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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1:24 Apr 03,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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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워너비
협업 참여 동의
나는 스스로 소박한 인간이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지만, 그렇다고 욕심이 목구멍까지 들어찬 인간도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좀 소박한 편에 들지 않을까, 싶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지하철좌석에 앉아서 꾸벅꾸벅 조는것도 안되는거냐고."


머리를 감싸쥐고 조그맣게 푸념해본다. 별의미는 없지만. '이번 역은 서면, 서면입니다'라는 안내음에 내 목소리가 덧칠된다. 진짜 싫다. 이 상황도, 이 상황을 만들어내는 나도. 대체 무슨 원수가 졌다고 넓디 넓은 서울도 아니고, 대한민국 제2의 도시라고 박박우기고는 있지만 아무도 신경안쓰는 부산 지하철에서 마법사씨랑 딱 마주치는 걸까.

'스크린도어가 열립니다'라는 소리와 함께 치익 하고 출입문이 열린다. 맞은편을 한 번 쳐다보고 시선을 문쪽으로 던진다. '자리를 옮기지.' 마법사씨도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피차 눈에 띄는건 곤란하니까. 아무일도 없는 것 처럼 일어서서 열차에서 내린다. 마법사씨 쪽도 내 뒤를 따랐다. 두 사람정도를 사이에 두고 계속해서 걷는다. 교묘하게 중간에 끼인 사람이 빠질때마다 발걸음을 늦춰서 최소 2명 정도를 사이에 두고 걷는다. 센스 좋은걸, 안좋은 소식이다. 하기야 부산한복판에서 저렇게 티를 내고 돌아다니는 걸 봐선 보통은 아니겠지.

북적거리는 개찰구에서도 거리는 별 문제없이 유지되었다. 진짜로 센스 하나는 끝내주는구만. 회복한지 한달도 안됐는데, 또 저런거랑 박터지게 싸워야 한다니 진짜 싫다. 별의미 없는 불평을 중얼거리면서, 여기저기 기(氣)를 휘돌려본다. 좋아, 60%정도인가. 마법사씨 쪽에서 움찔하는게 느껴질 정도였지만, 선공이 아니라 준비운동이라는 걸 금새 깨닫고는 거리유지에 신경을 돌렸다. 와, 감만 좋은게 아니라 경험도 꽤 되나보네. 점점 더 싸우기 싫어진다. 도망칠까.



이런저런 쓰잘데기 없는 생각을 하는새에 도망치지도 못하고, 공사가 중단된 것 같은 공사판에 도착했다. 보폭으로 따지면 한 스무걸음쯤 되는 거리인가. 맞은편의 마법사를 바라본다. 평범한 옷차림이지만 왠지 눈에 띄는 여자다. 허리를 넘긴 긴 생머리를 늘어뜨리고, 니트 스웨터와 청바지 차림의 여자는 흑갈색 눈동자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로브차림에 지팡이를 든 노인같은 걸 바라진 않았지만, 이건 좀 거북하다. 싸움 상대로는 정중하게 거절하고 싶을 정도다.


"어느 계파지?"


얼래, 이건 예상외의 질문인데. 계파? 저 마법사 아가씨 지금 나를 동류로 착각하는건가? 경험많다는 추측 전면철회다. 계파 운운하는 걸로 봐선 한국계 영국인 뭐 그런건가? 조사를 전혀 안하고 왔구만, 그런데 한국에 되게 유창하네.




"아직 계파같은걸 운운할 짓 한 기억없는데. 그리고, 보통 그런걸 물을때는 자기 계보부터 밝히는게 예의 아니었던가?"


"발렌시아 가, 13대 당주 메린 발렌시아."


오오, 이야기가 통했어. 발렌시아인지 뭔지 전혀 모르는 이름이지만. 아니, 성인가? 어쨌든 선공말고 말이 대답이 돌아온건 처음인거 같다. 놀려먹은 거 같아서 좀 미안해지는 걸.



"안타깝지만 계파같은 건 없어. 이름정도는 얘기해 줄 수 있지만. 이연후, 이연후다. 발음하기 힘들면 그냥 야 라고 해도 돼. 그런데 통역 마법이야?"


"계파가 없다고?"

"응, 없어. 애초에 마법사가 아니니까."


미간을 찌푸린채로 다시 눈에 힘을 주는게 별로 믿고 싶지 않다는 눈치다. 이제 치고받는건가. 말이 통하는 마법사를 보는 것도 처음이고, 꽤나 예쁘장하게 생기기도 했고. 괜찮은 추억거리로군. 자, 이제 일하자고 일.


"마법사가 아니라면 네 몸속의 마나는 대체 뭐지? 그리고 통역마법이 아니다. 순수 내 노력이다."


