시간의 이정표

미친 빌과 귀신늑대 -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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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굴을 나선 빌과 시론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단을 올라와서는 장벽 출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나루터가 훤히 보이는 출입구에 멈춰선 다음에야 시론이 겨우 입을 열었다.

 

 “전쟁이라니, 진짜일까?”
 “그렇겠지. 중부를 향한 북부의 대반격이다.”

 

 시선은 배에 고정되어 있었지만 대답은 즉각 나왔다. 그러자 시론의 얼굴에서 웃음이 떠올랐다.

 

 “떨리는데.”
 “이제껏 우리가 보지 못한 전쟁이 될 것은 분명하니까.”
 “참전할 거지?”
 “물론. 그건 신성한 의무며 갈망하던 권리다. 그 전에 목재부터 확보해야겠지만.”
 “음. 이번 토벌은 물러설 수가 없겠어.”
 “빌 대장!”

 

 그때였다. 양치기 반트가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돌아보니 그가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빌은 “왜 안 오나 했다”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또 뭔가 잊어먹었냐, 이 건망증 환자야?”

 

 시론이 먼저 장난스럽게 질문했다. 그러나 그 질문은 대답을 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빌과 시론은 반트가 왜 따로 말을 걸어오는지 어렴풋이 짐작했다. 빌이 시론의 뒤를 이어 말했다.

 

 “이상한 약을 또 사달란 이야기겠지. 아니면 물건 몇 개를 좀 구해달라든가.”

 

 양치기 반트는 브롬 장로에게서 어설프게 배운 지식으로 몰래 약을 만들곤 했는데, 빌의 병대는 빌이 싫어함에도 불구하고 그 싸고 의심스러운 약의 가장 중요한 고객이었다. 반트는 조금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다른 이야기도 있는데요. 여하튼 제가 약 만드는 것, 브롬 장로님 앞에서 꺼내진 마세요.”
 “네가 엉터리 약을 제조했다는 것을 아시면 아마 그 작은 냄비에 널 통째로 쑤셔 넣으실 테니까.”

 

 과장 없는 표현이다. 장로회의 수호자라면 그러고도 남는다. 물병 속에 달의 마력을 담는 자들 아닌가. 반트는 분노한 브롬 장로의 모습을 떠올린 다음, 몸을 잠깐 떨고는 대화를 이어갔다.

 

 “그렇겠죠. 그러니 함구해야죠? 빌 대장도 제 약 덕을 보고 있잖아요?”
 “얼어 죽을. 대체 어떻게 약을 조합하면 찰과상에 바른 약이 복통을 일으키는 게냐.”
 “찰과상은 확실히 낫잖아요. 복통도 심하진 않았고. 그 복통도 제 약의 효과인지 의심스럽다고요. 다른 것 때문에 생긴 복통일지도 모르잖아요?”
 “여하튼 난 네 약 안 산다.”
 “뭐 그러시던가요. 항상 하듯이 대장 부하들에게 팔면 그만이니까.”
 “망할 놈.”

 

 값싸게 온갖 약을 구할 수 있다면 기꺼이 돈을 지불할 녀석은 널렸다. 다소 엉터리라고는 해도 안면이 있는데다 북부 장로 밑에서 배우는 양치기 녀석이 만드는 약이라면 떠돌이 상인의 약보단 믿을만하다고 생각할 만도 하다.

 

 “그보다 대장. 본론으로 들어가서, 노예 몇 명 데리고 왔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래. 저 여자들이다.”

 

 빌이 손을 들어 가리킨 곳에선 3명의 여자가 정신없이 가벼운 짐을 나르는 중이었다. 반트는 그녀들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 팔렸어요?”
 “그래. 이번엔 운이 없었어.”

 

 빌은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상세한 설명은 빌 대신 시론이 해주었다.

