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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고갱과 안드로메다 카운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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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 Jan 07,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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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악당6호

 

김고갱과 안드로메다 카운슬러

 

 

 


1

 

귀찮은 광고배너 따윈 없다. 분홍색 하트만이 홈페이지 전역을 메우고 있을 뿐이었다.
[…사람의 온기가 그립지 않습니까? 혹시 모니터 앞에 앉은 당신은, 문 걸어 잠그고 자장면만 빨고 있지 않습니까? ]
나는 말없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어둔 방안에서 홀로 들이키는 자장면은 그 맛이 각별하지만 지금만큼은 젓가락을 놓아줄 시간이었다.
[상담뿐만 아니라 취향에 맞는 고객과의 만남을 주선해드리는 것도 가능합니다. 저희 단체는 국고의 지원을 받아 운영되고 있으므로, 제공하는 모든 서비스는 무료입니다. 전국 어디라도 출장가능하며 거주하시는 곳이 수도권인 경우, 당일 방문가능 합니다. 서비스 신청은 아래의….]
무, 무려 무료? 더욱이 귀찮게 찾아다니고 할 필요 없이 방문까지 가능하다고!?
이거라면 될 지도 모른다. 골방에서 같이 자장면을 먹어줄 친구가 생길 지도 모른다!

갑자기 찾아온 확신의 전율 속에서 나는 24년 만에 감사기도를 올리기로 했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나는 당신의 전지전능함을 가끔 믿었습니다. 비록 이 발견이 야시시한 사진의 출처를 찾다가 배너환승을 잘못한 결과였다 하더라도, 그건 나나 당신에게는 중요치 않을 거라고도 믿습니다.
주소와 이름 연락처까지 전송했겠다, 기다리는 것 외에 할 일이 없어진 나는 신의 축복 속에서 남은 자장면을 먹기로 했다.
출입문은 확실히 잠가 놓은 상태였다.

…아.

 

 

점심 때 자장면그릇은 회수해갔고, 이제부터 먹을 분의 그릇은 내일 찾으러 온다. 오기로 한 택배나 친구 역시 없다.
그렇다면?

드디어 올 것이 온 거다.
「띵동! 띵동띵동띵동―.」
신이시여!

홈페이지를 그렇게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은걸 보면 여, 여자일지도 모른다! 
나는 현관에서 잠시 숨을 가다듬고 문을 열었다.

 

없었다.
여자냐 남자냐 수준의 문제가 아니다.
일 년 전쯤에 종적을 감춘 차임벨 꼬마가 생각났다. 한 동의 차임벨이 동시에 울었던 그 날, 녀석은 전설이 되어 은퇴했었다. 만약 녀석이 돌아온 거라면 강호에 또 한 번 고성방가의 폭풍이 불지도 모르겠다.
하아….

쪼았던 긴장이 낚시로 풀려서인지 나른하다.
아니, 이럴 때가 아니다.
내게는 면발이 불기 전에 자장면의 각별한 맛을 음미해야할 권리이자, 의무가 있었다.  
그렇게 돌아선 내 시선이 창문과 마주친 바로 그 순간이었다.
웅웅웅웅―.
갑자기 들리는 소음에 가슴까지 울렁거린다.
“…….”
자그마치 15층이다. 
그런데 흰색바탕에 분홍 줄무늬가 있는 비행접시가 두둥실 떠있다. 완벽히 자장면 그릇을 엎은 모양이었다. 이 무슨 해괴망측한 미적 감각이란 말인가?
예상치 못한 광경에 넋 놓고 바라보고 있는데 ‘위잉’하는 기계소리와 함께 접시 전면부에서 빨간 머그컵 같은 것이 솟아났다. 그게 지금 이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카운슬러 서비스 신청하신 김철수 씨 맞아요?」
낭랑한 여자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긴 했지만, 대답할 생각까지는 못하고 고개만 끄덕인 나였다.
「그럼 멍청하게 서서 뭐해요? 얼른 안 오고.」
창문하나 없는 주제에 이쪽이 훤히 보이나 보다. 풍선 주제에 안에 카메라라도 달린걸까?

완전히 압도당한 나는 예의 그 머그컵(?)에서 흘러나온 목소리가 시키는 대로 걸어갔다. 카운슬링에 비행접시를 동원한다는 이야기는 듣도 보도 못했다. 그래도 설마 진짜 비행접시와 우주인일 리는 없겠지. 분명 새로운 마케팅의 일종일거다.
그렇게 생각하던 내가 창문을 열고 베란다로 나가는 순간, 비행접시 갑판에서 무거운 철커덕 소리가 났다. 갑판중앙에서 해치가 열렸다. 광고용 풍선이라 생각했던 그것들이 죄다 묵직한 쇳소리를 내고 있었다.

위이잉―! 위이잉―!
자폭경고 같은 소음 속에서, 한 여자가 크리스털로 된 왕좌(王座)에 앉은 채로 갑판위에 나타났다.

그녀는 아테네풍의 백의를 입고 분홍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모습이었는데, 희한하게도 그 머리 위에서 금색 고리가 반짝이고 있었다. 다들 천사의 고리’라 말하는 그것과 무척 닮은 것 같았다.

