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소설회랑

그냥 막 써내려간 영지물

Write

Article Menu

facebooktwittergoogle pluspinterestkakao storyband
  • 20:23 Jun 03, 2012
  • 3684 views
  • LETTERS

  • By 6수고러

이른 새벽. 또는 늦은 밤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시간은 이미 그만큼 지나있었다. 펜대를 놀리던 이모크는 손을 들어 눈을 비비고는, 하품을 한번 했다. 그녀는 그러고는 창 밖을 잠깐 내다보았다. 흐리고 캄캄했던 밤의 장막은 오늘도 또 한번 새벽 이슬 앞에 소리내어 무너졌다. 지평의 끝부터 밝아오는 푸른 어스름은 마치 유령 기수들이 나발을 불며 진군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지옥에도 새벽이 있고, 그들의 해와 달이 있다. 그녀는 음산한 새벽빛에 전율했다. 그것은 희열이었다. 지옥의 음기와 사악한 자극은 특히 새벽에 강렬했다.
이모크는 오늘도 밤을 새가며 제 업무를 돌보았다. 쏟아지는 새벽빛을 받으며, 그제서야 새삼 피곤함을 느낀 이모크는 커피 포트를 기울여 커피를 따랐다. 밤의 잔해가 먼지처럼 내려앉은 폐허 위로는 어제와 같은 풍광이 굳건하다. 무엇도 바뀐 것은 없다. 그리고, 그러므로 그들의 삶 또한 이제와 같이 여전할 것이다.
이모크는 창가에 기대어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썩어버린 지 오래인 식도를 타고 뜨거운 커피가 위장으로 흐른다. 맛은 느끼지 못한다. 다만 생전의 기억이 커피의 맛을 그려볼 뿐이다. 그때도 커피는 이런 맛이었던 것 같다. 커피를 음미하던 이모크는 자신의 침대 위에 곤히 잠든 고티를 바라보며 조용히 웃었다. 주인의 침대 위에서 코까지 고는 하인이라니.
하지만 둘 사이에 이미 그런 허물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것은 그 둘이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러했다. 이모크는 딱히 누군가를 지배하고 싶어하는 성격도 아니었으므로, 오히려 곤란했던 것은 고티 쪽이었다. 주인이 하녀의 이부자리를 준비해주고, 목욕물을 받아주며 격의 없이 대하는 모습에 고티는 항상 곤란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고티는 아직도 모른다. 다만 이모크에게는 서로를 이해해줄 만한 가까운 상대가, 친구가 필요했을 뿐이라는 것을.
하지만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다. 이모크는 언제나 혼자였으니까. 지난 천 년간. 그녀는 혼자서 무덤 속에 웅크리고 있어야 했다. 홀로 된 외로움과 사망에의 설움은 이내 영혼마저 찢어발길듯한 고통과 큰 괴로움으로 변질되어간다. 그리고 그러던 와중, 어떤 사악한 힘이 그녀를 죽음 중에서 일으켜 세웠다. 다시금 제 육신을 입게 된 것이다.
혼자서는 괴로울 뿐이다. 쓰잘데없는 잡념과 고뇌만이 그 내면에 남아 영혼을 갉아먹는다.
이제는 그녀도 그것을 안다.
어쩌면 그래서일까. 이제는 삶에의 욕망이 더욱 커져버린 것만 같다고, 그녀는 자조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생명에게 있어 단 한번의 죽음도 큰 고통일진대, 어찌 인간의 몸으로 그것을 두 번씩이나 겪고 가야 한단 말인가. 그것은 분명 잔인한 처사다.
