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소설회랑

접은 날개를 편 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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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40 Mar 25,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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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Shirley

 

도시는, 싫다.

 

대기의 탁함이나 사람들의 끝없는 이동, 쉴틈 없이 바쁘게 움직이는 속성 등, 뻔하디뻔한 이유 때문에 싫은 것이 아니다. 그저, 도시의 삭막한 분위기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다.

예를 들면.

지나다니는 사람들 사이의 대화가 이루어지는 경우는, 기껏해야 정말 친한 친구와 마주쳤거나 미리 만나기로 약속했던 사람과 만났을 때 뿐이고, 한시바삐 목적지에 도달하려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대화가 발생할 겨를이 없다.

같은 나라에 살고, 같은 도시에서 지내며, 심지어는 같은 언어를 쓰는 한 인종인데도 불구하고, 대화가 발생할 필요조건이 아직도 수도 없이 많다는 변명이 암묵적으로 날라다니는 것이다.

물론 그 변명에 대해 반박할 방법은 사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무리 번지르르한 말로 반박하려 해도, "낯선 사람에게 친한 듯이 말을 거는 것은 상대의 의사를 존중하지 않는 행동이다" 라는 문장 하나만으로 모든 반박을 논파할 수 있기 때문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 틀린 말이 아니기 때문에 도시가 싫다.

'의사를 존중하지 않는 행동' 에 대해 너그러워질 수 없는, 그런 억지와도 같은 삭막함이, 그저 그런 사람들이 모여있을 뿐인 도시를 싫게 만드는 것이다.

......

뭐, 내가 이런 실없는 생각을 해대기 위해 이 벤치에 앉아있는 것은 아니다.

도시는 싫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그 도시의 속에서 멍하니 다리를 흔들며 햇빛을 쬐고 있는 나는, 저 급하게 뛰어다니는 도시 사람들과 어느 부분이 다른 걸까.

바로 떠오르는 차이점이라곤, 여유 시간의 유무 정도 뿐이다.

나는 저들처럼 바쁘게 뛰어다닐 이유도, 그럴 만한 체력도 마땅치 않기에(이런 아지랑이가 나풀거리는 뜨거운 여름에 뛰어다닐 체력 따위는 키울 생각도 없다), 이렇게 흐르는 땀이나 바람에 날리며 멍하니 앉아있을 수 있다.

굳이 따지자면, 저들과 나는 이질적인 공간에 존재한다고 볼 수 있을까.

시간이 길어지는 공간과 짧아지는 공간이라거나 해서.

어쨌든, 이러한 공간의 분열은 나에게 있어선 이득이다. 낯선 사람이 말을 걸어오는 행동은 나로서도 받아들이기 힘든 일인데(나도 결국은 도시 사람들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것이다), 애초에 다른 공간에서 움직이는 사이라면 그럴 여지가 없어져 버리게 된다.

그런 속성 덕분에,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저들만의 드라마를 이리저리 비난하며 즐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ㅡ그런데.

평소와 같을 뻔했던 오늘.

그런 정해진 고리의 연속에서, 난데없는 이변이 일어났다.

도시 사람들 중에서도 유난히 유인원에 가깝게 생긴(그러니까 바보같이 생긴) 한 남자가, 그 공간의 경계를 넘어선 것이다.

그리고는, 쪼그려 앉아 나와 눈높이를 맞추더니, 이런 말을 지껄였다.

 

 

 

"...넌, 집에 언제 돌아갈 생각이냐?"

 

 

 

 

 

 

***

 

 

 

 

 

 

내가 그 녀석을 처음으로 발견한 것은, 아마도 일주일 정도 전의 주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처음으로 맞는 여름 연휴임에도, 남들은 다 있는 여자친구가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혼자서 피시방이나 전전긍긍하며 놀던 어느 날, 평소엔 잘 지나다니지 않는 공원에서 그 녀석을 발견했다.

몸집이 작은, 기껏해야 갓 중학교에 입학한 로우틴(low teen)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하얀 민소매 티에 짧은 반바지를 입고 있는 긴 생머리의 꼬마 여자아이였다.

어째선지 상당히 짜증내는 얼굴로 벤치에 앉아 꼼지락대던 그 녀석은, 내가 피시방에서 충분히 논 후에도 그 자리에 있었다. 12시에 가까운 시간이라 그런지 벤치 위에 누워 곤히 자고 있긴 했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그저 길을 잃은 아이라고밖에 생각하지 않아서, 안쓰러운 마음에 편의점에서 빵 몇 개와 물 한 통을 사와 그 녀석의 머리맡에 놓고 조용히 귀가했던 기억이 난다.

먹을거리가 생기고 나면 알아서 길을 찾으려고 하겠지, 라는 생각에 취했던 행동이었지만, 그 녀석은 그 다음 날 아침에도 그 벤치에 있었다(언제 먹었는지 빵 봉지와 물통은 깨끗이 비운 상태였다).

남이 기껏 생각해서 먹을 것까지 쥐어 줬는데도 길을 찾으려는 노력조차 안 하는 모습에 대한 괘씸함보다도, 왠지 모르게 생겨나는 호기심에 지배된 나는, 한동안 그 녀석을 도우며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그 녀석의 행동 패턴은 처음 발견한 날과 다를 게 없었다. 벤치에 앉아 가끔가끔 꼼지락대며 자세를 바꾸다가 날이 지면 얌전히 누워 잠을 자고, 내가 밤에 은근슬쩍 먹을 것을 준비해 두면 또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그걸 전부 먹어치운다(세면과 용변은 공원 공용화장실에서 처리). 4일 째 되는 날엔 비가 왔었는데, 그 날마저도 그 녀석은 신문같은 것도 덮어쓰려 하지 않고 평소의 행동 패턴을 그대로 지켰다.

5일 째 되는 날엔 몸이 젖은 채로 자서 그런지 계속해서 '에취' 하고 재채기를 해대길래, 그날 밤에 집에서 안 쓰는 이불을 가져와 슬쩍 덮어 주었다.

그런 반복이 오늘로 대략 일주일 정도.

내 인내력은 드디어 바닥이 났다.

도저히 못 참겠다는 느낌이 퍼뜩 지나가자 마자, 나는 항상 먼발치로 숨기던 몸을 당당히 드러내고, 그 녀석 앞으로 걸어갔다.

이 녀석이 깨어있는 모습을 정면으로 본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지만(평범한 학생이었다면 또래 남학생들에게 인기 있을 법한 외모였다), 어쨌든 "뭐 하는 녀석이야" 하고 째려보는 녀석의 눈빛은 가볍게 무시하고 말했다.

 

"...넌, 집에 언제 들어갈 생각이냐?"

 

다짜고짜 묻기엔 좀 그런 질문이지만, 무려 일주일 동안이나 이 녀석에게 시간을 허비한 나는 지금 무서울 게 없는 상태다.

내가 그렇게 물어보자, 계속 날 째려보던 녀석은 탐색하는 눈빛을 귀찮아하는 눈빛으로 진화시켰다.

"알 게 뭐야, 유인원같이 생긴 주제에. 저리 꺼져."

......

'색색' 하고 조용히 코를 고는 것 말고는 목소리를 듣는 것도 처음이었는데, 하필이면 대사가 왜 이런 건지.

그래도 일주일이나 관찰하고 나서야 겨우 말을 붙인 것이다. 이런 거친 말투에 기죽어 물러날 내가 아니다(아니, 사실, 조금은 기죽긴 했다).

"너 말이야, 길을 잃은 건지 집을 나온 건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부모님이 걱정하실 거라고. 필요하면 도와줄 테니까 집으로 돌아가."

"꺼지라고 말했잖아. 네가 뭔데 나한테 명령질이야."

"무려 일주일 동안이나 네 밥과 취침을 도운 분이시다. 됬냐?"

"......"

내가 살짝 자랑의 의미도 담아 당당하게 반박하자, 녀석은 말문이 막힌 건지 입을 다물었다. 매일 밤마다 먹거리를 사다 주는 수수께끼의 조력자가 갑자기 나타나니까 놀란 거겠지.

잠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던 녀석은, 그래도 여전히 귀찮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알 게 뭐야. 괜히 생색내기는. 고맙다고 할 생각 없으니까 빨리 꺼지기나 해."

...음, 이 녀석의 입버릇은 '알 게 뭐야' 인 것 같다.

물론 그런 반응에 동요할 만큼 오기가 모자르진 않았기에(솔직히 조금 더 기죽어버리긴 했지만), 내 시선을 피하며 애써 무시하려는 녀석의 팔을 덥썩 붙잡았다.

"...뭐, 뭐야."

"나도 고맙단 말 들으려고 말 건 거 아니거든. 어쨌든 일단 따라와."

"어, 야, 야! 무슨 짓이야! 이거 놔!"

반항하는 녀석의 목소리따위 전부 무시하고 팔을 잡아 끌어 벤치에서 일어나게 했다. 지금까지의 그 기세에 비해, 녀석의 몸은 정말 내가 베고 자는 솜베개만큼이나 가벼워서, 내 의사대로 움직이게 하는 데엔 별 문제가 없었다.

지나다니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모르는 여자애를 강제로 끌고 가서 난폭한 짓을 하려는 변태 대학생'으로 보일 지도 모르지만, 되도록이면 그런 오해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애초에 나는 로리인가 뭔가 하는 것은 취향이 아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도, 내 발은 확실하게 목적지를 향해 내딛고 있었다.

