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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전쟁] 일심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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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몸의 이상을 느끼는 것보다는 내가 하룻밤 누워있었던 곳이 달라졌다는 것을 알아채는 쪽이 더 빨랐다. 나는 별 생각 없이 몸을 일으켰다가 분위기가 다른 방의 모습에 순간 당황했다. 한쪽에 책장과 책상 하나가 있는 것이 전부인, 어쩐지 썰렁한 방이었다. 물론 방에 있는 것들이라는 게 대체로 비슷하긴 하겠지만, 배치 때문인지 아니면 잡다한 것들이 하나도 없기 때문인지 이 방은 휑하다는 느낌이 강했다.
 내가 어디 다른 집에 가서 잠을 잤던가? 아니, 그럴 리는 없다. 아니면 꿈 속을 헤매고 있는 것일까? 아침에 막 일어나고 정신이 들려는 참에는 꿈과 현실 사이의 경계가 흐릿해, 꿈 속에서 있었던 일이 마치 현실에 그대로 투사된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는 법이다. 그래서 나는 정신이 들 때까지 조금 기다려 볼 참이었다. 그게 그나마 합리적인 설명이었기 때문이다 - 마치 이성적인 환상 따위의 형용모순 같은 말처럼 들리기는 하지만.
 "일어났어?"
 어쨌든, 어느정도 정신이 들었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 밖에서 한 여자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 시간에 나를 부를 사람이라면 응당 부모님이겠지만, 그 목소리는 한 여자의 것으로 들렸을 뿐 내가 친숙한 사람의 것으로 들리지는 않았다. 그리고 역시나, 그렇게 부르면서 내 방 문 사이로 고개를 내민 사람은 내가 아는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마치 괴물이라도 마주친 느낌이었지만, 어쨌든 반사적으로 당신 누구야! 같은 소리를 지르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나는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네, 뭐, 일어났죠, 그렇게 대충 둘러대고는 방 안에서 거울을 찾았다. 물론, 낯선 방에서 내 책상 위에 늘 있었던 거울을 찾는다고 해서 거울이 눈에 띌 리 없었다. 도대체 꿈과 현실이 어느 지점에서 섞인 것인지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던 사이, 나는 문 밖 벽에 걸려있었던 거울 속의 나와 눈이 마주쳤다.
 멀쩡한 남자의 모습이었다.

 몸에 이상을 느끼지 않은 이유는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 물론 심지어 성별이 다르다고 해도 사람이 몸에 대해서 느끼는 것이 그리 다르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나는 머리를 그리 길게 기르지는 않았고 - 지금 이 몸이 그런 것처럼 -, 가슴은 - 조금 슬픈 고백인 것 같지만 - 그때나 지금이나 없으니까. 거기다 몸을 움직이는 것은 전혀 부자연스럽지 않았다. 자기의 것이 아닌 몸을 덧입고 있으면 마치 재활치료를 하는 것처럼 부자연스러울 것 같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 몸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는 것이 오히려 나를 더 혼란스럽게 했다. 이제는 더이상 꿈을 꾸고 있는 것이라고 지금 상황을 에둘러 설명할 수도 없었다. 몸을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내 정신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닐까? 해리성 정체감 장애라고 하는, 그러니까 이중인격의 특징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사람들도 지금의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될는지도 모른다. 그게 그나마 합리적인 것 같은 두 번째 설명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기억하는 나에 대한 정보를 떠올려보기로 했다. 이름은 정소진이었고, Y고등학교 2학년이다. 물론 거기에는 여자라고 하는 정보가 아주 중요한 요소 중 하나겠지만, 어쨌든 그건 잠시 차치하기로 했다.
 다음으로 이 몸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기로 했지만, 의외로 그건 쉽지 않았다. 책에 이름따위는 쓰여있지 않았고, 학생증은 더더욱 눈에 띄지 않았다. 혹시 주민등록증이 있지 않을까 싶어 둘러보았지만 이 방에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방 밖으로 나가 교복 안 따위를 뒤져보기로 했다. 밖에는 여전히 낯선 여자가 아침을 준비하고 있다. 그 모습엔 도저히 익숙해질 것 같았고,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것이 이 몸에 들어있는 여분의 인격에 불과하다고 해도 그것이 과연 나에게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갑은 바깥에 걸려있었던 교복 상의에 들어있었다. 이 몸의 주인의 부모님일 사람들이 - 쓸데없이 복잡한 관계인 것 같지만 - 이상하게 바라보고 있었지만 어쨌든 나는 지갑을 뒤지기 시작했다. 학교와 집만을 오가는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것인지 지갑 안에는 천 원 짜리 지폐 세 장이 들어있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그게 마치 남의 통장을 뒤지는 것 같은 짓인 것 같아 그만두고, 나는 지갑 안의 주민등록증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름은 이경민이었고, 94년생, 그러니까 나와 나이가 같았다.
