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소설회랑

새해를 맞이하여 판갤러들에게 선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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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46 Jan 01,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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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칸나기
아아. 제길. 이제와서 하는 변명이긴 하지만, 혹시나 하고 이런 상황이 일어나지는 않을까 걱정하긴 했었다. 핸드폰을 꺼내들어 시계를 확인한다. 시간은 벌써 밤 10시 43분. 자정까지는 얼마 남지 않은 상태. 나는 어둠 속을 달리는 중이었다.
장소는 시내 한복판. 길거리는 신년을 맞이하기 위해 이리저리 움직이는 인파로 그득하다.
"젠장! 진짜 이놈이고 저놈이고 제야의 종소리를 듣겠다고 이 모양이냐!"
가슴이 답답하다. 아무리 달리고 달려도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는 내 다리를 원망하고, 나를 가로막는 이 인파를 원망했다.
어차피 나도 제야의 종소리를 듣기 위해 거리로 나온 마당에 되먹지 않은 원망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따르릉. 핸드폰이 울린다. 나는 단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바로 받았다.
"어이, 박위래?!"
[아이구야! 귀 따가워! 어이, 나기 씨. 핸드폰에 대고 그리 크게 소리를 지르면 쓰나.]
휴대폰 저 너머에서 들려오는 유유자적한 목소리는, 우리 동아리 "판소리 갤러리"의 부장을 맡고 있는 김사호 선배의 것이었다.
"지금 그렇게 느긋한 말이 나와요?! 부장도 알고 있잖아요! 지금 위래가…!"
내 안달난 목소리에 김사호 선배가 말을 이었다.
[그래. 알고 있다고. 위래, 연락이 끊겼다며?]
"예…. 마지막으로 통화한 게 1시간 전이에요. 그때부터 쭉 전화가 안되요. 방금 전엔 전화해보니까………."
[핸드폰 전원이 꺼진 상태…였지. 뭐, 그건 이쪽에서도 확인했어. 어쨌거나 안달한다고 능사가 아니라고. 소년. 이미 약속장소에 모여있는 판소리 갤러리 부원들을 동원해서 찾고는 있으니 말이지. 일단 위래가 갈 수 있는 모든 장소를 둘러보고 있어. 그러니 나기도 힘내서 계속 찾아봐.]
뭐야. 고작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전화한 거였나?!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있다고!
하지만 그런 말을 입에 담지는 않았다. 아마. 사호 선배도 내가 걱정된 탓에 전화를 해준 것일테니까.
나는 한 박자 숨을 들이 쉬고는 입을 열었다.
"예."


