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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전쟁]실로(失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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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失路)



실로 오래간만이었다.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이따금 연락은 하며 지냈지만, 시간이 나질 않아서 만나지를 못했던 친구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한 번 보자는 말이 나왔다. 열두 시 정각에 유명 음식점에서 만나기로 했다. 시간을 정하고 슬쩍 고개를 들어 시계를 바라보니 열한 시 십 분 전이었다. 약속 장소까지는 걸어서 삼십 분 남짓 걸리는 거리. 그때까지 딱히 할 일도 없어서, 나는 곧장 밖으로 나갔다.

토요일 오전의 밖은 묘한 냄새를 품고 있었다. 평상시에 볼 수 없는 기묘한 풍경. 조용한 도로, 사람 없는 길.

약간 우중충한 날씨는 왠지 모를 우울함을 품고 있다. 손에는 우산이 없다. 하지만 금방 비가 올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걸었다. 거리에는 사람이 없고 도로에도 지나다니는 차가 없다. 6차선 도로의 신호등은 오랫동안 붉었다. 바로 앞부터 저 멀리 까지, 자동차는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그냥 건널까 아니면 기다릴까 하고 꽤 오랫동안 고민했다.

바람은 차갑고, 칼날처럼 손등을 엔다. 우중충한 날씨는 여전했다. 조금씩 걸어 나갔다. 그리고 갈림길에 섰다. 휴대폰을 열어 시간을 보니 열한 시 정각. 약속 시각까지는 한 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곧장 걸어간다면 20분 정도 걸릴 것이다. 너무 이른 시간에 나온 게 아닌가 싶었다. 괜스레 후회됐다.

그렇게 속으로 후회하던 도중,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생각해보니 이 동네에서 가보지 않은 길이 너무나 많았다. 여기에 산 지 10년이나 지났는데 말이다. 그래서 시간도 보낼 겸,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로 향했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기묘한 모험심이 새록새록 피어났다. 그 고양감이 추위를 잊게 해줬다.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새로움이 넘쳐났다. 지금이야말로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는 듯했다. 역시 사람은 걸어야 한다. 그리고 새로움을 느껴야 한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얼마나 걸었을까, 처음 보는 건물들로 뒤덮인 곳에서, 나는 길을 잃었다.

사실 조금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기도 했다. 이 나이를 먹고 내가 사는 동네에서 길을 잃다니 말이다. 수중에 돈도 어느 정도 있고, 휴대폰도 있고 하니 그렇게 겁낼 일은 아니었다. 물론 아직 시간은 충분하니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는 선택도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돌아가기에는 뭔가 아쉬웠다. 그래서 좀 더 깊숙이 들어가 보기로 했다. 가면 갈수록 익숙한 풍경이었다. 하지만 무언가가 생소했다. 아마도 어렸을 적에 부모님의 차를 타고 둘러봤던 풍경이겠거니 했다. 시간은 열한 시 삼십 분. 이제 슬슬 길을 찾아야지 싶었다. 하지만 눈앞의 무언가 때문에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길을 잃은 듯 한 꼬마였다. 나도 길을 잃은 처지이긴 하지만 도움을 주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었다.

"꼬마야, 혹시 길을 잃었니?"

꼬마는 당돌하게 말했다.

"저는 길을 잃지 않았어요."

그렇게 간결하고도 날카롭게 내뱉었다. 녀석 참 앙칼지다. 나는 애써 미소를 유지하며 말했다.

"그럼 여기서 무얼 하고 있니?"

"바람을 보고 있죠."

대답은 비수처럼 내 머리에 꽂힌다. 날카롭다.

"인간 같은 삭막한 것만 보고 있으면 정신세계가 황폐해져요. 인간은 바람처럼 자유로워야 해요."

……. 참 조숙한 아이다. 저런 아이들이 많아야 우리나라가 정말 많이 발전할 텐데 말이다.

"그런데 아저씨는 여기서 뭘 하고 있나요?"

"앗하하하하하하하하하!"

녀석!

그런 조숙한 어린애치곤 아주 멋진 개그였다. 한바탕 웃어주고 말했다.

