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이정표

미친 빌과 귀신늑대 -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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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은 날개에 새겨진 상처를 추스르며 숲 가장자리의 가장 높은 나무 위로 올라섰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젊은 익인 여자가 걱정스레 질문했다.

 

 “괜찮으십니까?”

 

 엘은 아랫입술을 깨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제자의 총탄은 빗나갔지만 스승의 총탄은 역시 정확했다. 날개가 튼튼하지 않았다면 땅으로 추락했을 것이다. 엘의 인내심이 키체커의 상상 이상이지 못했다면 죽은 자의 왕이 그녀를 끌고 갔으리라.

 

 삶과 죽음이 이토록 가까운 것이었나. 엘은 한숨을 내쉬고 여자에게 지시했다.

 

 “올라가세요.”

 

 여자는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지시에 따랐다. 시야가 단번에 넓어졌다. 엘은 늑대 떼에게 포위당한 257명의 인간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갖가지 장대무기로 늑대들과 싸웠다.

 

 장창의 아래로 달려들던 늑대들은 마찬가지로 창대 아래에서 대기하던 총병들과 일부 창병들과 싸워야했다. 도끼, 검, 몽둥이, 단검 등을 꺼낸 병사들은 늑대들을 제압할 수 있었다. 측면으로 돌아간 늑대들은 미늘창과 도끼창의 열렬한 환영 인사를 받았다. 찌르고, 베고, 걸고, 때리고. 잠시만이라도 장전할 시간이 주어지면 총탄과 화살이 날아갔다.

 물론 늑대들이 당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최초의 격돌에서 몇몇 창병들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져야 했다. 평범한 늑대는 사람을 피하지만 필사적으로 덤빌 땐 이야기가 약간 달라진다. 많은 창병들이 팔에 박히는 이빨을 보며 비명을 질렀다. 정면에서 목을 물린 병사는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그러나 인간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 괴물늑대들이라 해도 잔뜩 모인 쇳덩이들 앞으론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 한 녀석이 덩치와 가죽을 믿고 장창병의 숫자가 적거나 대열이 흐트러지는 곳을 골라 돌격했지만, 도리어 피투성이가 되어 물러나야 했다.

 

 견고하다. 강하다.

 

 엘은 셀레스테를 떠올렸다. 그녀는 이 근방에 사는 늑대들을 몽땅 모아서는 익인들에게 통보했다. 빌 대장을 죽일 것이라고. 키체커의 총탄에 다친 엘은 경황이 없었던 탓에 침묵했었다. 이제야 엘은 셀레스테의 의도를 어느 정도 이해했다.

 

 협력을 구하는 것 치고는 조야하고 불쾌하다.

 

 엘은 빌 대장을 떠올렸다. 미친 빌. 대학살 이후 가장 성공한 약탈자, 한 도시에 도전한 정신병자, 물이끼와 진흙의 냄새가 짙게 나던 인간, 락토의 익인들이 먼발치에서나마 처음 봤던 왕국군 장교. 락토 개척민들은 익인들의 이웃이었다. 개척촌에서 월동하는 빌의 패거리도 익인들에겐 나름 익은 얼굴들이다. 아성의 회의실에서 처음 봤을 때에도 빌은 엘에게 그리 적대적이지 않았다. 평범한 노인을 갑옷에 파묻어 놓고 도끼를 쥐어준 꼴이랄까. 사실은 세상이 놀랄 만큼 포악한 성격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행동은 철천지원수를 대하듯 포악했다. 엘은 예고 없이 돌변하여 달려드는 빌의 눈빛을 잊지 못했다.

 

 죽고 싶지 않아.

 

 엘은 자신의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도 그녀의 동족들 중 일부가 도착하지 않았다. 새 무기의 준비가 늦는 모양이다. 무거울 테니까. 어쨌든 이대로 두면 늑대들이 당한다. 잠시 동안의 고민 끝에 오른손을 높이 들어올렸다. 숲의 하늘을 맴돌던 익인들은 궤도를 바꿔 스치듯 나무 위를 날았다. 곧 그들의 손에 미리 준비된 무기들이 들렸다. 엘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건 너무 무섭잖아.”