이모크는 다시 고티를 내려다보았다. 고티가 잠결에 제 이름을 부르는 것도 이모크는 분명히 들었다. ‘이모크 님…….’이라고 투정하듯이 중얼거렸다. 이모크는 또 웃었다. 고티의 뺨을 살짝 힘주어 잡아당긴 그녀는 주머니 시계를 들어 눈 앞에 가져갔다. 시계는 그녀에게 시간이 가까워왔음을 알렸다. 이모크는 입고 있던 간편한 복장을 스륵 풀어 내리고, 셔츠를 갖춰 입었다. 그리고 그 위에 까만 조끼를 덧입었다. 넥타이를 매고, 관모를 눌러 썼다. 그녀는 떠나기 전에 고티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금방 돌아오겠다고 조그맣게 속삭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녀는 책상 위에 이지러지게 널려 있던 서류 따위를 챙겨 복도로 나왔다. 이모크의 집무실에서 조금 걸어가면 곧 중앙 계단이 나오고, 그 맞은편에는 총병실이 있다. 바르티 총병은 지금쯤 느긋한 마음으로 담배라도 피우며 이모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발리반드 대공국 나방스 시 총병, 바르티 콜먼 자작은 챙이 넓은 관모를 정성스레 눌러 쓰며 자신의 부관을 맞았다. 이모크는 예의를 갖춰 배례하고는 가져온 서류를 꺼내 들었다. 보고문 형식으로 쓰여진 그것들을 읽어 내려가며 그녀는 때로 바르티 총병의 결재를 구했다.
“좋아, 그렇게 하도록.” 그러면 이모크는 대답하고, 바르티의 사인 옆에 제 사인을 더했다.
바르티로써는 아직 이 모든 것이 어색할 뿐이었다. 아직도 전장을 나뒹굴던 자신이 생생하다. 이런 곳에서 서류 더미를 깨작거리는 자신은 스스로 보기에도 매우 낯설게 느껴졌다.
발리반드 대공국은 사방에 고루 퍼진 56개의 군사도시를 각기 60명의 총병에게 위임하는 형태로 행정을 재조직했다. 이것은 전날 에르방시 혁명 당시에 하냐엘 주계가 군부에 약조한 것으로, 그녀의 혁명 과업에 군부가 일조하는 대신 군부가 행정부에 간섭할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경솔한 약속이기는 했지만 하냐엘은 사전에 계획해둔 또 다른 방법들로 손쉽게 군부를 제압함으로써, 오히려 군부를 자신의 수족으로 둘 수 있었다.
나방스 시의 총병인 바르티 역시 군부 출신 인사로, 행정부에 속하기 이전에는 제 133대대를 지휘하는 사례교위였다. 고작 대대를 지휘하는 입장이었다는 말에 바르티의 직위를 꽤나 하찮은 것으로 넘겨짚을 지도 모르겠는데, 그래도 그가 ‘교위’였다는 점에 주목했으면 한다. 그가 이끌던 133대대는 구성원 89구 모두 흡혈귀로 이루어진 돌격대대였다. 대공국의 다른 대대들과는 그 구성부터 분명한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다.
또한 제 133대대는 바르티의 역량을 증거하는 역사이기도 하다. 흡혈귀들이란 본래 권력에 충성을 바치기보다는, 그 자신이 권력으로 군림하고 싶어한다. 그것이 그들의 본능적인 생리다. 그런 점에서 볼 때, 89구의 흡혈귀 모두에게 주인으로서 인정 받았다는 것은 바르티의 장악력이 보통 이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좌인 셈이다.
바르티가 나방스 시 총병에 제수되었을 때, 제 133대대는 그를 따라 시 방위군에 편입되었다. 이것은 하냐엘의 의지이기도 했다. 바르티를 나방스 시 총병에 임명함과 동시에, 그의 대대를 나방스에 묶어둠으로써 대공국 남부의 방비를 보다 건실하게 하자는 생각이었다.
아무튼 잘 길들인 흡혈귀는 혼자서 하나의 대대와 견줄 만하다. 하냐엘의 생각은 곧 옳았음이 증명되었다. 나방스 시를 시끄럽게 하던 내외의 우환은 곧 잠잠해졌고, 그 공훈은 나방스의 흡혈귀들에 기인한 것이었으니까.
