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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말엮기] 초콜릿 프래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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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 깨어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전 여자친구는 말했다. 생일이었고, 그녀는 내게 참새 모양의 알람시계를 선물했다. 시계의 겉면은 매끈매끈해서 만져 보면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어때, 마음에 들어?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그녀는 말했다. 마음에 안 들어도 마음에 드는 척 해.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고른 거니까.

그래, 마음에 들어. 그렇게 나는 대답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곧 이 참새를 증오하게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겉으로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으면서도 쓸데없이 낭만적인 걸 좋아했다. 새소리로 사람을 깨운다니 그게 무슨 미친 아이디어야.

물론 그녀 앞에서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날 밤 우리는 함께 잠들었고 바로 다음 날 나는 그녀가 저주의 말을 내뱉으면서 참새를 내던지는 소리에 깨어날 수 있었다. 그 이후로 나는 그 시계를 좋아하게 됐다. 단지 알람만 맞춰 놓지 않으면 되는 일이었다. 그녀가 내 곁에서 사라진 이후에도 참새시계를 보면 그녀가 참새를 던지는 모습이 생각나서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그 날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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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멍한 머리로 깨어나 오른손을 몇 번 옆에다 내려쳤다. 머리맡에서 사라진 베개가 어느 시점에선가 손에 잡혔다. 베개로 머리를 감싸고 신음하면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하지만 저 빌어먹을 새소리는 더욱더 날카롭게 내 귓속으로 파고들 뿐이었다.

나는 히치콕 영화에 나오던 미친 새떼를 생각하면서 드디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곧바로 눈앞의 참새를 발견하고 그걸 집어들어 벽에다가 내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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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조용해졌고 나는 다시 잠자리에 누워 평온을 얻을 수 있었

“정말 폭력적이네요.”

어야 했을 텐데 실제로는 그렇지가 못했다. 냉소의 빛을 띤 앳된 여자아이의 목소리에 나는 자리에서 펄쩍 뛰어 일어났다. 문간에서 중학생 정도 되어보이는 여자애가 날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실사판 앵그리 버드 보는 것 같았어요, 선배.”

“뭐야, 너.”

나는 당황해서 크게 소리치려 했지만, 목소리를 높이는 순간 머리를 울리는 둔직한 고통에 금세 목소리를 죽이고 머리를 싸쥐었다.

“아야…”

“숙취가 심하신 것 같네요.”

그런 날 바라보던 여자애가 혀를 찼다.

“숙취해소음료 줘요?”

“아니, 난 그런 거 안 마셔. 냉장고에 아이스크림 있을 텐데 그거나 하나 가져와. 바닐라로.”

“아 네, 부탁대로 해드리죠.”

여자애가 떠난 다음 나는 비틀거리며 방 밖으로 나가려다가 뭔가 매끈하고 둥근 걸 밟고 몹시 거창하고도 비참하게 넘어지고 말았다.

“아야야야…”

황록색 초코소주 병이 나를 업신여기듯 쳐다보고 있었다. 병 겉면에 그려진, 달관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쥐양이(쥐와 고양이가 혼합된 것처럼 생겼다는 소리다) 캐릭터를 쳐다보고 있자니 간밤의 기억이 흐릿하게나마 떠오르는 것 같았다.


하하호호 깔깔깔

야 마셔 그래 술 좀 더 가져오고

놀아 놀라고 이히 끼야호오


“아…….”

그제서야 나는 지난밤에 무슨 일이 있었고 또 저 여자애는 누구였는지를 기억해낼 수 있었다.

지난밤은 메이헴 한국지부 소속의 아는 청부업자들끼리 모여 간만에 모두 의뢰가 없이 프리인 날을 기념해서 한바탕 먹고 마시는 날이었다. 참고로 메이헴이란 일종의 청부업자 커뮤니티 같은 건데, 간단히 말하자면 대체로 인간을 초월할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지만 영 사회생활이나 재테크에는 서툰 청부업자들이 먹고살 정도의 의뢰는 받을 수 있도록 중간에서 일을 중개해주는 역할을 하는 그런 조직이었다.

