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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히토


 엘리베이터는 미끄럽게 상승했다. 강의 시간과 겹친 것인지 오르내리는 사람이 없었고, 그래서 나는 혼자 멈추지 않는 엘리베이터 안에 기대 서 있을 수 있었다. 한쪽 면이 유리로 덮여 있어 학교의 전경을 눈에 담아둘 수 있었다. 전경이라고는 해도, 여름이라 짙은 나뭇잎이 깔린 캠퍼스 여기저기에 높고 낮은 건물들 몇몇이 들어서있는, 그런 모습 정도였지만 말이다.
 이 학교에 와보는 것이 처음이었다보니, 나는 약간 조심스러워져 있었다. 조금 과장하면 당황했기 때문이라고 해도 좋다. 지도를 보고 어디에 있는 무슨 건물로 가야 하는가 정도는 알 수 있었고, 거기까지는 특별히 헤매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그 이후에도 일종의 낯섦은 쉽게 가시지 않았는데, 그건 내가 이곳이 처음이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 건물의 이상한 구조도 한 몫을 하긴 했을 터다. 이 건물은 어쩐지 번호가 이상하게 붙여져 있었다. 100호, A100호, B100호가 나란히 늘어서 있고, 계단도 각기 따로 나 있는 구조는 누가봐도 문제가 있다고밖에 할 수 없지 않을까. 당장 내가 가야 할 곳인 C702호는 도대체 어느쪽에 붙어있는 것이란 말인가?
 그렇지만, 그 이상한 건물 구조와는 별개로, 나는 이곳 캠퍼스의 녹음과 거기에 서 있는 건물들의 모습이 바라다볼수록 어쩐지 마음에 들었다. 어쩌면 그건 그 모습에서부터 내가 이전에 다녔던 대학의 모습을 추억해내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 판단에까지 닿기 전에 엘리베이터가 멎었고, 나는 C702호 교수실을 찾았다.
 "안녕하세요. 윤정원 씨이신가요?"
 방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나는 고개를 한 번 꾸벅 숙여보이고는 맞습니다, 라고 덧붙였다.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어요. 어디부터 시작해야 하나."
 정경진 교수는 책상에서 일어선 채로 여기저기 놓여있는 서류들을 부산히 뒤적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소개라거나, 개관 같은 것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닐까 했다. 그렇지만 그게 영 눈에 띄지 않았는지, 그는 결국 멋쩍게 웃고는 이야기를 돌렸다.
 "그냥 장비를 먼저 보고 시작하는게 좋을까요? 어떠세요?"
 "그쪽이 좋겠네요."
 그러고나서 그는 다시 서류 더미를 뒤져 서류철 몇 개를 끄집어내고 나서, 문을 열고 나를 바깥으로 안내해주었다.