시간은 하루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장소는 학교. 정확히 말하자면 특별교실동에 존재하는 우리 "판소리 갤러리"의 동아리 방이다.
잠깐 여기서 내가 속해있는 동아리인 판소리 갤러리. 그러니까 줄여서 판갤이라고 부르는 동아리에 대해 소개하자면 판소리를 좋아한다던가. 판소리를 하고 싶어한다던가 하는 녀석들은 전부 모여라! 란 취지 하에 개설된 동아리인데. 어찌 된게 판소리는 커녕 "판소리? 먹는 거임?" 하는 녀석들만 줄줄이 모여들어 매일매일을 주구장창 느긋하게 시간을 때우는 동아리가 되어버린 곳이다.
그것이 내가 있는 이곳. 판갤.
그런 판갤에도 어느덧 2011년 12월의 마지막은 찾아오게 된 것이다.
사실상 학교는 이미 겨울방학에 돌입한지라 수업이 없기에 학교에 등교할 필요는 없었지만. 우리들은 어찌어찌 겨울방학이 지속되는 지금도 이렇게 매일 같이 동아리 방에 출석해서 시간을 때우는 것이 일과가 되어버렸다.
학교 입장에서는 뭐 이런 민폐가 따로 없을지도 모르겠다만. 하여간 슬슬 창밖으로 석양이 내려앉는 시간대가 되었을 무렵. 판갤 동아리 방에 모여있는 부원들이 여전히 무의미하게 시간을 때우는 중에.
"좋아. 내일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러 가지. 제군들."
제멋대로 하기 좋아하고 제멋대로 떠들기 좋아하는 우리 판갤의 부장인 사호 선배가 멋대로 입을 열었다.
"제야의 종소리요?"
내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제야의 종소리라니. 뭔 뚱딴지 같은 소리야?
"그래. 내일로 2011년도 마지막을 고하고 드디어 새해 2012년이 찾아온다. 뭐지. 흑룡의 해라고 했던가? 하여간 너희들도 2012년을 맞이해서 슬슬 새해목표라던가 세우고 결심을 해야 하잖아? 판갤이라는 현실에 안주하고만 있다가는 도태되어버릴 거라고!"
흑룡에게 잡아먹힐 거다! 라고 여전히 정체불명의 소리를 하는 부장이었다.
새해라. 그러고보면 어느덧 2011년이 지나갔다. 나의 고등학교 2학년 시절이 이렇게 저물게 된 것이다.
뭐, 되돌아보면 참으로 별 것 없는 한해였지.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 판갤이 판소리 갤러리의 약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그런 판갤에 내 소꿉친구인 위래가 소속되어 있었다는 걸 알았을 땐 약간 놀라긴 했다만. 그건 아무래도 좋을 정도로 판소리랑은 전혀 관련 없는 활동만 1년 내내 주구장창 해대는 데에는 솔직히 진이 빠졌다. 그리고 결국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같이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러 가자니. 하지만 여기서 별다른 반론이 나오지 않는다면 제멋대로 하길 좋아하는 부장의 말대로 단체로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러 갈 판이라. 뭐. 이대로 좋나. 하고 생각하는 사이에
옆에서 번쩍 손을 든 소녀가 있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칼에 눈동자는 어쩐지 모르게 반짝반짝 빛이 나는 여자아이. 그 청순해보이는 이미지와 달리 본인은 바보긴 하지만. 일단 내 소꿉친구. 박위래 양이 부장의 바보 같은 의견에 클레임을 걸었다.
"……저. 그게. 전 내일 예정이 있어서 같이 모이기는 좀, 거시기 한게……"
뭐, 확실히 연말이라면 친구들과 모이기보다는 가족과 모이는 녀석들도 있으니까. 혹시라도 저 바보 박위래가 남자친구랑 연말을 맞이한다는 계획은 아닐테고.
"뭐냐. 부모님하고 같이 보내게?"
내 질문에 위래는
"아, 아니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어차피 부모님은 해외여행중이시고."
어, 엉? 뭐지? 위래의 말에 난 딱 굳었다. 그럼, 뭐야. 진짜 남자친구랑 2011년의 마지막을 보낸다는 건가…?!
"뭐야. 위래 양. 설마 남자친구랑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러 갈 예정이었남?"
부장의 평탄한 목소리가 내 명치 부근을 퍽하고 쳤다. 아니. 저 인간 내가 위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면서도 저딴 소리를 지껄이는 거잖아?!
부장의 말에 한 순간. 위래의 당황한 눈동자가 나랑 딱 마주쳤다. 뭐, 뭐냐. 왜 날 보는 거야. 박위래?!
"서서서설마요! 그냥 집에서 이불 뒤집어 쓰고 맞이하려고 했어요! 혼자서! 외롭게! 아무도 없어 홀로! 얼론(alone)! 제가 남자를 만나다니! 그.그그그럴리가 없잖아요?! 아, 안그래. 김나기?!"
왠지 모르게 당황한 태도로 날 바라보며 소리치는데. 아니, 그걸 나한테 물어서 뭘 어쩌라고!?
"오히려 혼자 연말을 맞이해야하는데에 자괴감마져 느끼고 있었을 정도라……!"
왠지 모르게 폭주한 위래는 거기까지 말하곤 헉하고 입을 다물었다.
방금 자기가 되는대로 주워삼긴 말이 앞에서 한 말과 다르다는 걸 깨달은 것이리라.
"흐음… 그렇다면 역시 우리 위래 양은 쓸쓸하게 홀로 2012년을 맞이해야 한다는 거고. 거기에 자괴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로군. 그렇다면 역시 우리 판갤 멤버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제야의 종소리를 듣는다는 구체적인 활동이 위래양을 구제해주는 구제책이 되지 않을까?"
안그래? 하고 동아리 방을 둘러보며 동의를 구하는 부장의 말에. 샤유나 외길이나, 던사니안까지 전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할 일도 없는데 모여서 놀죠. 술 마시자 술! 하고 말하는듯한 분위기다.
부장의 눈동자는 내게로 향했다.
"김나기, 너는?"
"……위래가 간다면야. 보호자 자격으로 따라갈 수 밖에요."
나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지껄여보였고.
이번엔 부장의 눈동자는 위래에게로 향했다.
"자. 그래서 위래양. 답변은?"
약 10초 정도의 침묵이 흐르고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위래는
"……………저도 갈게요."
그렇게 답했다.
석양이 지고 있던 학교 동아리 방 안에서 일어난, 하루 전날의 이야기.