이모크의 보고를 전해 듣던 바르티는 고개를 들어 이모크를 바라보았다. 처음 대면했을 때에도 그랬지만 지금 보아도 이모크는 여전히 기묘한 여성이었다. 이제 그녀의 두 눈구멍에는 온전히 남아있는 것도 없고, 그 안에는 뇌라던가 내장 따위도 남아있지 않다. 그녀는 미라니까. 그야말로 고기인형인 셈이다. 그렇지만 어째서일까. 바르티는 그녀가 다른 누구보다도 온전히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여전히 무언가를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아마도 보병궁 력(歷) 오에르 달(月) 스무 아흐레째 날이었다고 했던 것 같다. 그의 충직한 부관, 이모크의 영혼은 그날 다시 태어났다. 좋지 않은가. 이집트 인들은 현명하고 사리가 분명하여 항상 좋은 조언을 건네곤 한다. 이모크 역시 그러한 이집트 인들 중의 하나였다. 이모크 또한 뭇 이집트 인들이 그러하듯 죽어서는 온몸을 붕대로 친친 휘감고 있었다. 그나마 오랜 세월 동안 그의 몸을 지탱해준 붕대도 이제는 색이 바래 누런 빛을 띠고 있었으며, 그조차도 군데군데 삭아 푸르뎅뎅한 속살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이모크는 그 위에 하얀 셔츠와 까만 조끼를 받쳐 입곤 했다. 정장을 갖춘 미라의 모습은 그 자체로 독특한 여흥거리가 되고는 했다. 나방스 시의 뭇 언데드들이 의관을 갖추려 하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 자신을 드러내려 하는 것을 생각해 볼 때면 이모크의 고집은 분명 독특한 일이기는 했다.
바르티 콜먼 교위는 부관, 이모크의 보고를 전해 들으며 잎담배를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그것을 피울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는 다시 한번 고개를 돌려 이모크를 바라보았다. 이모크의 음산하지만 기백이 서린 목소리가 그의 귓전에 맴돌았다.
이모크의 보고를 조용히 듣고 있던 바르티 콜먼 총병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그는 창 너머로 우뚝 솟은 프타의 관을 응시했다. 그리고 눈을 돌려 그 아래 거민들도 내려다보았다. 셀 수도 없이 무수한 시체와, 또 시체들이 거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제법 말쑥히 차려입은 흡혈귀나, 또는 구더기가 바글바글한 뚱뚱한 좀비. 작은 마녀, 이 빠진 백골귀와 사악한 영령들. 죽음 중에 들림 받은 모든 사악한 존재들이 거기에 다 있었다. 바르티는 그들의 면면을 조금만 더 자세히 살펴보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애석하게도 그가 선 땅과 그들이 선 땅은 서로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었다. 총병실은 총병 관저에서도 최상위층에 자리한 탓이었다. 바르티로서는 그저 높은 곳에서 점점이 지나는 모습만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바르티는 그 사실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는 하나 그에게는 거민들의 생활이 하루하루 무사히 영위되는 모습으로 흡족해하는 황제의 마음가짐은 없었다. 나방스 시의 관리들조차도 바르티의 이 취미를 두고 이따금 수군거리듯, 발 아래 펼쳐지는 거민들의 시간을 흥미롭게 바라보면서 모 지구를 군사구로 재편한다던가, 모 부서의 누군가를 경질한다던가, 또는 시 자치군의 어떤 장교를 강등시킨다던가 하는 생각에 빠져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바르티는 수많은 존재들이 그려내는 광경 그 자체가 좋을 뿐이었다.
부관은 계속해서 서류들을 읽어나갔다. 그러면 총병은 이따금 물어보거나, 결정을 내렸다.
“그래, 산업용 시체 수확량을 좀 더 끌어올려보도록 하지. 한 3.8%정도. 이번 달 말까지.”
“알겠습니다, 총병 각하.”
바르티는 희미하게 미소했다. 여전히 어색하게만 들렸다. 바르티 사례교위를 부르던 옛 동지들이나 상관들마저도 이제는 그를 교위라고 호칭하기보다 총병이라고 부르기를 즐겼다.
그 뒤로도 이런저런 의제에 관한 논의가 둘 사이에 오고 갔다. 군 출신인 바르티로써는 여전히 난해하고 의미를 알기 어려운 것들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 바르티가 논의를 따라오지 못하거나, 또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을 사전에 감지하여 보다 간편한 단어와 설명으로 그를 이끌어주는 것은 어느 순간인가부터 이모크의 몫으로 남았다. 이모크 또한 그 정도의 배려와 미덕은 갖추고 있었으므로, 둘의 대화는 조금 더디기는 했지만 진전은 있었다.