 우리는 그 신기할 정도로 소음 없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바깥에는, 물론 아직도 매미가 울고, 후덥지근한 공기가 차 있었다. 나뭇잎에 가려 이지러져도 여름 햇빛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여름은, 그래서 연구실 안에서 바깥을 관조할 때를 제외하고는 그다지 달갑지 않은 계절이다.
 "신경영상연구동은 조금 멀어요."
 내가 지하철역에서 여기까지 걸어왔고, 그래서 기운이 조금 빠져있다는걸 눈치채기라도 했던 걸까? 그가 그렇게 말했다. 내게는, 그게 마치 각오하라는 의미처럼 들렸다.
 "정원 씨, 아, 정원 씨라고 불러도 될까요?"
 네, 라고 짧게 답하면서 나는 그에게 시선을 맞췄다.
 "정원 씨는 연구 분야가 어떤 건가요?"
 "전 의식하고 기억 전공이에요. 지금 하고 있는 건 기억이 어떻게 인출되서, 의식으로 회상할 수 있게 되는 가 하는 거죠. 물론, 요즘은 그렇게 분야가 있다고는 해도 다 섞여 있어요. 기억에서 지각을 빼놓을 수 없고, 또 의사 결정도 연계될 수밖에 없고, 그런 게 좀 있죠. 아마 어떤 주제를 가장 좋아하는가, 정도일 거예요."
 "그렇게 연계되는 분야가 많아질수록 복잡해질 것 같은데."
 "신경계를 연구하다보니 신경계처럼 복잡해졌죠."
 그는 잠깐 웃었다. 나도 농담처럼 한 이야기기는 했지만, 생각해보면 연구소가 점점 그것의 연구 분야, 신경계의 구조를 모사하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는건 사실일듯 했다. 대상과 주체가 일치할때 대상에 대한 인식이 일어난다,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던 것과 비슷한 맥락이지 않을까 싶었다.
 "저도 하다보면 이런저런 분야들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게 되긴 합니다만, 그런 연구들처럼 얽혀있다고 표현할정도로 복잡한 건 아니라서요."
 그가 말했다.
 "아, 그러고보니까, 점심은 드셨나요?"
 "네. 오는 길에 잠깐."
 이제 한 시 정도가 됐으니, 오는 시간을 빼고 생각해보면 조금 이른 점심이었다고 생각할는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생각하실지는 모르겠지만 전 기대를 많이 했어요. 이런 장비를 조립하고 나면 꼭 자식 같은 느낌이 든다고 할까? 그래서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들죠. 물론, 잘 알아볼 수 있는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으면 더 좋고요."
 "저도 기대는 많이 했어요."
 내가 말했다.
 "연구소에도 스캐너가 있긴 한데, 동시에 다룰 수 있는 범위의 제한이 컸으니까요. 방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부분 부분을 짜맞추는데는 한계가 있고, 그걸 뛰어넘을 방법이 필요한데, 현실적으로 제약이 심했던 거죠."
 신경 스캐너 자체는 상당히 예전 물건이었다. 다만, 높은 시간, 공간 해상도를 유지하면서 넓은 범위를 스캐닝한다는 것이 기술적으로 어려웠다는 것이 문제였다. 신경계라는 것 자체가 세부적인 기능을 하는 부분들의 조합이 아니라, 보다 광범위한 기능을 하는 부분들의 전체적인 연계를 통해 작동하는 만큼, 그런 제약은 연구의 방향 자체를 잘못 이끌어나갈 가능성마저 있었다. 도구가 생각을 제한하는 것은 생각보다 흔한 일이다.
 그래서 연구소는 몇 년 전부터 이곳 연구실과 스캐너를 개량하기 위한 작업을 해왔다. 그게 성과를 거둬, 1차 시험을 성공적으로 끝냈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이 바로 며칠 전이었다.
 "요즘 연구는 어디까지 진행됐나요?"
 그가 물었다.
 "제가 맡고 있는 분야 같은 경우에는, 기억의 내용을 바꿔놓을 수 있을 정도까지는 분석이 끝났어요. 물론 정말로 하자면 막대한 양의 계산이 필요하긴 하지만, 어쨌건 지금 수준의 기술로도 가능한 정도까지는 온 거죠."
 "이런 말씀을 드리자니 조심스럽기는 한데, 기억을 바꿀 수 있다는게 상당히 위험하게 들리는데요. 악용될 소지라거나, 그런 거."
 사실 기억을 왜곡할 수 있다는건, 누군가에게 소개해야 할 때를 위해 자극적으로 만들어낸 말이기는 했다. 특별히 기억을 조작하기 위해 연구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다만 기억이 저장되는 방식과 구조에 대해 알게 되면서 그걸 바꿀 수 있는 가능성 또한 열린 것 뿐이니까. 어쨌건, 그런 말을 던져놓고 괜찮다고 해명하는 것이 내 레퍼토리 비슷했다.
 "악용될 가능성도 충분하긴 하지만, 또 그만큼 긍정적인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는 거니까요. 앞으로 그걸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통제해서 사용하는가 하는게 중요한 거겠죠. 사실 처음 연구할때부터도 그런 이야기는 나왔었어요. 경계하는 사람도 많았고."
 "그런데 재미있게 들리긴 하네요. 그렇게, 사람의 정신의 구조와 기반에 대해서 샅샅이 알게 되면 어떤 느낌이 드는지도 궁금하네요. 신비함 같은게 벗겨질 거 같은데, 안 그런가요?"
 "벌써 많이 벗겨지기는 했죠."
 나는 가볍게 웃어보였다. 그런 종류의 신비함은, 사실 신경계를 분석해서 정신에 대해서 알 수 있고, 또 그런 분석이 가능하다는 합의가 이뤄졌을 때부터, 그리고 그 가능성을 끝까지 밀고 나가기 시작했을 때부터 풍화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신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건지 아는 것하고, 지금 제가 정신 과정에 대해서 경험하고 있는건 사실 별개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그 경험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알아도, 경험은 경험이니까. 무지개가 햇빛이 물방울에 산란된 것이라는 것을 알아도, 무지개를 보고 감탄하게 되는 것처럼."
 "어릴때 감탄했던 것들이, 나중에 조금 자라고 나서 보면 시시할 때가 있으니까, 그런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죠."
 "가끔은,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굳이 이유를 생각해보자면, 그건 인간이라는 대상이 때로는 대단하게만 보일 때도, 때로는 사소하게만 보일 때도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었다. 대상 자체가 양면적이니, 그에 대한 생각도 대체로 양면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참 나무들 사이를 지나던 길은 한 쪽에서 꺾여 도로와 맞닿았다. 그는 경사로 위 어딘가를, 저쪽이라고 말하면서 가리켰지만, 그걸로는 대체 어떤 건물이 연구동인지, 그리고 거기까지 거리가 얼마나 남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일주일이었죠? 어디서 지내시나요?"
 기실, 이젠 그런 거리 같은 것은 그리 중요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 시간을 보낼만한 한담을 얼마든지 늘어놓을 수 있을 것 같아 보였다.
 "연구소에서 레지던스를 하나 잡아 줬어요. 출장은 처음일테니까 좋은 곳으로 잡아줬다, 그러더군요. 실제로도 나쁘지 않았고요."
 "괜찮은 연구소네요. 그정도면."
 "나쁘지 않죠."
 나는 짐짓 그 문장을 반복했다.
 실제로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서서 좋다, 라고 말하지 못하는건 그저 내 성격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조건도 괜찮고, 하는 일도 나쁘지 않다. 정보 보안에 대해서 유난스러운 것만 빼면 특별히 흠잡을만한 것은 떠오르지 않았다. 물론, 그 보안 문제 하나 때문에도 떠나는 사람들은 많았으니까, 그걸 단순히 자잘한 흠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일 수도 있다.
 "저 건물이에요."
 그는 다시 한 번 앞쪽을 가리켰다. 도로 곁에 담장처럼 늘어선 가로수들 사이로 상당히 넓은 부지를 차지하고 있는 건물이 보였다. 무거운 장비를 여럿 들여놓을 것이었기 때문인지, 건물 자체는 1층 밖에 되지 않았다. 입구에 신경영상 및 신경심리연구동이라는 표지판이 서 있었다. 최근에 새로 만들어 붙인 것인지 눈에 띌 정도로 말끔했다.
 "물리학과 정경진입니다. 이쪽 분은 국립신심연에서 오신 윤정원 씨고요."
 그는 경비실에 카드를 내밀고는 말했다. 출입기록을 모두 남기게 되어 있는 것인듯 했다.
 "여기 정책이 조금 유별나요. 특별히 이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경비실을 지나치고 나서 그가 말했다. 이정도면 사소한 정도가 아닌가요, 라고 내가 말하자 그는 의아하다는 듯 나를 잠깐 돌아보았다.

