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이정표

미친 빌과 귀신늑대 -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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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녁 안개비가 북부의 흙을 때린다. 대장간엔 불이 켜졌다. 거푸집이 깨지자 나온 청동 주물. 마누크는 자신이 원하는 물건이 만들어졌음을 확신했다.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청동 주물은 땜질 따위를 해야 하지만, 이번엔 그럴 필요가 없다. 커다란 술잔 같이 생긴 청동 덩어리에 호두알도 들어갈 것 같은 깊은 구멍. 주물의 뒤에는 나무 자루를 끼울 구멍도 같이 뚫려 있다. 성공이다.

 

 “총보단 대포라는 말이 어울리는군요.”

 

 옆에서 구경하던 틸리가 말했다. 마누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부터 그런 걸 만들 생각이었어.”

 

 대형 수총. 무겁고 불편하지만 총보다는 강하다. 마누크는 자신의 작품을 감상했다. 급조한 재료들과 동네 대장간에서 만든 것 치고는 괜찮다.

 

 “전쟁의 분위기가 느껴지냐?”

 

 마누크가 질문했다. 틸리는 고개를 끄덕이곤 대장간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락토 개척촌은 전장이 되었다. 총성이 울리는 건 아니었지만, 전운에 가득 뒤덮였다. 갖가지 장대무기로 무장한 창병중대가 도착한 탓이었다. 그들은 락토 개척촌 안팎에 천막을 세우고 휴식을 취했는데, 워낙 살기가 등등해 억센 개척민들도 그들을 어려워했다.

 

 병졸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전장의 분위기를 풍긴다.

 

 “누추하고, 지루하고, 한편으로는 두렵고. 완벽한 전장입니다. 북부나 남부나 다를 건 없군요.”
 “출셋길이 다 그렇지.”

 

 마누크의 말에 틸리는 웃었다.

 

 

 

*
 틸리는 대장간을 나섰다. 북부의 안개비는 싸늘했다. 부드럽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남쪽의 안개비와는 그 온도가 너무 달랐다. 틸리는 미리 준비해둔 방수천을 황급히 뒤집어썼다. 빗방울 사이로 키체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어떤 명사수도 놀라 자빠질 사격비술을 알려주지. 화약을 탄환 무게의 2할 넣어.”


 키체커 씨, 너무 간단하지 않습니까. 작아도 전쟁인데. 틸리는 고개를 저었다. 전쟁은 좀 더 복잡해야 한다. 구려야 한다.

 

 전언취소.

 

 고약한 냄새가 풍겼다. 전쟁비약 냄새다. 치즈와 계란과 바닷물을 섞어 썩히면 이런 냄새가 날까. 아직 익숙하지 않은 그 냄새에 키체커는 얼굴을 찌푸렸다. 게드 장로가 약통을 브롬 장로의 토굴에서 마을 한복판으로 옮겨놓은 것이었다. 대강 만들어진 천막들 아래의 커다란 통. 그곳이 악취의 근원이었다. 장로는 그 통에다 비약과 빗물을 넣고 장대로 휘저었다. 틸리는 코를 막곤 그 곁으로 다가갔다.

 

 “뭐하시는 겁니까?”
 “희석.”

 

 게드 장로가 냉큼 대답했다. 틸리는 아깝다는 표정을 짓고는 질문했다.

 

 “왜요? 그냥 쓰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
 “못할 건 없지만 부담이 심한 편이지. 내일은커녕 당일에도 못 일어나. 무엇보다도, 비약의 양은 너무 적어. 희석하지 않으면 250명이나 되는 녀석들에게 나눠줄 수가 없다고.”
 “효력이 떨어질 텐데요.”
 “비상사태가 아니면 강한 효력이 필요하지도 않아.”
 “비상사태?”


 빌이 대답해줬다.


 “총알 같이 도망쳐야 할 때.”

 

 틸리는 등 뒤를 돌아보았다. 대장과 부대장이 그곳에 서 있었다. 둘 다 이 정도 안개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평소와 똑같은 복장을 했다. 빌은 수염과 개가죽 위의 빗방울을 터는 시늉만 하더니, 곧 말을 이었다.

 

 “아니면 추격과 기습.”

 

 틸리의 시선은 빌의 허리춤에 매달린 통들에게로 돌아갔다. 원액일까? 빌은 그 눈길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필요한 명령을 내렸다.

 

 “매복조는 내가 지휘한다. 본대보다 먼저, 곧바로 출발할 테니 석궁병들은 시위를 잘 관리하도록.”
 “결국 그 작전으로 가는 겁니까?”