"아저씨가 아니라 오빠라고 부르는 게 인간의 삭막한 정신을 타파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네, 그럼 여기서 무얼 하고 계셨어요?"

잠깐 주변을 둘러보았다. 공기는 끈적끈적하고, 무거웠다. 하늘은 우중충했다. 금방 비가 쏟아질 것만 같다.

"지금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야. 꼬마야, 정말로 여기에 바람을 보러 온 거니?"

녀석은 대답이 없다. 역시 예상대로다.

토요일 오전인 것을 고려하더라도 이곳에는 인기척이 너무 없다. 어린아이가 혼자서 올 만한 곳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 꼬마는 길을 잃은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도와줘야 하는 게 옳은 일이겠지만, 이렇게 직접 도움을 주려고 하면 이 조숙한 꼬마는 분명히 거절할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좀 더 저자세로 다가갔다.

"사실 말야, 오빠도 길을 잃었거든? 좀 도와주지 않을래?"

그런 내 말에 녀석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

"길을 잃었다구요? 혹시 여기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셨나요?"

"아냐 아냐. 여기서 10년이나 살았는걸?"

"저보다 1년이나 더 사셨군요. 그런데 10년이나 산 동네에서 길을 잃는다는 게 말이 되나요? 수상한데."

자신보다 1년 더 살았다는 말은 이 녀석이 아홉 살이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되겠지 싶었다. 내가 아홉 살이었을 때는 어땠는지 잠깐 생각해봤다.

……. 이 녀석 혹시 겉만 어리고 실은 아주 나이를 많이 먹은 게 아닐까.

아니 그런데 뭐가 수상하다는 거야?

"하지만 말야. 10년 동안 이 동네에서 살았다곤 해도, 내가 가본 적 없는 곳은 모르는 게 당연하다고."

"음, 그럼 아저씨는…."

"아저씨가 아니라니까."

"알았어요. 그럼 어쩌다가 여기까지 온 거에요?"

나는 녀석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이 꼬마를 도와주기 위해서 하는 말인데, 이렇게 설명하고 있으니 어째 내가 도움 받는 느낌이다.

사실 이런 꼬마는 별로 안 좋아한다. 꼬마는 꼬마다워야지 이렇게 조숙하면 어린애 특유의 귀여운 맛이 없다.

"음, 그럼 돌아가는 길은 아는 거예요?"

"그럼. 물론이지. 하지만 그렇게 돌아가고 싶지는 않아, 여기에 10년이나 살았지만 내가 모르는, 아직 안 가본 곳이 있다는 게 너무 분하거든."

어째 거짓말이 술술 나온다. 사실 이런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하지만 뭐 상관없다. 지금은 이 길 잃은 꼬마를 무사히 집으로 데려가는 게 먼저다. 그래. 어린애 눈높이를 맞춰주는 것. 내가 생각해도 나는 너무 어른스러웠다.

꼬마는 잠시 혼자서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이내 한쪽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럼, 걸을까요?"

즐거운 제안이었다. 대답 대신 고개를 살짝 끄덕여줬다. 나는 녀석의 손을 꼬옥 잡아주었다. 조그맣고 보드라운 손이었다. 그리고 우리 둘은 천천히 걸었다. 물론 뒤가 아닌 앞으로 나아갔다.

하늘은 점차 어두워져 간다. 하나 둘 물방울들이 똑똑 떨어지더니 어느새 빗줄기가 되고 이렇게 생각하는 와중에도 금세 굵어진 빗줄기는 이제 더는 우산 없이 버틸 수가 없는 정도가 되었다. 이대로 계속 비를 맞으며 걷기는 곤란해서, 비를 피할 만한 곳을 물색하던 도중이었다. 녀석이 손에 쥔 우산 하나를 내밀었다.

"같이 써요."

조숙한 녀석과는 맞지 않게 분홍색 바탕에 귀엽게 생긴 토끼 두 마리가 그려진, 어린애다운 우산이었다. 크기가 조금 작은 게 아쉬웠다. 어찌어찌 해서 이 녀석과 우산을 같이 썼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걸었다. 체격 차이가 꽤 났기 때문에 보폭은 상당히 차이가 났다. 그리고 오른쪽 어깨가 조금씩 젖어왔다.

