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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장 난 세계의 시간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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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2:54 Oct 23,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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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구름
협업 참여 동의
프롤로그
가로수에 꽃이 만개한 봄의 하굣길. 수많은 아이들이 무리지어서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 속에서 모습을 숨기고 그녀의 뒤를 몰래 따라가고 있다. 쉽게 말해서 미행 혹은 스토킹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결코 변태 같은 게 아니다. 나에게는 정당한 명분이 있다. 설명하자면 이 이야기의 시작은 그러니까, 바로 그날이었다.


01. 거미줄 위의 나비는 무슨 꿈을 꾸는가

수업이 끝난 뒤의 텅 빈, 창문 사이로 들어온 석양이 붉게 물들이며, 줄지어진 책상들 사이로 그림자를 만들고 있는 그런 교실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선배를 발견했다. 선배는 창가 쪽으로 몸을 돌린 체 이렇게 말했다.

"쭉.... 이대로 고등학생일 것만 같았어. 이제 민우 너랑도 못 만나게 되겠지?"

선배의 목소리에서는 깊은 아쉬움이 느껴졌다.

그날은 선배의 졸업식이었다. 오늘이 지나면 모든 게 끝날 것 같았다. 만나고 싶으면 얼마든지 만날 수 있지만, 왠지 모르게 그런 기분이 들어서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고백하기로 마음먹었다.

"저기 선배."

하지만....

"같이 사진 찍으실래요?"

결국, 이런 결말이다.

그날 밤 한참을 침대에 멍하게 누워서 생각했다. 만약 그때 선배에게 고백을 해버렸다면 어떻게 됐을까? '분명히 차였겠지.'라고 생각하니 약간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았지만, 얼마 안 가 더욱 우울해지게 할 뿐이었다.

선배에게 이끌려서 평소에 관심에 없던 동아리에도 가입했다. 하지만 나는 그저 선배와 같은 공간에 있는 것 만으로 만족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고백할 용기 따위는 없었던 것이다.

왠지 모르게 피곤한 기분이 들었다. 자자. 자고 모두 잊어버리자 그렇게 눈을 감았다.

이상한 꿈을 꾸었다. 그것은 마치 다른 이의 기억 같았다. 그는 어릴 적 부모의 이혼으로 아버지와 단둘이 살게 되었다. 어머니는 머지않아 젊은 남자와 재혼하였다. 아버지와의 관계도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학교에서는 항상 외톨이였다.

그의 눈에 비친 세상은 흑백이었다. 기쁜 것도 슬픈 것도 화나는 것도 없는 무관심의 세계였다. 단지 타인의 기억일 뿐인데 어째 선가 그의 기분을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계속해서기억들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흘러갔다. 그러던 중 어디선가 희미하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는 점점 선명해 졌고 이내 완전히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오빠 일어나! 계속 그렇게 자다간 빙하기가 온다고!"

눈을 뜨자 여동생이 배 위에 올라와서 멱살을 잡아 흔들고 있었다.

"으, 아침부터 뭐야. 일단 이것 좀 놓고 말하지?"

아직 잠에서 덜 깼는지 목이 잠겨있다. 동생은 미간을 찡그리면 말했다.

"오빠야말로 뭐야. 자기가 깨워달라고 했으면서."

"내가 깨워달라고 했다고? 언제?"

이때 뭔가 이상한 느낌을 느꼈지만 단순히 잠이 덜 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어젯밤에 휴대폰을 잃어버렸다면서 대신 깨워 달고 했잖아. 한대 정도 맞으면 잠이 깨려나?"

내 질문에 동생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말을 들으니 확실하게 잠이 깨긴 했지만 그때, 동생의 머리카락의 길이가 눈에 띄게 짧아진 것이 보였다. 어깨를 덮던 머리카락이 지금은 단발머리가 되었다. 거기에 아직 방학 중인데 교복을 입고 있다.

"너, 언제 머리 깎았어?"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제야 뭔가 확실하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너 지금 몇 살이지?"

올해로 열여섯일 것이다.

"열다섯인데, 오빠 오늘 좀 이상해."

머리가 어지럽다. 내 기억이 맞다면 휴대폰을 잃어버린 건 작년 봄 방학이 끝나기 바로 전날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여동생이 멱살을 잡고 깨운 것이 어렴풋하게 기억났다. 만약 그렇다면.... 그때,갑자기 동생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얼굴이 점점 가까워진다. 그리고 동생은,

"흠, 열은 없는 것 같은데...."

이마를 맞대고 열을 제는 시늉을 했다.

"알았으니까 그만 좀 비켜!"

동생의 얼굴을 손으로 밀었다. 동생은 그대로 중심을 잃고 '갹' 소리를 내며 침대 밑으로 굴러떨어졌다. 그리고 나는 침대에서 비틀거리며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설 때까지 채 몇 분도 걸리지 않았다.

자전거의 페달을 있는 힘껏 밟으며 내달렸다. 낡은 자전거는 비명을 지르듯이 삐걱대는 소리를 냈지만, 조바심에 페달을 더욱 빨리 밟았다. 아진 공사 중인 고가전철 밑을 지나서 학교의 정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학교에 도착한 뒤, 자전거는 아무렇게나 세워둔 채 곧장 중앙 계단을 올라가 3학년 교실 앞에서 멈춰 섰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숨을 가다듬어도 심장은 계속해서 요동쳤다. 결국, 그대로 문을 열고 교실 안을 들여다 보았다. 심장이 금방이도 터질 것 같았다. 나는 그곳에서 선배를 발견하고 말았다.

가느다란 턱선과 부드러운 이목구비, 허리까지 오는 긴 양갈래로 땋은 머리에 분홍색 뿔테안경을 쓰고 있는 틀림없는 선배였다. 선배는 반 아이들에게 둘러싸여서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표정은 평소처럼 온후한 옅은 미소였다.

