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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레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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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25 Jan 19,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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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악당6호

카트레이서

 

 

 

1

 

쫓기고 있다.

단지 녀석들의 운전솜씨가 대단해 구경 좀 했을 뿐이었다.

 

손님이 드문 한적한 마트.

반들반들한 바닥위로 구르는 쇼핑카트의 바퀴소리가 제트엔진처럼 요란했다.

“큭!”

발이 미끄러져 진열대를 걷어찼다. 피가 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아팠지만 내색할 시간 따위는 없다.

지금 막 코너를 빠져나왔다.

채소가 진열된 냉장고 옆으로 활주로처럼 곧고 긴 길이 뻗어있다.

“히히히.”

뒤에서 웃음소리가 들린다. 그새 또 가까워졌다. 녀석들은 바로 뒤에 있었다.

필사적으로 달린다. 냉장고 안의 채소들이 울창한 숲으로 보일 때까지 달린다. 하지만 바퀴 소리는 점점 가까워져만 온다.

중반을 넘어서서 끝이 보인다.

불행히도 직각으로 꺾이는 급커브가 나타났다.

 

멈춰야한다!

 

내 머릿속의 이성이 그렇게 외치고 있었지만, 날 뒤쫓고 있는 쇼핑카트들은 여전히 거침없었다.

아아! 제과점 주인이 진열대에 도넛을 쌓다가 도망치고 있다.

구간이 거의 끝났다.

버틸 수 없다! 지금 당장 서야만 한다!

끼익! 끼이익!

신발 밑창이 떨어져나갈 것만 같았다. 속력이 약간 줄긴 했지만 여전히 밀리고 있다.

 

……이미 늦은 것 같다. 망했다.

 

“어, 어억!?”

옷이 진열대에 걸린 걸까?

마치 누가 잡아당긴 것처럼 몸이 갑자기 뒤뚱거렸고, 시야가 비스듬히 돌아간다.

철퍽!

개똥을 밟고 자빠졌던 어제처럼 얼굴부터 바닥에 처박혔다. 제과점은 무사했지만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휴우…….”

내가 낸 소리가 아니다.

넘어진 자세에서 고개만 들어보니, 멜빵바지를 입은 여자애가 손을 털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머쓱해진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일어섰다. 무척 아팠지만, 어금니를 가루약으로 만들 기세로 이를 악물었다.

“많이 놀랐지?”

죽는 줄 알았다. 일생일대의 위기였다. 하지만 나도 남자다.

“아니, 전혀.”

“쌍코피.”

그녀는 방긋 웃으며 여행용 티슈를 건넸다.

울고 싶었다.

 

드르르르르            

 

말없이 코피를 닦고 있자니, 예의 그 바퀴소리가 가까워진다.

요즘은 좀처럼 보기 힘든 하회탈이 눈에 들어왔다.

하회탈 2인조. 조금 전까지 나를 쫓아오던 녀석들이었다. 매장을 한 바퀴 돌고 다시 온 걸까?

감속한다. 그런데…….

어?

곧장 달려오던 녀석들이 갑자기 이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오, 이런 슈크림! 놀라서 뒷걸음질 치다가 티슈채로 콧구멍을 쑤셔버렸다. 후끈한 느낌이 눈까지 전해져 왔다. 전신거울을 보니 인중이 네 갈래로 늘어나있었다. 이런 쒸―

“괜찮아. 잘 봐.”

육두문자가 나오기 직전, 멜빵소녀가 내 등을 토닥였다.

끼익!

귀 따가운 소리와 함께 내 쪽으로 오던 쇼핑카트가 순간 방향을 바꿨다. 카트가 완전 반대쪽을 향했다.

하지만 방향이 바뀌었다한들 속도가 과했다. 맨몸으로도 멈추기 힘들었는데 쇼핑카트까지 끌고 있음 오죽할까?

“으럇!”

하회탈 2인조가 꼴사납게 발을 구른다. 죽을 각오로 브레이킹을 해도 모자랄 판국에 되레 엑셀레이터를 밟는 꼴이었다. 저건 완전히 글러먹었다.

 

“…….”

 

하지만 완전히 글러먹은 건 내 판단이었다.

녀석들은 밑창이 뜯겨나가는 소음 속에서 대각선으로 미끄러져갔다.

안쪽으로 파고든다. 미끄러지는 것처럼 보이는 와중에도 쇼핑카트의 앞바퀴는 바닥의 진열대 세팅용 레일과 아슬아슬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드리프트야.”

멜빵소녀가 말했다.

“드리프트. 음…….”

놈들이 피해간 이상 그딴 기술이름이 중요한 게 아니다. 쬐끔한게 건방지게. 엎어졌을 땐 몰랐지만 나란히 서니, 나보다 머리 한 개 정도 작다. 초딩인 내가 이야기하긴 뭣하지만, 머리칼을 묶은 빨간 방울이 무척 애 같았다.

“너 지금 내가 유치원생 같다고 생각했지?”

“어? 아니, 그 정도는 아니고…….”

“몇 학년이야?”

허리에 손을 얹었다. 땅콩 같지만 눈빛은 매서웠다.

나는 자신 있게 5학년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땅콩이 자기를 가리키며 엣헴하고 헛기침했다.

“나 6학년. 앵두누나야.”

땅콩주제에 6학년이라니? 땅콩주제에 앵두라니, 누나라니?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자, 땅콩이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꼬깃꼬깃하게 접은 교과서 표지였다.

 

‘바른생활 6-2 최앵두’

 

……이것이 소문으로만 듣던 교, 교과서 인증!?

“너 같이 의심 많은 애들 때문에 갖고 다니는 거야.”

그러십니까.

“근데 굉장하지? 우리 가게.”

“너네 가게야? 큭!”

한 대 얻어맞았다. 바로 누나네로 고쳐 말했다.

“응. 그런데 이렇게 보니까 가게라기 보단 경기장이라 부르는 게 낫겠네.”

예의 그 하회탈 2인조도 그렇고, 내 또래로 보이는 것들이 쇼핑카트로 매장 전역에서 난리치고 있다. 콩밥 속 콩알처럼 드문 손님들은 되레 그걸 구경하고 앉았다.

확실히 이상하긴 하긴 했지만, 그래도 처음 보는 광경은 아니었다. 전에도 심부름 때문에 몇 번 와봤으니.

 

……어라?

 

이상한 놈이 시야에 들어왔다.

중학생인지 덩치가 좀 있는 녀석이었는데, 얼굴 반을 덮는 밴드형 선글라스를 꼈다.

카트를 밀며 다가오던 녀석은, 냉장고 밖으로 삐져나온 식재료를 바로 넣고 나서야 다시 걷기 시작했다. 차림은 이상하지만 나쁜 놈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안하던 짓 하고 있네. 딴 데 가자. 내가 구경시켜줄게.”

앵두누나는 내가 대답도 하기 전에 손을 잡아끌었다.

무슨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야 여기 있든 누나를 따라가든 아무래도 좋았다. 아까처럼 쫓기지만 않는다면.

드르르르르륵!

순간, 요란한 바퀴소리가 매장을 울렸다.

아무생각 없이 누나를 따르다가 뒤돌아봤을 때, 녀석은 이미 우리 뒤에 와있었다.

“이봐 앵두! 우리가 어떤 사인데, 보면 인사정돈 해줘야 되는 거 아닌가.”

녀석이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누나는 찌푸린 표정으로 녀석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계속 대답이 없자, 녀석은 그제야 이쪽을 돌아봤다.

“처음 보는 얼굴이군. 내 이름은 나이트 슈마허. 이 서킷의 챔피언이지. 다들 초음속의 기사 나이트 슈마허라고 부르더군.”

