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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소설은 '노블'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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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의 탄생

  우리가 흔히 ‘라이트노블’이라고 부르는 계열의 레이블에서 가장 흔히 말하는 공통적인 특징으로 ‘엔터테인먼트 소설’ 혹은 ‘비주얼적인 소설’이라는 것을 꼽곤 합니다. 대체적으로 틀린 말이 아니고, 분명히 이 계열 레이블에서 나오는 작품들은 이런 성향을 뚜렷하게 가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성향들은 1980년대 후반부터 열풍적으로 들이닥친 - 또한 나스 키노코 이후로 상당한 인지도를 확보한 - 문고본 라이트노블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오늘은 이 이야기를 잠깐 해볼까 합니다.


  제가 <경소설이란 무엇인가>에서 말씀드렸듯이, ‘노블’이라는 것은 서양에서 발달한 문학장르의 한 갈래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소설(小說)에 대응되는 유럽어가 Novel, Roman, Lai, Fable 등이 있는데, 지역이나 언어권에 따라 다소 다르긴 하지만, 앞의 두 개를 우리는 소설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서양의 문학사를 살펴보면 이 소설이라는 것 - 특히 장편소설 - 은 서사시의 파괴과정과 관련이 있으며 시민사회의 등장과도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즉, 우리가 아는 근대소설이라는 것은 귀족들의 교양와 정서 함양을 위해 창작된, 중세 신학관 아래서 창작된 운문의 이야기가 시민사회로 이행하면서 불특정 다수의 대중을 향하는 이야기로 바뀌는 과정에서 생성된 예술장르라는 것입니다. 근대문학의 핵심인 ‘리얼리티’라는 것은 바로 여기서 생겨납니다. 시민사회는 혁명과 평등, 민족과 파시즘 사이에서 갈등하는 사회였고 경제적 잉여가치와 인권 사이에 가로놓인 ‘귀족도 농노도 아닌’ 혼란의 인물들을 그려내는 이야기에서 시작됐습니다. 이것은 리얼리즘 소설의 극한을 보여준 19세기 러시아 리얼리즘 작가들 -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막심 고리키, 안톤 체호프 - 과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펄프픽션과 소설들 - 찰스 디킨스, D.H 로렌스, P.B 셸리, 마리 셸리, 로버트 브라우닝 등 -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보여줍니다. 양상은 다르지만, 역사적 궤는 시민사회의 탄생과 소설은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미학계나 문학계 등에서 말하는 모든 소설의 미적 형식은 그 안에서 논의됩니다. (포스트모던 소설은 예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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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시대 최대의 스타 찰스 디킨스는

뛰어난 작가이자 뛰어난 편집가였으며, 지금의 '영화배우'에 맞먹는 연예인이었고

(당대에 유명작가가 소설 낭독회 하는 전통은 지금도 유럽에 남아있습니다.)

연재단행본 완결편에 '설정집'과 '부록'을 끼워주는 상술을 혁신적으로 개발한

뛰어난 마케터이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까닭은 1850년대 이후 영국에서 의무교육이 시작되어,

모든 노동자가 책을 읽을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기 때문입니다.



