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이정표

미친 빌과 귀신늑대 -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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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빌은 커다란 나무뿌리를 넘어 평평한 돌을 밟고 뛰어올랐다. 때마침 그의 코앞으로 한 늑대가 마주 뛰어올랐다. 빌은 공중에서 도끼로 늑대를 찍었다. 늑대는 두개골이 박살나면서 공중제비를 돌았다. 빌은 관성 때문에 땅을 굴렀다. 젖은 흙과 낙엽이 전신에 달라붙었지만 빌은 털어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는 넘어지자마자 일어났다.

 

 눈앞에는 괴물늑대. 새카만 털 사이의 붉은 잇몸과 누런 이빨이 보인다. 빌은 머뭇거리지 않았다. 그는 커다란 코를 향해 흙 묻은 왼쪽 주먹을 내질렀다. 도끼에 정신을 집중하던 괴물늑대는 번개 같이 찾아온 고통에 뒤로 물러서야 했다. 빌은 그 괴물늑대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소리치며 달려들었다.

 

 “꺼져라!”

 

 이번엔 주먹이 아니라 도끼날. 앞발로 싸맨 코를 향해 도끼날이 날아들었다. 괴물늑대는 뒤로 펄쩍 뛰었다. 도끼날이 허공을 가르는 순간, 괴물은 다시 앞으로 뛸 준비를 했다. 그러나 총병들이 빌의 뒤에서 나타났다. 그들은 미리 장전된 소총과 권총을 일제히 겨누었다.

 

 “대장, 엎드려!”

 

 빌과 괴물늑대가 동시에 땅바닥을 나뒹굴었다. 앞으로 뛰려고 몸을 웅크리다 황급히 방향을 바꾼 괴물이 더 볼품사납다. 그러나 덩치가 워낙 크다보니 총탄 세례를 완전히 피할 순 없다. 대여섯 자루의 총이 한꺼번에 불을 뿜자마자 괴물늑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몇 발의 총탄이 애꿎은 나무줄기를 부쉈다. 빌은 자신의 몸 위로 떨어진 파편을 한번 털어내곤 뒤를 돌아보았다. 나무 사이로 보이는 부하들. 그는 명령했다.

 

 “미친 빌이 명령한다! 쓸어라!”

 

 총병들의 함성이 뒤따랐다. 머리 위를 괴롭히던 익인은 이제 없다. 그들은 자신들의 터전을 망가뜨릴까봐, 또는 울창한 나무에 시야가 방해되어 더 이상 투척 공격을 못했다. 지금이 기회다. 빌은 계속해 말을 이었다.

 

 “불태우고 부숴라! 익인 놈들의 재산을 깡그리 없애라!”

 

 그때 빌을 향해 한 늑대가 달려왔다. 괴물늑대는 아니지만 체구가 꽤 컸다. 당황한 총병들이 도끼나 검을 들기 전에 늑대는 도약했다. 늑대는 빌의 뒤를 노릴 생각이었다.

 

 도끼자루가 부채꼴을 그리면서 늑대는 위턱이 쪼개져 나무에 처박혔다. 늑대는 격통에 발버둥을 쳤지만 이미 운명은 결정되었다. 빌은 도끼날을 나무에서 뽑았다. 늑대는 나무에 박힌 채 떨어지지 못했다. 그는 도끼로 버둥거리는 늑대의 정수리를 후려쳤다. 거친 숨소리가 멎는다. 빌은 떨어진 위턱을 주워들었다. 그는 그걸 총병들에게 던지며 외쳤다. 

 

 “늑대 놈들은 오는 족족 박살내버려!”

 

 명령은 그대로 실행되었다.

 

 도끼날이 소나기처럼 쏟아지자 돼지와 양을 가둔 우리가 부서졌다. 숨겨진 창고는 남김없이 드러나 불씨가 던져졌다. 부랑자들의 빈 천막들마다 칼날이 날아들었다. 병사들은 날붙이와 횃불을 휘두르며 늑대들을 쫓아냈다.