그 중에서도 메이헴 한국지부는 한국의 메이헴 소속 청부업자들끼리 모여 서로 의뢰도 도와주고 친목질도 좀 하면서 재밌게 놀고 먹는 유쾌한 모임이었다. 그렇지만 사실 메이헴에 소속되지 않은 청부업자들이나 조폭 관련자들도 있고 나중에는 서로서로 지인들을 끌고 오면서- 대충 이쪽 세계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들에 한정해서지만- 뭔가 규모도 커지고 하는 것도 많아진 이상한 사람들 연합회가 되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어젯밤 우리 집에 집결했다. 이 집이 쓸데없이 넓다는 점에 주목해서.

전원은 아니었지만 꽤나 많은 사람들이 모였었기 때문에 정말 온 집안이 엉망진창이 되었던 것 같다.

저 여자애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혼자 조용히 앉아서 코코아나 홀짝이던 모범 여중생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청부업자로서의 이름은 분명 ‘ABC’.

전문분야는 뭐였더라.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아마 평소에는 그냥 성실하고 조용한 여중생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들은 것 같았다. 하지만 가족이 전부 뿔뿔이 흩어졌기 때문에 오늘 아침까지 우리 집에 있어도 딱히 상관없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도대체 참새 알람시계는 왜 몇 년만에 울린 거지.

그렇게 머릿속을 정리하고 있는데, 여자애… 아니 ABC가 다시 내 앞에 나타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ABC의 발이 내 눈앞에 나타났다. 아까 내가 초코소주 병을 밟고 넘어진 뒤 다시 일어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서 뭐 하세요?”

“바닥의 소리를 듣고 있는데. 황소 네 마리. 말 다섯 마리. 인디언 세 명. 카우보이 다섯 명.”

“그런 60년대 서부물 드립은 못 알아들어요.”

“모르나?”

“여중생이니까요, 선배.”

나는 한숨을 내쉬는 ABC의 얼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얼굴 쪽으로 고개를 돌리려고 했지만 보이는 건 팬티뿐이었다. 하얀색이었고, 별로 재미도 없었기 때문에 옆으로 덱데굴 굴러서 제대로 ABC의 얼굴과 마주볼 수 있도록 했다.

ABC의 손에 들린 아이스크림은 초콜릿이었다.

나는 분노에 차서 일어나 그녀의 손에서 아이스크림을 나꿔챘다.

“내가 분명히 바닐라를 가지고 오라고 했을 텐데!”

“아뇨, 오늘은 초콜릿을 먹는 게 더 나으실 거에요.”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러자 ABC는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더니, 딱 하고 눌러서 액정화면을 펼쳐 보였다.

“보세요.”

배경화면에 떠있는 건 청부업자 트루 스트레쳐의 사진이었다. 과거의 유명인이다.

“최근 청부업자도 아니고 옛날에 활약하던 중년 아저씨를 좋아하는 이상한 청부업자라는 것밖에 모르겠는데.”

“시끄러워요. 그거 말고 날짜를 보시죠, 선배.”

“날짜? 날짜 좋지.”

그리고 나는 휴대폰 화면에 떠 있는 글자를 읽었다.

“2월 14일, 일요일.”

“그렇죠.”

ABC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발렌타인 데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초콜릿 맛을 가져왔다?”

“네.”

“나쁘지 않군.”

나도 ABC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다음에는 바로 아이스크림 포장을 뜯어 초콜렛과 얼린 우유와 이것저것의 혼연일체를 와구와구 먹어치우고 파워업했다. 상태이상 숙취가 성공적으로 제거되었다.

“오렌지를 먹는 갱플랭크 같네요, 선배.”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고마워.”

“네. 고마워하세요.”

ABC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재미있는 점은 지금 선배가 간밤에 절 덮칠 때보다 더 파워풀하다는 점이에요.”

“뭐라고?”

그리고 나는 ABC에게 뺨을 한 대 얻어맞았다.

상쾌한 하루의 전조는 아닌 것 같았다.




나는 평소 아침 습관대로 샤워를 하면서 방금 ABC에게 들은 말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기억 안 나세요? 선배는 의외로 나쁜 남자네요.”