“……슈마허? 놀고 있네.”

누나가 입을 삐죽거렸다.

“카트 킹, 투케이(2․K)라고 불러도 좋아.”

당당하게 자랑하는 뻔뻔함에, 유치한 작명센스에 질려 말이 안 나올 지경이다.

“아……, 어. 나는 순수.”

“순수? 꼭 여자 이름 같군. 그래, 순수. 기왕 이렇게 서킷에 왔는데 레이스 한판 어때?”

초면에 대뜸 하는 말이 한판 붙잖다.

그래도 뭐, 레이스는 여건만 되면 꼭 한번 해보고 싶었다. 예전에 왔을 때부터 끼리끼리 어울려 노는 모습들이 즐거워보였기도 했고, 특히 여자애들한테 인정받는 모습을 지켜볼 때는 정말 부러웠다. 하지만 실력은 고사하고, 해본 적도 없다.

“내가 가르쳐주지.”

그들만의 리그 같은 기분이 들어서 쉽게 접근하지 못했는데, 챔피언이 직접 기회를 마련해준단다. 이거 의외로 좋은 기회일지도 모르겠다.

누나가 여전히 투케이를 흘기고 있었지만, 그래도 내가 보기엔 나쁜 놈 같진 않다. 사나이로서 사나이의 선의를 믿어보기로 할까?

“좋아! 네 놈의 그 제안 받아들이도록 하지!”

시원한 대답에 투케이가 싱긋 웃었다.

“너, 몇 학년?”

나는 자신 있게 5학년이라고 대답했다.

“나 6학년. 너, 네, 네 놈은 금지단어다. 알간?”

누가 초딩 아니랄까봐, ……씨.

 

 

쫓기고 있다.

시작할 때 내 앞으로 치고 나가는가 싶었는데, 곧바로 속도를 늦춰 내 뒤로 붙었다.

테크닉과 파워가 한참 딸리는 입장이라, 투케이가 앞질러 가도록 비켜주었는데도 집요하게 내 뒤에 붙어있다.

“늦다! 좀 더 스피드를 내란 말이다!”

끼기긱!

달려오던 속도 그대로 코너를 돌았다. 완만한 코너였는데도 신발 밑창이 비명을 질러댔다.

몸이 바깥으로 튕겨나갈 뻔했다.

이제부터 ‘냉장고 로드’다. 돌았던 구간을 통틀어 최고속도가 나오는 구간이다.

달린다.

가벼운 무게 때문에 접지력이 없다시피 한 카트는 사춘기가 한창인 망아지처럼 촐랑거렸고, 거기다 투케이까지 뒤에서 나를 몰아댄다.

이제 곧 구간이 끝난다.

잘 달리기 위한 설명 따위는 없었다. 속았다. 이건 완전 사냥당하는 기분이다. 대체 내가 뭘 잘못했기에 이런 수모를 당해야하는 걸까?

“……어이 순수, 앞을 봐야지?”

어깨너머로 들리는 목소리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직각 코너가 코앞이었다.

 

“으아악!”

 

단말마와 함께 카트채로 제과점 진열대에 꽂혔다. 진열대 패널들이 마치 구조용 매트처럼 밀려나며 내 몸과 카트를 감쌌다. 신기하게도 생각보다 아프지 않았는데, 멀찌감치 물러선 제과점 주인이 만족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였다. 이런 해프닝이 자주 있었던 걸까?

“…….”

뭉개진 도넛을 털어내고 있는데 투케이가 다가왔다.

녀석이 목소리를 깔고 말했다.

 

“……앵두는 내거다. 알간?”

 

 

 

2

 

[멍청한 자식! 네놈이 제로의 영역이 얼마나 위험한 건지 알기나 해!?]

모니터엔, 몇 년 전 부스터 신드롬을 일으켰던 레이싱 애니메이션이 돌아가고 있었다.

레이싱 초짜인 주인공이 노력 끝에 챔피언이 되는 것이 스토리다. 물론, 이런 걸 본다고 해서 투케이를 이길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냥, 그냥 보는 거다.

「순수야, 엄마랑 마트 좀 갔다 오자.」

열 받고, 겁난다.

아, 가기 싫은데…….

 

 

매장 안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붐볐다.

조미료 진열대를 돈다.

두 걸음 더 가면 엄마와 나란히 걸을 수 있지만, 그럴 순 없다. 나는 마마보이가 아니니까.

다행히 주위에 아는 얼굴은 없다.

집에서 나설 때만 해도 분노 반 두려움 반이었는데, 막상 현장에 나서보니……. 아, 오줌이 마려워지려한다.

 

순~ 수~ 야!”」

 

쿠직.

갑자기 뒤에서 미는 바람에 카트 손잡이에 급소를 찍혔다. 목이 멨다. 슬프지도 않는데 눈물이 났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간신히 돌아보니 앵두누나가 있었다.

솔직히, 두 번째로 마주치지 않길 바랐던 사람이었다.

“어머? 순수 친구… 가 아니라 동생이니?”

“동생이 아니라 누난데요.”

동생이냐는 물음에 앵두누나의 표정이 꿈틀거린다. 엄마가 조용히 돌아섰다.

“……그나저나 조미료 코너가 어디 있더라―.”

조미료를 카트에 담으면서 잘도 말씀하십니다.

누나랑 둘만 남았다. 투케이가 이 광경을 보기라도 하면 나는…….

“…….”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아니, 말을 해도 되는 거야?

눈치만 살피고 있는데, 누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제… 미안, 나 때문에 기분 나빴지?”

“아니, 뭐…….”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시커먼 눈 밑을 보면 알 거다. 마주보고 있기도 좀 그렇고 해서 시선을 돌렸다.

아…….

“투케이랑은 사귀는 사이?”

질투가 아니다.

투케이와 앵두누나의 투 샷 사진, 시선을 돌린 곳에 있었던 그 사진을 보고 말한 거였다.

“확 깨물어버린다? 그게 말이―”

누나는 장난 섞인 태도로 대하려다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정말로 그렇고 그런 사이였던 건가!? 그렇다면 어제 투케이가 내게 했던 해코지들이 이해가 간다. 정도가 좀 지나치긴 했지만.

“―너, 저기 마스코트 사진보고 그러는 거지?”

“마스코트 사진?”

“응, 네가 본거. 그거, 매장의 최고 실력자를 찍은 사진이야. 새 챔피언이 생기면 그 때 바꿀 거라고 아빠가 말했는데……. 아직 투케이를 이긴 사람이 없어서 붙어있는 거야. 아우 정말! 정말 같이 찍기 싫었는데, 아빠가 나랑 마스코트 사진을 찍게 해주면 상품 안 받겠다는 소리에 넘어가서…… 아빠 바보야, 정말로!”

……그렇고 그런 사이는 아닌가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투케이가 내게 해코지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아니, 백프로 할 거다 어제처럼.

이렇게 누나랑 같이 있는 모습을 들키면 투케이의 응징을 받을 거고, 누나를 무시하자니 내가 겁쟁이란 걸 들켜 망신당할 텐데……. 속이 불편하다.

 

「최앵두, 넌 언제쯤 날 좋아해줄래?」

 

옆에서 들린 목소리였다. 엄마가 나갔던 통로에 투케이가 서있었다 놈은 나를 노려보며 걸어 나왔다.

……설마, 엿듣고 있었던가?

“……절대, 그런 일은 절대 없어. 저리 안 가?”

상대가 대놓고 싫은 기색을 내는데도, 투케이는 씨익 웃고 넘길 뿐이었다. 녀석은 이제 나를 쳐다보고 있다.

“이렇게 같이 있는 걸 보면, 아직 덜 당했나보군?”

“…….”

