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소설회랑

산다이바나시. 폴라로이드, 지갑,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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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50 Jan 11,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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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릿새
해질녘의 공원 벤치에는 많은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그냥 갈 곳이 없어 앉아있는 듯한 노인과 스마트폰을 들고 열심히 두들기는 중고생들, 연인들이나 야근을 저주하며 담배를 피워제끼는 근처 사무실의 직장인들이라던가.
거기에는 나같이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며 석양을 감상하는 사람들도 제법 있었다.

"잠깐, 저기요."

바로 앞을 스쳐지나가는 아주머니를 불러세우며 나는 뒷주머니를 뒤적였다. '커피 500원'라고 쓰여진 종이를 코팅해 붙인 작은 손수레를 끌고가던 아주머니는 내 부름에 멈춰섰다.

"뭐 필요해?"
"커피 말고 뭐 다른 거 있어요?"
"뭐 녹차... 아니면 콜라하고 포카리 조금 있어. 천원."
"콜라 하나만 주세요..."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자 아주머니는 그것을 받아들더니 내가 다시 뒷주머니에 넣는 지갑을 쳐다보았다.

"지갑이 두둑하네 그래."
"아, 오늘 알바비를 다이렉트로 받아서."
"요즘 보통 통장으로 넣어주지 않나? 무슨 인력시장 일도 아니고."

껄껄 웃던 아주머니는 다 녹은 아이스박스를 뒤적거리더니 낭패 섞인 표정을 지었다.

"에이구. 이걸 어쩌나. 콜라 다 떨어졌었네. 하긴 오늘 콜라가 잘 나갔어, 애들 상대로 장사하다 보니까... 사이다랑, 포카리랑, 아 맥콜 있네. 이거 괜찮아?"
"네. 그걸로 주세요."

아마 아주머니가 오늘 영업을 했던 곳은 내가 오늘 일했던 곳과 동일할 것이다. 이 근처에서 일주일간 열렸던 아동교육도구 전시회가 오늘 파장했고, 나는 진행요원으로 일했다. 보통 다른 곳들은 자기네 스케줄에 맞춰 일러도 보름, 또는 한달 후에나 정산을 해 주던데 바로 현금으로 지불해 주는게 맘에 들었다.

받아든 음료수 캔의 고리를 꺾자 시원하게 공기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잘 마셔~."
"네 많이 파세요."

이미 많이 팔았겠지만,
뭐 별 의미 없는 인사치레다. 아주머니는 날 스쳐 지나갔고 나는 그저 멍하니 앞을 쳐다보았을 뿐이다. 어쨌든 지쳤고 힘들었다. 노을을 보고 싶었다. 그러려면 눈 앞을 가리고 있는 아주머니부터 사라져야 했다.

하지만 아주머니가 발걸음을 옮겼음에도 불구하고 난 노을을 구경할 수가 없었다. 내 바로 앞, 정면에 눈길을 끄는 어떤 소녀가 있었기 때문에.

샌들에 하얀 원피스 차림이 개운한, 대충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소녀였다. 단정한 단발에 깔끔하고 하얀 얼굴이 고와 자신도 모르게 그 소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말았다. 하지만 무례한 일은 아닐 것이다. 먼저 나를 쳐다보고 있던 것은 소녀였으니까.

시선이 마주치자 소녀는 날 보고 싱긋 웃었고, 나는 당황해 자세를 바로잡아 앉으며 시선을 돌렸다. 아니, 어차피 저쪽이 먼저 보고 있었으니까 당황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그 웃는 얼굴을 본 순간 어쩐지 부끄러웠다.

"저기."
"어, 어?"

어느새 바로 앞으로 다가온 소녀가 말을 걸었다. 잠깐, 나 이런거 약한데.

"옆에 앉아도 돼?"
"어, 어..."