   서양의 근대, 동양의 근대개념

   자, 그런데 이제 여기서부터 문제가 생깁니다. 근대소설(특히 장편소설)이 서양사의 근대화, 시민사회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발전해온 예술양식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과연 동아시아에서도 마찬가지의 ‘역사발전과정과 예술의 상관관계가 있느냐’는 겁니다. 이미 국내의 수많은 문학이론가들과 학자들이 한국의 ‘영정조시대’가 시민사회의 뿌리였으며, 개항기 이전에도 충분히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할 수 있는 단초들이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근대’에 대해서 생각해볼 여지가 있습니다. 서양의 ‘근대개념’(시민사회, 자본주의, 평등과 자유의 가치, 민족을 내세우는 자의식)은 서양사의 역사적 발전과정에서 나온 ‘단 한번의 사건’입니다. 역사의 진행은 보편성이 존재하더라도, 역사적 사건은 일회성을 가지는 특수한 사건입니다. <국문학과 민족 그리고 근대>를 지어 국사학계와 국문학계에서 커다란 이슈를 불러일으킨 강명관 교수는 그러므로 우리가 알고 있는 ‘근대의식’이라는 것은 ‘서양사의 근대의식’이며, 우리의 역사, 우리의 문화와는 큰 관련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즉, 우리가 말하는 ‘근대 시민사회’라는 것은 ‘보편적 근대사’가 아니라 ‘서양에서 발생한 일회적인 이벤트의 근대사’이며, 동아시아의 ‘근대’라는 것은 그것과 전혀 관련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저자는 실학운동, 한시운동, 시조 등 다양한 문화에서 그 근거를 찾고 있습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동아시아에 시민사회는 애초에 없었으며, 자본의 개념도 서양과 다르게 발전했다’는 것이 요지인데요, 이 글에서는 바로 ‘경소설’과 관련하여 동아시아의 소설에 대해서 이야기하려 합니다. 소설이라는 것이 ‘근대 시민사회’와 결부된 장르라고 한다면, 지금의 우리 소설도 당연히 그런 시민사회와 근대에 연결되어 있어야하는데, 강명관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그딴 거 없다’는 거죠. 그러면 소설에 대한 논의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제가 이 글에서 말하고자하는 요지는 일본에서 등장하여 한국에서 활발히 읽히는 ‘경소설’이라는 것은 서구적 근대의 ‘노블적 바탕’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고대 동아시아의 ‘소설전통’의 그것에 아주 충실한 장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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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학계에서도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근대'가 서양의 것이며 동양의 근대가 우리의 통념과 다르다는 것은,

17세기 일본 활자인쇄가 유럽을 능가했다는 점에서 분명합니다. 

왜, 일본만 유독 아시아에서 인쇄출판업이 성행했는지를

아주 설득력있게 보여주고 있는 부분도 있습니다.



  동아시아의 ‘소설’ 장르

   애초에 문화가 다르고 예술 형식과 미적 특성이 다르게 발달한 동서양의 문화는 소설도 당연히 다른 기점에서 출발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동양에서 소설의 기원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많이 하시는데, 이에 대해서는 분명한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작은 이야기’, 즉 소설(小說)이라는 단어는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 하편에 ‘이야기할 수 없는 대도(大道)’에 대비되는 의미로서 소설(小說)을 이야기합니다.(말할 수 있고 도에서 먼 의미로) 이 개념을 이야기에 적용하여 바꾸어놓은 사람은 바로 장자(莊子)입니다. 장자가 사용한 ‘우언(寓言 - 이것은 우화寓話와는 아주 다릅니다)에는 ’도‘란 것은 말로써는 전달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다른 이야기에 가탁하거나 빗대어 자신의 도를 말하는 방법이 담겨있습니다. <장자(莊子)>의 포정해우(庖丁解牛)는 이에 대한 대표적인 고사로 남아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우리는 말하고 싶은 것들을 사물에 빗대어 표현하는 것이 우리가 말하고자하는 바를 더 가깝게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인데, 여기서 생겨난 장르가 학교에서 배운 ’가전체‘라는 것입니다.


어쨌든 ‘도’, 즉 경서(經書)에 반대되는 의미로 시작한 ‘소설’이기 때문에 초기에 소설은 역사서와 수필, 이야기가 담긴 책을 모두 포괄했습니다. (시는 ‘시경’에서 논의되어 경서로 분류되었습니다. 이와 다른 개념으로 악(樂)과 악부(樂府)가 있는데 일단 여기서는 제외하겠습니다.) 그리고 한나라 시대에 이르러, 우리가 아는 ‘꾸며진 이야기’라는 개념으로 ‘소설’이라는 말이 사용됨을 알 수 있습니다.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동아시아 소설은 - 작가주의적 관점까지 포함하여 -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알맞은 커뮤니케이션 방법으로 ‘잡담을 늘어놓는’ 이야기 형식으로 발전합니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것은 ‘독자를 상정한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점입니다. 물론 독자의 상정은 유럽의 소설사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만, 동아시아의 소설은 이미 그 태생부터가 ‘팬덤’을 염두한 발전이라는 점, ‘성찰이 아니라 잡담’이 소설의 근본이라는 점에서 근대소설과는 엄청나게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장자는 근본적으로 잡담에서 도를 캐내는 방식을 우언으로 선호합니다. (박상륭 작가의 최근작 <잡설품>은 그런 면에서 굉장히 소설의 심장을 파고들고 있습니다.) 이는 나중에 선문답으로도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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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는 노자의 '소설' 개념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진 않았지만,

'우언'이라는 것을 통해 쓰잘데없는 잡설로 '도'에 이르는 길을 밝히려 합니다.