비행접시도 쓸데없이 디테일하다.

아아! 이 여자 정체가 신경쓰이기 시작했다.

 

 

2

 

“…어디서 오셨습니까?”
“행성 지구요.”
행성’ 지구라…….

“당연히 지구겠지 말입니다. 그러니까 제 말은 회사라든가―.”
“그런 거 없는데요.”
이것은 무슨 소리?
“홈페이지의 회사는 고객을 낚기 위해 꾸며낸 것일 뿐. 공짜로 도움을 주겠다고 광고 해봐도 회사이름 없이는 도무지 믿어주질 않아서요 괄호지구인짜증남.”
“어? 음… 그러니까 사기란 말입니까?”
“안심해요. 회사는 가짜지만 공짜카운슬링해주겠다고 한건 진짜니까.”
‘회사는 가짜지만 공짜카운슬링은 진짜랍니다.’라 말하면 ‘와아~ 다행이다! 진짜다! 공짜다~!’라고 좋아해야하는 겁니까? 당신 도대체 뭐하는 여자야!?
“안드로메다은하 F666행성출신 휴머노이드 ‘마리아’에요. 개인적인 사정으로 지구에서 잠시 카운슬러로 일하는 중요.”
“혹시… ‘개념이 안드로메다로 날아갔다.’고 할 때의 그 안드로메다를 말하는―?”
반짝 떠오르는 생각을 예로 들었는데, 비행접시 본체에 달려있던 빨간 머그컵이 날아들었다. 간신히 피하긴 했다만 적중했다면, 아마 내 머리통도 저것처럼 시뻘겋게 물들었겠지.
“…카운슬링 시작하죠.”
내 첫 카운슬링은 한동안 독기품은 눈으로 나를 깔보던 마리아의 재촉으로 시작됐다.

 

“…아마 없겠지만 친구는 있나요?”
‘아마 없겠지만.’ 이라니 그렇게 실례되는 말을! 당장 기억이 안 나서 그렇지 충분한 시간을 갖고 생각해보면 나올 터다. 이를테면―
“이를테면?”
“…언제, 어디에서든 나와함께 하는 공기라든가.”
마리아는 ‘친구 없음.’이라고 중얼거리며 메모했다.
죽고 싶었다.
“애인은 당연히 없겠고요.”
마리아는 나타날 때부터 해서 지금까지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메모하면서 힐끔거리는 시선이 특히 불쾌했다. 마치 자갈밭을 포복전진하는 구더기를 쳐다보는 느낌이라 할까.
“…저기 말입니다. 공짜라고해도 일단은 카운슬링인데, 우선 눈높이부터 맞추는 게 옳은 처사가 아닌가 싶지 말입니다?”
“괜찮아요. 여기서 봐도 안 불편하니까.”
“그쪽 말고 내가 불편합니다.”
“…….”
그제야 본인의 접객태도에 문제가 있었다는 걸 깨닫기는 개뿔, 마리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을 지었다. 순식간이었지만, 내 훌륭한 동체시력으로 확실히 목격했다. 하나도 안 기뻤다.
“귀찮은데….”

비행접시가 스르르 움직였다.
투덜거렸지만 어쨌든 마리아의 시선이 내 눈높이까지 내려왔다. 앉은 자태는 전혀 바꾸지 않았지만, 더 이상 바라는 건 무리인 듯 싶다.
뒤늦게 든 생각인데 똑같은 선상에서 마주보고 있는 건, 이것 나름대로 송구스러웠다. 이젠 내가 힐끔거리고 있었다.
마리아가 방긋 웃는다. 올려다봤을 땐 한없이 찢어진 것 같던 눈초리였는데, 막상 가까이서 보니 진짜 그랬다. 
“만족해요? 변태.”
“벼, 변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등골에 식은땀이 흐른다.
“정신도 차렸으니 계속하죠.”
정정한다. 머리위의 황금색 고리는 천사의 고리가 아니라 필시 단무지 빛 형광등일 것이다. 사람을 갖고 노는 천사라니, 듣도 보도 못했다.
아. 우주인이었구나, 젠장.
“본인이 무엇 때문에 친구를 사귀지 못하는지 짐작 가는 바가 있나요?”
“그걸 알고 있었으면 이런 카운슬링 따윌 받고 있겠습니까?”
“보나마나 사람들한테 무시당할까봐 나서지 못해서였겠죠 뭐.”

카운슬러라면 최소한의 성의 정돈 보이란 말이다!

와아…, 어이없다 못해 온몸이 화끈거린다.
“…절대로 아닙니다. 그것보다 당신 지금, 카운슬링 할 생각이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물어놓고 왜 대답을 안 듣습니까?”
“몰랐나요? 저는 상대의 마음을 읽을 수 있거든요.”
독심술!?