나는 대답대신 놈을 노려봤다. 반항의 뜻이라기보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될 지 생각나지 않았다.

누나가 나를 보고 있다. 대꾸조차 못하는 날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을까?

숨쉬기가 불편하다. 갑자기 오줌보가 터질 것 같다.

 

「순수야! 엄마 식기코너에 있는데, 좀 와줄래?」

 

투케이가 목소리를 쫓듯 주위를 흘겼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피식 웃음이 샜다.

“아직도 엄마랑 오냐?”

“…….”

누나가 날 쳐다보고 있다. 표정이 가라 앉아 있었다.

“혹시, 지난번에 당한 게 분해서…… 아니, 겁나서 같이 가달라고 부탁했다거나?”

“아니라고 쉬퐁!”

나도 모르게 육두문자가 나오고 말았다.

누나의 입술이 앵두를 문 것처럼 벌어졌다. 눈도 동그래졌다. 그리고…….

투케이는 미간이 찌그러졌다. 입은 웃고 있는데 눈만 찌그러졌다. 놈은 앵두누나를 슬쩍 보더니, 갑자기 내 멱살을 잡아 비틀었다.

“아니란 말이지? 우리 순수, 용감하네. 엉?”

투케이가 얼굴을 바짝 붙여왔다.

“짱나서 그냥 보내주긴 싫고, 아 맞다! 우리 맞먹은 김에 레이스나 한 판 뜰까? 어때? 짱나고 용감한 순수야.”

뒤늦게 정신을 차린 앵두누나가 투케이의 팔목에 매달리고 있었지만 벗어날 수 없었다.

비겁한 투게이 자식. 자기 좀 잘 하는 거 있다고 이야기를 그 쪽으로 몰아 가냐? 누가 초딩 아니랄까봐…… 씨.

“설마, 겁먹어서 도망치거나 그러진 않겠지?”

“…….”

“여기서 도망치면 네가 좋아하는 앵두누나는 엄청 실망할 거야? 정말 그렇겠지?”

딱히 싫어하진 않지만, 멋대로 몰아세우지는 마라.

 

(하지 마. 네가 고생하는 모습 보기 싫어.)

 

누나가 귓속말로 소곤거렸다.

“뭐라고 말 좀 해보라고.”

투케이와 엮이기도 싫고, 누나 앞에서 망신당하기도 싫다. 하지만 둘 중 하나는 선택해야만 했다. 후회된다. 집에 있을 때 자는 척 할걸. 갑자기 엄마가 밉다.

 

「얘는 참, 불러도 대답안하고. 안 오고 뭐하니?」

 

엄마가 나타났다. 조미료 코너 입구에서 오라고 손짓하고 있다.

“…….”

나는 두 사람을 쓰윽 보고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쇼핑카트를 밀었다. 애초에 엄마를 거들어주기 위해 왔던 거다. 이건 오라고 해서 가는 거다. 그래, 절대 도망치는 게 아니다.

“여자 앞이라고 입만 살아가지고는. 아니긴 뭐야 아니야? 저렇게 잘 도망치고 있잖아? 고자 같은 놈. 가라 가! 순수 고자, 순고자야. 너 감싸준 앵두 버리고 혼자 자알 가라 순고자야!”

 

내, 내가 고자라니!?

와, 나… 이런 슈크림을 봤나!?

 

“붙어보자 투게이!”

 

 

 

[한번만 말하겠다. 아키나에서 도랑타기를 이용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모니터에는, 몇 년 전 고갯길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던 레이싱 애니메이션이 돌아가고 있었다.

초조하다.

어제는 꼭지가 돌아 투케이와 결투직전까지 갔었는데, 결국 엄마 손에 질질 끌려왔다. 억지로 하루를 벌긴 했지만, 그럼 뭐하나? 카트 손잡이조차 만져보지 못했는데. 이건 완전 불 속에 뛰어드는 불나방 같은 꼴이다. 좋아서 뛰어드는 건 아니지만 맥없이 당한다는 사실은 다를 바 없다.

하지만 내뱉은 이상, 가야한다.

……내가 가면 놈은 바로 붙자고 달려들겠지.

이런 슈크림…….

망신당하지 않으려고 투케이와 싸우기로 했는데, 이래가지고는 산 넘고 강 건너 지뢰밭이 아닌가.

동네의 유일한 마트인 이상, 평생 안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 정말 모르겠다 이젠.

“……마트 좀 갔다 올게요.”

 

 

“도망칠 줄 알았더니, 제 발로 찾아왔군. 순고자란 말은 취소하지.”

“투케이, 너도 투게이에서 투케이로 1등급 상향이다.”

“뭔 소리냐? 난 투케이다. 슈마허다, 6학년이다! 너라 그러지 말라고 했을 터다? 어서 스타트지점으로 가지.”

챔피언 투케이가 다가가자, 수많은 레이서들이 동작을 멈추고 길을 비켜준다. 나는 그 뒤를 따른다. 기분이 묘했다. 내가 뭐 대단한 놈이라도 된 것 같은 느낌. 하지만 그런 대접을 받을수록, 스타트지점에 가까워질수록 내 카트는 무거워지는 것만 같았다.

출발선 앞에 나란히 섰다.

평소엔 고삐 풀린 망아지들처럼 설치던 레이서들도 길옆에서 잠자코 구경하고 있다.

「레디―」

카운트 소리가 들린다.

“앵두가 이 자리에 없어서 아쉽군. 네가 꼴사납게 처박히는 걸 직접 봐야하는데.”

그나마 없어서 다행이다.

「스타트!」

끼이! 끼이이익!

신발 밑창이 찢어지는 소리가 매장을 메웠다. 투케이의 카트가 앞바퀴를 쳐들고 튕겨나가듯 출발했고, 나는―

―나는 힘 조절에 실패해 카트채로 미끄러지고 있었다. 테크닉이 마음을 따라주지 못했다.

 

그런데,

 

“헥헥, 잠깐만!”

신나게 미끄러지고 있는데, 사람이 뛰어들었다.

……앵두누나였다. 왜 나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위치선정이 무척 안 좋았던 것만은 확실했다.

끼익! 끼익!

난 미끄러지는 와중에도 누나를 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꾸직.

카트 앞바퀴는 앵두누나의 발등을 밟고 정지했다. 아슬아슬했지만 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아야야야! 이 바보야! 뭐가 다행이야!? 멍하니 밟고 있지 말고 어서 치우란 말이야!”

호통에 놀라서 수레를 빼려했는데, 누나가 내지른 발차기에 맞아 투케이가 있는 곳까지 굴렀다. 아팠지만 카트를 치울 필요는 없어졌다.

“오우, 앵두 왔네.”

“네가 그러고도 챔피언이야?”

“야… 내가 인사하잖아.”

“이 시합, 게임이 될 거라고 생각해? 비겁하다는 생각 안 들어?”

잠자코 듣고만 있던 투케이가 다가간다. 카트를 버려두고 자리를 뜨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도 누나한테 가봐야겠다.

“그래서 어쩌라고?”

“순수한테 익숙해질 시간을 줘.”

투케이는 어이가 없었는지 실실 웃음을 흘렸다.

“나한테는 듣기 좋은 인사한 번 안 해주더니 이런    

“왜? 해주기 싫어? 겁 나?”

“뭐?”

투케이가 누나를 노려본다. 이를 가는 것도 모자라 눈까지 부라렸지만, 누나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응수했다.

누나가 끝까지 물러서지 않자, 녀석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감정을 듬뿍 담아서 내 어깨를 움켜쥐었다.

“……3일, 3일 안에 끝내라. 알겠냐?”