이는 '가전'과 '전기' '소설'에 모두 큰 영향을 끼쳤고

동양의 소설의 개념이 서양과 아주 다른 전통에서 시작한다는 단초를 보여줍니다.



  한국의 몽유록과 조선소설

   위에서 말씀드린 ‘팬덤’의 대표적인 장르는 바로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장르소설’인 몽유록계 소설입니다. 이미 몽유록에 대한 연구는 상당히 진척되어 시중에도 책들이 많이 나와있으므로, 관심있는 분은 읽어보시면 재미있을 겁니다. 몽유록이란 쉽게 말해서 성균관 대학생이 관직을 받지 못하고 한량으로 지내던 어느 날 꿈을 꾸는데, 그 꿈에서 해괴한 일들을 겪고 깨고 나니 꿈이더라, 그런 이야기형식을 가진 장르입니다. <구운몽>이나 <홍루몽>같은 몽자소설로 가는 가교적인 장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몽유록계 소설은 꿈에 가탁해 자신의 주장을 늘어놓는 작품이라고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조선초의 몽유록들에서는 그런 경향이 강합니다. 굉장히 사회비판적이죠. 왜냐면 저자들이 모두 힘들게 성균관에 합격했는데도, 관직으로 나아가지 못한 상태니까요. (혹은 몇몇 이유로 관직에서 하야한 경우도 해당됩니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저는 동아시아의 소설 전통의 특성으로 ‘팬덤의 상정’을 이야기했습니다. 네, 쉽게 말하자면 몽유록은 근본적으로 자기와 같은 ‘성균관 학생’ 혹은 ‘진사 이하’의 유생들이 돌려읽으면서 짓던 장르소설입니다. 꿈속에서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당대의 관직상황, 역사적 맥락에 대한 우언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일종의 ‘우언으로 된 신문고 칼럼’정도의 방법으로 몽유록을 창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몽유록이 굉장한 사회비판적 소설로 읽을 수 있는 까닭은 그 작품이 온전히 ‘진사급 공무원 이상’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어려운 역사적,우언적 알레고리가 담겨있기 때문이죠. 서양의 풍자소설과 가장 비슷한 맥락으로 발전한 장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분명한 점은 이 작품이 ‘작가주의의 성찰과 사상’이 담겨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팬덤의 의식을 함양시키는 일종의 대자보의 역할을 이야기로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위에서 말씀드렸지만, 동양에서 소설은 역사서/칼럼/논설/철학서 등과 거의 경계가 없이 시작했습니다.

이런 초기 몽유록계소설에 파격을 준 작가가 바로 신광한입니다. 신광한은 그의 대표적인 소설집 <기재기이>에서 이런 사회비판과 호소문에 가까운 테마를 싸그리 제거하고,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환상성과 문과양반이 가지고 있는 지적 유희를 테마로 작품을 창작합니다. 그 백미에 있는 작품은 바로 <<안빙몽유록>>입니다. 안빙몽유록에서 획기적인 점은 크게 세가지입니다.


1. 꽃에 가탁했으나, 그 사상적 테마보다는 소설적 - 동양적 의미에서 - 엔터테인먼트에 작풍이 집중됐다는 점,

2. 꽃들이 성격별로 로리, 누님, 데레 등의 여성캐릭터로 변환되어 그들과 대작(對酌)했다는 점,

3. 모든 인물과 대사, 상황이 하나의 지적 유희로 점철되었다는 점,

입니다.


