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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전쟁] 애니메이션의 올바른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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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48 Aug 31,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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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김보약
  러브레터.
  우리말로는 연애편지. 연애하는 남녀 사이에 주고받는 사랑의 편지라는 뜻을 가진 이 단어는 스마트폰을 필두로 하는 현대사회에서는 점차 사용할 일이 없어지는 단어 중의 하나다. 이대로라면 몇 년까지는 아니지만 적어도 20년 이내로는 러브레터라는 단어는 사어(死語)가 되지 않을까.
  갑작스레 한 단어의 미래에 대해서 걱정하게 만든 건 다름이 아니라 점심시간이 끝난 뒤 내 책상 서랍 안에 들어있는 러브레터였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러브레터는 아니었다. 정확히는 러브레터로 추정되는 물건이었다. 분홍색의 하트무늬 패턴이 박혀있는 노란색의 편지봉투. 손으로 집어 보니 안쪽에는 편지지가 고이 접혀 들어있는 감촉이 살짝. 슬쩍 본 겉면에는 아무 것도 적혀있지 않았지만 이건 누가 어떻게 보든 러브레터다.
  만세-. 드디어 18세 인생 최초로 러브레터를 받았다.
  이 러브레터를 눈치 챘을 때부터 5교시가 끝날 때까지의 시간은 정말 길었다. 이 날은 가만히 있어도 잠이 잘 오는 5교시와 잠이 잘 오기로 유명한 물리 선생님의 수업, 두 가지의 중첩 특수 효과가 왜 나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는지. 내 눈은 초롱초롱 이었지만 내 머릿속은 러브레터에 대한 호기심이 출렁출렁 넘쳐 조금씩 흘러내리고 있었다. 평범한 대덕-대놓고 덕후-인 나에게 누가 러브레터를 보낸 걸까. 처음 맛보는 수줍음을 감추려고 나는 5교시 내내 자는 척 엎드려 있었다. 옆자리의 내 짝임과 동시에 미소녀인 듀얼 클래스, 아니 거기에 더해 우등생까지 트리플 클래스인 양지숙은 그런 나를 구경이라도 하는 듯 힐끔힐끔 쳐다봤다. 애초에 말이 없는 편인 지숙이기에 내가 엎드려 자는 것 같은 모습에 ‘너, 방해돼.’라는 무언의 압박을 주는 건지도 모르겠다. 옆자리에서 하루 종일 대놓고 덕후질을 하는 나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으니까.
  5교시가 끝남과 동시에 나는 전혀 수상해 보이지 않게, 종이 울리고 급히 일어나지도, 그렇다고 너무 천천히 일어나지도 않고, 적당한 시기에 적당한 속도로 일어나서 적당한 걸음걸이로 화장실의 한 칸에 도착했다.

  윤동추, 오늘, 방과 후 음악실로 와줄래?

  편지지에 적혀있는 건 그게 다였다. 인사도, 관심이 있다는 말도, 좋아한다는 말도, 자신의 이름도, 협박도, 신문지에서 도려낸 글자도 아무것도 없었다. 어째보면 사무적이라고 할 수 있는 내용이지만, 오히려 은근하게 손으로 쓴 한 줄만 적혀있는 편이 더 로맨틱하지 않은가. 이 한 줄이라는 점으로 편지 쓴 여인의 부끄러움이 뻔히 보여 모에가 증가하고 있고! 이건 역시 러브레터였다. 오늘 나를 방과 후까지 마음 졸이게 할 러브레터.
  나는 변기의 물을 내리고 스리슬쩍 교실의 내 자리에 돌아왔다. 우리 학교는 평범한 인문계 고등학교임에도 불구하고, 강제적인 야간자율학습은 없다. 하는 것도 하지 않는 것도 모두가 학생의 자유. 실제로 2학년 중에서는 저녁을 챙겨먹은 뒤 교실에 남아서 공부를 하는 학생은 전체의 반 정도다. ‘오늘, 방과 후’라는 약속 시간은 그 고마운 제도 덕에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야간자율학습이 끝나는 시간 밤 10시는 고백하기에 적당한 시간이 아니지만 8교시가 끝난 5시는 저녁노을이 점차 세상을 붉게 비추는 낭만적인 시간, 의문의 미소녀가 러브레터로 나를 음악실로 불러내기에 이보다 적당한 시간은 있을 수가 없다.
