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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마지막 날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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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0:06 Mar 19,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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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고니
 구름이 안개가 된 건지 안개가 구름이 된 건지 모를 일이다. 맞닿은 수평선 어느 지점을 경계로 모습이 변한것 같다. 깨지 않은 바다는 고요하고 해는 아직 뜨지 않았다. 나는 해를 기다리고 있는것이 아니다. 해가 기다린다고 먼저 뜨는게 아니란 것을 왜 이제 알았을까. 위험을 무릅쓰고 몇 번이나 일출을 보러 다녔지만 그때는 느끼지 못한 것들. 그것을 어디인지 알 수 없는 망망대해 속 차가운 갑판위에서 느끼게 될 줄이야. 호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오랜만에 피운 담배는 비싼 담배값만큼이나 독해서, 몇 번이고 쿨룩쿨룩 기침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담배 연기가 코앞에서 일렁이다가 안개속에 섞여 들어간다. 바다 위는 희부연 안개가 자욱하고 그 안개가 품은 습기가 피부에 닿는다. 배는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느리게 나아간다. 아니 나아가는 게 아니라 되돌아가는걸지도 모른다. 어쩌면 같은 자리를 돌고 있는 것일지도. 그러나 초조한 기분은 들지 않는다.
 
하나의 기억들이 환상처럼 밀려온다. 멀면 멀수록 뚜렷하게 보이는 안개같은 기억의 무리들이다. BA29311과 JJ49726으로 처음 만났을 때의 너는 짚고 있는 난간의 차가운 금속보다 싸늘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연구대상의 상태를 훑어보던 빠르고 매서운 눈매. 앉아, 일어서, 오른쪽, 왼쪽을 지시하던 낮고 정확한 목소리. 머리칼과 피부를 만지던 손가락. 그 손가락은 냉혈동물의 그것처럼 서늘해서 손이 스칠때마다 움찔, 저절로 반응할 수 밖에 없었다. 네가 내가 관심을 가진것도 아마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네 눈빛에, 네 목소리에, 네 손가락에 일일이 변화하는 신기한 실험체. 우리의 만남 전체가 하나의 실험은 아니었을까. 네가 나를 변화시키듯이 나도 너를 바뀌게 하리라. 내 열기로 데워진 너의 그 미지근한 온도에 목숨을 걸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혼자다.

 지구의 마지막 날이다. 이 배의 선장이면서 항해사이자 승객은 목적지가 없다. 식량도 물도 떨어지고 담배도 거의 다 타간다. 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아마 길고 복잡했던 연구의 끝을 마무리하는 보고서를 쓰고 있을것이다. 보고서 말미를 작성하면서, 미처 결론을 짓기 전에 도망쳐버린 실험대상에 대해 아주 잠깐이라도 회상해주었으면 좋겠다.

 축축한 안개를 뚫고 빛이 들어온다. 내 지구 마지막 날의 아침을 밝히는 해가 뜬다. 찬란한 해가 뜨고 있다.


아! 내가 눈팅종자다! 헤헤 감평받고 싶었습니다.

comment (1)

로사기간티아 12.03.19. 14:12
어딘가 몽환스러운 분위기가 좋네요. 글 분량은 전후 내용을 짐작키 어려울만큼 짧습니다. 그렇지만 한 씬을 물끄러미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굳이 이 글의 배경을 억지로 파고들고픈 멋없는 생각은 떠오르지 않습니다. 느낌이 되게 좋은데 단중편 분량의 소설도 보여주셨으면 좋겠네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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