나는 소파로 자리를 옮겨 다시 누워 있었고, ABC는 그런 내 배 위에 올라가 앉아서 내가 기억 못 하는 얘기들을 늘어놓고 있었다.

“어제 새벽에 대충 모임이 해산하는 분위기가 됐잖아요. 몇 명은 PC방으로 가겠다고 하고, 또 몇 명은 다른 사람 집으로 옮겨서 무슨 기계를 체험해본다고 하고. 서로 눈이 맞은 커플도 있는 것 같았고. 커피 마시러 가는 사람들도 있었고 호텔로 가서 콜걸 부르겠다는 사람들도 많았고. 학생들은 집에 가고.”

ABC는 가벼웠다. 엉덩이는 말랑말랑해서 근육에 닿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그래도 여기 끝까지 남아있으려던 사람들도 있었는데, 선배가 다 쫓아냈었죠.”

아마 가슴을 만지는 감촉도 비슷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약간 짧은 머리카락과 보이시하면서도 귀여운 생김새도 내 취향에 가까웠다. 여러모로 똑똑해 보이기도 했다.

“저랑 같이 있고 싶으니까 분위기 좀 만들어 달라고. 선배는, 취하면 행동력도 강해지고 여러모로 멋져지더라구요. 여자 꼬시는 데도 능숙하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ABC가 하는 말은 죄다 헛소리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최종적으로는 선배랑 저랑만 남고 같이 잠자리에 들었어요.”

내게 여중생을 좋아하는 변태적인 성욕은 전무하니까.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ABC에게 질문을 던졌다.

“내가 너랑 갈 데까지 갔다고?”

“아뇨, 그렇진 않아요.”

그러면서 ABC는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했던 건, 키스랑.”

“키스랑.”

“페팅까지만.”

“페팅이라.”

“그 다음에 선배가 잠들었어요.”

“넌 어떻게 했는데.”

“울다가 갑자기 내가 너무 청승맞게 느껴져서 선배 알람시계 맞춰놓고 소파 가서 잤어요.”

“그러니까 내가 오늘 저 참새를 끝장낸 건 다 너 때문이네.”

“그럴 리가요. 어딜 봐도 선배 탓이죠.”

“됐어. 가서 참새한테 무릎 꿇고 사죄해. 그리고 우리 집에서 나가.”

나는 버둥거리는 ABC를 두 손으로 들어올려서 마룻바닥에 내려놓고 가볍게 툭 걷어찼다.

“잠깐만요 얘기 아직 안 끝났는데”

“필요없어. 무슨 생각인진 모르겠지만, 중요한 건 내가 지금 너한테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는 사실이야. 알겠어?”

ABC가 몸을 일으키는 동안 나는 다시 소파에 앉았다.

“일단 나는 너랑 잤을 리가 없어. 난 지금 네가 한 말이 모두 거짓말이라고 생각해. 그 이유는 물론 내게서 뭔가를 얻어내기 위해서. 그리고 설령 내가 너랑 잤다고 하더라도 난 그 사실에 대해 조금도 신경쓰지 않아. 그 사실이 내게 약점이 된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그것 때문에 너한테 뭔가 보상을 해 줘야 된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지금 너한테 애정 같은 걸 느끼지도 않아. 귀엽다고는 생각하지만 그게 내가 널 위해 뭔가 해줘야 되는 이유로 귀결되는 것도 아냐. 그러니까 이와 같은 이유로 내가 네 얘길 계속 들어줘야 할 근거는 전무해. 따라서 넌 이제 눈물을 흘리든지 절망하든지 뭐든지 하면서 내 집에서 네 발로 걸어나가면 되는 거야. 쉽지?”

“아뇨 그런 거 아니구요, 선배,”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안 들려. 안 들립니다. 내 집에서 나가세요.”

“하, 선배. 유치하게 굴지 마세요. 중요한 건 말이죠”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선배에게도 나쁠 것 없는 얘기에요!”

“뭔데. 뭐. 말해 봐. 말해서 내 구미에 안 맞는 얘기면 당장 널 들어서 내쫓을 거야.”