그때, 갑자기 선배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나는 무의식적으로 벽 뒤로 몸을 숨겼다. 그리곤 다리에 힘이 풀려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혹시 꿈이 아닐까? 아침마다 그런 생각을 한다. 하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평소와 다름없이 엉망이 된 머리를 정리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교복으로 갈아입고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는 것을 마지막으로 자전거를 타고 학교로 향한다.그날 후로 한 달 가까이 지났지만 변한 거라곤 새로 산 휴대폰 기종일 뿐이다. 똑같은 생활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교실에 들어서자 평소와 다름 없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내 자리는 교실 맨 뒤의 창가 자리다. 그 앞에는 어김없이 최진혁이 아침부터 책을 배게 삼아 낮잠을 자고 있다. 누렇게 탄 피부에 스포츠머리가 어울리는 나 같은 허약체질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인간이지만, 언제부터인가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는 사실에 나도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책상 의자에 앉아서 창밖을 보았다. 오늘의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 같은 우중충한 회색이었다.

그때, 반 아이들이 어수선하게 떠드는 소리 사이로 누군가 교실의 미닫이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무심결에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처음 보는 여자가 있었다. 작은 체구에 어딘가 싸늘한 인상을 주는 무표정한 소녀였다. 다른 반 학생인가? 하지만 그녀는 교실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와서 내 옆자리에 의자를 빼고 앉았다.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곁눈질에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그 후로는왠지 머쓱해져서 고개를 숙인 체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어때?"

"뭐가?"

"한겨울 말이야. 꽤 귀엽게 생기지 않았어?"

최진혁이 능청스럽게 말했다.

한겨울. 그녀의 이름이다. 그녀의 자리이자내 옆자리는 항상 비어있었다. 한겨울은 지난 2학년 중 한번도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아니,나오지 말아야 했다.

"시끄러워, 넌 그냥 계속 자는 그래?"

그때, 교무실에 불려 갔던 한겨울이 돌아왔다.

그녀는 무덤덤하게 앉아서 말없이 수업준비를 했다.

원래부터 말이 없는 건지 그녀는 도통 말을 하지 않았고 쉬는 시간마다 어딘가 사라지곤 했다. 결국, 나는 점심시간에 혼자서 밥을 먹고 있는 그녀 먼저 말을 걸어보기로 했다.

"저기 같이 앉아도 될까?"

겨울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겨우 들릴 정도로 작게 '응'이라고 대답했다. 일단 여기까지는 좋았지만 나도 어지간히 소심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한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사이, 뜻밖에도 먼저 입을 연건 그녀였다.

"만약에...."

"어? 방금 뭐라고 했어?"

갑자기 당황해서 횡설수설이다. 겨울은 다시 무덤덤하게 말을 이어갔다.

"매년, 매일 똑같은 생활을 한적 있어? 그렇다면 어떤 기분일 것 같아?"

이상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내 생각을 사로잡은 건 그녀의 목소리가 감미롭다는 것이었다. 좀처럼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까울 정도였다. 한동한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 그녀가 멀뚱멀뚱 쳐다보며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게.... 잘 모르겠는걸."

머리를 긁적이면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어차피 만약이잖아. 한번 생각해봐."

왠지모르게 강압적이다.

"글세 역시 지루하겠지. 그런데 이런 건 왜 물어보는 거야?"

"마땅히 할 말이 없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한겨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그런 질문을 했을까. 의문은 점점 커져서 그녀는 무언가 알고 있다는 것이 확신으로 변해갔다.종례시간에는 그녀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차서 담임의 말은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담임의 말이 끝나고 반장이 일어서서 경례를 시킨다. 마침내 수업이 전부 끝났다.

아이들이 각자 떠들썩하게 교실을 빠져나간다. 나는 잠시 가만히 앉아서 기다렸다. 한겨울이 문밖을 지났을 때 나도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심장은 그렇게까지 떨리지 않았다. 한번은 빨강 신호등에서 무단횡단을 하다 차에 치일 뻔 하기도 했지만 어떻게든 그녀와 거리를 유지하면 뒤를 따라갔다.

한겨울은 점점 인적이 드믄 곳으로 향했다. 약간 불안한 기분이 들었지만 발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불안보다 강한 호기심이 발을 움직였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는 마을의 시내와 시골 사이에 경계처럼 뚫려있는 좁은 터널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망설이는 것도 잠시. 놓칠세라 나도 따라 터널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터널 안에서 그녀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당황해서 터널 주변을 살펴 보았다. 아직 낮인데도 터널 안은 제법 어두웠다. 그때, 교복 주머니에서 휴대폰의 진동이 울렸다. 무음 모드라 소리는 나지 않았다. 엉거주춤 휴대폰을 꺼내는 순간, 뒤에서 무언가가 시멘트를 긁는 듯한 소리가 났다. 차마 뒤를 돌아보기 전에 뒤통수로 강렬한 충격이 밀려왔다. 나는 그대로 바닥에 힘없이 쓰러져 버렸다.

눈앞에 떨어트린 전화는 아직도 받기를 기다리며 울리고 있었다. 잠시 후 가느다란 손이 다가와서 휴대폰을 가져갔다. 곧이어 통화 버튼을 누르는 소리가 들리고 수화기 넘어로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민우니?"

목소리의 주인은 선배였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나는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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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구름

둥실둥실

comment (2)

Rogia
Rogia 12.10.23. 23:33
담임이 '단임'으로 오타 났네요. 타임리프 소재글이네요 기대됩니다ㅎㅎ
구름
구름 작성자 Rogia 12.10.24. 00:47
오타지적 감사합니다. ㅎㅎ
권한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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