  방과 후까지의 시간은 강건마의 고등학교 재학 기간 정도-88권-로 길었다. 그래도 럭키짱의 꾸준한 발매처럼 시계도 3시, 4시, 5시까지 근성 있게 돌아주었다. 그동안 조금 냉정해진 머릿속에는 ‘이거 사실 러브레터가 아닌 거 아니야?’라는 의심1과 ‘낚시 편지라서 가보면 다른 녀석들이 날 비웃고 있는 거 아니야?’라는 의심2가 자리 잡아 글씨체로 주인을 유추하는 추리1도 글씨를 통해 편지를 작성할 때 사용했던 펜을 추측, 그 펜의 주인을 추적하는 추리2도 시도해보았지만 모두 실패로 끝났다. 추리만화는 실제 추리에 도움 되는 점이 없다는 사실만 Q.E.D. 결국 가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내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다고 속으로 결론을 내렸다. 평소 같이 하교하는 친구들에겐 나 혼자 따로 집에 가겠다고 둘러댈 이유가 궁색하니 일단 8교시가 마치자마자 재빨리 1층으로 피신한 뒤 숨었다. 역시나 휴대폰의 진동이 울렸고, 나는 애써 그걸 무시했다. 미안하다. 친구야. 그 진동이 끝난 뒤 5분간 기다렸지만 다음 전화는 오지 않았다. 나는 조금 슬픈 느낌의 발소리를 내며 음악실로 향했다.
  음악실로 통하는 복도에 들어서니 감미로운 피아노 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나에게 편지를 보낸 미소녀는 감수성이 뛰어난 예술 속성의 미소녀임이 틀림없다는 직감이 머릿속을 울렸다. 한 발짝 한 발짝 음악실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클래식 문외한인 내가 이 노래를 아는 것 같은 기분이. 위화감을 안고 음악실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이거 10년도 더 된 메카닉 애니메이션 ‘우주기사단 ~솔마르크~’의 전투 테마잖아?!
  이 음악이 이렇게 미려하게 연주될 수 있다니, 아니! 이런 마이너 로봇애니메이션의 전투테마를 연주하고 있다니 도대체 뭐하는 녀석이 이 안에 들어있는 거지?! 궁금함에 재빨리 문을 열고 음악실로 들어섰다. 피아노 앞에 앉아 ‘솔마르크’의 전투테마를 연주하고 있는 소녀는 양지숙. 내 짝이었다.
  양지숙. 1학기 중간고사 성적 43위. 검은 긴 생머리에 하얀 피부, 조그마한 얼굴에는 큰 눈과 오뚝한 코, 거기다 붉고 아담한 입술에 도자기 피부, 160cm 정도의 보통 키에 날씬한 체형. 뛰어난 성적과 전형적인 미소녀의 외모를 갖춘 여학생. 거기다가 중학교 때까지 피아노를 레슨 받아 희고 긴 손가락에서 연주되는 피아노 실력 또한 수준급. 이정도로 그녀를 잘 알고 있는 건 딱히 그녀에 대한 관심의 발로라기보다 그녀는 교내의 유명인 중 한명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성적과 외모, 학교에서 인기 있을 만한 요소를 두 가지나 가지고 있으면서 친구가 없다. 별로 없다거나 적다거나 그런 수준이 아니고 없다. 그것에는 확실한 이유가 있는데 그녀는 말이 없다. 별로 없다거나 적다거나 그런 수준이 아니고 없다. 친구들이 질문을 해도 묵묵부답. 선생님이 발표를 시켜도 묵묵부답. 음악시간에 모두 함께 노래를 불러도 혼자서 묵묵부답. 휴대폰으로 전화를 받아도 묵묵부답. 침묵의 소녀였다. 이런 특수한 점은 그녀의 외모에 대한 소문을 증폭시켰고, 그녀의 외모에 대한 소문은 그녀의 침묵에 대한 소문을 다시 또 증폭시켜 교내에서 그녀의 인지도는 사정없이 끌어올려졌다. 그 결과 그녀는 특별한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어디에도 나서지 않는 일개 학생이면서도 학생회장과 비슷한 정도의 인지도를 가질 수 있었다.
  슬슬 음악의 종반부로 접어들며 미려함은 점차 웅장함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앞이랑 분위기가 전혀 안 맞잖아?! 그것보다 이런 음악을 왜 이 침묵 속성의 미소녀가 굳이 날 편지로 불러내서 들려주는 거야?!
  혼란에 빠져있는 도중 연주가 끝났다.