ABC는 잠깐 나를 째려보더니 곧 포기한 듯 순순히 자신의 제안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계획이 하나 있어요……”




샤워를 마치고 나와서, 거울을 보면서 옷을 입고 이것저것 외출할 채비를 마쳤다. 마지막으로 얼굴에 안경을 걸치고 쭉 기지개를 켰다.

방에서 마루로 나오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있잖아, 흔히들 인간의 3대 욕구는 식욕 성욕 수면욕이라고 하잖아.”

“네.”

ABC는 어느 새 소파에서 내 닌텐도DS를 플레이하고 있었다.

“난 말이야, 그 모든 게 혼합된 게 아침잠이라고 생각해.”

“네.”

“정말 제대로 된 아침잠이 얼마나 달콤한지는 겪어보지 못한 사람이 아니면 결코 알 수 없을 거야. 식욕과 성욕이 동시에 채워지는 듯한 개운하면서도 만족스러운 기분이 느껴지거든. 그리고 당연히 자는 거니까 수면욕도 채워지고.”

“네.”

“근데 오늘 너와 저 고인이 된 참새는 그런 내 즐거움을 산산조각내 버렸어.”

“네.”

“컨디션이 말이 아니라고.”

“네.”

“음, 그리고 그렇게 계속 닌텐도만 하면서 내 얘기에 네네네 건성으로 대답하면 네 척추랑 닌텐도를 동시에 뒤로 접어서 부숴버릴지도 몰라.”

“아이 무서워.”

ABC는 그렇게 말하면서 DS를 탁 덮고 옆으로 아무렇게나 던진 다음 일어섰다.

“와, 와이셔츠 잘 어울리시네요.”

“말 돌리지 마. 그리고 총 줘.”

“꺼낼게요.”

ABC는 등에 매고 있던 책가방을 풀러 안에서 총 한 정을 꺼내들어 던졌다.

탁. 총을 받는다. 습관처럼 겉면을 쓱 하고 문지른다. 정제된 쇠의 매끈한 감촉. 적당히 무거운 무게. 잘그락, 하고 모든 게 다 들어맞는 듯한 감각이 느껴진다. 언제나 그렇듯이 좋은 느낌이다. 누구든지 죽일 수 있다는 자신감.

“그럼, 총도 받으셨으니까 이번에는 정식으로 의뢰를 할게요.”

“좋아.”

나는 ABC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섰다. ABC는 나를 위아래로 가볍게 훑어본 다음, 제대로 의뢰를 시작했다.


“청부업자 ABC. 종합랭킹 321위.

전문분야는, ‘도둑질’. 이명은 괴도. 중복 이명의 존재가능성도 있지만요.

청부업자 트윅스에게 다음과 같은 사항을 의뢰합니다.

2월 14일 하루동안 내가 실행할 계획을 착실히 도울 것.

사례는 이번 계획으로 인해 내가 얻을 수익의 절반.

이상.”


“그럼 이번엔 내 차례군.”

나는 헛기침을 한 다음 말을 시작했다.


“청부업자 트윅스. 종합랭킹 214위.

전문분야는… ‘살인’과 ‘뒷처리’. 이명은 없다.

청부업자 ABC에게 다음과 같은 사항을 의뢰하지.

2월 14일 하루동안 내가 실행할 계획을 착실히 도울 것.

사례는 이번 계획으로 인해 내가 얻을 수익의 절반.

이상.”


이를테면 이건, ‘상호의뢰’ 라는 것이다. 청부업자 두 명이 있고 두 사람이 모두 능력을 발휘해야 하는 상황인데 그 외 제 3의 의뢰인이 없을 때, 청부업자 둘이 서로에게 목적에 맞는 사항을 의뢰함으로써 청부업자로서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만드는. 의뢰를 받지 않았을 때는 오히려 보통 인간보다 약해지기도 하는 청부업자들의, 일종의 편법이다.

“좋아요.”

청부업자로서의 능력, 그러니까 가령 괴도 취급받는 저 녀석의 경우에는 비정상적인 예민함과 기민함, 그리고 비약적인 신체능력의 증가 등이 각성 상태에 들어간 모양인지, ABC가 즐거운 듯 몸 여기저기를 가볍게 문지른다. 나 역시도 약간의 상쾌함을 느낀다. 근육이 제대로 풀리고 총을 잡은 손아귀에 힘이 주어진다.

