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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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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3:23 Mar 06,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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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칸나기

"결국 고등학교 생활도 끝났네."
소녀는 겨울 추위 덕에 새빨개진 얼굴로, 어쩐지 후련하다는 듯이, 어딘지 아쉽다는 듯이 그렇게 말했다.
나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칠판을 바라보았다.
[경축! 졸업식!]이라던가 [나중에 다시보자 애들아!]라던가, [선생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같은 글귀가 커다란 글씨로 적혀있는 칠판.
손 안에는 졸업장이 들어있는 자그마한 책자 같은 물건. 그런가. 새삼 이제와서야.
새빨개진 얼굴로 웃고 있는 소녀의 말을 듣고나서야 나는 실감할 수 있었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것이구나.

하고.
비눗방울 위에 올라탄 것 같은, 두둥실 하던 기분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창 밖으로는 석양이 들이치고 있다. 고즈넉한 분위기의 교실 안. 졸업식이 끝났는데도 불구하고 실감하지 못한 나는 교실로 돌아왔고, 거기에서 눈 앞의 소녀를 만났다.
지난 고등학교 3년 간 단 한 번도 이야기를 나눠보지 못했던 나의 클래스 메이트.
"너, 이름이 뭐더라?"
소녀는 두 눈동자가 가늘게 휘어드는 미소를 지으며 내게 물어왔다.
본래 여자와 남자 사이에 대화를 나눌 일 따윈 별로 없는 법이고, 덕분에 나는 처음으로 여기서. 졸업을 하고 나서야 그녀와 대화를 하게 되었다. 그녀가 내 이름을 모른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니다.
"뭐어. 이름 따윈 아무래도 좋지만."
자기가 물어놓고 금새 흥미가 사라졌는지 그리 말하고는 천천히 창가로 다가가는 소녀.
어딜 보고 있는 것일까. 졸업식은 오전에 끝났다. 그런데 창 밖으로 노을이 지고 있다는 이야기는 이미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정엔 아무도 없다. 나도 잊은 물건이 있어 다시 되돌아왔을 뿐이다.
그래서 소녀를 만났다.
소녀는 말한다.
"졸업식이라. 별로 와닿지 않는 구나."
확실히 그렇긴 하지. 고등학교 3학년. 졸업식을 기점으로 우리들의 학창시절은, 청춘은 여기서 끝을 고한다.
하지만 그건 단순히 개념적인 문제다.
뭔가 극적으로 신체가 변화한다던가.
눈에 보이는 현상 변화 따위가 일어나지는 않는다.
졸업식으로 바뀌는 사실은 단순하게.
그저.
"내일부터는 학교에 나올 필요 없다는 거네."
그래, 소녀의 말대로.
내일부터 아침 일찍 일어날 필요가 없다.
지각할까 전전긍긍하며 학교로 뛰어들어올 일이 없다.
아침 나절에 담임 선생과 신경전을 벌일 이유가 없다.
졸업식으로 변하는 것은
단지 그 정도의 것들 뿐이다.
잠시간의 침묵, 나와 소녀 사이에는 말이 없다. 애당초 말을 나눌 이유도 없다.
그저 졸업식 이후의 여운을, 석양이 쥐어주는 평화를 음미하고 있을 뿐이다. 앞으로 펼쳐질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고, 고민하고, 고심할 생각을 하며.
그렇기 때문에 새삼 소녀가 그런 말을 입에 담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소녀가
"너, 장래희망이 뭐야?"
이름도 모를 내 장래희망을, 미래를, 졸업식 이후의 세상을 물어보는 일 따위.
딱히 별다른 이유가 있어서는 아닐 거라는 걸. 난 잘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이루어지는 것은 소녀와 '나' 사이의 이야기. 단순한 잡담.
신변잡기. 졸업식 이후, 내일부터 변화할 우리들의 일상은 어떠한 모습을 띠고, 형태를 갖고, 의미를 내포할지.
딱히 달변도, 그렇다고 어눌한 어투도 아닌 그저 담담한 어투로 나눌 뿐이다.
아직 찾아오지 않은 우리들의 미래를.
가능성으로 가득한 내일을 공유할 뿐인 이야기.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창 밖의 석양도 기울기가 가파르게 변해.
어느덧 하늘 저 너머에서는 검푸른 밤빛이 찾아오고 있을 정도로 시간이 지나갔을 무렵.
"우으으으~"
소녀는 몸이 찌뿌둥한 듯 기지개를 키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좋아. 그럼 이만 돌아갈까."
산뜻하게 모든 것을 끝맺는 그 말투에 나도 몸을 일으킨다.
본래 착한 학생이라면 진즉 집에 돌아가야 했을 시간. 소녀는 타박타박 졸업장이 든 책자를 기세좋게 흔들며 교실 뒷문으로 다가간다.
그러면서
"아~ 아~ 내 청춘도 이걸로 끝이구나~"
그 장난스러운 어투에 나는 실소를 머금었다. 그래. 진정으로 끝났다.
우리들의 학창시절,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지난 3년 간의 고교시절.
교실 문을 통해 소녀가 이곳을 나간 뒤에, 나는 슬쩍 내가 지난 세월을 보냈던 이곳을, 교실을 되돌아보았다.
여기저기 흠집 나있는 나무 책상, 더러운 교실 바닥, 하얗게 세어 불투명한 유리창, 교실 한 켠에 세워져 잡다한 서적들이 들어서 있는 자그마한 책장.
이제 더는 볼 일이 없는 우리들의 교실을 향해.
"안녕."
작별인사를 해본다.
그렇게 우리들의 졸업식은 끝이 났다.


.
.
.
.


"우와. 아무도 없는 교실을 향해 안녕이라니, 닭살~"
코 앞에는 우웩 하고 토하고 싶다는 표정을 지은 소녀.
"?!"
"뭘 놀라고 그래. 괜히 분위기에 취해서 가방을 두고와버렸어."
정말 미쳤지. 뭐가 청춘이냐. 닭살 돋게~ 라고 중얼거리며 되돌아온 소녀는 창틀에 놓인 가방을 집어들고는 내게 몸을 돌렸다.
그리고
쾌활하게 웃으며, 발랄한 몸짓으로 척하니 내게 손가락질을 하는 소녀는

"야, 너 할 일 없으면 같이 밥이나 먹으러 갈래? 마침 롯데리아에 핫크리스피버거라고 신메뉴가 나왔던데."

졸업식이 끝났어도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



Writer

칸나기

칸나기

네. 나기 여신님 귀엽죠. 저도 좋아해요.

comment (1)

엔마
엔마 12.03.06. 17:23
아쉬움과 이별의 장소인 졸업식.
그곳에서 새로운 만남이 시작된다는 이야기는, 정말 예쁘네요.
권한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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