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소설회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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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학교 체스부는 따로 부실이 없는 대신 옥상의 식당을 빌려서 쓴다. 길다란 테이블에서 체스를 두는 

게 편하기 때문인데, 이 덕분에 햇볕이 잘 드는 날이면 체스부 부실은 수면실이 된다. 체스를 아무리 좋아

하는 학생이라 하더라도 사방에 난 큼지막한 창문에서 쏟아지는 따스한 햇빛에 직격당하면 얼마 못 버티고 

고개를 떨구기 마련이다. 이 수면의 유혹에 버틸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해봐야 두라는 체스는 안 두고 책을 

읽는다던가 수다를 떤다던가 하는 녀석들, 그리고 나 뿐이다. 나 역시 작년까지만 해도 수면파 부원이었지

만 올해 들어서는 상황이 달라졌다.

"야, 자지 마."

나른하디 나른한 내 체스부 생활을 환기시켜준 원인씨는 지금 내 앞에서 늘어져라 주무시고 계시다. 한동

안 장고하나 싶더니 그대로 곯아 떨어져서 침으로 강까지 만들고 있다. 깨워야겠는걸.

"일어나라니까. 침에 빠져 죽겠다."

어깨를 잡고 가볍게 흔든다. 이 녀석을 상대로 이렇게 할 수 있는건 어떻게 보면 특권이다. 지금이야 완전

히 늘어져 있지만 평상시에는 접근불허의 아우라를 뿜어대고 있으니까.
그나저나 진짜 안 일어나네. 예전에는 이 정도로도 잘 일어나더니.
어제 뭔가 피곤한 일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몸의 흔들림이 요람의 흔들림이라도 되는 것마냥 갓난아이처럼 

천진난만한 얼굴로 잔다.
침을 흘리면서.
피곤한 일이라고 하면 뭘까. 본의가 아니게 들어버렸지만 아무튼 녀석 가정 사정이 최근 안 좋았으니까. 

그게 문제가 되는건 아닐까. 확실히 이 녀석은 공부랑은 거리가 머니까 이미 알바같은걸 하고 있을지도 모

르겠는데. 뭐, 이 녀석 언니쪽은 엘리트니까 그다지 걱정할 필요는 없으려나.

"......정신 차려."

괜한 걱정에 한창 취해있자니 아래에서 잠 섞인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무래도 일어난걸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 흔들었던 모양이다.

"왜 깨우고 그래. 평소에는 자게 내버려두더니."

"침이나 닦고 다시 자던지 말던지 하세요."

말없이 티슈팩을 내밀었다.

"아. 침 흘렸구나. 위험했네."

여자애라면 이런 상황에서 좀 부끄러워하지 않을까하는 기대는 언제나처럼 깨끗하게 날아가 버렸다.

"근데 만화에서 보면 이럴땐 손수건을 내밀어주던데."

"요즘 남자애들 중에 누가 손수건같은걸 가지고다녀."

요즘이라고 말하기도 뭐할 정도로 오래된 이야기를 하고 있냐.

"게다가 손수건은 범용성이 떨어진다고."

"범용성......?"

아무래도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다.

"티슈로 닦을수 있는 건 대부분 손수건으로도 닦을수 있지 않나?"

"알아들은거야?!"

의자 다리에 발등을 찍힐뻔 했다.

"모의고사 톱클래스는 확실히 다르네. 시도때도없이 무시하고."

"농담이었으니까 심각하게 받아들이면 곤란한데."

"그럼 나도 장난좀 쳐볼테니 심각하게 받아들이진 말라구."

그렇게 말하며 검은색 나이트를 내 얼굴로 튕기려 한다.

"아니, 이빨 나갈수도 있으니까 이제 그만."

다행히 얼굴로 말 머리가 날아오진 않았다. 대신 녀석은 그걸 위협적으로 만지작거리며 노려본다. 눈동자

에 차 있는건 졸음이 반이라 노려보는 효과는 없었지만.

"침은 닦았으니까 다시 자. 아직 끝나려면 한시간 반이나 남았으니."

"됐어. 이왕 깬거 다시 자서 뭐해."

그렇게 말하며 녀석은 체스판을 자기 앞으로 살짝 끌어당긴다. 아무래도 두던 체스를 계속할 모양인것 같

다.

"어차피 내가 이길거 그냥 자도 괜찮은데."

그리고 예상대로 말 머리가 날아왔다.

"이 잘못 맞으면 부러진다니까."

"싸가지없는 주둥이에 달린건 부러져도 괜찮지 않아?"