1.이 바로 이 글에서 ‘경소설’이 ‘노블’보다 ‘소설’에 가깝다고 말하는 일차적 근거가 될 것입니다. 이 작품은 역사적 교훈이 베이스로 깔려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작품 전체를 장악하지는 않습니다. 이 작품에서 모든 묘사와 표현이 집중되는 것은 각 캐릭터들의 성격과 그녀들이 짓는 시문들이 각 꽃들과 얼마나 오묘하게 뉘앙스가 맞는지, 그리고 주인공 안빙이 그 소녀들 사이에서 어떤 감정을 가지는지 등을 추적합니다. 이는 <기재기이>에 수록된 본격 장르로맨스라고 할 수 있는 <<하생기우전>>에서 상당히 극대화되고 조선후기 <장화홍련>이나 <수성궁몽유록>과 같은 한국판 로맨스의 기틀을 다져놓은 작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2.는 다소 충격적인 내용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데, 이것은 작품을 직접 읽어보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미 학계에서도 <<안빙몽유록>>의 할렘계열적 성격(?)이 김만중의 <구운몽>에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을거라는 주장이 나오기도 합니다. (물론 원전은 중국에 다 있습니다.) 중요한건 히로인 캐릭터의 모에성향에서 중국의 작품들과 다른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조선초 모에성향 캐릭터의 재밌는 점들을 찾아낼 수 있다는 점 정도입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작품들은 한국의 모에캐릭터를 디자인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3.인데, 여기에 나오는 문장 속에 숨어있는 의고체들은 어지간한 학벌로는 독해도 어려운 엄청나게 풍부한 주석이 숨어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파헤쳐보면 사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일종의 ‘문체를 통한 낚시’인데요, 아마 당대 양반들이었다면 모에캐릭터나 시문보다는 이런 낚시질에 더 흥미를 느꼈을법도 하죠. 이 의고체 낚시질은 아주 단단한 클리셰로 형성되어 있어 그 자체가 하나의 장르형식으로 굳어집니다. 이 전통은 후에 판소리계 소설의 편역에까지 영향을 줄 정도로 동양 소설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이 의고체를 통한 언어유희의 전통은 지금도 일본의 만담이나 <냐루코양>같은 작품에서 간접적으로 남아있습니다. (히라노 게이치로의 경우는 이걸 그냥 정공법으로 파해한 케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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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에는 특이한 발문(跋文)이 담겨 있습니다.

"기괴하고 환상적인 이야기도 들을 가치가 있다"는 다소 의미심장한 주장인데,

이 작품을 통해서 조선소설은 논설 중심의 '중소설'에서 경이 중심의 '경소설'로 넘어가는 계기를 만듭니다.



  조선후기 판소리계소설과 경판본 소설 - 대여점의 등장

   제가 정리를 제대로 못해서 좀 장황하게 적어뒀는데 요점은 간단합니다. 송/명대, 그리고 조선, 그리고 에도시대의 소설의 특징은 ‘떠도는 이야기’(항설백물어(巷說百物語)와 어우야담(於于野談)사이의 간격이 얼마나 좁은지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역사서’, ‘글로 지은 잡담식 이야기’라는 세가지 특징이 모두 담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몽유록까지의 장르는 팬덤이 규정된 상태로 논설조에 초점을 두고 창작된 귀족문학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구텐베르크 이후 서양이 인쇄혁명을 일으켜 시가 ‘노래하는 것’에서 ‘읽는 것’으로 변했듯이, 17세기를 넘어가면서 유럽과 다른 인쇄혁명이 동양에서 일어납니다. 바로 대본소, 세책점의 등장입니다.

이제까지의 이야기를 서민들이 듣는 것은 기껏해야 양반집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나 노인들의 옛이야기가 전부였지만, 세책점의 등장으로 상황이 엄청나게 변합니다. 세책점(지금의 도서대여점)의 등장은 판소리계사설, 가객(歌客)의 등장과 엄청나게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이 이야기는 너무 전문적이니 여기서는 제외하고, 18세기부터 한반도에서는 도서대여점 시스템이 아주 완전하게 정착됐다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세책점과 현재의 도서대여점은 책권수, 대여기간, 유통구조까지 현재와 거의 비슷하기 때문에 그냥 ‘도서대여점’이라고 생각하셔도 무방합니다.


