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이정표

미친 빌과 귀신늑대 -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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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하는 꼬마냐.”

 

 침대에 누운 늙은 전사의 말이었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그의 옆에는 열다섯 살이 되었음직한 청년이 서 있었다. 그는 꼬마라는 말에 발끈했다.

 

 “꼬마 아닙니다.”

 

 전사는 코웃음을 치다 격통에 인상을 찡그렸다. 청년이 즉각 말을 걸었다.

 

 “약을?”
 “아니. 필요 없다. 돈 낭비야. 게드 장로의 성의는 고맙지만.”

 

 청년은 방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장로와 그의 아버지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믿을 수 없나?”

 

 노인의 말에 청년의 고개가 다시 홱 돌아왔다. 정곡을 찔린 탓이었다. 전사는 계속 말을 이었다.

 

 “네 아버지는 너무 단순했지. 병사로선 제격이지만 전사로선 실격이었어. 하지만 그 용명만큼은 그 어떤 전사도 따라잡기 힘들었다.”

 

 전사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왕의 정예병.”

 

 청년이 침을 꿀꺽 삼키며 전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전사는 눈을 감으며 말했다.

 

 “나처럼 죽고 싶나?”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전장에서 기어 나와, 우연히 들른 친구의 집에서 죽는 것이?”
 “전사의 죽음입니다.”
 “네 아버지도 그렇게 죽을 수 있었지. 지금은 양이나 치지만.”
 “바보 같은 짓이었습니다.”
 “과연 그럴까. 내가 그에게 명령했다. 다시는 전장에 나오지 말라고. 그는 용명에 비해 너무 평범했으니까. 그 용명을 끝까지 끌어안았다면, 네가 지금 이 자리에 있을 것 같나?”

 

 청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사가 화제를 돌렸다.

 

 “네 아비의 검은 어떻게 되었나?”
 “베개 밑에 항상 넣어두십니다. 전 건드려보지도 못했어요.”
 “아깝군. 상당히 멋진 검인데.”

 

 전사가 혀를 차자 청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사는 잠시 말이 없었다. 청년이 두 번째로 등 뒤를 돌아볼 때,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내 검을 가져가라.”

 

 청년은 깜짝 놀라 전사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천천히 침대 아래로 향했다. 가슴팍이 깊게 베이긴 했지만 다른 부분은 멀쩡한 사슬갑옷과 아직 날이 죽지 않은 강철 검 한 자루.

 

 “도둑처럼 무덤에서 훔쳐 가느니 내 허락을 받고 가져가라. 네 아버지는 짜증부터 내겠지만, 내가 불허한 건 네 아비의 출정뿐이다. 네 손에 잡히는 것을 모두 쥐고 황금과 함께 가라.”
 “왜 제겐 출정을 허락하시는 겁니까?”

 

 전사는 웃어버렸다.

 

 

 

*
 “그만.”

 

 엘의 말이었다. 도끼 대신 검을 뽑은 빌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나뭇가지 위의 파란 눈동자를 보며 웃었다.

 

 “안 도망갔나.”
 “제정신을 찾은 것 같군요.”

 

 엘은 빌의 말을 무시했다. 하지만 빌은 엘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의 앞에는 귀신늑대가 있다. 도끼를 입에 문 채 쓰러진. 빌이 질문했다.

 

 “방해할 건가?”
 “당연히.”

 

 엘은 결연히 답했다. 빌은 코웃음을 쳤다.

 

 “전쟁이 즐거웠나 보군.”

 

 엘의 표정이 굳어버렸다. 난생 처음 겪는 전쟁에서 그녀의 동족들은 보금자리를 잃었다. 죽은 자의 왕이 그 권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유쾌할 리가 있겠는가. 피눈물을 흘려도 부족하다. 아랫입술을 깨문 엘을 바라보던 빌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희는 멍청하지 않아.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서 숲 밖으로 재산을 빼냈겠지. 나라도 그래.”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죠?”
 “지금쯤 개척민들이 네 양들을 찾아냈을 거다.”

 

 엘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빌은 검을 잡지 않은 왼손으로 허리춤에서 신호탄을 꺼내들었다.

 

 “택하라. 귀신늑대냐, 아니면 일족의 미래냐? 시간이 없다. 잠시 뒤엔 살아 걷지 못할 테니까.”

 

 엘은 잠시 망설였다. 그녀는 셀레스테에게 지켜야 할 의리랄 것이 별로 없었다. 그녀가 이끄는 늑대들과의 협력도 익인들에겐 상당히 예외적인 상황이었다. 손발이 맞지 않을 정도로. 하지만 엘은 선뜻 셀레스테를 버린다는 선택지를 취하지 못했다. 그녀는 분노했다. 빌은 그녀에게 도끼를 휘두른 불한당이다. 셀레스테는 그녀를 도왔다. 어쨌든 빌의 뜻대로 하긴 싫었다. 커다란 날개가 양쪽으로 활짝 펼쳐졌다.

 

 “시간이 없는 건 그쪽도 마찬가지 같군요. 해봐요. 그깟 폭죽 따윈 기꺼이 막아드리죠.”

 

 빌은 못마땅하다는 듯이 이를 딱 부딪쳤다. 엘의 지적은 사실이었다. 빌도 시간이 없다. 앞에는 셀레스테, 뒤에는 죽은 자의 왕이다. 셀레스테가 조금이라도 기운을 차린다면 빌은 난감한 지경에 빠진다. 있는대로 허세를 떨지만, 실은 거세게 뿜어지는 그녀의 숨결 하나하나에 털이 쭈뼛 서는 판이다. 엘이 셀레스테를 택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당혹감이 더했다. 빌은 투덜거리듯 말했다.

 

 “그깟 것도 인연이라고…….”

 

 셀레스테의 목구멍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녀는 빌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눈물, 콧물, 침 범벅이 된 노인의 얼굴이다. 그 노인은 입술만 움직여 뭔가를 읊고 있었다. 셀레스테는 아래턱과 몸 곳곳의 격통 속에서 그 움직임을 읽어보았다.

 

 죽은 자의 왕이여.

 

 내 몸뚱이의 왕이여.

 

 내가 죽인 이들의 왕이여.

 

 빌은 셀레스테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내 아들의 왕이여.

 

 빌은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
 빌은 살아 돌아왔다.

 

 거지처럼 비척비척 걸었지만, 그 무시무시한 도끼도 잃어버렸지만, 그 좋은 보검을 지팡이처럼 썼지만 살았다. 죽은 자의 왕이 미친 듯이 후려치는 공간에서. 그 순간 락토 개척촌에선 하늘을 찌를 함성이 터져 나왔다. 총병도, 창병도, 개척민도 모두 환호했다. 그것은 사지에서 살아 돌아온 이를 맞는 원시적인 기쁨이었다. 애꿎은 하늘을 향해 총탄이 펑펑 날아다녔고, 창과 깃발들이 사람들의 머리 위에서 춤을 추었다.

 

 하지만 빌은 그 환성에 제대로 답해주지 못했다. 게드 장로와 몇몇 고참병들만이 그의 몸 상태를 알아채곤 성문을 박차고 황급히 달려갔다. 뒤이어 병사들과 개척민들이 달렸다.

 

 빌은 그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졸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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