 

 긴 손가락이 피 묻은 깃털 위를 가볍게 쓸었다.

 

 

 

*
 마누크는 소리쳤다.

 

 “빌만 무서운 줄 알았냐!”

 

 초대형 수총이 몽둥이처럼 휘둘러졌다. 날쌘 늑대들은 재빨리 옆으로 뛰어 그 공격을 피했다. 함부로 대오 밖으로 나올 수 없는 마누크는 그들을 쫓아가지 않았다. 밀집대형 안에서는 전투망치나 수총을 휘두르는 것도 위아래로만 가능할 뿐이다. 마누크는 콧김을 거세게 내뿜고는 수총을 거꾸로 세워 재장전을 시작했다. 닦아내고, 화약 넣고, 총탄 넣고, 꽂을대로 쑤시고. 준비가 끝나자 그는 곧바로 적을 조준했다.

 

 “죽어라!”

 

 총성이 귀를 때렸다. 화약연기가 거세게 뿜어져 시야를 가렸다. 맞았나? 자문에 마누크는 부정적인 대답만 떠올렸다. 너무 작고 날쌔.

 

 틸리는 팔의 근육이 경련하는 것을 느꼈다. 화약이 아닌 장력에 의지하는 석궁은 체력소모가 총에 비해 심하다. 시위가 습기에 늘어지는 꼴을 안 보나 했더니, 이젠 제 팔을 늘어지게 하시나이까? 그는 북부인이 가장 의지하는 초월적인 두 존재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오, 제발. 북부의 신이여! 죽은 자의 왕이여!”

 

 틸리는 어렵게 시위를 당겼다. 그는 짧은 화살을 가죽시복에서 꺼내어 석궁에 장전하였다. 옆 사람의 땀방울이 자신의 목에 떨어질 정도로 밀집한 곳에서, 매우 어렵게. 이제 조준의 시간이다. 그러나 그는 장전만이 아니라 조준 또한 어렵다는 사실에 그만 욕설을 내뱉고 말았다.

 

 소년 코마는 장전할 때 총탄을 화약보다 먼저 넣는 실수를 해버리고 말았다. 키체커는 화를 내면서 소년에게서 총을 빼앗았다. 코마는 빽빽한 창대 아래에서 단검을 빼들곤 자신의 앞으로 늑대가 달려들지 않기만을 빌었다. 부들부들 떠는 제자의 모습을 본 키체커는 미간을 찌푸리곤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올 때가 됐는데.

 

 과연 그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충분히 상상은 했다만…….”

 

 키체커는 말꼬리를 흐렸다. 꿈이 현실보다 우월하다던 장로님들, 발칙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반론하겠습니다. 왜 사람은 상상이 아니라 현실을 보고 말을 잊는지요? 키체커는 등 뒤로 고개를 홱 돌리곤 전혀 사냥꾼답지 않은 일을 해냈다. 쉽게 말해서, 그는 목이 찢어져라 외쳤다.

 

 “대장, 온다!”

 

 

 

 “빌 대위! 빌 대위!”

 

 홀더 대위는 부하들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공황 상태에 빠졌다. 그로서는 괴물늑대들에게 포위당한다는 상황이 너무나도 낯선 것일 테니까. 비명소리와 숱한 총성이 진기한 상황과 맞물렸으니, 홀더 대위가 그리 못난 것은 아니다. 다만 모든 상황을 아는 덕에 상대적으로 침착한 빌이나, 주어진 상황에 충실할 뿐인 정예병들에겐 적잖은 감점 대상이다.

 

 정신없이 총탄을 장전하는 부하들, 희뿌옇게 눈앞을 막는 화약연기, 시끄러운 총성과 찢어지는 비명을 제치고 대열 중심부까지 어렵게 걸어온 빌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무슨 일이냐고? 저 늑대들이 안 보여? 대체 왜 저런 것들이 락토에 있는 건데? 이런 이야긴 들어보지도 못했어!”

