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이정표

미친 빌과 귀신늑대 -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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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젖은 공기 속에서 긴 검은머리가 찰랑거린다. 소녀는 창병중대까지 떠나고 빈 터만 남은 전장을 가로질렀다. 쓰레기를 치우던 양치기 반트가 먼저 아는 체를 했다.

 

 “셀레스테 양? 어딜 갔다 왔나요?”

 

 셀레스테는 다소곳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갑자기 분위기가 흉흉해지기에 이웃 마을로 잠깐 피해 있었죠.”
 “군대는 다 그렇죠.”

 

 반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군인이나 용병은 행패를 부리기 일쑤다.

 

 “빌의 병대도?”

 

 셀레스테의 질문에 반트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대장이 여기서 첫 겨울을 난 것이 11년 전이에요. 최고참인 시론 부대장이 합류하기도 전부터죠. 그런 곳에서 부하들이 어떻게 난동을 부려요?”
 “미친 빌도 아는 사람들 앞에선 얌전하단 건가요?”

 

 반트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는 불분명한 대답을 줬다.

 

 “매사에 무관심하단 말이죠.”
 “이해가 어렵군요.”

 

 명쾌하지 못한 말을 셀레스테는 뚱한 표정으로 평가했다. 빌의 어디가 무관심이란 말에 어울릴까? 아는 사람들에게 무관심하단 뜻인가? 말이 되나?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질문들을 짐작한 반트는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좀 어려운 이야기일지도 모르겠군요. 간단히 설명하자면, 눈이 먼 거예요.”
 “더 알아듣기 힘들어졌어요.”
 “목표만 본단 말이죠. 대장은 자신의 관심사 외엔 아무래도 좋은 거예요. 매 순간 최대한 노력을 해서 위기를 넘기고 부하들을 이끌지만, 만약 일기나 서한집, 자서전을 쓰라고 하면 그런 이야긴 한마디도 적지 않을 겁니다. 대신 자신의 목표에 관한 이야기만 적겠죠. 오늘은 어디까지 왔는데 아직 숙원을 이룰 날은 요원하기만 하다. 뭐 이렇게 말입니다.”

 

 셀레스테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그의 숙원이 뭐죠?”
 “몰라요.”
 “네?”
 “반가운 소식을 찾아다닌다는 이야기만 들었어요. 아마 락토에서는 브롬 장로님과 죽은 자의 왕만 아실 겁니다. 그분들은 모르는 것이 없으니까요.”

 

 셀레스테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죽은 자의 왕이라니, 절대 피해야 할 상대다. 빌에게 직접 묻는 건 불가능하다. 결론은 하나. 셀레스테가 마을로 돌아온 목적이 하나 더 늘어났다. 그녀는 그제야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브롬 장로님께 여쭤봐야겠군요. 혹 잠깐 뵐 수 있을까요?”
 “장로님을?”

 

 반트는 자기도 모르게 셀레스테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슬쩍 훑어보았다. 수호자가 평범한 차림새의 평범한 여자를 만나줄 리는 없다. 하지만 이 여자는 빌과 아는 사이다. 게다가 빌의 이야길 캐묻고 있다. 평범하진 않을걸. 반트는 짧은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안내해드리죠.”

 

 반트가 몸을 돌리는 순간, 셀레스테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질문했다.

 

 “빌은 당신에게도 무관심할까요?”

 

 대답은 즉각 돌아왔다.

 

 “그렇겠죠.”

 

 

 

*
 춥다. 비가 그치고 해가 떴건만 매복조는 추위에 떨어야했다. 안개비를 쫄딱 맞으면서 밤을 샜으니 당연하다. 어두컴컴한 숲을 등지고 차가운 진흙 위에 선 그들은 일각이 짧다는 듯 한숨만 내쉬었다. 양손도끼에 기대어 졸던 병사는 자세를 잃고 무너지는 위기를 몇 번이나 겪었다.

 

 마찬가지로 졸고 있던 빌은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렸다. 그는 무거운 몸을 끌고 허리를 폈다.

 

 “때가 됐다.”

 

 빌의 목소리가 모두를 흔들었다. 그들은 계명성 들은 사람처럼 고개를 들었다. 시야에 본대의 행진이 들어왔다. 빌은 다시 말했다.

 

 “총병은 불을 준비하라.”

 

 여기저기서 성냥 긋는 소리가 들려왔다. 방수천으로 보호한 화승 끝에 불꽃이 머물다 사라졌다. 한 성냥에 대여섯 화승. 총병들은 여름철 모기 쫓듯 손을 흔들어 연기를 흩었다. 연기는 나무 꼭대기를 벗어나기도 전에 잎과 바람에 흩어질 테지만, 혹여 매복을 들키면 안 되니까.

 

 “완벽하군요.”

 

 틸리가 웃으며 말했다. 빌은 그의 말을 부정했다.

 

 “아직은 아니야.”