  “‘우주기사단 ~솔마르크~’의 전투 테마를 붉은눈미소녀★식으로 연주해보았다.”
  “말했다?! 목소리 좋아?! 아니, 그것보다 붉은눈미소녀★는 대체 뭐야?!”
  “나의 닉네임이야.”
  붉은눈미소녀★라니 현실에서 그거 말하기 부끄럽지도 않냐!
  “참고로 조회 수는 세 자릿수 미만.”
  “더 부끄러운 현실을 들어버렸다!”
  그것보다 이렇게 잘 치는데 세 자릿수도 안 되다니. 높구나! 조회 수의 벽!
  “편지한 거 너지? 보란 듯이 피아노 치고 있었고.”
  왜 하필이면 ‘솔마르크’의 전투 테마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덕에 잠시 김새버렸지만 8교시까지 느꼈던 초조함이 두근거림이 되어 내 가슴을 두드린다. 오늘 처음 열리는 걸 본 그 조그만 입술이 다시 열리기까지 기다리며 침을 꿀꺽.
  “그래, 맞아. 잘 와주었군. 피게온. 모든 것을 끝낼 결투의 장에.”
  고등학교 입학 이래 한 번도 웃는 적이 없는 그 얼굴에 처음으로 조소를 잔뜩 담아 한쪽의 입 꼬리만 올리며 지숙은 속삭이는 듯, 하지만 분명히 들리는 크기의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입에서 나오는 말이 조금 이상한데.
  “결투? 고백 아니야? 아니, 그보다 피게온이라니 나를 ‘우주기동전대 ~비르드~’의 멍청한 캐릭터에 대입하지 마!”
  “고백? 당연히 결투지. 무슨 생각한 거야?”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반문한다. 묻는 말도 역시 조용하다. 그런데 요즘에는 노란 바탕에 분홍 하트무늬 패턴의 편지 봉투에 결투장을 담아 보내나?!
  “그보다 너, ‘우주기동전대 ~비르드~의 멍청한 캐릭터들이라니. 무슨 말을 하는 걸까, ’비르드‘의 등장인물 주제에 ’비르드‘를 욕 하는 거니, 피게온.”
  “피게온 아니라고! ‘비르드’, 그 실격 애니메이션, 욕하는 게 당연하잖아?! 작화 실격, 전개 실격, 캐릭터 실격, 시나리오 실격, 연출 실격, 죄다 실격인 실겨니매이션. 아무리 봐도 그거 실격이잖아, 실격….”
  갑자기 피아노에서 굉장히 웅장한 소리가?! 이거 ‘비르드’ 오프닝 반주?! 근데 5배속?! 빨라!
  “무어어어어라고오오오??”
  지숙의 얼굴이 굉장히 망가졌다. 마치 ‘비르드’의 작화처럼! 작붕! 아니, 얼붕! 그 표정과 반주의 패기에 눌려 도저히 말을 이어갈 수가 없어!
  피아노 연주 도중 팔을 번쩍 올린 뒤 건반을 세게 쳐내려 마무리하는 주법을 지숙은 자연스럽게 구사해서 곡을 마무리했다. 실제로는 처음 봤다. 내려치는 양팔에서 나오는 박력은 대단했다. 그리고 지숙은 화난 표정이지만 다시 사람처럼 돌아온 얼굴로 날 보며 말했다. 그 괴성은 한 번 뿐인지, 다시 조용한 목소리로.
  “너 ‘솔마르크’도 알고 있는 주제에 ‘비르드’를 욕하다니 애니메이션 보는 눈이 없는 거 아니야? 그 어설픔은 의도된 어설픔이야. ‘우주기사단’ 특유의 의도된 B급.”
  “아니, 나야말로 너의 애니메이션 보는 눈에 대해 탐구심이 생기는데! 확실히 네 말대로 이전 ‘우주기사단 시리즈’는 의도된 B급으로 애니메이션의 다양성을 늘려놨어. 특유의 팬덤도 형성되고. 완벽한 B급 로봇애니메이션 시리즈라는 느낌으로 입지를 탄탄히 굳혀놨는데, ‘비르드’는 아니야. 그건 B급도 못돼. Y급이라고. ‘우주기사단 시리즈’를 다 망쳐놨다고. ‘우주기사단 시리즈’를 구제하려면 ‘비르드’를 인정하지 않는 수밖에 없어. 그 작품 실격이라고.”