 

 빌은 고개를 끄덕였다.

 

 “익인들이 눈치를 챘으니까. 화염병 정도는 적잖이 준비해놨을 거다.”

 

 밀집대형에 하늘로부터 쏟아지는 화염병 세례는 치명적이다. 빌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작전을 포기하고, 홀더 대위의 작전을 받아들였다. 포가를 개조한 경포병 3명, 빌과 마누크, 총병 30명. 석궁병 10명.

 

 “화염병뿐이랴? 익인을 얕보지 마. 본격적으로 전쟁을 준비하면 걔들도 꺼낼 수 있는 무기가 꽤 될 거다. 석회가루를 뿌려대기만 해도 다들 장님이 되겠지. 물을 뿌려대면 화승이 젖을 테고.”

 

 게드 장로가 강의를 읊었다. 장로 특유의 긴 말이다. 남들 끼어들 틈을 주지 않는다. 장로가 하는 말은 대개 옳다고 생각하는 북부인의 사고방식 덕에 반론이나 끼어들기 자체가 드물지만. 빌 역시 고개만 끄덕였다. 하지만 아직 북부식보단 남부식이 익숙한 틸리는 노인의 말을 잠자코 듣는 드문 젊은이가 되어줄 수 없었다. 특히 그 말이 고리타분하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예상이라면.

 

 “본격적인 모험의 시작 치고는 좀 꼬이는군요.”

 

 장로는 얼굴을 찌푸렸지만 빌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틸리와 처음 만났을 때의 대화를 기억했다.

 

 “그러니 두근두근한 모험 아닌가. 도시공략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틸리도 웃었다. 그는 자신의 확신을 다시 대장에게 들려줬다.

 

 “전형적인 젊은이로서 말하건대, 미친 빌은 절 실망시키지 않을 겁니다. 이깟 일쯤이야 고난이라 생각지도 않겠습니다. 미리 준비해두지요.”

 

 대화가 끝났다. 틸리는 즉각 천막을 벗어나 패거리들에게로 달려가 버렸다. 장로가 뭐라고 탓할 타이밍은 완전히 빗나갔다. 게드는 몇 마디 투덜거리고는 남은 약을 가져오기 위해 토굴로 돌아갔다. 그제야 시론이 입을 열었다.

 

 “틸리는 다 좋은데 조금 건방진 면이 있어.”


 “자넨 좀 순박한 면이 있지. 마누크는 필요할 때 그 필요 이상으로 냉혹해지고. 개성이야. 그리고 젊은이의 특권이지.”

 

 빌은 웃는 얼굴을 유지하며 말했다. 시론은 그 웃음에 그리움이 어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를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이유야 어쨌든 지금 대장은 다소 감상적인 상태다.


 시론은 그 분위기를 정면으로 깨부수긴 싫었다. 그러나 할 말은 해야 했다.

 

 “셀레스테는?”

 

 분위기가 식었다. 빌의 얼굴은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셀레스테는 달아났다. 키체커와 그의 똘똘한 제자가 익인의 대표에게 총을 쏘는 순간, 그녀는 마을에서 사라졌다. 시론은 그녀가 총성을 듣고 놀라 달아났다고 생각했다. 빌도 이견은 없었다. 그녀의 실종은 총을 쏘기로 결정한 순간 예상한 결과들 중 하나일 뿐이다. 문제는 그녀가 앞으로 취할 행동이다.

 

 “어떻게 움직일까?”

 

 시론이 다시 말했다.

 

 “글쎄.”

 

 빌은 대답을 망설였다. 최악의 경우는 익인과 셀레스테가 힘을 합칠 때다. 빌은 그것이 가능한지 확신할 수 없었다. 최선의 경우는? 익인들이 우왕좌왕하고 셀레스테는 끼어들지 않는 상황이다. 최악의 경우보다 가능성은 더 낮다.

 시론이 먼저 가정을 시작했다.

 

 “미리 예상 좀 해보자고. 대비를 해야 할 것 아냐.”
 “그래.”
 “좋아, 엘은 살아서 도망쳤겠지?”

 

 익인 대표, 엘은 키체커의 총탄에 맞고도 살았다. 그녀는 튼튼한 날개를 이용해 동족들에게로 날아갔다. 만약 그녀가 아직 살아 있다면, 셀레스테와 접촉할 수 있다면 둘은 당장 손을 잡을 것이다. 엘은 판을 깨버린 인간들에게 분노하고, 셀레스테는 빌을 죽이려 하니까.