우리 둘은 말없이 걸었다.

우중충한 날씨. 아무도 없는 거리. 차가운 공기. 찰박찰박, 하고 엇갈리며 들려오는 발소리. 그리고 기분 좋게 들려오는 빗소리.

시선을 살짝 내려 녀석을 바라봤다. 내 시선을 눈치 챈 녀석이 입을 열었다.

"왜요?"

녀석의 물음에 슬쩍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런데 넌 어쩌다가 길을 잃은 거야?"

녀석도 덩달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는 길을 잃지 않았어요."

"것 참. 그렇게 고집부리지 않아도 돼."

"정말로 아니라니까요?"

이렇게 고집부리는 걸 보니 어린애다운 면도 있다. 이렇게 보니 조금 귀여운 구석도 있는데?

"그러는 오…. 아니, 아저씨도 길을 잃은 건……."

"잠깐만, 너 일부러 그런 거지? 응? 오빠라고 하려다가 일부러 아저씨라고 한 거지? 맞지? 그렇지?"

"아뇨. 그럴 리가요. 실수에요, 실수."

귀엽다는 말 취소다.

그렇게 하하 호호 떠들며 걷던 중. 많이 익숙한 건물이 보였다. 우리 집 앞에 있는 상가와 비슷하게 생긴 건물이었다. 우리 집 앞에 있는 슈퍼와 비슷하게 생긴 슈퍼도 있었고, 우리 집 앞에 있는 정육점과 비슷하게 생긴 정육점도 눈에 띄었다.

순간 멈칫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디서 많이 본 곳인데.

"이제 우리 집에 다 왔어요."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너도 여기사니?"

"네? 오빠도 여기 살아요?"

이제 오빠라고 불러줬구나. 왠지 모를 감동이 밀려왔다.

"응. 101동 1408호에 살아."

"그것참 우연이네요. 전 101동 1308호에 사는데 말이죠."

"그래?"

정말 기막힌 우연이었다. 길을 잃었기에 만난, 아랫집에 사는 꼬마…….

그렇게 같이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리고 13층과 14층을 눌렀다. 엘리베이터는 차분히 올라갔다. 그동안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 속에서 딩동- 하는 소리와 함께 13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리고 녀석은 쫄래쫄래 엘리베이터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런 녀석의 뒷모습을 보며 손을 흔들어줬다.

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닫힐 즈음, 바깥쪽에서 녀석이 버튼을 눌렀는지 갑작스레 문이 다시 열렸다. 그리고 녀석이 말했다.

"다음에, 같이 바람 보러 가실래요?"

참 미묘한 말이거니 생각했다. 나는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언제라도 좋으니 우리 집에 와."

녀석도 해맑은 미소로 답했다.

실로 즐거운 우연이었다. 뭔가 중요한 일을 잊어버린 듯 했지만 별로 상관없었다.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현관문을 열었다.



이제 와서 밝히는 거지만, 나는 자살을 하려고 했었다.

2년 전 즈음. 부모님 두 분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친척이라곤 한 명도 없던 터라 나만 혼자 덩그러니 남겨졌다. 너무나도 슬펐고, 아무것도 싶지 않았다. 그저 죽고만 싶었다.

결국엔 스스로 삶을 포기하지는 않았지만, 의욕이 없는 건 여전했다.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유산과 보험금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무언가를 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하루하루를 연맹해가는 삶이었다.

그리고 그 꼬마를 만났다.

그 꼬마에게 무언가 자극을 받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궁금했다. 바람을 본다는 게 무슨 의미였을까, 그 꼬마는 왜 이렇게 조숙한 걸까. 그냥 단순한 호기심이 들었다.

지이이잉-

갑자기 휴대전화의 진동음이 들려왔다. 번호를 보니 저번에 만나기로 했던 친구였다. 그제야 약속을 깜빡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야, 너 어제 왜 안 나왔냐?]

"아, 미안. 깜빡하고."

[그래…. 하긴 네가 한두 번 이런 것도 아니고…. 뭐, 별일은 없는 거지?]