하지만, 아침잠을 제대로 잤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그런 원망을 담아 잠시 ABC를 노려봤지만, ABC는 그런 기색을 조금도 알아차리지 못한 듯 즐거워하고만 있다. 아니면 그냥 무시하는 거거나.

어쨌든,

“그럼 출발할게요.”

나쁘지 않았다.

나도 ABC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얍얍.




“계획은 간단해요.”

핸들을 돌려 차를 오른쪽으로 돌리면서 ABC가 아까 불러줬던 계획을 다시금 머릿속에서 재생시킨다.

“어제 선배 집에서 전 우연히 두 가지 서로 다른 정보를 들었어요. 하나는, 유명 보석 디자이너 ‘마즈 발렌타인’의 국내 전시회에 전시되어 있던 보석 세공품 몇 점이 최근 있었던 일련의 도난사건에 대한 예방책으로 인해 모조품으로 대체되고, 진짜는 다시 해외로 돌려보내질 거라는 것. 그 양복 입고 계셨던 경비 전문 청부업자분이 경비업체에 고용돼서 그 일을 함께 진행할 예정이셨는데, 막판에 몇 가지 변경사항이 생기면서 경비업체가 청부업자 대신 새로운 버젼의 보안장치 설치를 선택한 모양이에요. 그 업체측이 운반일로 선택한 날이 바로 오늘 2월 14일.”

“하.”

“그리고 나머지 한 가지 정보는 메이헴닷컴이 운영하는 인터넷 쇼핑몰 한국지부 운영자분께 들었는데, 발렌타인데이를 기념해서 몇 가지 이벤트성 상품들이 신상으로 올라온 것 같아요. 그 분이 시제품을 몇 개 보여주셨는데, 그 중 하나를 훔쳤어요. 나트로졸이라는 물질을 첨가한 다용도 물인데, 보세요. 꼭 녹인 초콜렛 같죠?”

“그렇네.”

“이 두 가지를 접한 다음에 괴도로서의 본능이 깨어나면서 완벽한 계획이 생각나 버렸지 뭐에요. 그래서 즉석에서 총 두 정을 훔치고, 내일 바로 써먹을 수 있게 몇 가지 도구들도 더 훔쳤어요. 그리고 협력자를 구하려고 하다가 선배한테 농락당하기 시작하는 바람에 잊어버리고 말았어요.”

“하지만 거기서 든 생각이, 날 협력자로 삼으면 된다는 거였나.”

“네. 그러니까 전 선배에게 뭘 일방적으로 요구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 말하자면 동업을 제안하려던 거였어요. 몸정을 촉매삼아서 계약을 속행하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던 것 같기는 하지만.”

“솔직 돋네.”

“헤헤. 아무튼, 전 이런 시나리오를 생각하고 있어요. 우선 그쪽은 특수한 트럭으로 전시장에서 공항까지 보석을 나를 거고, 그 다음에는 또 특수한 보안장치를 설치한 컨테이너로 보석을 옮길 거고, 거기서부터 특수한 경로를 통해 공항의 특수한 장소에 보석을 보관하다가 어떤 믿을 만한 재벌분의 전용기 화물칸을 빌려서 보석을 원 주인에게 가져다주려는 거잖아요.”

“그렇지.”

“여기서 저희가 파고들 부분은 보석이 컨테이너 안에 있는 시점이에요. 보석은 각각의 단계에서 트럭, 컨테이너, 공항내의 안전지대, 비행기 화물칸이라는 네 가지 ‘안전한 장소’에 놓여지게 돼요. 하지만 여기서 유일하게 사각이 생기는 부분이 컨테이너에요. 다른 부분들은 모두 일정 파트가 치밀한 사람들의 손에 의해 조절되게 되지만 컨테이너는 거의 대부분이 그 새로운 보안장친지 뭔지에 의존하고 있거든요.”

ABC는 후후 웃어 보였다.

