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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복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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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2:31 Apr 10,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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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라세
협업 참여 동의


수영복 전쟁

 

"다 끝이야."

끝이야으야으야으야으... 야으야으야으야으...

큰 언니의 느닷없는 한숨 섞인 목소리가 좁은 방안을 이리 맴돌고, 저리 맴돌고 하다가 내 귀에 착하고 내려앉았다. 그것은 강한 여운이 남는 목소리였다. 나는 딱 15초간 큰 언니의 말을 생각해보다가, 15초 후에 그것을 깨끗하게 잊기로 했다. 도무지 지금과 같이 급박한 상황에 신경 쓸 만한 말이 아니다.
그것은 마지막 한 조각남은 치킨의 주인을 결정하기 위해, 그다지 조용하지 않는 암투를 벌이고 있던 큰 언니를 제외한 나의 두 자매들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먹고 살기가 막막해지면, 친지든 친구이든 자매든 간에 서로에게 관심이 없어지는 것이 사람이라는 동물이 아닐까.

둘째 언니가 지나가는 듯이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언니."

과연 고수라고 불리 울만하다. 큰 언니를 향해서 질문을 던지면서도, 치킨의 마지막 조각에 대한 일말의 경계심도 흐트러지지 않고 있다. 으르렁 거리듯이 질끈 깨물고 있는 이빨도 그대로. 동생이라는 탈을 쓴 두 하이에나들에 대한 적개심도 그대로. 티끌만큼의 방심도 용납하지 않는 치킨 헌터계의 스페셜 리스트다.

"......"

그러나 큰 언니는 대답도 없이, 침울한 얼굴로 다시 맥주를 입에 가져간다.
뭔가 이상했다. 문득 내 마음을 건드리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오늘 저녁,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호탕한 아저씨처럼 걸걸하게 웃으며, 치킨 두 마리와 맥주 일곱 병을 내려놓은 큰 언니의 당당했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지금의 큰 언니는 온 몸의 기라는 기는 다 빠져 나간 공기 빠진 빨간 튜브와 같은 모습으로 방 한구석에 놓여 있을 뿐이었다.
이 급격한 품격의 변화는 도대체 뭘까. 알 수 없다.
내 마음을 건드리는 것이 도대체 뭘까. 알 수 없다.
주변의 두 자매들 역시 뭔가 걸리는 것이 있는 표정이었다. 물론, 급하게 치킨을 흡입하다가 닭 뼈가 목에 걸린 막내는 제외하고. 근데 저거, 병원 가봐야 되는 거 아냐?

"아."

떠올랐다.
그것은 최근에는 생소하던, 그러나 익숙한. 그런 역설적인 말을 가능하게 하는 일종의 공식과도 같은 행동 패턴이다. 나는 알고 있었다. 큰 언니가 어떤 상태일 때 저런 모습을 하는지. 무의식적으로 나는 그 결론을 내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던 것 같다.
그것은 하나의 전쟁이 시작된다는 의미니까.

나는 여차하면 둘째 언니의 얼굴에 뿜어서 그녀를 제압하기위해, 머금고 있었던 맥주 한 모금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크으. 목구멍이 엄청나게 따갑다. 젠장.
내 결론이 사실이라면, 남아있는 치킨 조각 따위는 문제가 아니었다. 물론, 그 기름기 번들번들한 친구는 충분히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자격을 가지고 있지만, 나는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할 수 있는 결단력 있는 사람(자칭)이다. 머릿속에서 5분 전 만해도 찬양해 마지않던 친구를 싹 지워버리고 마음을 다 잡았다. 마침내 그 순간이 온 것이다.

 

큰 언니가 남자친구와 헤어졌다.

어떤 말을 들어도 좋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남몰래 이 날을 기다리고, 준비하고, 수련하고, 정진해왔다. 내가 이 날을 위해 얼마만큼 인고의 세월을 보냈는지에 대해 풀어 놓는다면, 며칠 밤을 세어도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일 것이다.
조금 시적으로 함축해서 표현하자면, 무~~~~~~~~~~지 기다렸다.
너무 몰인정 한 것 아니냐고? 처음에 말했지? 어떤 말을 들어도 좋다고.
나를 욕해도 좋다. 피도 눈물도 없는 계집아이라고 매도해도 좋다.
큰 언니가 남자친구와 헤어진 사실이 그렇게 오매불망 기다리고 바라마지 않는 일이냐고?
나는 자신 있게 대답할 테다!
그래! 나는 기다렸다! 피도 눈물도 없이!