어라? 공격안하는건가? '마법사 이외의 존재가 마법사에 대해서 알고, 내 정체도 알고 있다니. 입막음을 해야겠군. 죽어라!'가 당신들 레파토리 아니었나요. 


"마법사만 꼭 마나를 다루라는 법은 없지. 왜 가끔 마나를 타고 나는 애들을 당신들이 잡아다가 실험체로 쓰기도 하잖아."



나름대로 도발한 건데 어째 반응이 요상하다. 나라면 일단 선빵 때리고 봤을텐데, 뭐지 이녀석?



"그런 불명예스러운 짓을 하는 마법사들도 없지않다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모든 마법사들이 그런건 아니야. 그 정도까지 알면 너도 알텐데."


칼에 찔린 듯한 표정으로 입술을 씹는건 내가 바라던 반응이 아닌데. 내가 나쁜놈 된거 같잖아. 그냥 차라리 공격해줬으면 하는데. 멍하니 벙쪄있는 나를 무시하고 마법사씨는 말을 이었다. 아니, 내가 바라는건 그게 아니라니깐.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런 사도를 걷는 마법사들을 처단하기 위한 집행기관이 있고, 가문에서도 가문의 제자가 일탈행위를 하면 책임지고 교정에 들어가기도 한다. 용서받기 힘든 과오를 저지르는 자들도 있지만, 그런 자들만 있다고 생각하진 말아줬으면 좋겠군."



대체 뭐하는 마법사지, 저녀석. 혹시 협회에서 파견한 '마법사 홍보대사'쯤 되는건가? 이상한 말 그만하고 그냥 치고 받자니까.


"내 질문이 마법사 중심적인 발언이었다는건 인정하지. 기분나빴다면 사과하겠다. 네 체내의 마나는 마법사든 아니든 굉장한 노력의 산물이겠지. 그래, 그렇다면 내 질문이 기분나쁘게 들렸겠군. 사과하지."


아니야, '마법사 홍보대사'일리가 없어. 협회가 돌지 않은 이상에야 저런 녀석을 지부도 없는 머나먼 동토(東土)에 저런 멍청이를 혼자 '홍보대사'로 보낼리가 없지. 그럼 뭐하는 녀석이지 이녀석?


"아니, 뭐. 딱히 기분나빴던 건 아닌데. 기공(氣攻)이라는 거다. 너희가 말하는 '동양의 신비'같은거라고 생각하면 쉬워."


내 머리도 어떻게 된거 같다. 흡족해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꼴을 보면서 만족감을 느끼고 있으니까. 바보는 옮는다더니 진짠가보다.


"그렇군, 말로만 들어봤지. 이렇게 보는 건 처음이다. 그러고보니 마나의 움직임이 굉장히 매끄럽군. 집중하지 않으면 느끼지 못할 정도야."




우와, 웃는 얼굴로 칭찬까지 받았어. 진짜로 슬슬 공격해주지 않으면 의욕을 완전히 상실할 것 같은데. 아니, 이미 싸울 마음 같은건 흔적도 찾아볼수가 없지만.



"그건 그렇고, 발렌시아가 당주께선 무슨일로 협회지부도 없는 동토(東土)에 오신걸까나. 관광차 온것 같지는 않은데. 모르긴 몰라도 당주라는 사람이 호위도 없이 혼자서 그것도 '나 마법사요' 광고하면서 돌아다녀도 되는건 아니텐데."



'대답여하에 따라서 공격한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솔직히 이녀석 입에서 내가 공격할만한 껀덕지가 나올것 같지는 않다. 그냥 의례적인 질문이다. 대답을 해도 상관없고, 안해도 상관없다. 응, 무슨 대답이 나오든 간에 이제 난 내 갈길 갈거다. 이런 무해한 녀석이 부산 한복판에서 무지 위험한 마법실험을 감행할 마법사라고? 대체 난 뭐한거지. 무지 피곤하다.


"가문의 비보가 유출되어서 말이지. 그 비보가 좀 골치아픈거라서 회수차 내가 직접 온거다. 이런일에 가문의 제자나 구성원들을 보내는건 당주로서 실격이지."


예, 당주님께서는 내 예상을 뛰어넘는 바보셨습니다. 바보냐,부외자한테 그것도 방금전까지 치고받을 준비를 하던 남한테 그런걸 술술 부는거냐고! 아니 뭐, 지금 생각해보면 치고받을 준비를 한건 나뿐인 것 같지만. 발렌시아 가문인가 뭔가 하는 놈들은 다 이런걸까. 아니면, 당주는 가문 최고 바보로 뽑는다던가 뭐 그런걸까. 



"아니, 다 좋은데. 그걸 생판 남인 나한테 이야기하는 이유는?"