 스캐너는 아직 프로토타입 단계여서 그런지 케이스가 없어, 코일이나 케이블들이 여기저기 늘어뜨려져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자기 차폐가 되어 있는 문 너머에서, 여러명이 터미널을 붙잡고 서 있었다. 실험 성공의 여파가 아직 가시지 않은 것인지, 그들의 몸짓에는 어쩐지 부산스러움 비슷한 것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여기, 오늘 오시기로 한 윤정원 씨."
 옆에 있었던 그가 먼저 나를 소개했고, 우리는 서로 잠깐 인사했다. 그렇지만 그 이후로 더 할 말이 없어서, 오히려 소개하기 이전보다 더 가라앉은 공기가 흘렀다. 그게 멋쩍었는지, 그는 나를 터미널 하나 앞으로 이끌었다.
 "이게 어제 시험 결과예요. 해상도가 높아지니까 데이터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커져서 컴퓨터부터 갈아치워야 했어요. 여전히 부족해서 뉴런 각각의 활성화 패턴은 학교에 있는 메인프레임까지 동원해야 하긴 하지만요."
 화면에는 점과 선으로 나타낸 신경망의 모습이 떠올라 있었다. 10초 정도 길이의 스캐닝 결과였는데, 뉴런 하나하나의 활성화 정도가 빠르게 바뀌는 색상으로 나타났다. 전체적인 모습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은 점들이,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색을 바꿔가는 것처럼 보였다.
 "멋진데요, 이건."
 더 거창한 감탄사도 있겠지만, 당장은 그런 말 외에는 특별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당장 그 분야에 종사하고 있는 입장에서는 우스운 말이지만, 나조차도 이런 속도로, 이런 규모의 데이터를 얻어낼 수 있는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스캐닝을 한다는 것 자체에도 기술적으로 한계가 있었고, 또한 그렇게 얻어낸 결과를 웬만한 컴퓨터로는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가 말했던 것과 꼭 같이, 마치 자식을 바라보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데이터를 행렬로 바꾸는데도 성공했어요. 활성화 정도로 뉴런들을 분류해서, 필터링한 다음에 처리한 거라 그럭저럭 할만 했죠. 지금 필요하신게 그 데이터죠?"
 고개를 끄덕였다. 뉴런의 특성을 행렬화한 데이터를 가지고, 어떤 자극을 가해야 특정 반응을 유도할 수 있는지 계산할 수 있도록 연동하는 것이 이번 출장의 목적이었다. 개인차가 있으니만큼 아주 구체적인 반응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각 개인의 특수성에 대한 데이터가 필수적이었다. 그게 지금까지 진행한 연구를 실용화하기 위한 가장 첫 단계였고, 그래서 연구소에서는 대체로 많은 기대를 걸고 있었다. 나로서는 그게 조금 조급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일단 기관 입장에서는 실용화할 수 있는 무언가를 보여주라는 압박을 간과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고해상도 자기 자극 장치도 여기 연구동에 있으니까, 어떻게 연계하면 될 것 같긴 한데요. 물론 저는 잘 모르는 과정을 거쳐야겠지만."
 "잘 모르는 과정 까지도 아닐 거예요. 그냥 행렬 연산의 연속이라서요."
 "요즘은 심리학자들도 행렬을 붙잡고 사나요?"
 "요즘이라기엔 상당히 됐죠."
 신경망을 다루기 위해서는 행렬 연산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그랬다. 그래서, 요즘은 컴퓨터 앞에 앉아 있노라면 내가 점점 전산학자에 가까워지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면 어떻게 해드려야 할까요? 데이터를 따로 보내드려야 될까요?"
 그가 물었다.
 "데이터가 여기 있으니까, 여기서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여기 컴퓨터로 메인프레임 접근이 가능한 거죠?"
 "요즘 여기 집중되고 있는 자원이 많아서 거의 상시 접근이 가능할 거예요."
 그렇게 복잡한 작업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일단 연동하는 것이 가능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 정부 입장에서는 필요한 모양인지도 모른다. 연동 과정이라고 해도 얻은 데이터를 기존 연구 데이터와 대조해 특정 자극이 가해졌을 때의 결과를 행렬 연산으로 예측하고, 그걸 토대로 신경 자기 자극을 수행해 실제 결과와 맞춰보는 것 뿐이다. 물론 그 과정을 단순화할 프로그램을 만들어둬야 하긴 하겠지만, 굳이 출장까지 올 필요가 있는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도, 역시 출장까지 가서 검증했다라고 하는 한 줄의 문구가 필요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전산실이 따로 있으니까, 그쪽에서 하시면 될 것 같아요. 그쪽에 있는 컴퓨터로 바로 데이터 접근이 가능하게 해뒀으니까, 아마 작업하는데는 충분할 것 같네요."
 그는 맞붙어있는 전산실 앞에 나를 데려다놓고는, 온 김에 스캐너를 한 번 다시 점검해보고 싶다며 돌아갔다. 물론, 조금 더 조용한 환경에서 작업할 수 있다는 면에서는 나쁘지 않았다.
 나는, 평소에 하던 것과 비슷한 작업을 시작했다. 집에서라면 술잔을 하나 곁에 놓고 있었겠지만,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니까, 대신 자판기에서 커피를 한 컵 뽑았다.