 

 

 

 

 

 

***

 

 

 

 

 

 

"자, 먹어."

"......"

대략 10분 정도 후.

고등학교 시절에 단골로 다녔던 분식집을 들러, 갑자기 끌려왓 ㅓ당황한 채로 우물쭈물하는 그 녀석을 어떻게든 앉히고, 떡볶이와 김밥 등등을 시켰다.

12시가 조금 넘은 때라, 아침밥 이후로는 아무 것도 먹지 않은 나는 음식이 나오자 마자 김밥 2줄을 녀석에게 넘겨 주고 떡볶이와 튀김을 적당히 집어먹었다.

그런데, 슬슬 허기가 달래질 때쯤 녀석의 그릇을 보니, 김밥은 단 한 개도 없어져 있지 않았다.

"뭐야, 먹으래도. 갚으라고 안 할테니까 안심하고 먹어."

"......"

나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분명 배가 고플 터인 녀석은 젓가락을 들려고 하지도 않았다.

혹시 김밥을 싫어하는 건가, 하고 김밥에 젓가락을 가져가 봤지만 곧바로 손으로 저지당해 버렸다.

그러고는 "왜 내 껄 가져가려는 거야" 라는 눈빛으로 잡아먹을 듯이 째려본다.

"...가져가는 것도 싫으면 어서 먹으라니까."

"...시끄러워."

나를 째려보는 눈빛을 거둔 후에야 녀석이 젓가락으로 손을 가져갔다.

다행히도 젓가락질을 할 줄 모르는 건 아니었는지(사실 아까 김밥에 젓가락을 가져간 것도 젓가락질을 못 하는 건줄 알고 먹여주기 위해서였다. 중학생이 못 할 리야 없겠지만), 젓가락을 평범하게 집고는 천천히 김밥 위에 올려 놓는다.

그리고, 김밥을 드는 순간.

 

땡그랑, 하고.

 

"...아."

그 녀석이, 젓가락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나는 녀석이 젓가락을 잠깐 들었을 때 녀석의 손이 마약하게 떨렸다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손의 떨림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원래부터 수전증을 가지고 있는 경우나, 힘든 일을 하고 난 다음에 손에 힘이 없어서 떨리는 경우, 무거운 것을 들고 있는 경우, 거대한 일에 긴장한 경우 등, 나라도 알 만큼 뻔하디뻔한 이유라면 얼마든지 있다.

그 녀석이 든 김밥 한 조각은 적어도 손이 떨릴 만큼의 무게는 아니었기에, 무거운 것을 들어서 손이 떨린 경우는 아닐 것이다. 젓가락을 쥐기 전까지만 해도 그다지 손떨림이 눈에 띄지 않았으니, 수전증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애초에 그럴 나이도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지금 이 상황이 손이 떨릴 정도로 긴장할 만한 물건도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뭔가 힘든 일을 했다는 말이 되는데, 내가 관찰한 일주일 동안만큼은 녀석은 힘든 일은커녕 꼼지락대는 것 말고는 한 행동이 없다.

"...너, 어디 불편하냐?"

"시끄러워. 미끄러졌을 뿐이야."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며 녀석이 젓가락을 주웠다.

이번엔 과연 김밥을 어떻게 집을까, 하는 호기심에 곁눈질로 슬쩍 보니, 젓가락을 양손으로 쥐고는 김밥을 포크처럼 콱 찍어서 한 번에 2개씩 입에 넣고 있었다.

상당히 버릇없는 행동이지만, 녀석에게는 그렇게 먹는 것마저도 힘겨워 보였다.

"......"

그래도 먹는 방법을 터득한(?) 이후로는 그 속도가 대단해서, 내가 남은 떡볶이 중 6개 정도를 먹었을 때 그 녀석은 이미 김밥 1줄을 다 먹어치운 상태였다. 혹시 몰라서 물을 떠다 놓긴 했지만, 녀석은 결국 김밥을 다 먹을 때까지 물컵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김밥을 다 먹은 후, 물컵에 든 물마저 원샷으로 마신 녀석은 옷깃으로 대충 입을 닦더니 나를 파악 하고 째려보았다.

"...나한테 이런 걸 사준 이유가 뭐야?"

"넌 왜 사줘도 불만이냐. 점심 시간이라 배고플 테니까 나도 먹을 겸 해서 사준 것 뿐이야."

"댓가로 이상한 걸 시킨다거나 할 생각은 아니겠지?"

"시켜지고 싶다면야 말리진 않겠지만."

대충대충 대답하며 남은 튀김들을 처리했다.

날 의심하는 건지 녀석은 계속해서 나를 째려보고 있었지만, 슬슬 그 눈빛에도 익숙해지는 참이라 별 문제 없이 튀김 그릇을 비울 수 있었다. 이 분식집은 언제 먹어도 맛있다니까.

"아ㅡ잘 먹었다. 더 먹을래?"

"...됐어, 배불러."

내가 한 제안을 거절하며 녀석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화장실이라도 가려는 건가, 하고 눈으로 쫒아 보니 망설임 없이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야, 야!"

깜짝 놀라며 상 위에 돈을 두고 황급히 따라나갔다. 녀석의 발이 의외로 빨라서, 서두르지 않으면 놓칠 정도로 거리가 벌어져 있었다.

겨우겨우 따라잡은 후, 살짝 숨이 찬 목소리로 불평했다.

"너 말이야, 그렇게 갑자기 가버리면 어쩌잔 거야."

"알 게 뭐야, 빨리 사라지기나 해."

"넌 할 말이 그것밖에 없냐?"

"그럼 꺼져."

"......"

정말이지 입이 험한 녀석이네.

그렇다고 정말로 사라져버릴 내가 아니므로,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쉰 후 녀석을 집에 돌아가게 설득시키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래도 지금까지 도와준 전적이 있으니 내 말을 아예 무시하거나 하지는 않을 거라는 일말의 희망에서였다.

"너, 집에 돌아가지 않는 이유가 뭐야?"

"...네가 뭔 상관인데."

"내가 없었으면 벤치에서 굶어 죽었을 아이에게 신경도 못 써주냐."

"......"

반박할 말이 없어졌는지 녀석은 뚱한 얼굴로 침묵했다. 잘 하면 설득할 만한 요지가 생길 수도 있을 것 같다.

"약간이라도 좋으니까 말해봐. 도와줄 수 있으면 도와줄 테니까."

"......"

"말하기도 싫은 이유야?"

"...이유같은 건 없어."

계속 침묵하던 녀석이, 겨우겨우 입을 열었다.

"집이든 뭐든, 지금은 어느 곳에도 가고 싶지 않아. 누구와도 만나고 싶지 않고, 말을 나누고 싶지도 않아."

말문이 열린 녀석의 표정은 살짝 슬퍼 보였다.

독심술같은 건 배워본 적도 없으니, 그 마음을 알 길은 없었다.

"그래도, 나랑은 말을 나누고 있잖아. 그거면 됬어."

"...네가 하도 귀찮게 하니까 불쌍해서 어울려준 것 뿐이야."

불쌍해 보일 정도로 달라붙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어찌됬든 나한테 만이라도 말문을 열어줬으니 된 거다. 나한테마저 아예 접근 자체를 거부한다면 상황이 더 어려워지니까.

약간 안심하고, 쪼그려 앉아 녀석과 눈높이를 맞췄다.

"그럼, 이제부터 어쩌고 싶어? 계속 여기에 있을 순 없잖아."

"...앞으로의 일 같은 건 생각한 적 없어.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게 지금 심정일 뿐이야."

"으음..."

말문을 열어준 건 고맙지만, 이래저래 꽤 난감한 상태다. 아무리 양보해도 이 녀석이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할 확률은 현저히 낮을 것 같고, 그렇다고 여기에 그냥 놔둘 수도 없다. 이 녀석의 부모는 빨리 찾지 않고 뭘 하는 건지.

결국 방법은 이것 뿐인가...

"저기 말이야."

"뭐야."

 

"우리 집에 갈래? 재워줄 방 정도는 있으니까."

 

"......"

녀석은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

그야 망설일 만은 하다. 아무리 며칠 동안이나 자신을 도와준 사람이라지만, 생판 모르는 남의 집에 함부로 발을 들이는 건 위험하다는 것 정도는 당연한 상식이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녀석은, 의심하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내가 널 어떻게 믿고 따라가."

꽤나 평범한 대사로군.

"못 믿겠다 해도 할 말은 없지만, 걱정되서 그래. 너, 그냥 냅두면 계속 여기서 지낼 거잖아."

"......"

녀석이 살짝 시선을 피하며 끄덕였다.

"그러니까 우리 집에 가자. 몇 주 수준까진 무리지만, 며칠 정도라면 재워줄 수 있어."

"...납치라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그런 짓을 할 만큼 부족한 가정은 아니라서."

내 말에 고개를 숙이고 잠시 생각하던 녀석은, 10초 정도 후에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며 끄덕였다. 어디 한 번 믿어보겠단 눈빛이었다.

거절당하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믿어준 것 같네.

"단, 내 몸에 손대기만 해봐. 거세하는 편이 좋게 만들어줄 테니까."

...완전히 믿는 건 아닌 것 같다.

 

 

 

 

 

 

***

 

 

 

 

 

 

쏴아ㅡ하는 샤워기 소리가 거실에 울려퍼진다.