 

 분위기가 무겁다. 게드 장로가 전투를 앞두고 분위기를 약간 바꿀 필요를 느꼈다. 빌에겐 무리지.

 

 “뭐, 여기까지 별 일이 없으면 다 잘 될 거야. 자, 다들 편지는 쓰고 왔냐? 잊은 놈은 가락지나 말 한마디라도 내게 넘겨라. 죽은 장로는 본 적 없지?”

 

 짓궂은 웃음소리가 매복조에서 낮게 새어나왔다. 신화시대부터 이어져 온 고전적인 우스갯소리다. 장로는 오래 산다. 아무도 죽은 장로를 본 적 없다. 그러니까 나도 안 죽어.


 몇몇 병사가 대답했다.

 

 “바스코다. 발카 개척촌의 재봉사네 둘째 아가씨. 아직 결혼 안 했다면, 미안.”
 “세브랄. 東파롤의 수도에 계신 모친께. 전 재산.”
 “케텔. 내 비석에. 잘 놀다 감.”
 “타향까지 나온 놈이 비석을 바라냐? 호화판 인생이구나.”

 

 게드는 비문 이야기를 꺼낸 병사에게 농을 건넨 다음 킬킬 웃고는 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선에 빌은 당황했다.

 

 “알고 있을 텐데.”
 “그거 말고. 내 멋대로 덤 좀 쥐어줬노라.”
 “뭐냐?”
 “네가 반트에게 중매해준 여자.”

 

 그걸 중매라고 부를 수 있다면. 빌은 게드 장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게드 장로는 친절히 설명해줬다.

 

 “주석거울 큰 것 1개, 작은 것 1개, 주머니 하나. 내 비용으로 네 이름 달아 결혼 예물 삼아 줬다. 몰랐지?”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장난꾸러기의 미소. 빌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내 이름으로?”
 “그래.”
 “이것 참.”

 

 빌은 고개를 저었다. 미친 빌이 신부의 후견인? 병사들 사이에서 계속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들은 생각했다. 아, 폭소 좀 했으면.

 

 “쓸데없는 짓을 했군. 유쾌하지만 말이야.”

 

 빌이 그런 말을 할 때는, 가감 없이 정말로 쓸데없는 짓. 게드 장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이런 짓이라도 안 하면 네놈이 여자에게 좋게 기억될 사례가 얼마나 되겠느뇨.”

 

 사람 살려. 병사들은 익인들이 모두 귀머거리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봐요, 장로님. 어떤 농담이 나와도 웃어줄 수 있는 분위기에 대장 갖고 농담하면 어쩌잔 겁니까. 침 뿜어가며 웃음을 참던 틸리가 슬쩍 끼어들었다.

 

 “하나 있긴 있습니다.”
 “누구?”
 “셀레스테.”

 

 빌의 얼굴이 굳었다. 틸리는 그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그는 누구누구는 서로 좋아한데요 놀이를 하는 어린아이처럼 질문을 꺼냈다. 이 나이에 이 놀이를 재밌어한다는 현실에 자괴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남자란 다 유치한 법이다.

 

 “그 여자 누굽니까? 설마 숨겨둔 애첩입니까?”
 “내 금욕 맹세를 모르나?”
 “압니다. 술, 여자, 아편.”
 “그럼 더 물을 필요 없을 텐데.”

 

 애첩은 아니고 딸이라기엔 너무 안 닮았고. 결론을 내리지 못한 틸리는 조금 우회적인 질문을 꺼냈다.

 

 “그 맹세는 왜 한 겁니까? 재미없게.”
 “사람 눈을 멀게 하니까.”
 “좋은 대답입니다. 근데 성인처럼 눈을 떠서 뭘 합니까?”
 “찾아야 하니까.”
 “무엇을?”

 

 빌은 틸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틸리는 빌의 눈이 언제나 보던 것과 똑같다는 사실에 약간 놀랐다. 사람을 고깃덩이 보듯 하는 그 눈이다. 빌은 말했다.

 

 “내가 그 여자의 약혼자를 죽였지.”

 

 누가 딸꾹질을 시작했다. 틸리는 눈을 화등잔처럼 크게 떴다. 마녀라고 했으면 안 놀랐을 것이다. 요정이라고 했으면 농담이라도 꺼냈을 것이다. 하지만 빌의 입에서 나온 것은 피비린내뿐이다. 빌이 다시 말했다.

 

 “틸리.”

 

 틸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빌은 명령했다.

 

 “숲으로 들어가라.”

 

 

 

*
 “불쌍한 빌.”