“저희는 그 컨테이너가 트럭에서 내려진 뒤 경비업체 직원들 일부가 공항 직원들로 대체될 때 직원 두 명으로 변신해서 끼어들 거에요. 예상 인원은 경비측 셋, 공항측 셋. 이 중 한 명은 운송 및 화물 관리과. 저희는 일반직원으로 변장하고 일단 이 사람을 제압해요. 그 다음 선배가 관리과 직원인 것처럼 행동하면서 그 사람들을 잘못된 경로로 안내. 그 사이 저는 컨테이너 내의 보안장치를 해제하고 안의 보석들을 죄다 꺼낸 후 조악한 모조품을 집어넣고 다시 보안장치를 설정할 거구요.”

그러면서 그녀는 살짝 모조품을 보여줬는데, 글쎄, 내가 보기엔 꼭 진짜 같아 보였는데.

어쨌든 나는 되물었다.

“그게 가능해?”

“전 가능해요. 괴도잖아요? 순수한 여중생이고.”

“그런가…… 그런데 그럼 순수한 여중생이 공항 직원으로 변장하는 것도 가능해?”

“그럼요. 훗훗훗. 오히려 그런 걱정은 인상 더러운 선배가 해야 할지도 모르죠.”

은근히 짜증나는 꼬맹이였다.

그렇지만, 역시. 말해볼수록 나쁘지 않았다.

“아주 촉박한 시간 내에 준비한 거라 모조품은 반드시 어느 단계에선가 들킬 것 같아요. 직원들을 계속 제압해둘 수도 없을 거구요. 그러므로 저희는 중간에 빠져나와서 아주 빠르게 공항을 탈출해야 하는데, 특히 중요한 건 이때 보석을 숨기는 것. 여기서 등장하는 게 이 가짜 초콜렛이죠.”

ABC는 활기차게 계속 말했다.

“이 초콜렛 용액 안에 보석을 전부 넣고, 용액에 딸려 있는 이 즉석 초콜렛 제조 틀을 이용해서 보석이 안에 들어가 있는 가짜 초콜렛을 만듭니다. 그리고 미리 준비한 포장지에 넣고 예쁘게 포장해서 발렌타인데이 선물처럼 꾸며요. 그 다음에 알콩달콩한 커플처럼 굴면서 공항을 빠져나오는 거에요.”

“뭐… 나는 도둑질은 해본 적이 없어서 이 말도 안 되는 계획이 성공할 지 아닐지 잘 모르겠는데……”

“걱정 마세요, 선배. 저만 믿으시라니까요. 게다가, 이 가짜 초코 용액은 공항측에서 사용할 엑스레이선을 투과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어요.”

“그거 굉장한데.”

“검문에 걸릴래야 걸릴 수가 없다니까요. 괜찮죠? 그리고 제가 아는 장물아비한테 다 팔아넘기면 끝!”

정말이지, 지금 옆에서 평화롭게 자고 있는 꼬맹이가 제안하기에는 너무 담대하고 허술하고 이상하게 들리는 얘기였다.

하지만, 그래도 ABC가 괴도라고 불리는 인물이라서인지 그 말들은 모두 묘하게 할 수 있을 것처럼 들렸다.

어쨌든, 그 말에 따라준다고 내가 손해볼 일은 없었다.

만일의 경우에는 여기 총도 있고.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든든했다.




공항에 도착하자 ABC가 눈을 부비며 일어나 휴대폰 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도착했나요. 빠르네요, 선배.”

“좋은 차를 타기 때문이지.”

“하하하. 하긴, 정말 비싼 차긴 하더라구요. 게다가 선배는 집도 좋고. 집안에 비싼 것들도 꽤 있던데.”

“별로 신경은 안 쓰지만. 전부 쓸데없어.”

“그럼 이 계획엔 왜 협력해요? 오로지 금전적인 이익만 목표로 하는 계획인데.”

“글쎄……”

“선배는 참 알 수 없는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나도 자주 그런 생각을 하거든.”

이런저런 시시껄렁한 얘기를 하면서 차 밖으로 나왔다. 최근 민영화되니 어쩌니 말이 많은 웅장한 공항의 웅장한 주차장을 걸어가는데, ABC가 뭔가 떠오른 게 있는 것처럼 말을 하기 시작했다.