말없이 쳐다보고만 있자, 녀석은 실실 웃으며 카트 쪽으로 걸어갔다. 애꿎은 진열대만 걷어차고는 사라져버렸다.

 

 

 

“문제는 접지력이야.”

우수한 접지력.

투케이가 무지막지한 출발을 했음에도 미끄러지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그거다. 반면 나는 투케이에 비하면 안쓰러울 정도로 밋밋한 출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카트를 바로 잡는 것조차 힘들었다. 세월아 네월아 밀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무튼 방법을 찾아야했다.

“이걸 써보면 어떨까?”

앵두누나가 ‘SNOW-X’라고 적힌 스프레이 깡통을 내밀었다.

“전에 아빠가 자동차 바퀴에 뿌리는 걸 봤어. 그거 뿌리면 눈에서도 안 미끄러진대.”

큼지막한 타어이 모양의 라벨부터가 믿음직스러웠다. 바닥에 철퍼덕 앉아 뿌려보았다. 약간 끈적끈적한 느낌이 일품이었다. 하지만 내 신발 접지력만 좋아져서는 곤란하다. 투케이와 처음 맞붙었을 때 어땠던가? 특히, 냉장고 로드에서는 사춘기가 한창인 망아지를 몰고 가는 기분이었다.

그럼 카트바퀴에도 좀 뿌려볼까?

“그거보다 이렇게 하는 쪽이 더 좋을 걸? 으이쌰!”

누나는 자기 머리만한 포대하나를 들고 오더니, 그대로 카트에 처넣었다. 밀가루였다. 근데 웬 밀가루?

“카트는 무조건 다운포스야, 다운포스! 한 번 몰아봐.”

음…….

두루루루루―.

아, 소리가 좀 다르다. 그리고 무겁고, 음? 좀 힘이 드는데…….

어라?

스타트 할 당시에는 빈 카트보다 훨씬 힘들었는데, 어느 정도 속도가 붙고 나니 카트가 제 발로 굴러가는 것처럼 수월하다. 속도도 훨씬 잘 붙는다. 그런데 더 신기한 건, 카트가 제멋대로 굴지 않고, 오직 내가 트는 방향으로만 간다는 점이었다.

“어때? 훨씬 쉽지? 하지만 무거울수록 코너돌때 많이 밀리니까, 적당히. 오케이?”

“오케이.”

……이렇게 밑 준비를 하니까 이기는 거지. 비겁한 투게이 같으니라고.

“그런데 누난 어떻게 그리 잘 알아? 누나가 카트 끄는 건 한 번도 못 봤는데.”

“그게, 예전에…… 좀, 놀았어.”

아니, 카트 끄는 게 웃는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울 만큼 심각한 일입니까?

아, 괜히 물어봤다. 고마운 마음에 칭찬해주려 했던 것뿐인데.

 

「맞아! 좀 놀았지, 아주 자알 놀았지!」

 

투케이였다. 오늘은 왜 안 오나 했다.

“시끄럽게 굴지 말고, 저리 가.”

누나가 흘기면서 말했지만, 투케이는 들은 체도 안했다.

“앵두는 이 서킷에서 내게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레이서였지. 뭐, 다 옛날일이고. 지금은 너 같은 놈의 매니저 짓이나 하고 있지만.”

5학년이라서 참는다.

그런데 왜 그만둔 걸까? 아니, 그만 뒀다하더라도 지금 다시 시작하면 되잖아? 실력이 비슷하다면 노력해서  직접 마스코트 사진을 떼도 될 텐데.

“응……. 근데 그게, 사정이 좀 있어. 아빠가 매장 주인이라서…….”

무슨 소린지 잘…….

“멍청한 놈. 현직 카트레이스 위원장의 딸이 우승이라도 해봐라. 그럼 뒤가 구리다느니, 팔은 안으로 굽는다느니 따위의 헛소리들이 돌게 돼있어. 그럼 여러모로 귀찮아지는 거지. 실제로, 앵두는 허섭스레기들이 지껄인 헛소리 때문에 자격을 박탈당했기도 하고.”

투케이의 시선은 어느 샌가 드리프트 중인 하회탈 2인조에게 가있었다.

…….”

뚱하게 서 있던 누나는 내가 쳐다본지 수초가 지나서야 나를 알아챘다. 무안했는지 방긋 웃는다.

“뭐, 그런 이유로 순수가 꼭 이겨줄 거라고 믿어. 기대하고 있으니까 절대로 날 실망시키지 마.”

어? 이야기가 갑자기 이리로 흘러도 되는 거야?

“믿었던 도끼는 항상 발등을 찍게 되어있지. 이놈을 무참히 박살내고 널 내 걸로 만들 거다.”

“헛소리 하지 마!”

 

……싫다, 이런 전개.

 

 

 

스타트라인에 섰다.

삼일 전보다 많아진 갤러리들이 투케이를 응원하는 소리가 들린다.

신발 바닥에 SNOW-X을 덧뿌렸다. 강력한 다운포스를 위해 포대도 두 개나 실었다. 할 수 있는 수준에서 최선을 다했다. 이젠 대결뿐이었다.

“순수야 잘 해! 꼭 이기는 거야!”

앵두누나의 목소리였다. 유일하게 나를 응원해주는 소리였지만, 위안대신 내 속의 부담감만 더 커지는 기분이었다.

「레디―」

투케이가 앵두누나를 한 번 쳐다보고는 카트손잡이를 힘껏 쥐었다.

“박살내주지.”

「스타트!」

끼이이익!

옆에서 밑창이 뜯겨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여전히 무지막지한 스타트 대시였다. 하지만 나는 지난번의 내가 아니다!

끼익!

밑창은 처음으로 힘을 줬던 순간에 딱 한번만 비명을 지르고 조용해졌다. 미끄러지지 않았다. 카트도 안정적으로 뻗어나가고 있다. 약간 시큰거리는 발목만 빼고는 모든 게 마음에 든다.

가속도가 붙었다. 투케이의 뒷모습이 가까워진다.

“이제 왔냐?”

“앞질러주지!”

투케이와 나란히 섰다.

힘껏 내딛어도 미끄러지는 것 없이 나아간다. 접지력은 완벽했다.

 

그런데, 어? 뭐야!?

 

나란히 달리던 투케이의 모습이 갑자기 사라졌다.

“……그럼 난 예고했던 대로 널 박살내도록 하지.”

뒤에서 나는 소리였다. 돌아보니 투케이의 카트와 내 엉덩이의 사이의 거리가 불과 30센티도 안될 만큼 붙어있다. 지난번처럼 몰아붙일 작정인가!?

[경고! 40R 코너 접근! 감속하라! 감속하라!]

내 머릿속 센서가 경보를 울려댔다. 하지만 느긋하게 대처할 시간은 이미 지나있었다.

“크윽!”

포대무게 때문에 카트가 바깥쪽으로 밀려난다. 신발은 미끄러지지 않았지만, 발목이 꺾일 것 같다.

“슬립을 잡으려고 궁리한 것 같다만… 과했군.”

뒤에서 따라오던 투케이가 어느새 바로 옆에 와있다. 그것도 내 안쪽에. 어째서, 어째서 이런 스피드에서 파고들 수 있는 거냐고!?

 

철컥!

 

녀석은 간신히 버티고 있던 내 카트를 박았다.

“이만 꺼져라.”

끼이이이―

카트가 미끄러진다. 냉장고 패널이 코앞이다.

챠캉! 챠르륵! 챠르르르              

카트 옆구리가 찌그러졌다. 오렌지 색 불꽃이 튄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며 냉장고 패널을 긁고 있었지만, 코너가 완만했던 탓에 간신히 코스에 복귀 할 수 있었다.

 

“투우               게이이!!”

 

따라잡아주마, 미친 듯이 따라잡아주마!