"음, 아무래도 유출된 곳이 이 나라라는걸 듣자마자 출국한거라서 말이야. 정보가 부족해도 너무 부족하더군. 협회 지부도 없다보니 정보를 제공받기도 힘들고 말이야."



"이곳에도 마법사는 있을테니 적당히 거래를 하면 되겠지 라고 생각했지만, 서울이라는 곳에서도 마법사 구경하기가 어렵더군. 어쩌다 발견해도 접촉을 시도하면 기겁을 하고 도망쳐버리고 말이야."


정말 곤란했지, 라고 고개를 내젓는 바보 당주님. 그야 여기 있는 마법사놈들은 도망자이거나 도망자의 자식이니까. 이도저도 아니면 제대로 미친놈이거나. 아니, 그런데 내 질문은 무시하시는 겁니까.


"유출된 아티펙트의 특성상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야 사용할 수 있는거라서 좀 여유를 부렸지만, 이제 슬슬 타임리미트라서 말이지."


당황해선, 일단 찾아나서는 거다! 하고 돌아다니고 있었던거지. 라니, 뭘 기쁜듯이 말하는거냐. 바보는 행복해서 좋겠구나. 나도 행복해지고 싶다.


"2호선을 세번쯤 왕복하고는 안되겠다 싶어서 3호선으로 갈아타려고 하고 참이었지. 정말로 마법사 구경하기 힘들더군. 어쩌다 마나가 느껴져서 찾아가보면 부유령에 씌인 사람이었고 말이지."


아니 왜 그런 시시콜콜한 사정이야기를 하는건데. 잠자코 듣고 있는 나도 나지만. 어라? 잠깐만 이거 꼭......



"하지만 헛수고는 아니었던 것 같군. 본토의 수준높은 마법사를 만났으니 말이지. 아, 마법사가 아니라고 했었지. 이거 실수했군. 사과하지. 아무래도 고정관념이란건 무섭군."

"아니, 사과할 필요까진 없는데. 말하자면 난 권사랑 마법사 중간쯤 되니까."


"넓은 아량에 감사한다. 그리고 그 넓은 아량에 좀 더 기대고 싶군."

"어?"


어? 잠깐만, 어? 왜 갑자기 급전개죠? '부탁합니다'라고 하면 '허나 거절한다'하고 멋지게 뒤돌아서서 돈가스나 사먹을 생각이었는데요. 당주님? 90도 인사는 또 어디서 배우셨나요. 보는 내가 다 속이 쓰린뎁쇼. 우와, 머리카락이 땅에 닿고 있어.


"부탁한다. 일단 아티펙트가 기능하기 시작하면 늦어. 아무런 관계없는 자들이 피해를 입을거다. 다짜고짜 이렇게 부탁하는게 말이 안된다는건 알지만, 부탁한다."

"......"



90도로 꺾인 저 허리를 손수 펴준 다음에 다림질 해주고 싶은 기분이다. 누가 저 바보 당주한테 90도 인사같은걸 가르친거냐고, 이건 거의 협박수준이잖아!


"고개들어. 당주라면서, 한 가문의 대표가 아무대나 고개숙이는 게 아니야."


내 돈가스, 내 평화로운 점심아 안녕. 내가 내밀었지만 정말 잘라버리고 싶은 손이다. 이런건 만화주인공이 도맡아서 해야하는 거 아니냐고, 어디에 쳐박혀있냐 빌어먹을 주인공자식!


"당주이니 이럴 때에 고개 숙여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감사한다. 정말로 오늘은 운이 좋군. 이후에 일이 어떻게 되든 발렌시아가의 이름으로 사례하도록 하지."


아니, 실패하면 뒤도 안돌아보고 도망갈건데. 그건 그렇고 내 손 슬슬 놔줬으면 좋겠다. 너무 오래 잡고 있다고. 부드러워서 기분나쁘거나 하진 않지만, 계속 이러고 있을건가.


"메린 발렌시아다. 잘 부탁한다."


진짜 중증 바보였구만, 뭐가 좋아서 실실 웃는거야. 외부인한테 손벌릴 정도로 몰려있으면서, 사람좋게 웃고 있다. 바보같다. 이 바보당주도, 손을 맞잡고 어쩔수 없이 웃고 있는 나도. 어쩔수 없구만, 나도 바보니까. 아티펙트인지 뭔지 후딱 찾은 다음에 이녀석 집으로 반송시켜 버리는게 최선이겠지. 그래, 그게 최선이야.


"이연후다. 너무 큰 기대는 마."


손을 맞잡은채로 환하게 웃는 모습이 마법사답진 않지만, 이런것도 괜찮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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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정하는게 제일 힘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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