 

 틸리와 석궁수들은 아예 남은 화약뭉치들에다 불을 붙여선 괴물늑대들에게 마구 던져댔다. 키체커와 코마는 익인들의 기중기를 이용해 나무 위로 올라갔다. 잠시 뒤 늑대들은 하늘에서 쏟아지는 총탄에 쓰러졌다. 마누크는 지형지물을 이용해 작은 포대 하나를 즉석에서 만들었다. 그는 그곳에서 몇몇 총병들과 함께 재장전을 서둘렀다. 빌은 그의 친우 게드 장로를 찾았다. 그는 드디어 잡동사니의 정리를 다 끝냈다. 그는 진흙이 들어간 작은 유리병을 꺼내 자신의 몽둥이 끝에 묶었다. 그 다음, 장로는 유리병을 나무에 후려쳐 깼다. 그 순간 물에 젖은 흙이 거대한 불꽃을 토해내는 기적이 실현되었다. 늑대들은 기겁하며 물러섰다. 장로는 소리쳤다.

 

 “타 죽지 않게 조심해라!”

 

 불의 검이 하늘로 휘둘러지는 꼴을 본 빌은 혀를 찼다. 저건 아까 꺼냈어야지. 그는 목재가 상하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불 같이 화를 내고 포효하던 전사는 이미 없다. 그곳에 존재하는 건 냉정하게 손익을 계산하고 적의 동태에 온 정신을 쏟는 노인이다.

 

 빌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 터전이 불타고 있다. 힘겹게 길러왔을 가축들이 산 채로 찢겨져 분뇨 섞인 진흙탕에 버려졌다. 어설프게 만든 오두막들이 부서졌다. 항아리는 깨졌다. 나무 위에서 어린 익인들의 비명이 들려온다. 폭력과 마주친 약자들의 아우성. 흔해빠진 광경이다.

 

 빌과 셀레스테도 그 광경 속에 있다.

 

 빌은 매캐한 연기를 내뿜는 수풀을 짓밟았다. 그는 앞으로 걸어갔다. 병사들을 제치고 밀치며, 그는 늑대들이 도사리는 곳까지 걸어갔다. 분노와 두려움이 섞인 흉흉한 눈빛들이 빌을 노려보았다. 돌격 직전이다. 다시 온다. 빌은 도끼자루를 꽉 쥐었다. 빌은 생각했다. 냉정하게 계산해라. 머리를 쳐. 빌은 소리쳤다.

 

 “나와라!”

 

 응답은 없었다. 병사들은 날뛰기를 멈추곤 경애하는 대장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빌은 그 시선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다시 소리쳤다.

 

 “숨지 마라!”

 

 늑대들을 향한 도발이라고 생각한 병사들 중 일부가 빌의 말을 따라 외치기 시작했다. 곧 병사들은 온갖 야유와 독설을 사방으로 쏟아냈다. 우린 돌격해왔다! 너희도 와봐! 부딪혀보자! 빌은 그 소음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다시 외쳤다.

 

 “너는 나를 죽인다!”

 

 정적. 불씨가 젖은 나뭇가지를 태우는 소리만 들려왔다. 병사들은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입을 뻐끔거렸다. 시론은 당황하여 빌에게로 달려왔다. 그가 빌의 어깨를 짚었지만, 빌은 멈추지 않았다.

 

 “죽은 자의 왕께 맹세한다!”

 

 키체커의 총성마저 멎었다. 장로의 불길이 꺼졌다. 마누크와 경포병들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틸리와 그의 석궁수들은 손에 쥔 화약주머니가 폭발 직전이란 걸 깨닫고 황급히 던져서 위기를 모면했다. 깨진 코를 붙든 채 쓰러져 쉬고 있던 홀더 대위는 한마디만 했다. “미친 놈.” 빌은 그 소릴 분명히 들었다. 빌의 입가가 일그러졌다.

 

 “싸움과 죽음은 숙명이다!”

 

 홀더 대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명하지. 북부 숙명론. 빌은 다시 선언했다.

 

 “나는 너를 죽인다!”

 

 다시 정적. 병사들은 불편한 침묵 속에서 늑대들과 빌을 번갈아 보았다. 곧 시선은 한곳으로 쏠렸다. 늑대들이 있던 곳에서 확연히 격이 다른 늑대가 걸어 나왔다. 커다란 덩치의 검은 늑대. 평범한 괴물늑대가 아니다. 빌과 시론, 키체커는 그 정체를 알았다.

 

 빌은 도끼자루를 고쳐 쥐었다. 