그, 그런 거였나? 그렇다면 친구가 없다는 것도, 내가 그녀 본인에 대해 생각했던 것 전부를 모니터링하고 있었단 이야긴가!? 괜한 허세를 부렸다. 분위기에 젖어 기네스(Guinness)를 구인네스로 읽고 포스팅한 남자의 눈물을 지금이라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안심하세요.”
“이렇게 된 판국에 뭘 말입니까.”
“뻥이거든요.”
“…….”
그런 거였나.
죽고 싶었다.
“긴장도 풀었으니 계속하죠. 당신이 바라는 친구상은 어떤 건가요? 생각나는 대로 불어요.”
테이블 위의 자장면은 이미 어딘가의 하수도관처럼 불어터졌고, 내 마음은 초면의 안드로메다 출신 우주인에게 얻어맞아 팅팅 불었다.
바라는 친구상? 외톨이 신세에서 탈출해 사람들 속에 평범히 녹아들 수만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싸이코패스 같은 종자만 아니면 된다. 거창하게 말했다가, 이 안드로메다 카운슬러가 되레 심술을 부리기라도하면 그거야말로 큰일이다. 아아, 도대체 이건 어떻게 굴러먹은 카운슬링이란 말인가!

…젠장. 다음이야 어쨌든, 오늘은 이쯤에서 끝내고 싶다.
“특출하지 않아도 되니, 내 말을 들어줄 수 있는 상대면 됩니다.”
마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메모했다.
“알았어요. 오늘 내로 발송하도록 하죠.”
메모를 마친 마리아는 묘한 여운을 남기고 사라졌다.

 

 

3

 

다음날 아침.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깬 나는 별 생각 없이 현관문을 열었다.
인상 좋은 남자가 서있었다.
…왠지 피부가 까칠까칠해 보이는.
키는 나와 비슷했지만 덩치는 그 사람 쪽이 호리호리했다. 쌍꺼풀 잡힌 눈은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배달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처음으로 이 집을 방문한 사람이다. 정말로 잘해주고 싶었다.
그 마리아라는 여자, 심성은 비뚤어졌지만….
정말로 다시 볼 일이다. 더 이상 외톨이가 아니라는 기쁨에, 어제의 원한은 샤워기 앞의 비누거품처럼 사라지는 것 같았다.
“아, 안녕하십니까?”
나는 허리까지 구부려가며 정중하게 악수를 청했다.
“…….”
한손만 내밀어 예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나는 애써 웃는 얼굴을 유지하며 다른 손도 내밀었다.
그런데….
악수는커녕, 대답조차 없다.
유일한 친구인 공기만이 내 손을 잡아줄 뿐이었다.
나는 무안함을 무릅쓰고 이 과묵한 친구의 반응을 눈으로 직접 보기로 했다.
그 친구는 한결 같이 웃고 있었다.
소리 없이, 숨조차 쉬지 않고 웃고 있었다.
아침 공기가 이리도 차가운데 왜 들어올 생각을 안 합니까?
…남들보다 두께가 얇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남들 다 있는 관절이 없었기 때문입니까?
“…….”
정말로 인상 좋은 남자였다.
…스티로폼 패널로 만든.

 

 

“마음에 들었으면 손도장요.”
해질 무렵 어제와 똑같은 시간에 비행접시를 타고 나타난 마리아는, 오자마자 정체불명의 투명 플레이트를 내밀었다.
“무슨 손도장말입니까?”
“서비스해줬으니 도장을 찍어달란 말이죠.”
“독설로 실컷 괴롭히다가 사람모양 스티로폼으로 결정타 날리면 그게 서비스가 되는 겁니까? 소비잘 물로 봅니까?”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스티로폼 사람이 달려오더니 내 뒤에 멈춰 섰다. 정확히는 달린다기보다 발부분에 달린 바퀴가 구르는 것뿐이다. 원리는 잘 모르겠는데,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자동으로 작동하는 그 바퀴만이  쓸데없이 하이테크였다.
“‘당신의 말을 들어줄 수 있는 상대’라는 콘셉트에 충실하게 제작했음요.”
“너무 충실하잖습니까! 볼일보고 있는데 저게 뒤에서 실실 쪼개고 있으면 얼마나 소름끼치는지 압니까? …것보다 제작은 왜 합니까? 제가 무슨 공작품 같은걸 원한 줄 아십니까?”
두 눈은 동그랗게 떴고, 입까지 벌리고 멍때리고 앉았다.
처음이었다.
마리아가 저런 심각한 표정을 지어보인 것은.
…아아, 도대체 이 여자는 날 얼마만큼 만만하게 봤던 겁니까?
“쳇.”
이 여자, 방금 분명히 혀를 찼다. 눈 밑에 짙은 어둠이 드리워졌었다. 순식간이었지만, 내 훌륭한 동체시력으로 확실히 목격했다. 하나도 안 기뻤다.
“할 수 없네요. 이번엔 확실히 불어요!”
이번엔 그래도 의욕이 보인다.
…양보하는 셈치고 한 번 더 믿어보기로 했다.
“외모는 저 스티로폼 수준으로 생겨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절대 스티로폼은 안 됩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영적인 교류. 그저 눈앞에서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게 아니란 겁니다. 알겠습니까?”
“쫑알쫑알 많기도 해요. 귀찮게 시리.”
“당신이 확실히 하라며!”
“이래서 지구인들이란….”
마리아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사라졌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기대 반, 걱정 반인 심정이지만 잠자코 기다려볼 수밖에 없었다.

