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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이바나시 [수학, BBC, 감자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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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은 실제 인물과는 전혀 관계 없습니다. 절대로 누군가의 이름을 고의로 넣은 게 아닙니다.


"여기는 이렇게 풀면 돼요."
지영이 펜으로 수식을 슥슥 쓰며 말했다. 어느새 노트 한 페이지가 수식으로 가득찼다. 준호는 그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너는 어떻게 이런 걸 다 아냐."
"수학적 직감이에요."
지영은 후훗 하며 웃었다. 준호는 바닥에 누우며 말했다.
"으아…이제는 지쳤어."
"어라? 이번에는 제가 물어보려고 했는데요?"
지영은 알파벳으로 가득찬 노트를 펼쳐서 그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검은색 바다에 붉은 동그라미 하나가 떠있었다.
"몰라. 나 영어못해."
"웃기지 마세요. 매일 학교가면 BBC보는 거 다 알거든요, 미국인."
지영은 그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꾹 누르며 말했다.
"알았어, 알았어. 일어나게 손가락 좀 치워."
"싫어요."
"손가락 부러진다."
"야만인."
"……."
비록 그렇게 말하지만 준호는 쉽사리 지영의 손가락이 부서질 기세로 일어나지는 않았다. 지영은 천천히 손가락을 때며 물어봤다.
"그런데 왜 BBC를 보는 거에요? CNN을 보지 않고? 미국에서 살다 오셨다면서요?"
"영국식 영어가 멋있잖아."
"그래요? 저는 구분도 안 가던데."
지영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준호는 노트를 자기 쪽으로 살짝 끌어당기며 말했다.
"그럼 보자. 이 부분이 왜."
"이 부분이 틀렸다고 지적받았는데 도대체 왜 틀렸는지 모르겠어요."
"음? 아, 이 부분은 해석은 이렇게 되는 게 아니라……."
준호는 파란 펜으로 알맞은 문법과 해석을 노트에 적었다. 이제 붉은 동그라미에 푸른색 배가 하나 매달렸다.
"으아아아아아. 도대체 영어는 왜 이리 어려운 거에요?"
"내가 똑같이 하고 싶은 말이네. 도대체 수학은 왜 이리 어렵냐?"
"영어가 더 어려워요."
그는 무의미한 논쟁으로 빠져들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약 2초후에 다른 주제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면 너는 앞으로 무슨 직업을 잡을건데?"
"수학교수요."
망설임없이 대답이 나왔다. 준호는 도대체 이해를 못하겠다는 듯 한숨을 쉬며 지영에게 물어봤다.
"그렇게 수학이 좋아?"
"네. 수학은 제 인생이에요."
지영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자신있게 말했다. 준호는 도저히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모르는 바람에 이런 말을 내뱉어버렸다.
"배고프지? 먹을 것 좀 가져올께."
준호는 그리고 살찔 것 같아서 싫다는 지영의 말을 못들은 척 하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부엌으로 도망쳐 나왔다.

"살찔 것 같아서 싫다니까 딱 살찌기 좋은 음식을 가져오셨네요."
지영은 쟁반에 올려진 감자칩을 보며 말했다.
"거기다가 여자 후배가 왔는데 감자칩을 가져오는 남자 선배가 어딨어요."
"그러면 뭘 원했는데."
"마블링이 잘 되어있는 스테이크라든가, 고급 참치회라든가, 달팽이 요리라든가."
"우리 집은 고급 레스토랑이 아니야."
거기다가 그런 건 여자랑 데이트할 때도 사주기 힘든 음식이라고 하고 그는 덧붙였다.
"어라? 진짜요?"
"도대체 여자들은 어디서 뭘 보고 그런 환상을 가지는거야?"
"헤헤. 당연히 장난이죠."
그녀는 우스터소스맛 감자칩 하나를 먹으며 말했다.
"드라마 속에서처럼 멋있고 돈도 많은 남자는 아마 현실에 있더라도 찾기 힘들 거에요."
"너도 그런 걸 꿈꾸는구나."
"모든 여자들이 한번쯤은 신데렐라를 꿈꾼다구요."
"워낙에 수학을 좋아하다보니 너는 훨씬 더 현실적일 줄 알았다."
그녀는 피식 웃으며 새 봉투를 열었다. 바베큐 맛이었다.
"그러는 선배도 그런 꿈 꿔본 적 있지 않아요? 공주처럼 멋있고 인형처럼 예쁜 여자와의 운명적인 만남!"
"그런 거 없다는 거 깨달은 지 몇년 지난 것 같아. 아니, 여자친구 자체가 환상 속의 동물인 것 같아. 아마 생기면 진짜로 랍스타같은 거 사줄 수도 있을 것 같아."
"사귀어주세요!"
그녀는 책상을 치고 일어서며 그에게 고백했다. 다른 사람들 같았으면 두근거렸을 상황에 그는 태연하게 중지에 힘을 줘서 꿀밤을 먹였다.
"아야야……."
그녀는 이마를 살살 어루만지며 그에게 쏘아붙이듯 말했다.
"아프잖아요!"
"그런 장난을 쳤으면 그 정도는 각오했어야지."
"만약 장난이 아니었으면요."
"장난이 아닐 리가 없잖아."
"바보가……."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집에 갈 거에요."
지영은 화난 듯 가방을 쌌다.
"뭐야. 벌써 가려고?"
"갈 거에요."
지영은 화난 듯 가방을 들었다.
"진짜로?"
"네!"
지영은 방문을 열고 나갔다. 그리고는 문이 닫히기 전에 준호에게 메롱 하고 혀를 내밀었다.
"꿀밤이 그렇게 아팠나……."
그는 허공에 그 꿀밤을 두세 번 날려보며 말했다. 그는 문득 그 고백이 진짜였으면 어땠을까 상상해보았다. 진짜였으면 좋았을텐데…….
"그럴 리가 없지."
그는 조용히 중얼거리며 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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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하루카나

하루카나입니다. 

comment (1)

버들 11.12.26. 19:36
수학을 좋아하는 히로인은 모든 걸 떠나서 최고입니다
권한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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