 그렇지만 이름이나 나이만큼이나 중요한 것들이 남아 있었다. 내가 다니는 학교 이름이 뭔지 알아? 따위의 질문은 정말 죽어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 이경민이라는 남자의 책상을 전부 뒤지지 않는 이상 그것 밖에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내가 다니는 학교 이름이 뭐였지?"
 "Y고잖아."
 "반은?"
 "2반. 아직 잠이 덜 깼나?"
 내가 댔어야 할 이유를 대신 찾아줘서 다행이다 싶었다.
 거기까지 듣고보니 대충 이름 정도는 들어본 것 같았다. 인문계에서 압도적으로 1등이라는 남자애의 이름이 이경민이었던 것 같기도 했다. 이럴 때는 그래도 범생이의 몸이어서 다행이었다라고 해야 하는 걸까? 어쨌든 이 몸의 주인이 어떤 인간인가 하는 정보는 갈피를 잡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질 않았다. 내가 이전에 그 녀석 - 이 녀석이라고 해야 할는지도 모르겠지만 - 면식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저 그런 녀석이 있다는 식으로 이름 정도를 아는 게 고작이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생각하면 그 또한 나에 대해서 무언가 알고 있는 게 있을 리 없고, 그러니 설령 정체감 장애니, 이중인격이니 해도 그가 내 인격을 형성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생각할 수록 일이 복잡해지는 것 같아서, 나는 생각은 그쯤 하고 일단 학교에 가보기로 했다. 학교에 나와있을 나를 만나면 일이 조금 풀릴까 싶어서였다.
 그래서 나는 서둘러 황망하게 집을 나왔다. 옷을 뭘 챙겨입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부터도 당황스러웠지만, 어쨌든 내가 생각하는 한 별 문제가 없지 않나 싶을 정도로는 챙겼다. 다행히도 내가 아는 아파트 단지여서 학교를 찾아가는 것 자체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학교에 와서도 문제는 여전했다. 2반이라는 것은 듣고 왔다지만, 문제는 내 자리가 - 그러니까 이 몸의 주인이 앉던 자리 - 어디인가 하는 것조차도 알 수 없었다. 순간 당황했다가 교탁 어딘가에 자리를 인쇄해둔 표가 눈에 띄어 어찌어찌 해결할 수는 있었다.
 가방을 자리에 내려놓고 나서, 나는 내 반, 그러니까 9반으로 찾아갔다. 누가 봤다면 하나하나 이상하기만 한 행동의 연속이었겠지만, 아직 이른 시간이었던 탓에 눈에 띄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나는 이경민이라는 녀석의 인간 관계 따위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거의 없었고, 앞으로 내게 아는 척을 할 녀석들에 대해서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당황스럽기만 했다.
 반에는 나, 그러니까 정소진은 아직 오지 않은 채였다. 사실은 조금 두려웠다. 내가 말을 붙이면 걔는, 그러니까 나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잘 알지도 못하고 지냈던 남자애가 갑자기 자기 반에 찾아와서 아는 척을 하고 있다,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그렇지만 그렇다고 나를 잘 아는 척 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지 않은가. 몸이 바뀐 것 뿐이라지만 나는 내가 나라는 사실을 확증할만한 모든 것을 잃어버린 느낌이었다. 그래서, 단지 내가 알 것 같은 누군가에 기대 내가 누군지를 찾아내려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참 9반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반 맞은 편에 있었던 계단에서부터 한 여자애가 허겁지겁 뛰어올라오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렇게 길지도 않은 머리는 제대로 말리지도 않아 물기가 축축했고, 옷매무새는 꼭 일부러 헝클어놓은 것처럼 보였다. 어쨌든, 나는 내가 기억하는 나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올라온 그 녀석이 - 물론 내 기억 속에서 미화된 것일 수도 있겠지만 - 정소진이라는 것은 알아볼 수 있었다. 물론, 내가 이경민이라는 남자애의 몸을 하고 있다는 것과는 별개로 그건 마치 도플갱어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거울 속에 있는 내가 갑자기 나를 보고 웃으며 손을 드는 것 같은, 그런 것.
 "너, 너, 정소진 맞지?"
 그렇지만 정작 그렇게 소리친 건 내가 아니라 그렇게 뛰어올라온 여자애 자신이었다.
 "그러는 넌 이경민이고?"
 "그래. 이게 대체 뭐야……."