인생을 살아가다보면, 한 개인의 불행이 여러 사람의 행복이 되는 아이러니한 경우를 적지 않게 겪을 수가 있다. 더군다나 그 행복의 당사자가 자신이 된다면 어떨까?
절대로 자신은 기뻐하지 않을 거라고? 그 순간을 기다리지 않을 거라고?
대단한 박애주의자 나셨다. 축하드린다.

물론, 나도 처음부터 그렇게 몰인정한 사람이었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 이 사단이 났을 때는 큰 언니에 대한 동정심과 죄책감에 박애주의자의 길을 걸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차츰차츰 반복되고, 두 손가락을 더해 두 발의 발가락으로도 세기가 불가능한 횟수까지 넘어서고 보면, 이제는 박애주의자의 'ㅂ'자도 남아있지 않았다. 어차피 버려질 거, 내가 가져도 그것이 무슨 죄가 될까.
사건의 정황은 이러하다. 나의 큰 언니는 같은 여자가 보기에도 놀랄만한 미모의 소유자였다.
설명 끝.
응? 설명이 부족하다고? 왜 이러나, 아마추어 같이. 나는 백 마디 말로 고작 백 가지의 정보만을 전달하는 몰지각한 커뮤니케이션을 가장 증오하는 바이다. 가장 적은 단어로 가장 많은 것을 표현하는 소통이 가장 이상적인 커뮤니케이션이 아닐까.

흠흠. 아무래도 내가 취한 모양이다. 너무 단어를 아낀 것 같군.
한 가지 보충하자면, 큰 언니의 대단한 미모까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판타스틱하다. 아니, 그것은 이미 예술의 경지다. 그러나 그게 문제가 되는 것은 이 대단한 언니가 자신을 '순정파'라고 굳게 믿고 있다는 사실이 더해지고 나서다. 언니의 미모가 다른 것을 다 가려줄 정도로 대단한 것이다 보니, 언니에게 접근하는 남자들은 보통 언니의 미모만을 보고 접근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니, 솔직해지기로 하자. 접근해온 남자 전부다.) 거기서 '자칭 순정파'인 언니는 자신의 모든 것을 봐주지 않는 연인들에게 상처를 입는 것이다. 그리고 다가오는 것은 예정된 파국.
그리고 거기서 남는 중요한 '부산물'들이 있다.

그것은 언니가 남자들에게 받은 선물이라는 이름의...
나는 이 부산물들로 추측하건데, 자신이 순정파라는 언니의 지론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다. 언니도 남자의 모든 부분을 보지 않는다. 내가 추측하기에, 언니는 남자의 재력을 본다. (한 번은 아랍계 석유재벌 2세를 남자친구라고 소개해서 우리 자매들을 깜짝 놀라게 한 적도 있으니까.) 그것이 언니의 고의적인 선택인지, 무의식적인 선택인지는 나도 파악 할 수가 없지만, 이래서야 절대로 이루어 질 수 없는 순정일 수밖에. 그런 큰 언니의 상황이 가끔, 그러니까 가뭄에 콩 날 정도로 한 번씩 동정이 가고는 한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도 사람이니까.
어쩌면 자신을 순정파라고 굳게 믿고 싶고, 또 자신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바로 큰 언니 자신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도 바로 그 사람이기 때문에, 동정보다는 부산물에 더 관심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여자로서, 아니 어쩌면 살아가기 위해 무언가를 태울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생물로서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아니지? 응?

"난정말사랑했어!사랑했다고!"

어흥-! 하고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 결국 터지고야 말았다. 그제야 문제를 파악한 두 사람의 치킨 헌터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듯하다. 표정에 순식간에 신중함이 감돌았다. 방안을 떠돌던 하이에나들은 어느새 사라지고, 진중한 네고시에이터(Negotiator)들이 강림했다.
그 일련의 상황은 제 3자의 입장에서 보면 조금 웃길 수도 있겠다.

"사랑했다고!그사람모든걸!그남자발가락하나하나까지!니들그사람발가락이어떤줄모르지?모를꺼야.얼마나걸어다녔는지멀쩡한발가락이하나도없었어.물론엘리트영업사원이라는사람이니까많이도걸어다녔겠지안그래?실적이란게그렇게책상머리에서만앉아있는다고쌓이는게아닐테니까.난그사람발가락이제일좋았다?다른건몰라도그발가락은거짓말을안할것같았으니까.응.다정한남자였지.근데그다정함은나한테만주는게아니었어.결국그놈은나한테도영업을한거야.사랑이라는이름의상품을판거라고.그남자는내얼굴만사랑했어.그래서끝이야.헤어졌어."