 

 

 

*
 셀레스테는 빌의 미친 짓거리를 모두 살펴볼 수 있었다. 그녀는 빌을 향해 이빨을 드러냈다. 빌은 상냥하던 남자를 죽였다. 그가 살기 위해서였다. 그 남자는 빌에게 덤볐다. 여자에게 물어다 줄 먹잇감으로 알았으니까. 간단한 이야기다. 땅에 발 딛고 서려면 다른 발 달린 놈을 죽여야 한다. 가죽시장의 사치품도, 유물을 탐하던 북부재단도, 목재의 값을 계산하던 수호자도 사실 그런 살해의 연장선에 있을지도 모른다.

 

 빌의 입이 소리 없이 움직였다.

 

 껄끄러워할 것 없다.

 

 살려면 죽여라.

 

 너나 나나.

 

 죽는다.

 

 셀레스테는 빌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나는 인연을 죽인다.’

 

 떨어져 나온 거짓말쟁이, 원초적인 이유의 살해자, 자신을 정당화하는 무뢰배.

 

 그것이 셀레스테가 빌에게 받은 인상이었다. 그는 죽어도 후회가 없기에 앞으로 나선 것이 아니다. 빌은 셀레스테를 죽이기 위해 섰다. 가만히 있으면 죽임을 당할 판이니, 자신이 살기 위해서 싸운다. 그러니까 나와. 이놈들은 내 상대가 되지 않아. 내가 너를 죽일 수 있게 해. 네게도 기회를 줄 테니.

 

 “죽은 자의 왕에게 맹세한다고?”

 

 셀레스테가 늑대의 모습으로 말을 하자 인간들은 일제히 술렁거렸다. 그러나 빌은 꼿꼿이 선 채로 답했다.

 

 “그는 내가 옳다 말할 것이다.”

 

 셀레스테는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까 당신, 찾는 게 있다지?”

 

 빌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셀레스테는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그럼 그것도 죽은 자의 왕에게 물어봐.”

 

 그 순간 커다란 술통이 빌의 바로 뒤로 떨어졌다.

 

 

 

*
 장로회의 수호자는 부들부들 떨었다. 황동그릇에 뜬 왕의 뜻은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그렇게 욕심이 많아서는 무덤을 크게 파야 하겠소.’

 

 브롬 장로는 숨 쉬는 것조차 잊었다. 죽은 자의 왕은 위대하다. 공포 그 자체다. 가장 지독하며 완벽한 살해자이기에 그렇다. 그가 행차의 대가로 개척촌의 모든 생명을 거두어가더라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브롬 장로는 다시 북부의 호의를 담았다. 잠시 뒤 왕의 뜻이 답했다. 그건 지나치게 애매모호하고 당연한 말이어서, 수수께끼를 좋아하는 장로도 고개를 갸웃거려야 했다.

 

 ‘이기는 자가 살아 나오겠지.’

 

 수호자는 대답을 요구하지 않았다. 왕은 남의 말을 잘 듣는 편이 아니다. 그가 말할 뿐이다. 있는 힘껏 준비하고 예를 갖춘 다음에는 순전히 왕의 뜻을 기다릴 뿐. 왕이 다시 답했다.

 

 ‘나는 이미 존재한다.’

 

 

 

*
 익인들은 마구잡이로 술통을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이래 파괴되나 저래 파괴되나 그들의 숲에 더 이상 미래는 없다. 익인들은 자신들의 미래가 남들에게 망가지는 꼴을 보느니, 스스로 파괴하는 한이 있더라도 침입자들을 물리치기로 결정했다.

 

 빌은 술을 잔뜩 뒤집어 쓴 채 기침을 내뱉었다. 그는 엘을 떠올렸다. 지금쯤 울고 있겠군. 빌은 도끼 자루를 지팡이 삼아 일어났다. 술통이 또 떨어졌다. 이번엔 늑대 무리 한복판이었다. 더는 피아를 가리지도 않는다. 또 떨어졌다. 이번엔 불타는 오두막에 떨어져 그대로 폭발했다.

 

 다리가 후들거린다. 숨이 막힌다. 하지만 셀레스테는 기다리지 않는다. 늑대들이 뛰쳐나오는 순간 빌은 도끼를 들어올렸다. 셀레스테의 이빨이 코앞이다. 그는 소리쳤다.

 

 “찢어발겨!”