  도서대여점에서 주로 책을 빌려보던 사람은 양갓집 규수들이었습니다. 한글을 깨우치고 대여의 시간과 여가가 가능한 집단이었으니까요. (그때까지도 대부분의 서민들은 한글을 깨우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도서대여업이 팽창하다보니, 새로운 직종의 사람들이 등장했습니다. 그들이 바로 가객(歌客 - 연회나 잔치에서 노래를 대신 불러주던 사람. 17세기 후반에 등장하여 18세기까지에 걸쳐 판소리의 등장에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전문 소리꾼)의 후예인 강담사(講談師)입니다. 말그대로 이야기를 내려주는 사람이라는 뜻의 강담사는 18세기 초엽부터 성행한 이들은 양갓집 규수 못지 않은 커다란 소비층으로 부상합니다. 이들은 주로 청계천이나 남대문시장 등 저잣거리에서 자리를 잡고 책을 아주 맛깔나게 읽어주고 모여서 이야기를 들은 사람에게 돈을 받는 직종이었습니다. 이들은 한마디로 이 시대의 ‘성우’였으며, 소설텍스트의 ‘멀티콘텐츠’의 대표주자였던 셈이죠.


  여기서 재밌는 기록 하나, 도서대여점(세책점)의 대여장부가 최근 10년 사이에 속속들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각 강담사는 전담 장르를 두고 파트를 나눠서 강담한 기록도 있다고 하는데, 남자들은 주로 <홍길동전>이나 <임진록>등을 즐겨 들었고, 여자들(주로 규수들이죠)에게는 <춘향전>과 <장화홍련>이 으뜸이었다고 합니다. <삼국지>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큰 사랑을 받았다고 합니다.


자, 보이시나요? 이미 도서대여점의 남녀 성향은 이때부터 드러납니다. (중국과 일본은 사실 더 노골적입니다. 한국이 그나마 출판업에서는 그 속도가 더딘 편) 강담사는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관객들의 반응을 보고, 더 ‘잘팔리는’ 작품을 찾아내고 도서대여점에 청탁합니다. 그러면 출판사(=도서대여점=잔반(몰락양반) 이 엮이는 시스템)는 잘 먹힐만한 이야기를 찾고 잘 먹히는 코드를 찾아서 - 주로 민담에 기반하여 - 새로운 책을 갖다놓고, 옆 도서대여점과 경쟁하고... 뭐 이런 구조입니다.각 텍스트의 장르별 '이본'이 있다는 점은 이것을 잘 보여줍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춘향전>에 시민의식이 담겨있고, <홍길동전>에는 역사비판의식이 담겨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홍길동전>도 이 시기에 오면 다이제스트판으로 각색되어 ‘펄프픽션’으로 대단한 인기를 끌며, <춘향전>은 ‘양반용’과 ‘서민용’으로 스플릿되어 2가지 판형으로 인쇄되었습니다. 즉, 이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근대 시민사회 의식의 발로’가 아니라 ‘각자의 층이 다른 팬덤의 클리셰를 만족시킬만한 텍스트’를 만드는 것에 치중했음을 뜻합니다.

일본은 좀 상황이 다른것이, 이미 16세기 후반부터 소설을 몇 천 부씩 팔아제끼는 전업작가가 등장한 상태였기 때문에 이미 출판유통시스템이 완성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16~17세기 일본 출판업시스템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자세히 정리해서 따로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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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 개봉했던 영화 <음란서생>에는 조선후기 세책사업과 관련된 문화의

꽤 여러가지가 담겨있습니다.

최근 10년 사이에 세책점과 관련된 조선 후기 출판/소설 문화의 베일이 하나둘 벗겨지고 있고,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작품들이 발굴되고 있습니다.

일례로 제 은사님이셨던 교수님은 현재 이시기에 창작된 137권짜리 무협지를 연구중이십니다.

(저는 그 작가를 조선의 김성모라고 부릅니다.)



  경소설은 ‘노블’이 아니다

  이렇게 조선 후기에 소설이 더욱더 서민독자 성향의 엔터테인먼트로 되는 데에는 사실 시조(時調:우리가 아는 바로 그 시조입니다)가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지만, 분명한 사실은 동양의 ‘소설’개념이 가지고 있는 우언적 잡담성과 ‘펄프 엔터테인먼트’가 합쳐진 성향이 17~19세기 사이의 조선 소설의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조선초기 몽유록계소설이 논설조의 우언들이 진하게 감지되는 ‘중소설(重小說)’이라 할 수 있다면, 신광한과 김만중의 등장 이후 인쇄의 보급으로 발전한 일련의 조선후기 소설들은 서민들의 대량 ‘청취’에 적합한 ‘경소설(輕小說)’로 변모해간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서양의 ‘노블’의 발전방식과는 전혀 다릅니다. 서양의 근대소설이 ‘현대의 서사시’라고 말하는 까닭은 근대소설이 서사시의 내적 형식을 파괴하면서 등장하였기 때문입니다. (서사시는 서양에서 중세까지의 장르입니다.)


