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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마왕이 살아가는 55가지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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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2:25 Aug 02,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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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rook



글자 크기 14px, 줄간격 160%로 쓰면 읽기 좋아요.

 

마왕.

이 단어에 베토벤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테고 자신의 직장 상사, 부모님, 형제자매, 친인척, 선생님 등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으레 판타지에 나오는 무시무시하게 생긴 괴물을 떠올리거나.

그도 아니라면 아주 잘 생기고 훈훈한 남성을 떠올리는 이도 있겠지.

"헉...헉......이제 다 틀렸어."

한참을 달렸는지 온몸에서 흘러내리는 비지땀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골목에 위치한 거대한 벽은 그를 좌절시키기에 충분했다.

그의 이름은 마진.

올해─, 아니 정확하게는 오늘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졸업식을 끝난 뒤 어처구니 없는 일을 경험했다.

교실에서 졸업식 사진을 찍고 있는데 운동장에서 난데없이 거대한 블랙홀이 생기더니 거기서 기묘하게 생긴 괴수들이 잇달아 나타나는 것이다. 흡사 RPG게임이나 판타지 영화에나 나올법한 괴수들의 모습을 보던 마진의 입이 쩍 벌어졌지만 하지만 정작 교실의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운동장을 거닐고 있는 이들 중 단 한 사람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 하고 있다는 점은 더더욱 마진의 심장박동수를 늘리고 있었다.

처음엔 마진 자신도 단순히 눈의 착각이거나 아니면 학교 측에서 마련해준 졸업이벤트, 그도 아니면 무슨 영화의 촬영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한 마진의 생각을 멋지게 부숴준 건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밖으로 나가려던 그에게 다가온 한 마리의 괴수였다. 흔히 게임에 나오는, 인간 크기의 박쥐를 닮은 몬스터인 가고일과 판박이의 생김새를 가진 괴수를 보며 마진은 다리가 후들거리는 바람에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284대 마왕님을 뵙습니다."

가고일은 그 흉측한 이빨이 가득 달린 입을 달싹이며, 놀랍게도 인간의 말로 인사했다.

이건 뭔 미친 소리지? 284대? 마왕? 무슨 종교권유인가? 게임중독자? 마약흡입자?

머리를 1초간 풀가동해보았으나 도무지 해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를 수년 간 괴롭혀왔던 수리 영역보다 더 난해한 문제였다.

마진은 괴수를 환각이라고 생각하고는 보이지 않는 척 무시하고 지나가려 했고 그러한 그는 교실을 나와 운동장으로 나온 순간 기겁을 하고 말았다.

생긴 것만 다르지, 필시 방금 자신에게 284대니 뭐니 했던 놈과 똑같은 부류로 보이는 괴수들이 마진을 향해 우르르 몰라온 것이다.

마진을 더 기겁하게 만든 것은 그 숫자나 그들의 기괴한 모습에도 있었지만 결정적인 원인은 그들이 마진을 향해 외친 말에 있었다.

"284대 마왕님을 뵙습니다!" X 최소 100

아마 남들도 들었다면 기절초풍할 기백의 인사소리에 어버버 하며 거의 넋을 놓아가던 마진의 어깨를 누군가가 붙잡았고 마진은 다행히도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어깨를 붙잡은 이는 제일 처음 자신에게 말을 걸었던 괴수였다

"으아아아악!"

"마, 마왕님?"

괴성을 지르며 달아나는 마진을 보며 괴수들 또한 깜짝 놀라 그를 불렀지만 마진은 이미 공황상태에 빠진 나머지 아무 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그렇게 하루종일 괴수들로부터 도망다니던 마진은 결국 골목길에 가로막히고 말았던 것이다.

이제 자신은 어떻게 되는 걸까. 저 정체도 알 수 없는 악마들에게 잡아먹히겠지. 으적으적, 그들은 마진의 뼈까지 통째로 씹어삼킬 것이다.

크르르릉, 취이이이익, 하아아아.

제각각 다양한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괴수들 앞에 마진은 모든 것을 체념하고 삶을 되돌아보기 시작했다.

'부모님, 불효자는 먼저 갑니다.'

'친구들아, 그동안 즐거웠다.'

'피피야, 형아 없어도 건강하게 잘 지내야돼.'

집에 돌아가면 꼬리를 살랑이며 다가올 하얀 털뭉치가 미칠 듯이 귀여운 강아지에게까지 인사를 마친 마진은 다가오는 괴수들을 노려보았다. 마음 속으로 유언을 남긴 마진의 심리는 많이 안정된 상태였다. 다리의 후들거림도 멎었고 다리와 마찬가지로 벌벌 떨리던 팔과 주먹에는 평소의 힘이 돌아왔다.

'이렇게 된 이상 한놈이라도 더 저승길동무로 삼겠다.'

마진의 눈빛은 그런 투지를 나타내었다.

하지만 자신들을 향해 살기를 내뿜는 마진을 보며 괴수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마왕님, 뭐하십니까?"

"이야아아아아아아!"

궁금증을 참지 못한 괴수 한 마리가 마진에게 다가가면서 묻자 마진은 공포와 분노, 투지가 뒤섞여 그대로 괴수를 향해 돌진했다.

그리고 그대로 괴수에게 자신의 최고위력이 담긴 훅스트레이트를 날렸지만, 괴수의 반응은 "?"였다. 전문 용어로 말하자면 데미지 제로였던 것이다.

"자, 가시지요. 284대. 어이, 뭐해? 어서 차원문을 열어!"

대장 격으로 보이는 듯한 괴수가 마진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고 마진은 비명을 지르면서 그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괴수의 악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대한민국 19세 고등학생의 평균에서 아마도 살짝 더 강한 마진이었지만 괴수에게 그런 마진의 팔은 나무젓가락처럼 느껴질 정도로 허약했다.

"차원문을 열었습니다. 라고르스님!"

"좋아, 이대로 지옥으로 간다!"

"후훗, 그래야 제 상관답죠."

그들의 대화를 듣던 마진은 미친 듯이 발버둥치며 동네 사람 다 들으라는 식으로 외쳐댔다.

"무무무뭐뭣, 지, 지옥?! 놔! 놓으란 말이다, 이 괴물들아아아! 여러분! 여기 인신매매단이 있...!"

마진의 말은 차원문에 끌려들어감과 동시에 허무한 메아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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