의제를 읽어나가던 이모크는 서류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르티의 안색이 퍽 어두웠다.
“……각하, 피곤하십니까?”
“음? 아아, 아니. 그런 건 아니야. 하지만 잠깐 실례해도 괜찮을까? 갈증이 나서 말이지.”
이모크는 가볍게 대답했다. 양해를 구한 바르티 총병은 왜건에서 포도주 병을 꺼내 제 잔에 따랐다. 시큼한 냄새. 그리고 비린내가 물씬 풍겨 나온다. 그건 어쩔 수 없다. 겉모양은 포도주 병이라도 안에 든 음료는 인간들의 오래 묵은 핏물이니까. 당연한 말이겠지만 흡혈귀에게 있어서는 그 어떤 고급스러운 포도주보다도 처녀의 핏물이 더욱 감미로운 법이다.
“한잔 하겠어? 이모크. 포도주라던가, 커피라던가. 아무튼 피만 있는 건 아니니까 말야.”
“괜찮습니다, 각하. 배려해주심에 감사 드립니다.”
“쉴새 없이 말하다 보면 목이 마를 텐데. 그런데다 넌 나보다도 더 많이 말하고 있잖아.”
이모크는 그저 말없이 웃었다. 이모크의 입가를 바라보던 바르티는 그제야 문득 깨달았다.
“실례……. 그다지 생각이 없다면야, 그만두겠어.”
바르티는 잔을 입에 가져댔다. 그는 잔 너머로 이모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그녀에 대해 되새겼다. 망자에게도 급이라는 것이 있는 법이다. 그것은 크게 두 부류로 분류되고는 하는데, 살아 생전에 불사의 막강한 마력에 귀의한 자와, 죽음 이후에 종속된 자가 그것이다. 이모크와 바르티는 같은 망자라고는 하지만 그 분류에 있어 뚜렷한 차이가 존재했다. 바르티는 살아서 불사의 힘을 움켜쥔 덕분으로 오감과 사고가 생전과 비슷한 수준으로 남아있었지만 바르티는 달랐다. 커피의 맛도 생전의 기억을 더듬어 막연히 떠올려볼 뿐이다. 썩어버린 식도는 어떤 맛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이모크는 구태여 거절한 것이다.
물론 이모크도 갈증이나 피로를 느낀다. 하지만 그것과 이것은 다른 법이다. 아무런 맛도 느끼지 못하는데도 욕구만은 미치도록 들볶는 고통. 살아있는 인간으로서는 결코 상상할 수도 없고, 이해할 방도도 없는 고통이다. 단순히 즐거움 하나를 잃은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어찌할 도리가 없는 탐식. 그것은 그들이 짊어진 천형인 동시에, 타고난 운명인 셈이었다.
“그러면 회의를 계속하기로 할까. 그런데 이모크. 시 잔고가 부족하다면 세금을 올려 걷으면 해결되는 일 아닌가? 나는 이모크가 굳이 그런 방법을 쓰자고 하는 이유를 모르겠군.”
“아뇨, 그렇지만 그건 뒷감당이 어려운 방법입니다, 각하. 망자들은 대부분 자기 주장이 강한 이들입니다. 그건 나방스 시의 망자들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지요. 세금을 인상한다면 그들과 우리 사이엔 깊은 골이 자리하게 됩니다. 그 골은 세금을 인상한 우리 스스로 자초한 것이 되고요. 그 때문에 저는 그보다는 좀더 교묘한 방법을 궁리한 것입니다, 각하.”
바르티는 턱을 쓰다듬었다. 매끈하고 기다란 손가락이 조금 신경질적으로 턱을 문질렀다.
“……좋아. 그렇다면 이번은 이모크의 제안을 따르기로 하지.”
이모크는 그의 결정에 감사를 표했다. 어느새 시간은 정오를 가리키고 있었다. 바르티는 시계를 한번 바라보더니, 다시 이모크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손에 든 서류들도 이제는 반 정도 줄어있었다.