  나도 만만찮은 ‘우주기사단’의 팬이었단 말이다. 하지만 도저히 ‘비르드’는 인정할 수가 없다. 이 망할 애니메이션을 왜 옹호하는 거야!
  “머-엉청한. 그런 널리고 널린 인터넷 평으로 욕하지 말고 ‘비르드’를 제대로 보고 욕하란 말이야.”
  “방영 시 26주 동안 1주 1주 기다려가며 1회 감상. 너무 재미없어서 혹시나 재미있는 부분을 놓쳤나 싶어 2회 감상. 혹시나 내가 이 시리즈에 대해 이해를 잘못하고 있나 싶어 ‘솔마르크’를 다시보고 분명 재미있을 거라는 생각에 3회 감상. 더 보라는 거냐.”
  게다가 Y급이라는 인터넷 평은 내가 작성한 거다! 요건 몰랐지! 내가 뱉은 말에 지숙은 잠시 멈칫했지만 계속해서 그녀 특유의 나긋나긋한 악담을 이어갔다. 이 여자, 말을 못해서 안하는 게 아니었구나. 오타쿠라서 말을 아끼는 거였잖아. 너무 아꼈지만!
  “피게온녀석 주제에 말이 많네. ‘비르드’를 3번이나 봤으면서 자기가 나오는 애니메이션을 이해도 못하는 녀석 주제에.”
  “피게온 아니라고! 애초에 피게온, 그 이름부터가 실격의 시작이잖아. 비둘기, Pigeon을 그대로 읽어 피게온이라고? 이번 작품 네이밍 센스가 제목에서부터 괴상하긴 했어. 로봇의 모티브가 새인 건 좋은데 Bird를 그대로 읽어 ‘비르드’라니 너무하잖아….”
  “점점 간편하고 편리해지는 현대사회의 추세에 맞춰 이름도 간편하고 편리하게 지은 거야. 네 뇌처럼.”
  “그건 아무리 봐도 성의 없음으로 인한 실격인데?! 게다가 내 뇌는 그렇게 간편한 구조가 아니라고?!”
  뇌가 크고 복잡하니까 내 머리도 덩달아 커다란 거라고-!
  “그리고 이름만 보고 그렇게 말하면 안 돼. 캐릭터 설정은 전혀 본 적 없는 새로운 캐릭터잖아. 거기서 느껴지는 신선한 맛을 즐겨야 하는 거야.”
  “그래. 새롭긴 하지. 신선하다 못해 너무 날 것이라 디스토마가 걸릴 지경이지만 말이야. 시청자가 친숙하게 느낄 수 있는 캐릭터들을 만들겠답시고 세탁소 아저씨를 로봇에 태우고 있는데다가 세탁소 아저씨(피게온, 42세)지만 요즘의 기호에 맞춘다고 얼굴은 또 미소년이질 않나. 세탁소 출신이니까 양복만 입는다? 조종복도 양복? 게다가 AI세탁기 발명의 결과 세탁소 매출이 줄어가는 현실에 반항하는 마음으로 악역을 맡아버린다고?! 이건 아무리 봐도 말도 안 되는 실격 캐릭터잖아….”
  “아니. 너 정말, 캐릭터 보는 눈이 없구나. 그 눈 거추장스러워서 빼버린 거 아냐? 안타깝네.”
  아니, 네가 보는 눈 더 없네! 정말 안타까운 눈으로 보지 말라고!
  “‘비르드’에는 평소 십대들이 생활하면서 만날 수 있는 속성의 캐릭터들이 잔뜩 모여 있는데다가, 친숙함 속에 감춰져있는 독특함. 그게 매력이잖아.”
  “절에서 뛰쳐나온 파계승(52세) 캐릭터. 스패로. 일단 스님이고 나이고 뭐고 설정은 상관없이 외모는 장발의 미소년인데다가 나중에는 여성캐릭터가 모자랐는지 갑작스런 사고로 미소녀로 변하기까지 한다고, 그리고 결국 부처님의 가르침을 못 잊어 탑승 기체에는 염주를 무기로 장착해서 쓰질 않나. 이건 좀 새롭긴 하지만. 애초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를 생각이면 사람을 죽이면 안 되잖아…. 이게 네가 사랑하는 친숙함 속의 독특함인 거냐.”
  “그런 면까지 사랑하는 거야. 그것이 진정한 ‘우주기사단’의 팬인 거잖아.”
  안 돼, 이 녀석 그릇된 팬심이 너무 강해서 꺾이지가 않아. 더 강한 펀치를 날리지 않으면.
