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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이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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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12 Jan 25,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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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모리노

  학창시절의 우리들은 항상 세 명이 함께였다.

  명랑하고 활발한 성격으로 어디서든 분위기를 휘어잡는 묘한 매력을 지녔던 연주와, 부드러운 말씨와 좋은 머리로 언제나 침착하게 우리를 이끌어 주었던 민서. 그리고 비록 내세울 만한 개성은 없지만 보석 같은 친구를 둘이나 두었다는 것만큼은 자랑할 수 있었던 나.

  만화책을 보며 방에서 뒹굴 때에도, 머리를 싸매고 방학숙제를 할 때에도, 수험 스트레스로 몸도 마음도 걸레짝이 되었을 때에도, 우리 셋은 언제나 함께였다. 좋아하는 만화도, 시험 성적도, 지망하는 대학도 달랐지만, 그런 것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서로의 온기를 넘쳐흐를 정도로 전해받았다. 그 무렵의 우리들은 서로의 빛깔로 찬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수학 여행으로 간 바닷가에서 발바닥이 까지도록 모래사당을 뛰어다녔던 기억이며,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비칠비칠 돌아오면서도 눈싸움을 해가며 장난을 쳤던 기억들. 그것들 하나하나가 모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석이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이란 숫자는 참 애매했다. 둘로 나누면 하나가 남고, 셋으로 나누어 버리면 뿔뿔이 흩어진다. 3은 영원할 수 없는 불완전한 숫자였다.

  지리하게 우리를 괴롭혔던 수능 시험이 끝났을 무렵, 언제나 조신하고 우리들 중 가장 수줍음이 많던 민서에게도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 그 민서가 설마 남자에게 먼저 고백을 하게 될 줄은 상상조차 못 하고 있었기에, 조금 쓸쓸하면서도 대견스런 기분이 들었다. 민서는 그 후로도 섬세한 여자아이답게 남자친구를 사귀면서도 우리에 대한 애정을 조금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연주와 나는 그런 민서에게 늘 미안했다.

  민서가 뒤늦게 이성에 눈을 떴을 즈음, 연주와 나는 이미 친구 이상의 관계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이 우릴 어떤 눈으로 보는가에 관해서는 관심도 없었거니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하지만 민서에게만큼은 그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우리들의 관계가 변해간다는 것, 그 자체가 두려웠다. 여자와 여자가 사랑한다는 상황에 대해서가 아니라, 나와 연주가 서로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들키는 것이 두려웠다. 그 두려움이 민서와 우리 둘 사이를 서먹하게 만들었다. 민서가 그렇지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렇게 느꼈던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일종의 죄책감 같은 것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만약 연주와 나의 관계를 솔직하게 털어놓았더라면 민서는 우리를 이해해줄 수 있었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해답이야 어쨌든, 이미 늦은 이야기이다. 우리들의 고교생활은 그렇게 애매한 삼각형을 유지한 채 막을 내리고 말았으니까. 민서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겨울 내내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바빴고, 우린 우리 나름대로 시간을 보내느라 민서를 아쉬워 할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졸업식을 하던 날, 우리는 민서가 남자친구의 손을 잡고 반지를 맞추러 보석 가게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봄이 오고, 가슴을 졸이며 기다렸던 합격 발표일이 찾아왔다. 연주와 나와 민서는 모두 다른 지역의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다. 하지만 서로가 목표로 했던 대학에 합격한 것이었으므로, 섭섭함을 참고 웃으며 작별하기로 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타임캡슐이란 걸 만들었다. 10년 후의 서로에게 보낼 추억의 선물을 단단히 봉해 한 데 묻었다. 셋이 함께 땀을 흘리며 꽃삽으로 흙을 퍼내는 그 순간만큼은, 예전의 우리들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미처 성인이 되지 못한 채 사회로 내몰린 내게, 그 이후의 삶은 가혹하기 짝이 없었다. 내 손으로 등록금을 벌기 위해 하루에도 몇 건이나 아르바이트를 했고, 식비와 교재 값을 제하고 나면 기차를 탈 돈도 없었다. 연주나 민서와 가끔 전화를 통해 나누는 대화가 가장 큰 안식이었다. 하지만 통화가 끝나고 나면 허전함만 남았다. 장학금을 받으며 학교를 다니는 민서나 집안 사정이 넉넉한 연주는 나만큼 힘들게 사는 것 같진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셋은 결국 그렇게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길을 걸었다. 이게 찢어진 3의 종말이구나, 하고 나는 어두운 방에 홀로 앉아 탄식했다.