 그는 완전히 울상이 되어 있었다. 물론, 내 얼굴로 지은 표정이었기 때문에, 그게 그가 지은 울상이라고 생각하는 건 생각보다 자연스럽지 않았다. 어쨌든 그가 그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최소한 침착한 척 가장할 수 있는 내가 별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영혼이 바뀐 건가?"
 내가 말했다.
 "영혼이라는 게 있긴 있나? 어쨌든, 영혼이 바뀐 거든 뇌가 바뀐 거든 넌 지금 내 몸 속에 들어가 있는 정소진이잖아. 맞지?"
 "맞아."
 "그리고 이 몸은 네 몸이고."
 "그것도 맞아."
 "뭘 어째야 하지?"
 물론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이게 무슨 병이라면 약을 처방한다는 따위의 정확한 답을 내놓을 수 있겠지만, 이런 초현실적인 사건에 대해서는 - 물론 이미 현실에 벌어진 일을 초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이 온당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푸닥거리?
 "좀 진정해. 일단."
 나도 한참 당황한 상태로 학교에 나왔지만, 나보다 더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을 하고 있는 그를 마주하고 있으니 오히려 내가 한참 더 침착한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옷은 또 그게 뭐야?"
 "여자는 옷 입는 게 왜 이렇게 힘든 건데? 이거 안 입고 올 뻔 했어."
 그러면서 그는 가슴께를 가리켰다.
 "안 입었는데도 전혀 불편하지 않더라고."
 당황했다지만 아직 농담 따위를 할 정신은 남아있는 듯 싶었다. 나도 비슷한 농담으로 맞받아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 녀석의 몸은 상당히 멀쩡하게 생겨서 그럴 수도 없었다. 나는 대신 표정만 짐짓 딱딱하게 굳혀 되돌려주었다.
 "아, 미안해. 음, 그러니까, 지금 내가 제정신이 아니라서 말야……."
 "어쨌든, 뭔가 방법을 생각해봐야지."
 "정신과 상담 같은 거?"
 "정신병 진단밖에 안 나올 걸."
 "정신병일지도 몰라."
 그가 말했다.
 "정말 있을 수 없을 정도로 희박한 확률이겠지만, 우리 둘이 동시에 정신병에 걸려서 서로 상대방의 인격이라고 착각할 가능성. 그게 그나마 그럴듯한 설명 아닌가?"
 "그런데 너하고 나는 서로 아는 게 없잖아. 정신병이라기엔 나는 나에 대해서 아는 게 너무 많거든. 전화번호, 가족 관계, 내가 좋아하는 거, 이메일 주소, 그런 거 전부. 그리고 너하고 난 계열이 달라서 공부한 것도 달라. 착각이라고 하면 그런 것까지 알 수는 없잖아?"
 "아, 맞다. 너 자연계지?"
 그러고보니 그것도 큰일이다 싶었다. 만약 몸이 돌아오든 아니면 정신을 차리든 간에 이 일이 수습되지 않으면 당장 서로 계열부터 바꿔야 할 판이었다. 그런데 그랬다간 선생님들이나 가족들한테서 날아올 말들을 얼마나 견뎌야 할까? 머리가 아팠다.
 "오늘 모의고사잖아. 어쩔 거야?"
 그가 물었다.
 "어쩌긴 뭘 어째. 탐구영역은 포기해야지."
 "난 수리부터 막혀."
 수리부터 막히든지 아니면 탐구에서 넘어지든지, 어쨌든 점수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건 기정사실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6월 모의평가라고 한참 학교가 시끄러웠던 차에 소위 인문계의 희망이라고 불렸던 녀석이 미끄러진다면 난리가 나긴 할 터다. 문제는, 그 난리를 겪어여 하는 게 그가 아니라 나라는 것이겠지.
 "서로 대신 칠까?"
 그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
 "모르겠다. 정말."
 그는 악, 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아직 다 마르지도 않은 자기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쥐고 헝클어뜨렸다. 마치 남이 내 몸을 망가뜨리고 있는 장면 같아 말리고 싶었지만, 그래도 그런 정도는 이해해줘야 하는 게 아닐까 싶어서 말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러면 점심시간에 다시 보자. 시간 별로 없으니까."
 경민이 말했다.
 사실 시간이 없는 것만큼이나 계열이 다르고, 서로 친하다는 소문조차 없었던 두 명이 서서 무언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떠들고 있다는 것 자체가 난처한 일이었다. 오가는 녀석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었고, 반에 들어가는 선생님들도 드문드문 이쪽을 이상하게 바라봤다. 물론, 경민이 평소 범생이로 통했기 때문인지 이런 모습도 범생이의 외도 정도로 보인 모양이다. 흔한 핀잔 따위를 주지도 않았으니까.
 "어디서?"
 "내가 갈게."