 

 “원래 작년에 사서 제국에 데리고 갔는데, 거기 노예 시세가 개판이더라고. 알고 보니 그 사이에 남부 제국이 극동 왕국이랑 크게 한판 붙어서 전쟁포로가 넘쳐났던 거야. 결국 잡일 맡기면서 북쪽까지 왔는데, 기형아 놈들도 말썽이 좀 생겨서 분위기가 말이 아니었어. 결국 절반만 팔았지.”
 “흠. 그럼 이제 어떻게 하려고요?”
 “이 근방에서 처분할 거다. 아니면 내년 봄에 西파롤이나 東파롤의 수도에서 처분하던가.”
 “저한테 1명만 팔면 안돼요?”
 “뭐?”

 

 반문이 시론이 아닌 빌의 입에서 즉각 튀어나왔다. 의외의 사람에게서 나온 의외의 요청이었기 때문이었다.

 

 “슬슬 결혼하려고요.”

 

 반트의 대답에 빌과 시론은 둘 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빌이었다.

 

 “하필이면 노예냐? 그리고 넌 맘에 둔 여자 있을 텐데?”
 “대장 없는 동안 걔는 병으로 죽었어요. 죽은 자의 왕이 거둬갔죠.”
 “유감이군.”
 “유감이야.”

 

 빌과 시론이 한마디씩 위로의 말을 건넸다. 반트가 마음에 둔 여자는 전형적인 시골 처녀로 그에게 꽤 잘 어울렸는데, 지금쯤 그녀는 죽은 자의 왕이 지휘하는 군대에서 앙상한 몰골로 서 있을 것이다. 상상하기 좋은 광경은 아니다.

 

 “저한테 딸을 주려는 사람이 흔치 않은데 말입니다. 곤란하던 참이었어요.”

 

 남부 제국에서야 유목민이 농민보다 높은 계층이라지만, 중부와 북부에선 그렇지 않다. 중부에선 양치기를 천민취급하고, 북부에선 그나마 나은 편이지만 여러 가지로 좋지 않은 소릴 듣는 것은 마찬가지다. 농경민과 유목민의 대립은 흔한 이야기다.

 

 “결혼 선금을 구입비로 바꾸겠다는 건가.”
 “그렇죠.”

 

 신부의 지참금을 기대하긴 어려운 반트 입장에선 해방노예도 그리 나쁠 것은 없는 선택이다. 빌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축의금 대신 싸게 해주겠다. 아내가 생긴다면 너도 좀 성실해질 테니 그 빌어먹을 약도 좀 나아지겠지.”
 “감사합니다. 저기 붉은 보석함 들고 가는 애로 하죠.”
 “윽.”

 

 반트의 손가락을 따라 다시 배를 향해 시선을 돌린 순간 시론이 짧은 신음을 흘렸다. 빌은 쓴웃음을 짓더니 반트를 만류했다.

 

 “쟨 예쁘긴 하지만 성깔이 좀 있는데. 다른 애로 해라.”
 “예?”
 “처음 만나자마자 내게 욕을 퍼붓더군.”

 

 반트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저 가녀린 여자가 빌을 상대로 으르렁거릴 수 있단 말인가? 반트는 믿기질 않는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미친 빌인 걸 알면서도?”
 “그래. 해적 따위에게 원한이 있는 것이겠지.”
 “아아. 이해했습니다. 원한이란 원래 겁의 천적이죠.”
 “장로님의 말버릇만 배우는군. 쯧.”

 

 별로 이상할 것 없는 이야기다. 노예가 되었다는 것 자체가 해적에게 잡혔기 때문일 테니까. 반트는 잠시 생각하더니 뭔가를 떠올리곤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했다.

 

 “흠. 양치기 아내라면 그 정도 배짱은 환영이죠. 가끔 늑대를 쫓아가야 할 일도 있거든요.”
 “같이 양치기 일을 할 셈이냐?”
 “개척촌은 언제나 양치기가 부족하죠.”
 “아아, 그런가.”

 

 빌과 시론은 수긍했다. 빈 땅이 많으면 임노동자가 생기지 않는다. 지주의 협상력은 낮아지게 되고, 노동력이 부족하면 경지가 경작될 수 없다. 이때 지주는 어떤 방법을 선택할까? 그들은 빈 땅에 가축, 즉 양을 키울 수밖에 없다. 양을 키우려면 양치기가 필요하다.