  “‘그런 면’이라는 건 인정했다는 뜻…. 아니 그런 표정은 그만해 줘. 그래, 그렇다고 치자고. 그런데 시나리오는? 이건 누가 봐도 정말 B급 밑이라는 게 확실하잖아.”
  “너 3번 봤다는 주제에 이 시나리오의 매력을 눈치 채지 못했어?”
  “눈치 챈 건 최악의 시나리오라는 점 뿐 인데….”
  “역시 피게온답게 멍청하네.”
  “너도 멍청하다고 인정한 거지?! 그런 거지?!”
  “멍청한 피게온을 위해 내가 시나리오의 우수성에 대해서 설명해줄게.”
  “무시당했다!”
  그리고 지숙은 음악실의 칠판까지 종종걸음으로 가서 분필을 들었다. 쓰면서까지 설명할 게 있던가.
  “B급, B급 타령만 하던 ‘우주기사단’의 팬들에게 아예 쓰레기인 시나리오를 투척. 최강의 쓰레기, 쓰레기로는 A급, 최강인 시나리오를 선사했어. 이는 언제나 B급에만 머무르지 않고 A급으로 올라가겠다는 확고한 의지의 표명이야. 장하잖아. ‘우주기사단’.”
  그리고 갑자기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지숙. 아니, 이건 ‘우주기사단’에 대한 경례인가. 게다가 칠판에는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그거 아무리 봐도 장점이 아니고 단점인데?!”
  “오히려 제일 최악인 시나리오에서 느껴지는 재미가 장난 아니야.”
  “너도 최악이라고 한 거지. 지금?!”
  “말귀를 못 알아먹는 비둘기-새대가리- 같으니. 최고의 재미라고 한 거야. 지금.”
  그게 재미있다고 느낄 정도면 네 재미 회로가 어떻게 구성돼 있는지 궁금한데. 애니메이션을 감상할 때마다 목숨 걸고 재미 회로를 재구성하기라도 하는 거냐…. 내가 트윈 테일의 츤데레는 못되더라도 최소한의 선의로써 재미 회로는 똑바로 잡아주고 싶다.
  “‘비르드’에서 최고로 최악인 점은 메카물의 길을 버렸다는 거다. 아니, 조금만 참고 내 말을 들어봐. 일단 로봇의 탈을 쓰고는 있지만, 그거 메카물 아니잖아? 그래, 1화에서는 확실히 메카물이지. ‘우주기사단 시리즈’답게 전투만큼은 박진감 있고, 꽤 좋았어. 1화 내내 전투만 하는 게 조금 미묘하긴 했는데. 덕분에 1화에서 예산 다 써버린 거 아냐? 2화부터 26화까지 전투씬 하나 없는 메카물이 어디 있어?! 재활용이라도 하라고?!”
  “멍게온. 재활용 하지 않는 게 ‘우주기사단’의 긍지잖아.”
  “멍청이와 피게온을 합치지마! 아니, 그러면 예산을 1화에 다 쓰질 말던가…. 2화부터 4화까지는 추리 서스펜스를 시도하는데, 그 결말이란 게 ‘사실은 이전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초과학을 활용한 트릭이었어.’라는 추리 장르에서 절대 쓰지 말아야할 짓을 해버리질 않나. 8화부터 11화까지는 갑자기 학원 러브코미디로 장르가 바뀌는데, 캐릭터를 만들기 귀찮았는지 어땠는지 여기서 스패로(52세, 스님)를 여성화 시켜 입학시키질 않나. 그래도 이야기가 재밌을 수가 있잖아. 그런데 재미없어. 진짜 이건 담백하게, 그냥 재미가 없어. 러브라인이 있기는 있지만 발전도 없고, 갈등도 없고, 딱히 사건도 없고. 왜 자꾸 수업하는 내용으로 시간을 때우는 거야…. 인강 듣는 줄 알았잖아.”
  “자라나는 청소년들을 위해 교육내용까지 넣어주는 친절한 ‘비르드’. 너 같이 애니메이션만 보는 멍청이를 위해서잖아.”