현재 위치는 우리 집 내부. 이런 더운 여름임에도 샤워할 만한 장소가 마땅치 않다는 이유(공원 공용화장실 따위에 샤워실이 있을 리가 만무하다)로 일주일 동안이나 몸에 물을 대지 못한 상태인 녀석을, 불평같은 건 전부 무시하고 억지로 샤워실에 밀어넣은지 대략 10분 정도가 지났다.

참고로 말하자면 현재 이 집은 나밖에 살고 있지 않다. 물론 가족이 전부 날 버리고 떠났다거나 하는 어이없는 상황이 발생한 건 아니고, 조금 말하기 힘든 사정이 있어서 나만 떨어져 살고 있을 뿐이다.

지금은 아무도 쓰지 않는 여동생의 방에 있는 옷장을 뒤져 녀석이 갈아입을 옷을 준비해두고 있는데, 샤워기 소리가 끊기더니 곧 샤워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수건이 없어. 좀 갖다 줘."

"아, 잠깐 기다려. 갈아입을 옷이랑 같이 줄 테니까."

"됐어. 입고 있던 거 입을래."

"입고 있던 건 땀에 절어 있길래 곧바로 세탁기에 넣었어."

그 옷은 나중에 다 마르면 입으라고 말해둔 후, 갈아입을 옷과 수건을 문이 닫힌 샤워실 앞에 두었다. 그리고 가볍게 노크를 하자 손만 살짝 나와 수건을 가지고 들어간다. 동생이었다면 내가 있든 없든 아랑곳않고 당당히 가지러 나왔을 텐데, 이런 반응을 보니 왠지 신선한 느낌이 든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조금 기다리니, 옷을 다 갈아입은 녀석이 수건을 머리에 올린 채로 샤워실에서 나왔다.

"...뭘 쳐다봐?"

"아니, 그냥. 깨끗해지니까 신선하구나 해서."

"뭐래는 거야, 기분 나쁘게."

실로 오랜만에 맡아보는 동생의 샴푸 냄새(선반 구석에 있었는데 어떻게 알고 꺼내 쓴 걸까)를 풍기던 녀석은 내 농담에 짜증을 내고는 거실에 있는 소파 쪽으로 갔다.

잠시 두리번거리더니, 곧 탁자 아래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발로 낑낑대며 그 물건을 꺼낸다. 리모콘이다.

"......"

하긴, 딱히 할 게 없을 땐 TV 시청이 최고긴 하지.

한숨을 쉬고 녀석의 옆자리에 앉아 리모콘을 들었다.

"뭐야, 내놔. 내가 고를 거야."

"보고 싶은 거 말해. 틀어줄 테니까."

"......"

뭐가 불만인 건지 뚱한 얼굴로 예능 프로그램 제목을 중얼거리는 녀석. 마침 케이블에서 그 프로그램을 재방송하고 있길래 별 문제 없이 녀석의 요청을 들어줄 수 있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예능 프로의 평소와는 다른 지루한 진행에 따분해하고 있는데, 녀석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뭔데 그래?"

"이 집, 왠만한 가족이 같이 살 만큼 큰데 왜 너 혼자 사는 거야?"

"...혼자 산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그냥, 신발도 한 개고 가재도구들이 왠지 여럿이서 쓰는 배치가 아닌 듯 해서."

"......"

그다지 꼼꼼히 관찰하지도 않았으면서 내가 혼자 산다는 것까지 알아채다니, 타고난 건진 몰라도 눈치가 상당히 좋다. 가재도구 배치 형태로 그런 것도 알 수 있는 건가.

"뭐, 그렇게 심각한 사정이 있는 건 아냐. 단지..."

"단지?"

"...부모님이랑 사이가 엄청 안 좋아서 말야, 어쩌다 보니 이렇게 떨어져 살게 되어 버렸어."

"어쩌다 보니, 라..."

어째서 사이가 나빠졌는지에 대해 물어보면 어쩌나 했지만, 깊게 파고드는 건 실례라는 생각에선지 녀석은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잠깐 대화가 끊긴 후, 녀석이 탁자 위에 올려져 있는 액자를 손에 들었다. 이번엔 손떨림이 보이지 않는다.

"...이거, 가족사진?"

"뭐, 그렇지."

"흐응...너같은 유인원을 낳은 부모가 어떻게 생겼나 궁금했는데, 의외로 평범하네, 두 사람 다."

"...그 유인원이란 말좀 그만 하면 안 되냐."

잘생긴 건 아니더라도, 유인원 만큼이나 못생겼다고 생각하진 않았는데.

유인원이란 별명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고 있으려니, 녀석이 나를 향해 액자를 돌리고는 손가락으로 어느 부분을 가리키며 물었다.

"네 옆에 있는 이 여자애는 누구야? 동생?"

"......"

조용히 끄덕였다.

"헤에, 뭐야, 엄청 귀엽게 생겼잖아. 얘 어딨어? 이 애도 떨어져 살아?"

"아니, 그렇진 않지만..."

"그럼 어디 있는데?"

"...그게."

난감해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되도록이면 동생에 대한 건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

"실제로 보고 싶은걸. 나보다 어릴 것 같은데."

"...네가 몇 살인데?"

"이번 해로 14살이 돼."

"햇수로 따지면...동갑일걸."

"동갑이야? 얘 엄청 동안이네."

" '2년 전 사진' 인데 어려 보이는 게 당연하지."

"뭐야, 진작 그렇다고 말을 하던가."

내 태도에 투덜대며 녀석이 액자를 다시 탁자 위에 두었다. 그리고는 "어떻게 둬야 이쁘려나" 하고 중얼거리며 이리저리 방향을 맞춘다.

결국 탁자의 좌측 중간쯤에 비스듬히 방향을 맞춘 녀석은, 소파에서 일어나며 나에게 말을 건넸다.

"...생각나게 해서 미안."

"......"

눈치챈 걸까. 정말 엄청난 감이네.

"...괜찮아. 그 사진을 마지막으로 벌써 2년이나 지났는걸. 이젠 약간 그리운 느낌 정도밖에 들지 않아."

약간은 거짓이 되는 말을 해보았다.

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녀석은 고개를 숙이고 무언가를 생각했다. 표정이 보이질 않아서 뭘 생각하는 건지 예상이 가지 않는다.

잠시 후, 녀석이 고개를 들며 한 말은, 이렇게 시작하는 대사였다.

 

"...날고 싶어."

 

"...날고 싶다니...?"

갑자기 엄청나게 뜬금없는데.

"말 그대로의 의미야. 지금 유일하게 하고 싶은 게 있다면, 이런 아랫세상은 신경 쓰이지 않을 만큼 높은 곳에서 유유히 날아다니는 거야."

"으음..."

"...왜 인간은 날개가 없는 걸까. 가장 진화한 종이라는 멋들어진 머릿말을 달고 다니는 주제에. 난 그게 너무 궁금해."

"......"

녀석의 의문에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했던 것도 그렇지만, 녀석의 분위기가 마치 혼자 떠들게 놔둬 달라는 듯한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말도 안 되는 꿈인 건 알아. 하지만,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날고 싶어. 내가 날 수 있을 만큼 큰 날개를 달고, 내가 가고 싶은 곳을 직접 가보고 싶어. 구름이 머금은 물로 뺨을 적셔 보고도 싶고, 멋있는 야경을 내 멋대로 스케치해 보고도 싶어. ......그런데, 날 수가 없어. 날기는커녕 그 정도로 높이 뛸 수도 없어. 이것이 나라는 인간의 한계라는 절망만이 있을 뿐이야. 그저 그 절망을 덮기 위해 더 크게 희망하고, 또 그 희망이 더욱 큰 절망으로 덮이고, 또다시 희망하고, 절망하고...그런 시덥잖은 반복이 그나마 하얀 색으로 존재했던 내 마음을 폐암에 걸린 듯이 검게 물들여 버렸어. 그래도, 그런 미친 연속을 끊는 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날고 싶다는 욕망을 버릴 수가 없어."

"...너무 집착스러운 거 아냐? 그냥 상상하는 걸로 충분한 희망을, 어떻게든 이루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까 절망감이 더욱 커지는 거잖아."

"맞아. 그게 정답이고, 내가 틀린 거야. 그래도,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도, 나는 난다는 것을 염원하고 싶어. 그것이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자,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니까..."

녀석의 기나긴 대사는, 그것으로 끝을 맺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억지로 끊겼다.

 

 

 

"...윽..."

 

 

 

지금까지 멀쩡히 서서 이리저리 떠들던 녀석이, 갑자기 어지럽다는 듯이 머리에 손을 올리더니 힘없이 털썩 하고 바닥에 주저앉은 것이다.

"...?! 어, 야, 야! 괘, 괜찮냐?!"

"...아, 아무 것도 아냐...약간 현기증이..."

"잠깐..."

혹시 독감인가 하고 이마에 손을 올려 보았다. 하지만 열은 전혀 없었고, 오히려 식은땀 때문에 얼굴 전체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빈혈 증세랑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손떨림에 빈혈 증세라니, 이 녀석, 도대체 무슨 병에 걸린 거지.

"...업혀. 일단 침댈 가자."

"...호, 혼자 걸을 수 있어..."

"어지러워서 숨까지 가쁜 녀석이 뭐래는 거야. 빨리 업히라니까."

"......"