그런 건 굳이 안 물어봐도 되지 않나. 나는 조금 옆으로 자리를 비켰고 소녀는 고맙다고 하며 그 자리에 앉았다.
어디 사는 누군지는 몰라도 학교에서 제법 예쁘다는 소리는 많이 들을 것 같다. 얼굴이 정말 조막만한데다가 눈은 크고 선명하고 입술도 붉다. 뺨은 만져보면 정말 부드러울 것 같은 게... 아니, 이런 생각 하다간 무심코 만져볼 것 같다. 그만 두자.

"뭐 보고 있어?"
"어... 노을?"
"하긴, 이 자리에 앉아서 정면을 보면 시야를 가리는 게 없으니까. 탁 트여서 하늘 구경하기엔 좋은 것 같아."

소녀는 웃더니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늘 보는 거 좋아해?"

웃는 얼굴을 본 순간 왠지 얼굴이 화끈거린다. 부끄러워져서 나는 소녀를 훔쳐보던 시선을 돌려 애먼 하늘만 쏘아보았다. 얘는 왜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말을 거는 걸까.

..관심있나.

아니, 도끼병이 아니라, 아무래도 그렇게 생각하는 게 타당한 상황이잖아.

"어, 보고 있으면 아무래도 좀 마음이 편해지니까... 바람 부는 것도 좋아하고..."
"난 그래서 학교 옥상에 자주 올라가 있는데."
"옥상? 보통 잠궈두지 않아?"
"5층인 본관은 잠겨 있는데 분관 세 개는 전부 열려 있어. 근데 아무래도 곧 폐쇄할 것 같아."
"왜?"

질문을 던지며 나는 소녀에게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대화는 아무래도 상대방을 쳐다보면서 해야 하는 것이니까 자연스럽게 시선이 돌아간 것 뿐이었지만, 소녀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온 순간 내 시선은 더 이상 움직일 생각을 하질 않았다.

"저번에 담배꽁초 버려져 있는게 발견되어서... 필 거면 조용히 피우고 깨끗이 정리하지 왜 그런데에 흔적을 남겨서 다른 사람에게도 피해를 주는지. 애초에 학교에서 피워야 할 정도로 급한가?"

갑작스럽게 뾰로통해진 얼굴이 너무 귀여웠다. 나도 모르게 풀어지는 얼굴 표정을 다잡기가 힘들다.

"그냥 애들끼리 모여서 허세부리는 게 대부분이라... 근데, 분관이 세개나 있어? 어디 학교야?"
"아, A여고."
"아."

A여고면 제법 이름 있는 학교다. 이 지역에서는 좀 떨어져 있지만 이 지역에 있는 여중생들도 그 쪽으로 많이 가고 싶어한다.

"너는 어디야?"
"나 C고."
"이 근처네? 집 이 근처야?"
"응. 이 근처긴 해. 바로 이 공원 맞은편 도로 건너서, 두 블럭만 가면..."
"아, 나 그 근처 있는 독서실 다니는데. 혹시 알아? Y 마트 위에 작년 초 새로 생긴데."
"어, 거기... 처음 생겼을 때 좀 다니다가 말았어. 근데 거기 독서실 다니면, 너도 집 이 근처야?"
"응, 나는 역 쪽에서 살지만... 거기 가는 거 멀지 않으니까. 시설도 훨씬 좋고."

소녀는 씩 웃더니 벤치 위에 놓여 있는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집 가깝네, 우리."
"어... 어. 어."

뭐야, 귀가 뜨겁다. 혹시 나 지금 얼굴 빨갛나. 그도 그럴게 여자애 손에 닿아본 건 처음이어서, 으, 여자는 다른 생물인가. 같은 손인데 왜 이렇게 부드럽지. 너무 부드러워서 닿는 게 부끄럽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지?"
"어? 어, 어. 그럴...지도?"

역시, 나에게 관심 있는 걸까. 그도 그럴게 이런 상황에서 인연을 꺼낸다면 뻔한 거잖아. 으, 이런 일은 겪어 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예쁘고, 성격도 모나지 않은 것 같고, 나도 좀 잘 해 보고 싶은데 이 다음은 어떻게 해야하는거지. 역시, 전화번호를 따야 하나?