“나머지는 두고 가. 본래는 나 혼자 해결해야 할 일이었으니까. 이만 가서 좀 쉬도록 해.”
이모크는 사양했지만 바르티도 양보하지 않았다. 둘 사이에 짧은 실랑이가 오갔고, 결국은 또 이모크가 졌다. 그녀는 툴툴거리면서도 남은 일감을 집무용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왔던 것과 똑같이 예의를 갖춰 배례한 그녀는 천천히 총병실을 물러나왔다. 바르티는 그녀의 뒷모습을 눈으로 배웅하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관모를 벗고, 관복을 멀찍이 걸어둔 그는 우선 잎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러고는 한번 더, 남은 서류들로 눈길을 향했다. 그에게는 아직도 해야 할 일이 적지 않았고, 생각해야 할 일들 또한 태산처럼 쌓여있었다.
담배를 마저 다 피우고 난 바르티는 깃털 펜을 들었다. 피곤하다지만 해야만 하는 일이다.
그렇기에 이모크의 존재는 그에게 있어 더없이 큰 힘이 되었다. 나방스 시의 시정 전반을 두루 꿰고 있는 탁월하고 영리한 부관. 누구에게나 자상하고, 그러면서도 귀족의 품위를 잃어버림 없는 인물.
때로 바르티는 자신이 그녀를 조금만 더 빨리 만났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그랬더라면 그녀를 보다 강고한 망자로 일으켜 세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바로 흡혈귀로 말이다. 하지만 그런 상념에 빠질 때면 바르티는 곧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패밀리어를 거느린 뭇 흡혈귀들을 보아온 바르티로써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게다가, 모르긴 몰라도. 만약 바르티가 이모크의 살아 생전에 그 목을 깨물었더라면 말이다. 아마도 지금과 같은 이모크를 만나볼 수는 없었지 않을까.
패밀리어들은 대체로 허영심이 강하다. 그들은 갑작스레 주어진 불사의 특권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나머지, 그 힘을 그저 허영에 쏟아 붙는 것 같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허나 그렇다고는 해도 그들은 그저 제 주인에게 아양이나 떨며 조금이나마 주인의 은덕과 권능을 나눠 받고자 할 뿐인 존재들이다. 조금도 제 스스로 할 줄 아는 게 없으며, 의지가 없고, 피동적이며, 그야말로 무가치한 존재들이다. 바르티는 또 한번 고개를 저었다. 이모크를 그런 멍청한 인형으로 만들 수야 없다. 그럴 기회가 없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다행인지. 고귀한 지성을 그런 식으로 망가뜨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것은 바르티의 군인 시절 만났던 부관, 이조크를 만났을 때와 비슷한 인상이었다. 지성은 그 자체로 보호 받을 가치가 충분하다는 것을 그때 처음으로 느꼈다. 그저 막강한 힘과 권력, 그리고 그에 따르는 무수한 재보만을 궁극의 가치로 여겼던 바르티에게 있어 이조크와의 만남은 바르티의 시간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아, 하지만 그만한 지성을 갖춘 이라고 해도 말이다. 자신의 패밀리어만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나 보다. 그의 패밀리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좀 나은 점이라고는, 다른 녀석들보다야 조금 더 영리했다는 정도일 뿐이다.
하지만 그녀는 과연 제 주인과 마찬가지로 용맹하고, 보다 나은 가치를 살펴 선택할 줄은 알았다. 아마도 2년 전, 이조크의 패밀리어는 격전 중에 사망했다. 그녀는 홀로 남아 제 주인과 대대원의 퇴로를 확보해 두었고, 곧이어 적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파도를 맞아 그녀는 싸웠다. 그녀, 아마도 이름은 벨리스였던 것 같다. 벨리스가 마지막으로 제 주인에게 남긴 것은 값으로는 그 가치를 따질 수 없는 희생이었다.