 

 동시에 날붙이들이 뛰쳐나왔다. 셀레스테는 주둥이가 아니라 오른쪽 앞발로 그녀를 가로막은 총병들을 쳐냈다. 괴력 앞에 병사들은 나동그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시론과 마누크가 뒤따라 셀레스테에게 덤벼들었다. 요란한 총성. 그 직후 달려드는 도끼와 망치. 셀레스테는 앞발이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워지자 격노했다. 그녀는 상처투성이의 앞발을 절룩거리더니 곧 하늘로 뛰어올랐다. 그녀의 도약력은 다른 늑대들과는 수준이 달랐다. 시론과 마누크의 무기는 허공을 갈라 하마터면 서로를 죽일 뻔했다. 시론이 비명을 질렀다.

 

 “대장!”

 

 셀레스테가 낙하하는 곳에 빌이 있었다. 빌은 재빨리 몸을 굴렸다. 아슬아슬하게 셀레스테의 몸뚱이가 빌을 비켜갔다. 압사는 면했군. 빌은 중얼거리면서 일어났다. 그러나 셀레스테가 더 빨랐다. 상처투성이 앞발이 빌에게로 날아들었다. 빌은 황급히 양팔을 들어올렸다. 발톱과 도끼 자루가, 발바닥과 사슬갑옷이 부딪혔다. 빌은 그대로 날아갔다. 요행히 충격이 분산된 데다 힘이 없는 공격이라 골절은 없다. 되려 셀레스테가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에 움찔거렸다. 나무에 부딪혀서 멈춘 빌은 허리가 아프다고 느꼈다. 그는 재빨리 주변공간을 파악했다. 그는 술을 뒤집어쓴 상태다. 조금만 불씨가 튀어도 위험하다. 빌은 땅바닥에서 젖은 천을 찾아 쥐었다. 이전엔 뭘 닦았는지 모를 더러운 걸레짝이었다. 그는 황급히 도끼와 몸에 묻은 술을 닦아냈다.

 

 당연하지만, 전부 닦을 순 없었다. 셀레스테는 시간을 더 주지 않았다. 몇몇 창병들이 장창을 들이대는 것을 도리질 한번으로 다 쳐내고, 빌에게 전속력으로 달려든다. 몸통박치기다. 늑대답지 않은 공격에 빌은 혀를 찼다. 셀레스테의 어깨가 빌을 피해서 그 옆의 굵은 나무줄기를 강타했다. 그 순간 빌은 그녀가 표적을 헷갈릴 정도로 다쳤는지 의심했다. 오답이다. 총성과 함께 들려오는 키체커와 코마의 비명소리에 빌은 미간을 좁혔다. 셀레스테는 빌을 공격한 게 아니라 저격을 피했다. 오발탄이 어디로 날아갔는지는 파악이 되지 않지만, 분명 셀레스테를 맞추진 못했다.

 

 셀레스테의 눈이 빌에게로 돌아갔다. 빌은 자세를 고치고 도끼를 겨누었다. 위협적으로 도끼를 내밀었다가 빼기를 반복하자 셀레스테가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조금 전과는 의미가 좀 다르다. 가소롭다는 뜻일까.

 

 하지만 그 도끼에 네 짝이 죽었다.

 

 빌은 멀쩡한 앞발로 공격이 날아오는 걸 짐작했다. 그는 셀레스테가 다친 발쪽으로 몸을 날렸다. 셀레스테의 배 밑을 통과한 빌은 잽싸게 뒷다리를 도끼날로 찍었다. 거체가 뒤흔들린다. 시론과 마누크는 그때를 놓치지 않았다. 시론은 도끼로 셀레스테의 꼬리를 인정사정없이 찍었다. 그 직후 생물처럼 발광하는 꼬리에 맞아 허공을 날았다. 마누크는 망치를 못으로 삼아 그녀의 앞발로 달려들었다. 상처 후비기다. 셀레스테가 얌전히 있어주진 않았다. 몸이 날쌔게 반전하더니 꼬리가 마누크를 때렸다. 반대쪽으로 날아가는 마누크를 본 시론의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안 쉽다니까.”

 

 빌은 한탄하는 시론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그는 신임하는 부하를 짐짝처럼 질질 끌어가며 소리쳤다.

 

 “창병!”