 작업을 마치고 레지던스로 돌아왔다. 처음 왔을 때는 낯선 곳이니만큼 불편하지 않을까 싶기도 했지만, 한숨 잠을 청하고 나니 곧 익숙해졌다. 다른 것보다도, 침대가 크고 푹신하다는 것 덕분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일단 컴퓨터를 켜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여기에서까지 작업하고 싶은 기분은 들지 않았다. 작업 그 자체보다도, 여기저기 돌아다녔던 것들이 더 기운을 빼놓은 것이 아닌가 싶었다. 입고 나갔던 옷 그대로 침대 위에 쓰러지듯 누웠다가, 이러다가 그대로 잠들어버리겠다 싶어 겨우 몸을 일으켰다.
 샤워를 끝내고 나서는, 오히려 조금 무료한 생각이 들어, 여전히 침대 위에 걸터 앉은 채로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물론, 특별한 것 따위는 없었고, 다만 창문 바깥으로 여름 밤공기에 덮인 시가지의 모습이 눈에 띄었을 뿐이다. 기온이 그 모습에 차이를 만들지는 못할 것일 텐데도, 여름의 모습은 겨울의 그것보다는 조금 더 나른하게 반짝이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 나는 여행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뿌리까지 정주민이라고 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게 천성인지, 아니면 언젠가 여행에 데인 적이 있었기 때문인지는 이제와서는 잘 알 수 없었다. 출장을 여행이라고 할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건 나는 비슷한 맥락에서, 출장을 가보라는 이야기가 썩 내키지는 않았다. 물론, 내색까지는 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아직까지는 나쁘지 않았다. 처음부터 여행이 목적이었다면, 사소한 불편들에 실망하게 되었을 것이겠지만, 지금은 일단 일이라는 목적이 더 크게 드러나 있어 그런 것들이 보이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쨌건, 여행 가방을 하나 앞에 가져다 놓고 침대에 앉아있다는 것 따위가 주는 감상 같은 것이 어쩐지 마음에 들었다.
 잠깐 그런 멍한 생각들에 잠겨 있다가, 컴퓨터 앞에 앉아 게시판에 올라오는 글들 따위를 들여다보고 있었던 중이었을 때, 책상 위에 올려놓았던 전화가 울렸다. 수애였다.
 - 무슨 일이야?
 내가 먼저 물었다. 사실, 수애는 대체로 별 일이 없을 때만 전화를 걸어오는 편이었고, 이번에도 지금 딱히 할 일이 없는 모양이겠거니, 미리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 술 한 잔 하다보니까, 갑자기 네 생각이 나서.
 - 좋다고 해야할지 싫다고 해야할지 모르겠다.
 술 마실 때나 생각해냈다는 것에 대해서 화라도 내야 하는 걸까? 별개로, 그가 웃는 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생생하게 들려왔다.
 - 이럴 때라도 생각해냈다는 건 좋은 거 아냐?
 - 차라리 평소에 생각해줘.
 수애는 또 한 번 웃어젖혔다.
 - 바카디 한 잔 했어?
 무얼 마시고 있는가 하는건 보지 않아도 눈에 선했다. 그는 그 75도가 넘어가는 술을 유난히 좋아했다. 그걸 한 잔 마시고 나서, 기분이 들떠 한참 수다를 떨다가, 종국에는 나를 생각해내고, 전화까지 걸어 이런저런 말들을 늘어놓을 작정을 한 것일 거리는 그림이 그려졌다.
 - 한 잔 했지. 한 잔 더 마실까 고민하는 중이었다고 할까.
 - 너무 많이 마시지는 마.
 괜한 걱정이겠지만, 나는 으레 그러는 것처럼 그렇게 덧붙였다.
 - 잘 지내고 있어?
 - 이제 첫날인데 뭐.
 - 그래도, 난 네가 거기 가 있다는게 이상해서 말야.
 - 무슨 부모님들 걱정하는 이야기 같잖아. 그거.
 - 이것도 일종의 모성애 아닐까?
 나이도 같으면서 무슨, 그런 생각을 하다가, 술에 취한 채로 그런 말을 떠들고 있을 그의 모습을 생각해보니 조금 재미있어졌다. 옆에서 누가 그 모습을 보고 있는게 아닐까? 그런 상상도 나쁘지 않았다.
 - 혼자 있을 거 아냐.
 그가 말했다.
 - 나야 늘 혼자 있잖아.
 - 아니, 그거 말고, 다른 의미로.