이조크는 오래된 토파즈 목걸이를 지금도 제 몸에 부적처럼 달고 다닌다. 여전하다. 벨리스가 마지막으로 남겨 둔 주종간의 각별한 기억이라고 한다. 마지막 싸움에 임하기 전, 벨리스는 이조크에게 자신의 목걸이를 맡겼다는 듯하다. 그녀 스스로도 자신이 다시 돌아오지 못함을 알았던 것이리라. 그런 벨리스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바르티의 무모함이었다. 바르티가 크뤼겔 녀석들의 간교한 함정에 빠지지만 않았더라도 벨리스는 지금도 살아 있었으리라. 살아서 제 주인을 헌신으로 섬기고……. 아아, 아마도 그러했으리라.
바르티는 종종 그런 생각에 이조크를 볼 낯이 없었다. 그는 또 담배를 물었다. 시계는 이제 2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서류 더미도 그새 아까의 반으로 줄어 있었다. 그는 의자에 한껏 기대어 기지개를 한번 켜고는, 벨리스의 오래된 얼굴을 되새겨보려 애썼다.
 
폐허의 도시, 나방스. 차라리 돌무덤이라고 불리우는 게 더욱 걸맞을 이 석조 도시는 종종 그런 이름으로도 불리고는 했다. 그야, 지난날 북남전쟁의 상흔을 고스란히 지닌 몇 되지 않는 남부의 도시라는 점에서 볼 때는 그것은 아주 잘 어울리는 이름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도시가 그런 기기묘묘한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사실 북남전쟁보다도 더욱 전의 일이다. 오아시스를 둘러싼 형태로 지어진 고대의 석조 유적을 중심으로 자라나기 시작한 이 도시는, 그러니까 아주 오래 전부터도 가히 ‘폐허’라 부를만했다. 아니, 오히려 폐허라는 단어를 따로 떼어놓고서는 도저히 이 도시를 말할 수 없다고 보아도 좋았다. 미로처럼 뒤엉킨 골목들과, 타일 틈새와 틈새를 있는 힘껏 짓부수고 튀어나온 초목 뿌리들은 도시의 곳곳에 엉킨 쐐기 덫처럼 널려 있었다. 또 그런가 하면 시의 곳곳에는 뻘겋고 시꺼먼 도저히 정체를 가늠할 수도 없는 괴이한 것들이 종양처럼 돋아나 사방으로 뻗어나갔고, 또한 도시의 어느 한 곳이라고 딱히 집어 말할 필요도 없이 그저 온 도처가 핏물과 구정물로 흥건했다. 뭉그러진 시체나 백골 따위가 그 위에 이지러지게 흐드러져 있었으며, 그러므로 악취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저 도시의 곳곳에 죽음의 악취와 죄악의 잔향이 가득했다.
물론 도시의 한가운데 위치한 유적─그들은 이 유적을 ‘프타의 관’이라 불렀다─과 그 유적의 중앙에 자리한 오아시스는 매우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뿐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바르티는 과연 이곳을 도시라고 말할 수나 있는지도 의문스러웠다. 이곳은 도저히 무엇도 자라날 수 없는 땅이었다. 공기도 혼탁하고 더러워서 들이쉬는 순간 폐가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 뭐, 하지만 그건 당연하다. 나방스 시는 오로지 사령과 시체들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굳건한 성이니까 말이다. 사망의 늪을 두 팔로 기어 나온 사악한 의지들, 이를테면 악령이나 좀비, 스켈레톤, 굴귀와 같은 무덤 속의 존재들 말이다.