 

 브롬 장로의 넋두리였다. 장로회의 수호자는 자신의 토굴 안임에도 불구하고 다소 불안한 기색이었다. 그는 짧은 나무막대기에 주먹 크기의 철구가 가죽 끈으로 묶인 철퇴를 오른손에 들었는데, 불안감을 달래기 위해서인지 아무런 장식도 없는 철구를 자꾸 왼손으로 만지작거렸다

 

 그의 앞에는 셀레스테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장로와 달리 마치 자기 집에 온 것처럼 편안해보였다. 커다란 굴에 들어온 늑대라면 비유가 맞을까. 그녀는 브롬 장로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왜 빌을 죽이려 하는지도 말했다. 그리고 경고했다. 끼어들지 마. 이에 장로는 그녀를 노려보았다. 여자의 모습이라고는 하지만 귀신늑대다. 지금 그는 귀신늑대와 단 둘이 있는 것이다. 브롬 장로는 긴장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어리석지 않다는 사실을 슬퍼한다. 그리고 내가 너보다 영리하다는데 감사를 느낀다. 난 네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셀레스테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브롬 장로는 당장 답을 던져주진 않았다. 네가 정체를 까발리면 내가 빌에게 월동지역을 제공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지? 오산이었어. 다만 빌은 죽어나겠군. 귀신늑대의 함정에 빠진데다, 살아남아도 내가 잔소리를 할 테니.

 

 “네가 여기 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겠다. 익인들도 정말 머리를 많이 굴렸군.”
 “내 생각이야.”

 

 귀신늑대는 마을의 방어를 책임진 브롬 장로를 견제한다. 수호자를 마을 방어란 역할에만 묶겠단 뜻이다. 익인들은 토벌대를 상대한다. 꽤 괜찮다. 브롬 장로는 웃으며 말했다.

 

 “남부 제국에 재밌는 새가 있지. 그 녀석은 늪지괴물의 이빨에 낀 고기조각을 쫀다더군. 괴물은 그 새를 먹지 않고. 상조란 그런 거야. 너 혼자만이 떠올려선 소용없지.”
 “장로들의 선문답이라면 그만둬. 머리 아파.”
 “해봤나?”

 

 대답하면 대화가 딴 곳으로 샌다. 그러나 셀레스테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 외에 마땅한 방법을 떠올리지 못했다.

 

 “어른들이 가르쳐줬어. 까마득한 옛날엔, 선조들이 장로들과 그 놀이를 하기도 했다지.”
 “어느 시대인지 짐작도 안 가는데.”
 “붉은 대장로의 시대였대.”
 “신화시대에서도 초기의 이야기군. 지금은 검은색이니까.”
 “검은색? 공석이라고 들었는데. 이 시대에 대장로가 있어?”
 “입조심해라. 그가 온다.”

 

 셀레스테의 머릿속에서 번개 같이 한 칭호가 스쳐지나갔다. 그녀는 약간 질린 표정을 짓더니, 입을 꽉 다물곤 좌우로 눈을 굴렸다. 일부러 취한 모습이다. 브롬 장로는 웃어버렸다.

 

 “추대는 했지만, 아직 발표는 안 했지. 때가 아니니까. 누군지 짐작 가나?”
 “응.”

 

 경고가 곧 실마리다. 셀레스테는 광견병 걸린 개를 보는 눈빛으로 브롬 장로를 바라봤다.

 

 “댁들은 미쳤어.”
 “장로회의 합당한 결정이었어. 그는 모든 비밀의 수호자니까. 그리고 붉은색이나 검은색이나 차이는 없을 거야. 흙바닥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으니. 그리고 네가 걱정할 일은 더욱 아니다. 신화시대에도 사람은 늑대를 두려워했어. 기회가 되면 사냥하려고 했지.”

 

 셀레스테는 간신히 대화를 하고 싶은 이야기로 돌릴 줄기를 찾았다. 그녀는 새침한 표정으로 말했다.

 

 “적어도 그 시대에 빌 같은 놈은 없었을 거야.”

 

 브롬 장로의 한쪽 입아귀가 올라갔다.

 

 “빌이 어쨌는데?”
 “혼자서 괴물늑대를 잡았지.”
 “수호자도 할 수 있어. 태양궁에는 그런 재주 가진 놈이 더 많을 거다.”
 “그는 수호자가 아니야. 중부 마법사도 아니고. 그가 가진 것은 도끼와 약간의 비약뿐이었어.”
 “결정타는 총이었다고 들었다.”
 “그런가? 빌이 쐈겠지. 어쨌든 그 셋은 누구나 쓸 수 있어.”
 “중요한 문제냐?”
 “어른들이 화를 낼 만큼.”

 

 상상하기 싫다. 브롬 장로는 철구를 세게 쥐었다. 애석하게도 가끔 상상은 의지에 반한다.

 

 시대가 달라졌다.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 홀로 괴물늑대를 죽였다. 이에 경악한 귀신늑대들이 복수권자를 보냈다. 이해할만한 이야기다. 기사들은 총을 싫어한다. 신화시대의 잔재들도 그러지 말란 법은 없다.

 

 문득 브롬 장로는 의문을 떠올렸다.

 

 “넌 싸우기 싫었나?”

 

 셀레스테는 조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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