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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소설과 청소년문학 - (1) 한국 청소년문학의 본질과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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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소설과 청소년문학>은 총 4주에 걸쳐 기고될 예정이며, 각 글의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한국 청소년문학의 본질과 한계

  2) 라이트노블은 청소년소설이 될 수 있는가?

  3) 한국의 청소년소설은 라이트노블과 교류가 가능한가?

  4) 경소설 필드의 확장을 위하여

 

 

  서점에 가면 어렵지 않게 ‘아동/청소년문학’ 코너가 존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마 그 코너에 가서 책을 뒤적거려본 경험이 있는 분들은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아는 청소년문고, 청소년소설들도 여기에 들어가고 상당수의 판타지 소설도 이쪽에서 출간된 작품이 많습니다. 그리고 아동/청소년 문고 소설로 조앤 롤링 여사의 <해리포터>도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서점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청소년소설’들과 <해리포터>에는 아주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청소년문학’이라는 개념의 탄생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 차이점이 청소년소설과 ‘라이트노블’이라는 레이블과의 공통점으로도 이어진다는 점입니다.

  청소년소설과 <해리포터> 사이의 중요한 차이는 바로 구매층입니다. 대다수의 청소년소설은 부모가 학생들에게 권하기 위해 사지만, <해리포터>는 학생들이 부모께 사달라고 부탁합니다. 라이트노블도 마찬가지로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작품을 선택해 구매합니다. 출판문화사상 학생들이 직접 소설을 선택하여 구매하는 것은 할리퀸 문고 이후 실로 오랜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게다가 할리퀸이 단단한 로맨스 장르씬 안에서의 작가적 역량에 의존했던 것과는 다르게, 라이트노블 시장은 출판계의 전반적인 상황, 문화 트렌드와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는 경소설필드 뿐만이 아니라 아동문학이나 청소년문학에서도 반드시 다뤄야하는 문제입니다. 청소년소설과 라이트노블은 중요한 몇 가지 접점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우리가 중고등학교에서 지겹도록 배우는 교양청소년문학의 특징에 대해 다각도로 살펴보고 라이트노블과 청소년소설 사이의 교류가능성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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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부모님이 사주시는 경우는 아마도

극히 드문 예외중의 예외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하지만 서점에서 지르신 분들은 무수할 거라 확신합니다.

 

 

  1. 청소년문학이란 무엇인가?

  청소년문학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동문학’에서 파생됐다고 볼 수 있기도 하고, 교양소설bildungsroman에서 파생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자는 영국과 프랑스에서, 후자는 독일에서 발전했습니다.

  청소년소설이 아동문학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르네상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성에 의한 성찰 개념이 소설에 들어오는 16세기 이후로 소설은 아이들이 읽기에 너무 어렵고 현실적인 것들을 다루기 시작했습니다. 즉 ‘인간’과 ‘계몽’이라는 것이 문학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에 따르면 ‘계몽’의 개념과 ‘어린이’의 개념은 거의 동시대에 태어났다고 합니다. 왜냐면 ‘계몽되지 않은’ 존재가 바로 어린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근대 이성은 어린이를 ‘무지의 존재’로 간주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런 ‘무지의 존재’를 윤리적으로 계몽시키기 위해 태어난 문학장르가 바로 ‘아동문학’입니다. 즉, 아동문학이라는 개념은 그 자체가 이미 미적 개념을 배제한 상태에서 생성된 ‘교육학적 개념’입니다.

 

  이와 더불어 약 120년쯤 전부터 ‘교조적 아동문학’에 반하는 움직임이 일어나는데, 그것 역시 ‘아이는 이성에 물들지 않았기 때문에 상상력이 더 강력하게 작용한다’는 발상에서 시작한 상상력의 ‘어린이문학’입니다. 프랑스의 문예사가였던 폴 아자르는 따라서 “아이들이 상상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이야기책이 좋은 어린이책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이 상상력의 미학적 특성을 밝히고 어른들이 즐길 수 있는 영역까지 끌어올린 장본인이 저 유명한 존 로널드 류얼 톨킨입니다. 여기서 발전하면 판타지문학의 기원까지 언급할 수 있으나, 그것은 2),3)장에서 다루겠습니다. 이는 독일의 교양소설 전통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2. 아동/청소년문학의 본질과 한계