그야말로 ‘지옥의 도시’라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한 성읍이었다. 그렇지만 지옥의 여느 도시들이 다 이렇다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것들도 어딘가 기기괴괴하고 음침한 구석이 있기는 했지만, 이토록 철저하게 뭉그러진 도시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방금 말했듯이 이 도시가 뭇 악마들을 위한 것이 아닌, 죽음을 요람 삼은 망자들을 위한 장소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 망자들에게는 집도 필요치 않고, 돈도 큰 소용이 없다. 그들은 다만 바닥에 허물어져 눕거나, 구정물 가운데 늘어지거나 한다. 소유욕이 희미해서 수중에 들어온 금품을 금새 누군가에게 나누어주고는 한다. 베풀 줄 안다는 얘기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소유욕이 무뎌진 그들은 때로 그 때문에 큰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그러고는 그 탓을 서로에게 돌린다. 초월자의 지혜나 해탈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한번 죽었다 깨어난 사람─사람이라니, 말이 이상하기는 하지만 그들은 모습이 달라졌을 뿐이지 한번 죽었던 이가 제 육신을 다시 입고 깨어난 것뿐이다─은 그렇게나 달라질 수도 있는 것일까? 그야 물론 그들에게도 여전히 남아있는, 생전보다도 더욱 절실해지고 절박해진 욕망은 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시간’을 중요하게 여긴다. 시간. 그들은 그 무엇보다도 그것을 소중히 따른다─살아있는 인간이라면 그것을 ‘생명’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생명이라는 단어는 역시 어울리지 않는다. 어쨌든 그들은 죽은 존재이니까─망자들은 생존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긴다. 역설하자면, 그들이 소유욕에서 완전히 벗어난 이유는 한번 죽음을 맛보았기 때문이며, 그들이 생존을 절실히 간구하는 이유도 역시 한번 죽어봤기 때문이다.
죽음은 외롭고 무시무시하다. 그 무엇도 느낄 수 없는 영원한 암흑에 빠진다는 것은, 아니, 오히려 영원히 죽어 있었더라면 나았을 것이다. 다시 한번 깨어난 이상, 두 번 다시는 잠들고 싶지 않다는 것은 당연하다. 이곳은 그런 곳이다. 죽음과 삶의 경계가 비명을 지르며 허물어지는 땅. 꿈과 환상, 지독스런 악몽과 애끓는 감정만이 남아 옥죄는 감옥 같은 땅. 세상의 불보다 칠 배로 뜨겁게 들끓어 오르는 지옥의 업화와, 무시무시한 공포가 가득한 세계. 그곳이 바로 악마들의 땅이다.

제 방으로 돌아온 이모크를 가장 먼저 반겨오는 것은 카토레파스였다. 카토레파스는 그녀의 무덤에 부장된 자칼 인형이었는데, 죽음 중에 들림을 받은 이모크는 저에게 부여된 얼마 안 되는 마력을 쏟아 부어 그에게 ‘시간’을 선물했다. 이모크가 카토레파스를 쓰다듬고 있자니, 곧 고티도 안쪽 방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고티 역시 무덤에 함께 묻혔던 악사 인형으로, 이모크의 남편이 손수 조각해 부장한 것이었다. 그래서 고티의 목덜미에는 ‘내 사랑, 운명이 맺어준 소중한 반려에게’라는 글귀가 남아있다. 고티는 카토레파스에게 밥을 줄 생각이었던지, 손에는 큼직한 사료봉투를 들고 있었다. 고티는 이모크를 보자마자 꾸벅 인사부터 했다.
“다녀오셨어요, 이모크 님? 많이 피곤하시죠? 그런데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끝나셨네요?”
“총병님이 되도 않는 억지를 부리는 바람에 그렇지 뭐. 그래, 나 없는 동안 별일 없었지?”
“으음. 별일이라고 한다면…… 아, 커피 가루가 다 떨어졌어요. 그리고 방부제도 없어요.”
“그래? 그거 마침 잘됐네. 그러면 우리, 시내에나 좀 다녀올까?”
이모크는 관모를 벗어 의자에 걸어놓았다. 그 사이에도 카토레파스는 계속해서 달려들어 제 주인에게 엉겨 붙었다. 카토레파스는 제 주인을 떠밀다시피 하여 바닥에 눕히고는 연신 얼굴을 혀로 핥아댔다. 그 바람에 이모크의 붕대가 또 너덜너덜해졌다. 하지만 이모크는 개의치 않고 카토레파스의 뒷덜미를 쓰다듬어주었다. 카토레파스는 기분 좋은 듯 가랑거렸다.
“어때? 나가서 우리 고티 옷도 몇 벌 사고……. 또 나도 시장 조사 겸해서. 괜찮지 않아?”
“제, 제 옷이라니. 당치도 않아요, 이모크 님.”
“너 그런 말하면서, 지금 입고 있는 것도 실은 내 옷이잖아. 또 그렇게 고집 피울 거야?”
