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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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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18 Jan 25,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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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모리노

  우리 학교는 여고다. 그리고 커다란 도서관이 있는 것이 자랑이다. 장서 수는 학술서를 포함 2만권으로 대학 도서관 규모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고등학교 수준으로는 최고 등급의 숫자를 보유하고 있으며, 공간도 무척 넓어서 붙어 앉으면 넉넉잡아 백 명쯤은 앉을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그러나 복지가 좋은 우리 학교가 전산실에도 투자를 시작하면서 책을 찾는 학생들의 발길이 점차 끊기게 되었고, 국내 최고의 고등학교 도서관이라는 이름도 요즘은 무실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다만 시험기간에만 학업을 위해 찾는 학생들이 있을 뿐으로, 실은 나도 그 중 한 명이다. 남 일처럼 말하지만.
  수능시험을 앞둔 수험생들 틈바구니에 끼어서 기말고사 공부를 한답시고 책을 펴고 앉아 있기는 한데, 사실 원래부터 태평한 성격인 나는 아직 고등학교 2학년이었기 때문에 딱히 입시에 대한 압박감은 갖고 있지 않았다. 문제는 우리 엄마가 요즘 들어 친구들과 나를 자꾸 비교하며 내신 성적의 저조함을 지적하고 있다는 거다. 반에서 평균 정도만 하면 그만이었던 내가 저녁을 먹어야 할 이 시간에 학교 도서관에 앉아 있는 건 전부 그것 때문이다. 이미 좋다고 할 수 없는 내신을 이제 와서 끌어올려 봐야 입시에는 도움이 하나도 안 될게 뻔한데, 엄마들의 경쟁이라는 건 참 무섭다.
  그렇게 공부와는 거리가 먼 딴생각을 하며 앉아 있던 내 맞은편에서 여자 애들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한 쪽이 무언가를 묻고, 다른 한 쪽이 거기에 대답하고, 그에 다시 이야기가 이어지는 식이었는데, 목소리가 크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중요한 것은 그 대화가 이루어지는 장소가 바로 도서관이라는 점이었다. 곧바로 신경이 곤두선 수험생들의 시선이 쏟아졌지만 그 애들은 눈치가 없는 편인지 그에 아랑곳없이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딱히 공부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닌 내가 뭐라 할 입장은 되지 못하고, 귀찮기도 하고, 그렇게 스스로에게 변명하며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데, 그런 나조차도 슬슬 누군가가 주의를 줄 때도 되지 않았나 생각하게 되었을 즈음, 갑자기 대화 속으로 한 목소리가 끼어들어 다른 목소리들을 완전히 잠재웠다.
  그 차분하고 청량감 있는 목소리는 ‘조용히 해’라든지 ‘그만둬’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대화를 하고 있던 학생들이 의문으로 하고 있었던 점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설명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목소리에는 압도적인 힘이 있었다. 모두를 침묵하게 만드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오른쪽 팔에는 초록빛 도서위원 완장이 수수한 모양의 팬시 클립으로 끼워져 있었다.
  이윽고 설명을 마친 그녀는 소음의 발신지였던 학생들에게 눈으로 물었다. 이만하면 설명이 됐을까? 그녀의 눈빛을 마주본 아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곧바로 일어섰다. 오른팔의 도서위원 완장이 조금 팔락거렸다. 그리고 도서관에 앉아 있는 모두를 한 번 둘러본 뒤,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의 도서관 이용에 불편을 드린 점 대단히 죄송합니다. 저희 도서위원은 앞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겠으니 이후로도 적극적인 도서관 이용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말을 마치고 자리로 돌아간 그녀는 의연한 태도로 읽던 책을 다시 펴들고 읽기 시작했다. 아무도 무안한 꼴을 당하지 않았다. 공기 중에 떠다니던 불쾌감이 씻은 듯이 사라진 것도 확실하게 느꼈다. 나는 박수라도 쳐야 할 것 같은 기분을 억누르며 책상 위에 놓인 명판을 통해 그녀의 이름을 확인했다. 이름은 정은주다. 모두가 고개를 돌리고 다시 학업에 열중하게 되었을 무렵까지도 나는 그녀의 이름 석 자만을 되새기고 있었다.
  책에는 도통 관심이 없던 내가 도서관에 매일 출근하게 된 것도 바로 그 날부터다.