 

 황급히 달려온 10명의 창병들이 2열 횡대로 늘어섰다. 지형지물을 살려 좌우에는 엉망진창의 장애물을 놔둔 채로. 빌은 그들의 창대 아래까지 기어간 다음 부중대장을 그곳에 내팽개쳤다.

 

 “총이나 쏴!”

 

 빌은 다시 창대 아래로 뛰쳐나갔다. 셀레스테는 창병들을 확 뭉개버리려다 빌의 움직임을 따라 다른 방향으로 뛰어갔다. 창병들에게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오는 꼴을 본 시론이 중얼거렸다.

 

 “명령대로.”

 

 시론은 권총을 빼들었다. 그는 그것을 바라보더니 실소했다. 지난번의 셀레스테는 이걸로 위협할 수 있었다. 지금은 어림도 없다. 시론은 권총을 배 위에 올려놓고는 화승총을 대신 들었다. 애석하게도 비었다. 누운 채로 장전하는 건 안 익숙한데. 시론은 앓는 소리를 하며 화약통의 마개를 열었다.

 

 틸리는 총탄 몇 발에도 쉽게 멈추지 않는 괴물딱지들을 석궁으로 잡긴 힘들다는 상식적인 결론에 도달했다. 그래서 틸리와 그의 동료들은 평범한 늑대들을 상대했다. 하지만 빌 대장은 상식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셀레스테를 달고서 뛰어오는 대장의 모습에 틸리는 말 그대로 경악했다.

 

 “어떻게 하라고요?”
 “화약!”

 

 짧고 굵은 대답. 틸리는 짧은 시간 동안 숱한 생각을 떠올렸다. 그 생각들이 정리되기도 전에 그는 화약뭉치들을 마저 꺼냈다. 마지막. 주저할 틈도 없다. 그는 황급히 남은 화약뭉치 모두에게 불을 붙이곤 빌의 머리 위로 던졌다. 그 즉시 셀레스테의 주변에서 크고 작은 폭발이 일어났다. 그녀는 고통과 폭음, 섬광에 빌의 추격을 중단하고 당장 바닥을 굴렀다. 하지만 치명타는 아니다. 화약을 종이에 싸놓은 폭탄에 파편효과까지 바란다면 그건 욕심이 지나치게 과하다. 틸리는 현명하게 대처했다. 쉽게 말해, 셀레스테와 거리를 벌리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난 할 일 다 했어!”

 

 틸리의 말에 가장 공감하기 어려운 것은 키체커와 게드 장로였다. 재장전을 서두르던 키체커는 셀레스테가 정신없이 날뛰는 통에 조준이 어려울 것임을 깨달았다. 게다가 툭하면 빌과 셀레스테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워진다. 잘못하면 빌이 맞는다. 게드 장로는 더 한심하게 대처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효과가 지극히 의심스러운 늑대 쫓는 향을 사방에 뿌려댔다. 조금 전의 위기에서도 안 쓸 정도로 사용을 고려치 않던 물건이었다. 당연히 광분한 늑대들을 상대로는 효과가 거의 없었다. 게드 장로는 셀레스테의 뒤통수에다 철퇴를 냅다 집어던지고는 부리나케 키체커가 매달린 나무 위로 올라가버렸다. 빌은 그런 게드 장로를 보고 외쳤다.

 

 “당장 쓸 만한 것 찾아내지 않으면 해고하겠다!”

 

 게드 장로의 대답을 들을 정신은 없었다. 늑대 하나가 빌의 옆에서 덤벼들었기 때문이었다. 빌은 그 늑대에게 왼팔을 물린 채 데굴데굴 굴렀다. 불행히도 도끼를 놓쳤다. 팔 보호대를 뼈다귀 씹듯 깨무는 늑대의 배에 주먹이 날아들었다. 그러나 턱이 벌어지질 않는다. 빌은 늑대와 함께 나무뿌리들 위를 굴러 커다란 구덩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는 뾰족한 나뭇가지, 돌멩이를 닥치는 대로 집어 늑대의 배를 짓이긴 후에야 해방되었다. 그 직후 셀레스테가 뒤따라 날아올 때 빌은 암울한 기분을 느끼며 검을 뽑았다. 일단 도끼부터 찾아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빌은 일단 구덩이를 뛰쳐나갔다. 셀레스테가 곧바로 쫓아왔다. 빌이 계단처럼 뛰어올라야 할 나무뿌리들을 그녀는 너무 가볍게 넘는다. 숱한 부상을 입고도. 주변의 병사들이 시간을 끌어주지 않았으면 빌은 벌써 잡혔을 것이다.

