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소설회랑

여름이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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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26 Jun 26,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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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민연

 바야흐로 여름입니다. 후덥지근, 끈적끈적의 원천인 고온다습의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단어만 봐도 알 수 있지만 저만의 개인적인 한 마디를 덧붙이자면 여름은 아주 덥다고 생각합니다. 여름 날 에어컨 없는 방을 상상해보세요. 제습기같은 건 없습니다. 그 날의 전에 비가 왔고 비가 그친 건 아침입니다. 지금은 해가 중천에 걸려 액체들을 소멸시키고 있습니다. 자아, 어느 정도나 상상되십니까. 지옥이 생각나지 않나요? 뭐어,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추위를 많이 타는 어떤 이들은 여름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보내는, 축복받은 인생일 테니 말이죠.

 제가 앉아있는 오두막은 만두집의 나무 찜기 같습니다.

 제 앞의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 싶지만요. 남자같은 그녀는, 여름임에도 블랙진을 입고 검정색 반팔 티셔츠를 입었어요. 검정색 운동화는 패션의 마무리인 것 같고, 검정색 모자는 눈 밑에 살짝 그늘을 만들어주는 용도인 것 같지만, 모자의 용도 만큼은 오두막이라 상관은 없습니다. 어쨌거나, 이런 사람과 같이 길을 걷는다고 상상해보세요. 옆에 있는 걸로도 더워지지 않나요? 그래서 전 덥습니다. 옆에서 어느 정도 밸런스를 맞춰가는 역할을 하고 있거든요. 지금은 오두막에 앉아, 마주보고 있기 때문에 옆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저는 그녀의 옆에서 회색 반바지와 하얀색 티셔츠, 발가락이 삐져나오는 샌들의 패션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왜 이런 사람과 같이 걸어야 할까요?

 저에 대한 존중을 그녀에게 요구했더니,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여름은 시원하잖냐?"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 저는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말이 맞다고 생각하는지, 어깨를 으쓱하네요.

 하지만 저는 전혀 공감이 되지 않습니다.

 그녀의 목을 따라 땀의 줄기가 흐르고 있거든요.

 "…땀을 그렇게 흘리면서 말하셔도 소용 없습니다."

 그녀는 제 말을 부정하듯 손사레를 쳤습니다.

 "여름은 춥다고 생각하지 않냐, 시원하잖아. 이미지들이 너무 시원해. 수박, 바다, 쿨의 노래… 이것 말고도 시원한 이미지들이 너무 많아 추워질 지경이다, 야.

 이렇게 추운 시대에 네가 반팔에 반바지 복장인 것이, 내가 이런 패션으로 일관하는 것보다 더 신기할 거 같은데."

 "…저는 수박, 바다, 쿨의 노래보다 40도에 육박하는 현재의 기온, 어제 내린 비, 어제의 습도와 오늘의 높은 기온이 이루어내는 환상의 조합, 후덥지근, 끈적끈적, 그러니까 한 마디로 고온다습이라는 현재의 상황을, 땀 까지 흘리는 주제에 '춥다'라고 느낄 수 있는 당신이 신기하다고 방금 전에도 그랬잖습니까!"

 저는 화내보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카리스마 눈빛으로 저를 위협했습니다.

 그러면서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입으로 한 마디 던졌습니다.

 "마음먹기에 달린 거라고, 잣샤."

 "그렇습니까… 당신의 말투를 외견을 제외한 채 마음으로만 받아들인다면, 당신을 확실히 남자라고 생각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당신이 남자가 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현실을 직시하자고요, 덥잖습니까. 그러니까 그 더워보이는 옷들 좀 벗고, 조금이나마 눈을 시원하게 만들어달라고, 그렇게 부탁하는데도…"

 "거절."

 뭐어, 언제나 같은 패턴입니다.

 "……."

 딱히, 할 말도 없고요.

 

 "그렇게 싫으면 나랑 헤어지면 되잖냐. 이것저것 요구사항이 왜 그렇게 많은 거야. 그냥 적당히, 적당히 넘기면 안 되는 거야? 남자애가 왜 이렇게 마음이 좁아. 개인적으로 나는 조금 불만이 생겨버릴 거 같다고. 내 말투가 싫다, 내 이런 모습도 싫다, 나중에 진도를 빼게 되면 나와의 속궁합도 싫다고 하는 거 아냐?"

 그녀는 고개를 으쓱하네요, 뭐가 그렇게 잘났다는 건지.

 아마 제 인상이 많이 구겨졌을 거라고 예상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그렇죠, 뭐. 이제는 힘도 없어요.

 마지막 발악은 언제나 한 번 쯤 필요한 법이기도 하니, 살짝.  

 "…경박하니 그런 말은 꺼내지 말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덧붙여보았는데, 그녀의 인상이 구겨졌습니다.

 "경박하다… 라. 넌 내가 경박하게 느껴져? 지금까지 들었던 나에 대한 감상 중에는 단연 최악이라고 꼽을 수 있겠네. 진지하게 한 번 물어보자. 넌 내가 어디가 그렇게 좋은 거냐? 남자 같은 말투, 이렇게 특이한 행동들, 뭐 이것저것 다 포함해서 말이지. 난 네 이상형과는 삼각자 반대로 엎어놓은 것만큼 다르다고 생각하는데? 나의 어디가 그렇게 좋은 거냐?"