 그가 말을 떠올리지 못하는 것처럼, 나도 그 말이 어떤 의미일는지 바로 떠오르지는 않았다. 생각해보면, 혼자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수애 그 자신인 것인지도 모른다. 성격에 비해서, 나는 그가 누군가와 어울린다거나, 하는 모습을 특별히 기억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가 지금 나를 생각해낸 것일 수도 있을 테고. 어쩌면 그런 사람들끼리만 연이 닿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 네가 혼자 있으면 어쩐지 정말 쓸쓸해 보일 것 같은, 그런 느낌? 평소에는 매일 보면서 그런 느낌을 조금 덜어내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지. 네가 있는 장면에 날 세워보면서 말야. 그러다가, 눈에 띄지 않으니까 네가 어떤 모습으로 거기 있을지를 상상해보게 되기도 하고, 그런 거지.
 - 글쎄, 잘 모르겠어.
 그러면서 나는 일부러 소리내어 웃었다.
 - 가끔 위태로워보이는 사람이 있어. 하루하루를 견뎌내는 것 같은, 그런 사람들. 네가 꼭 그렇다는 것도 아니고, 단지 내가 그런 사람들을 좋아하는 것 뿐이지만. 그냥 내가 오늘 조금 쓸쓸해서 그런건지도 모르겠다.
 가끔, 쓸쓸하다라는 말이 어울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언젠가 쓸쓸해, 라는 말을 읊조리듯 꺼낼 것 같은, 그런 느낌을 흘리는. 평소에 그가 그런 부류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어쩌면 그런 어울리지 않음이 오히려 그런 것에 더 걸맞게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 오늘 센치한 거 같긴 하네. 넌 술 마시면 보통 들뜨잖아.
 - 그러게. 미안해, 괜히 쓸데 없는 소리나 해서 기분 가라앉게 만들고.
 - 그렇지도 않아.
 실제로도 그렇지 않았다. 굳이, 그가 늘어놓는 이야기를 받아주겠다고 하는 의미에서 한 말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어떻게 말해야 실제로도 아무렇지 않다는 의미를 전달할 수 있을는지는 잘 떠오르지 않았다.
 - 그런 이야기를 들어도 아무렇지 않다는게, 어쩌면 내가 평소에도 그런 상태라는 증명일지도 모르겠어. 그렇지만 가끔 그런 건 있지. 불현듯, 내가 혼자 던져져 있다는 것을 직감할 때. 그럴 때는 다른 모든 시간들이 그 시간 하나를 위해서 응축하는 것 같고……. 물론, 그런걸 느끼는 사람들이야 하고 많겠지만, 그런 경험들에 대해 설정하는 비중이 크다고 할까.
 내가 말했다.
 - 지금은 괜찮은 거야?
 - 그럭저럭. 전화도 받았잖아.
 거기에 대한 증명처럼, 나는 다시 소리내어 웃어보였다.
 - 하여간, 너무 마시지 마.
 - 괜찮아. 아직까지는. 일주일 있는 거지?
 - 그래. 그러니까, 술 마실 때 빼고 평소에도 조금 생각해줘.
 그러고나서 서로 잠깐 웃고, 잘 있으라는 말 한 마디가 엇갈린 다음 전화가 끊겼다.
 쓸쓸하다는 말을, 나에게 붙일 때에 대해서는 그리 진지하게 생각해보지는 않았다. 가끔씩, 누군가 힘들어보인다고 할 때에나 마치 바늘에 꿰여 떠오르는 것처럼, 그 말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정도일 뿐이다. 실제로 내가 그렇게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하는건 잘 알 수 없었다. 다만, 언젠가부터 관계라는 것들을 거의 끊어버리고 살아가는 것들이 그렇게 비칠 수도 있겠다, 싶은 정도이기는 했다. 어쩌면, 여행가방 하나를 앞에 놓고 감상에 빠지는 것도 그 일환일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시선이 정확한 것일 수도 있다. 아무렇지도 않은 양 가장하는 것에 익숙해져서, 스스로 그러고 있다는 것마저도 알아차리지 못할 때가 많으니까.
 수애와 나 사이의 관계는 이상한 데가 있었다. 어쩌면 서로 유지하고 있는 관계가 몇 없는 상태에서, 붙들고 있는 관계 중 하나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전화 너머에서도 어떤 모습일지 상상할 수 있는 거겠지. 조금 우스워졌다.
 쓸쓸함이라는 단어의 나른함이 마음에 들어서, 나는 침대에 누워 잠들 때까지 그 단어를 생각 속에서 굴려 보았다.