발목이 많이 시큰거린다. 하지만 냉장고 속 채소가 울창한 숲처럼 보일 때까지 달린다.

“저런 미친.”

투케이의 중얼거림이 들릴 정도까지 따라붙었다. 이제 곧 대망의 직각코너다.

끼이익!

끼익!

아슬아슬한 지점에서 나와 투케이가 동시에 발을 멈췄다. 제과점에 처박힐 것을 각오한 분노의 브레이킹이었다.

“라인 크로스냐!?”

갤러리의 외침이 들린다.

라인 크로스? 그딴 거 뭔지 모른다.

투케이는 브레이킹과 동시에 코너 바깥쪽으로 옮겨갔다. 대체 얼마나 좋은 세팅을 하고 있기에 저런 움직임이 가능하단 말인가!?

괜히 몰두해서 자존심 상할 필욘 없다. 코너 안쪽은 이제 내 차지였으니까!

 

그 때 였다.

 

눈앞으로 이상한 광경이 펼쳐졌다.

웬일인지, 코너 안쪽을 달리던 내가 바깥에 있는 투케이를 따라붙고 있다. 다시 보니, 내가 녀석보다 더 바깥쪽에 있었다.

투케이가 안쪽으로 파고든다. 하지만 뒤에서 따라붙던 내 카트가 녀석과 진열대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비집고 들어왔다. 보이는 내 표정이 괴롭다. 나는 진열대를 스치며 마침내 녀석을 앞질렀다.

 

    드르르르                            

놈과 내가 브레이킹 중인 풍경으로 돌아왔다. 녀석은 여전히 바깥쪽에 있었고, 나는 안쪽에 있다. 투케이와 진열대 사이로 보이는 공간이 이상하리만치 넓다. 갑자기 보인 그 영상이 뭐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화려한 드라이빙은 무리다. 지금의 나는 쉬운 길을 놔두고 일부로 어려운 길로 돌아갈 만큼 여유롭지 않았다.

나는 사이 공간으로 카트머리를 들이밀었다.

「안 돼!」

분명 앵두누나의 목소리였다.

“큭큭큭 멍청한 놈 같으니.”

투케이가 웃고 있다?

……설마 이건,

 

이건, 날 노리고!?

 

투캉!

카트가 튀어 올랐다.

“큭!”

내가 밀던 카트가 바닥에서 완전히 떴다.

아아! 카트 그림자 속에 진열대 세팅용 레일이 있었다.

……투케이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그 점이 서글펐다. 이 모든 게 순전히 내 실수 때문이라는 사실이 더 서글펐다.

이 코너만 벗어나면 골이건만!

 

쿠당탕탕!

 

이번에도 카트채로 제과점 진열대에 꽂혔다. 대신 이번에는 진열대가 완전히 박살났다. 지금 막 화장실에서 나오던 제과점주인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가까워져오던 발소리들이 멎었다. 앵두누나를 포함한 갤러리들이 다가와 있었다.

앵두누나가 내려다보고 있다. 표정이 어둡다.

“비켜라.”

투케이가 비집고 들어왔다.

“꼴좋군. 내가 이런 놈을 겁 낸다고? 뭐가 무서워서? 어디 말씀 좀 해보시지?”

“…….”

내가 대답하지 않자, 이번엔 앵두누나를 쳐다본다.

“…….”

그 당당하던 앵두누나가 시선을 피했다. 돌아섰다.

누나는 말없이 매장에서 나가버렸다.

“어지간히 실망한 모양이군.”

투케이의 비웃음 소리가 들린다.

하나도 아프지 않았지만 일어설 수 없었다.

누나의 기대를 저버린 나는,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지켜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오고 싶지 않았다.

안 오려고 엄마한테 필사적으로 대들어봤지만, 복날 개 맞듯이 얻어맞기만 맞고 결국 이 꼴이다. 투케이한테 깨진 이후로 이게 벌써 세 번째다.

최대한 빨리 사고 사라지자.

그렇게 마음먹고 쪽지를 펴봤는데, 생각보다 장거리가 많다.

“…….”

빈 카트는 많이 있다. 하지만 나는 빈손으로 들어섰다. 살 게 많기는 하다만, 딱히 카트를 사용할 정도는 아니고…… 또 사용하고 싶지도 않다.

나는 냉장고 로드 쪽에서 오는 카트 무리들을 피해 조미료 코너로 들어갔다. 먼저 온 사람이 있었다. 앵두누나였다.

물건을 비교해볼 심산인지, 카트에 담긴 물건을 뒤적거리고 있다. 아직 나를 못 본 것 같았다.

“…….”

무엇부터 사든, 적힌 대로 사가기만 하면 된다. 조미료는 나중에 사기로 하고 조용히 빠져나왔다. 남자답진 못 할지라도, 지난번처럼 마주쳐서 서로 불편해지는 것보단 백번 나을 터다.

……참 못났다. 아는 체할 자격도 없는 놈이다 나는.

진열대에서 나와 익숙한 통로로 들어섰다. 오이와 당근 한 묶음씩을 꺼내들고 걸었다. 옆의 냉동고에서 동그랑땡 두 팩을 꺼내 품에 안에 안았다. 그리고는 다시 조미료 코너로 향했다.

다행히 앵두누나는 갔다. 맛소금과 후추 한통씩을 빼내 들었다. 조금 위태롭긴 하지만, 계산대까지만 가면 된다.

조금만 참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빈 카트가 앞을 막아섰다.

“요즘 얼굴보기 힘들구먼.”

듣기 싫은 목소리였다.

조용히 빠져나가려고 반대쪽으로 돌아섰는데, 재수 없게도 거기에 투케이가 서있었다.

“근데 카트는 어쨌냐?”

“…….”

“앵두가 편 좀 들어준다고 이젠 내 말이 우습냐? 우습냐고!?”

“컥!”

대답 없이 서있자, 주먹이 날아왔다. 주먹자체는 안고 있던 장거리에 맞아 안 아팠지만, 넘어지면서 찍힌 꼬리뼈는 제법 아팠다.

안고 있던 물건들이 모조리 바닥에 흩어졌다.

나는 몸을 일으켜 물건들을 다시 주웠다. 세 개였던 당근은 두 개로 줄었고, 오이는 반 토막이 났다.

“……!!”

나는 눈으로 오이조각의 행방을 좇던 자세그대로 굳어버렸다. 오이조각은 내가 잘 아는 사람의 운동화에 닿아있었다. 바로 앵두누나의 운동화였다.

날 내려다보던 누나는 말없이 오이조각을 주워 내밀었다. 나는 고개만 슬쩍 끄덕이고 받아들었다. 그리곤 앞을 막고 있던 카트를 옆으로 치웠다.

“카트 잡어.”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누나가 나한테 이런 목소리로 말한 건 처음이었다. 나는 무시하고 걸음을 내딛었다. 카트는 더 이상 나와 관계없는 물건이니까.

옆을 지나쳤다고 생각한 그 순간, 누나가 내 앞을 막아섰다.

 

찰싹!

 

내 열두 평생 한없이 많이 맞아봤지만, 또래 여자애한테 귀싸대기를 얻어맞긴 처음이었다.

“너 이렇게 약한 애였어? 겁쟁이였어?”

……겁쟁이라고? 그러니까 아직 앙금이 남아 있다는 거지?

“…….”

잠깐만. 생각해보니까 열불 나잖아.

실망시킨 건 미안해. 근데 이미 일주일이나 지난 일이잖아? 왜 이제 와서 사람 창피하게 만드는 건데? 와 어이없네. 맞은 사람은 난데, 왜 때린 니가 울먹이는 거냐고!