오늘따라 까칠하네. 역시 가정 사정이 연관된 일.....아니, 괜한 추측이 오히려 더 실례인거지.

"미안."

입 밖으로 낸 것과 내지 않은것까지 합친 사과였다.

"흐으으으음.....으음."

녀석은 턱을 괸 채로 뭔가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이는게 

나를 한참 뜯어보는 모양인것 같다. 내가 사과하는게 그렇게도 이상한 일인가. 그리고 그렇게 직접적인 눈

빛은 왠지 부끄러운데.......

"신기하네."

녀석의 말소리에 녀석쪽을 쳐다보았다가 시선이 마주쳐버렸다. 몇 초도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는 것은 

숙맥자식의 슬픈 운명.

"네가 말하면 진짜로 미안한 것 같단 말이지."

사과 이야기였나.

"한두번 들은 사과도 아니잖아?"

"뭐, 그야 그렇긴 하지. 하지만 들을때마다 신기하단 말이야. 나한테 이러저러한 이유로 사과하는 녀석들

은 많은데, 너같은 분위기로 사과하는 녀석은 없었어. 다들 빈 말이라 그런건가?"

"그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아마 다른 이유가 있겠지."

한순간에 친구들을 미안한 줄도 모르는 나쁜 녀석들로 몰아붙이다니. 이런걸 가리켜서 마이페이스적이라고 

하는 건가....? 아니면 단순히 배려의식 부족인가.

"그나저나 사과받을 일이 많다니, 평소에 어떻게 하길래 그래?"

"응?"

갑자기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는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본다. 잠이 싹 달아난 모양이다. 내가 

그렇게 놀랄만한 말을했었나?

"네가 방근 그랬잖아. 이러저러한 이유로 사과하는녀석들이 많다고."

"아.....그랬나?"

설마 졸음에 취해 꿈 속 이야기를 한 건 아니겠지.

"생각하기 싫으면 대답 안해도 되니까."

".....보통 대답하기 싫으면, 이라고 하지 않아?"

이번엔 녀석의 눈매가 제대로 일그러진다. 졸음기 없이 분노만으로 이루어진 날카로운 눈빛이 무섭기까지 

하다. 아무래도 이 눈빛이 문제인거 같은데.

"죄송합니다."

"오냐."

시원스레 대답하고는 금새 부드러운 표정을 지어준다. 아마 날카로운 태도가 채찍이라면 이 부드러운 태도

는 당근. 이런 식으로 주변을 조련하고 있는 거구나.

"생각해봤는데 말이지....."

"생각해보니까."

어라?

이건 또 무슨 외산 로맨틱코미디같은 상황이야.

"내가 먼저 말할거니까 닥쳐."

"네"

처음 부분만 똑같았구나.

"생각해보니까, 너 강아지 같아. 아마 그래서 그런것같은데."

강아지라.

여자애가 강아지 같다고 말하면 칭찬인걸까? 아니면 단순히 '커서 개같은 놈이 될 조짐이 보이네.' 라는걸 

돌려말한 것 뿐인걸까?

"나랑 눈도 못 마주치고 슬금슬금 눈치를 보면서 사과하니까 좀 더 진심인것 같단 말이지. 집에서 기르는 

개를 혼내는 느낌이 든다고 할까."

아직까지도 사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구나. 은근히 끈질기네. 게다가 딱히 미안해서가 아니라 그냥 여자랑 

눈 마주치는게 익숙하지 않을 뿐인데.......

"뭐야, 강아지 같다고 해서 삐졌냐. 고개들어, 칭찬이니까."

"칭찬입니까."

"칭찬이지. 일부러 파고들어서 상처받지 말고 니 이야기나 해 봐. 하다 말았잖아."

그 말인즉슨 파고들면 상처받을만한 일이라는 거냐? 엄청나게 파고들고 싶어지는데!

뭐. 그래도 역시 안 파고드는게 낫겠지?

"아니, 별게 아니라. 네 눈매가 무서우니까 다들 지레 겁먹고 사과하는게 아닐까, 싶어서."

말해놓고도 왠지 무서워져서 고개를 숙여버렸다. 앞을 바라보면 분노에 불타는 눈동자가 있는거 아닐까.

"눈매가.....무서워?"

목소리를 들어보니 분노보다는 의아함이 더 큰 것 같은데. 고개 한 번 들어볼까......아, 역시. 궁금한 표

정이네.

"인간보다는 금수의 수준이지. 눈빛만으로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수준."

그리고 나는 금새 눈빛으로 제압당했다. 역시 이 눈매가 문제라니까.




제목이 없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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