“맞다, 선배. 아까 선배가, 아침잠은 식욕 성욕 수면욕이 결합됐느니 어쩌니 했잖아요?”

“그래.”

“생각해 보면 저한테도 그런 존재라고 할 수 있는 게 하나 있는 것 같아요.”

“오호?”

나는 ABC의 작은 머리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뭔데 그게.”

“초콜릿이죠.”

ABC는 갑자기 걷기를 멈추고 제자리에 서더니 헤헤 웃었다.

“초콜릿?”

“네, 초콜릿. 초콜릿 좋아요. 일단 당연히 식욕은 충족시켜 주고, 거기다가 초콜릿은 가벼운 흥분제 역할도 하거든요. 성욕을 증진시켜 줘요.”

“그런가.”

그런데 그 얘기가 지금 걷기를 중단하고 시간을 낭비해야 할 정도로 중요한 건가? 하고 묻고 싶었지만, 그냥 말하지 않았다.

대신 나는 다른 질문을 하기로 결심하고, 물었다.

“그럼 수면욕은?”

“수면욕은 말이죠… 선배. 아, 잠깐만요.”

ABC는 교복 치마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딱 열더니, 뭐라고 중얼거렸다.

“3, 2, 1.”

“뭐?”

그리고 나는 갑자기 머리통을 한 대 맞은 듯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억…”

갑작스레 눈앞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숙취를 몇 배는 강화시킨 것처럼 눈앞이 흐려지고, 머리가 심하게 욱신거리고 아팠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참을 수 없는 건 바로 이 자리에서 잠들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였다.

“이게 바로 수면욕이에요, 선배.”

ABC는 그런 나를 바라보면서 여중생답게 미소짓기 시작했다.

“초콜릿 아이스크림 맛있었어요?”

“……하…”

“메이헴닷컴 한국지부 발렌타인데이 특별 상품 중에는 말이죠, 수면제를 극도로 강하게 압축시켜 넣은 초콜릿 캡슐도 있었다나 봐요… 참, 기발한 아이디어 상품도 다 있죠?”

“하하하…”

나는 다리가 풀림을 느꼈다. 더불어 근육에 들어간 힘도 서서히 빠져나감을 느끼고 있었다.

“사실요, 보석에는 애초부터 관심 없었어요. 왜냐하면 일찌감치 전부 다 훔쳤거든요. 아까 선배한테 모조품이니 뭐니 하면서 보여드린 그게 진짜 보석이었어요. 지금 전시장에 있는 건 다 모조품. 저 머저리들이 애지중지 옮기고 있는 것들도, 죄다 다 모조품.”

하지만 나는 마지막 남은 힘을 다 쥐어짜서 바지 뒷주머니에 손을 넣고, 그 안에 들어있던 권총 한 정을 꺼낼 수 있었다.

“그냥 전 처음부터 선배 차랑 선배 집에 있던 것들이 다 갖고 싶었어요. 그리고 개인적으로 선배한테 관심도 좀 있었고. 그래서 이 말도 안되는 거짓말들이 다 하룻밤만에 탄생한 거에요. 선배조차 알아챌 정도로 허술한 도난 계획하며, 하룻밤을 같이 보냈느니 어쨌느니 하는 이상한 포르노그래피까지 말이에요.”

기회는 한번뿐이리라고 생각했다.

“소녀다운 망상이죠?”

그러면서 ABC는 살짝, 후훗 웃었다.

그리고 그녀가 웃느라 잠시 눈이 감기는 사이 나는 그녀를 향해 재빨리 총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방아쇠를 당겼다.

녹은 초콜렛이 뿜어져 나왔다.

“기발한 아이디어 상품.”

마지막으로 들린 건 ABC의 멀어지는 목소리였다.

“다 끝났어요, 선배.”

아아……

“몇 시간이나마 고마웠어요.”

젠장……

“그리고 참새 일은 미안해요. 하지만 뭐 어쩌겠어요, 인생이 다 그런 거지.”

가지 마……

“어쨌든,


해피 발렌타인 데이 되세요, 선배.”



그리고 내 의식은 이 시점에서 한번, 끊어졌다.