  ‘교조적 아동문학’이든 ‘상상력의 어린이문학’이든 아동문학은 애초에 장르적 개념이 아니라 교육학적 개념으로 탄생한 분야입니다. 따라서 작품의 ‘가독수준’이 존재하지만 작품의 테마나 소설의 내적 형식에 있어서 뚜렷한 기준근거가 없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청소년문학’이라는 것은 이 아동문학에 기반하여 ‘십대 청소년이 읽기 좋은 작품’을 선별하여 만든 인덱스의 확장판에 불과합니다. 어차피 ‘도서의 인덱스’라는 것은 수요자와 공급자의 편의에 의해서 나누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작품을 감상하는 데 있어서 사용할 수 있는 가이드라인은 ‘이 책을 읽고 어떤 것을 깨달았다’라는 교육학적 결론밖에 남지 않습니다. 그리고 대다수의 아동/청소년소설의 해설에는 이 작품 감상을 통해서 무엇을 깨달아야한다는 결론이 첨부됩니다.

 

  이것이 아동/청소년문학의 시장이 가장 큰 비율을 점유하고 있고, 힘이 있는 결정적인 이유가 됩니다. 책은 ‘교육적 이유’로 권장되기 때문에 책을 구매하는 사람은 ‘독자 본인’이 아니라 독자들의 ‘학부모’ 혹은 ‘교사’들이 됩니다. 따라서 작품의 판매를 가르는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하는 것은 ‘좋은 작품’이나 ‘재밌는 작품’이 아니라, ‘좋은 교훈을 주는 작품’이었다는 거죠. 상당히 오랫동안 아동문학시장은 그렇게 흘러갔고, 수요층은 학부모들에게 맞춰져 교조적인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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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유럽에서는 100년도 넘게 전부터

교훈적 아동문학이 가지고 있는 맹점에 대해서 깊은 논의가 있었습니다.

2000년 이후 한국에서는 이런 논의가 아동문학쪽에서 서서히 오가고 있습니다.

'교조적 아동문학'을 본격적으로 비판한 이 책은

아동문학이론의 초석을 다져놓았다고 평가받습니다. 

 

 

  3. 해리포터의 직격탄과 '라노베'의 국내 상륙

  그런 아동/청소년문학 시장이 2000년을 기점으로 엄청난 지각변동을 맞이하게 됩니다. 영화화되는 <해리포터>에 의해서 국내 아동문학 시장이 초토화된 것입니다. <해리포터>나 <타라 덩컨> 같은 작품들에는 어떤 윤리적이고 교훈적인 내용이 거의 강요되지 않습니다.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의 옵션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학생들, 혹은 아이들의 ‘요구’에 의해서 해리포터는 엄청난 환호를 받기 시작합니다. ‘독자’가 ‘구매자’를 누르는 현상이 목격된 것입니다.

<해리포터>의 등장으로, 국내의 아동/청소년문학계는 상당한 반성에 들어갔습니다. 이미 유럽과 일본에서는 100년전에 끝난 ‘교조적 아동문학의 문제점’이 한국의 출판시장의 문제와 맞닿으면서 화두로 떠오른 것입니다. 즉 작품을 사는 ‘구매자’가 아니라 읽는 ‘독자’의 관점을 새로이 보게 된 것입니다. 아동문학계는 ‘교조적인 것’뿐만이 아니라 아이들의 상상력과 유희에 도움이 되고, 즐길수 있는, 그러면서도 작품성이 있는 작품에 주목하기 시작했고, 새로운 연구가 시작됐습니다. (톨킨에 대한 연구가 아동문학 전공자들 사이에서 활발히 전개되기 시작한건 그러므로 우연이 아닙니다.)

 

  최근 10년 사이에 아동/청소년문학시장에서 이런 ‘청소년의 독서에 초점을 맞춘’ 작품들이 출간되기에 이릅니다. 여기에는 수준 높은 판타지소설이 대거 포함되어 있기도 한데, 이에 대한 이야기는 차후의 칼럼에서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에는 현재 아이들의 부모가 되는 세대가 읽었던 ABE문고와 ACE문고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다는 세대적 아이러니가 숨어있습니다.) 현재 아동/청소년문학이라는 레이블을 달고 출간되는 작품들 속에는 교조적인 내용보다는 아동/청소년들이 스스로 즐길 수 있고 그 안에서 독자가 의미를 찾아가는 작품들이 끝없이 번역소개되고 있습니다. 이런 ‘교조성’과 ‘유희성’의 역전관계는 교육학에 기반을 두고 생성된 아동문학의 특수성에 기인한 것이긴 하지만 현재 한국의 출판상황에서 판타지소설이 청소년시장에서 등장하고 있다는 것은 상당한 시사점을 던져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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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히 '십대를 위한 호주판 백년의 고독'이라고 불릴 수 있는

소냐 하트넷의 <목요일의 아이>는 완전무결한 신화적 판타지이며,

마술적 사실주의와 청소년 소설의 접점에서 빛을 발하는 걸작입니다.

