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소설회랑

그날의 소나기는 다시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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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 Jul 24,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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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xester

남자는 겨우 눈을 들었다. 눈이 감기는 것은 졸려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비다. 맹렬한 비가 속눈썹에 매달려 눈꺼풀을 끌어내리고 있었다. 남자가 눈썹 위에 손을 대 모자챙처럼 만들고 나서야 시야가 트였다. 물론 거기에는 소녀가 있었다.

‘물론’이라고 생각한 것은 본능 때문이었다. 이유를 대라고 하면 할 말이 없었다. 모두가 신기하다고 생각할 일이었지만 남자에게는 아니었다. 심지어 남자는 그 소녀가 누군지도 알고 있었다.

레인메이커. 그것이 소녀의 이명異名이었다. 남자는 그 이명이 어색하기만 했다. 그녀를 지칭하는 다른 단어는 많았다. 하지만 그중에 남자가 고를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애초에 추억을 고를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


남자는 잠깐 이를 악물었다.


“왜 너는 아직까지 여기 있는 거지?”

“…….”


소녀는 대답대신 손을 들었다. 바닥의 조약돌들이 중력을 거부하며 하나 둘 일어섰다. 남자는 금방 최악의 상황이 닥쳐오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그가 가진 것은 그저 작대기 하나뿐이었다.

물론 그것은 여느 작대기가 아니었다. 벼락 맞은 떡갈나무로 만든 그 물건의 영험함은 소격서에서 관리하고 있는 열두 신기神器에 못지않았다. 아니, 사실은 누구도 그것이 진정한 힘을 개방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기에, 열두 신기와 견주는 것은 옳지 않았다.

그러나 남자는 그것을 그저 작대기라고 부르고 있었고, 그것의 진정한 가치마저 아직 모르고 있었다. 무엇보다 남자는 그것을 휘둘러 소녀를 상처 입힐 의도 자체가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는-

그때 조약돌 무더기가 남자에게 쏟아졌다. 남자는 그것을 마구잡이로 쳐냈지만 모두 막아낼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렇다고 피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이 돌 세례는 벌써 세 번째고, 앞선 두 번의 경험을 통해 피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남자는 금세 피투성이가 되어 무릎을 꿇었다. 작대기에 기대어 겨우 숨만 몰아쉬고 있던 그는 콧잔등에 뜨끈한 것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이상하다. 비는 아직도 이렇게 차가운데.


“바보.”


남자는 고개를 들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곳에 소녀가 있었다. 남자는 무어라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뜨끈한 것’이 입속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자연히 침을 삼켰다. 비릿한 냄새가 퍼졌다.


“바보. 바보.”


소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뭔가 싫은 기억을 떠올린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두 손을 내밀어 남자의 목을 쥐었다. 앙증맞은 손이건만 남자의 목은 바이스로 죄어진 것처럼 오그라들었다. 남자는 벌개진 얼굴로 소녀의 손목을 잡았다. 그러나 소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미, 미안….

죽임당하는 쪽은 자신이건만, 남자는 그렇게 말하려 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소녀의 아귀 힘에 막혀 나오지 않았다. 남자의 손이 툭 떨어졌다. 그것은 남자의 임종선언이었다.


-참, 그날 재밌었어….


아득해져만 가던 남자의 머릿속이 일순 청명해졌다. 감로수를 한 모금 마신 듯한 기분이었다. 남자는 또 다른 한 모금을 갈구하며 혀를 내빼물었다.


-너, 저 산 너머에 가 본 일 있니?

-여기 참외 맛있니?

-이 양산 같이 생긴 노란 꽃이 뭐지?


좀 더 많은 것을 말해 주고 싶었다. 좀 더 많은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 좀 더 많은 것을 함께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그럴 수 없었다.

남자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녀의 목소리가 그를 깨운 것인지 아니면 고통이 그를 깨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의 온 정신은 그저 그의 손끝에 몰려 있었다. 그는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주머니 속의 ‘그것’을 꺼냈다. ‘그것’을 내밀었다.


“…….”


남자는 목을 죄던 고통이 옅어지는 것을 느꼈다. 숨통이 트인 남자는 보기 흉할 정도로 켁켁 거렸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되기도 전에 말했다.


“맛봐.”


그리고 한 번 더 헐떡인 다음.


“우리 증조할아버지가 심었다는데, 아주 달아.”


남자가 내민 것은 대추였다. ‘그것’을 바라보던 소녀의 눈, 그저 게걸스럽게 삼키기만 할뿐인 저 흙탕물만큼이나 무기질적인 눈에 쓸쓸함이 감돌았다.


“병이 나으면…. 병이 나으면 이사 가기 전에 한 번 개울가로 나와 달라고 말하려고 했었어.”

“…….”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그 말을 할 기회가 없었어.”

“…….”

“나는 너를 잊으려고… 서울로 올라갔어. 그럴 수밖에 없었어. 너와 이런 모습으로 만날 줄 알았다면… 나는 가지 않았을 거야.”


또 뜨거운 것이 얼굴을 타고 흘렀다. 이번에는 짭조름했다. 고향을 떠난 이래 눈물이란 것을 흘려본 적이 있었던가. 남자는 목소리에 회한이 배지 않게 노력하며 말했다.