  “악질적인 방향으로 옹호하지 마…. 이건 분명히 실격이라고…. 그거 말고도 초능력 배틀, 느와르, 좀비, 스포츠, 특수요원, 마법소녀, 이세계 탐험, 요리, 거기다 일상까지 웬만한 장르는 거의 다 도전해버리잖아. 이쯤 되면 이미 메카물도 아니잖아. 것보다 로봇애니메이션에 좀비 장르는 대체 왜 도전한 거야?! 게다가 2쿨 애니메이션에 이런 잡다한 장르를 다 집어넣고 단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재미가 없잖아. 생각해보니 이건 실격 수준도 아니야….”
  말하면 말할수록 너무 하구나. ‘비르드’. 예전 인터넷에 리뷰 쓸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고 생각했는데.
  “너, 멍게. 보자보자 하니까 말이 심하잖아. 네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비르드’는 재미있어. ‘우주기사단’이니까.”
  “바꾼 걸 줄이지마?! 해산물이 됐잖아?! 하여간 내 말이 맞으면 재미없어. 확실히.”
  “우으…. 아니야. ‘우주기동전대 ~비르드~’는 최고의 애니메이션이란 말이야….”
  지숙은 역시 내 논리 정연한 비판에 허점을 찾지 못했는지 갑자기 힘을 잃은 목소리-원래도 조용한 목소리였지만-로 말했다.
  “너 왜 그렇게 옹호하는 거야? ‘비르드’에 무슨 은혜라도 입은 적 있어? 네가 은행에 있는데 갑자기 나타난 은행 강도가 우연히 TV에 나온 ‘비르드’를 보고 너무 재미없어서 의욕 저하로 바로 퇴근했다거나한 건가.”
  “그런 힘 빠지는 이유가 아니라고. 개불.”
  “해산물의 종류를 바꾸지 말라고?! 게다가 왜 하필이면?!”
  너무 남자를 지칭하는 데 어울리는 해산물이잖아?!
  “그건 그렇고 그게 아니라면 너 대체 왜 ‘비르드’에 죽고 못 사는 거야.”
  “피코, 알아?”
  모를 리 없다. 피코. ‘우주기동전대 ~비르드~’의 유일한 여자 대원. 하지만 역시 ‘비르드’답게 괴상한 설정의 캐릭터다. 공작-peacock-에서 따온 이름답게 외면은 화려한 미소녀. 하지만 말이 없다. 누군가 말을 걸어도 묵묵부답. 오퍼레이션 시간에도 묵묵부답. 출격 대사 타이밍에도 묵묵부답. 적이 통신으로 도발을 해도 묵묵부답. 위급 상황에서도 비명하나 없이 묵묵부답. 근데 이거 왠지 익숙하잖아….
  “너, 말 없는 캐릭터를 피코보고 구축한 거였어?!”
  “…………. 응.”
  지숙은 달아오른 얼굴을 푹 숙인 채 전혀 들리지 않을 정도의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나, 맙소사. 21세기 대한민국의 고등학생이 애니메이션을 보고 등장 캐릭터를 따라 자신의 캐릭터를 구축하다니?! 이런 건 중학교 2학년 때 졸업해야 하는 거 아냐?!
  “뭐 어때! 피코는 매력적이고!”
  붉어진 얼굴로 갑자기 큰 소리를 내뱉은 지숙. 평소와 다른 행동으로 지숙의 부끄러움이 극한값에 수렴했다는 사실이 뻔히 보였다.
  “음. 그래. 사실 ‘비르드’에서 피코만큼은 매력적이지. 모에하고.”
  “---?!”
  갑자기 손바닥 뒤집듯 바꾼 내 태도에 지숙은 조금 놀란 듯 했다.
  “피코는 네가 말한 ‘비르드’ 특유의 신선한 설정이 제대로 들어간 경우잖아.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아무리 내가 ‘비르드’ 안티라도 인정할건 인정한다고!”
  나 사실 ‘비르드’ 블루레이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샀을 정도로 ‘우주기사단’ 팬이고! 게다가 이제껏 도저히 Z급이라고까지 할 수가 없어서 Y급이라고 표현한 거고!
  “…. 멍게 주제에 제대로 말할 줄 알잖아.”
  아니, 그럼 지금까지 내가 한 말은 말이 아니었나?! 멍게가 숨쉬기 위한 뻐끔뻐끔 이었나?!