  발도장을 찍기 시작한지 2주일째 되던 날 즈음에는 사소한 것들이나마 은주에 대해 이것저것 알게 되었다.
  우선 도서위원은 당번제로 8인 1조가 격주로 근무한다는 점. 그녀는 월, 수, 금요일 방과 후에 남아 도서위원으로 일하지만 항상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서고를 둘러보며 책 정리를 하기도 하고, 무슨 작업을 하는지 학교를 분주하게 돌아다니기도 한다.
  그 후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우리 학교에서 도서위원은 학생회장보다 많은 업무를 보고 있단다. 새삼 그녀가 더 눈부셨다.
  그리고 도서관 입구에 매주 새롭게 붙어있는 ‘금주의 추천 도서’란에 그녀가 항상 한 권씩을 올려놓고 있으며, 총 5~6권 중 가장 쉽고 익숙한 제목을 꼽으면 대체로 그녀가 추천한 도서들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개중에는 동화도 있고 교과서까지에 실린 스테디셀러도 있었다. 교내 도서관 이용 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일부러 쉬운 책을 고른 건지, 아니면 정말로 그런 책들이 취향이기 때문인지 까지는 내가 알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단지 어느 쪽이든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따름이다.
  한 달이 지났을 무렵에는 그녀도 내 얼굴을 기억하고 눈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날듯이 기뻤지만 딱히 내색은 하지 않은 채(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는지에 대한 자신은 없다) 그 인사를 고개를 끄덕여 받기만 했다.
  이윽고 수능 시험이 끝나고, 본격적인 한파가 찾아와 겨울을 알렸다. 그 때가 되어서야 나는 서고에서 꺼낸 ‘어린 왕자’ 한 권을 손에 들고 사서대를 찾았다. 시기가 시기인지라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한적한 날이라 도서위원도 은주 혼자뿐이었다. 내가 책을 들고 다가서자 그녀는 읽던 책을 덮고 대여 등록을 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나는 책을 내미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재미없고 짧은 인사였지만, 잔뜩 긴장한 나로서는 이게 최선이었다.
  “안녕하세요.”
  그녀는 의연하게 대답했다.
  “은주 씨는 고등학교 2학년이죠? 저도 2학년이에요. 하지만 아직은 존댓말을 쓰고 싶어요. 괜찮겠죠?”
  “네, 괜찮아요.”
  그렇게 대답하는 그녀의 긴 머리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민 하얀 귀가 약간 곰실거린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눈의 착각이었다. 그녀는 실제로 고개를 약간 갸웃거렸다. 반칙이다. 이 시점에서 그런 행동은 반칙이다! 하지만 나도 오늘 이 순간까지 꾹꾹 참아 온 몸이다. 물러서지 않는다.
  “은주 씨는 ‘어린 왕자’라는 책을 알고 있나요?”
  “네, 알고 있어요.”
  나보다 책을 더 읽어도 수백 권은 더 읽었을 그녀인데도 ‘당연하죠’, ‘물론이죠’라는 대답이 나오지 않은 것이 정말로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다. 그렇기에 반한 거다. 이제 와서 일일이 놀라고 있을 수 없다. 나는 가능한 한 태연하게 말을 잇는다.
  “‘어린 왕자’에는 이런 장면이 있잖아요. 자기네 별에만 있는 줄 알았던 꽃이 사실은 수많은 개체들 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실의에 빠진 어린 왕자가, 여우를 만나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장면 말이에요.”
  “네, 있어요. 좋은 내용이라고 생각해요.”
  은주는 진지하게 눈을 빛내고 있다. 분명 그녀의 추천 도서 중 ‘어린 왕자’도 끼어 있었다. 도서관 이용 의식 고취를 위한 배려 따위가 아니다. 그녀는 진심으로 그 책들을 좋아했던 것임에 틀림없다. 점점 내 가슴도 뛰기 시작했다. 아니, 거짓말이다. 처음부터 죽을 만치 뛰고 있었다.
  “처음 만나 인사를 교환하고, 같이 놀자는 어린 왕자에게 여우가 이렇게 말하죠. ‘난 너랑 놀 수 없어, 난 길들여지지 않았거든’ 이라고 말이에요. 그렇죠?”
  “네, 그렇게 말했어요. 대사까지 외우고 있다니, ‘어린 왕자’를 정말 좋아하는가 봐요.”
  네, 물론 이 날 이 순간을 위해 죽도록 암기한 거랍니다. 그런데 큰일 났다. 칭찬을 들었더니 머리가 새하얗게 되어서 다음 대사가 생각나지 않는다. 그녀는 여전히 진지한, 그리고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다.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다. 안 돼. 뭐라도 말해야 한다. 지금 당장!

  “나, 나, 나는, 여우가 아니라 당신을 길들이고 싶어요!”

  라고, 나는 폭탄선언을 했다.
  망했다. 장렬하게 망했다. 다 뛰어넘고 마지막 대사부터 쳐 버렸다.
  힘이 빠진다. 나 치고는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해서 외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얼굴을 맞대었을 때의 충격파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이건 틀림없이 태평하게 살아온 나에게 내린 천벌이다.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새하얀 백지가 된 머리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은주가 웃음을 참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그럼 여기에서 제가 ‘제발…… 날 길들여줘!’라고 말할 차례인가요?”
  “그래요! 바로 그거야!”
  그렇다. 이게 바로 예상했던 대답이다. 그녀라면 그 정도 대사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을 거란 걸 나는 알고 있었다. 나와는 달리 읽고 또 읽어 대사를 달달 외우고 있을 정도일 것이다. 그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는데도, 앞뒤 다 잘라먹은 내 계획이 정통으로 성공해버린 기쁨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컸다. 나는 지금 당장 그녀를 꽉 안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참는다. 여기까지 와서 변태로 몰리고 싶진 않다.
  그리고 고민하는 내가 다음 행동을 취하기 전에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친구가 되어 주어서 기뻐요, 민아 씨. 정 은주입니다.”
  이렇게 나는, 어느 겨울의 도서관에서, 긴 머리와 지적인 눈매를 가진 매력적인 도서위원과 서로를 길들이는 사이가 되었다. 마침 형편 좋게도 밖에는 슬슬 눈이 내리고 있다. 정말로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좋은 타이밍이다. 해피 화이트 라이브러리.

comment (1)

창공의마스터
창공의마스터 12.01.27. 09:28
"'제발...... 날 길들여줘!'라고 말할 차례인가요?" 다음에 옷을 벗기 시작하면 에로망가가 될 것 같은 전개로군요! 동시에 도서위원이 평소 들고다니던 시집의 겉표지가 벗겨지면서 '내 노예가 이렇게 귀여울리 없어'가 모습을 드러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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