어제 있었던 일은 고작 그뿐인 이야기였다.
그렇게 부장의 주도하에 따라 착착 이야기는 진행되었고, 결국 12월 31일 몇 시에 어디에서 만나고 어떤 루트를 따라 제야의 종소리를 듣고, 마지막으로 새해를 맞이하며 서로의 소원을 쓴 쪽지를 한데 모아 불태운다는 거창한 이벤트까지 계획한 부장은 그렇게 연말 이벤트를 거침없이 밀어붙였다.
도중에 위래는 매번 부자연스럽게 주위를 둘러보거나. 나랑 눈이 마주치거나, 그때마다 화들짝 놀라는 게 어쩐지 이상한 반응이긴 했다만.
설마 그것이
지금 상황을 예고하는 복선이었을 줄이야.
"위래 녀석. 역시 같이 모여서 노는게 싫었던 걸까."
처음부터 낌새는 있었다. 어쩐지 12월 31일이 되어서까지 판갤 부원들과 모이기 싫어하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고. 말이 횡설수설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나와 눈이 마주칠때마다 황급히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아니, 이렇게 되면 오히려 같이 모여 노는게 싫다기 보다는, 그건 마치, 나랑 마주하기 싫다고 말하는 것 같지 않은가.
나는 한창 인파로 그득한 도보 길을 달리며 생각했다.
"위래…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왜 핸드폰을 꺼놓고 있는 건데? 왜 내 전화를 거절하는 건데? 왜 나를 이렇게 걱정하게 만드는 거냐고.
그렇게 불안감만 커져가는 사이
따르릉. 하고 무미건조한 핸드폰 컬러링이 울렸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고
[김나기. 지금 위래가 어디있는지 알아냈다.]
부장의 말을 듣고, 부장이 지시한 장소로 나는 지체없이 달려갔다.


