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소설회랑

여름이 다가오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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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일

  어머니는 평소에 몸에 열이 많으셔서 그런지, 더운 것을 끔찍하게 싫어하셨다. 하지만 서민의 집안 사정이 달리 좋을 리도 없어서, 에어컨을 트는 것은 아버지에 의해 엄격히 관리되는 게 보통이었다.


  혹시 안방에 가면 있을 법한 커다란 장롱이 기억나는가? 방 한쪽을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그거 말이다. 우리 집의 에어컨도 사실상 그런 붙박이 신세였다. 그래서 어머니는 나에게 전기세 걱정할 필요가 없도록 꼭 크게 성공하라는 말을 입에 붙이고 다니셨다. 나는 어린 나이에도 한여름에 집에서 에어컨 빵빵하게 틀고 다니는 사치가 꼭 부자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그 의견을 존중하여 열심히 공부했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어떻냐고? 나는 영광스럽게도 그 꿈을 이루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꿈의 발끝에도 접근하지 못한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이것은 대단히 운이 좋은 결과였다. 음, 원래 꿈보다는 좀 더 와일드하다고 해야 할까?


내 직업은 바로 남극 과학기지의 연구원이었으니까.

이곳은 덥지 않다. 징그럽게 춥다.


11월 4일.

어디까지 썼더라. 그래. 꿈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나는 MIT를 졸업한 후에도, 그 전에도 일기를 써본 적이 별로 없지만, 지금은 이렇게 파이패드로 일기를 가장한 잡담을 쓰고 있다. 손이 가는 대로 마구 글을 써재끼고 있다는 표현이 적합할 것이다. 사실 본토에 있을 때의 나는 채팅에도 항상 의성어를 쓰는 비일반인적인 버릇이 있었지만, 뭐 어차피 이 글을 볼 사람은 나 뿐이니까 상관없겠지.


이곳은 정말로 외롭다.

  과학 기지의 연구원이라고 말했는데, 내 주 전공은 실은 기계 공학이다. 그 중에서도 위성관제소의 설비 관리가 바로 내 담당인데, 이 녀석은 그야말로 남극의 가장 중심부의 외딴 곳에 배치되어 있다. 대부분의 기계가 무인이고 혼자서 작동하지만, 수리는 못하더군. 그게 바로 내가 여기 있는 이유다.


  위성관제소가 어떻게 생겼냐고? 사실 겨울에는 눈보라 때문에 전체의 모습을 볼 수 없지만 여름에는 그나마 방한복을 마구 겹쳐 입고 나가면 가능하다. 이걸 트위터에 올리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다. 전세계의 위성과 통신할 수 있는 설비를 갖췄으면서 정작 140자(고작 몇십 바이트다.)의 단문 하나 전송하지 못하다니, 이거야말로 아이러니의 대표적인 표본이라는 생각이 든다. 뭐, 그래도 따뜻한 인스턴트 커피 믹스 한잔을 책상에 올려놓고 패드를 두드리는 여유가 있어서 다행이지.


  아마 이틀 후면 내가 속한 과학 기지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멍청한 놈이 위성관제소에 꽉꽉 우겨 넣은 설비 중에서 2층 침대를 뺄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놈이 여기에 한 번 있어봐야 혼자라는 게 얼마나 외로운 건지 알 수 있을 텐데.


11월 5일.


  오늘은 하루 종일 바빴다. 얼마나 바빴냐면 자동 수리 기계가 하나 쯤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위성관제소의 수많은 접시 안테나들 중에서 한 개가 작동 불능 상태였는데, 굳이 확인해보지 않아도 내 경험으로는 분명히 이음새 부분에 생긴 얼음조각이 문제였다. 어지간하면 관제소를 떠나지 않았던 나였지만 이것만큼은 방치할 수 없다.


