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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소설과 청소년문학 - (2) 청소년소설과 장르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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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어린이, 청소년

일전부터 제가 꾸준히 제기해온 주장 중 하나는 한국 청소년 소설은 굉장히 오랜 기간동안에 '진공상태'에 놓여져 있었다는 가설이었습니다. 청소년소설은 일본이든 유럽이든 아동소설에서 확장된 개념으로 발전했던 교육학적 용어였습니다. 또한 이 '교육학적'이라는 표현은 그것이 '문학적 교육'이냐 '도덕적 교육이냐' 혹은 '어린이다운 환상적 상상력의 자유로운 표현이냐'에 따라서 기획방향이 바뀌고, 청소년소설의 성격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이었습니다.


전 칼럼에서 언급했다시피 일본의 애니메이션의 경우, 미야자와 겐지라는 상징이 만들어놓은 성과들에 의해서 일본의 아동/청소년 소설은 근본적으로 교조성과 환상성을 동시에 안고 시작했습니다. 이 영향들은 1970년대를 거치면서 일본 애니메이션에서도 산발적으로 영향을 드러낸다고도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한국의 경우는 어떨까요? 이 이야기를 하려면 먼저 한국에서 '어린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어린이 소설' 혹은 아동소설이라는 것이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지고 발전됐는지를 알아봐야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시다시피 '어린이'라는 표현은 조선시대에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표현이었고, 이것을 우리가 아는 용어로 바꾼 인물이 소파 방정환입니다. 방정환은 국내의 장르소설의 역사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지고, 아동문학사에서는 가장 거대한, 일본의 미야자와 겐지에 비견되는 인물로 형상화됩니다. 실제로 소파 방정화는 중요한 해외의 작품들을 다수 번역하여 소개하였고, 스스로도 장르소설에 포함되는 작품을 창작했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방정환.jpg 

방정환이 출간한 <어린이>는 국내 최초의 아동 잡지로서 유명하고,

우리가 아는 다수의 장르소설들이 이 잡지를 통해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방정환에 의해 시작된 아동문학의 흐름이 청소년소설까지 뻗쳐 훌륭한 청소년/아동문학 필드가 형성되었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상당히 회의적입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방정환이 어린이에게 읽어주는 문학에 대한 근대적 관념의 오류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어린이'라는 개념은 '어리다' 즉, '어리석다'라는 조선시대 단어에서 확장하여 만든 개념입니다. 이 말 자체에서 '어린이'라는 단어는 '덜 성숙하다'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는 돌려말하자면 '성숙해야한다'는 필연적 명제를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어린이라는 단어는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이것은 철저히 근대 서구식의 사유방식에서 출발한 말이고, 이렇게 만들어진 어린이라는 단어는 계몽이 필요한 존재로 각인됩니다. 물론, 방정환이 생존하던 당대에는 근대적 사유방식이 조선의 지식인 사이에서 절실하게 필요하던 시점이었기 때문에, 그의 생각과 사고가 틀리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만들어낸 '어린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철저히 근대적이었으며, 계몽주의 시대의 어른들이 어린이들을 바라보는 사고관과 똑같은 방식을 고수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방정환은 근대적 사유방식에 매몰될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어린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로운 상상력'이며, 교조성에 앞서 이 상상력이 선행되어야한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이는 '가르쳐야하는, 어른이 뭔가를 알려줘야하는' 존재라는 점은 근본적으로 변함이 없었습니다.

이를 방증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방정환이 '어린이를 위해서만 소설작업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어른과 아이를 나누지 않고 '인간'에 초점을 맞췄던 미야자와 겐지의 입장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입장입니다.