 물론 이 상태로는 서로 한가하게 점심 밥을 목 너머로 삼킬 여유 따위는 없을 것이다.
 "전화번호 교환할까?"
 "서로 전화번호 알고 있잖아."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는 그러고보니 그랬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역시 아직 정신을 못 차린 모양이다.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 나는 반에 돌아와 책상 위에 엎드렸다. 혹시 누군가 걸어온 말에 대답을 하다가 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나는, 되도록이면 다른 녀석들과 이야기하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그건 실수에 대한 걱정 뿐만 아니라 본래 내가 그리 사교적인 성격은 못 되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친한 척  다가오는 녀석들에게 대꾸할 말을 떠올릴 자신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엎드려서 '나는 지금 누구와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라는 파장을 내보내고 있다고 해서 모두가 나를 그냥 내버려둘 리는 없었다.
 "야, 뭐하냐?"
 어떤 남자애가 책상을 두드렸고, 나는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켜서 그 녀석을 쳐다봤다.
 "넌 좋겠다. 대충 쳐도 1등이지?"
 그건 공부를 잘하는 애들에 대한 일반적인 편견이었지만, 어쩌면 실제로 경민은 '공부를 하지 않는데도 성적이 잘 나오는' 천재형이었을는지도 모른다. 압도적이라는 수사는 그러지 않고는 쉽게 붙지 않을 단어니까.
 "어제 밤 좀 샜어."
 내가 말했다. 그러면 건드리지 않고 내버려두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이번에는 그래도 모평이니까?"
 "그렇지 뭐."
 그러고나니까 남자애는 음~하고 말을 길게 빼며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별 탈 없이 말을 받기는 했지만 정작 나는 그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 반에 있는 애들 중 내가 아는 것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러고나서 모의평가가 시작되었다. 사실 언어는 별 문제가 없었다. 경민만큼은 아니라고 해도 나도 그럭저럭 공부에는 자신이 있었다. 처음엔 정신이 없는데 시험 같은 걸 칠 수 있을까, 그런 생각도 했지만 몸에 대한 생각을 무의식으로 밀어넣고 나니 의외로 그럭저럭 할 수 있었다. 그건, 어쩌면 몸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언어 시간이 끝나자 내 책상에 여럿이 달려들더니, 결국은 내 시험지는 어떤 여자애의 책상으로 넘어갔다. 정신이 없어 나는 교실 밖으로 나왔다. 시험 때만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거 참 대단한 인기다, 싶었다.
 "이거 정답이 왜 이거야?"
 내 시험지를 가장 먼저 채갔던 여자애가 그렇게 물었다. 그건 차라리 대답하기 쉬운 물음이었다.
 "정답 그거 아닌가?"
 "이것도 정답 아냐?"
 그정도 답을 해줬을 뿐이지만 아이들 사이에는 다시 한참 언쟁이 시작됐다.
 "오늘은 시험지가 깨끗하네?"
 여자애 하나가 지나가듯 그렇게 말했다.
 "그래?"
 경민은 눈에 띌 정도로 낙서를 하는 스타일이었던 모양이다. 시험지에 낙서를 한다 정도는 사소하다지만, 그런 습관의 차이들이 하나하나 쌓여서 남들에게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 때는 감당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내가 굳이 이경민이라는 남자애의 행동방식을 모방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일까? 내가 그랬던 것처럼 행동한다고 해서 내가 이경민이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어쨌든 바깥에 보이는 것은 이경민이지 그 속에 들어앉아 있다는 정소진이 아니니까. 그렇게 생각해보면 몸이 바뀌는 순간 나는 내 일부를 영영 잃어버린 셈이다.
 기분이 착잡해진 채로 나는 수리 시험을 쳤다. 사실 친다고 할 것도 없이 인문계의 수리는 어쨌든 자연계였던 나에게는 너무 쉬웠고, 그래서 나는 남는 시간 동안 책상 위에 엎드려서 점심시간 동안 경민과 해야 할 이야기들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점심시간에 2반에 경민이 찾아왔을 때, 그는 또 울상이 되어 있었다.
 "시험 망쳤어."
 그는 대뜸 그런 말부터 시작했다.
 "집중을 못 하겠어. 수리엔 처음 보는 문제들만 나오고……."
 그러면서 경민은 표정을 찡그렸다. 나르시시즘일까? 내겐 그가 그러는 모습이 어쩐지 귀엽게 느껴졌다. 사실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경민과 나 사이의 관계는 애매했다. 나는 그를 경민이라고 부르며 한 대상으로 생각하는 동시에 나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계속 생각하다보면 헷갈릴 지경이다.
 "그리고 몸이 이상해."
 "어디 아파?"