녀석은 그렇게 말하며 내 안부를 물어왔다. 그러고 보면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가장 의지 되던 게 바로 이 녀석이었던 것 같다. 내가 일방적으로 약속을 깼는데도 이렇게 내 걱정을 해주고 있다.

"어, 응."

[알았다. 그래도 다음번엔 꼭 만나는 거다?]

나는 녀석에게 알았다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것이었지만 참 이해심 많은 놈이다. 내게는 과분한 친구다.

녀석의 전화 덕분일까. 착잡해진 마음이 조금이나마 회복된 느낌이었다. 오늘은 왠지 기분 좋은 하루가 될 것 같다.

-딩동

전화를 끊은 뒤, 별생각 없이 TV를 보던 중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이 시간에 누구지.

나는 TV 소리를 줄인 뒤 현관문 앞으로 걸어갔다.

"누구세요."

"저에요."

왠지 익숙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목소리만으로는 누구인지 알 수가 없어서 나는 현관문에 박힌 외시경을 통해 문밖을 내다봤다. 외시경을 통해 본 현관문 밖에는, 시야에 닿으려 폴짝폴짝 뛰고 있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어제 그 꼬마였다.

무슨 일인지 물어보려다가 먼저 문을 열어주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현관문을 열었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나타난 것은 활짝 웃고 있는 꼬마였다. 간편하게 보이는 외출복을 차려입은 게 꽤 귀여웠다. 녀석은 내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참 예의 바른 아이였다.

"무슨 일이야? 혹시 바람 보러 가자고?"

녀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그건 다음에요."

그렇게 말하며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 펼쳐 보였다.

조그마한 메모장이었는데, 그 안에는 귀엽게 생긴 빵 그림이 그려져 있고, 그 밑으로는 줄글이 적혀있었다. 뭐지 저건.

"머핀을 만들려고 하는데, 집에 전자레인지가 없어서요. 혹시 집에 전자레인지 있어요?"

머핀을 만든다고? 그럼 저 메모장에 적혀있는 건 머핀 만드는 방법인가. 프린트한 것으론 보이지 않으니 아무래도 저 메모장에 적혀있는 건 이 녀석이 직접 적어 넣은 건가 보다.

그건 그렇고 전자레인지라면….

"어. 사용한 지 꽤 되긴 했지만."

"와, 정말요? 폐가 안 된다면 빌려 써도 될까요? 허락해주신다면 머핀 몇 개는 드릴 수 있는데 말이죠."

"그럼. 되고말고."

마지막으로 전자레인지를 사용했던 때가 언제인지 떠올려 보았다. 음. 잘 생각나질 않는데….

뭐, 조금 안 썼다고 고장 나거나 하지는 않았겠지.

"그런데 말야. 전자레인지로 머핀도 만들 수 있는 거야? 오븐 같은 게 필요한 거 아냐?"

"인터넷에서 찾아보니까 전자레인지로 머핀 만드는 방법이 있더라구요."

"음. 그래. 일단 들어와."



"우선은 재료를 사야 해요."

"어떤 거?"

녀석은 아까 내게 보여주었던 메모장을 다시 꺼내 펼쳐 보였다.

"여기에 적힌 걸 사면 돼요."

아까 그 페이지다. 머핀 그림 바로 아래쪽에 적혀있는 건 재료와 요리 방법이었다. 재료가 적힌 곳을 주욱 읽어보니, 밀가루, 달걀, 설탕, 우유 같은 '빵' 하면 당장 떠올릴 수 있는 것들이 적혀있었다.

"설탕이랑 우유 같은 건 여기에 있는데."

"음…."

내 말을 들은 꼬마는 혼자 무언가를 열심히 생각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조금 빌려 써도 될까요?"

별것 아닌 식료품이었지만 녀석은 정중하게 물었다.

"맛있는 머핀을 만들어 준다면."

"좋아요."

그렇게 말하고는 혼자서 재료를 체크하기 시작했다. 이건 필요하고, 저건 없어도 되고, 이건 있고….

"그럼, 저는 장을 보고 올게요. 잠시만 기다리고 계세요."

"어?"

"없는 재료는 사야 하니까요."