 

 

이른 새벽.
나는 무언가가 와장창 깨지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불을 켜보니 몇 년 동안 쓰지 않았던 식기들이 공중에 두리둥실 떠있다. 예의 소음은 그 식기들 중 몇 개가 깨지면서 났던 소리였다.
콰직!
그릇하나가 또 떨어졌다. 그나마 플라스틱이라 다행이라고 방심하는 사이 유리그릇 두 개가 박살났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나는 거덜 나기 전에 공중부양하고 있는 그릇들을 회수해 이불 밑으로 집어넣었다.
마지막 두 개를 한 번에 잡아 이불로 가져가는데… 화장실 옆, 구석진 곳에 서있는 거무스름한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사람모양의 그 그림자는 양손에 접시를 든 나를 보며 엄지를 추켜세우고 있었다.
나는 직감했다.
유령이라니 나 참….
“유, 유유유유령!?”
후후, 잠깐 놀라서 발이 문틀에 걸렸을 뿐이다. 고작 몸이 기우는 정도다. 나는 초인적인 순발력을 발휘해 바닥을 짚었다. 접시 두 개는 말끔히 박살났을 뿐이다.
구경하고 있던 유령이 다가와 넘어진 내게 손을 내밀었다.
시도해봤지만 잡을 수 없다.
“퀵! 퀵퀵!”
이해할 수 없다.
의미를 모르겠다.
위이잉―, 철컥!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곁에는 어느새 달려온 스티로폼 사람이 와있었다.
스티로폼 사람을 보니 한 사람이 생각난다.
더도 말고 딱 한 사람.
…그 망할 안드로메다 카운슬러.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영적교류라고 했는데,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존재를 보내왔다. ‘인간 대 인간’ 부분은 어따 팔아먹은 걸까?
이건….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르겠다. 원산지조차 모르겠다.
“퀵! 퀵퀵! 퀵퀵퀵!”
이해할 수 없다.
의미를 모르겠다.

 

 

“…아까부터 ‘퀵퀵’ 소리만 내는 저건 뭡니까?”
“안심해도 돼요. 주문한 콘셉트를 충분히 반영한 끝에 나온 물건이니까.”
“설마 했는데 역시 물건입니까? 진지하게 묻겠습니다. 저것의 도대체 어디가 인간입니까?”
“굳이 꼽자면, 당신처럼 머리와 가슴 그리고 배가 있다는 점일까요?”
“아아, 도대체 당신은 지구인류를 어디까지 깔봐야 직성이 풀리는 겁니까?”
“풀 생각 없음요. 아. 그리고 낮은 퍼텐셜을 가진 지구물질이 아니라, 에테르 체를 기반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항상 대우주의 마음과 직접적 소통하고 있어요.”
“…대우주의 마음과 소통한 결과가 저 소립니까?” 
“설마, 이 천상의 하모니가 안 들리는 건가요? 집중하고 다시 들어봐요.”

귀를 기울이자, 예의  ‘퀵’ 타령이 한층 더 또렷하게 들렸다. 돌아보니, 유령이 곁에서 엄지를 세우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여전히 안 들리잖습니까!?”
“그럼 니가 자격미달이라는 소리에요. 우선 365 레벨부터 달성하시길.”

“…무슨 지구공전 레벨입니까?”

“쉽게 말해서 ‘3.141592653589 ― 3’ 레벨인 당신이 10만년만 노력하면 된다는 소리임요.”

“쉽게 말해서 10만년이지 말입니다. 뭡니까? 나도 모자라 자손전부를 노예로 만들 작정입니까? 예? 설마…, 지구정복입니까? 목표는 지구정복입니까? 자릿수는 넘쳐나는데 레벨1조차 안 되는 버러지들이 노예인데도 기뻐죽겠단 겁니까, 뭡니까? 우와 젠장! 구질구질하게 걸어온 24년 외길인생이 전부 이 싸이코패스 주인을 위한 것이었다니!”
“그러니까 얼른 포기하고 도장요.”
“아악, 젠장!”
한숨을 내쉬며 손을 뻗던 나는 순간 흠칫했다. 언제 이야기가 갑자기 이쪽으로 흘렀는지 떠올려봤지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쳇, 거의 다됐었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마리아가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아무튼 이래가지곤 억울해서라도 도장 못 찍습니다.”
“아, 제발 좀 작작해주세요. 나도 얼른 끝내고 안드로메다로 돌아가고 싶으니까.”
아니, 그걸 나더러 말하면 어쩌라고!?
천사처럼 생긴 우주인이 대놓고 빈정대고 있다. 살아생전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어서 하나도 안 기뻤다.
“진짜 제대로 좀 일합시다. 안 그럼 평생 안 찍습니다?”
“하아….”
마리아는 한숨을 내쉬면서 내 요구사항을 묵묵히 메모해갔다. 에테르니 뭐니 말도 안 되는 물건은 다 집어치우고, 몸과 마음 어느 쪽으로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존재’를 원한다고 확실히 못 박았다.