 "아니, 다리나 허리 같은게 느낌이 어색해서 그래."
 남자의 몸과 여자의 몸은 느낌부터 다른 걸까? 그렇지만 정작 나는 그런 어색함은 느끼지 못했고, 그래서 그건 그가 예민한 탓이 아닐까 싶었다.
 "화장실에도 못 가겠어."
 그는 계속해서 불만을 터뜨렸다. 아니, 불만이라기보다는 애처롭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
 "왜? 가면 되잖아?"
 "여자 화장실에 어떻게 들어가?"
 "넌 지금 여자잖아."
 나는 이걸로 한 방 먹일 수 있다는 느낌으로 그렇게 말했다.
 "넌 남자 화장실 들어갈 수 있어?"
 "못할 것도 없지."
 "변태."
 남자애가 여자애의 모습으로 변태라느니 하는 이야기를 하는 건 솔직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쨌든 너무 참지는 마."
 내 몸에 이상이 생기는 건 싫으니까. 그렇지만, 그가 평소 습관처럼 남자 화장실에 들어가는 것이 아닌 이상 별 문제는 없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질이 좋지 않은 녀석이라면 일부러 그런 식으로 행동해 나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을 퍼뜨리겠다고 들 수도 있겠지만,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는 모습을 보면 그는 그런 데까지 생각이 미칠 것 같지는 않았다.
 "빵이라도 사올게. 너, 지갑에 돈 좀 있더라?"
 만 원 짜리가 두 장 들어있었던가? 어차피 비상금일 뿐이지만, 천 원 짜리 세 장으로 살아가는 그가 보기에는 그렇게 보일는지도 몰랐다. 나는 교탁에 있는 의자에 앉아 매점으로 간 그를 기다렸다. 잠시 후, 그가 사들고 돌아온 것은 초콜릿 소보루 두 개와 사과주스 두 개였다.
 "이런 것도 다르구나. 진짜."
 내가 말했다.
 "다르다니?"
 "나는 초콜릿 별로 안 좋아해서."
 "그래? 미안해."
 "뭐, 상관은 없어."
 좋아하지 않는다 뿐이지 싫어하는 것은 아니니까. 나는 그가 가져온 빵을 받아들고 한 입 깨물었다.
 "생각해보면 다르다고 이상해할 필요는 없는데. 너하고 나는 남남이니까. 그런데, 내 손으로 그걸 사들고 왔다고 생각하니까 또 이상하네."
 내 손이라는 표현이 이상하긴 했지만, 그 외에 딱히 적당하다 싶은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사기 전에 물어볼걸. 별 생각 없이 샀거든."
 "내가 나한테 뭐 좋아하냐고 물어보는 것도 이상하지 않아?"
 "그거야 그렇겠지."
 그는 교탁 위에 걸터앉은 채로 빵을 삼켰다. 표정은 여전히 시무룩했다. 그런 모습은, 사실 그의 성정체성이 여성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그가 보기에 내가 하고 있는 모습도 그렇게 보이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정작 엉뚱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다리 너무 벌리고 있지 마."
 "아, 알았어."
 경민은 여전히 교탁 위에 올라앉은 채로 다리를 모았다. 그게 영 불편하다는 눈치였다.
 "그런데 몸이 안 돌아오면 어쩌지?"
 "바뀔 수도 있으니까 돌아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지만 바뀌는 방법을 모르니 돌아갈 수 있는 방법 또한 알 수 없었다. 어느날 일어나보니 몸이 바뀌어 있었다는, 카프카의 변신 같은 이야기가 벌어진 것이니까 말이다. 어쩌면 이건 가역적인 것이 아니라 비가역적인 것일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아직도 거창한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아니, 내심 그렇기를 바라고 있었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랬으면 좋겠는데……."
 "이대로 사는 것도 괜찮겠다 싶긴 한데."
 "무서운 소리 하지 마!"
 그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가 당황한듯 했다.
 농담처럼 한 말이기는 하지만, 어느정도 진심이 섞여있기도 했다. 그건 아직 내 몸이 바뀌었다는 것 때문에 특별히 큰 문제를 겪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동시에, 몸이 바뀌는 순간부터 내 주위에 흐르는 미묘한 기류가 달라졌기 때문인지 나는 기분이 조금 고조되어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역시 경민과 마찬가지로 복잡한 기분이었다고 밖에 할 수 없겠지만.
 "모르겠어. 이건 도대체……."
 누구 한 쪽이 상황이 더 낫다고 할 수 없었지만, 나는 여전히 울상인 그를 다독일 수밖에 없었다.