 작업은 여전했다. 정경진 교수라거나, 연구동에 있는 연구원들이 몇몇 와서 이런저런 것들을 물어보기도 했지만, 사실 무엇을 하고 있다는 정도의 개략을 제외하고는 지루한 반복 작업에 가까워서 그들의 관심을 그리 끌지는 못했다. 그보다는, 차라리 사소한 것들에 대한 것이 더 인기있는 주제처럼 보였다.
 한참 대규모 연산을 진행중이었던 터라, 나는 별 관계 없는 생각들로 대신 시간을 채우고 있었다. 어제 그랬던 것처럼, 일이 없을 때, 즉, 여행할 때는 사소한 불편함 같은 것도 눈에 들어오는 법이다. 그래서 쓸쓸하다는 생각에도, 감상에도 빠질 수 있는 것이지 않을까.
 "그런데, 전문 분야가 기억하고 의식이라고 하시지 않았나요?"
 곁에 있었던 수현이 물었다. 평소에도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는데 약했던 터라, 소개받을 때 기억했던 이름을 아직 기억하고 있다는 게 나 스스로도 신기했다.
 "맞아요."
 "후각은 그 둘 하고는 조금 거리가 있어 보이는데요."
 예전부터 그런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무언가, 후각이라고 하면 강아지들이 킁킁거리는, 그런 것을 연상시키는 모양인지, 그게 기억 같은 보다 고차원적으로 보이는 것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다.
 "후각이 기억하고 강하게 연결되어 있거든요. 후각은 다른 감각하고 처리 경로가 많이 달라요. 그래서, 기억 연구를 하면서 후각과의 관련성도 많이 연구가 됐고, 지금은 기억 연구를 위한 지표 같은 것으로도 쓰여요."
 "의외네요. 보통 시각에 방점을 찍으니까요."
 "프로이트가 그랬잖아요. 후각은 문명의 가장 초기에 억압된 감각이라고. 전 맞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후각이 강해지면 전혀 다른 경험이 일어나거든요. 후각만으로 사람을 구분할 수 있다던가, 그런 현상이 일어나죠."
 그래서, 나는 시연할 것을 생각해보다가 후각과 기억의 연결을 부각시켜 일종의 공감각을 유도해보는 쪽을 택했다. 어떤 향에 대해서 기억을 강렬하게 재경험한다거나, 혹은 어떤 기억에 대해서 그 기억 속에 남아있는 후각적 경험에 대한 것들을 끌어낼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그정도면 내 전문 분야 안에서 할 수 있는 재미있는 시도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기억을 조작한다거나 하는 건 누구라도 좋아하지 않을 테니까.
 "그런데, 이 데이터는 어떤 분을 스캐닝한 건가요?"
 내가 물었다.
 "연구원 중 한 명이에요. 이혜진 씨라고, 아직 만나보지는 못하셨을 거예요. 사적 정보 보장 때문에, 그 분을 분석한 데이터라는 걸 모르는 사람도 많아요. 사실, 그걸 굳이 안다는 것 자체도 불필요하니까 당연한 것이긴 하지만요."
 "그 분은 시연에 동의하셨나요?"
 "괜찮다고 하시던데요. 오히려, 재미있겠다고 하시는 것 같던데."
 그러는 동안 메인프레임에 전송했던 명령어의 처리가 끝났고, 나는 다시 다음 명령어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다음날 분석이 거의 끝났고, 어떤 뉴런을 자극 혹은 억제해야 반응을 유도할 수 있는가에 대한 것도 특정할 수 있었다. 그걸 다시 자기 자극 장치에 입력할 데이터로 가공해야 했는데, 이미 주요한 처리가 모두 끝난 뒤라 그 작업은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다만, 후에 있을지도 모르는 발표에 대비해서 몇가지 자잘한 처리를 맡을 프로그램은 하나 만들어야 했다. 신경 스캐닝과 신경 자기 자극을 연계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했습니다, 라고 이야기할 때 한 줄 덧붙이는 정도는 할 수 있어야 할테니까.
 어제 이혜진이라고, 이름만 들었던 연구원이 자기 자극 장치 아래에 앉았다. 사실, 스캐닝 장비 뿐만 아니라 자극 장비도 한참 개량을 거친 결과물이었다. 신경 하나 단위로 자기장을 밀집시켜 조사하는 것도 쉽지 않았고, 거기다 수많은 곳을, 자기장이 서로 간섭하지 않게 하면서 동시에 자극하는 것도 만만하지 않은 일이라고 들었다.
 "시작하죠."
 유리창 너머에서 그를 바라보면서, 내가 말했다. 그렇지만, 사실 자기 자극 과정은 그 말이 무색할 정도로 빠르게 끝났다. 피험자가 된 그는, 순간적으로 약간 당황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기억이나, 추억 같은 걸 떠올려 보세요."
 그는 잠깐동안 어리둥절한 것처럼 보이다가, 이내 웃기 시작했다.
 "바람에 실린 분자가 느껴지는 것 같은 느낌이에요."
 그가 무슨 상상을 하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말만으로도 시연이 성공한 것이라는 증명에는 충분했다.
 "체취가 눈으로 보는 것처럼 선명하고……. 사람들마다 체취가 분명하게 달랐었다는 것이 느껴지네요. 이걸 제가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 거죠?"
 "기억하지 못 하는게 아니에요. 기억한 걸 떠올리지 못할 뿐이에요."
 기억의 구조가 대체로 그랬다. 기억 자체를 잃어버린다기 보다는 그 기억을 떠올릴 수 있는 단서를 잃어버리는 것에 가까웠고, 그래서 후각에 대한, 사람들이 영영 잃어버린 단서를 자극해서 끄집어내면 후각에 대한 경험들도 뒤따라오는 것이다.
 "사람을 체취로 구분할 수 있다는게 영 감이 안 잡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건가요?"
 곁에 있었던 정경진 교수가 물었다.
 "지금은 일종의 공감각 비슷한 상태라고 보셔도 될 거예요. 음악이 눈에 보이는 것과 비슷한 거라고 할까요. 기억을 맡을 수 있는 상태라는 거죠. 직접 경험해보지 않으면 상상하기 어려운 현상이기는 하지만요."
 그렇지만, 대체로 음악이 보인다는 것보다는 기억을 맡을 수 있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사람들은 더 어려워했다. 전자는, 칸딘스키의 그림 같은 것을 떠올리면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건, 반대로 후각이라는 감각이 그만큼 평소 주의의 대상에서 동떨어져 있다는 의미이기도 할 터다.
 어쨌건, 그렇게 왜곡된 감각은 곧 돌아왔다. 장치 아래에 계속 앉아있었던 연구원은 조금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고, 주위에는 여전히 기억과 후각의 공감각에 대해 신기해하는 동료 연구원들이 남아 있었다.