  공구를 들고 허리까지 푹푹 파이는 눈 속을 헤쳐가며 문제의 3번 안테나를 수리하고 난 뒤에 가벼운 눈보라를 맞으며 돌아가는데, 문득 이 세상에 나밖에 없다는 그런 착각에 사로잡혔다.혼자 있을 때 종종 느껴지곤 하는 감정이었다.


  남극에 파견되기 전에 받은 정신감정과 의사가 근엄한 목소리로 내게 그런 말을 했었지. 절대 혼잣말을 하지 마십시오. 나 외에 다른 누군가가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때는 좀 섬짓한 이야기처럼 느껴졌지만, 뭐 솔직히 지금은 말을 건넬 가상의 상대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도 들 정도로 우울했다.


  난 상상력이 별로 풍부하지 못해서 혼자서 체스도 둘 수 없다. 과학 기지에 있는 내 동료들 중에는 혼자서도 잘 노는 놈들이 많은데 나는 왜 이런지 모르겠다. 이 모든 게 꽁꽁 얼어붙은 남극 때문일 것이다. 아마 이곳에서는 귀신조차도 얼어붙은 동상으로 발견될 게 틀림없다. 뭐,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자면, 뭔가를 수리하기 위해서 이곳에 파견되었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돌아가는 건 좀 억울하긴 하지만.


내용 추가.

  밤에 창문 너머로 엄청나게 커다란 오로라를 보았다.(내가 보기에는 항상 밤이지만 GMT를 기준으로 보자면) 저 정도로 밝게 빛나는 오로라는 남극에 꽤 오래 있었다고 생각하던 나조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뭐, 이런 걸 볼 수 있는 걸로 만족해야지.


11월 6일.

나와 임무를 교대할 동료가 올 시간이 벌써 한참 지났다.

  과학 기지에 연락도 안 되고, 뭐지? 어제 오로라의 전파간섭 현상 때문인가? 기지와의 거리가 그리  가깝지는 않지만, 스노우모빌을 사용하니까 그렇게 먼 것도 아니다. 위성관제소는 항상 한 명이 상주하고 있는 게 원칙이라서 나는 이곳을 떠날 수 없다. 젠장. 전파는 이곳으로 왔다가 다른 곳으로 거쳐갈 뿐이고 나도 마찬가지의 운명일 텐데, 왜 나는 갈 수가 없냐고!


일ㅈㄷ안.....

  갑자기 통신기가 경고음을 울리는 바람에 파이패드를 떨어트릴 뻔했다. 젠장. 깜짝 놀랐네. 솔직히 삐비빅 하고 우는 소리를 들은 후에야 나는 책상 옆에 있는 커다란 기계가 통신기라는 것을 깨달았다. 난 저게 무슨 모니터가 달린 발전기인줄로만 알았는데. 기술자 실격인가.


  모니터에 찍힌 단어는 간단했다. 11120800. 그리고 뒤에 적혀 있는 것은 경도와 위도가 표시된 일종의 GPS 좌표다. 좌표는 파이패드에 넣어 보니 위성관제소 부근에 있는 얼음바다를 가리키고 있었다. 앞의 것은 날짜겠지. 솔직히 뭘 의미하는 건지 모르겠다. 마지막 문장이 짤려서 그 외의 정보는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11월 10일.

  앞서 나는 어머니의 꿈을 이루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남극이 딱 좋게 시원한 것도 여름일 때에나 가능한 것이고, 그조차도 영상으로 올라가는 경우가 거의 없다. 이곳은 평소에는 영하 6,80도가 기본인 세계다. 어쩌면 난 그 꿈을 이루지 못한 것 같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나는 교대자가 오지 않는 것에 상당히 빡돌아서 위성관제소 창고에 쳐박혀 있던 비상용 스노우모빌을 끌고 과학기지로 말 그대로 날아갔다. 도중에 몇 마리의 펭귄을 쳐버렸는지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어쩌면 펭귄 모양의 얼음 덩어리였을지도 모르지) 영하 50도 이상의 추위 속에서 스노우모빌을 전속력으로 달리게 하는 것은 목숨을 삼도천에 던진 다음 그걸 튜브 삼아 떠다니는 행위였지만, 그만큼 나는 열 받은 상태였다.