업히는 걸 거부하는 녀석을 억지로 당겨 업고. 서둘러 동생의 방으로 들어갔다. 동생이 쓰던 침대는 항상 깨끗하게 청소해 놓기 때문에 언제든 사용해도 상관 없다.

녀석을 편안한 자세로 눕히고, 장롱에서 이불을 꺼내 턱밑까지 덮어 주었다.

"누워 있으니까 어때? 좀 괜찮은 것 같아?"

"...아직 어지러워."

"그럼 아예 한숨 자. 저녁 시간 되면 깨워줄 테니까."

이미 누워 버렸으니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쉰 녀석은 얌전히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그다지 할 일도 없었던 나는, 그 옆에서 녀석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 주면서 시간을 보냈다. 예상과는 다르게 별로 뒤척이지도 않고 잘 자서 간병하는 데 딱히 어려움은 없었다. 어디가 아픈 건지 가끔 끙끙대기는 했는데, 그것도 오래 가지 않고 곧 얌전해지니 내가 할 일은 그저 땀 닦아주는 것 뿐이었다.

한 1시간 정도 지나니까 녀석도 좀 편안해졌는지 땀도 흘리지 않고 안색도 붉은 색을 띠기 시작하길래, 그제서야 나도 안심하고 반쯤 졸며 앉아있을 수 있었다.

 

 

 

6시 쯤에 녀석을 깨워서 저녁을 먹고 난 후(딱히 재료가 없어서 이것저것 다 넣어 만든 오므라이스로 해치웠다), 현기증이 완전히 없어진 녀석과 함께 TV를 보았다. 마침 골든 타임이라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많이 방송해서 시간도 잘 갔고, 티격태격하다가 같이 웃다가 하면서 녀석과의 사이도 꽤 좋아졌다.

그렇게 무려 4시간 동안이나 웃고 떠들며 놀고 나니, 역시 피곤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흐암...벌써 11시네. 난 슬슬 자야겠다."

"뭐야, 난 아직 안 졸려. 더 놀고 싶은데."

"11시가 다 됐는데 잠이 안 온다니, 착한 어린이는 일찍 자야지."

"아까 너 때문에 4시간이나 자버렸는데 잠이 안 오는 게 당연하잖아. 더 보다 잘래."

"으음...그럼 1시 안에는 꼭 자라. 무슨 일 있으면 나 깨워."

"알았어."

그럼 뭘 볼까ㅡ하고 채널을 돌려보는 녀석. 생기가 넘치는 걸로 보아(아프다가 나으면 원래 더 기운이 나는 법이다) 아마 1시 안에 잔다는 약속은 가볍게 깰 것 같다. 밤이나 새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내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누웠다. 어차피 내일도 일찍 일어날 필요는 없으니 알람은 안 맞춰도 될 거다.

 

 

 

 

 

 

 

 

 

 

 

 

다음 날 아침.

의외로 눈이 빨리 떠져서 멍한 머리로 거실로 나가 보니, 역시나 녀석은 소파에 누워 피곤한 얼굴로 코를 골고 있었다. 보나마나 거의 해뜨기 직전 새벽까지 깨어 있었겠지.

동생 침대에서 이불을 가져와 녀석에게 덮어 주고 가볍게 세수한 후 옷을 갈아 입었다. 녀석의 상태로 보아 정오가 지난 후에야 깰 것 같은데, 그 때까지 멍하니 TV만 보고 있을 수는 없으니 장을 봐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혹시 일어나면 먹으라는 의미로 소파 앞 탁자에 식빵과 바나나우유를 두고 마지막으로 지갑을 챙겼다.

그리고 나가려다가, 순간 녀석의 옷을 세탁기에서 빼질 않았다는 걸 기억해냈다.

"구름도 없으니까 바깥에 널어놔야지..."

확실히 깨끗해진 녀석의 하얀 민소매 셔츠와 반바지를 꺼냈다(속옷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듯 하다). 빨랫줄에 걸린 옷걸이가 있으니까 따로 뭘 꺼낼 필요는 없다.

"...어, 뭐야."

밖으로 나가 옷걸이에 걸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반바지 뒷주머니에 끼워져 있는 종이가 눈에 띄었다. 그러고 보니 예의 상이라는 의미로 주머니를 뒤지지 않고 그냥 세탁기에 넣어버린 게 기억난다.

중요한 거면 어쩌지, 하는 걱정에 서둘러 그 종이를 빼서 상태를 확인해 보았다. 다행히 축축하게 젖었다는 것만 제외하면 딱히 손상된 부분은 없었다.

뭐가 쓰여 있거나 하면 지워졌을 수도 있으니, 찢어지지 않게 조심조심 펼쳐서 내용물을 보았다.

 

 

 

"............"

 

 

 

그리고, 나는 종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종이에 적힌 내용물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는 엄청난 것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고를 어떻게든 정리한 나는, 종이를 다시 접어 원래 자리로 되돌려 놓았다.

......

 

오랜만에 할 일이 생긴 것 같다.

 

 

 

 

 

 

 

 

 

 

 

 

"어딜 가는지 말을 하라니까."

"일단 따라와 봐."

그 날 저녁.

집에 돌아가자 마자 녀석과 함께 점심 겸 저녁을 먹고, 동생의 옷장에서 외투를 꺼내 녀석에게 입힌 후 바로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가고 싶은 곳까지는 그다지 멀지 않았기에, 나는 녀석이 항의하는 소리는 가볍게 무시하고 그저 발을 내딛기만 했다.

약 15분 정도 걸은 후, 더운 건지 외투를 벗은 녀석과 함께 도착한 곳은 낡은 아파트였다.

"되게 낡은 곳이네."

"뭐, 내부는 겉만큼 낡지는 않았어."

대충 대답하고 망설임 없이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겉으로 보기엔 곧 무너진다 해도 믿을 만큼 낡은 아파트지만, 다행히도 엘레베이터같은 건 정상으로 작동하고 있어서, 별 문제 없이 원하는 층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도대체 이런 꼭대기 층엔 왜 온 거야?"

"아직 조금 더 가야 해."

어디로 가야할 지 몰라서 가만히 있는 녀석의 손을 잡고 계단 쪽으로 이동했다. 내가 최종적으로 도달하고 싶어하는 곳은 이 층에서 더 올라가야 하는데, 그 곳은 당연히도 엘레베이터가 올라갈 수 없다.

계단으로 한 층 더 올라가자, '옥상' 이라는 안내 종이가 붙은 철문이 있었다.

"잠겨 있는데 어쩌려고."

"잠깐 물러서 봐."

"...너 설마."

녀석이 짐작했는지 서둘러 옆으로 물러섰다.

"합!"

녀석이 거리를 충분히 뒀다는 걸 확인하고, 나는 망설임 없이 그 철문을 발로 강하게 걷어찼다. 이 문의 걸쇠는 녹슬어 있어서 이렇게 충격만 줘도 가볍게 풀린다.

그 배경지식에 회답을 하듯, 철문은 끼이익 하는 소리를 내며 활짝 열렸다.

"자, 가자."

"...이거 범죄 아냐?"

어리둥절해하면서도 녀석은 시키는 대로 옥상으로 나갔다. 낡긴 했지만 이 동네에서는 가장 높은 건물인지라, 옥상에서의 풍경은 예상대로 훤히 내다 보이는 느낌이었다.

의외로 나쁘지 않은 야경(그 정도로 밤인 건 아니지만)을 바라보며, 녀석에게 말을 꺼냈다.

"여기 어때? 탁 트이는 느낌이지 않아?"

"...뭐, 막히는 느낌은 아니네."

장난스럽게 대답한 녀석은 여전히 어리둥절해하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여기로 날 데려온 이유는 뭐야? 슬슬 알려줄 때도 됐잖아."

"좀 해주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

"해주고 싶은 얘기?"

"그렇게 심각한 얘기는 아니지만."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내 동생에 대한 이야기야."

 

 

 

ㅡ그렇게, 녀석에게 말했다.

역시나 예상대로, 녀석은 내 말을 듣는 순간 더욱더 어리둥절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뭐야, 그런 건 네 집에서 말해줘도 되잖아. 왜 굳이 이런 곳에 온 건데."

"일단 들어봐. 다 이유가 있으니까."

"......"

잠시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날 째려보던 녀석은 한숨을 쉬더니 말해보라는 듯한 손짓을 했다. 들어줄 용의는 있는 것 같다.

옥상 벽에 기대어 야경을 바라보면서, 나는 동생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 동생은 말이지, 이름은 지혜인데, 그 때 사진을 봤으니까 알겠지만 엄청 귀여운 아이였어. 나랑은 무려 6살이나 차이가 났으니 귀여울 수밖에 없었다곤 해도, 애가 선천적으로 착하고, 예의도 바르고, 어느 곳에서나 활기차서 도저히 내 동생이라고 보기엔 너무도 보물단지같은 녀석이었지."

"확실히 그러네. 좋은 유전자는 다 가져갔구나."

"...어쨌든, 그렇다 보니 부모님과 나는 지혜를 아끼지 않을 수가 없었어. 생긴 것도 이쁘지, 하는 짓도 이쁘지, 게다가 공부같은 것도 잘 하지, 어느 면에서 보아도 흠잡을 데가 없는 아이였으니까."

"뭐야, 동생 자랑하려고 데려온 거야?"