하지만 동양의 ‘소설’은 애시당초에 ‘경서’의 반대개념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의미가 굉장히 너른 폭으로 언급되다가, 역사가 진행되면서 우리가 아는 ‘꾸며낸 이야기’로 정착이 되는 과정에서 그 성향과 문화가 '고관대작의 수필조' -> ‘대학생의 논설조’ -> ‘서민들의 엔터테인먼트’로 바뀐 것 뿐입니다. 물론 전통적인 ‘잡담’형식에 충실한 ‘가전문학’과 ‘야담’이라는 장르가 있는데 - 지면관계상 생략했습니다 - 분명한 것은 한국의 경우 20세기로 넘어오면서 이 흐름이 경성에서 동경으로 넘어가버렸고 - 김내성과 이상이 대표적인 작가입니다. - 1945년 이후에는 정치사회적 문제로 리얼리즘이 대두되면서 이 흐름에 대한 논의가 묻혀버렸습니다. 그러고 2000년 이후 지방자치제가 본격적으로 수행되면서 각 가문(집안)이 가지고 있던 대대로 내려오던 고서들이 공개되고 각 지방마다 연구가 시작되면서 괄목할만한 성과가 보고되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라이트노블’이라고 불리는 이 장르는 형식적으로는 잘 모르겠지만(여전히 고민중입니다), 적어도 문화적으로 조선 후기, 에도시대, 송/명대의 소설들과 아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고, ‘엔터테인먼트 노블’이라는 것, 일본에서 유독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 일본이나 영국과는 비교도 안되는 시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 성향은 메이지유신 이전에도 있었던 - 혹은 조선후기에도 존재했던 - 잡담의 마당차려주기의 성향이 아직까지는 우리 문화에 남아있는 흔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한국에서 게임문화에서 반영되는 측면이 있긴 합니다.)

그래서 저는 ‘라이트노블’이 아니라 ‘경소설’이라고 부르는 것에 조금 더 친근해지려고 합니다. 한국과는 다르게 펄프출판의 연속성이 남아있던 일본에서, 1949년 카도카와 문고가 출범하면서 내세운 슬로건이, 뻔하지만서도 ‘서구 문화를 백과사전적으로 흡수하여 우리문화의 재건에 이바지한다’라는 점은 경소설에 관련해서도 여러모로 생각해볼 부분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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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병원 때문에 계속 몸이 안 좋아서 비리대다가 정리해서 올리자니 글이 엉망이네요. 나중에 제대로 정리해서 다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__)


Writer

현서/푸른꽃

현서/푸른꽃

과도한 상상력은 비참한 최후를 예방한다!

comment (2)

다이노씨
비밀글입니다. 다이노씨 11.05.24. 00:03
[비밀글입니다.]
투명한빛
투명한빛 12.03.15. 06:38
자세한 내용이라 어려웠지만, 잘 읽었습니다. 칼럼 감사드리구요.
뭐랄까... 꽤나 심오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경소설=라이트 노벨]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경소설'의 본질에 관한 이야기로 해석을 했다고나 할까요.
같지만, 다르다는 것은 어찌보면 모순일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어쩌면 다르다는 말 대신에 '틀리다'는 말을 써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그렇기 때문에 더욱이 설명하는 데에 있어서 어려움이 따르는 것이겠지요.
어느새인가 정의된 '라이트 노벨'을 '경소설'과 연관을 지어서 설명해주신 부분에 대해서는 특히나 유심히 읽었습니다.(물론, 대체로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말이죠.)
읽고나서 하는 생각이지만, 라이트노벨이면서 동시에 '경소설'인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전에 기회가 된다면 '경소설'이라는 부분에 대해서 자세한 공부가 선행되어야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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