녀석 참 당차다. 이럴 때는 건장한 남자 한 명 정도를 짐꾼으로 데려갈 수 있는 게 여자의 특권인데, 이 꼬마에게는 그런 개념이 없나 보다.

"같이 가줄게."

내가 그렇게 말하자 녀석은 고개를 슬쩍 저으며 말했다.

"그러실 필요까진 없어요. 저 혼자서도 할 수 있어요."

아무래도 폐가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나 혼자 집에만 있어도 딱히 할 일도 없고 심심하니까 따라가는 게 좋을 것 같다.

"집에만 있으면 심심하니까. 짐도 내가 들어줄게"

그 말을 들은 꼬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럼 같이 가요."

이 녀석…. 내가 짐 들어준다니까 바로 승낙한 건가.

"자, 어서 가요."

꼬마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와 꼬마는 서로의 손을 꼭 잡고 밖으로 나갔다.



어제와는 다른 날씨였다. 추위는 여전했지만, 하늘은 깨끗했다. 비구름 같은 건 한 점도 보이지 않았다.

마트로 가는 길은 그리 멀지는 않았다. 나 혼자 걸어가면 오 분 남짓한 거리였지만, 이 녀석의 보폭에 맞춰 걸으면 아마 십 분쯤 걸릴 것이다.

그리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이었지만 이 녀석에게 궁금했던 것들을 물어보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머핀은 왜 만드는 거야? 누구 주려고? 아니면 혼자 다 먹으려고?"

"엄마한테 드리려구요. 요즘 많이 힘드신 것 같아서 말이에요."

참으로 기특하다. 아홉 살 난 딸아이가 직접 만든 머핀을 받는 엄마는 어떤 심정일까. 정말 기뻐하겠지. 혹시 감동해서 눈물을 보이거나 하지는 않을까.

참 가슴 따뜻한 이야기다. 그런데 아빠는? 아빠는 안중에도 없는 건가? 하긴. 저 나이 때, 아니, 상대적으로 조숙한 아이니까 정신연령은 중학생쯤 될까. 그럼 한창 사춘기일 나이지. 그래서 아빠랑 사이가 안 좋은 걸까.

후….

같은 남자로서 참 가슴 아프다. 힘내세요, 꼬마네 아빠.

괜스레 나까지 서러워지는 이야기는 됐고, 이번엔 다른 화제다. 보통 어른들이 다른 집 아이들을 만나면 줄곧 묻곤 하는 그거.

"학교는 재밌어?"

"음. 그럭저럭 재밌어요."

"공부는 잘해?"

"어느 정도요."

참으로 미묘한 말이거니 했다. 뭐, 말하는 것만 봐도 영특한 아이니 공부는 잘하겠지?

"나는 초등학생 때 항상 전교 1등만 했었는데."

물론 농담이다. 이 꼬마가 어떤 반응을 할까 궁금해서 꺼낸 농담이다.

"그러신가요."

응? 그런데 어째 반응이 좀 기분 나쁘다?

"뭐야 그 안 믿긴다는 표정은?"

"아뇨. 믿어요. 믿겨요. 오빠라면 분명 초등학생 때 전교 일 등을 했겠죠."

하…. 참 귀염성 없는 녀석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오빠라고 불러줬다. 왠지 기분이 좋아져서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쓱쓱-

보통의 꼬마였다면 분명 싫다고 칭얼댔겠지.

그렇게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우리는 마트에 도착했다.

카트를 밀고 다니기에는 재료가 너무 적었기에, 카트 옆에 있던 노란 바구니를 꺼내 들었다.

"먼저 밀가루를 사야 해요."

"그래. 어디에 있는지 알아?"

녀석은 저 멀리 보이는 코너를 손가락을 가리켰다.

"그럼 가자."

녀석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만면에 즐거운 표정을 띄우며 걸어갔다. 나도 녀석의 뒤를 따랐다.

도착한 곳에는 밀가루가 잔뜩 있었다. 강력분. 중력분. 박력분. 종류도 크기도 각양각색이다.

"뭘 사야 하는 거야?"

"박력분이요."

녀석은 그렇게 말하며 박력분이라고 적힌 밀가루 봉투를 집어 들었다.

