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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우리는 닌텐도DS에 전원을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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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31 Sep 14,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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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칸나기
방과 후. 당번 일을 끝내고 교실 문을 나섰을 때, 핸드폰 시계가 가리키고 있는 시각은 오후 5시 30분이었다.
계절은 해가 짧은 겨울. 덕분에 벌써부터 복도 창문은 감귤색으로 물들어있다.
"하아."
가볍게 입김을 불어본다. 허공을 수놓는 새하얀 숨결을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런. 안돼지. 벌써 이런 시간이다.
난방이 안되는 학교 복도를 추위에 절은 종종걸음으로 지나친다. 춥다. 난방 안하는 걸까. 당번 일지 갖다놓으러 갔을때 들린 교무실은 따듯하던데. 받아먹는 등록금으로 난방이나 하라고.
이런저런 불평을 입에 담으며 내가 도착한 곳은 동아리 방. 나는 겨울 추위에 몸을 떨며 동아리 방문을 열었다.
그러자.
"…안녕."
동아리 방 구석, 철제 의자에 앉아있던 '여자애'가 흐리멍텅한 시선으로 나를 맞이해주었다.
웅웅. 동아리 방에 울리는 건 무미건조한 라지에이터의 소음. 나는 동아리 문을 서둘러 닫으며 부실 안을 둘러보았다.
"다른 애들은 없어?"
창 밖으로 비쳐드는 것은 오렌지 빛깔의 석양. 그 석양빛을 받으며 철제 의자에 가지런히 앉아있는 '여자애'를 향해 묻는다.
방 안에는 나와 여자애. 단 둘 뿐이었다.
여자애는 고개를 기울이며, 그다지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없어."라고 답했다. 뭐, 없는 건 보면 알지만 말이다.
보통 이런 경우엔 어디 갔는지 물어보는 거잖냐.
"…몰라."
이번에도 돌아온 답은 간단하며 심플. 전부터 생각했던 거지만, 정말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제로에 수렴하는 녀석이다.
철제 의자에 앉아 양 손으로 닌텐도 DS를 들고 흐리멍텅한 눈동자로 나를 응시하는 여자애. 소녀. 흑색 생머리에 별다른 특징 없는 이목구비. 뭐, 그래도, 제법 귀엽다고 말해주지 못할 것도 없는 외모.

또래의 여자애들이라면 으레 교복에 여러 손질을 가하기 마련이지만(블라우스를 몸에 꽉조이도록 줄인다던가, 치마의 기장을 쓸데없이
미니스커트로 만들어버린다던가), 눈 앞의 여자애는 그저 자기 몸보다 커, 헐렁거리는 교복을 몸에 걸치고 있을 뿐. 별달리 교복에
손을 댄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자기 언니한테 물려받은 교복이라고 했던가. 원래부터 몸집이 작은 녀석이니 형제의 옷을
물려받은 것만으로는 교복 치수가 맞지 않는 거겠지.
교복만 보면 착실하다고 착각 할 수도 있겠지만. 눈 앞의 여자애가 평소
학교 수업에는 출석하지 않고 이렇게 동아리 방에 틀어박혀 닌텐도DS─그것도 특정 게임 소프트만 즐기고 있다는 걸 고려한다면,
녀석은 그리 모범생이 아니라는 결론이다. 딱히 그게 어쨌다는 건 아니지만.
"오늘 수업은 어쨌냐?"
"쨌어."
"당당하게 말하지 마."
"하지만 4v 핫삼이 갖고 싶은데."
나는 가방에서 DS를 꺼내들며 녀석 건너편에 앉았다.
"그래서 알은 몇개나 깠는데."
"600개."
휘유. 장난이 아니구만.
그것도 다 집념이다. 참고로 녀석의 별명은 자타공인 포켓몬 덕후.
거창하게 '휴대용 게임 동아리'라는 이름으로 활동중인 우리 동아리 내에서도 포켓몬 소프트로 녀석을 이길 사람은 부장 말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애당초 평소 스탠스 자체가 실전멤버를 위해서라면 학업시간을 포기한다…라는 녀석이다.
나도 오늘 하루종일 수업 중이나 쉬는 시간마다 알을 깠지만 150개가 한계였다고.
"좋아. 간만에 배틀이나 해볼까."
하지만 남자라면 무모하다 하여도 벽이 있다면 도전하고 싶어하는 법.
DS
를 켜고 통신모드에 들어간다. BW 소프트부터는 따로 통신모드에 들어갈 필요도 없이 즉석에서 교류가 가능하다는 모양이지만. 나와
녀석이 가지고 있는 소프트는 아직 플라티나(Pt) 버전이다. 번거롭지만 포켓몬 센터에서 일정 절차를 거치지 않으면 안된다.
"룰은?"
"레벨 50대전. 포켓몬은 세 마리. 종족값 550 이상 그룹은 제외."
"치킨(겁쟁이)."
웃.
"그 이상의 조건으로 대전했다간 내 멤버가 못버텨."
하루종일 포켓몬을 판 녀석과 동일 선상에 두지 말아줬음 좋겠다.
"치킨."
"그래서 안할거냐?"
"아니. 할 거야."
말로는 불평을 해대도 녀석은 착실히 통신 모드에 돌입했다.
배틀.
스타트.
내 첫번째 포켓몬은 특공형으로 잠재파워를 전기형으로 맞춘 밀로틱.
녀석은……
"엑. 킹드라. 설마…?"
"물공형."
"봐주라!"
녀석은 망설임 없이 DS를 조작했다. 큰 교복 소매 밖으로 작게 손가락만 나와, 귀엽게 DS 버튼을 눌러나간다.
하지만 그런 귀여운 모션과는 달리 DS 안에서 펼쳐지는 풍경은 대학살☆
내 멤버가 단숨에 두번째 포켓몬으로 교체.
멍하니 DS의 액정을 들여다보며 나는 입을 열었다.
"야. 이번주 토요일날 닌코(닌텐도 코리아)에서 배포이벤트 한데. 갈거냐?"
"?! 갈…거야! 어디? 어디? 어느 포켓몬? 전설? 환상?"
녀석이 꺼내든 초염몽의 반응속도가 좀 느려졌다. 그 사이를 내 대짱이의 눈사태가 파고든다.
"아마 세레비라고 들은 것 같은데. 코엑스에서 할 걸."
"세레비. 환상의 포켓몬. 귀여워."
고개를 흔드는 녀석. 머리카락이 물결치며 흔들린다. 미리 예상한대로 반응하는 녀석이다. 좋아. 그렇다면 나는 신중히 말을 골랐다.
오해하지 않도록. 그럴 여지가 없도록 천천히, 그러면서도 확실하게.
"저… 혹시 괜찮다면 이번주 토요일날 같이 갈래? 점심 정도라면 내가 쏘마."
"……."
윽. 왠지 모르게 녀석에게서 말이 사라졌다. DS 액정으로 얼굴을 파묻는다. 야야. 좀 봐달라고. 왜 거기서 말이 사라지는 거냐.
DS 안에서는 이미 내 두 번째 포켓몬까지 리타이어. 멤버는 세 번째로 넘어간 상태다.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거기엔.
"……."
얼굴이 발갛게 물들어. 초점 없는 눈동자로 DS 버튼을 연타하고 있을 뿐인.
녀석이 보였다.
"……이보세요?"
한동안 말이 없던 녀석은, 간신히, 신생아가 생전 처음으로 호흡을 시작하는 것처럼 힘겹게.
"……그거, 데이트 신청?"  그런 말을 입에 담으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아니아니! 그! 데이트신청이라고 할까! 좀.그냥,같이포켓몬을받으러가자고하는건데! 그,중──간에영화를 보거나,밥을먹는것도.네가원한다면이라는 조건이붙으면할뿐인거고!"
으아아! 얼굴이 불타는 것 같다!
나는 그대로 DS 액정에 키스를 해버릴듯한 기세로 고개를 팍하고 숙였다.
딱히 코나미의 특정 게임소프트를 플레이 하는 것도 아니건만 왠지 모르게 입술에 DS액정보호필름 맛이 느껴진다.
으으. 녀석의 얼굴을 보기가 힘들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좋아."