 

 “빌 대장에게도 나쁜 이야긴 아닐 겁니다. 겁 없는 노예를 옆에 두다니, 그동안 맘 편히 자진 못했을 것 같은데요.”

 빌은 피식 웃어버렸다. 저 여자노예가 아니라 귀신늑대 탓이긴 하지만, 최근 1년 동안 맘 편히 자지 못한 것은 맞다.

 “너 좋을 때 데려가라.”
 “감사합니다. 오늘 저녁 목로주점 앞에서 뵙죠.”

 목로주점은 빌의 병대가 묵을 장소는 아니지만, 오늘 그 앞에서 마을사람들과의 술판이 벌어질 장소다. 결혼식을 겸하기에 나쁘진 않을 것이다.

 “깜짝쇼라도 할 것 아니면 사람들에게 미리 말을 해둬라.”
 “그래야죠.”

 

 반트는 씩 웃더니 도로 브롬 장로의 토굴로 뛰어갔다. 장로에게 제일 먼저 이야기할 모양이었다.

 

 빌과 시론은 다시 배와 짐들을 먼발치에서 한번 살펴보더니 목로주점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시론은 킬킬 웃으면서 빌에게 농담을 건넸다.

 

 “결혼이라. 졸지에 대장이 중매를 선 꼴이 됐군.”
 “미친 빌이 중매라. 죽은 자의 왕더러 주례 서달라고 할까?”
 “대장이 부탁하면 진짜로 오지 않을까 걱정되는데.”
 “축가는 귀신늑대가 부르고.”
 “그만해줘. 실현될까 무서워.”

 

 웃지 않는 얼굴로 농담에 대답하는 대장을 보고 시론은 익살스럽게 몸을 한번 흔들어보였다. 그제야 빌은 피식 웃었다.

 

 목로주점 앞은 벌써 병사들로 가득했다. 개중엔 짐을 하역해야 할 병사도 몇 명 보였다. 직무유기처럼 보이는 행동이다. 질책을 결심한 빌이 눈을 부릅뜨자마자 때마침 뒤를 돌아본 병사가 즉각 해명했다.

 

 “일은 다 해놨어!”

 

 진실성을 의심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절박하고 급한 외침이었다. 애초에 남은 짐이 얼마 없었으니 가능한 일일 것이다. 빌은 그제야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주점 안에서는 요란한 웃음소리와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 염병할 놈들, 벌써 술판을 시작했군.”
 “아, 대장.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 지금 굉장한 일이 벌어지고 있거든.”

 

 변명하던 병사가 말을 더 내뱉었다. 빌은 그를 보지 않고 앞으로 걸어가며 반문했다.

 

 “무슨 일?”
 “마누크가 젊은 여자랑 주량대결을 벌이는데, 그 여자 주량이 말술이야. 마누크랑 막상막하라고.”
 “뭐하는 여자냐, 대체.”

 

 빌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고는 주점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바글바글한 병사들과 마을 사람들을 헤치던 그는 커다란 나무 술잔에 담긴 맥주를 물마시듯 들이키는 큰 키의 남자를 발견했다. 짧게 깎은 머리와 오른쪽 이마의 손바닥만 한 큰 화상흉터가 인상적인, 부중대장의 좋은 체스 친구이자 대장장이 출신의 병사인 마누크였다.

 

 그의 상대역을 맡았다는 희한한 아가씨는 병사들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인상을 찌푸리며 더욱 더 앞으로 나아가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빌은 숨 쉬는 것을 잊었다. 설령 죽은 자의 왕이 그 자리에 있다 해도 그보다 놀라진 않았을 것이다.

 

 “오랜만이네?”

 

 검은색 긴 생머리에 짙은 파란 눈을 가진 소녀가 결코 마누크에게 지지 않는 크기의 술잔을 양손으로 든 채 밝게 웃었다. 완전히 따돌렸다고, 이젠 볼 일이 없다고 생각했던 여자였다. 그녀는 1년 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전에 봤던 검은 드레스 차림과 달리 이번엔 회갈색의 평상복을 입고 있을 뿐이다.

 

 “뺏는 재주만 가진 줄 알았어.”

 그녀의 귀는 여전히 밝았다. 터무니없을 정도로.