그런데 내가 도착했을 때, 과학 기지는 텅텅 비어 있었다.


  나는 어리둥절했다. 이럴 수가 있나.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남극의 연구대원도 파업을 할 수 있는 직종이었나?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일반적인 불평으로 파업을 해야 한다면 남극이나 북극에 남아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을 테니까. 혹시 옛날에 영화로 본 더 씽의 괴물이 출현하기라도 한 걸까? 그런 것 치고는 핏자국이나 널려 있는 창자 같은 게 전혀 보이지 않는데. 


  하지만 적어도 내가 본 휴게실은 엉망이었다. 무엇 때문인지 찢어진 종이 조각들이 사방에 널려 있고, 소파도 뒤집혀져 있으며 은은하던 조명등도 깨져 있었다. 이건 결코 북극곰이 창문을 깨거나 문을 열고 들어와 한 짓은 아니었는데, 그랬다면 어딘가에 갈비뼈 한 조각이라도 널부러져 있었을 테니까 말이지.


  본국에 몇 번이나 연락을 취해 봤는데 답이 오지 않는다. 나는 내가 기억하는, 그리고 전화번호부에 적혀 있는 모든 연구기지에 전화를 스팸메일 보내듯이 날려보았지만, 그쪽이 받았다는 신호 자체를 잡을 수가 없었다. 어젯밤의 오로라 때문인가. 젠장. 그러던 와중에 나는 며칠 전에 팩스로 출력된 종이를 발견했다. 전에 위성관제소에서 보았던 날짜와 좌표가 찍혀 있었다. 그리고 뒤에 있던, 짤렸던 단어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건 내가 알고 있는 바로는, 관제소 안에 보관되어 있는 일종의 강력한 휴대용 고출력 무선 통신 장치였다. 먼 거리에서도 위성 관제소와 직접적으로 연결하는 것이 가능한, 일종의 통신 허브라고 보면 된다. 이걸 뭐에 쓰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의미는 알겠다. 12일 오전 8시까지 저 장비를 가지고 지정된 좌표로 가라는 이야기겠지. 이놈의 공무원 놈들은 아무래도 미친 것 같다.


  밖에는 거센 눈보라가 치고 있다. 정기 무전이 끊긴 것을 안 본국에서 구조 헬기를 보내려면 이 눈보라가 잠잠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 나는 이 미스테리한 현상을 누군가에게 설명해야만 하겠지. 어쩌면 이 과학기지에서 있었을지도 모를 대량학살극의 주범으로 송환될지도 모른다. 이의 있소! 북극곰을 증인으로 요청합니다! 아니면 펭귄이라도. 젠장.


  나는 오랜만에 아무도 없는 넒은 침대에서 홀로 잠을 청했다. 왠지 위성관제소에 설치되어 있던 초라한 좁은 침대가 그리워진다. 사람이란 이토록 간사한 동물인가 보다. 아멘.


11월 11일.

  아무리 거센 눈보라가 몰아치고 오로라가 번개처럼 무수한 방전을 계속하고, 나 외에 내 일을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도 나는 내가 할 일을 해야만 한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배웠다. 사회에서 나는 하나의 톱니바퀴에 지나지 않아. 하지만 그게 얼마나 중요한 부품인지 아닌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사람 하나 없는 남극의 한가운데에서 파이패드를 만지작거리는 일이 과연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나는 내 꿈을 이루기 위해 이곳에 있긴 한 걸까? 정규직이라는 싸구려 설정에 다행이라는 감정을 소모하기에는 내 이상이 너무 큰 모양이다.


나는 오늘 오랜만에 면도를 하다 말고 왈칵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턱에 반창고를 붙인 채로 나는 스노우모빌에 시동을 걸었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나침반은 하나 뿐이다. 정확한 날짜와 장소, 그리고 명확한 물건. 이 임무를 수행하면 누군가는 나에게 보상을 주는 걸까? 내 시간을, 그리고 동료들을, 내 꿈을 돌려줄 수 있다는 걸까? 머리가 복잡하다. 어딘가 먼 곳에서 지지직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기분이 든다.