 점심시간에 만나자고 대강 약속까지 하고 이야기했지만 나아진 건 전혀 없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 자체가 철수가 사과 4개를 가지고 있는데 그의 기차가 7분 전에 떠났을 때 태양의 질량을 구하라는 질문과 전혀 다를 게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계속 같이 있는다고 해서 상황이 나아질 것 같지도 않고, 오히려 감정만 더 키우지 않을까 싶어 나는 그를 돌려보내고 다음 시험 준비를 했다. 점심을 제대로 먹지 않고 건너뛰었기 때문인지 외국어 듣기 시간에도 졸리지는 않았다.
 문제는 사회탐구였다. 나는 대충 경민이 수리 시험지를 받아들고 들었을 것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물론 그 또한 지금 과학탐구 시험지를 붙들고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테지만 말이다.
 우선, 나는 그가 무슨 과목을 선택하는지부터 알 수 없었다. 다들 친다고 하는 윤리 같은 것을 고르면 되지 않을까 싶어서 일단 그걸 체크하기는 했는데, 그러고나서가 문제였다. 아니, 오히려 아무도 치지 않는 과목을 고른다면 점수가 이상하게 나와도 다들 이해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것도 그 이후에 일어날 일들을 상상하면 막막했다. 이번 시험처럼 중요한 시험을 장난으로 쳤냐는 이야기가 분명히 나올테니까.
 어제까지만 했어도 인문계에 있는 한 남자애의 처지 따위는 내 고려대상이 아니었겠지만, 지금은 그의 문제가 동시에 내 문제가 되기도 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조화인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되는대로 답안지에 체크할 수밖에 없었다. 2시간이라는 시험 시간이 막막하기만 했다.
 채점 결과는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외국어까지는 평소 내 점수와 비슷했지만, 사회탐구는 찍은 것이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처참했다 - 윤리 같은 경우에는 가장 올바른 것 같은 답을 고르는 따위의 성의를 보였는데도 말이다. 나는 채점 결과를 몰래 제출하고 나서 도망치듯 교실 밖으로 나왔다.
 그 또한 상황은 비슷했는지, 내가 학교 밖으로 나왔을 때 그 또한 저 멀리서 황망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시험 어땠어?"
 내가 물었다.
 "처참했지 뭐."
 어쩌면 이런 일이 일어난 것도 시험 스트레스 때문인 게 아닐까? 모의고사 당일에 일어났다는 사실 때문인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실제로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몇 년 간의 기억이 사라졌다거나 하는 이야기도 있으니까, 비슷하게 설명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스트레스를 견디다 못한 그가 자연계의 전혀 엉뚱한 여자애의 의식을 가지게 되었다거나? 그렇지만 그것도 결국 재미있는 설명에 불과할 뿐, 그 이상이 될 수는 없었다.
 "이제부터 어쩔 거야?"
 내가 다시 물었다. 그러지 않으면 그는 계속 침묵을 이어갈 것 같아서였다.
 "몰라."
 우리는 학교 밖으로 나와 학교에 맞붙은 경사로를 걸어올라가기 시작했다. Y고는, 사실 특별한 것도 없는, 어디에든 흔할 것 같은 학교였다. 늘 공부하라고 강조하는 선생님들이 있긴 하지만 절반 쯤은 아예 관심이 없는 게 아닌가 싶은, 그런 학교. 그렇다고 해서 질이 좋지 않은 것은 아니었고, 그보다는 단지 그런 것들을 귀찮아하는 것 같은 아이들이 많은. 남녀공학이라 이런저런 말이 많기는 했지만 대부분이 뜬소문에 불과한, 그런 학교였다. 어쩌면 그런 평범함 속에서 경민이라는 남자애의 지위는 조금 '특별'했는지도 모른다.
 바깥은 아직 그렇게 어둡지 않았고, 대신 학교 저편의 산에 걸린 지는 해로부터 노란 빛이 이편부터 저편까지 비쳐오고 있었다. 나는 교복 바지 주머니에 손을 끼운 채로 여전히 말 없이 길을 따라 걸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을 수 있다는 것도 사소한 장점이라면 장점이었다. 경민은, 여자 교복의 불합리한 구조 때문에 그럴 수 없었기 때문인지 팔을 축 늘어뜨린 채로 따라오고 있었다.
 "기운 좀 내."
 내가 말했다.
 "넌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아. 어쩐지."
 "그냥, 네가 그러고 있으니까 같이 축 쳐져 있을 수 없어서 그런 거지."
 지금까지는 괜찮았지만, 집에 돌아가면 낯선 사람들이 거실에 앉아 나를 반기는 것을 바라봐야 할 것이다. 아니, 그런 것을 내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일까? 마치 지금까지 있었던 내 부모님이 사라지고 거기에 대신 낯선 사람들이 앉아 웃는 것 같은 괴리감, 어쩌면 두려움 같은 것. 물론 내 부모님은 내가 기억하는 내 집에 돌아가면 여전히 그곳에 앉아 계시겠지만.