 

 빌을 보자마자 홀더 대위는 말을 쏟아냈다. 힘들게 걸어오니 들리는 것이라곤 추궁 비슷한 비명. 빌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저도 이런 경우는 처음입니다.”
 “대체 왜?”
 “모르겠습니다.”

 

 어떤 아가씨가 수작 부렸다고 해봐야 믿지 않을 것 같다. 믿어주더라도 빌에게 이로울 것은 없다. 빌은 시치미를 잡아떼는 것으로 대응했다. 당사자가 모른다고 뻗대는데 홀더 대위가 무슨 증거를 잡겠는가. 빌은 담담하게 현 상황에 대해 정리했다.

 

 “일단 늑대들에 관한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된 것 같습니다.”

 

 늑대들은 누적되는 피해를 견디지 못하고 점점 보병대와 거리를 벌렸다. 이제 늑대들은 총의 유효사거리를 벗어나 숲과 바위와 구덩이를 오가며 보병대의 주위를 맴돌기만 했다. 이젠 제대로 맞는 총탄과 화살이 드물었다. 보여야 쏘든가 말든가.

 

 “하지만 이대론 대형을 못 풀어! 꼼짝할 수가 없다고!”

 

 맞는 말이었다. 창병들이 충분히 훈련되었어도 이 상태로 질서정연하게 후퇴하기는 힘들다. 공세로 나서야 할까? 그 또한 힘들다. 창병이 공세로 신속히 전환하는 건 익숙하지 않은 일이다. 가만히 있을까? 안 된다. 아군의 적은 호기를 놓칠 상대가 아니다.

 

 “온다! 온다!”

 

 병사들이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빌은 부하들이 탄식하며 부르는 대상을 확인했다. 익인들이 날아오고 있었다. 빌은 더 이상 홀더 대위와 의논하려 들지 않았다. 최우선 문제 해결. 그는 대열 앞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냉정하게 명령했다.

 

 “총병, 조준!”

 

 빌이 외치자마자 총구들이 하늘로 솟구쳤다. 빌은 잠깐 뜸을 들인 다음 외쳤다.

 

 “일제사격!”

 

 전례 없는 일이 일어났다. 밀집대형이 흰 화약연기 속에 완전히 파묻힌 것이다. 일부 병력이 대형 바깥에서 총을 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많은 병력이 대형 안에서 머리 위를 쏘기에 가능한 현상이다. 이런 상황은 역전의 병사들에게도 익숙한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이건 미리 준비한 상황이 아니다. 귀를 찢는 총성과 매캐한 연기가 대열 한복판에서 솟아오르자 창병들은 공황을 일으켰다. 시력의 상실에 흐트러진 그들의 모습엔 빌의 총병들도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에 빌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대오를 유지하라, 이 멍청이들아! 자기가 쏜 총에 놀라느냐!”

 

 빌은 병사들을 독전하면서도 익인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척 보기에도 피해가 크지 않다. 온다. 익인들 중 일부가 긴 밧줄을 들고 있다. 그 끝에 뭔가 달려 있는 것 같다. 화약연기가 자욱해 정체를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대형 앞에 서기도 전에 빌은 그 정체를 알았다.

 

 “으아아악!”

 

 사람이 하늘을 날았다. 주변의 화약연기가 너무 자욱해서, 마치 대포에서 사람이 발사되었다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은 광경이었다. 빌은 그 병사의 배에 박힌 것을 보고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사람 낚시로군.”

 

 갈고리. 원래는 나무 위에서 아래의 물자를 옮기는데 쓰던 물건임에 분명하다. 일개 개인이라면 갈고리가 제 아무리 빠르다 한들 피할 수 있겠지만, 밀집대형은 꼼짝도 못한다. 쏟아지는 핏방울을 보며 빌은 이를 악물었다. 대형 앞에 선 그는 또 다른 갈고리를 볼 수 있었다.

 

 “꺽!”

 

 병사가 또 낚였다. 그러나 이번엔 하늘로 솟구치지 않고, 갈고리와 한 몸이 되어 동료들의 가슴팍으로 뛰어들었다. 빌은 다급히 외쳤다.