얼마를 달렸을까.
숨이 턱끝까지 차올랐을 무렵에야 나는 부장이 알려준 장소. 우리 판갤 동아리가 처음으로 결성된 그곳. 우리 학교 뒷편에 있는 뒷산의 꼭대기에 위치한 전망대.
그곳에 도착했다.
현재 시각은 밤 11시 12분
사실 오늘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러 가기 위해 우리 판갤 부원들은 학교 교문에서 밤 10시에 만나기로 합의를 본 상태였다. 그때 이후로 1시간 정도를 줄곧 위래를 찾는데 보낸 것이다.
"하아…. 하아…."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어떻게든 심호흡을 해본다.
그렇게 가슴을 가라앉히고 바라본 정면, 전망대 끄트머리에 나의 소꿉친구이자 판갤의 부원이며, 약속시간이 되어서도 약속장소에 나타나지 않은 악당.
박위래가 있었다.
"……위래. 너 왜 여기있는 거야."
부장이 위래의 위치를 알게 된 건 위래가 뒷산으로 올라가는 걸 목격한 누군가의 증언을 입수한 덕분이라고 했다. 마침 그 장소에서 가장 가까이 있었던 것이 바로 나.
덕분에 가장 먼저 이곳, 위래가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도 나였다.
위래는 그 특유의 어깨까지 오는 검은 머리칼을 흩날리며, 그렇게 어둠 속에 파묻혀있었다.
위래는 차분하게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입을 열었다.
"용케도 찾아냈네?"
"그야 물론이지. 자 빨리 내려가자. 아직 늦지 않았어. 지금이라도 내려가서 부장이랑 모두에게 사과하고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러 가자."
성큼성큼 위래에게로 걸어간다. 하지만 바로 그때.
"……다가오지 마!"
위래가 소리쳤다. 나를 거절하듯
소리쳤다.
"……위래…야?"
"……싫어. 다가오지 마."
솔직히 말하겠다.
충격먹었다. 위래가 나를 보고 다가오지 말라고 하는 그 말을 듣고
내 마음 속 깊은 심지가 뚝하고 부러져나가는 것 같았다.
뭐야. 어째서. 어째서 위래가 나를 거절하는 걸까. 내가 미워져서?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 어제부터 위래의 모습이 이상하긴 했지만.
잠깐 어째서…… 하고 불안감에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정신이 이상해질 것만 같은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신년을 맞이하는 거. 싫어." 하고
위래는 실로 연약한 목소리로.
지금이라도 당장 꺼질듯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박위래?"
"……싫어. 싫다고. 뭐가 새해맞이야. 뭐가 제야의 종소리야. 뭐가 신년을 위한 결심이냐고……! 그런게 다 무슨 소용이라고!"
소녀는 소리친다.
새해 따윈 맞이하고 싶지 않다고.
"어이. 너 무슨 소리냐고. 지금 부장들이 밑에서 기다리고 있……"
"말해줘. 나기야. 새해를 맞이한다고 뭐가 바뀌는 건데? 결심을 한다고 뭐가 바뀌는 거야? 아무리 결심을 하고. 다짐을 하고, 새해를 열심히 보내야지 하고 결단을 해도.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잖아?"
거기서 나는 입을 다물었다.
지금. 위래는 자신의 속마음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벌써 1년이 지났어."
1년. 우리가 판갤에서 함께한 우리들의 1년.
"너는 모르겠지만. 나 말이야. 작년에도 똑같이 판갤 멤버들이랑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러 갔었어. 그리고 거기서 결심을 했어."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 되어서야 판갤에 들어왔지만, 내 소꿉친구는 고등학교 1학년때부터 판갤의 멤버로써 활동했다. 내가 뒤늦게 소꿉친구가 여기 있다는 걸 알게 된 건 고등학교 생활이 시작되고 1년이 지나. 고등학교 2학년이 되어서다.
그러니 나와 달리 위래가 작년에도 판갤 멤버들과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러 갔었다고 해도 딱히 놀랍지는 않다.
하지만.
"나 그때 결심했었어. 목표를 세우고 2011년엔 그걸 반드시 이루어내자고, 자신의 신념을 담아. 소원을 담아 꼭 이루고야 말겠다고."
그리고
"실패했어."
깔끔하게 잘라내듯. 위래는 말했다.
2010년에 세운 목표를, 2011년을 보내기 위한 신념을.
실패해버렸다고.
하지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래도 2012년 만큼은 다를테니까. 위래야 나랑 같이……."
한 걸음 위래에게 다가간다. 어쩐지 모르게 위태로운 분위기를 품은 소꿉친구에게로 다가간다. 허나 도리어 그것이 위래의 신경을 건드린 것일까.
위래는 다시 한 번 내게 소리친 것이다.
"하지만 무섭다고! 한 번 실패해버렸는데! 다시 실패할지도 모를텐데!"
그래서 다시 도전하는게 무섭다.
신년을 맞이하는 게 무섭다.
"나 이번 년도에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어! 결국 이루지 못했어! 아무것도 해내지 못했어! 그런 내가 2012년을 맞이할 수 있을 리 없잖아!"
위래는 겁에 질려있었다. 그저 흘려보낸 2011년이 다시 한 번 되풀이 되지 않을까하는 두려움. 솔직히 위래가 어떤 결심을 하고 어떤 실패를 맛보았는지는 나는 알 수 없지만.
그러하더라도 거기서 자연스레 나는 깨달았다. 아아. 그래. 분명 위래가 지금 느끼고 있을 저 두려움은 실로 나 또한 이해할 수 있는 종류의 두려움이라고.
물론, 나도 그런 종류의 두려움은 갖고 있다.
실로 지난 1년은 아무것도 이룬게 없는 한해였다. 위래가 어떤 다짐을 하고, 어떤 목표를 세우고 한 해를 맞이했는지는 모르지만.
어떤 생각을 갖고 2011년을 보냈는지는 모르지만, 판갤에서 우리들은 분명 무의미하게만 시간을 보내고. 그렇게 세월을 흘려보내왔다.
그렇게만 본다면 분명 우리들은 그 무엇 하나 이룬게 없을 것이다. 그저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냈을 뿐인 것이다.
모두가 손가락질 할 정도로 무의미하게 시간을 낭비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니 위래가 실패했다 말해도 어쩔 수 없다. 우리 판갤은 실로 실패한 시간을.
1년을 보내왔으니까.
그런만큼 다시 한 번 판갤 멤버들과 제야의 종소리를 듣는 다는 것은, 어쩌면 그녀에게 그런 실패한 1년을 한 번 더 강요한다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이미 한 번. 위래는 아무리 다짐하고, 결심하고, 힘내려해도 한 번 실패해버렸다. 그래서 이제와서는 포기하려 하는 걸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나는 것을 피하려 드는 걸지도 모른다.
내년을 맞이하길 거부하려 들지도 모른다.
"위래……."
"……그러니까, 그러니까! 나 여기에 쭉 있을 거야! 새해따윈 안와도 좋아! 시계 따윈 안 볼거야! 그냥 여기서 쭉 가만히 앉아서! 눈을 감고! 귀를 틀어막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테니까! 시간 따윈 흐르지 말라고 그래! 그러니까…………!"
마침 타이밍 좋게 띠링. 하고 핸드폰에 떠오른 메일. 그것을 확인한 순간.
한 발짝 걸음을 앞으로, 텅 하고 자리를 박차는 것으로 내가 신고 있던 스니커즈 운동화가 끼익 하고 비명을 내지른다.
한 마디로 말해 단거리 달리기를 시도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달리고 달려.
지난 1년을 실패했다고.
새해 맞이 따윈 아무래도 좋다고.
시간 따윈 흐르지 말라고 말하는