“너를 다시 만나 사과하려고 했어. 하지만 겨우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거기에 고향은 이미 홍수가 덮친 후였지. 그래서 나는 너를… 너의 무덤을 찾을 수 없었어. 너를 기억하는 사람도 없었고. 그래도 끝까지 너를 찾았어야 했는데. 나는, 나는….”


정말 바보야. 남자는 고개를 숙이려다 거의 앞으로 쓰러질 뻔했다.


“너를 내버려둬서 미안해. 그 말을 하고 싶었어….”


남자를 내려다보던 소녀는 대추를 하나 집어 들어 삼켰다. 오물오물 씹고 있던 중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가만히 떠오른 보조개가 못 견디게 귀여운, 그래서 더욱 슬픈 미소였다.


“참, 알도 굵네.”


남자는 고개를 들었다. 거기에는 이제 더 이상 레인메이커가 아닌 윤초시댁 증손녀가 서 있었다. 소녀가 손을 내밀어 그의 얼굴에 대었다 뗐다. 그녀는 한 여름임에도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스웨터의 소매가 붉게 물들었다. 그것은 남자의 피였지만 어찌 보면 꽃잎처럼 보이기도 했다. 스웨터가 분홍색이라 더욱 그렇게 보인 것일지도 몰랐다.


“이 물, 이번에도 지지 않겠다.”


소녀의 미소가 비에 묻혔다. 남자는 아픈 것도 잊고 놀라 일어났다. 와르르 쏟아지는 비가 소녀를 뒤덮기 시작했다. 느린 산사태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남자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가지 마!”


그때 그의 목소리는 소년의 목소리였다. 추억이 시간을 뛰어넘어 그에게 부여한 목소리….


“가지 마라!”


한껏 거꾸로 끌어당겨졌던 시침이 텅 소리를 내며 멈췄다. 그 순간, 찰나에서 영원에 해당하는 그 순간만큼은 그 소년 그 소녀의 시간이었다. 소년은 무명 겹저고리를 벗어 소녀에게 입혔고, 소녀는 안고 있는 꽃묶음이 망그러지든 말든 소년에게 몸을 기댔다. 과거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만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다는 것이다.


-나, 전에 묻힌 곳에 다시 묻어줘….


시침이 쿵쾅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것은 남자의 심장소리일 수도 있었다. 정신이 든 남자는 어색하게 뻗은 양 팔을 보았다. 그 팔에는 아무 것도 안겨 있지 않았다.

구름 한 점 없이 쪽빛으로 갠 하늘 아래, 남자는 되다 만 판토마임을 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있었다. 그러다 얼마나 지났을까, 남자의 품속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남자는 욕설을 씹어 삼키며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여보세요.”

「임무는?」

“…당신, 내가 그녀를 만날 거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지?”

「언제부터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게 됐지?」

“아아, 그래. 결과가 어떻게 됐냐고? 잘 끝났어. 아주 개같이 잘 끝났지.”

「레인메이커의 제거. 확인했다. 장애물이 사라졌으니 보 건설을 재개할 수 있겠지. 수고했다.」

“그런 인사를 받기에는 일러.”

「무슨 뜻이지?」

“당신 임무는 끝났지만, 내 임무는 지금부터거든.”


남자는 핸드폰을 귀에서 떼고 소리 질렀다.


“잘 들어. 장관이든 국무총리든 대통령이든 간에 이 마을에는 한 발도 못 들어와. 삽질이든 공구리질이든 하기만 해봐, 다 박살을 내버릴 테니까. 강을 살리고 지역 경제를 살린다고? 그런 개소리는 자기네들 키우는 개한테나 하라고 해. 내 말 듣고 있어? 그거 미안하네, 나는 하나도 안 들리거든!”


남자는 핸드폰을 집어던진 다음 그것도 모자라 작대기로 그것을 내리치기까지 했다. 그러자 핸드폰은 레이저 절삭기를 댄 것처럼 깨끗하게 두 동강 났다.

한참 동안 숨을 고르던 남자는 비틀거리며 돌아섰다. 비안개 속에 원두막이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소년소녀가 비를 그을 수 없는 장소였다. 불어난 물에 떠내려가지 않은 것만이 신통할 따름이었다.

겨우 지붕만 남은 원두막을 망연히 바라보다 남자는 돌아섰다. 소녀의 유해는 작대기가 찾아줄 터였다. 그러나 소녀의 유해를 모두 수습한다 해도 남자는 고향을 떠나지 않을 작정이었다. 남자는 유난히 흰 조약돌을 하나 집어 들어 소중히 갈무리했다. 그리고 예전 갈꽃이 걷던 들길로 접어들며 남은 눈물을 마저 흘렸다.

어디선가 ‘바보, 바보’하는 소리가 자꾸만 뒤따라오는 것 같았다.

 

 

끝.

comment (1)

로사기간티아 11.07.24. 20:06
태그ㅋㅋㅋㅋㅋ 처음에는 이능배물인 줄 알았는데 뒤로 갈수록 감동적이네요.

'한껏 거꾸로 끌어당겨졌던 시침이 텅 소리를 내며 멈췄다. 그 순간, 찰나에서 영원에 해당하는 그 순간만큼은 그 소년 그 소녀의 시간이었다.'

특히 이 부분이 너무 마음에 듭니다ㅠㅠㅠㅠ 타임오버 작품에도 한줄 감평은 달아야 할 것 같아서 읽었는데 글 되게 분위기 좋네요 잘 읽었슴다
권한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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