따라서, 아동문학의 향유자는 어린이일지라도 그것을 지도하는 계층은 철저히 '계몽된 자'로 한정됩니다. 방정환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19세기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폴 아자르가 그렇게도 싫어했던 상황이 20세기 한국에서는 100년에 걸쳐서 일어납니다. 어린이는 '덜 성숙한 존재','성숙해야하만 하는 존재'로서 지성인 혹은 계몽자의 인도를 받아서 무언가를 계발해야한다는 전제가 들어가는 겁니다. 거기다 방정환은 아자르의 입장까지 흡수하여 어린이는 '상상력이 풍부한 존재', 그리고 때묻지 않은 순수하고 고결한 존재로서의 당위성을 부여받게 됩니다. 이 두가지가 겹쳐지면서 아동문학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이상적인 문학형식'이라는 오해를 받기에 충분한 상황으로 몰아집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동문학을 창작하고 연구하는 무게추는 당시가 그랬듯이, '문학가'들에게로 넘어가게 됩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자면, 한국의 아동문학사는 철저하게 한국의 근대문학사의 부수적 성격으로만 보조되어 연구됐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연장선에서 창작되고 출간됐습니다. 이것은 아동소설이나 청소년소설을 전문적으로 창작하고 출간하는 집단이 문학소설 출간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거나, 혹은 철저하게 고전에 입각한 출간을 기획했던 집단에 의해서 주도됐다는 점에서 거의 명백합니다.



  문학소설의 청소년소설 주도

한국의 아동소설과 청소년소설은 그들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존재기때문에 누군가에 의해서 권장되고 추천받아야하는 문학이 됩니다. 이는 방정환에 의해서 아동소설이 그나마 확립된 것과는 다르게, 청소년 소설에서는 훨씬 극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해외의 경우, 청소년소설의 개념은 아동소설의 교조성에서 탈피하려는 움직임과 교육학으로서의 독서추천의 연구가 동시에 이루어지면서 복합적으로 발전했습니다. 그래서 유럽의 청소년 소설에는 톨킨의 <호빗>도 들어가지만, 셰익스피어의 <한여름밤의 꿈>도 포함됩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까닭은 일차적으로 유럽의 낭만주의 소설의 근본적 성격에 있기는 하지만, 청소년 소설이 계몽의 역할만 가지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여러군데에서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는 다음에 자세히 다루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국내의 청소년소설은 이런 아동문학의 연구기반이 없는 상태에서 '교과서위주로' 진행됩니다. 완전한 진공상태에서 급조된 인덱스, 교과서 재편위주의 청소년소설은 '청소년'이라는 집단에 대한 고민 없이, 유럽에서 선행된 청소년 소설의 중요한 특징들에 대한 고찰 없이 공교육 기관과 문학전공자들의 결탁 아래 만들어진 '교과서' 위주로 강제 재편됩니다. 한국의 중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린 절대다수의 작품들, 또는 청소년 권장도서에 포함되는 목록들의 99%는 온전한 청소년소설의 범주에서 보기보다는, 문학소설 중에서 '청소년들이 읽기 좋은 소설'로 선정되는 강제적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조세희.jpg   김유정.jpg

대다수 청소년 소설의 대표라고 꼽히는 작품들의 면면을 뜯어보면,

사실 청소년소설이라기 보다는 '청소년이 읽을만한 리얼리즘 소설'이라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포함된 소설은 유럽에서 '청소년 소설'이 가지고 있는, 혹은 '아동소설'이 가지고 있는 특징들의 극히 일부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애초에 대한민국의 20세기 문학사가 근대문학, 리얼리즘 위주로 진행됐기 때문에, 리얼리즘과 거의 정반대의 입장에 있는 아동/청소년 소설들은 조명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물론 극히 이례적인 경우로 정채봉 작가 같은 특이한 경우도 있었지만, 정채봉의 작품들은 그 풍부한 청소년소설적 특성에도 불구하고 그가 '어린이용 동화작가'라는 이유로 문학사에서 배제되는 반대의 상황을 겪게 됩니다.

당연히 리얼리즘 소설 안에서 청소년에게 읽히기 좋은 소설을 골라내다보니, '환상성'이라는 아동 청소년 소설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애초부터 편입이 불가능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 판타지소설이 문학사에 등장하지 않는 가장 중요한 이유중 하나가 저는 여기에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예를들면 완벽한 동양적 판타지인 <용과 용의 대격전>같은 중요한 작품이 교과서에 실리지 못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며, 고전소설로 묶이고 그치는 <구운몽>이나 <홍길동전>이 오히려 청소년들에게 더 매력적으로 끌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의 칼럼에서 저는 청소년소설과 아동소설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가 유년기에 읽었던 소설의 영감이 어른이 되어서도 영향을 주어, 창작에 원천으로 작용하고 새로운 창작을 이끄는 흐름을 만든다고, 일본의 문화를 예로 들어서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애초에, 청소년소설은 진공상태였고, 아동소설은 오로지 아이들만 읽을 수 있다는 (혹은 읽어야한다는) 전제로 시작한 이 작품들은 어른이 되면 거의 재독이 불가능한 상황에 빠지게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때 1990년대에 이르러 우리는 굉장히 주목할만한 하나의 흐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PC통신 소설의 등장과 장르소설