멍청한 계집애에게 달려가.

"이─── 바보 녀석아!"
쾅 하고 박치기를 했다.

"꺄악?!"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지는 위래. 그 위로 나 또한 무게중심을 잃고 덮치듯 쓰러진다.
그렇게 우리들은 전망대 위를 한데 모여 구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그 상황에서도 입을 열었다.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그야 당연하지 않은가.
우리가 보낸 지난 1년이
"판갤에서 우리가 함께 보낸 1년이 실패한 시간 일리가 없잖아!!"
머릿속에 수많은 상념이 스쳐지나간다. 그 무엇보다, 녀석, 위래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떠오른다.
올해 초엔 서먹서먹했다. 소꿉친구라고 해도 고등학교 1학년 동안엔 서로를 보지 못했었다. 오죽하면 녀석이 판갤에 들어갔다는 걸 고등학교 2학년이 되어서나 알았었다. 그렇게 우리 사이엔 서로 간에 공백이 있었고. 그 공백을 매꾸고, 서먹함을 지우는데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함께 해왔다.
봄엔 동아리 맴버들이 모여, 부장이 주최한 꽃놀이에 참가했다. 거기서 부장이 제멋대로 술을 가져와서 마시느라 온통 난리였지.
조금 시간이 지나서는 왠지 모르게 판소리 동아리인 주제에 부장이 등산회를 열어 산에 올라갔다가 조난 당했었다.
거기서 밤새 위래 녀석의 우는 소리를 들으며 달래주려고 애를 쓰기도 했다.
시간이 또 흘러 여름이 되어서는 부장이 난데 없이 "역시 동아리라면 합숙이지!" 라고 외치며 해변으로 놀러가기도 했었다. 거기서 난생 처음으로 불꽃놀이를 했었다. 하늘을 수놓는 커다란 불꽃을 배경으로 위래와 단 둘이 된 적도 있었다.
솔직히 분위기에 취해 키스까지 할 뻔했는데 부장이 등장하는 바람에 실패하기도 했었지.
그래도 거기서 처음으로 위래와 손을 잡았다.
가을엔 밤을 따러 산에 올라가기도 했고 괜히 위래가 흥에 겨워 방방 뛰다가 가시에 찔리고 상처를 입고 그러면서도 위래는 씩씩하게 웃고 줏어온 밤을 학교 구석에 모닥불을 피워놓고는 구워먹고 그걸 당직 선생한테 들켜서 도망치기도 했다.
겨울이 오고나서는 스키장에도 놀러가고, 스키 초보인 녀석에게 휘말려 눈밭 위를 구르기도 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떠들석하게 시작한 겨울은 시간이 흘러 크리스마스가 찾아왔고 여전히 판소리 동아리인 주제에 아무래도 상관 없을 크리스마스 이벤트를 준비한답시고 열을 올리고 직접 수제 트리를 만들겠답시고 톱을 휘두르다가 창문을 깨먹고 크리스마스 파티를 열고 옆 방에 있던 오컬트 연구부까지 끌어들여서는 떠들석하게 움직이고 마침 당직을 서던 학교 선생님에게 걸려서 설교를 듣고.
연말이 가까워져서는 부실에 틀어박혀 시시덕거리고, 아무래도 좋을 시간을 흘려보내며