 스캐닝 장비와 자기 자극 장비간의 연동은 그 시연으로 사실상 거의 검증된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그 밖의 제출할 프로그램과 분석한 데이터와 결과물들도 정리가 끝난 상태였다. 일주일 중 나흘만에 할 일은 거의 다 끝낸 셈이어서, 나는 남은 시간 동안 스캐닝 데이터를 가지고 이곳에서 연구를 조금 더 진전시켜볼까, 그런 생각을 했다. 이 정도로 광범위한 데이터가 없었던 만큼, 지금까지와는 다른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같은 것이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다시 연구동에 나가봤던 날, 그곳에서는 연구원들이 스캐닝 장비를 한창 분해하고 있었다. 물론, 그런 이야기는 전혀 듣지 못했던 나는, 거기 있는 연구원들 중 한 명에게 물었다.
 "무슨 일 있나요?"
 "스캐닝 장비를 이전하기로 했어요.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처음부터 개발을 끝내면 다른 연구소로 이전하기로 했던 걸로 알고 있어요."
 "그런 이야기는 처음인데……."
 굳이 장비를 이전할 필요가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는 그런가요, 라고 한 마디를 덧붙이고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아직 프로토타입 수준이기도 하고, 다듬어야 할 곳도 많지만, 어쨌든 시연에 성공했으니 충분했다고 보고 있는 것 같아요. 물론, 그곳에서도 저희들이 개량은 계속 해나가야겠죠."
 충분하다고 보고 있는건 내가 속해있는 연구소인 걸까? 그에게서 그런 사정까지 들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무언가 더 이야기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던 중에, 지나가던 정경진 교수가 눈에 들어왔다.
 그가 먼저 아는 척을 하기는 했지만, 표정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가 지금 분해되고 있는 장비가 마치 자식처럼 느껴진다고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장비를 이전한다는 것은 자식을 떠나보내는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물론, 굳이 그런 비유를 끌어오지 않아도 그의 기분을 가늠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신심연하고 처음부터 그런 계약을 맺었어요. 정부 차원에서 개발에 필요한 모든 경비를 지원하는 대신, 개발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장비를 이전받겠다는 거였죠. 신심연에서는 어제 시연으로 성공했다고 파악한 것 같아요. 어제 저녁에, 정원 씨가 없을 때 벌써 이전을 준비해달라고 전화가 왔어요."
 그가 말했다.
 "어제 시연한게 그런 식으로 흘러갈 거라는 생각은 못 했는데……."
 행여나, 내가 그걸 진행했기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되었다, 그런 생각을 남기게 되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정작, 당사자인 나도 그런 사정에 대해서는 전혀 들은 것이 없었으니까.
 "아뇨, 괜찮아요. 어쨌건 저희가 개발한걸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도 조금 아쉽긴 해요. 조금 더 곁에 두고 싶은, 그런 거?"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조금 멋쩍게 웃었다.
 "그런데, 어디로 이전하는 거죠?"
 "모르세요?"
 "네. 이전할 거라는 말 자체를 못 들었으니까요."
 국립 신경심리연구소라는 곳 자체가 비밀을 좋아하는 집단이었던 만큼, 따지고보면 내가 모르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겠다 싶었다. 그쪽에서, 굳이 내가 그런 사실을 알아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 당연스럽게도 내게는 아무런 소식도 전해지지 않는 것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나와 같은 연구원들이 알아야 하는 정보는 지금까지 지극히 협소했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장비의 이전이나 계약 같은 것에 대해서 내가 모르는 것이 오히려 당연했다.
 "저도 구체적인 장소는 모르겠는데, 어쨌건 신심연 쪽으로 옮길 거라는 말은 들었어요. 규모도 있고, 필요한 기반 설비 같은 것들이 있으니까 새로 센터를 만들 것 같다는 말도 나왔던 것 같은데, 자세하게는 모르겠네요."
 신심연이라면, 부품을 옮겨서 재조립해야할 때에나 그에게 정확히 어디로 이전했는지를 알릴 게 분명했다. 거기다, 새로 센터를 만들 것 같다는 이야기 또한 나는 전혀 들은 바가 없다는 걸 생각해보면, 도대체 연구소 내부에서는 일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 것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어떻게 봐도 기분 나쁜 방식이다.
 "어쨌건 저는 오늘 분해 작업을 해야 할 것 같아요. 정밀 기계다보니까 분해하는 것도 만만한 작업이 아니라서 말이죠. 정원 씨는 특별한 계획이 있어요?"
 "저야 데이터를 조금 더 봐야겠다, 그런 생각 정도만 하고 나왔거든요."
 그 때, 주머니 속에 들어가 있었던 전화기가 울렸다. 신심연의 수석 연구원으로 있는 이수현의 전화였다.
 - 정원 씨, 지금 어딘가요?
 - 전 신경영상연구동에 있는데요. 무슨 일인지 스캐닝 장비를 분해하고 있네요. 여기는.
 - 아, 그게 오늘부터 장비 이전을 시작하기로 했거든요. 처음부터 계약이 그랬어요.
 그는 마치 당연해서, 굳이 알릴 필요가 없는 말이었다는 것처럼 이야기했다.
 - 그래서 말인데, 어제 시연은 끝냈죠? 어땠나요?
 - 잘 끝났어요. 별 문제도 없었고, 정확하게 작동하는 것 같더라고요.
 모르는 척 하고 있긴 하지만, 어쩌면 내가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정확한 정보가 신심연에 이미 흘러들어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떤 경로로 보고가 올라가는 것인지는, 물론 나조차도 알수 없다.
 - 수고했어요. 정원 씨가 적임자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빗나가지 않았네요.
 그런 식으로 쓸데 없는 수사를 집어넣는게, 이수현의 습관 비슷한 것이었다.
 - 일은 다 끝났죠? 끝났으면, 정리하고 올라왔으면 좋겠는데.
 그가 말했다.
 - 아직 사흘은 남지 않았나요?
 - 특별히 할 일이 없을 것 같아서요. 무슨 계획이라도 있어요?
 - 여기 있는 데이터로 분석을 조금 더 해볼까 했거든요.
 - 그건 여기 올라와서 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다른 일이 더 있는 게 아니면 빨리 정리하고 오세요.
 다른 일이 있지 않다면, 이라는 조건을 달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강요 비슷한 말이다. 물론, 더 분석해보고 싶다는 것도 내 계획이었을 뿐 출장 자체의 목적은 아니었던 만큼, 그의 이야기가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긴 했다. 다만, 굳이 그렇게 서둘러 올라가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당장 어제 시연이 끝나자 바로 장비 이전을 준비하라는 이야기가 나왔다는 것도 그렇고, 일을 필요 이상으로 재촉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저, 아무래도 지금 돌아가봐야 할 것 같아요. 정리하고 올라오라고 하네요."
 내가 말했다. 마찬가지로, 그 또한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벌써요? 일주일 있을 거라고 하셨던 거 같은데."
 "아무래도 연구소에서 제가 노는 걸 바라지 않는 거 같네요."
 그리고 바로 그 자리가 작별의 자리가 되어버렸다. 나는 그와 거기 있는 연구원들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연구동에서 나왔다. 저녁이라도 같이 하고 가는 게 어떻겠냐는 말도 나왔지만, 그런 식으로라도 지체했다가는 다른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아서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 길로 레지던스에 돌아가 풀어놓았던 짐들을 다시 여행 가방에 집어넣었다. 일주일치를 가져왔던 것이니 만큼 양이 적지 않았고, 이럴 거였으면 처음부터 풀어놓지를 말았어야 했는데, 그런 생각을 했다.
 어쨌건, 나는 곧바로 서울로 출발했다. 꼭 누군가에게 쫓겨서 움직이고 있는 기분이 들었는데, 그렇다고 따질 수 있는 누군가가 눈에 띌 리도 없었다. 주소지를 설정해놓고 멍하니 지나가는 풍경들에나 눈을 맞추고 시간을 보내다가, 아파트에 도착하자 가져갔던 짐을 정리하고 나서, 진이 빠진 채로 침대에 누웠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그러는 동안에는 바로 연구소로 나오라는 전화 같은 것은 걸려오지 않았다.