 

 “한 발짝도 움직이지 마라! 버텨! 밧줄을 끊어버려!”

 

 대형이 찌그러진다. 이 혼란 속에서는 저 갈고리도 우습게 볼 게 아니다. 빌은 총병들에게 명령했다.

 

 “자리를 지켜라! 더 빠르게! 장전이 끝나는 대로 자유 사격하라!”

 

 탄환을 재장전하는 총병들의 손놀림이 바빠졌다. 익인들도 가만히 있질 않았다. 총은 제일 성가신 물건이다. 익인들은 천에 싸오거나 손에 든 것을 병사들의 머리 위로 쏟아냈다. 돌과 화염병이 비처럼 내렸다. 빌은 병사들의 머릿속에 박아 넣기로 작정한 말을 다시 외쳤다.

 

 “대오를 유지하라!”

 

 하늘에서 떨어진 돌은 그대로 핏덩이가 되었다. 투구나 갑옷이 없는 병사들에게 투석은 치명적이었다. 화염병은 더 위험했다. 특히 총병은 화약통 때문에 불덩이가 되는 즉시 동료들과 함께 폭사할 수 있다. 몇몇 병사가 불덩이가 되어 구를 때마다 총병들은 기겁하며 물러나야 했다.

 

 “대장! 화염병이 예상보다 많아!”

 

 시론이 당황하여 외쳤다. 빌은 그의 말을 이해했다. 대형 앞에는 용케도 깨지지 않은 한 화염병이 진흙탕에 빠져 심지만 타고 있었다. 그걸 본 빌은 신대륙 럼주를 저주했다. 지나치게 싸다고 전부터 말했잖아. 빌은 화염병을 건져내 늑대들이 우글거리는 숲 속으로 던져버렸다. 그는 보병대 속에서 게드 장로를 찾은 다음 외쳤다.

 

 “게드, 마법은 뒀다 뭐할 건가!”
 “네가 이 북새통에서 뭔가 해낸다면 장로회의 수호자로 추천하마!”

 

 게드 장로는 투덜거리면서도 양 소매 속에서 온갖 잡동사니들을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어깨가 부딪히고 발이 밟히는 혼란 속에서 그것들을 쏟지 않거나 분류하는 것은 고역임에 분명했다. 밀집대형이 조금씩 부서진다. 아직 늑대가 있는데. 빌은 발악적으로 외쳤다.

 

 “대오를 유지하라!”
 “대장, 앞에!”

 

 빌의 외침이 끝나자마자 시론이 손가락으로 빌의 뒤를 가리켰다. 빌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갈고리가 날아오고 있었다. 가깝다. 빌은 자신의 뒤에 서 있는 병사들이 뒷걸음질을 하다 말고 주춤거리는 꼴을 보았다. 여기서 물러설 수 없다. 빌은 이를 악물고 자신의 도끼를 양손으로 가로쥐었다.

 

 “규율 개정! 도망치는 놈은 내 손에 죽는다!”

 

 화물용으로나 쓸 묵직한 갈고리가 빌의 도끼 앞으로 쇄도했다. 빌은 도끼자루로 그걸 막았다. 쇠와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거세게 터졌다. 장갑을 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손바닥에 통증을 느꼈다. 팔이 단번에 뽑혀 하늘로 끌려갈 것 같다. 발끝이 땅에서 떨어진다. 도끼자루가 구부러지는 건 아닐까. 전신이 떨리기 시작했다. 무슨 갈고리가 이렇게 큰 거야. 빌은 안간힘을 써서 갈고리를 잡아당겼다. 익인은 빌이 당장 낚이거나 쓰러지질 않자 크게 당황했다. 밧줄을 붙잡은 채 보병대 위를 맴돌던 익인은 곧 자신이 총병들에게 아주 좋은 표적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기겁하여 다급히 밧줄을 놓았다. 그러나 때가 늦었다. 빗발치는 총탄 사이로 한 사냥꾼의 총탄이 날아갔다.