물론 일전에도 무협이라는 장르가 고전적으로 존재하고는 있었지만, 그것이 가지고 있는 특징은 한정적이었습니다. 또한 1990년대 PC통신 이전에 있었던 장르소설들이 청소년들에게 공감을 일으키지 못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등장은 너무나 충격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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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



퇴마록은 근본적으로 리얼리즘에서 벗어난 대중소설이면서, 동시에 무협적 성향이 진하게 녹아있고, 한국의 토속적 성격이 강한 굉장히 재미있는 장르소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청소년부터 장년층까지 엄청나게 넓은 폭의 사랑을 받으며 읽혀졌습니다. (이에 대한 더욱 자세한 이야기는 이 칼럼의 마지막 장에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퇴마록은 여타 대중소설들이 그러하듯이 누군가의 '교육적 목적에 의해'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의 선택의 의해 읽혀'집니다. 그리고 이 퇴마록에 이르러서야 드디어, 유년기에 작품을 읽은 독자가 청년과 장년이 되어서도 다시 읽으며 새로운 상상력을 만들어낼 수 있는 작품이 탄생한 것입니다.


본 칼럼의 마지막 장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퇴마록은 굉장히 라이트노벨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일본적인 라이트노벨과 굉장히 다른 형식입니다. (이 부분은 다음 칼럼에서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상당히 연극적으로 캐릭터라이징된 인물, 준후와 현암이라는 두명의 인물은 각각의 세대가 가지고 있는 고민을 대변하면서, 다양한 층위의 감동과 스타일을 줄 수 있도록 배려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무속인인 준후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청소년이 바라보는 초현실 세계와 삶에 대한 시각과, 삽십대가 넘은 직장인, 퇴마사 현암이 바라보는 초현실 세계의 시각의 충돌과 공감은  '퇴마물'이라는 아주 한국적인 문화 안에서 '판타지'적인 상상력을 발현시킬 수 있는 빈 공간을 마련해둡니다.


아무도 의도하지 않았던 곳에서 아동/청소년 문학이 가진 상상력의 가장 훌륭한 역할이 수행되기 시작한 것 입니다. 십대에 퇴마록에 열광했던 청소년 독자들은 이십대가 넘고 한두번 정도는 퇴마록을 다시 읽습니다. 그리고 처음 읽을 때와 나중에 읽을 때의 상상력의 폭과 즐거움의 재미가 다르다는 것을 찾아냅니다. 이것은 라이트노벨, 혹은 장르소설의 매력이 아니라, J.R.R 톨킨도 지적했던 '상상력이 자라날 여지가 있는 문학작품이 환상소설의 중요한 특징'이라는, 바로 판타지소설과 아동소설의 매력과도 겹쳐있는 부분입니다. 최근에 퇴마록이 재판된 배경에는 많이 팔린 스테디셀러라는 것 이외에도 문화적으로 이 작품의 영향을 받은 '독자군'들의 사회활동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PC통신은 문단처럼 견고하고 권위적이거나 교조적인 팬덤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또한 아이와 어른을 강제로 구분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불특정 다수의, 작품을 읽는 누군가'의 선택에 의해서 작품의 출간이 결정되는 특수한 상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기존의 권위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는 창작의 자유를 보장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태에서 만들어질 수 있는 최대의 성과가 PC통신에서 등장합니다.

바로 판타지소설입니다.


1990년대의 젊은 문화의 중요한 흐름 중 하나는 RPG를 기반으로 한 일본 문화였습니다. 이전 칼럼에서 <로도스도전기>와 용자물 RPG가 가지고 있는 청소년소설과의 접점에 대해서 잠깐 언급을 드렸는데, 이 당시 롤플레잉 게임의 특징은 '성장'이었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청소년소설의 미학적 특성을 함께 안고 가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1990년대 판타지 소설 팬덤은 고전적인 장르판타지 이외에도 게임의 원천이었던 판타지적 설정과 더불어 롤플레잉 게임이 가진 성장코드를 동시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든 판타지소설이 성장소설인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1990년대 한국에서 출간된 대단히 많은 판타지소설은 성장의 테마를 안고 가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작가는 두말할 것도 없이 전민희와 이영도입니다. 