우리는 그렇게 한해를 보내왔다.

뭐야.

뭐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거야.
뭐가 실패했다는 거야.
지난 1년은.
우리가 보내온 1년이란 시간은.
이토록
이토록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왼쪽 가슴이 따스해지고, 마음이 훈훈해지는
가슴 충실한 추억이지 않느냐고.

"──안그래, 위래야?"
나는 살풋이 웃으며, 나의 소꿉친구이자, 지난 한해를 같이 보낸 동료를 바라보며 위래의 귓가에 그렇게 속삭였다.
"아무 것도 이룬게 없는게 아니야. 물론 남들이 보면, 그냥 시간을 낭비했다고 욕할지도 몰라. 뭘 그리 태평하게 사냐고 매도할지도 모르지."
우리는 고등학생이다.
해봤자 3년. 아니 아무래도 좋을 고등학교 1학년을 보내고, 판갤에서 고등학교 2학년까지 마쳐버린 지금. 앞으로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고작 1년. 1년이라는 시간만 있으면 우리는 사회라는 거친 전쟁터로 내던져진다.
고교시절이란 그런 전쟁터에 참가하기 전에 태세를 정비하기 위한, 준비하기 위한. 그런 긴장감 넘치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등학교 시절이라는 건 정말 그렇게 삭막하고 아무것도 없이. 홀로 싸움을 준비하기만 하는 고독한 시간인 걸까?
"아니잖아. 그게 아니라는 건 네가 더 잘알잖아."
우리가 보내온 지난 1년은 결코 아무것도 아닌게 아니라고. 그걸 가장 잘 알고 있는 건 위래.
"바로 너 자신이잖아."
함께했다.
1년을 함께했다.
여기엔 없는 부장도, 샤유도, 외길 그 녀석도, 던사니안까지.
우리는 같은 동아리에 들어. 같이 시시덕거리고, 같이 시간을 보내왔다.
우리에겐
"바로 여기에 추억이 있잖아."
나는 왼쪽 가슴을 가리키며 말했다.
남들이 보면 그건 정말 아무것도 아닌, 그저 시간을 낭비한 것일 뿐인, 고작 그뿐인 일이라고 말할지도 몰라.
하지만 아니야. 절대로 아니야. 우리가 보낸 지난 1년은 그저 쓸모 없이 허비해버린 시간이 아니야.
우리가 함께한 1년.
그건 분명히 여기 남아있고. 앞으로도 영원토록 남아 있을 거라는 것을
나는 알고.
위래도.
분명 알고 있다.
나는 거기까지 말하고 입을 닫았다. 현재 시각은 11시 54분. 위래에게서는 말이 없다.
여전히 위래와 내가 자리잡고 있는 위치는 뒷산 전망대의 끄트머리.
거기서 위래는 고개를 도리질 치고 있다.
"───나기, 네 말은 알겠어. 잘 알겠어. 하지만. 그래도 역시. 난."
위래는 거기까지 이르러서도 여전히 고개를 도리질 쳤다. 왜? 하고 묻지 않았다. 위래가 뭘 말하고 싶은지.
나는 알수 있었으니까.
"우리, 지난 1년 동안 헤어져 있었잖아?"
위래가 입에 담기 시작한 이야기는. 그래, 중학교 때까지는 친하게 지냈던 우리가 잠깐. 고등학교에 들어가 헤어진 이야기.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원치 않게 벌어진 단절. 친하고 친하고 친했으며 친했던 남녀, 소꿉친구가 헤어진. 그저 그뿐인 이야기.
"그래서 나 너랑 더이상 만날 수 없다고. 만나도 서먹해서 더이상 이야기 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슬펐어. 정말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팠어."
그리고 나서 찾아온 고등학교 2학년. 거기서 운명적으로 소년 소녀는 재회한다. 1년의 단절을 딛고.
소꿉친구인 둘은 같은 반이 되었다.
"그때 먼저 다가와 준 건 나기 너야…!"
그래, 다시 같은 반이 되었을 때 나도 위래도 서로를 한 눈에 알아봤지만 1년을 헤어져 있었다. 알아봐도 알은 채를 하기가 망설여졌다.
그래서 서먹했다. 아마 입학식이 끝나고서도 이주일 정도는 그렇게 서먹한 채였다고 기억한다.
하지만 그걸 견디지 못한 내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래서 나 기뻤어. 정말 기뻤어! 나기가 먼저 다가와줘서! 2011년이 찾아오기 전에. 2010년 12월 31일에 결심했던 걸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나기가 2010년에 품고. 2011년에 이루겠다고 생각한 소망.
그것을, 나는 알고 있다.
방금 전에 부장이 보내줬던 메일에 아무렇지도 않은 어투로 적혀있던 말.