 "벌써 왔어?"
 연구원들 중에서도, 내가 돌아왔으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당연히 아무도 없었다. 모두에게서 그런 질문을 받고 나서, 마지막으로 수애가 그렇게 물어왔다. 그러면서 수애는 무슨 일이 나기라도 했는가라고 묻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쓸쓸하지 말라고 빨리 돌아오라고 한 게 아닐까."
 "그런 거 말고. 어떻게 된 거야?"
 "할 일 다 끝냈으면 오라던데."
 "그렇게 나오면 할 말이 없긴 하지."
 "그렇지 뭐."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자니까 기분까지 시무룩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그런 일은 적당히 시간을 끌어야지. 일을 빨리 끝내는 만큼 일이 늘어난다는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아."
 그걸 굳이 이런 방식으로 배웠다는 것도 우습지만, 아마 연구소라면 분명 왜 일의 진척이 이렇게 느린가, 하고 이유를 따져묻는 전화도 했을 테니 의미가 없을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시한이 일주일이었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중요하지 않은 문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어쨌건, 생애 첫 출장은 어땠어?"
 "사흘 째까지는 괜찮았지. 나흘 째부터 이렇게 어그러진 거고."


//


처음부터 장편을 상정했던거라, 씁니다...

조금 짧네요.


라이트하지 않다는건 예전부터 들어온 이야기고,

그러니까 그냥 일반문학 쪽이라고 써붙이고 다닐까, 그런 생각도 많이 했었는데,

문제는 또 그러기에는 '무거움'이 부족하더군요. 애매모호하죠.

그거 때문에 고민을 많이 하긴 했는데...그렇다고 여기 게시판이 개인 연습장도 아니고, 생각을 조금 더 해봐야겠습니다. 아마 그때까지는 쓰겠죠.

comment (1)

로사기간티아 12.05.30. 15:41
등장인물이 모두 어른스러운게 장르소설 쪽 느낌이 나네요. 글이 차분하고 텐션이 높지 않다는 점에서 라이트하지 않아 보이지만, 감정 과잉의 글이 아닌 이런 글도 좋죠. 잘 읽었습니다.
권한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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