"본론은 여기서부터야. 그런 지혜가, 평소 행실 뿐만 아니라 건강도 문제 없었던 지혜가, 어느 날 갑자기 쓰러져 버렸어."

"...뭐?"

"지혜가 11살 때의 겨울, 그러니까 지금부터 세면 대충 30개월 정도 전에 일어난 일이야. 쓰러졌다고 해서 뭐 실신했다거나 했단 소리는 아니고, 우리가 보는 앞에서 갑자기 맥없이 주저앉았을 뿐이야."

"...주저앉아..."

"지혜 본인의 말로는 갑자기 현기증이 몰려와서 그랬다지만, 우리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병원에 데려가기로 했지. 지혜 본인이 별거 아니라고 반대해도, 지혜를 너무 아끼고 사랑하는 우리로서는 강제로라도 진찰을 받게 하고 싶었어. 실제로도 그렇게 했고."

"...그래서? 병원에선 뭐랬는데?"

"처음엔 동네의 작은 병원에 갔는데, 특별한 이상을 발견할 수가 없다고 해서 일단은 집으로 돌아왔어. 곧바로 큰 병원으로 가보려 했지만, 지혜가 너무 완강하게 거부해서 부모님은 데려가기를 포기했고, 나만 계속 지혜를 데려가려고 노력했지. 그러다 결국 일이 터진 거야."

"...일?"

여기서 잠시, 나는 숨을 들이마셨다.

마음의 준비에 가까운 느낌으로.

 

 

 

"지혜가, 집을 나가버린 거야. 편지 한 장만을 남기고."

 

 

 

"...잠깐."

녀석이 인상을 찌푸리며 내 말을 끊었다.

"어째서 일이 그렇게 연결돼? 얘기를 듣기로는 가출같은 건 전혀 안 할 아이처럼 들렸는데. 그리고, 겨우 11살 남짓의 꼬마애가 뭘 알고 가출을 해."

"가출...이라고 생각하기엔 좀 그래. 편지 내용을 들어보면 이해할 거야."

그렇게 말하며 주머니에서 미리 준비해둔 복사본을 꺼냈다. 원본은 부모님이 가지고 있고, 나는 이런 복사본만 열몇 장을 가지고 있다.

"...나한테 그걸 읽어주는 건 무슨 의미야?"

"들어보면 알아."

녀석이 더 항의하기 전에, 나는 그 편지를 읽었다.

 

 

 

[안녕, 아빠, 엄마, 그리고 오빠. 지혜에요. 나 글씨가 이상해도 이해해 줘. 며칠 전부터 손에 힘이 없어서 양손으로 쓰고 있거든. 말이 이상해도 그냥 맞춰서 읽어 주세요.

내가 이렇게 편지를 남기고 나가는 건, 집이 싫어서 가출한다거나 하는 나쁜 의미가 아냐. 그걸 알아줬으면 좋겠어. 부모님이랑 오빠가 보는 앞에서 아픈 모습 보이긴 싫었는걸요. 사실 지금 앞도 잘 안 보여. 거짓말해서 미안해요. 왼쪽 눈은 아예 보이질 않아. 오른쪽 눈은 침침해. 무서워.

그래도 나는 이 편지를 남길 거야. 날 찾으려고 하지 마세요. 이 말을 전해주고 싶었어. 찾아봤자 아빠 엄마 오빠가 알던 지혜가 아닐 거야. 지금 너무 아파. 손이 너무 떨려요. 이거 쓰면서도 연필을 5번이나 떨어뜨렸어. 손에 자꾸 상처가 나요. 그런데 안 아파. 그런데 아파.

지금 내 얼굴, 어떤지 알아? 웃고 있어. 근데 눈물이 나. 아픈데 웃어요. 나 너무 이상해. 그러니까 찾지 말아줘요. 이런 모습, 누구한테도 보이고 싶지 않아. 죽을 것 같아.

맞아, 지혜는 죽기 위해 집을 나온 거야.

난 알 수 있어. 난 이제 곧 죽어. 사실 엄마랑 아빠랑 오빠 앞에서 멀쩡한 척 하는 것도 너무 힘들었어. 속여서 죄송해요. 하지만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는걸. 그러니까 날 찾지 말아줘. 조용히 죽게 해줘. 엄마 아빠 오빠가 내가 죽는 모습 못 보게 죽게 해줘요.

더 이상은 못 쓰겠어. 팔이 너무 아파요. 아까부터 자꾸 손에서 피가 흘러. 하지만 견딜게. 아직 더 쓰고 싶은 게 있어.

미안해, 아빠.

미안해, 엄마.

미안해, 오빠.

그리고 사랑해.

다시 말할게. 날 찾지 마. 부탁이야. 이젠 앞이 거의 안 보여. 너무 힘을 썼나 봐요. 날 찾지 마요. 날 찾지 마요. 날 찾지 마요. 부탁이에요.

아파. 그러니까 이제 그만 쓸래. 걱정 마세요. 나 죽어도 아빠 엄마 오빠 계속 지켜볼 거야. 지혜는 이제 갈게. 바이바이. 나 찾지 마세요.]

 

 

 

"...여기까지야."

"......"

"말도 안 되게 횡설수설하지?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지혜가 얼마나 아팠는지 느껴져. 글도 잘 쓰는 녀석이었는데, 이런 앞뒤가 안 맞는 편지를 쓸 정도로 아팠다면 정말 죽고 싶었을 거야. 난, 느낄 수 있어."

녀석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평소처럼 불쾌하다는 의미는 아닌 것 같았다. 마치, "더 이상 말하지 마" 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지혜는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발견됐어. 목격자의 말로는 우리 집이 있는 주택가를 나서는 순간 쓰러져서 그대로 온 힘을 다해 기어갔다고 하더라. 아마, 어떻게든 집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려고 했던 거겠지."

"......"

"이미 싸늘하게 식은 몸을 붙들고, 부모님과 나는 정말 몇 시간이고 울었어. 그 웃음밖에 모르던 지혜가, 고통스러워서 못 참겠다는 표정을 지은 채로 쥐어뜯은 얼굴이, 정말 참을 수 없을 만큼 안쓰러웠으니까."

"......"

"그리고...지혜의 사인은 곧바로 밝혀졌어. 아무래도 똑같은 증세로 죽은 사람이 꽤 있었던 모양이지. 그 사인은...정말이지 듣도보도 못한 병이었어."

"...잠깐...설마..."

 

 

 

 

 

 

"...'심근·심혈관 팽창증' . 그 병이 지혜의 사인이었어."

 

 

 

 

 

 

녀석은 멍한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 녀석에게, 이 병명은 아주 친숙하고도 치가 떨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녀석의 주머니에서 발견한 종이는, 자신의 진찰 기록의 일부를 찢어 접은 것이었다. 어느 의사가 쓴 건진 몰라도 참 악필이어서, 읽는 데 꽤 시간이 걸렸었다.

처음 문장에는 녀석의 신상 정보(너무 자세한 것 말고 이름이랑 생년월일 정도)가 적혀 있었고, 그 아래에 녀석의 병명과 의사의 코멘트가 적혀 있었다.

 

 

 

심근·심혈관 팽창증, 이라는 병명과.

요점만 정리해서 말하자면, 앞으로 15일 정도가 한계, 라는 코멘트가.

 

 

 

그 시점에서 내가 지혜를 떠올린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기억해 보면 녀석의 증세는 지혜가 아파했을 때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팔다리의 힘이 빠지기 시작하고, 시도때도 없이 심한 현기증이 몰려오고, 피가 정상적으로 흐르지 않아 몸 전체가 저릿한 고통으로 휘감기는, 지혜가 조금 심했다는 것만 제외하면 무서우리만치 일치하는 증세다.

지혜가 더 심했던 건, 아마 말기에 다다랐기 때문이었겠지.

심근·심혈관 팽창증이란 병에 대해 설명하자면, 거의 알려지지 않은 무감염 무유전의 특질병으로, 일정 나이가 되면 이름 그대로 심근과 심혈관이 비정상적으로 팽창하여 앞서 말한 증세가 한꺼번에 몰려오는, 원인도 제대로 밝혀진 바가 없는 불치병이다. 어째서 그런 증세가 나타나는지에 대해서도 정확히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하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이 병의 진행이 시작되면 아무리 오래 견뎌도 3주를 채 넘기지 못하고 사망에 이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심근과 심혈관의 팽창 속도로 사망 시기를 예측할 수 있다곤 하지만 그런 자세한 것까지는 알아보지 않았다.

어쨌든, 녀석의 병의 진행 상태는 아직 초기 또는 중기 단계라고 추정했다. 말기에 접어들면 신체 부위 하나하나가 제 기능을 잃어가기 때문이다.

 

 

 

 

"...그럴 수가..."

이상의 내용을 요리조리 설명하자, 녀석은 경악에 찬 표정을 지으며 신음했다.

"저번에도 말했지만,못 믿는다 해도 할 말은 없어. 하지만 사실이야. 그리고, 사실이기 때문에 난 널 이해할 수 있어."

"......"

"...처음 진단서를 받았을 때, 아마 청천벽력과도 같았겠지. 어찌어찌 해서 수술을 받으면 살아날 수 있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편히 죽는 방법밖에 없다니, 이제야 겨우 중학교에 입학하려는 아이에겐 정말 믿고 싶지도 않은 소리였을 거야."

"......"