 

 

다음 날 늦은 아침.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깼다. 며칠간의 해프닝 덕분에 내 마음은 언제나 전투태세다.
나는 유령과 스티로폼사람을 대동하고 문을 열었다.
“캬오!”
발톱세운 고양이가 날 맞아주었다.
말없이 유령과 스티로폼사람에게 의견을 물은 나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너 이거, 엿 먹이는 겁니까?”
“네.”
“내가 당신한테 뭘 잘못했기에 나한테 이러는 겁니까? 예? 이유나 좀 알고 당합시다!”
“어제 들른 식당의 종업원이 불친절했기 때문에….”
“그렇다고 저한테 화풀이합니까?”
“…….”
대답이 없다.
지금까지 행해왔던 온갖 악행을 깨닫고 비로소 빛의 존재로 돌아서기는 개뿔, 초점 흐린 눈으로 엉뚱한 곳만 쳐다보고 있었다.
“제발 내 말 좀 들어주십시오. 일단은 나도 고객입니다!”
“네, 고갱님.”
방긋 웃으면서 대답하는 마리아.
…이, 이번 건 조금 귀여웠다.
제발 그대로만 대해주길 바라는 내 염원이 얼마나 갈지….
“저는 평범한 지구인을 원하고 있는데―, 아아! 또 딴 데 봅니까. 평범한 지구인을― 보란 말입니다, 저를! 평범한, 눈은 또 왜 감습니까? 제발….”
염원? 아하하하~ 염원은 개뿔~★
나는 실랑이 끝에 겨우 주문을 마칠 수 있었다.
마리아가 사라진 풍경은 고요했다.
“아하하하….”
웃음이 나왔다.
‘평범한 지구인을 원한다.’라는 말 전하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이젠 누가 고객이고 누가 카운슬러인지도 모르겠다. 이젠 전부 될 대로 되든지 말든지다.
싫다, 이런 인생.
 

 

4

 

다시 마리아를 만나는 시간이 되었다.
마리아는 언제나처럼 아테네풍의 백의에 단무지 빛 형광등을 머리에 얹었다. 그리고 크리스털왕좌에 앉아 이쪽을 보고 있다.
나를 보고 있는 건지, 아니면 오늘 아침부로 배달된 스티로폼 사람 2호를 보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오늘은 정말로…. 저쪽에서 먼저 사과를 하든지, 진지한 태도를 보이지 않으면 입도 떼지 않을 생각이다. 어리석은 지구인이라 도발해도 오늘만큼은 걸려줄 생각이 없었다.
이쪽을 찬찬히 살피던 마리아가 갑자기 한숨을 푹 내쉰다.
“고갱님 미안요.”

…어?
생각보다 쉽게 풀리는 전개에 맥이 빠지는 기분이었지만 그래도 꼬이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진작 그렇게 나올 것이지.
“니가 생각해도 너무한 거 맞습니까?”
끄덕끄덕.
남 약 올릴 땐 잘만 놀리던 마리아의 입술은 이럴 때만 놀고 있다.
“운전하다가 실수로 살짝 긁었는데 그걸로 난간에 금까지 갔을 줄은 정말 몰랐음요. 하아, 역시 지구문명이란….”
“…….”
그러고 보니 난간뿌리 부분에 못 보던 선이 하나 생겼다. 아까 마리아와의 기싸움에 돌입하기 전에 봤었지만 애써 무시했다. 관심을 주지 않았다.
내 눈치를 살피는 건지 숨죽이고 있던 마리아가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도장요.”
“…역시나 스티로폼 보낸 거에 대해선 전혀 미안한감이 없나봅니다.”
“네. 사실 이번엔 좀 신경써보려 했는데, 카드대금결제 때문에 예산이 모자라서. 그러니까 마음만 받아주시면 돼요.”
“니가 왜!? 그건 그 쪽 사정이고 일 똑바로 안할 겁니까?”
“네, 고갱님.”
“아 놔….”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도 원점으로 돌아왔다. 아니, 정신 쪽은 차라리 마리아를 알기 전이 나았다. 사람 놀리는 것도 정말 정도껏이지.
이젠 이골이 났다.
…부처의 관대함을 지닌 나라도 더 이상은 못 참아주겠다.
“평범한 지구인을 데려와 달라고 말했습니다. 헛짓거리 없이 데려올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것만 압시다.”
“당연히 무리요. 그건 납친데.”
“…카운슬링으로 서로를 이어줄 생각은 없습니까? 아예?”
“…엑!? 혼자서는 좀, 귀찮은데다가, 음…, 귀찮기도 하고…. 귀찮아요.”
“도대체 당신 지구에 뭐 하러 온 거야!?”
“어두운 과거를 청산하기 위해서랄까요? 믿지 못하겠지만 이래봬도 나, 옛날에 좀 놀았거든요.”
눈을 가늘게 뜨고 있던 마리아가 권총 모양으로 만든 엄지와 검지로 턱을 받쳤다. 마치 슬라이드 쇼처럼 다른 포즈를 짓고, 또 바꿔간다. 마리아가 처음으로 왕좌에서 일어난 기념비적인 순간이었지만, 하나도 안 기뻤다.
“만족했어요? 변태.”
아무튼 마리아가 올바르게 자란 어른이 아니란 것만은 확실하다. 그런 절대적인 믿음이 내 마음속에 싹튼 지 오래였다.
분명, 이 여자는 처음부터 제대로 된 카운슬링을 해줄 생각도 없었고, 사회로부터 소외된 약자들을 공짜란 말로 꼬드겨 갖고 놀 생각으로 접근했었던 거다.