 

 날개의 추락은 서글프고, 요란하다.

 

 익인의 머리가 깨지고 깃털이 흩날리는 순간, 병사들은 일제히 환호했다. 그들은 일제히 빌의 이름을 연호했다. 이에 빌은 충분히 화끈하게 답했다. 그는 전설 속의 야만전사처럼 수염을 떨며 포효했다.

 

 “나는 한 도시에 도전했다!”

 

 병사들의 함성이 같이 터졌다. 빌은 다시 외쳤다.

 

 “대오를 유지하라!”

 

 

 

 셀레스테는 더 이상 브롬 장로와 대화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포성을 들었기 때문이다. 분명 총성과 다른 수준의 소리였다. 경포다. 경포를 쏠 수 있을 정도라면, 아직 대오는 무너지지 않았다.

 

 ‘기껏 보냈더니, 아직도 못 죽였어?’

 

 자포를 곧바로 갈아 끼운 듯 포성이 연이어 들려왔다. 그녀는 짜증스럽게 고개를 흔들었다. 긴 흑발이 찰랑거리는 모습은 더 없이 아름다웠지만, 브롬 장로는 그녀의 행동에서 몸을 요란하게 흔드는 늑대의 몸짓을 떠올렸다. 그는 조금 전에 토굴을 탈출한 약사 노인을 떠올리며 한탄했다.

 

 ‘좀 같이 있어주면 어디 덧나느냐, 친구여.’

 

 브롬 장로의 불안을 눈치 챈 듯, 셀레스테는 느리게 움직였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덕택에 브롬 장로는 주변에 놓인 약병을 닥치는 대로 움켜쥐는 망상을 실현하지 않아도 되었다. 셀레스테는 브롬 장로를 굽어보며 말했다.

 

 “일단 고맙다는 인사는 해둘게.”
 “무슨 뜻이지?”

 

 브롬 장로의 질문에 셀레스테는 웃으며 답했다.

 

 “당신의 욕심 덕택에 기회를 잡았잖아.”
 “차라리 국왕에게 감사를 하지 그러냐.”
 “여기 없잖아. 하긴, 당신에게 인사하는 것도 어색하군. 샘물과 죽은 자의 왕에게 고마워하진 않는 법이니.”


 물을 마시려는 사냥감, 약하고 병든 사냥감. 브롬 장로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가려고?”
 “응.”

 

 그녀는 몸을 홱 돌렸다. 토굴을 나서기 직전, 그녀는 파란 눈동자로 브롬 장로를 슬쩍 돌아보며 웃었다.

 

 “나오면 죽는다.”

 

 브롬 장로는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았다. 문이 열리고, 닫혔다. 발소리는 없었다.

 

 장로회의 수호자는 엉덩이에 불이 붙은 것처럼 일어났다. 그는 자신의 귀중한 서적들과 자료들을 다짜고짜 헤집더니 구석에서 뚜껑 달린 황동그릇들을 찾아 꺼내었다. 윗면에 붙은 이름표들을 보고 자신이 원하던 것을 찾던 브롬 장로는 곧 게드 장로라고 적힌 이름표를 찾았다. 뒤이어 가장 깊은 곳에서 절대 꺼내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던 이름표도 찾았다.

 

 ‘무엇부터 써야 하나?’

 

 브롬 장로는 잠시 망설인 끝에 불길한 이름표를 골랐다. 우선 조치부터.

 

 장로는 황동그릇의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는 작은 주머니가 들어있었다. 그는 주머니의 입구를 황동그릇 안으로 향한 채 탈탈 털었다. 수십 알의 밀알이 황동 그릇을 때리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브롬 장로는 황동그릇을 빈 촛대 위에 올려둔 다음, 그것을 돌렸다. 너무 세게 돌렸는지 밀알 몇 개가 그릇 밖으로 튀어나갔지만 장로는 그것에 전혀 신경 쓰지 못했다.

 

 그가 입에 담을 이름은 그만큼 무서웠다.

 

 “장로회의 수호자가 죽은 자의 왕께 요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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