갑자기 치밀어 오른 울분이 턱까지 차올랐을 때, 누나는 투케이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런 놈한테 지고 그것도 모자라 얻어맞기까지 했는데, 이게 뭐야? 평생 기죽어 있을래? 넌 분하지도 않냔 말이야!

“그럼 어쩌라고! 계속 덤비기라도 하라고? 와, 나! 질 것 뻔 한 게임을 왜 해야 하는 건데!? 누나 도움까지 받아가면서 세팅했는데도 못 이겼잖아. 레이스를 잘 아는 사람이 도와줬는데도 그 모양이었다고. 그런데 나 혼자서 뭘 어떻게? 세팅이고, 나발이고 아무것도 모르는데 나더러 어쩌라고!?”

누나의 팔이 올라간다.

그래. 차라리 때려라, 때려!

하지만 귀싸대기를 후릴 것 같던 손은, 내가 안고 있던 물건들을 카트로 쓸어내렸을 뿐이었다. 멍하니 보고 있는데, 누나가 내 손을 잡고 카트 손잡이 위에 올려놓았다.

“…….”

……?”

누나는 사납던 표정을 거두고 눈을 감았다.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잘 들어, 여기서부터 냉장고 로드를 거쳐서 골까지. 진 사람이, 이긴 사람 소원 한 가지 들어주기.”

“갑자기 무슨 소리야?”

어이없다.

“가!”

“으컥!”

다짜고짜 엉덩이를 걷어찼다. 한참을 밀려가서 돌아보니, 누나가 뒤따라오고 있다. 카트 속의 조미료팩이 팝콘처럼 튀고 있었다.

고민된다.

여기서 멈추고 돌아갈까? 불안하다. 왠지 누나 혼자 골까지 가서는, 소원이 어쩌고저쪼고 따질 것 같아서 마음에 걸린다.

그건 그렇고, 홀로 걸어 나오는 투케이가 보인다. 흘깃 째려보는 폼이 완전 기분이 상한 것처럼 보였다.

“야! 내가 보기엔 다른 데 신경 쓸 때가 아닌 것 같은데?”

따라 잡혔다. 누나는 어느 새 나와 나란히 달리고 있었다.

코너가 가까워진다.

[경고! 크랭크 형 코너 접근! 감속하라! 감속하라!]

머릿속 센서의 말이 맞았다. 모서리 두 개가 엇갈려 이어지는 코너였다. 반경은 크지 않지만, 두 쪽 모두 코너각이 직각에 가까웠다.

끼이익!

지난 번 투케이와 붙을 때에 비하면 좀 밀리는 감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괜찮은 제동력이다. 오히려 발목에 무리가 가지 않는 부분은 이쪽이 낫다.

그런데…….

누나가 멀어져간다. 왜 감속하지 않는 거지?

끼익!

말하기가 무섭게 신발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속도는 거의 줄지 않았다.

누나는 방금 전의 하나마나 한 것처럼 보였던 감속과 동시에 카트 머리를 코너의 바깥쪽으로 틀었다. 정면에 있는 진열대 모서리에 금방이라도 충돌할 것만 같았다.

 

바로 그 때였다.

 

카트 앞대가리를 중심으로, 누나가 반원을 그리며 바깥쪽으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끼익! 끼이이이             

누나는 마치 기다렸던 것처럼 발을 굴렀다. 카트 앞대가리가 코너 안쪽으로 돌아갔다. 신발 밑창이 사정없이 미끄러진다. 누나는 마치 빙판위에서 뛰는 것처럼 헛발질하고 있었다.

“아…….”

누나와 카트는 대각선으로 미끄러져갔다.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져버렸다.

일전에 봤던 ‘드리프트’ 라는 기술이었다.

어떻게 저런 무모한 주행을 할 수 있는 걸까? 보는 입장인데도 오금이 저린다.

크랭크 코너를 벗어나보니, 누나는 이미 냉장고로드로 통하는 40R 코너의 부근까지 간 상태다. 빨라도 너무 빠르다! 이건 완전 사기다!

빨리 안 오고 뭐해!?”

나는 필사적으로 뒤쫓았다.

약간이지만 거리가 좁아졌다. 코너는 귀신같이 공략하지만, 그래도 파워는 남자인 내가 한 수 위다.

나는 누나가 40R 코너를 드리프트로 파고드는 모습을 보며 필사적으로 뒤쫓았다. 어금니가 가루약이 될 기세로 이를 악물었다.

초고속구간 냉장고 로드다. 누나가 카트 일곱 대를 붙여놓은 거리 정도로 앞서고 있지만, 그래도 구간이 이 정도로 길면 아직 가망은 있다!

여섯 대 반,

여섯 대,

다섯 대 반             

카트가 심하게 흔들린다. 손에 땀이 고이고 어깨가 덜덜 떨린다. 혹시 힘이 너무 들어간 게 아닐까?

[에어로 모드 온! 무릎 임계점까지 앞으로 8초, 7초, 6초―]

뭐라는 거야?

아무튼 간신히 카트를 유지할 정도로 어깨에 힘을 빼자, 자세가 낮아졌다. 엉덩이를 뒤로 뺀 자세가 우스꽝스러웠지만, 운전은 훨씬 수월해졌다.

누나와의 거리는 이제 카트 두 대 정도의 거리다. 누나가 흘깃 뒤를 돌아본다.

“뭐야!? 무슨 비밀 무기를 쓴 거야?”

“나도 몰라!”

냉장고 속 채소들이 울창한 숲처럼 늘어져 보인다.

미친개처럼 달린다. 죽을힘을 다해 달린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직각코너가 코앞이었다.

[경고! 직각코너 접근! 감속하라! 감속하라!]

감속을 위해 어깨와 손목에 힘을 주고, 자세를 바로 세웠다.

[서킷 모드 온!]

거 참, 오늘따라 시끄럽네!

끼익! 끼익! 끼이익!

우와, 무릎이 빠질 것 같다. 투케이와의 일전에서도 이 정도 충격은 아니었는데.

아…….

아픈 게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겨우 코너로 돌입할 준비를 끝냈을 때, 누나는 이미 드리프트로 직각 코너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완전 망했다. 나의 완패였다.

골로 들어가자, 누나가 카트를 밀며 다가왔다. 그리고는 마치 보라는 듯이 카트를 내 쪽으로 내밀었다. 카트 안에는 조미료 팩 몇 개 들어있는 게 전부였다.

“알겠어?”

“‘알겠어?’라니? 뭘?”

“레이스는 세팅이 전부가 아니란 거.”

그건 뭐…….

카트 접지력도, 체력도, 덩치에서 나오는 안정감도 나보다 훨씬 불리했을 거다. 하지만 누나는 무모한 기술도 거침없이 써대는 배짱과 테크닉으로 완승을 거뒀다. 대단한 땅콩이다, 정말로.

“그건 그렇고…… 넌 처음으로 완주했네?”

그러고 보니 첫 완주였다. 완패했지만 생각보다 기분 나쁘진 않다.

“뭐, 완패했지만.”

불 지펴놓고 물 붓는구나. 누나에 대해선 알다가도 모르겠다.

“근데 누나, 갑자기 나한테 잘해주는 이유가 뭐야? 내가 투케이한테 졌을 땐, 실망해서 다신 안 볼 것 같은 분위기더니.”

“그거? 바보야! 실망해서가 아니라 투케이가 비웃는 꼴 보기 싫어서 나갔던 거야. 음…… 근데 다시 생각해보니까, 그렇게 오해할 수도 있겠다.”

누나가 ‘그래서 삐쳤던 거구나아~?’라며 어깨를 툭툭 친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누나라곤 하지만, 그래도 나보다 머리 한 개만큼 키 작은 여자애한테 이런 소릴 듣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래도 할 말은 없다.