 “축가, 정말 내가 불러도 돼?”

 

 병사들은 소녀의 아는 척에 딱딱하게 굳은 대장을 보고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다. 소리 높여 떠들기 바빴던 그들은 곧 조용해졌고, 빌의 뒤를 따라온 시론은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총원, 전투준비!”

 

 대장장이 마누크가 잔뜩 붉어진 얼굴을 한 채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엉거주춤 물러서는 것과 동시에, 병사들이 일제히 도끼나 검을 빼들었다. 어떤 병사는 황급히 자신의 총을 점검하다 비어있음을 확인하곤 다시 도끼를 들어야 했다. 그들 모두는 다소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빌과 소녀를 곁눈질했다. 소녀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좁히곤 고개를 가로저었다.

 

 “버릇없는 부하들이네. 여자한테는 친절해야 한다고.”

 

 빌은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사람 놀라게 하지 않는다면 충분히 주의해주겠다. 셀레스테.”

 

 말이 끝나기도 전에 빌은 왼손을 들어올렸다. 무기를 내려놓으라는 신호였다. 그것은 주저함이 약간 묻은 행동이었지만, 어쨌든 명령이었다. 섬뜩하게 날이 선 도구들은 대장의 심정을 반영하는 것처럼 잠깐 주저하더니 천천히 지면으로 향했다. 셀레스테는 그 광경을 보더니 빌에게 질문했다.

 

 “나에 대해 이야기했어?”
 “아니. 전혀.”
 “흠. 그런데 어떻게 소녀를 향해 무기를 겨눌 수 있는 거지?”
 “내 부하들에겐 네가 악마와 놀아난 마녀든 창부가 된 순례자든 상관없어. 내가 명령하면 죽인다.”
 “대단하네.”

 

 셀레스테는 다시 웃어보였다. 하지만 빌은 웃지 않았다. 이건 기 싸움이다. 대담해져야 한다. 승기를 잡기엔 조금 늦지 않았을까 걱정하면서 그는 그녀와 마주 앉지 않고 탁자 옆에 앉았다.

 

 “주량대결 중이었지? 계속하게. 마누크, 자리에 앉아.”
 “이 미친 대장아! 전후사정은 설명해줘야 술을 마시든 똥을 싸든 할 것 아냐?”

 

 술잔과 전투망치 사이에서 갈등하던 마누크가 반사적으로 내뱉은 폭언에 셀레스테는 묘한 눈빛으로 빌을 바라보았다. 의심과 매혹의 눈초리. 빌은 무슨 질문이 나올지 직감했다.

 

 “절대복종?”

 

 셀레스테가 장난스럽게 질문하자, 빌은 한숨을 내쉬곤 자백했다.

 

 “저 친구 빼고.”

 

 이 답변에 셀레스테는 소리 높여 깔깔 웃어댔고, 그렇잖아도 붉은 얼굴을 분노로 더욱 붉힌 마누크는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빌이 상황설명을 해주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툭하면 티격태격하지만 빌과 마누크는 서로를 가장 잘 아는 동료였다. 빌이 안전하다고 한 것은 안전하다고 믿어야 한다. 빌이 숨기는 것은 캐지 않는다.

 빌이 심판을 보는 것 같은 자리배치 속에서 마누크는 술잔을 마저 비우곤 셀레스테의 술잔을 씹어 먹을 것처럼 노려보았다. 셀레스테는 그런 마누크를 보고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다소곳한 미소를 짓더니 남은 술을 단번에 다 마셔버렸다. 그 모습을 보던 빌은 새 술과 안주를 주문할 필요를 느꼈다.

 

 “술은 다 마셨고, 안주는 없군. 주인장. 이 아가씨에게 맥주 3잔과 만두 5인분.”
 “만두? 그게 뭔데?”

 

 셀레스테가 눈을 동그랗게 뜨곤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질문했다. 그 모습은 궁금한 것을 묻는 인간소녀의 것과 전혀 다를 것이 없었다. 빌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맛있는 것.”

 

 잠시 뒤 병사들과 마누크는 셀레스테가 빌이 주문한 모든 것을 순식간에 잡아먹어버리는 것을 보고 질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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