 생각해보면, 저는 왜 이 사람을 좋아할까요?

 좋아할 만한 이유가 있었던가, 그런 생각을 떠올려보았지만.

 딱히 떠오르는 게 없습니다.

 

 "저… 제가 고백을 먼저 했습니까?"

 "내가 했지."

 "…제가 좋다고 한 적 있습니까?"

 "1년이 지나도록 아직 차질 않았으니, 좋아하는 거 아니었냐? 아니면, 내가 불쌍해서 만나주는 건가?"

 

 "아뇨, 그건 아닐 겁니다."

 "…당연하지. 고백은 내가 먼저 했지만, 나를 넘어가게 한 건 너였으니까."

 그랬었나요. 저는 딱히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녀의 화난 표정은 저에게 '그걸 잊어 먹은 거야?' 라고 말하고 있는 듯 합니다. 마치 중요한 날을 기억하지 못 하는 남자친구를 보는 느낌이네요. 아, 나 남자친구 맞습니다. 딱, 제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지만요, 딱히 그런 건 아니라는 느낌도 들고. 여러가지 생각들에 마음이 복잡합니다.

 "제가 뭐라고 그랬습니까?"

 "……진심으로 네 뺨을 때리고 싶어졌다."

 아마, 맞는다면 제 볼이 퉁퉁 붓게 될 것입니다.

 "후우, 너에게 큰 기대를 하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자기가 했던 말 정도는 기억하고 살았으면 좋겠네. 어떻게 그렇게 잊어먹을 수 있지? 나에게는 아주 중요한, 아주 결정적인 말이었는데, 그건 너는 기억하지 못 하는구나. 날 이렇게 만든 것도 너잖아? 여름을 겨울처럼 보내는 방법, 을 떠올리게 만들 수 있는 것도 너라고. 짜증나게, 정말."
 저는 아무 죄가 없습니다. 기억이라는 건 원래 서서히 사라지고, 자연스레 사라지기도 하는 것 아닙니까? 만약에 그 때의 기억이 중요한 것이라고 해도, 날이 갈수록 서서히 사라지는 건 당연한 거라고요. 많은 이들에게 소중했던 사람이 10년 후, 20년 후에는 결국 잊는 것처럼. 물론, 평생 기억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매 년 제사를 지내더라도 마음 속에서는 이미 없는 사람일 수도 있고요, 그에 관한 사람이 기억나지 않는 것일수도 있다고요. 제 말에 공감하지 않으세요?

 "…불가항력입니다." 라고 반문해보지만, 이번에도 역시 그녀의 표정은 나빠졌습니다.

 그녀는 한숨을 크게 들이쉬고,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갑을 꺼냈습니다. 그러고보니 스트레스 때문에 담배를 핀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오두막에서 담배피는 건 그리 좋을 거 같지 않지만, 제 의견은 묵살 당할 게 뻔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굳이 반문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녀를 멍하니 지켜보는 것으로 제 의견을 대신해도 괜찮을 겁니다.

 "딱히 나는 괜찮은 사람이 아닌데도, 너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고 그랬잖아? 나에게는 이러이러한 점이 나빠보이지만, 그와 반대로 이러이러한 점이 좋은 거라고 말했잖냐. 나는 당신의 나쁜 점보다 좋은 점이 더 많이 보입니다, 라고 그러지 않았어? 나는 그 얘기를 현재의, 이 여름의 날씨에 대입한 것 뿐이라고. 여름은 꽤 괜찮은 날이잖아, 적어도 1년 전에 너와 나를 이어준 계절이니까. 나는 겨울은 겨울처럼, 가을은 가을처럼, 봄은 봄처럼 보낼 거야. 하지만 지금의 여름은 그와 반대로 좋은 점만 보고 싶다고."

 "…그랬습니까, 제가?"

 "……그랬다고."

 그랬었나봅니다. 

 중요한 말은 아니었는데.

 그녀에게는 좋은 말이었나봅니다.

 "…그렇군요."

 

 여름 바람이 시원하네요.

 더운 날에 쩔어있는 저에게, 한 줄기의 바람은 꽤나 시원하네요.

 그러고보니, 여름 바람만큼 시원한 바람이 있었습니까?

 "여름 바람이 시원하네요, 누나."

 "그렇지?"

 

  

  

 

  

 

comment (2)

민연 작성자 11.07.16. 11:20

제가 미쳤는지, 이딴 글을 썼었군요. 지금 더워죽겠는데, 소설처럼 마음먹기에 따라 시원해질 수 있다면 제가 에어컨 전기세에 벌벌 떨 필요도 없겠죠. 더워죽겠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이 글 생각나서 들어와서 이 글 보고 이게 뭔 소리야, 하게 되네요. 아 더워, 내가 이걸 왜 썼지. 지금 같은 마음가짐이면 아마 여름에 저주를 퍼부었을 겁니다. 더워, 덥다고. 

수려한꽃
수려한꽃 11.07.18. 22:56

저도 지금 무지 후덥지근한 열대야에 신음하면서 이 글을 읽고 있습니다. 누나, 부러운걸요…! 냉방도 기합으로 하다니, 엄청 에코스러우면서도 초자연적인 그런 느낌! 잘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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