  시간은 그 뒤로도 더디게나마 확실하게 흘러, 나도 대학을 무사히 졸업하고 작은 회사에 취직할 수 있었다. 민서로부터 청첩장이 도착한 것은 그 무렵으로, 신랑은 고등학교 때부터 사귀어 왔던 그 남자인 모양이었다. 그 때는 나도 직장에 적응하느라 여유가 없는 시기였던 까닭에 전화를 통해 축하해 주고 선물로 사과 한 박스를 보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민서는 아쉬운 목소리로, 그렇구나, 언제 우리 셋이서 꼭 다시 모이자. 너희들 얼굴이 너무 보고 싶어. 그렇게 말했다. 나는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다음에는 반드시 찾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 보겠다고 민서를 달랬다. 하지만 결국 그럴 기회는 오지 않았다.

  결혼식이 있었던 이듬해 겨울. 민서는 어릴 적부터의 지병이 악화되어 결국 세상 밖으로 길고 긴 여행을 떠났다.

  장례식장에 들어서 평온하게 잠들어 있는 민서의 얼굴을 보자, 그간의 기억들이 모두 눈물이 되어 한꺼번에 쏟아져 흘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역시 민서는 내가 살아온 삶의 반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열하는 내 등을 누군가가 힘껏 안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내 다른 반쪽인 연주가 초췌한 얼굴로 입술을 악문 채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엎드려 한없이 울었다. 왜 좀 더 빨리 만나러 오지 못했을까. 도대체 뭐가 그렇게 두려웠던 것일까. 서로의 차이마저도 사랑할 줄 알았던 어린 시절의 우리들에게 사과하고 싶었다.

  장례식이 끝난 후, 연주와 나는 기차를 타고 우리들의 모교로 향했다. 과거의 우리들이 묻어 둔 타임캡슐이 있는 곳으로. 10년 뒤에 다같이 열어보기로 했던 약속은 이미 지켜질 수 없었다. 그래서 아직 6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예정보다 일찍 그곳을 찾았다. 그곳에 남겨진 것은 민서의 마지막 흔적이었다.

  연주와 나는 꽃삽 하나씩을 손에 들고 약속했던 나무 앞에 서서 서로를 마주봤다. 그리고 옷이 더러워지는 것에도 아랑곳않고 흙을 퍼내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삽 끝으로 딱딱한 무언가가 닿아왔다. 손으로 흙을 걷어내니 작은 플라스틱 상자가 나왔다. 상자 안에는 예쁜 손수건으로 싼 덩어리가 세 개 들어있었다. 하늘색이 연주 것, 꽃무늬가 내 것, 분홍색이 민서 것이었다.

  연주가 빙긋 웃으며 자기 것을 풀어놓았다. 나도 내가 남긴 물건의 봉인을 뜯었다. 사실 나와 연주는 서로 뭘 넣을지 미리 상의해서 결정해 두었었다. 원래대로라면 4년 후의 오늘 즈음에는 건강한 아기를 낳았을 민서에게 보내는 아기 옷과 기저귀 세트. 이제는 그 목적을 잃어버린, 쓸쓸한 물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이나 말없이 앉아 있던 우리는, 마지막으로 상자 안에 덩그러니 남아 있는 민서의 타임캡슐을 꺼내 조심조심 그것을 열어 보았다.

  거기에서 나온 것은 한 쌍의 반지와 포스트잇으로 만든 작은 편지였다.

  편지에는 반듯한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예쁘고 소중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나의 친구들에게.
                                                          - 민서]

 

  불현듯 목이 메었다.

  모든 것을 알고도 따뜻한 눈으로 우리를 지켜봐 주었던 민서가 거기에 있었다. 남자친구와 함께 보냈어야 할 고교 시절 마지막 겨울방학을 통째로 빚어 만든 사랑의 선물과 함께.

  연주와 나는 민서가 남기고 간 선물을 각자의 오른손 약지에 끼어 보았다. 마치 오늘을 위해 만들기라도 한 듯이 알맞게 손가락을 감싸는 반지의 감촉에, 눈물이 흐르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이런 차가운 겨울의 어느 날, 우리들은 시린 바람 사이로 하얀 입김을 내뱉으며 눈싸움을 하고 있었다.

  민서가 내 얼굴에 눈덩이를 던지며 말했다. 사랑해! 연주는 민서 뒤로 몰래 돌아가 옷 사이로 눈을 한 움큼 집어넣으며 자기도 사랑한다고 소리질렀다. 나는 배를 붙잡고 웃으면서도 열심히 눈덩이를 빚어 민서와 연주에게 마구 던졌다. 나도 너희들을 사랑해.

  이 세상의 모든 눈을 녹여버릴 만큼 사랑해.

 

 

 

  3은 참 애매한 숫자다.
  둘로 나누면 하나가 남고,
  셋으로 나누면 뿔뿔이 흩어져 버린다.
  하지만 평면 위에 찍힌 세 개의 점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훌륭한 삼각형을 그려낼 수가 있다.
  각자의 길을 택하고 그 위를 걸어감에 따라
  반듯하던 정삼각형이 균형을 잃는 일도,
  너무나도 커진 삼각형이 한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우리는 분명,
  서로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comment (2)

이재한 12.02.07. 09:24
잘 봤습니다. 아련한 이야기네요.
권한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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