정말 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는데….
너님, 고소입니다!
“…….”
…라고 쏘아붙이고 싶었는데, 애초에 비행접시 타고 다니는 우주인을 어떻게 고소해서 어쩌겠단 말인가? ‘안드로메다은하 F666행성출신 휴머노이드 마리아를 사기 및 명예훼손죄로 고소합니다.’ 라고 했다가 내가 정신병원에 체포될지도 모를 일이다.
하아….
정신을 차려보니, 마리아가 영화포스터의  작위적인 포즈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만족했어? 변태.”
이젠 좀 고만해!

더 이상 이야기 할 힘도 없다.
“됐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합시다.”
“혹시 서비스 받기 싫어요?”
적어도 지금은 그럴지도 모르겠다.
대답 없이 멀뚱히 서있자 마리아가 방긋 웃었다. 이번이 두 번째지만, 이번 역시 귀엽다고 생각해버렸다.
죽고 싶었다.
“주문은?”
“말해도 니 멋대로 하지 말입니다.”
마리아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화했네요. 지구인 주제에.”
아니, 지구인류가 니 아버지의 원수라도 됩니까?
너는 대체 지구인류를 어디까지 깔아뭉개야 만족하렵니까?

 

 

다음날 오후.
늦어도 오전 중에는 들리던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며칠 시달렸다가 조용하니, 거짓말 조금 보태서 허전하기까지 했다.
쿵! 쿵! 쿵! 쿵!
…방금 말은 긴급취소다.
문을 열자마자 뭔가가 내 품에 안겼다.
예쁘장한 금발 여자였다. 얼굴이 누군가와 조금 닮은 것 같기도 한데―.
“제발 들어가게 해줘요. 저, 저기! 이상한 사람이 계속 따라온단 말예요!”
여자가 가리키는 곳에는 누군가가 숨을 헐떡이며 뛰어오고 있었다. 이럴 때가 아닌 것 같다. 급한 불부터 끄는 게 우선이었다.
딸깍.
이걸로 안심.
여자와 나는 마주보고 앉았다. 줄곧 자장면그릇만의 안식처였던 테이블에는 처음으로 뜨거운 찻잔이 올라왔다.
그녀가 커피를 홀짝이며 이쪽을 흘긋거린다.
결코 내가 아는 누군가의 시선처럼 기분 나쁘지 않았다. 그녀의 하얀 얼굴 덕분에 방안전체가 환해진 것 같아 되레 황홀했다.
“…고맙습니다.”
그녀의 인사에 나는 말이 잘 나오지 않아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내가 아는 누구와 닮은 것 같다. 풍기는 분위기는 완전 딴판이었지만, 특히 눈매가 닮았다.
…아이돌인가? 아님 게임히로인? 우주인?
정신 차리고 보니, 그녀가 내 머리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
내 뒤에 있을 유령과 스티로폼 사람 1&2호가 기억났다. 아까 그녀가 흘긋거렸던 이유는 분명, 그것들을 보고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일 거다.
…이걸 어떻게 설명한다?
머릿속이 텅 빈 느낌이다.
설명을 해야만 이 오붓야릇한 시간이 이어질 텐데….
여자가 설명을 요구하듯 이쪽 쳐다보고 있다. 하지만 반사적으로 나는 창문 쪽으로 시선을 피해버렸다. 굴러들어온 호박도 못 먹고 있다. 나는 왜 이리도―?
“…젠장.”

"에?"
…있었다.
마치 숨어있었던 것처럼 비행접시가 떠오르고 있었다.
당혹감에 여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뚱한 얼굴이 물음표 서너 개는 띄운 표정이다.
하필이면 왜 이 기적의 순간에―!
「쿠르르르!」
어떻게 숨기고 무마할지 고민할 시간도 주지 않는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베란다 난간이 무너졌고, 왕좌에 앉은 마리아가 찬란한 태양처럼 떠올랐다.
…끝이었다.
여자도 그 광경을 본 이상, 더 이상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안녕, 얼굴만 비추고 떠날 나의 봄날이여.
나는 베란다로 걸어갔다.
마리아가 방긋 웃는다. 이번으로 세 번째이지만 역시… 귀엽다.
죽고 싶었다.
“좋은 분위기였는데 아깝네요.”
“…보고 있었으면 나오지 좀 말지 말입니다.”
“그게 저도 구경만 하려했는데 저 애, 배터리가 다 돼서요.”
저 애? 배터리?
무슨 말씀이신지 잘….
“마리아 5호야, 이리와.”
마리아의 부름에 걸어오는 건 유령도, 스티로폼 사람 1&2호도 아니었다. 조금 전까지 나와 오붓한 한때를 보내던 ‘그녀’였다.
“얼굴을 보면 눈치 챌 거라고 생각했는데… 멍청하군요. 역시나 지구인.”
걸어오는 여자의 얼굴을 다시 본 나는 처음부터 느꼈던 위화감의 이유를 이제야 확인했다.
…마리아와 똑같았다. 특히 눈매가.
남녀 할 것 없이 사람은 머리 빨이라더니, 여자의 금발에 내 혜안이 무디어졌나보다.
“아….”
내 곁으로 다가온 여자는 낮은 기계음을 냈는데, 뜬금없이 입고 있던 옷 채로 가슴이 열렸다. 속에는 붉은 빛을 내는 두 개의 스틱형 부품이 장착되어 있었다.
그것들이 배터리인걸까? 마리아는 크리스털 왕좌의 기계팔로 그것들을 빼내고는, 준비해온 부품으로 갈아 끼웠다. 교체가 끝나자 장착된 부품은 짙은 하늘빛으로 빛났다.
위이잉― 찰칵.
여자의 가슴이 닫혔다.
그리고 내 눈꺼풀도 닫혔다.
낚였습니까?”
“네, 고갱님.”
마리아의 대답이 돌아왔다.
더러운 세상, 이젠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다!
“눈 떠봐요. 아까 구해준 답례로 5호가 드릴게 있다는데.”