 

 “그렇다면 셀레스테와 엘은 둘 다 사람을 피해 숲에 있을 가능성이 커. 그들이 서로의 존재를 모를 것 같진 않아. 익인과 귀신늑대잖아.”
 “가능성이 높을 뿐이야.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장담 못해. 익인도 꽤 똑똑하지. 마을에서 기어 나온 귀신늑대를 믿어줄지 의문이다.”

 

 그것도 그렇군. 시론은 머리를 싸맸다. 만약 빌의 말대로 된다면? 익인과 귀신늑대가 싸우는 것도 가능할까? 난데없이 삼파전?

 

 “일단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자. 그게 현명하겠지.”

 

 빌이 시론을 구원했다. 시론은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셀레스테가 익인과 연합하고 우릴 칠 때 말이군. 정면에서 덤비진 않겠지?”
 “그녀가 미친다면 2개 중대의 정면으로 덤비겠지.”
 “어디서 어떻게 덤빌까? 행군 중?”
 “그때는 아니야. 우리가 언제 출발할지도 모르니까. 익인이 우리의 전쟁의도를 알았으니, 두 가지 배치를 생각하겠지. 하나는 자신들의 아래, 다른 하나는 본대의 뒤.”
 “아래의 경우엔 어떻게 되지?”
 “매복이 들킨다. 셀레스테가 우릴 보겠지. 홀더 대위의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다. 익인들이 공격을 할 때쯤 셀레스테는 매복조를 치겠지. 괴물늑대를 잡는데 80명이 덤벼야 했다. 30명의 총병이라면 상대적으로 쉽겠지.”
 “셀레스테가 본대 뒤에 놓이면?”
 “본대가 위험하다. 밀집대형이나 포위대형이 아니면 셀레스테를 감당할 수 없어. 그런데 본대가 이번에 취할 대형은 산개대형이고, 정면만 바라보지. 셀레스테에겐 이런 호기가 또 없을 거다.”

 

 어느 쪽이든 최악이네. 시론은 아랫입술을 핥았다. 비가 오는데 입술이 마르다니.

 

 “어떻게 해결하지?”
 “이미 손을 썼다.”
 “뭐?”

 

 시론이 놀라 반문했다. 빌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내가 매복조를 지휘하면 셀레스테는 본대를 공격하지 않을 거다. 나만 죽이면 되니까. 내가 매복조에 있는 것을 일찌감치 알아차리든, 나중에 본대를 보고 알아차리든 그녀는 매복조로 올 거다.”

 

 시론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질문했다.

 

 “확신할 수 있어?”
 “확신할 순 없지. 그러니까 네가 본대에서 남은 총병들을 지휘하는 거다. 키체커를 붙여 줄 테니 뒤를 조심해라.”
 “어, 그런 거군. 매복조에도 계책이 있어?”
 “계책이랄 건 없다.”
 “그럼?”
 “게드 장로와 마누크는 나 못지않게 거칠다. 경포도 매복조에 배치했지. 총병은 전부 고참병이다.”
 “이해했어. 화력으로 승부하겠단 거군. 경포 1문이면 산탄을 장전해서 쏴도 귀신늑대에겐 엄청난 위협일 테니. 속사도 가능하고. 하지만 그래도 부족하면?”
 “매복조를 최대한 빨리 본대로 합류시키겠다.”

 

 그 과정에 다소 피해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시론은 납득했다. 부하들을 질서정연하게 후퇴시키는 것은 빌에게 어울리는 역할이다. 역시 대장은 똑똑해. 시론은 이미 가능한 모든 조치가 취해졌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대장이 다 알아서 했군. 내가 괜한 이야길 한 것 같아.”
 “아니다.”
 “아냐?”
 “그녀는 현명하진 못할지언정 멍청하진 않다.”

 

 시론은 입을 열지 못했다. 셀레스테는 상상 외의 길을 밟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귀신늑대다. 영악하다. 진심으로 빌을 죽이려고 덤빈다면, 어떻게든 길을 찾아낼 것이다. 그때도 이 결정이 현명하다 말할 수 있을까? 겨우 입을 연 시론은 넋두리만 꺼냈다.

 

 “점쟁이라도 불러야 하나.”

 

 장로라면 점술에도 어느 정도 일가견이 있겠지만, 현명한 방법은 아니다. 빌은 다시 웃었다.

 

 “출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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