당시의 PC통신 판타지 작가와 독자들은 롤플레잉 게임과 판타지소설, 그리고 개별적인 판타지 신화들을 다양하게 섭취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고, 특히 롤플레잉 게임과 유럽 판타지소설들이 공유하고 있던 '성장'이라는, 교양소설의 가장 중요한 장점을 본능적으로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당시까지도 청소년소설은 진공상태로 남아있고, '교과서에 나오는 청소년 소설'만 있었던 상태였습니다.

당연하게도, 청소년들은 이제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서 '장르소설'을 선택하는 상황이 오고야 말게 된 것입니다.


작가들은 장르적 논쟁이나 문학적 논쟁, 리얼리즘에서 완전히 해방된 상태로 자신의 작품 세계가 가지고 있는 매력에 대해서 온전히 고민하기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SF든 판타지든, 장르를 설정하기 이전에, 한명의 창작자로서, 그것도 20세기에 강요되었던 리얼리즘적인 교조성에서도 한발짝 벗어나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고민'들을 하나둘 꺼내기 시작합니다. 이는 미야자와 겐지가 70년전에 했던 고민과 거의 같은 맥락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등장한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의 판타지소설들은 감히 '걸작'이라고 말해도 손색이 없는 작품들을 연신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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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재발매된 김상현의 장편 소설 <하이어드>는 SF판타지의 장르적 재미를 충분히 가지고 있지만,

트랜서라는 특수한 상황에 처해있는 한 소년의 진한 고민과 성장을 담은 훌륭한 성장소설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2000년을 기점으로 <반지의 제왕>과 <해리포터>의 영화화, 국내에서의 재조명이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르게 겹치면서, 한국 아동/청소년소설이 반성에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장르소설은 '상업소설'이라는 이유로 무시 받아왔습니다. 하지만 감히 이 자리를 빌어서 말씀드리건데, 1990년대 PC통신을 기반으로 생성된 장르소설의 팬덤 필드는 문단에서 만들어내지 못해 진공상태로 남아있던 청소년 소설의 중요한 부분들을 알게 모르게 채워주고 있었습니다. 저 또한 그 증거로서, 지금도 이렇게 경소설회랑에서 칼럼을 쓰고 있는 것 아닐까요?


한국은 문단의 '교조적 선택'에 의해 사실상 진공상태로 비워져 있던 청소년소설의 역할을 '리얼리즘 문단'이 할 수 없었던 바로 그 역할들을 본의아니게 '장르소설', 그것도 자유가 보장되는 PC통신 기반의 장르소설들이 채워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이것은 다른 국가의 청소년소설의 진행과는 조금 다르게, 어른과 아이의 구분조차 없이, '청소년 소설'이라는 타이틀이 걸리기도 전에 '장르소설'이라는 프레임을 차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자면, 한국에서 탄생한 장르소설들은 굉장히 중요한 특징을 가지게 됩니다. '청소년에 의해서 스스로 선택된 최초의 청소년소설은 바로 장르소설이다'라는 명제가 탄생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위에서, 라이트노벨 혹은 경소설이라고 하는 최근의 흐름을, 이 연장선에서 바라보려는 시도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번 칼럼의 테마입니다.



다음 칼럼에서는 그렇다면, 한국 청소년소설로 대표할 수 있는 한국의 '장르소설'들이 지금 여전히 청소년들에게 선택되어 향유되는 국내의 라이트노벨과 어떤 연관을 가지고 있고, 어떤 가능성이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칼럼이 늦어져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__)





Writer

현서/푸른꽃

현서/푸른꽃

과도한 상상력은 비참한 최후를 예방한다!

comment (1)

주절 12.04.03. 03:04
너무나 화가나는 군요.

소설을 써보려다 잘안됐기에 방황하다가, 하필 이런 곳을 들리게 되어 새벽1시 부터 지금 새벽 3시까지 쭉 미친듯이 읽게 만들어버리고 저의 귀중한 시간을 금쪽같이 만들어 버리시다니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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