가끔은 제대로 된 여성을 사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전 여자친구는 말했다. 그녀의 생일이었고, 그녀는 내게 일방적인 이별 통보를 고했다. 여자친구의 피부는 항상 매끈매끈해서 만져 보면 기분이 좋았던 것 같다. 


그래.

정상적인 여자애를 사귀는 것도,

어쩌면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가장 먼저 그렇게 생각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고, 내 눈앞에는 뭔가가 누워 있었다.

여긴 어디지.

아, 그래. 우리 집 침대 위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침대에서 내려왔다. 

근데 잠들기 전에는 무슨 일이 있었더라?

그렇게 생각하면서 문가로 한 발 내딛으려는 순간

"왁!"

"엄마야!"

눈앞의 시체가 일어났다.

"사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무슨 소리에요! 멀쩡한 사람보고 시체라니!"

시체한테 한 대 얻어 맞았다.

아팠다.

나는 여전히 멍한 머리로,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생각했다.

그리고 시첸지 뭔지 몰라도 묘하게 활기차 보이는 얼굴의 ABC를 보면서 드디어 모든 걸 기억해냈다.

"어…"

"깜짝 놀라셨겠죠, 선배? 후후후!"

"그, 뭐냐, 그러니까… 난 지금 널 죽일 정도로 증오해야 되는 뭐 그런 상황 아니었나?"

"그런 상황 맞았어요!"

"허…"

"하지만…"

ABC는 손가락을 흔들어 보였다.

"그 모든 것이 반전되는 것이 바로 서프라이즈의 묘미겠죠, 선배."

그리고 내게로 보석과 초콜릿을 내밀었다.


"좋아해요, 선배."


"어?"


"오늘을 위해 많이많이 준비했어요!"

그렇게 얼굴을 붉히며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ABC를 바라보면서, 나는 드디어 모든 것을 이해했다. 

"그러니까, 음모가 사실은 음모가 아니었고…"

"괴도니까요…"

"사실은 전부 연애계획의 일부였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훔치는 데도, 각고의 노력을 쏟아부으니까요…!"

"내 차랑 내가 가진 것들을 다 갖고 싶다는 얘기도…"

"서, 선배의 연인이 되면 다 해결되는 문제…"

"허허허…"

나는 잠시 헛웃음을 지은 후, 

"나쁘지, 않네."

하고 중얼거렸다.


초콜릿은 맛있었다.

ABC도.


…그 멍청한 총을 처음 집어들었을 때부터 대충 다 짐작하고 있었다는 건 비밀로 해 둬야겠지만 말이다.


모두들 해피 발렌타인.

comment (5)

수은튀김 작성자 12.02.15. 00:20
으 '개ㅅ끼' 라는 말이 등록이 안돼서 나쁜남자로 고치느라 1분 늦었는데 봐주시면 안될까요ㅠ
창공의마스터
창공의마스터 수은튀김 12.02.15. 00:26
넵. 여기까지 OK로 하겠습니다! 참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수은튀김 작성자 수은튀김 12.02.15. 00:27
감사합니다ㅠ
창공의마스터
창공의마스터 12.02.15. 13:58
<초콜릿 플래그먼트>는 이번 세말엮기의 주제어를 가장 잘 활용한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라이트노벨이 중시하는 캐릭터성도 빛나고, 이야기 자체도 허술한 부분이 없지는 않으나 하룻만에 썼다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흥미롭게 짜여져 있네요!(하룻만에 쓰신 거 맞죠?) 특히 '초콜릿은 맛있었다. ABC도.'하는 부분은 "꺄아~" 소리가 나올 정도로 에로에로했어요. 수은튀김 님의 다른 작품도 보고 싶네요. 현재 창작공간에서 진행중인 단편전쟁에도 참전해주시기를 바래요! ^.^
수은튀김 작성자 창공의마스터 12.02.15. 17:35
네 감사합니다..... 정확히는 두 시간 이십 분만에 썼어요ㅠㅠㅠ 그래서 시간부족 때문에 막판 결말이 조루화됐네요 으으....... 아무튼 좋은 평가 감사드려요! 앞으로도 열심히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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