"그래서 뛰쳐나온 거지? 미안하다고 통곡할 수밖에 없는 부모님의 모습, 좌절하는 것조차 의미가 없는 자신의 상태, 자신을 바라보는 주위 사람들의 안쓰러워하는 시선, 이 모든 것들이 너무나도 싫어서 앞뒤 보지 않고 뛰쳐나온 거 아냐?"

내가 말을 이어가는 동안, 녀석은 숙인 고개를 천천히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을 걸러내는 것도 없이 정확히 내뱉는 내 말에, 어떻게든 거부감을 표하고 싶어서겠지.

하지만 나는 그만두지 않았다.

물론 나도 괴롭지만, 이것만큼은 이 녀석에게 말해야 했기 때문이다.

"모든 게 싫어지는 것도 당연해. 누구든 무시하고 접촉따위 개나 줘버리고 싶어지는 것도 당연해. 누구를 봐도 자신보단 행복해 보이고, 그저 자신만이 가장 비참한 사람이라고 느껴지는 것도 당연해."

"......"

"...그런데도, 그런 가당찮은 절망에 머리를 감싸쥐면서도ㅡ날고 싶다는 희망만은 살아있다며?"

"......!"

이 대목에서, 녀석은 마치 잊고 있던 걸 기억해 냈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처음엔 나도 무슨 뜻인지 몰랐어. 하지만, 네 주머니에 있는 진단서를 읽는 순간 너무도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떠올릴 수 있는 희망은, 장래희망같은 것보다 '날고 싶다' 같은 어렸을 때부터 품고 있었던 꿈일 테니까."

"......"

계속해서 침묵만을 유지하는 녀석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쪼그려 앉아 눈높이를 맞추고 녀석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난 평범한 인간이라서, 너한테 날개를 달아줄 수는 없어. 하지만, 네가 만족할 만큼 높은 곳이라면 어디든 데려다 줄게. 63빌딩 꼭대기라던가, 서울타워 전망대라던가, 아니면 비행기를 태워달라 해도 좋아. 어떻게든 네가 '날고 있다' 라는 느낌이 들 수 있도록 도와줄게."

"...우..."

"...그러니까, 지혜처럼 희망을 저버리고 멋대로 사라지거나 하지 말아줘. 나를 믿지 못 해도 좋으니까, 제발 끝까지 '날고 싶다' 라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줘. 그게, 나의 유일한 부탁이야."

내가 부탁의 말을 끝냄과 동시에,

"...흑."

녀석의 뺨에서, 닦아줄 수 없는 것이 흘러내렸고,

 

 

 

"...우, 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마치 고함을 지르듯, 녀석이 울부짖었다.

"흐아아앙! 으아아아아앙!!"

내 어깨에 고개를 박은 채, 두 팔로 내 옷을 꽈악 잡고, 녀석은 모든 걸 뱉어내는 것처럼 울었다.

"어째서...어째서 나야...왜 내가 죽어야 되는 거야! 도대체 왜!! 내가 뭘 잘못했다는 거야!!"

"...네가 잘못한 건 아무 것도 없어. 그렇기에 더욱 돕고 싶은 거야."

"...으아아앙...!"

"......"

안쓰러워하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나는 어쩔 수 없는 동정심에 녀석을 꼬옥 안아 주었다.

이런 조그마한 아이가 버티기엔 너무도 냉정한 운명을,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나만이라도 같이 버텨주기 위해.

 

 

 

 

 

 

 

 

 

 

 

 

그 뒤로 약 일주일 간은 거의 외촐의 연속이었다.

녀석이 울었던 날은 집에 돌아오자 마자 둘다 그대로 자 버렸고, 다음 날부터 녀석이 가고 싶어하는 곳을 시간이 허락할 때까지 돌아다녔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크다는 관람차도 타보고, 서울타워 전망대도 가보고, 심지어는 높기로 유명한 아파트 단지의 옥상(숲처럼 꾸며놓은 곳이었다)에도 가 보았다.

물론, 그 어느 곳에서도 녀석이 만족을 느끼진 못 했다. '날고 있다' 라는 느낌은 이런 간접적인 방법으로느 느낄 수 없는 것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녀석은 내가 그런 곳에 데려가줄 때마다 항상 "고마워" 라는 감사의 말을 전했다.

아무튼, 가뜩이나 아픈 몸을 이리저리 돌아다녀서 고단하게 만드는 건 역시 병의 악화에 엑셀을 밟을 수밖에 없는지라, 녀석은 가면 갈수록 현기증 증세가 심해지고 몸의 감각이 무뎌지기 시작했다. 유명한 아파트 옥상에 갔을 때는 내가 업어서 가야 했을 정도다.

그래도 불평 한 마디 안 하고 그저 할 일을 한다는 듯이 행동하는 나의 모습에, 녀석은 점차 나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물론 까칠한 말투는 여전했지만, 예전엔 업히라고 하면 어떻게는 반항했던 녀석이 약간 투덜대면서도 바로 업히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사실은 기쁨과 슬픔이 공존하는 느낌이었다.

내 동생, 그러니까 지혜는 앞서 얘기했던 대로 녀석과 똑같은 병으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것도 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이유로 가족에게 아픈 것은 정말 티도 내지 않고 참아냈으니, 그 사실을 전혀 모르던 나에게는 지혜의 아픔을 달래줄 기회조차 없었다.

당연히 후회한다.

조금이라도 빨리 알아챘더라면, 지혜에게 힘든 인내를 하게끔 만들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래서 그런지, 똑같은 상황에 놓인 녀석만큼은 어떻게든 돌봐주고 싶었다. 의대 학생도 아닌 내가 뭐 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었지만, 어쨌든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만큼만이라도 도와주지 않으면 내 자신이 싫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녀석이 굳이 인내하지 않고 아프다는 것을 드러내 주는 것은 나로서는 기쁘면서도 슬플 수밖에 없다.

기쁘면서도 슬프다는 건 조금 모순되긴 하지만, 원래 인간의 마음이란 것은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공존하는 법이니까.

 

감정에 관한 얘기는 이쯤 하고.

외출의 연속은 낡은 아파트 건으로부터 정확히 7일 째 되는 날에 끝나게 되었다. 될 수 있으면 녀석이 버텨줄 때까지 외출을 계속할 작정이었지만, 일은 그렇게 수월하게 풀리지만은 않은 것이다.

이제 질질 끌지 않기로 하자.

 

 

 

7일 째 되는 날, 녀석은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

나는 병실에 있었다.

녀석이 살던 집은 의외로 우리 집과 그다지 멀지 않았는지, 우리 집에서 가장 가까운 큰 병원에 녀석의 진료 기록이 있어서, 별 무리 없이 녀석의 부모님과 연락을 취할 수 있었다(마음 같아서는 연락하고 싶지 않았지만, 녀석을 입원시키려면 혈연이 필요했다).

녀석의 부모님은 나와 녀석이 있는 병원까지 정말 쏜살같이 달려왔다.

그리고, 정신을 잃은 녀석을 품에 안고는 미안하단 말만을 반복하며 통곡하셨다.

보호자가 도착하니 입원 수속이 가능해져서, 그나마 멀쩡하던 내가(사실 나도 그다지 맨정신인 건 아니었지만) 모든 수속 과정을 끝냈다. 녀석이 입원실에 들어가고 난 후에 녀석의 부모님과도 대화를 해 보았는데, 딸을 찾아줘서 고맙다고 말하는 것 말고 다른 말을 할 정신은 없어 보이셨다.

그 후 3시간 정도, 녀석과 혈연이 아닌 나는 녀석이 있는 병실에 들어가 보지도 못 하고 대기실에서 초조하게 서성거리기만 했다. 하지만 지루하다거나 하진 않았다. 혹시 나 때문에 더 심해진 건 아닐까, 나을 방법이 생기거나 하진 않았을까 등등, 떠오르는 생각이 너무 많아서 지루할 새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 후, 담당 의사와 함께 녀석을 침대에 눕히고 급하게 끌고 갔던 간호사가 나에게 다가와 병실로 들어오라는 말을 했다.

어리둥저해하며 병실로 들어가 보니, 정말 드라마에서나 봤던 산소호흡기나 심장 박동수를 재는 기계 등등이 누워 있는 녀석의 몸에 연결되어 있었다.

나에게 다가와 귓속말을 하는 담당 의사의 말에 의하면, 정신을 차린 녀석이 나를 찾았다고 한다. 곁에서 엉엉 울고 있는 부모님에게는 오히려 잠시 나가 있어 달라는 말을 했다고 하니, 나로서는 일단 시키는 대로 녀석의 곁으로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

녀석의 희망을 배려하기 위해 모두들 병실 밖으로 나가고, 병실 안엔 녀석과 나만이 남아 있었다.

"...산소 호흡기좀 떼줘. 불편해."

그리고, 녀석이 나에게 맨 처음으로 한 말은 이것이었다.

"...멍청아, 너 건강해지라고 붙여놓은 걸 왜 떼. 얌전히 누워 있기나 해."

"어차피 건강해지지 않을 건데 무슨 소용이야. 그냥 떼줘."

"싫어."

"...짜증나."

인상을 구긴 녀석은 그래도 나를 공격하거나 하진 않았다. 아마 움직일 힘도 마땅치 않아서겠지.

"어쨌든, 난 왜 찾은 거야. 부모님이 오셨는데 부모님이랑 같이 있어야지."

"...필요 없어. 편지만 전해주면 돼."

"편지?"