[그러니까 이게 1년 전에 우리가 2011년을 준비하면서 위래가 2011년에 자기가 이루고 싶은 소망이라면서 적은 쪽지인데──]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보내준 사진은. 2010년 소심했던 소녀가 자신의 마음을 과감하게 담아낸, 신년맞이 소원을 담은 쪽지 사진.
거기엔 이렇게 적혀있었다.
[소꿉친구와 다시 사이좋게 해주세요.]
아니, 그 뒤에 몇줄 허겁지겁 쓰고 나서 지운듯한 흔적에는 분명
[사이좋게 되는 것뿐만 아니라, 그, 저 사귈 수 있도록!]
정말.
뭐냐고.
뭘 우리는 서로 마음을 졸이고 있고
서로 두려워하고 있고
서로 어쩔줄 몰라하고 있는 거냐고.
우리들의 진심은
이렇게나 가까이 있는데.
나는 여전히 내 옆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소꿉친구에게로 입을 열었다.
"우리가 보낸 이번 1년은 분명히 실패한 시간이 아니야. 위래야."
지금 핸드폰이 가리키고 있는 시각은 밤 11시 59분.
나는 천천히 일어나, 위래를 일으켜 세우며.
여전히 겁에 질린 얼굴로, 어쩔 줄 몰라하는 소녀에게.
어딘지 모르게 갸냘픈 눈동자를 한채 나를 올려다보는 나의 소꿉친구를 바라보며.

현재 시각 밤 12시.
2011년이여 굿바이.
컴온 2012년.

데엥~ 데엥~ 하고
어딘지 모를 장소에서 울려퍼지는 제야의 종소리를 배경으로

"저기, 2012년부터는 그, 나랑 사귀어줄래……?"

조심스럽게.
예전부터 계획하고 있었고, 반드시 2011년의 끝을 맞이하고, 2012년의 새해를 맞이하며 결심했던 나의 2012년의 목표를 입에 담아보았다.