녀석이 말했다.
"어? 어…?"
"좋아. 좋다고 말했어."
고개를 든다.
녀석의 얼굴은 새빨갰다. 아마. 내 얼굴도 사과처럼 빨갛게 물들어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미 DS 내에서 펼쳐지는 사투따윈 아무래도 좋다. 나와 녀석은 서로를 마주보는 상태로, 그저 서로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말은."
"이번주 토요일. 기대할게."
녀석은 거기까지 말하고 팩 몸을 돌렸다. 응? 방금 그거, 허락 맞지?
그때 끼에엑 하고 비참한 비명과 함께 내 포켓몬이 비명을 지르며 리타이어. 녀석과의 배틀은 내 패배로 끝이 났다.
하지만 어안이 벙벙한 나에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상태. 그런 내게 몸을 돌린 녀석은 그저.  왠지 모르게 들뜬 것 같은 목소리로,
"내 승리. 이걸로 365전 365승이야." 그렇게 말할 뿐이었다.
창 밖으로는 석양. 방 안을 데우고 있는 라지에이터의 훈훈한 열기. 그 안에서 나는 약간의 희열감을 느끼며 DS를 다잡고는
"리벤지전을 신청한다. 이번에는 제한 없이 6마리 대전으로. 어때?"
"……좋을대로."
돌아온 대답은 평소와 다름 없이.
그렇게 내 366번째 도전은 시작된다.

우리들의 일상은 이런 느낌이다

Writer

칸나기

칸나기

네. 나기 여신님 귀엽죠. 저도 좋아해요.

comment (2)

회중시계 11.09.16. 21:01
여러 방면으로 뻗어 갈 수 있는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앞뒤 스토리가 막 상상이 되네요.(최근에 나친적 1권을 읽어서 그런건가;;)

살짝 아쉬운 점은
"?! 갈…거야! 어디? 어디? 어느 포켓몬? 전설? 환상?"
요 대사에서 인물의 모습이 살짝 흔들렸다고나 할까요. 평면적일 필요는 없지만 입체적인 모습을 보여주려면 분량이 조금 더 길어야 하겠고. 입체적이라기 보다는 그 대사만 좀 붕 뜬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전체적인 대화나 묘사는 괜찮았다고 생각합니다.
칸나기
칸나기 작성자 회중시계 11.09.17. 01:14
마침 저도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쿨데레로 유지하는게 낫지 않으려나. 하는 식의 생각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닌게 아니긴 하지만.
DS소녀(가칭)의 저런 모습도 괜찮지 않아? 라고 생각해서 그 대사를 넣어봤습니다.
만약 뒷 이야기가 나온다면 쿨한 가운데 당황했을때 폭주하는 여자아이라는 캐릭터일지도 모르겠네요. DS소녀는.
권한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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