  “피코는 미소녀에다가 말이 없는 속성. 사실 두 개 뿐이었지. ‘성의 없는 거 아냐?! 제작진?!’ 같은 딴죽을 잔뜩 걸고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1화부터 이 두 가지 속성밖에 없는데 얼굴을 엄청 자주 비추잖아. 그런데 출연할 때마다 속성이 하나씩 추가되고. 어느 날은 쿨데레에 어느 날은 도짓코, 어느 날은 안경을 꼈다가 어느 날은 벗었다가 어느 날은 운동도 잘했다가 어느 날은 못했다가 어느 날은 가사도 잘했다가 어느 날은 못했다가 어느 날은 머리도 길렀다가 어느 날은 잘랐다가 나중에는 글로 필담까지 가능해지면서 어느 날은 독설도 했다가 어느 날은 천사처럼 굴었다가 어느 날은 오타쿠적 기질을 보이는가 하면 어느 날은 츤데레고 어느 날은 천연이고…. 정해진 속성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체스 판을 뒤집어 생각해보면 피코는 속성이 너무 많아. 근데 이 천차만별 속성을 원래 유일한 여주인공이었던 피코는 모두 완벽하게 소화해버리잖아.”
  “맞아. 이래서는 같은 캐릭터가 아니잖아-! 라는 녀석들도 있지만, 잔뜩 모여 멍게나 뜯어먹는 플랑크톤들 같으니.”
  “뜯어 먹지 마?! 아프다고?!
  “그럼 개불을 뜯어먹는 플랑크톤들.”
  “왠지 특정부위가 아파?!”
  남자의 상징이?! 그런 나의 고통과 상관없이 어느새 원래 색을 되찾은 얼굴로 지숙은 말을 이었다.
  “하여간 피코는 피코라고.”
  “그래. 결국에 말을 안 하는 설정은 계속 유지되고 말이야. 계속 미소녀고, 이 두 가지 속성을 유지하면서도 공작이라는 이름에 어울리게 이것저것 엄청나게 많은 색깔의 매력을 뽐내잖아? 사실 이 캐릭터 엄청난데, 최곤데! 유지되는 침묵속성 자체가 엄청 모에하고!”
  “침묵 속성이…. 모에…?”
  원래 빛깔로 돌아왔던 지숙의 얼굴색이 다시 붉어졌다. 왜 그러지? 피코를 생각하니 다시 흥분한 건가? 역시 자기가 꽂힌 속성이라 그런 건가?! 아니면 그런 성향-백합-인건가?!
  “정말, 침묵 속성이…. 모에하다고 생각해?”
  “응, 맞아. (피코의) 침묵속성은 확실히 모에하지. (피코한테) 아무리 이것저것 많이 있어도 침묵속성이 최고지.”
  한 단계 더 얼굴이 붉어지는 지숙. 피코를 칭찬했다고 이 정도까지 흥분할 정도로 좋아하다니?! 중증인가?! 아니, 아니지. 우리 세계에서는 엄연히 ‘취향 존중’이 존재해야 하는 법. 나는 그런 면에서 신성 브리타니아 제국 정도-전 세계 영토의 1/3-로 넓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
  “난 다 이해해. 받아들일 수 있고. 조금 특수한 취향이라도 괜찮으니까. 그렇게 혼자서 부끄러워 할 필요 없어.”
  그래. 나도 남 말할 처지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가 BL을 즐기는 소년이란 건 아니다.
  “진정한 친구를 만남 기념으로 이리 와서 안겨. 난 너의 모든 걸 이해해 줄 수 있단다.”
  아버지와 같은 마음으로 허허 웃으며 나는 팔을 벌리고 지숙이 나에게 안겨 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지숙은 돌연히 질문했다.
  “그런데 특수한 취향이라니 무슨 소리야?”
  “너 중증 피코팬이잖아? 애정이 지나쳐 사랑할 정도잖아? 이미 난 다 이해했으니까 숨길필요 없…. 웁!”
  대화 도중 난데없이 지숙은 ‘우주기동전대 ~비르드~’ 1화에서만 나온 피코의 최강기술 ‘클리어 스크류 비크 체인지 어택’-피코가 기술명을 외치지 않아 블루레이에 동봉된 설정집에서야 겨우 본 이름이었다.-을 프리 허그 자세를 취하고 있는 나에게 날렸다.
  부리 공격이라는 이름과는 상관없이 그냥 철산고였지만.
  “멍게…. 같으니….”
  인류의 새로운 발견, 고통의 최댓값을 발견해낸 환희로 인해 아무 말도 못하고 쓰러진 나에게 지숙은 짧게 읊조리고 음악실에서 나가버렸다.