"그런데 강력분, 중력분, 박력분 이건 무슨 차이야?"

녀석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잘 모르겠어요."

"그럼 박력분을 사야 하는 건 어떻게 알았어?"

"인터넷에 그렇게 나와 있었으니까요.

요즘 어린애들은 IT기기와 많이 친하구나….

나와 꼬마는 밀가루를 사고, 초콜릿도 사고, 버터도 샀다. 참 별의별 재료가 다 들어간다.

"그런데 초콜릿은 왜 산 거야?"

녀석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초코 머핀이니까요. 달콤하고 맛있을 거예요."

아무리 조숙하다곤 해도 입맛은 어린애인가보다.

바구니를 들고 계산대로 갔다. 꼬마는 주머니에서 작은 지갑을 꺼내 계산을 했다. 아홉 살짜리 어린애가 가지고 다니기에는 적지 않은 돈이었다.

"그 돈은 어디서 난 거야?"

꼬마는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용돈을 모은 거예요."

"헤에."

녀석 참 기특하다. 용돈을 모아서 어머니께 머핀을 만들어 준다니. 정말 복 받은 어머니다. …. 이렇게 생각할수록 꼬마네 아버지가 너무 불쌍했다.

계산을 마치고 우리는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갔다. 날씨는 조금 더 쌀쌀해졌고, 희뿌연 구름도 한두 점씩 눈에 띄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비가 올 것만 같았다.

"얼른 가자. 비가 올 것 같아."

"알았어요."

마트에 올 때와는 다르게 우리는 서둘러 집을 향해 뛰었다.



녀석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헐레벌떡 뛰어오느라 많이 지쳤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지친 건 나였다. 아무래도 운동부족인가보다.

"먼저 반죽을 해야 돼요."

주방에서 반죽을 하려고 했지만 둘이서 같이 반죽을 하기엔 주방은 너무나 좁았다. 그래서 거실에 있는 식탁에서 같이 반죽을 만들었다.

꼬마가 정해준 양을 대충 눈대중으로 잰 뒤, 밀가루와 달걀, 버터와 우유를 한데 모아 휘휘 저었다. 희멀건 반죽을 보니 내가 진짜 요리를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꼬마는 자기 반죽을 하다 말고 내 반죽을 슬쩍 보고서 한마디 했다.

"우유를 너무 많이 넣은 거 아니에요?"

깐깐하기가 마치 시어머니 같다. 확실히 내 반죽에는 물기가 너무 많았다. 하지만 그냥 인정하고 넣기에는 무언가 심심한 감이 있어서, 나는 슬쩍 농담을 던졌다.

"우유 많이 마셔야 키 크지."

내가 그렇게 말하자 꼬마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렇게 많이 넣으면 반죽이 제대로 안 되잖아요."

녀석…. 농담도 못하냐….

"그럼 밀가루를 더 넣으면 되는 거 아냐?"

"그렇긴 하네요."

꼬마는 그렇게 말하며 내 반죽에 밀가루를 넣어줬다. 그런데 실수를 한 모양인지 생각보다 많은 양이 들어갔다. 나는 조심스레 한마디 했다.

"이번엔 밀가루를 너무 많이 넣은 것 같은데."

"아뇨. 그게 적당해요."

이 녀석…. 자기 실수는 인정하지 않으려는 건가?! 뭐, 될 대로 되라지.

"뭐, 주방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반죽하기를 그만뒀다.

내가 세게 나오자 꼬마는 당황하며 말했다.

"아…. 잠시 만요. 우유를 조금 더 넣어야 할 것 같기도 하고…."

녀석은 그렇게 말하며 우유를 살짝 부었다.

저런 모습을 보니 참 귀엽기만 하다.

"이제 초콜릿을 잘라서 넣어야 해요."

"초콜릿? 아, 초코머핀이라고 했었지…."

"네. 원래는 코코아 가루도 넣으려고 생각했었는데, 오빠 말을 들어보니 너무 달 것 같아서 그냥 초콜릿만 넣으려구요."

초콜릿을 자르는 일은 간단했다. 그냥 손으로 조각내거나, 칼로 잘라 내거나 하면 됐다. 혹시나 녹을까 걱정되기도 했지만, 집 안 온도가 그리 높지 않아서 걱정으로만 그쳤다.