 "일단 앞으로 어떻게 생활해야 될지 같은 것부터 생각해야 될 거 같아. 부모님한테 이야기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어."
 그건 또 자기 자식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엉뚱한 녀석이 메우기 시작한 것과 다를 게 무엇인가. 그렇지만, 어쩌면 그게 가장 나은 방법일는지도 모른다. 조금 더 생각은 해봐야겠지만.
 "내 몸 가지고 이상한 짓 하지 마."
 "안 해!"
 그 나이 남자애들의 여자에 대한 무궁무진한 호기심 때문에 엉뚱한 짓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지만, 그가 그렇게 짓궂어보이지는 않았고, 또 그런다고 해서 내가 감시할 수 있는 방법 또한 없었다.
 경민과 나는 곧이어 나온 갈림길에서 헤어졌다. 나는 아침의 기억을 더듬어 그의 집을 찾아갔다. 물론, 상상했던 그대로 그의 부모님은 나를 반겼고, 그건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불편하고 섬찟한 경험이었다. 그들을 '부모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은 더 견디기 힘들었고, 나는 단지 이 집에 내가 초대받아 온 것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겨우겨우 그 상황을 견뎠다.
 당연히, 그들과 마주하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아 나는 방 안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시간을 때우고 싶어 컴퓨터를 켜봤지만 암호가 걸려있었고, 암호 힌트는 미얄이 등장하는 극의 이름은?이라고 되어 있었다. 봉산탈춤인가 싶어 쳐봤지만 암호는 맞지 않았다. 그냥 농담삼아 써놓은 힌트인듯 했다.
 나는, 꼭 관음증 같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휑한 그의 방 안을 뒤져보기 시작했다. 한쪽에 문제집이 조금 쌓여있기는 했지만 그리 많은 양은 아니었다 - 이것도 편견인 것일까? -. 책장에는 소설들이 조금 꽂혀있었는데, 대체로 나도 이름 정도는 아는 작가들의 것이었다.
 그런 것들 이외에는 만화가 여러권 꽂혀 있었다. 만화에 그리 익숙하지 않았던 나는, 이런 걸 사모으는 사람도 있었네, 하는 생각으로 한 권 한 권 젖혀보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전형적인 만화 그림체의 표지에 반해 내용물은 소설인 것 따위도 있었다. 나는 별 생각 없이 그런 것들을 뒤적여보다가, 문득 이게 전교 1등이라는 아우라를 뒤집어 쓴 그와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나는, 그를 놀릴 생각으로 유난히 옷을 입지 않은 여자가 그려져 있는 책 한 권을 골라 가방 속에 집어넣었다.

 사실, 방 안에 틀어박혀 있을 때는 괴리감이나 불편함 따위가 덜했다. 그의 부모님과 마주칠 때와 같은, 내가 덧입고 있는 몸이 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어쩔 수 없이 확인하고 인정해야 하는 순간부터 꺼림칙함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본능적으로 그런 상황들을 피하려 애썼고, 오늘도 어제 그랬던 것처럼 일찍 집 밖으로 나와 학교로 향했다. 내가 언제 집보다 학교를 더 편하게 생각했던 날들이 있었나 싶어 조금 우스워졌다.
 나는 9반 앞에서 경민을 기다렸고, 그는 어제보다는 조금 나은 매무새로 계단을 올라왔다.
 "조금 나아졌어?"
 내가 물었다.
 "어제보다는 나아. 진정이 좀 됐어."
 그가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꼭 내가 다른 사람의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야."
 나는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가 나의 부모님과 마주했을 때의 곤혹스러움에 대해 상상했다.
 "그렇겠지."
 "넌 어떤데? 어제는 괜찮아 보이던데."
 "못할 짓이다 싶긴 해."
 "그렇지? 아무래도."
 그는 자신의 불편함이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고, 그렇게 확인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말했다.
 경민이 내 모습으로 눈 앞에 있기 때문일까? 어쩐지 나는 그와 마주하고 있는 것이 편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지나치는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복도에 늘어서있는 사물함들 사이로 몸을 숨겼다. 물론, 그건 그것 나름대로 영락없이 사귀는 한 쌍의 모습처럼 보일 위험이 있었지만 말이다.
 "나, 컴퓨터 비밀번호 좀 알려줘."
 내가 말했다.
 "비밀번호?"
 "컴퓨터는 써야 될 거 아냐."
 그는 바로 알려주려는 듯 하다가, 멈칫하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안 돼. 절대 안 돼!"
 "왜?"