이모크는 카토레파스를 꼭 껴안은 채로 입술을 내밀었다. 지금 고티의 옷은 그나마도 많이 낡아있었다. 가사를 포함한 힘들고 궂은 일들을 저 대신 도맡아 힘써준 덕분이라고 생각하면 지금 이모크의 마음은 당연한 것이기도 했다. 고티의 낡은 옷은 그간의 훈장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모크는 그에 대해서도 항상 감사하고 있다. 하지만 고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바보같이. 스스로를 너무나도 돌보지 않는 모습에, 이모크는 어쩐지 화마저 일었다.
“고티, 설마 날 화나게 만들 셈은 아니겠지?”
“우우……. 그, 그렇지만 이번에도 방부제를 덜 사고 남은 돈으로 사주시는 건 곤란해요?”
“그래, 그래. 약속할게.”
이모크는 카토레파스를 떼어놓고는 고티의 이마에 살짝 꿀밤을 먹였다. 고티가 그렇게 말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 그녀는 여전히 이모크를 걱정하는 것이다. 방부제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독극물과 같지만, 이모크에게 있어서는 영양제와 같았다. 그녀는 미라니까 말이다.
이모크는 옷 속으로 제 몸을 한번 내려다 보았다. 아무래도 붕대를 갈아줄 때가 된 것 같다. 괜찮다. 돈이라면 넉넉하게 있다. 붕대도 사고, 커피랑 방부제도, 그리고 고티 옷도. 그러고도 남을 정도로 있다. 그러면 고티랑 간단한 식사라도 하면서 기분을 낼 수도 있겠지.

comment (4)

비명소리 12.06.03. 21:08
읽기 전에 하나만 말할게여
님아 들여쓰기점ㅠ
6수고러 작성자 비명소리 12.06.03. 21:09
아 그렇네. 했는데 복붙하니까 지워지는구나;;
6수고러 작성자 6수고러 12.06.03. 21:09
첫번째 단락은 되있는데 그 뒤부터 그냥 종범이네...
권한이 없습니다.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최종 글
공지 『경소설회랑 창작공간』 비영리 공간 선언 (1) file 수려한꽃 2012.05.17. 78864
공지 글 올리기 전에 꼭 읽어주세요!! (3) file 수려한꽃 2012.01.21. 84525
278 이벤트 [라제뒤대] 여동생과 오빠가 부모 몰래... '충격' (5) 나노 2012.06.04. 16315
277 이벤트 [라제뒤대] 미소녀 뿐인 천국에서 나는 1년간 고자다 얀데레포 2012.06.04. 3409  
276 이벤트 [라제뒤대] 자지맛! (7) 수려한꽃 2012.06.04. 4970
275 이벤트 [라제뒤대] 나의 이웃 꼬마팬더님 겨울 2012.06.04. 3064  
274 이벤트 [라제뒤대] 서큐버스에게 내 정력을 모두 빨려 TS! 소는말랐을까살쪘을까 2012.06.04. 6508  
273 이벤트 [라제뒤대]그녀는 다운로드되었습니다 국내산잉간 2012.06.04. 3098  
272 이벤트 [라제뒤대] 내 여동생은 백명입니다 령몽 2012.06.04. 3036  
271 [라제뒤대] 13번째 학원의 스트렐카 VANWAIDE 2012.06.04. 2503  
270 이벤트 [라제뒤대] 능력자가 머무는 그 어느 집단 (1) coramdeokisys 2012.06.04. 3437
269 이벤트 [라제뒤대]마이 트윈'즈 시스터! (1) 지우조영운 2012.06.04. 3065
268 이벤트 본격 라이트노벨 제목 + 뒤표지 소개문구 대회 개막! 칸나기 2012.06.04. 3425  
자유 그냥 막 써내려간 영지물 (4) 6수고러 2012.06.03. 3684
266 자유 클리셰 실험 소설 "모험가 윌슨" (1) 경은유 2012.06.03. 3719
265 자유 필통 심리학 (7) 일이삼사 2012.06.02. 5427
264 자유 제목 따위 알게 뭐야 (1) readme 2012.06.01. 3848
prev
이동할 페이지 번호 입력 후 엔터
('63'이하의 숫자)
of 63 next
서버에 요청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