그렇게 자른 초콜릿 조각들을 반죽에 넣어 섞었다. 희멀건 반죽에 새카만 초콜릿 조각들이 듬성듬성 박혀있는 게 생각보다 어울렸다. 완성된 반죽을 보니 괜스레 뿌듯한 마음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새록새록 피어났다.

하지만 반죽만으로는 부족했다. 어서 머핀을 완성하고 싶었다.

……. 어째 꼬마보다 내가 더 들뜬 느낌이다.

"반죽은 다 끝났고. 이제 뭘 하면 되는 거야?"

"여기 유산지에 반죽을 넣은 다음,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리기만 하면 끝이에요."

"그렇구나."

고작 반죽만 한 것뿐인데도 생각보다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별것 아닌데도 상당히 많은 노력이 들어갔다. 문득 사람이 살아가는 것 또한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별것 아닌데도 막상 하려면 힘들다. 그래.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다들 힘들게 노력을 하며 살아가지. 이 꼬마도, 꼬마의 엄마도, 머핀을 못 받는 꼬마의 아빠도.

"저기 있잖아."

꼬마는 초콜릿 조각이 박힌 반죽을 정성스레 매만지다가 나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왜요?"

"이 머핀 완성되면, 아빠한테는 안 가져다줄 거야?"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주 잠깐 꼬마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가 다시 해맑은 미소를 띤 얼굴로 되돌아갔다.

마치 표정을 감추려는 듯이. 그것은 결코 어린아이의 행동이 아니었다.

"아빠는…."

무언가 심상치 않았다. 하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아빠는 하늘나라에 계세요."

아….

그제야 모든 게 정리가 되었다. 이 조숙한 꼬마는 고작 사춘기라는 이유로 아버지와 서먹서먹할 녀석이 아닌데.

어째서 고작 아홉 살짜리 꼬마가 이렇게 조숙했던 것인지 이제야 깨달았다. 아마도 아빠 없이 자라온 환경 때문일 테지.

아무리 힘들어도, 참고 견뎌내다 보니 저런 조숙한 성격이 형성된 게 분명했다.

나와는 너무나도 달랐다. 그게 너무나도 안쓰러웠다. 고작 아홉 살밖에 안 된 어린아이인데 이렇게나….

갑자기 감정이 격해지며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가까스로 터져 나오는 눈물을 참아내며, 나는 녀석의 손을 잡았다.

꼬마는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왜, 왜 그러세요?"

"일단 나가자."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왜요?"

"어디로든 가자. 놀이공원이든 어디든 일단 가자."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지금은 이 꼬마를 즐겁게 해줘야 한다는 생각 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왜요, 갑자기?"

"재밌을 거 아냐."

"하지만 머핀은…."

"머핀은 나중에. 갓 구운 따끈따끈한 머핀을 가져다 드려야 어머니가 좋아하시지."

"음…."

"어머니는 늦게 오시지?"

"네…."

"그럼 그때까지 만이라도 좋으니까, 밖에 나가자. 어디든 좋아,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자."

꼬마는 내 손에 이끌려 집 밖으로 나왔다.

어디로든 가고 싶었다. 이 울적한 기분을 달래려면 그 방법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길을 잃을 때까지 걷고 싶었다. 문득 그런 기분이 들었다.

나와 꼬마는 계속해서 걸었다. 맞잡은 두 손은 따뜻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조금씩 우울함이 씻기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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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피어스

하이피어스

디시 밖에서는 시크한 컨셉입니다.

comment (1)

창공의 마스터
창공의 마스터 12.09.28. 11:38
같은 상처를 가진 사람들끼리 서로 보듬으며 함께 치유하는 모습은 아름답죠. 하지만 <실로>는 그러한 결론을 드러내기 위한 과정이 그다지 극적이지 않습니다. '바람'과 '머핀'이라는 소재를 '길을 잃다'는 키워드와 연계시키는 고민을 좀 더 해보시기를 권합니다. 더불어 다음 응모시에는 장르적인 재미를 추구한 글을 출품해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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