"내 바지 뒷주머니에 껴져 있어. 나중에 좀 전해줘."

어리둥절해하며 선반 위에 놓인 녀석의 반바지를 뒤적여 보았다.

녀석이 말한 대로, 그 바지의 뒷주머니에 4번 정도 접은 A4 용지 몇 장이 있었다.

"펼쳐보지 마."

"안 볼 거니까 걱정 마. 그보다, 이게 용건이었어?"

"......"

녀석은 왠지 짜증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

"...너, 여자친구 한 번도 없었지?"

"...네가 어떻게 알아."

"눈치가 없으니까."

"......"

어렸을 때 자주 들었던 소리를 이런 녀석한테 듣게 되다니, 뭔가 기분이 묘하다. 그래도 나이가 좀 먹고 난 다음엔 그런 소린 별로 안 들었는데.

내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고 묵언으로 항변하자, 녀석은 잠시 날 지그시 쳐다보더니 갑자기 몸을 움직였다.

"...으극..."

겨우 몸을 약간 일으키는 동작만 취했을 뿐인데도, 녀석은 너무 아프다는 듯이 신음했다. 황급히 어깨를 잡고 도와 주려고 해씨만, 괜찮으니까 놓으라는 녀석의 말에 일단 어깨를 놓았다.

겨우 몸을 앉은 자세로 만든 녀석은, 힘들다는 한숨을 내쉬고는 이윽고 입을 열었다.

 

 

 

"...나, 아마 곧 죽을 거야."

 

 

 

그 녀석이 내뱉은 말은, 정말이지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뭐?"

"...농담이 아냐. 아프지 않은 척을 하긴 했지만, 사실 지금 정말로 죽을 것 같이 아파."

"......"

"온몸이 아픈 건 말할 것도 없고, 눈도 제대로 안 보이고, 발은 아예 움직이질 않아. 머리는 말도 안 되게 어질어질하고, 심지어는 말도 제대로 안 나와. 지금 이렇게 말하는 건, 정말 마지막 남은 힘을 모으고 모은 거야."

"...그, 그럼 말하지 말고 푹 쉬는 쪽이..."

"...어차피 죽을 거라면, 전할 말은 전하고 죽는 쪽이 나아."

마지막 남은 힘을 모으고 모아 말한다는 건 사실이었는지, 녀석의 안색은 점점 창백해져 갔다.

어떻게든 그만 두게 하고 싶었지만, 녀석의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막을 수가 없었다.

"...너한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나한테...?"

녀석은 힘겹게 끄덕이고는,

 

"정말...고마웠어."

 

평범하면서도, 깊은 의미를 담은 말을, 숨이 찬 목소리로 나에게 전했다.

"...그 공원에 있었을 때, 사실 난 그 자리에서 굶어 죽어버릴 생각이었어. 어차피 죽을 건데 이리 죽으나 저리 죽으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으니까."

"......"

"...그런데, 대충 3일 정도 지나고 난 후에, 아침에 일어나 보니 먹을 게 머리맡에 놓여 있는 거야. 굶어 죽겠다는 의지보다 배고픔의 고통이 더 커지던 때라, 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 도움을 달게 받았지."

"......"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내 머리맡엔 항상 먹을 게 놓여 있었어. 비가 오고 난 다음 날엔 심지어는 이불까지 덮여져 있더라구. 도대체 이렇게 꾸준히 도와주는 사람이 누구인지, 나는 살짝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궁금해졌어."

한 마디 한 마디 말할 때마다, 녀석의 목소리는 점점 약해져 갔다.

그래도, 나는 막을 수가 없었다.

녀석의 말을 막는 순간, 왠지 녀석이 바로 죽어버릴 것 같다는 말도 안 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주일 후쯤, 갑자기 네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거야."

"......"

"완전히 까칠하게 굴었긴 했지만, 사실 속으로는 고마워하고 있었어. 그 이후에 네가 했던 모든 도움에 대해서도, 하나도 빠짐없이 고마웠어. 지금도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막막한 기분이 들 정도야."

"...보답같은 건 필요 없어.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아주는 게 나로서는 최고의 보답이야."

"...그럼 정말로 보답할 방법이 없어지잖아."

점점 숨이 가빠지는 목소리로 녀석은 계속해서 말했다.

"...지금의 나로서는 고맙다고 연거푸 말해주는 것 말고는 너에게 보답할 방법이 없어. 연인들이 하는 짓을 해주는 것도 의미가 없고, 네가 원하는 오래 사는 것도 어차피 불가능해. 그러니까...그냥, 고맙다고 말해주는 걸로 만족해줬으면 해."

"......"

"...부탁이야, 네가 끄덕여주지 않으면, 난..."

"...큭."

왼손으로 머리를 감싸쥐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을 해도, 녀석이 방금 말한 부탁을 철회시키고 오래 살도록 노력하겠다는 약속을 하게 할 방법은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나는 조용히 끄덕였다.

녀석은 안심의 한숨을 내쉬더니, 갑자기 쓰러지듯이 뒤로 털썩 하고 누웠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다시 말을 시작하는 녀석의 목소리는, 지금까지처럼 억지로 버티는 느낌이 아닌, 꺼져가는 느낌의 목소리였다.

정말로 듣기 싫은 목소리였지만, 이 녀석의......마지막 말을 들어줄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네 동생이...아픈 걸 숨겼던 이유는...아마도 너 때문일 거야..."

"...어?"

"...너, 동생과 관련된 일로...부모님이랑 사이...안 좋지?"

"......"

안타깝게도 사실이었다.

자꾸 아프지 않다고 우기는 지혜를 내가 병원에 보내자고 했을 때, 지혜의 의사를 존중하자며 병원에 보내지 않은 부모님을, 나는 용서할 수 없었으니까.

녀석의 예상이 맞았다는 의미로, 가볍게 끄덕였다.

"아마 그 아이는...지금의 너희 가족의 상태랑은...정 반대의 미래를 예상하고...그렇게 행동했을 거야..."

"...정 반대의 미래..."

"...자신이 자신을 죽이는 것처럼 행동해서...네가 죄책감을 가지지 않도록...그리고 다른 가족들에게...죄를 묻지 않도록."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지만, 어째선지 반박할 수가 없었다.

녀석의 말에 지혜의 성격을 조합해 앞뒤를 맞춰 보니, 전후 상황이 놀랄 만큼 맞아 떨어졌던 것이다.

지혜의 성격 상, 자신이 죽더라도 아무도 자기의 탓이라고 생각하지 않게끔 하고 싶었을 테고, 그렇다면 일부러 아픈 걸 숨겼다가 몸 상태가 심각해지자 그런 편지를 남겨놓고 집을 나가버린 것도 앞뒤가 맞는다.

"...내가 죽은 건 오빠의 탓이 아냐...그러니까 죄책감 가지지 마, 라고...네 동생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거야..."

"......"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입을 여는 순간, 왠지 지혜 생각에 목이 메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남자 주제에 뭘 우냐고 말해도 할 말은 없다).

잠시 조용히 있으려니, 녀석이 갑자기 "윽..." 하고 아파하는 신음을 내며 자신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어, 야, 야! 괜찮냐?!"

"...욱...하아, 하아......이제, 진짜 마지막..."

"마, 말하지 마! 빨리 편히 누워서 쉬란ㅡ"

그 다음 말을, 나는 이을 수 없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도 힘들어 보이던 녀석이, 갑자기 내 몸을 끌어안더니, 귓속말로 이렇게 얘기했던 것이다.

 

"...내 이름, '지혜' , 야..."

 

 

 

그리고.

눈앞에서, 마치 도화지가 떨어지듯, 녀석의 몸이 가라앉았다.

 

"...지..."

 

삐이ㅡ하는, 드라마에서 자주 들었던 익숙한 소리가 맴도는 병실에서,

 

"...지혜, 야..."

 

나는, 동생의 것인지 녀석의 것인지 모를 이름을, 조용히 중얼거렸다.

 

"...지혜야...지혜야...!"

 

 

 

 

 

 

그 후, 나는 아무도 들을 수 없는 이름만 몇 백 번을 외쳤다.

 

 

 

 

 

***

 

 

 

 

 

 

장례식의 조문객은 북적일 정도로 많았다.

녀석의 집안은 엄청난 국보급 집안이었는지, 왠지 TV 토론방송에서 본 듯한 사람들도 장례식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나는 장례식이란 건 처음 가보는 거라, 무례하게도 그런 사람들에게 정신이 팔려 진지하게 서있질 못 했다.

 

 

 

잠시 지금까지의 얘기를 해보자.

그 녀석이 죽은 후, 상심의 절정이었던 그 녀석의 부모님은 나에게 화내기는커녕 오히려 고마움을 표하셨다. 쌍욕을 들어도 할 말이 없을 거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너무도 의외의 반응이어서, 나는 어쩔 줄 몰라 하며 그저 꾸벅꾸벅 고개만 숙였다.

나의 그런 반응을 보고는, 그 녀석의 아버지께서 나에게 이런 말을 하셨다.

 

"...네가 아니었다면, 우리 딸은 세상을 원망하며 죽어갔을 거야. 네 덕분에 우리 딸이 원한 없이 갈 수 있었어. 정말 고맙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나 때문에 그 녀석이 더욱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일 수도 있었는데, 그런 놈에게 그저 녀석이 편안한 마음으로 죽을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고마워하시다니, 정신이 성숙하지 못한 나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 후에 나는 대학에 휴학 신청을 하고 입시 공부를 시작했다.