 "어쨌든 안 돼!"
 "……19금이지?"
 나라고 그걸 짐작할 수 없을 리 없었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내 얼굴로 두 뺨을 새빨갛게 달구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이 재미있어 한쪽 손으로 숨겨 들고 왔던 어제의 그 책을 꺼내밀었다.
 "너 이런 책 좋아해?"
 "뭐, 뭐야!"
 그는 이전에라면 자연스러웠을 몸짓으로 팔을 뻗어 책을 낚아채려 했지만, 이전의 그의 키로 높이 책을 들어올리고 있는 내 팔을 잡아 챌 수 있을 리 없었다. 나는 그걸 허공에 들고 몇 번 휘저었다가, 이내 포기해버린 그에게 내밀었다.
 "……다른 사람한테 말하지 마."
 "말 안 해."
 어차피 이 몸을 가지고 떠들고 다녀봤자 내가 놀림거리가 될 수밖에 없으니까. 그는 그 책을 가지고 어쩔줄 몰라 하다가 품 속에 끌어안았다. 내 사물함 열쇠가 있을 테니까, 그 안에 넣어도 되긴 될 것이다.
 "어때, 네 삶을 살고 있다는 자각이 좀 들었어?"
 내가 장난치듯 말했다.
 "엄청나게 절실해졌어."
 그걸로 기분이 좀 나아졌을까? 놀리듯 말하기는 했지만 굳이 그걸로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고, 그의 기분이 조금이라도 풀렸다면 그것도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노트북이니까, 언제 가져오면 암호 바꿔서 줄 게."
 "19금 자료는 전부 지운 다음에?"
 그는 다시 말을 잇지 못했다.
 "안심할 수가 없어. 네가 내 비밀을 다 알게 될 거 아냐."
 "그거야 너도 그럴 거잖아."
 "기다려. 나도 네 약점을 찾아낼테니까."
 그는 창틀에 팔을 기댄 채 열린 창문 쪽으로 고개를 향했다. 여름이 다가오고 있다지만 아침 공기는 아직 시원했고, 그래서 거기서부터 불어오는 바람아 달아오른 뺨을 식히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했어. 어제 잠자리에 들 때는, 아침에 깨서 일어나보면 모든게 제자리로 돌아와있고, 내 방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그런 일은 안 일어나더라. 아마 너도 비슷한 생각을 했을 거야."
 나는 말로 대답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만약 이게 어쩔 수 없는 현실이고 앞으로도 계속 될 거라고 하면 어떻게 해야될까, 그런 생각을 했지. 물론 여러가지 불편한 게 많기도 할 테고, 어쩌면 영영 적응할 수 없을 것 같기도 하지만, 어쨌든 한 가지 확실하다 싶은 건 있어. 너하고 떨어지면 안 될 것 같다는 거. 그러면 꼭 내가 나를 잃어버릴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단어 그대로 말야. 거기다, 이런 걸 보면 널 그냥 내버려두면 안 되겠다 싶다."
 "감상적이야."
 "이런 상황에선 당연히 그런 거야."
 당연한 걸까? 그런 것을 따지는 건 차치하고라도, 나 또한 그의 말을 단지 웃고 넘기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잃어버린 반쪽이라는 말 따위가 수사가 아니라 현실이 되어버린 상황이었고, 나 또한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내 모습을 한 사람이 내가 모르는 곳에 떠돈다는 상상은 견디기 어려웠다.
 "그러니까, 사귀자."
 "잠깐만, 뭐?"
 이미 그는 나보다 상황에 더 잘 적응한 듯 했다.

comment (1)

창공의 마스터
창공의 마스터 12.09.09. 15:10
이것이 정말 까레니나 님의 글인가 싶어 아이디를 다시 확인해보았습니다만... 역시 까레니나 님이 맞네요. 아니면 까레니나 님의 몸에 들어간 다른 인격이 쓴 글일지도?!
인격교환은 식상한 소재처럼 여겨지지만, 언제나 흥미로운 소재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최근에는 하트커넥트가 인격교환을 다룬 좋은 예를 보여주었지요. 진부한 소재라도 어떤 식으로 변화를 주느냐가 중요하며, 그것에서 작가의 역량이 드러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일심이체는, 아쉽게도, 그러한 '변화'를 찾아보기 어려운 글이었습니다. (작풍은 확실히 변화했습니다만!) 아니면 이야기가 너무 짧아, 변화된 모습을 표현하기에 부족함이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작풍의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당황스러웠습니다만, 적어도 예전보다는 라이트노벨 스러워졌다는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것이 좋은 의미인지 나쁜 의미인지는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에 달린 것이겠지요. 수고하셨습니다. 앞으로도 건필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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