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소설회랑

책, 한글, 화살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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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1:11 Jul 22,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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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Wishes

석양이 짙어지는 시각, 도서관을 거닐던 도중 책 한 권이 눈에 띠었다. 대출, 반납이 잦았던 듯 표지가 잔뜩 너덜너덜해진 책이었다. 상당히 두꺼운 데다가 표지가 산화된 가죽 특유의 색을 띠고있어 싫어도 눈에 띨 수밖에 없었다. 여태껏 이 책을 빌려간 사람들도 저 표지와 두께에 홀리지 않았을까. 난 책을 부여잡아 바닥에 몸을 숙이고 앉았다. 펼친 책의 표지에는 어떤 문구가 적혀 있던 것 같았지만 흐릿해 알아볼 수가 없었다. 한글로 쓰여져 있었던 것인가, 하고 추측을 해볼 뿐이었다.

책을 펼쳤으나 책의 내용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책의 페이지 한 장 한 장마다 화살표와 문구가 가득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번역본 등에서 자주 나오는 ‘역주’ 라고 하는 것이겠지만 책을 전부 뒤덮어버리면 역주고 뭐고 소용이 없는 거 아닌가. 이런 생각에 적힌 문구들을 자세히 보니 책과는 관련이 없는 내용들이었다. 페이지 위의 머리말에 검지 손톱만한 글씨로 큼지막하게 이런 문구가 쓰여있다.

‘아, 젠장.’

‘장’ 의 오른쪽으로 깨알만한 글씨가 주욱 늘어져있다.

사랑고백에 관한 이야기였다. 내용인 즉슨, 한 남자가 여자를 사랑했다. 하지만 그 여자는 다른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남자는 여자를 짝사랑했고 여자는 마침내 다른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다. 한 발자국을 눈앞에 두고 남자는 갈등했다. ‘내가 내가 사랑하는 여자의 상처를 비집고 들어가도 되는 걸까?’

그 밑의 역주들이 또 눈에 들어왔다.

‘뭔 고민을 해 ㅋㅋ’ ‘ㅋㅋ’의 끄트머리에서 화살표가 뻗어 나와 밑으로 연결된다.

‘짝사랑만 죽어라 했으니 결실을 맺은 거지... 당장 고백해라’ 담담하면서도 정직한 문구에서 화살표가 뻗어 나와 밑으로 연결된다.

‘위에.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되지 인마.’ 옆에는 화난 사람 얼굴 그림이 그려져 있다. 얼굴의 입에서 화살표가 뻗어져 나와 위의 ‘짝사랑만~’ 문구를 가리켰다. 이 문구 밑에는 또 다른 문구와 화살표가 있었고, 또 다른 문구와 화살표가 있었고, 또 다른 것들이 있었다. 동글동글한 한글체로 이루어진 문장. 자로 대고 쓰듯이 또박또박한 한글체로 이루어진 문장. 저마다 다른 사람의 저마다 다른 반응이 모여 책 한 페이지를 이루고 있었다. 책의 끄트머리, 페이지가 적혀있어야 할 부분에는 이런 것이 적혀있었다.

‘고맙다.’

머리말의 ‘아, 젠장’ 과 같은 글씨체의 세 글자에 난 피식 웃음소릴 내뱉고 말았다. ‘책속에 길이 있다.’ 라는 명언이 갑작스레 떠올랐기 때문이다. 책의 페이지를 넘기려고 했으나 이미 도서관의 폐관 시각이 다가온 것 같았다. 하는 수 없다. 책을 덮고 책꽂이에 책을 넣으려던 중 문득 떠오르는 게 있어 다시 책을 펼쳤다. 아까의 책 끄트머리에 있었던 ‘고맙다.’ 라는 문구. 난 펜 뚜껑을 열어 밑에 또박또박 네 글자를 적어놓았다. 장난이나 쳐보자.

‘천만에요.’

 

발상 -> 구상 -> 작성 = 25분

 

아는 형이랑 타임어택하듯이 작성한 산다이바나시

comment (1)

rook 10.08.01. 22:10
화살표 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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