  사족인데, 스노우모빌을 타고 위성 관제소로 가는 동안 생각보다 날씨가 푸근해서 문득 기온을 체크해 보니, 놀랍게도 평균 온도가 예년에 비해 30도 가량 떨어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세상에. 11월 초인데 아직 영하 30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이것 참. 말세로구만. 이런 급격한 이상 기온 변화로 지구가 멸망할 줄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잘하면 내 대에서 실현될 것 같기도 하다. 내 인생을 후손들이 비웃어 줄 여유 따위는 주지 않겠는데? 하하하.


  이렇게 농담을 치고 있는 와중에도 아마 내 얼굴은 입꼬리 하나 올라가 있지 않은 상태일 거라는 생각이 들자, 나는 또 문득 우울해졌다. 혼자 있다 보니 하이한 내 소프트웨어에 비해 하드웨어의 경직성이 한층 더 증가한 모양이다. 뭐 누군가에게 보여줄 일이 없으니까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지.


  그런데 정말 걱정이다. 도대체 동료들은 어디로 간 거지? 남극에서는 길을 잃을 수가 없다. 사방이 흰색 투성이라 워낙 길을 잃기 쉽기 때문에, 그만큼 만반의 태세를 갖추기 때문이다. 길을 잃고 싶은 게 아니라면 길을 잃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쓰잘데없는 말장난이군.


  위성 관제소로 도착한 다음에는, 전쟁영화에서 무전병이 지고 나올 법한 휴대용 고출력 무선 장치를 찾아내 침대 옆에 놔둔 채 잠을 청했다. 내일은 모든 의문이 해소되는 날이 될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되기를 믿고 싶다. 어쩌면 내 생일이 120일 남았다는 것에 대한 깜짝쇼일지도 몰라. 저 좌표에 도착해서 기계를 켠 순간, 사방에 숨어 있던 동료들이 나타나 축하의 팡파레를 울리는 거지. 


위성 관제소의 기계들이 나름대로 자장가를 불러주려는 모양인지 밤새도록 지지직거리는 잡음을 내는 바람에 나는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기계가 하도 오래 되어 가끔 이럴 때가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게 지금인가 보다.


11월 12일.


약간 충격적인 상황에 처했다.

어젯밤에 들었던 지지직거리는 소리는 기계가 낸 소리가 아니었다.


  위성 관제소를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귓가에는 여전히 기묘한 잡음이 들려왔다. 나는 빙하가 충돌하거나 부서져서 나는 소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내 스노우모빌의 수 미터 아래에 거대한 고래가 유유히 헤엄치고 있어, 녀석이 초음파 같은 걸로 대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야 생물학자가 아니니까 그게 실제로 가능한지는 모르겠다.


  먼 곳에서 거대한 얼음 덩어리가 쩌억거리는 소리를 내며 남극해 속으로 침몰했다가 둥실 떠오르는 모습이 보인다.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낀 것은 지정된 좌표에 도착한 후였다. 새삼 내가 무신경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남극의 겨울은 밤이 매우 길다. 단순히 낮이 짧다는 게 아니라, 오랜 밤이 몇 달이고 이어진다. 그런데 지평선으로 해가 떠 있었다. 물론 오전 8시라면 해가 떠 있어야 하긴 하겠지만, 11월의 남극은 이 시간에 해가 뜨고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 분명하다. 


  나는 황급히 고출력 무전 송신기를 켰고, 그러자마자 누군가가 무전 송신기의 여유 대역대 주파수를 몽땅 사용해 버렸다. 내가 알기론 그럴 수 있는 존재는 한 곳 뿐이다.