 

 다행히 도끼는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다. 자루까지 쇠로 만들어진 도끼. 빌은 재빨리 그것을 잡고는 커다란 고목을 등지고 뒤로 돌아섰다. 셀레스테가 절룩거리면서 달려온다. 빌은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북부 비약. 30년 전. 왕의 정예병.

 

 성벽을 깨고 광야를 달린다.

 

 빌은 수통을 꺼내들었다. 마개가 열리고 역한 냄새가 풍겨온다. 희석하지 않은 회백색 액체. 빌은 하늘을 향해 입을 크게 벌리고, 그 약을 목구멍으로 쏟아 넣었다. 셀레스테도 그 비약을 안다. 그녀는 더욱 속도를 높였다. 한 방울이라도 더 들어가기 전에 그녀는 빌을 죽여 버리기로 결정했다.

 

 둘의 시도는 같은 이유로 동시에 무산되었다는 점에서 꽤 특이하다. 이제까지 떨어졌던 것보다 훨씬 큰 술통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폭발하지 않더라도 술통은 그 질량에서 충분히 폭탄이다. 특히 셀레스테보다 훨씬 체구가 작은 빌은 산산조각 나는 술통 속에 들어온 착각을 느꼈다. 파편과 액체가 놀라운 속도로 빌을 강타했다. 그는 고목을 등진 채 그 충격을 고스란히 받아버렸다.

 

 빌은 의식을 잃었다.

 

 

 

*
 새하얀 세상.

 

 빌은 벽도 바닥도 없는 공간을 걸었다. 그 장소가 어디인지 의문도 생기지 않았다. 빌은 생각했다.

 

 ‘꿈같군.’

 

 꿈인 걸 깨달아도 깨지 않는 꿈같다. 그건 마치 현실을 모르는 철부지가 “나도 알 것 다 알아.”라고 중얼거리는 기분이다. 이런 꿈은 참 드물었는데. 빌은 혀를 찼다. 다행히 분명 꿈이 깰 때가 된 것 같았다. 공간의 가운데이자 끝에 한 남자가 있었다.

 

 남자가 말했다.

 

 “전투 중에 술 폭풍을 맞는 사람은 처음 봤다.”

 

 시각적 혼란 속에서 목소리는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느낌을 줬다. 새카만 사내였다. 처음엔 멀어서 점처럼 보였다. 그러나 빌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무서운 속도로 가까워졌다. 그가 허공을 의자처럼 앉아있는 모습이 보인다. 손목을 감추듯 팔짱을 낀 상체가 보인다. 빌의 반 보 앞에 나타났다.

 

 “여전히 특이한 전장만 끌고 다니는군.”

 

 빌은 사내의 옷차림을 살펴보았다. 새카만 천으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감싼 젊은 사내. 머리에는 작고 낮은 고깔모자를 썼고, 눈은 황금 가면으로 가려져 있다. 가면은 콧등에서 끝났는데, 작은 황금구슬들을 묵주 같이 여럿 엮어 턱 끝까지 치렁치렁 늘어뜨려 놨다. 가장 인상적인 건 전신에 두른 녹슨 쇠사슬들이었다. 바람도 불지 않는데 새빨간 녹이 흔들리며 옷자락을 자꾸 스쳤다.

 

 “브롬 장로의 부름은 솔직히 반갑지 않지만, 자네는 정말 반가워. 미친 빌, 아직도 헤매는가?”

 

 남자가 웃으며 인사했다. 빌은 그가 누군지 안다. 난생 처음 보는 옷차림, 난생 처음 듣는 목소리임에도 불구하고. 영혼 깊은 곳에서 남자의 정체를 소리쳤다. 빌은 무릎을 꿇었다. 사내는 빌이 내려다볼 존재가 아니다. 사내가 빌을 올려다보는 것도 격이 안 맞다. 아직 때가 아니라고 소리칠 배짱도 생기지 않는다.

 

 빌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언젠가는 당신을 뵙게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사내는 여전히 웃음소리를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빌은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으며 말을 끝맺었다.

 

 “죽은 자의 왕께 경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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