“…….”
…고 생각했었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답례하겠다는건데 어쩔 수 없이 눈을 떴다.
설령, 답례라해도 마리아의 부탁이었다면 듣지 않았을 거다.
…아, 그러고 보니 그 여자도 ‘마리아’였다.

젠장! 5호라니, 전혀 위로가 안 된다.
5호는 왼쪽 옆구리의 해치를 열어 손을 넣더니, 찻잔하나를 꺼냈다. 찻잔 속 커피에선 아직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고갱님께서 아까 대접해주셨던 커피지만, 제 마음이라 생각하고 받아주세요.”  
고객을 고갱이라 말하는 것도, 은근슬쩍 사람 속을 뒤집는 재주도 쏙 빼닮았다.

싫다, 이런 인생.
“…….”
“고갱님, 서비스 받기 싫지요?”
“지금만큼은 그런데….”
함박웃음을 짓고 있다.
마리아가 지금껏 지은 표정 중에서 제일 행복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반할 뻔했지만, 이번만큼은 속에 이글거리는 분노를 누르지 못했다.
“…너, 지금 행복해죽겠습니까?”
“죽겠는 건 너뿐이겠지요, 고갱님.”
콰직!
뒤에 있던 스티로폼 사람 1호의 상반신이 박살났다. 스티로폼 조각이 내 머리에 엉겨 붙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왕좌의 기계팔이 뭔가를 갖고 왔다.
“들끓는 고갱님을 위해 준비한 선물요.”
…투명 플레이트다. 손도장을 찍어달라고 할 때마다 내밀었던 그 판때기.
“어느 누가 이 상황에서 만족합니까? 지금 지구인 깔보는 겁니까, 이 싸이코패스 카운슬러가!”
“깔봐왔고, 깔보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깔볼 예정요. 그건 그렇고 이건 당신이 생각하는 그게 아니라, 서비스 계약철회 플레이트니까 빨랑 찍어요 짜증나는지구인고갱님.”
모양은 다를 바 없다. 그냥 투명 판때기다.
그것보다도 계약철회라고?
…애당초 계약 같은 걸 한 기억이 없다.
“후후후 당신은 이미 찍고 있습니다, 고갱님.”
아아, 다른 소리도 들린다.
‘찍어, 찍어, 찍어, 찍어, 찍어, 찍어―.’
마치 머릿속에다 직접 말하는 것만 같았다.
혹시 우주인싸이코패스 마리아의 특수능력이 발동된건가!?
요컨대 텔레파시 같은―
―이 아니라, 곁에서 5호가 열심히 우물거리고 있었다. 귀를 기울여보니 ‘쉬거, 쉬거’하는 바람 새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이게 말로만 듣던 그 복화술인가 보다. 여러의미로 재주가 많은 족속들이었다.
마리아 세트가 이토록 필사적인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다.

단지 진상고객을 떨쳐내려는 이유만으로 이러는 걸까?
글쎄….

 

 

5

 

햇살이 비치고, 새도 지저귄다.
…아침이었다.
바람이 찼다. 프리랜서인데다가 일거리도 이메일로 주고받는 나는, 딱히 일어나는 시간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었다. 이렇게 방안조차 추운 날이면 볼일이 마렵거나, 배고파서 깰 때까지 논스톱으로 자곤 한다.
살갗에 닿는 바람이 차다.
그런고로 오늘도 늦잠으로 결정했다.
…시리다.
이불이 없다. 양팔, 양다리를 휘저어 봐도 없었다.
음?
아.