현재 아동문학이 '판타지'같은 장르소설과 경계가 흐려지고 있다는 결정적 증거는

이 작품이 국내에서 '출간됐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청소년소설의 특징은 구매층과 독자층이 구분돼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작품의 판매량은 독자에 의해 결정되게 마련입니다. 국내 청소년문학의 시장이 ‘부모들의 교훈성’ 그리고 영미 신비평적인 '작품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동안, 시장은 스스로의 움직임에 의해 청소년들이 원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시장을 만들어내기에 이르렀습니다.

  그것이 바로 라이트노블 시장입니다.

 

 

 

* 아동문학에서 등장하는 ‘판타지소설’과 독자들에 의해 탄생한 ‘라이트노블’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2)장에서 계속 됩니다.

Writer

현서/푸른꽃

현서/푸른꽃

과도한 상상력은 비참한 최후를 예방한다!

comment (5)

도스까라아스 11.06.22. 01:29
음.. 곰곰히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는군요.

청소년 문학은 크게 두 갈래로 발전한다고 보면 되는 건가요?

1) 교조적 아동문학 : 르네 상스 이후 '어린이'라는 개념이 행성 되는 데, 이 개념은 a) 미성숙하고 b) 순진하며 c) 덜 발달된 상태로 아동을 간주하고 있으며, '어른'에 비해 열등함을 전제로 타자화 된 개념이다. 교조적 아동문학은 이 개념을 바탕에 두어, 청소년을 어린이에서 어른으로 계몽시키고 교육시키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며, 이를 달성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기능을 수행하는 문학이다. 따라서 그 내용은 특정한 도덕적-윤리적 도그마에 의해 제한된다.

2) 상상력의 아동문학 : 독일 낭만주의의 영향으로 인해 형성된 인간관인, 인간의 자연스러운 모습과 의지를 그대로 표현하는 것을 바탕에 두고, 아동을 a) 완전하며 b) 인위적이지 않고 c) 인간 본래의 상태를 구현한 것으로 간주하여, 그 근간에 상상력을 두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상상력의 아동문학은 인간 본래의 상상력을 발휘하도록 유도하며, 이를 향유하는 독자인 아동과 청소년이 텍스트를 자기목적적으로 선택하고, 즐기고, 향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문학이다. 따라서 그 내용이 어떠한 도그마에 의해 제한되어서는 안된다.

전자는 수단, 타자에 의해 선택되는 텍스트로 본다면 후자는 목적, 주체에 의해 선택하는 텍스트로 볼 수 있겠군요. 그리고 이 두 개념이 국내에 적용 될 때, 현실태로 제시할 수 있는 것이 예전에는 할리퀸이 있었고 최근에는 라이트노벨이라는 것이군요.

이런 맥락에서 라이트노벨은 '노벨'이 아니라고 하신 예전 칼럼의 주장을 이해해도 괜찮을까요? '노벨'을 전자에 더 가까운 개념으로 보았을 때요.

이 글을 읽으니 미국과 일본 SF계에 활발히 출판되던 쥬브나일 SF를 상기하게 됩니다. 미국에서는 하인라인이 활발하게 집필하였지요. 저도 몇 편 일본의 쥬브나일 SF를 읽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라이트노벨의 원조격이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이 서브장르는 위의 개념이 혼재되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분명 어려운 과학 지식을 더 쉽고 재미있게 접하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집필이 되었었고, 제가 알기로는 적어도 미국의 경우는 여전히 그런 스탠스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일본의 경우 현재 쥬브나일 SF는 거의 사라졌습니다. 그 자리를 라이트노벨이 대신하고 있지요.

후자에 가까운 개념으로서의 쥬브나일 SF는 히라이 카즈마사에서 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더군요. 전학생 물을 쓰던 마유무라 타쿠의 작품은 두 개념의 중간에 위치하는 작품으로 직접 읽어보았는데 히라이 카즈마사의 작품은 쥬브나일 SF만 읽어보지 않았습니다.