"휘유우! 뜨겁다! 뜨거워! 뜨거워서 데일 것 같구만 제군들!"
갑작스레 들려온 정체불명의 목소리에 나는 퍼뜩 놀라 고개를 돌아본다. 거기에 있는 것은 판갤이라는 정체불명의 동아리 부장을 맡고 있는 인물. 사호 선배.
사호 선배는 한 손에는 스마트폰(아무래도 제야의 종소리 실시간 중계 어플을 켜놓은 것 같다.)을 들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입가에 휘파람 용 손동작을 취하고는 야유.
그밖에도 샤유나 외길이나 던사니안이나 전부 지들이 얼굴이 벌게져서는 연애라니, 말도 안돼. 판갤에서 연애질이라니. 나가 죽어라! 배신자들! 하고 소리치는게 들려왔다.
뭐야. 이 바보 자식들은?!
"고것 참 좋은 구경이었네! 역시 나기 먼저 이리로 보낸 것은 정답이었군!"
"부, 부장?!"
내 옆에서 당황하기 시작하는 위래와 또한 당황할 준비를 마치고 있는 내 앞으로 부장은 씨익 웃어보였다.
"자. 그래서 나기의 2012년 새해 목표는 들어보았네만. 자, 위래 양은 어찌할 거지? 마침 판갤 부원들도 전부 모였겠다. 위래 양의 새해 목표를 들어보고 싶은데?"
부장의 말에 나 또한 마음의 귀가 바싹 조여지는게 느껴졌다.
그렇다. 아직 나는 대답을 듣지 못했다.
위래, 나의 소꿉친구, 내가 지난 1년을 함께 해오며 바라보고, 연정을 품어버린 소녀의 대답을 나는 듣지 못한 것이다.
고개를 돌린다. 위래를 쳐다본다.
위래의 눈동자가 좌우 흔들리다가 나를 쳐다보는 것 같더니 다시금 퍼뜩 들어올려지고. 하여간 제멋대로 움직인다.
나 또한 거기에 화들짝 놀라 눈을 내리까는 일의 반복.
그런 지루하지만, 어쩐지 모르게 긴장감 넘치는 서스펜스가 지속되던 도중에 드디어.

"거절할 리가, 없잖…아."

위래는 고개를 푹 숙이고는

"내 2012년 목표도, 그거, 니까."

소박하게나마.
뒤늦게나마.
자신의 목표를.
이번에도 포기하지 않고 2012년이 되어서도 다시 한 번 결심해준 목표를

내게


들려줬다.



이번 이야기의 후일담.
경축!
위래와 내가 사귀게 되었다! 공식 연인사이로 발전! 샤유나 외길이나 던사니안은 아니 이게 무슨 소리요?! 의사양반! 커플이라니! 커플이라니! 하고 소리쳤지만 나는 당연히 무시. 지난 1년을 견뎌내온 것이다. 그래서 이룩한 위래와의 공식 연인 사이 라는 타이틀.
그런만큼. 확실히 내게 지난 1년은 무의미한 시간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물론 위래에게도 마찬가지로

"자! 다음 번엔 저쪽 의류 매장이야! 빨리빨리!"

1월 휴일의 어느날.
나는 위래에게 이끌려 쇼핑 매장을 돌아댕기는 중이었다.
1월 1일부로 공식 연인사이가 된 만큼, 부모님께 인사는 드려야겠고, 그렇다면 찾아뵙는 건 역시 구정이 좋겠지? 그렇다면 그 전까지 입을 옷을 준비해야 돼……! 나기의 부모님은 서양식을 좋아하셔 한식을 좋아하셔? 한복을 입어야 할까? 아니면 정장? 뭘 선택해야 하지?! 라는 위래의 패닉에 우리 부모님은 학생 답게 캐주얼 복장을 좋아……까지 말했을때는 위래가 그럼 역시 평상복을 왕창 사야할지도?! 라고 폭주해버려서.
뭐. 여기까지 이르게 된데에는 그런 일이 있었다고만 일러두겠다.
그렇다.
새해는 찾아왔다.
2012년.
올해는 흑룡의 해.
내 옆에는 흑룡보다도 제멋대로인 소꿉친구가 있지만.
뭐. 좋은게 좋은거지.
고3이 되어서도 우리에게는 판갤이 있다. 우리는 남은 고등학교 시절도 판갤에서 보낼테지.
그건 무의미한 시간이 아니다.
위래와 나는 그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다.
우리들은 앞으로도 매해 새해 목표를 세워나갈테고, 실패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상관 없어.
우리는 함께 하고 있으니까

---------------------

함께 새해를 맞이하자!

다른 누가 아닌 바로 내가!
당신의 판갤질을 긍정해줄게!

Writer

칸나기

칸나기

네. 나기 여신님 귀엽죠. 저도 좋아해요.

comment (2)

수려한꽃
수려한꽃 12.01.03. 03:40
누구 마음대로 위래를...!
제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인정 못합니다!
칸나기
칸나기 작성자 수려한꽃 12.01.03. 13:53
후후후. 하지만 바로 이 글을 판한대 우승작으로 뽑아준 것이 바로 위래 당사자라는 사실...!
권한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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