  그렇게 음악실에서 벌어진 우리의 결투는 나의 패배로 끝났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제 막 야간자율학습이 시작된 후였다. 나는 음악실 바닥에서 쓸쓸히 일어나 집으로 향했다. 만화에서처럼 기절한 뒤에 의식을 차릴 때 무조건 침대에 누워있는 현실은 없었다.

  지숙과 나의 음악실에서의 결투가 있고 난 뒤, 우리 사이는 조금 변했다. 지숙은 여전히 내 짝에다가 말이 없는 교내의 유명 미소녀였고, 나는 평범한 대덕이었지만.
  “야, 그건 아니지. 분명 ‘로스트 파일’은 최악이라니까. 너 4화부터 다시 보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그것만 봐도 ‘로스트 파일’이 얼마나 쓰레기인 줄 알 수 있으…. 3화까지 밖에 안 봤다고? 야, 안 보고 최고라고 하면 안 되지. 내 말대로 조용히 4화부터 한 번 봐라. 여기 PMP."
  나와 애니메이션 이야기를 나누러 온 친구에게 나는 평소와 같이 애니메이션 보는 시각을 넓혀주고 수업시간에 수업 대신 애니메이션을 볼 수 있게끔 지도해주었다. 그 잠시 후,
  지잉-.
  휴대폰의 진동. 나는 휴대폰을 꺼내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한다.
  -붉은눈미소녀★ : 멍게, 너 진짜 ‘로스트 파일’ 다시 보는 게 어때? 그거 진짜 근래 보기 힘든 제대로 된 애니메이션이라고, 시지브 로의 매력은 정말이지 꺄아~♡
  옆 자리를 본다. 지숙은 황급히 책을 보는 척 한다. 너 정말이지. 애니메이션 볼 줄 모르네!




아슬아슬 세이프네요. 안녕하세요. 보약입니다.
오타쿠인 친구가 있었으면 하는 마음에 이야기를 썼습니다.
재미있었으면 좋겠네요.
급히 키보드로 옮겨 오타가 많을지도 모르겠네요. 지적해주시면 바로바로 고치겠습니다.
그럼 많은 지도편달 부탁드립니다.

Writer

김보약

김보약

평범한 워너비

comment (3)

창공의 마스터
창공의 마스터 12.09.09. 14:44
읽는 내내 킥킥거렸습니다. 숨덕부의 전개에 아라라기 군을 꽂아넣은 느낌이네요. 유쾌하고 시원시원한 글이었습니다. 이런 글을 읽으면 반나절 정도는 기분이 좋아지지요. 그래, 한국 라이트노벨의 미래는 밝구나!
...그러나.
이 작품이 가진 유사성(숨덕부의 전개에 아라라기 군을 꽂아넣은 듯한)은 기대와 동시에 우려를 느끼게 합니다. '습작'이라는 조건 하에서야 저러한 유사성은 얼마든지 용인될 수 있습니다만, 습작 단계를 넘어 본격적인 작품을 보이고자 할 때는 오히려 독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은 온전히 작가의 역량으로 뛰어넘어야 할 부분이기에 특별히 조언해드릴 것이 없습니다... 그저 앞으로 관심있게 지켜보겠다는 말밖에는요. 다음 작품을 기대하겠습니다.
엔마
엔마 12.09.09. 15:15
재미이었습니다. 건필하세요.
-로 끝낼 수는 없죠. 창공의 마스터님 말씀과 비슷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글 자체의 구성이라던지 재미는 있습니다.
다른걸 생각하지 않고 본다면 충분히 재미있는 이야기지만……
위에는 숨덕부를 예로 들었지만 전 읽지 않았으니까요.

제가 느낀건 ['메루루로 다투는 키리노vs쿠로네코'의 패러디]였기에, 굉장히 아쉽네요.
+이건 제 탓인지도 모르지만 야자 시간 운운하는건 왠지 독자로부터 '우리나라 고등학생이 왜 야자안해-'같은 소리를 들을까봐 미리 선수친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전 조금 어색하네요(혹은 불편하거나).

글 자체로만 봤을때는 말했지만서도 무척 재미있게(깔끔하게, 무리없이, 시원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김보약님의 새로운 소설을 빨리 보고싶습니다.
김보약
김보약 작성자 12.09.12. 18:10
두분 말씀 감사드립니다 :-)
숨덕부는 본적이 없지만 스타더스트 위치 메루루를 모티브로 글을 썼어요. 헤헤.
다시 한 번 말씀 감사드리며 다음번엔 우승하도록 열심히! 할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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