 

「야! 최앵두!」

 

투케이가 진열대를 밀치며 다가왔다.

조금 전까지 웃고 있던 누나의 얼굴에는 어느새 사나운 표정이 떠올라있었다.

“이딴 고자 같은 놈이랑 어울리지 마! 지금껏 네 곁에 있어왔던 내가 안보여? 네가 이런 찌질한 놈이랑 어울리면, 너만 쳐다보면서 기다린 나는 뭐가 되겠냐고!”

“허, 누가 기다리래? 기다려 달랬어?”

“와아……. 이놈한테는 소원도 걸었는데, 나한테는 따뜻한 말 한마디 안 해주네. 이 매장의 챔피언인 내가, 이 내가 역겹다고? 실컷 기다렸는데, ‘기다려 달랬어?'라고? 이건 대체 어디서 굴러먹은 경우냐고!”

투케이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입은 웃는데 눈은 울고 있었다. 껄렁한 모습만 보이던 놈이 저러고 있으니까 기분이 묘하다. 누나도 참―

“너 이 새끼!”

투케이가 내 멱살을 움켜쥐었다.

“지는 놈은 이 매장에 다신 얼씬거리지 않는 걸로 한 판 붙자.”

숨 막힌다.

“뭐하는 거야!? 빨리 놔!”

“최앵두, 잘 생각해봐. 어쩌면 억지로 찍었던 마스코트 사진을 뗄 수 있을지도 모르지. 더욱이 네가 그렇게 싫어하는 나를 내쫓을 수 있는 기회지 않아?”

누나의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투케이의 손목을 붙잡고 있던 손은, 망설임 속에서 스르르 풀리고 있었다.

“결정해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게 맞서 싸울 건지, 아니면 지금껏 해온 대로 고자처럼 도망칠 건지를.”

놈의 말대로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다. 언제오든 한번뿐인 기회다.

누나한테 보여주고 싶다. 모두에게 증명하고 싶다.

 

내가 고자가 아니란 것을.

 

“붙어보자 투게이!”

 

 

 

3

 

스타트라인 앞에 섰다.

많은 갤러리들이 지켜보고 있다.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고, 물러서기도 싫다.

「레디―」

카운트 겸, 판정은 누나의 아빠인 위원장님께서 직접 맡아주셨다. 얼떨결에 챔피언십이 되어버린 탓에 누나 손에 끌려 나오셨다. 조금 죄송하다.

고개를 돌리자 투케이가 독기를 품고 째리고 있었다.

“너 이 새끼, 꼭 박살내주겠어.”

경기에 앞서 쓸데없이 힘 뺄 필요는 없다. 나는 카트 손잡이를 잡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뇄다. 오로지 내 레이스만 집중하자고.

「스타트!」

끼기기긱!

투케이의 카트가 튀어나간다. 앞바퀴가 들린다. 마치 사냥감을 쫓는 상어의 주둥이 같았다.

투케이가 조금 앞서고 있긴 했지만 거리 차는 그다지 나지 않았다.

좁아진 시야 옆으로 앵두누나가 보인다. 누나는 화이트보드를 들고 있었다.

‘꼭 이겨!’

급하게 휘갈겨 썼는지 글씨가 엉망진창이다. 피식 웃음이 났다. 정말 묘한 기분이었다.

 

철컹!

 

투케이가 내 카트를 들이받았다. 하마터면 카트손잡이를 놓칠 번했다.

“입이 아주 귀에 걸리셨구만.”

“큭!”

철컹! 철컹! 철컹!

계속 카트를 들이받고 있다. 반동으로 코너 안쪽에 있던 진열대에도 부딪히고 있다. 하얀색이었던 진열대에는 스크래치가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드르르르륵―, 끼익!

쉴 새 없이 공격을 퍼붓던 녀석이 갑자기 속력을 줄여 내 뒤로 붙었다.

그랬다. 이제 곧 40R 코너였다.

“…남의 여잘 뺏은 대가를 톡톡히 치르도록 해주지.”

“누나가 어째서 네 건데!?”

또다. 뒤에서 빠른 속도로 몰아대다가 코너에서 카트를 칠 생각인거다. 하지만 몇 번이고 당했던 패턴이다. 이번엔 나도 얌전히 당해줄 생각은 없었다.

내가 몰리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코너 안쪽을 차지하고 있다.

나는 감속해서 내 페이스를 만들어가기로 했다.

얌전히 내 꽁무니를 따라오든지, 코너 바깥쪽으로 둘러오든지간에 내 앞을 달릴 순 없다!

 

그런데……어라?

 

털컥.

엉덩이에 놈의 카트가 닿았다.

감속하기는커녕, 놈은 더욱 속도를 높이고 있었다.

카트도 아니고 아예 대놓고 몸을 들이받아? 이거 완전 미친 놈 아니야!?

바깥쪽으로 옮겨가자, 놈도 따라붙었다.

“멍청하기는.”

끼익! 끼익! 끼이이                       

내 발은 이미 둘 다 바닥을 딛고 있었다. 하지만 점점 빨라져만 갔다. 냉장고 패널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투케이의 카트 프레임이 내 발 뒤꿈치에 닿아있다. 빌어먹을! 발을! 발을 움직일 수 없다!

“잘 가라. 그리곤 다시 나타나지 마라!”

“미친놈! 끄아악          !!”

투케이는 카트로 내 엉덩이를 밀치고 바로 속도를 줄였다. 놈도 발을 멈추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카트 방향을 틀어 일부러 진열대를 긁었다.

하지만 내 상황은 훨씬 심각했다.

투케이에게서 벗어나면서 발을 구르는 순간, 놈의 카트프레임에 발뒤꿈치를 찍혔다.

미친 듯이 방향을 틀었다. 하지만 그땐 이미 냉장고 패널이 너무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쿠당탕탕!!

 

냉장고 패널과 충돌했다. 튕겨 나와서 진열대를 들이받았다. 카트 앞부분이 찌그렸고, 옆구리를 심하게 부딪쳐서 잠깐 숨을 들이마실 수가 없었다.

투케이가 내 옆을 지나친다.

발이 아프다. 한쪽 양말이 빨갛게 물들어있었다.

여기서 멈출 순 없다. 이런 나를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실망은 한 번이면 충분하다.

날 믿어준 누나를 위해,

내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이겨야만 한다!

“나는 고자가 아니야          !!”

발목이 아팠지만, 숨이 거칠었지만 그게 뭐 대수란 말인가!

미친 듯이 달린다.

냉장고 야채고, 나발이고 볼 여유도 없었다.

“우랴랴랴랴악!”

투케이와의 거리는 카트 여섯 대 반. 구간은 아직 반이나 남았다. 할 수 있다. 해내야만 한다!

[에어로 모드 온! 무릎 임계점까지 앞으로 8초, 7초, 6초―]

썩을, 뭐라고 지껄여도 좋다. 제발 나 좀 도와주라!

거리가 좁혀든다.

“이, 이런 미친 새끼를 봤나!? 다쳤으면 구석에나 조용히 처박혀 있으란 말이다!”

마침내, 녀석과 나 사이의 거리는 카트 두 대 길이.

[직각코너 접근, 감속하라! 감속하라!]

조금 더         

[감속하라!]

따라붙었다!

[서킷 모드 온!]

끼익!

끼이이익!

동시에 발을 멈췄다.

투케이놈은 브레이킹 순간에만 약간 밀렸지만, 따라잡을 것만 생각하고 필사적으로 달려왔던 나는 계속 밀리고 있다.

아, 이대로 끝인 건가?

투케이놈이 코너바깥쪽으로 옮겨간다.

 

그때였다.