지금 막, 손에 이불이 걸렸다. 역시 체온으로 덥히지 않으면 이불도 차갑다.
그래서 잡아당겨 덮었다.
무겁다.
나의 오리털 이불은 결코 이렇지 않다.
“…….”
매서운 두 눈이 날 내려다보고 있다.
분홍빛 긴 머리가, 그리고 그 빛깔처럼 상기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얼굴만이 아니다. 이불이라 생각했던 그것은 가느다란 팔다리까지 있었는데, 어째선지 내 손은 그것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 
 “…만족해? 변태.”
속삭임과 함께 딱딱한 판때기가 내 뺨을 가차 없이 후려쳤다. 이젠 모양으로나, 위력으로나 익숙한 투명플레이트였다.

가끔 생각하곤 한다. 

지금 이 순간이 꿈이었면 하고….

 

 

한 달 전 오늘.
나는 마리아의 마음을 떠보려 손도장을 찍는 척하다 말았다.

마리아는 예상대로 혀를 찼다. 이것은 일이 자기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 녀석이 보이곤 하는 습관이었는데, 나 역시 그걸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확증은 없었지만, 나는 남자의 육감을 믿고 도장을 찍지 않았다.
다음 날 나는, 녀석이 비행접시에서 내리는 걸 처음 목격했다. 내 손도장을 노리고 장소불문하고 기어들어오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특히 오늘 아침과 같은 해프닝 덕분에, 지금의 나는 잘 때도 열손가락 전부에 골무를 착용한다. 오늘 그건 분명히 내가 잘때 몰래 손도장을 찍으려고 들어왔다가 재수 없게 걸린 거다. 이건 보증할 수 있다.
이젠 친구대용품도 없고 계약철회니, 만족승인 같은 소리도 안한다. 내 손도장만이 목적이라는 건 딱히 가르쳐주지 않아도 잘 알고 있다. 그걸 볼 때 한 달 전에 말했던 계약철회라는 건, 아마도 거짓말이겠지.
집요하게 내 손도장을 노리는 이유가 뭘까?

초창기에 녀석은 이상한 친구대용품을 배달할 때 얼른 끝내고 돌아가고 싶다.’ 말한 적이 있었고,  지금은 내 손도장을 받는 데만 집착하고 있다.
여유 있는 지금에야 생각해 보건데, 녀석의 귀향여부가 내 손도장 획득유무에 달린 것 같다. 그 자장면그릇 같은 비행접시로 날아가면 될 텐데… 혹시 추방당했다던가 하는 사정이라도 있는 걸까?
“고갱, 케이크 먹을래?”
베란다와 거실에 걸쳐 주차해놓은 비행접시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베란다 난간을 무너뜨린 뒤로, 마음에 들었는지 계속 이러고 있다.
“있으면.”
그 후 나는, 한 지붕 아래에 살면서 어느 정도의 시비나 유머가 녀석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한도선인지 알게 되었고, 녀석, 그러니까 마리아를 ‘녀석’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을 시달리는 일상 속에서 얻었다는 사실이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
“세모난 플라즈마 케이크, 동그란 플라즈마 케이크, 별 모양 플라즈마 케이크 중에 골라봐.”
“…결국 전부 플라즈마 케이크라는 소리군. 먹고 죽으란 건가?”
마리아는 케이크 세 조각을 들고 걸어 나와 테이블 앞에 앉았다. 케이크에 푸른빛 후광이 감돈다. 지난번처럼 알맹이가 메론 케이크일 확률은 몇 프로나 될까?
“걱정 안 해줘도 돼. 죽어도 지문은 남으니까.”
마리아의 대답에, 뒤에서 청소기를 돌리고 있던 5호가 눈을 번쩍였다.
“어서 먹어봐, 메론 케이크야. 먹고 죽어도 책임은 안지겠지만….”
마리아가 이쪽을 보고 씨익 웃고 있다.

녀석에게 시달리는 일상 속에서 지금처럼 눈치껏 몸을 사린다는 건, 여간 신경쓰이고 피곤한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거라면 더 말할 것도 없겠지.

하지만 투닥거릴 상대라도 있는 지금과 방문 걸어 잠그고 혼자서 자장면 빨던 그때를 두고 하나만 선택하라면….

 

글쎄, 아마도….

 

아무튼 지금 확실한 건,

적어도 아직까지 손도장 찍어줄 생각은 없다는 거다. (完)

 

 

 

 

 

 

습작으로 단편을 쓰며 공부하는 악당입니다.

투닥거리는 상황극을  주요 컨셉으로 잡고 써본 실험작입니다. 재미있으셨는지 모르겠네요 ^^;

 

comment (5)

수려한꽃
수려한꽃 11.01.09. 13:39
툴툴거리면서도 다 받아주는 '나'도 귀엽고, 안드로메다 카운슬러 마리아가 하는 짓들도 귀엽고, 아기자기하면서 재밌네요! 잘 읽었습니다!
악당6호 작성자 11.01.13. 08:18
고맙습니다! ^.^
꼬꼬 11.01.14. 02:26
근래 읽은 것중에(출간작 포함) 상당히 괜찮네요.
주인공 독백이나 캐릭터ㅡ유령 대박!ㅡ도 재밌고 아주 재밌게 읽었습니다
악당6호 작성자 11.01.14. 08:27
추,출간작이랑...!! 고맙습니다!
시스네 11.03.03. 18:08
잘 보고 갑니다! 결국 끝은 어떻게 될지 기대되네요.
권한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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