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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판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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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40 Jul 01,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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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Rogia

   R 왕국의 수도(首都)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는 소위 '낙서판 신문'이란 것이 유행이었다.
   신문이라고 해서 거창한 인쇄설비와 편집장과 기자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건물을 짓고 남은 진흙벽돌을 맨들맨들하게 다듬은 다음, 아궁이의 숯가루와 파자마 기름을 섞어 굳힌 흑묵으로 온갖 음란패설을 휘갈긴 것이 전부다. 누가 먼저 시작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수도 곳곳으로 퍼져나가는 속도는 파격적이었다. 골목길이란 골목길엔 한 두개 씩 굴러다니는 낙서판은 풋풋한 소년들의 가슴을 설레이게 만들었다.

   물론 소년들의 적은 부모님 뿐만이 아니었다. 시덥잖은 소문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국립 보안관은 눈을 부라리며 골목을 누볐다. 그렇지만 행여 그들에게 낙서판이 걸리더라도, 침을 묻힌 손바닥으로 슥슥 문지르면 그만이었다. 낙서판을 처음 만든 자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별로 알고 싶어하는 사람도 없었다. 발 없는 낙서판이 드높은 왕궁 담장을 훌쩍 뛰어넘어, 쇠약한 왕의 단 하나뿐인 피붙이인 어여쁜 공주님의 침실에서 발견되기 전까지는.


   "좋은 일은 아니지..."
   총리는 초조하게 펜 끝으로 무언가를 써갈겼다.
   "어른 손바닥만한 진흙판이 이 도시에 몇 개 정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응? 이보게, 내가 당신에게 질문을 하는 건, 대답을 바라기 때문이야. 몇 개 정도 있을까?"
   "오만 칠천 십육 개가 있습니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지금도 더 늘어나고 있지만요."
   "그래. 그렇지. 당신이 하는 말은 언제나 틀린 법이 없지... 그래서 지금 몹시 곤란하단 말이야. 암. 그렇고말고. 그러면 이제 몇 개가 남았지?"
   "질문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오늘 대답할 수 있는 답변의 수 말일세."
   "세 번 남았습니다. 지금 말한 답을 제하면 두 번이구요."
   "쫀쫀하구먼."
   나와의 대화는 귓등으로 흘러 듣는지, 총리는 내게 눈치 한 번 주지 않고 길다란 두루마리 종이에 글을 쉴새없이 써내려갔다. 얼핏 보니 그녀 답지 않게 공존한 미사여구가 가득 찬 글이었다. '왕궁 관리를 소홀히 한 책임을 너그러이 봐주십시오'라는 한 문장을 저렇게나 궁정체로 늘려적는 것도 흔치 않은 능력이리라.
   그 옆에 서 있는 것도 귀찮아진 나는 융단 위에 아무렇게나 앉았다. 총리는 말했다.
   "나는 좁은 방에 처박혀 손목을 혹사시키는 행위에 쾌감을 느끼는 변태가 아니야. 그러니까 아침이 오기 전에 순순히 대답해주라. 몇 번을 물었는지도 모르겠지만-왕궁에 낙서판을 들여온 사람은 누구지?"
   "없습니다."
   "그러면 질문을 바꾸겠다."
   펜대에서 휘어진 펜촉을 빼내며 총리는 나를 노려보았다.
   "방금 당신이 한 답변은 진실인가, 아니면 거짓말인가?"
   "진실입니다. 이제 제가 오늘 대답할 수 있는 답변의 수는 한 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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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거 게시판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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