"아, 잠깐. 있잖아."

소녀는 내 손을 움켜쥐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소녀가 튀어오른 만큼 내 심장도 튀어올랐다. 그렇게 움켜쥐지 말라고, 심장에 안 좋아. 아, 너무 격한 운동을 한 건지 심장이 욱신거리는 것만 같다.

"왜, 왜, 왜, 왜?"
"저기."

두근거리는 심장 덕분에 말더듬이가 된 나를 향해 소녀는 자비롭게 웃어주었다. 그리고 손 끝으로 사진기를 들고 털레털레 걸어가는 어떤 사람을 가리켰다. 폴라로이드, 사진 촬영 합니다, 이런 걸 가방에 붙이고 걸어가는 사람이었다.

아마 저 사람도 나랑 같은 곳에서 일하다가 퇴근하는 것 같다.

"사진찍자."
"응?"
"나 저런거 좋아하거든."

소녀는 싱긋 웃으며 엉거주춤 일어선 내 손을 한번 더 잡아당겼다.

"만난 기념으로 사진찍자."

그렇게 말하는 데 거절할 도리가 있을 리 없었다. 얼굴이 새빨갛게 익은 채로 나는 소녀의 손에 붙잡혀 폴라로이드 사진사에게 다가갔다. 소녀가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자 우울한 표정이던 사진사는 웃으며 알겠다고 했고, 좋은 위치와 포즈에 대해 조언해주었다.

보아하니까 오늘 장사가 무척 안 된 모양이다.

"자, 찍어요."
"좀 더 가까이 와."

소녀가 내 허리에 손을 감고 끌어당겼다. 잠깐, 이거 너무 과감한 거 아냐?

"하나."

사진에 새빨개진 내 얼굴이 찍히면 어쩌지. 하지만 도망칠 수도 없고. 어쩔 수 없다, 그냥 찍는 게 낫다.

"둘."
"앗."

그렇게 마음 먹은 순간, 갑자기 옆에서 작은 소리와 함께 나를 밀쳐내는 손길이 느껴졌다.

"세..."
"엇?!"

세게 밀어내는 손길에 내가 주춤거린 사이 카메라 셔터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게 뭔 일인가 해 옆을 돌아보았지만 방금전까지 나를 쳐다보던 소녀는 공원 저 편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가고 있었다.

"야, 잠깐..!!"

그제서야 아직 이름도 물어보지 못했다는 게 생각났다. 나는 급히 소녀를 쫒으려 했으나 그런 내 손목을 붙잡는 사람이 있었다. 사진사였다.

"잠깐, 어디가. 값은 내고 가야지."
"사진 찍지도 못 했는데 무슨..!"
"아 그럼 이거 이미 찍은건 어쩔거야! 난 쌩돈 날리라고?!"

장사가 안 되다보니 예민해진 모양이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따질 시간이 없었다. 일단 돈부터 쥐어주고 소녀를 쫒아가기 위해 나는 급하게 뒷주머니를 뒤졌다.

빨리 쫒아가야 했다.
나는 깨달았다. 아아, 소녀는 나에게 중요한 것을 훔쳐갔습니다.
정말 정말 중요한 것을 훔쳐갔습니다.















내 알바비.
내 지갑 내놔 이년아...

comment (1)

더워드 12.01.15. 11:36
통쾌한 반전에 모든 상황이 납득 가게 만든 글쓴이의 유쾌한 가치 판단의 미. 그 미적 감각은 끝까지 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역시 끝까지 보더라도 그런 가치의 변화를 잘 드러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큼, 글쓴이의 판단은 정말이지 훌륭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전개가 마치 초반부라는 점에서 어마어마한 잠재력을 지녔다. 뭐 그런 거겠지만. 잘 보았습니다.
권한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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