  우루릉 콰광! 이런 진부한 소음과 함께 지축이 흔들리는 굉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놀라서 파이패드를 품에 안은 채 얼음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내 반사신경이 조금만 더 허접했어도 파이패드를 얼음 틈 속으로 떨어트려 지난 몇 개월간의 기록을 몽땅 날려 버릴 뻔했다는 것을 시인해야겠다. 그러나 그 때는 그것조차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경황이 없었다.


거대한 고래들이 내 주변의 두꺼운 얼음을 뚫고 솟아 올랐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건 핵잠수함이었다.

  그 중 하나는 나로부터 불과 20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잠수함의 위쪽 부분에서 해치가 열리더니 군복을 입은 사람이 외부 마이크로 나를 향해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상당히 오랜만에 듣는 타인의 목소리가 낯설게 느껴져서 그런지 기억이 생생하다.


  당신이 XX위성관제소의 직원이오? 도통 연락이 안되던데. 그래도 늦지 않아서 다행이군.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적도 지대는 엄청난 열로 괴멸된 것 같소. 혜성이 지구의 인력에 사로잡힌 채 불타오른 모양이야. 엄청난 속도로 돌면서 인공위성을 쓸어버리고, 이제는 지구와 가장 가까운 최악의 궤도로 진입했소.

  우린 지구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이곳 관제소의 통신 장비들을 이용해 핵탄두를 혜성의 취약한 부분으로 유도할 거요. 아주 운이 좋다면 놈을  박살낼 수도 있겠지. 

신이 당신을,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기를.


말을 끝낸 그는 두 손을 들어 귀에 가져다 대는 시늉을 하더니, 해치를 닫고 사라졌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그건 귀를 막으라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직후 핵잠수함들이 일제히 등에 달려 있는 수많은 포문을 열어 핵미사일을 발사했기 때문이었다. 거대한 핵미사일들이 꼬리를 물며 하늘 위로 솟구쳐 올랐다. 핵잠수함 전대가 남극의 얼음 덩어리 밑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었지만, 설마 살아 생전에 그것들을 목격할 일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뭐, 그런 것보다는 태양이 지평선 위가 아닌 옆으로 움직이는 모습도 제법 희한하지만, 그게 태양이 아니라 혜성이라는 것도 정말이지 놀라운 일이지 않은가?


어머니는 내게 말씀하셨다.

여름에도 에어컨 걱정 없는 그런 인생을 살라고.


  나는 머리에 쓰고 있던 방한용 모자와 털 귀마개를 벗었다. 마치 그걸 기다렸다는 것처럼 지이잉- 하는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소음과 함께 눈앞으로 불타오르는 혜성의 찌꺼기가 선명하게 보인다. 저 멀리 지평선이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새삼 떠오르는 것이지만, 동료들이 어디로 간 것인지 이제야 알 것 같다. 무수한 핵미사일들이 뭉게구름만을 남긴 채 작은 빛으로 사라져간다.


  체감컨대, 지금은 아마 영상 15도쯤 될 것이다. 녹음이 우거진 나무 아래에 누워 있는 것처럼 딱 좋은 날씨다. 아마 남극에서는 이전에도, 이후로도 더 이상 경험할 수 없는 최고의 기상 조건일 것이다. 저 멀리, 거대한 얼음이 떨어져 나가는 모습이 보인다. 나는 파이패드의 타이핑을 잠시 멈춘 채 귀를 쫑긋 세웠다.


여름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린다.





comment (3)

더워드 11.07.04. 15:33

파이패드(X) -> 아이패드(O)

수려한꽃
수려한꽃 더워드 11.07.18. 23:09

특정 상품명을 쓰지 않기 위한 배려로 보는게 맞지 않겠습니까...

수려한꽃
수려한꽃 11.07.18. 23:12

SF 소설이 나올 줄이야! 제가 너무 좁다란 마음으로 테마 기획을 시작했나 보네요. 예상치 못한 장르에,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여름과 가장 거리가 멀어 보이는 '남극'에서의 미스테리한 사건과 뜻밖의 진상, 읽는 내내 모두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잘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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