만화 쪽 원작자로 활동하던 히라이 카즈마사가 자신의 SF나 쥬브나일 SF에서 만화 특유의 '재미'와 '리듬'을 도입하고 특히 쥬브나일 SF에서 '超革命的中学生集団' 이라는 작품을 '하챠하챠 SF(개그 SF)'로 규정하여 제시했는데 이 작품을 라이트노벨의 시초로 보는 이들도 있더군요. 설정이 외계인에게 초능력을 받은 6명의 중학생이 서로 적으로 갈라지고 동료가 되면서 싸운다는 슬랩스틱 개그 SF입니다. 지금은 중진 작가들이 된 SF 동호회 멤버들이 그대로 캐릭터화 해서 등장하는 당시로는 보기 드문 시도였다는군요.

http://www.geocities.jp/nene_yasuko/jpg/chokaku_s.jpg

위의 주소는 표지인데 표지부터가 보통이 아니지요. 아쉽지만 히라이 카즈마사의 옛날 글은 구하기가 어려워 위의 작품도 텍스트를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이 작품 이후로 무언가 정보를 전달하고 사회 비판을 하고 커다란 메시지를 주려고 하던 일본 SF계에 오직 독자의 재미를 추구하고 SF의 논리적 과학적 근거 보다는 이를 소도구로 이용해 즐거움을 주려는 시도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만화 계에서도 이에 영향을 받아 '우루세이 야츠라'가 생겨났고요. 이러한 움직임과 비교해서 생각해보니 여러가지로 개인적으로 짚히는 부분이 많습니다.

계속되는 칼럼 연재를 기대하겠습니다. 건필을 기원합니다!
현서/푸른꽃
현서/푸른꽃 작성자 11.06.22. 21:29
청소년문학의 갈래는 제가 임의로 나눈 것인데, 아동/청소년문학의 발전 과정 자체가 1)에서 2)로 변화하고 다시 3)으로 이행되었기에, 이 세가지가 현재 모두 공존하고 있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2)번 같은 경우 낭만주의의 영향이 일정부분 차지한 것은 맞지만, 외적인 요소가 많이 담겨있기도 합니다. 후기낭만주의 운동은 유럽 각지에서 다른 방식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로 묶기는 매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라이트노벨이 '노벨'이 아니라는 것은 동양과 서양의 소설 발전 단계가 다른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번역'의 문제로 노벨과 소설이 1:1 대응 관계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려 했던 것이므로, 이 글과는 큰 관련이 없다고 봅니다.

쥬브네일 판타지에 대한 이야기는 2장에서 자세히 다룰거니깐 주말까지 기다려주세요. 키즈문학과 쥬브네일 판타지/SF가 가지고 있는 특징이 라이트노블과 장르소설에 어떻게 겹쳐서 나타나는지가 2장의 테마입니다.

쥬브네일 노블, 즉 청소년(십대 초중반)을 대상으로한 소설의 특징은 '성장소설'이라는 큰 테마가 잠재돼있는 테마적 경향이 강합니다. 또한 어려운 지식을 쉽게 풀어놓는 기술적 특징도 같이 가집니다. 하지만, 먼저 알아둬야할 것은 쥬느베일 노블이라는 용어 역시 '어른들에 의해서 교육적 목적'으로 사회학적 카테고리에의해 묶인 장르라는 것입니다. 내적 형식으로 단단한 클리셰가 형성된 장르는 아마도 교양소설Bildungsroman이 아닐까 싶은데, 교양소설의 역사는 중세부터 시작되는 관계로, 유럽의 근대와 중세 사이의 '아이와 어른'의 개념 변화를 살펴봐야합니다. 이 이야기는 포스트모더니즘과 모더니티를 비교하는 미학적 차원의 문제와 연루되므로 여기선 자세히 다루지 않았습니다.
Dona 11.06.26. 11:08
잘 읽었슴다. 볼 때마다 지식량이 늘어나는 것 같아 기쁘지 말입니다.
아동문학의 관점에서 라이트노벨을 보다니, 생각도 못했어요.
현서/푸른꽃
현서/푸른꽃 작성자 Dona 11.06.26. 21:49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전공이 전공이다보니, 전공의 시선쪽에 많이 잡혀져서 이쪽으로 보게되서 정작 라이트노블 읽는 분들께 신선한 면이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
돌사육사 11.06.30. 22:50
잘 읽었습니다.
절충적인 입장에서 라이트노블이 교육적인(교조적인이 아니라) 측면을 가미한다면 청소년소설의 역할을 분담할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해봅니다. 예를들어 전문지식이 가미된 만화들처럼 말입니다. 물론 만화와는 그 여건이 다르긴 합니다만 그래도 어느정도 참조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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