 

온 몸의 감각이 멈춰버린 것만 같은 몽롱한 기분이 들었다. 카트에 걸린 관성도, 소음도, 상처의 아픔도 느껴지지 않는 정지된 공간 속에 나와 투케이가 있었다.

여전히 안쪽에 공간이 있음에도 투케이를 따라 바깥쪽으로 빠지는 나와 내 카트.

교차되는 라인.

아슬아슬하게 파고드는 나.

그리고 투케이를 앞지르는 나.

 

드르르르르              

모든 감각이 살아 움직이는 풍경으로 돌아왔다.

투케이는 안정적인 움직임으로 속도를 줄이고 있다. 하지만 내 쪽은 잔류하는 속도가 여전히 너무 빠르다. 평범히 감속해서 돌기는 글러먹었다.

 

어느 쪽이나 확실한 결과를 보장할 수 없다면          

 

    그래, 이제 지난번과 다른 선택을 하라는 소리지?

 

그런 거지?

 

“이런 슈크림 같은!”

투케이보다 더 바깥을 향해 카트를 몬다.

끼이익!

바깥쪽을 향했던 카트가 순간, 안쪽으로 틀어졌다.

영상 속에서 봤던 나를 그대로 카피하는 거다! 내 자신을 믿어보는 거다!

감속하기엔 이미 늦었다. 감속이라는 단어는 대갈통에 없는 거다. 미친놈이 돼보는 거다!

끼익!

대각선으로 미끄러져간다.

코너 안쪽에서 완전히 벗어났던 내가, 지금 투케이를 지나 코너 안쪽으로 파고들고 있다.

바닥에 진열대 세팅용 레일이 보인다.

 

바로 지금이다!

 

덜커덩!

 

“어? 뭐, 뭐야!?”

소리에 놀랐는지, 코너 안쪽으로 진입하려던 투케이의 카트가 한순간 폭탄을 맞은 것처럼 요동쳤다.

직각코너의 모서리부분을 지난다.

진열대 모서리와 카트사이의 거리는 10센티 미만.

“무슨 드리프트가 저렇게 빨라!?”

갤러리들 중 누군가가 외쳤다.

“너 이 새끼! 무슨 짓을 한 거야!?”

코너 밖으로 튕겨 나가지 않으려고 카트 앞바퀴를 레일 안쪽에다 걸친 상태였다. 정신차려보니 나도 모르게 레이싱 애니메이션에서 보았던 기술을 써먹고 있었다.

“크윽!”

투케이와 놈의 카트는 내 몸에 막혀, 코너 바깥쪽에서 돌고 있다. 나를 박으려고 몇 번이나 시도하고 있었지만, 카트에 걸린 관성 때문에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고 있었다.

“어떻게 너 같은 버러지한테 내가            

골이 보인다!

마침내 코너가 끝났다.

 

내가,

이 내가! 놈을 앞질렀다!

 

“어서! 순수야 어서 와!”

누나는 벌써 결승선 앞에 와있었다. 정말 험난했다. 생판 처음 보는 놈한테 괄시 당하고, 또래 여자애한테 싸대기도 맞아보고…….

하지만 이젠 끝이다.

증명해냈다.

난 고자 같은 놈이 아니야!

 

너한테만은 질 수 없단 말이다!」

 

투케이의 카트가 내 뒤를 찌르고 달려들었다.

피하고자시고 할 여유가 없었다.

 

“우와아아아악!”

 

나는 결국 투케이의 카트에 치여 미끄러지면서 결승선을 통과했다. 덤으로 스낵코너에 처박혔다. 꼴사나웠지만 그게 내 첫 승리였다.

지금 하고 싶은 일은 한 가지뿐이다.

‘난 고자가 아니다!’

삼켜왔던 그 한 마디를 외치고 싶었다.

 

“난 고자       

 

콰직!

 

아악!?

아?? 머리, 가 아으          

 

     하, 피리… 면, ……때,

…려 이떤…… 떠러, 졌…….

……망할, 마… 코트 ……진,

 

……런, 슈크…… 림        

 

    켁.

 

 

 

낯선 침대와 환자복이 불편하다. 머리전체를 감은 붕대는 말할 것도 없다.

아야야야…….

액자에 찍힌 부분이 아직 아프다. 겨우 기회가 찾아와서 고자가 아니라고 선언하려던 순간었는데.

음…….

액자가 박살나던 그때의 투케이는 정말 대단했었다. 유리조각에 여기저기가 찢긴 마스코트 사진을 안고 울어재끼더니, 말릴 틈도 없이 뛰쳐나가버렸다. 여러모로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녀석이었지만, 그래도 그런 최후를 보고 있자니 약간은 안타까웠다.

 

「순~ 수~ 야!」

 

앵두누나였다.

노크 없이 들이닥친 점이 누나다웠다. 그런데… 위원장님도 오셨구나.

“몸은 좀 괜찮은가?”

붕대 때문에 입 벌리기가 곤란해서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럼 바로 시작하지.”

어? 뭘?

나는 옆에 있는 스케치북에 물음표를 그려 손에 들었다.

“신 투케이의 마스코트 사아~ 진~!”

반 미라 같은 꼴을 찍어가서 어쩌자는 건데? 뭔 귀신의 집도 아니고.

위원장님 대신 대답했던 누나가 곁으로 쪼르르 다가오더니, 열심히 네임 펜을 놀리고 있던 내 팔을 품에 안았다.

카메라를 꺼내던 위원장님께서 게슴츠레한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다.

“너는 왜 거기 있어? 얼른 나와.”

누나가 내 얼굴을 보며 싱긋 웃는다.

“내기에서 이기면 같이 찍어도 된다고 허락해줬거든.”

내가 언제? 무슨 내기?

……내기?

내기 비슷한 거라고는 그 때 얼떨결에        

“정말인가?”

위원장님께서 의심하는 눈초리로 쳐다보고 계신다. 부정하면 무안해질 것 같아 고개를 끄덕이자, 한숨을 내쉬시며 카메라를 잡았다.

“지난번엔 찍기 싫다고 쌩 쑈를 부리더니만.”

“메롱이다~ 뭐!”

찰칵.

액정으로 찍은 사진을 확인해보니 과연 반 미라의 모습이었다. 심지어 누나는 혀를 빼문 채로 찍혔는데, 이걸로 정말 괜찮은 걸까?

“좋아! 마음에 들어.”

 

……모르겠다. 그냥 니 마음대로 해라.

 

“그럼 우린 가보겠네. 빨리 나아서 매장에 돌아오게. 자넬 기다리는 도전자들이 많아.”

도전자란다… 하하, 이런 건 생각도 못했는데 귀찮게 됐다.

“아, 맞다!”

응?

“‘고자’가 무슨 뜻이야?”

헉.

“네가 기절하기 전에 ‘나는 고자!’라고 말했었잖아.”

이런 슈크림…….

“지금 애들이 전부 그 이야기들이야. 네가 고자라면서―”

야~ 신난다!

“얘야, 빨리 가자. 아픈 사람을 오래 붙잡고 있으면 못 써.”

“아, 미안. 어쨌든 빨리 나아서 와. 그럼 바이~!”

두 사람은 충격과 공포만 가득 남기고 나가버렸다.

 

내가 고자라니…….

 

카트레이서들에게 고한다.

 

기다려라.

 

신 투게       

 

―아니, 신 투케이의 귀환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完)

 

 

 

'신 본격 쇼핑카트 레이싱 소년물' 입니다?

레이싱 소설을 꼭 써보고 싶었는데, 이런 식으로 쓰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아무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__)

 

 

Writer

악당6호

악당입니다.

comment (2)

수려한꽃
수려한꽃 11.03.22. 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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