뭔가 만화 같아서 우습긴 하지만, 명문대 의대를 가서 심근·심혈관 팽창증에 대해 알아내고 싶어서였다.

물론 힘든 건 말할 것도 없다. 대학교에서 빤빤히 놀기만 한 녀석에게 갑자기 다시 공부를 시작하라는 건 운동신경 제로인 녀석에게 1년 안에 축구 국가대표가 되라고 다그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래도 어떻게든 이 목표를 달성하고 싶었다.

나는 더 이상 지혜나 그 녀석처럼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그리고 그 주위 사람들마저 고통스럽게 만드는 터무니없는 상황을 관조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렇게 1개월 정도 공부에 전념하다가, 녀석의 장례식에 대한 편지가 나에게로 왔고, 이렇게 익숙치 않은 장소에 오게 된 것이다.

 

앞서 말한 대로 나는 조문객들에게 정신이 팔려 장례식이 어떻게 거행되는지도 모른 채 이리저리 방황하기만 했고, 장례식이 끝날 때쯤에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그 녀석의 부모님에게 인사를 할 수 있었다.

여전히 어두운 표정의 그 분들은, 그래도 나를 보자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시고는 입시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을 하셨다(내가 입시 공부를 한다는 건 어떻게 아신 건지 지금도 모르겠다).

한 40분 정도 그 녀석에 대한 얘기를 하고 난 후, 이제 인사를 드리고 다시 집에 돌아가려는데, 갑자기 아저씨가 나에게 무언가를 건네셨다. 4번 정도 접힌 A4 용지였다.

어리둥절해하며 종이의 귀퉁이를 쳐다보니, 'To. 유인원같이 생긴 로리콘에게ㅡ아빠는 읽지 마' 라고 적혀 있었다.

"......"

나에게 건네줄 때의 아저씨의 씁쓸한 미소가 이해가 되는 칭호였다.

집에 가서 읽어 보라는 말을 듣고 그 종이를 주머니에 넣은 나는, 다음에 또 찾아뵈겠다는 인사를 드린 후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내 방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침대에 걸터앉아 녀석의 편지를 펼쳤다.

"...하하."

그 편지는, 첫 문장부터 나의 웃음을 자아내는 물건이었다.

 

 

 

[8월 21일, 새벽 2시에 쓰기 시작......너 코 좀 골지 마. 편지 쓰는 데 감정 이입이 안 되잖아.

이 편지를 쓰는 건, 아직 팔 힘이 제정상일 때 미리미리 하고 싶은 얘기들을 적기 위해서야. 네가 말해준 동생의 편지처럼 읽기조차도 서글픈 횡설수설한 편지는 정말로 쓰기 싫으니까.

일단 말해두는데, 고맙다는 말은 여기서는 하지 않을 거야. 원래 그런 말들은 죽기 전에 해야 드라마틱하잖아ㅡ...뭐, 이건 농담이고, 사실은 좀 멋쩍어서 말이야. 까칠하게 대하던 녀석이 갑자기 사글사글해지면 너도 낯설 거 아냐. 그러니까 환자의 의사를 들어준다는 의미로 그냥 넘어가줘.

그럼 불평부터 좀 하겠어. 너 말이야, 그렇게 여러 곳을 억지로 끌고 다니면 여자로서 얼마나 피곤한지 알아? 인자한 나니까 참아준 거지, 만약 요즘 여자들처럼 귀찮은 거 싫어하는 성격이었다면 당장 욕지거리를 내뱉었을 거야. 여자들은 고상한 곳이나 쇼핑 센터가 아니면 다리가 아프도록 돌아다니는 건 무지 싫어한다는 걸 알아 두라구.

그리고, 그 때 내가 울었을 때, 은근슬쩍 날 안더라? 너 역시 로리콘이지? 어딜 상냥한 척하면서 달라붙고 난리야. 게다가 퍽하면 업으려고 드는 건 또 뭐야? 그렇게나 여자애의 몸을 만지고 싶어? 정말 변태라니까, 너. 역시 변태들에게 친절한 나였기에 망정이지 다른 애들이었다면 바로 교도소 행이야.

이것 외에도 불평할 건 수도 없이 많지만, 그걸 다 적으려면 귀찮으니까 그냥 이 정도로 끝내겠어.

이제 미리 인사를 해둘 차례야.

내 예상이지만, 나는 아마 죽을 때쯤엔 너한테 고맙다는 말 말고는 다른 말을 하지 않을 거야. 한다고 해도 그건 언제든지 할 수 있었던 얘기거나, 아니면 너랑 관련된 얘기겠지. 그러니까 미리 인사를 해두는 거야.

 

잘 있어. 아니, 안녕히 계세요.

 

...쓰고 나니까 좀 쑥스럽네. 하지만 이미 쓴 거니까 지우진 않을래.

그리고 말해두는데, 내가 죽는다고 해서 슬퍼하진 마. 슬퍼해줄 사람은 부모님이면 충분하고, 나 때문에 누가 고통스러워하는 건 완전 싫으니까. 뭐, 너처럼 유인원같은 남자가 슬퍼할 감수성이 있을 리는 없을 테니, 왠지 자아도취같긴 하지만.

대충 이 정도면 할 말은 다 적은 것 같네.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더. 난 사후세계같은 건 안 믿지만, 만에 하나라도 저승에 가게 된다면 네 동생을 꼭 찾아서 만날 거야. 너의 부끄러운 과거를 파헤치고 싶고, 나한테 했던 요상한 짓을 동생한테 일러바치고도 싶거든(각오해 두라구).

 

...그리고, 네 동생에게 이 말도 꼭 해주고 싶어.

'네 오빠는, 날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날개를 달아줄 정도로 엄청나고 친절한 사람이다' 라고 말이야.

 

...흥, 그렇다고 착각하진 말아 줄래. 너무 욕만 하면 안 되니까 말도 안 되는 칭찬을 살짝 껴준 것뿐이야. 날개를 달아준다니, 너 따위가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러니까 의기양양해하지 마. 만약 그런 티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죽어서라도 네 곁에 붙어서 저주할 거니까.

그럼 여기까지. 이젠 졸려서 더 이상 못 쓰겠어. 맞다, 참고로 말하는데, 여기에 묻은 물방울들은 더워서 땀이 떨어진 거야. 읽기 불편해도 잘 읽어. 끝까지 안 읽기만 해봐라! 꿈자리가 사나울걸!

 

From. 완전 착하고 귀여운 지혜가

 

 

 

P.S. ...거짓말만 가득한 편지라서 미안.

그래도 완전 착하고 귀여운 건 사실이야!]

 

 

 

 

 

 

"...욱...아하하..."

편지를 끝까지 다 읽은 나는, 왼손으로 머리를 감싸쥔 채로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뺨을 타고 흐르는 건 눈물일까. 아니, 아마도 더워서 흐르는 땀이겠지.

그도 그럴 것이, 내 뺨에서 떨어진 그 물방울은, 녀석의 편지 위로 떨어져, 녀석이 묻혔다는 물방울과 똑같은 자국을 남겼으니까.

"...정말, 끝까지 재미있는 녀석이네...아하하..."

나는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그 정도로 재미있는 편지였다.

재미있는ㅡ

"...윽..."

안 된다. 역시 거짓말은 할 수 없다.

거짓말을 할 때마다. 내 목구멍은 더욱더 메어간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 편지에 대해 뻔뻔하게 대답해 주자.

그것이, 녀석을 위한 나의 마지막 도움이다.

 

 

 

 

"...잘 있어, 지혜야."

 

 

 

남자의 눈물이란 것을, 나는 너무도 많이 낭비한 것 같다.

 

 

 

 

 

 

 

 

 

 

 

 

힘들다는 건 잘 압니다.

 

누구나 고충은 있는 법이고, 당신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으니까요.

 

죽고 싶을 때도 있겠고, 모든 걸 부정하고 도망가 버리고 싶을 때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것을 행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어째서일까요.

 

그다지 용기가 없지도 않고, 의지결여증과도 거리가 멀 텐데 말이죠.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렇게 어두워진 마음 속에서도, 분명 '바람(wish)' 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품어왔던, 말도 안 되지만 즐거운 바람이 말이에요.

 

물론 뻔한 얘기입니다.

 

누구나 생각해낼 수 있는, 보잘것없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잊지 않고 항상 마음 속에 새겨두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어차피 이루어질 리가 없는 허망한 꿈을, 언제나 염원하고 있는 사람이.

 

아마 찾기 힘들겠죠.

 

그리고, 당신에게 그런 사람이 되라고 강요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겠죠.

 

그러니까.

 

이것만 잊지 말아 주세요.

 

그 '바람' 조차도 꿈꿀 수가 없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그 '바람' 을 꿈꾸는 것만으로 행복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이것이, 저의 바람입니다.

 

 

 

 

 

  처음으로 올려보는데 이렇게 하면 되는 건지...어쨌든 잘 봐주세요

comment (1)

xester
xester 12.03.27. 23:10
잘 읽었습니다.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네요. 사랑하는 '지혜'를 두 번이나 잃게 되다니, 너무 가혹한 운명이 주어진 주인공에게 뭔가 힘이 되는 말이라도 해주고 싶네요. 그가 지혜의 몫까지 '뻔뻔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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