어떻게 숨 한번 쉬지 않고 저렇게 말들을 쏟아내는지. 매번 남자친구와 헤어질 때마다 겪는 일이긴 하지만, 그 경이로움에 치를 떨 정도다. 어느새 큰 언니를 빙 둘러싸서 포위하고 있던 네고시에이터들도 조금 질린 기색을 얼굴에 띄우며, 무릎으로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다. 점점 결전의 시간은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이미 맥주가 머리꼭대기까지 들어찬 큰 언니의 상태를 살피는 척, 몸을 숙이고는 곁눈질로 나의 최대의 호적수. 둘째 언니의 얼굴을 스캔했다.
낭패였다.

언제나 밤 열두시가 되어서야 쌩쌩해지는 야행성의 둘째 언니가, 오늘은 저녁 여덟시 반 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절호의 컨디션인 것 같다. 언제나 푸석푸석하던 얼굴이 오늘에는 윤기마저 감도는 것이 뭔가 수상했다. 아무래도 남몰래 정보상으로 부터 정보들을 그러모아, 오늘을 준비하고 있었으리라.
어쩐지. 최근 저녁을 먹자마자 방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이상하다고는 생각했다. 그것은 이른 취침으로 생체시계를 정상적으로 되돌려 놓으려는 수작이었던 것인가! 나는 다시 한 번 둘째 언니의 치밀하고 비인간적인 대담함에 치를 떨었다.
근데, 정보상 이 계집애. 나한텐 그렇게 빌어도 정보하나 주지 않더니.

물론, 여기서 '정보상'이란 내 바로 아래 동생의 이름이다.

하지만 그 정도 어드밴티지는 유리함 축에도 들지 않는다. 나는 건방진 도전자의 도전을 받은 챔피언처럼 한편으로는 두렵고, 한편으로는 쾌감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결국 사람은 투쟁 속에서 살아가는 동물인가.
챔피언에게 어떤 도전자 보다 두려운 것은 상식이라는 이름의 도전자. '챔피언이 도전자를 물리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상식과 도전자와의 2:1 결투를 벌이는 것이 바로 챔피언의 의무 인 것이다. 나는 의식적으로라도 그렇게 생각하려고 애썼다.
말해 무엇하랴. 내가 바로 지난 42번째 전쟁의 챔피언. 자매들 모두가 은근슬쩍, 혹은 대놓고 노리고 있던 분홍색 명품 뮬(Mule)을 포부도 당당하게 손에 넣은 여제다.

이제 우리 자매들이 벌이는 전쟁에 대해서 어렴풋이 눈치 챈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래, 이 전쟁은 바로 큰 언니의 헤어진 남자친구들의 선물을 서로 차지하기 위한, 자매들 간의 치열한 전쟁이다. 이즈음에서 상황에 실망하고, 이 글을 덮으려는 사람도 있겠지. 한껏 분위기를 잡더니 이딴 시시한 결말이었냐고? 그렇다면 흥미가 동하는 방식으로 설명해줄까?
말 한번 잘해서, 최고 시가 400만 원 짜리의 물건을 차지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표현한다면 그것이 과연 시시한 일일까. 큰 언니가 순정파의 탈을 쓴 책략가라는 나의 추론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언니가 지금까지 옛 연인들에게 받은 선물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명품 백, 고가 옷, 비싸 보이는 장신구, 명품 가구, 최근 최고가를 갱신한 모 회사의 주식 등등 사리계산에 밝은 정보통의 비공식적인 추산에 의하면 언니가 받아온 선물은 시가 100만 원 이하로 내려간 일이 없다고 하는 충격적인 사실들을 알 수가 있다.

물론, 여기서 '정보통'이란 내 바로 아래아래 동생의 이름이다.

여기까지 오면, 이 심각하지 않지만 치열한 전쟁의 이유에 대해서 공감하는 사람이 생겼으리라 믿는다. 언니가 무슨 결혼 사기꾼 인 것은 아니냐고? 극렬하게 동의하고 싶지만, 일단 아니다. 언니가 경찰에 신고당한 적도 없고, 옛 연인들이 물건을 다시 받아내겠다고 찾아온 적도 없으니까. 난 결백하다. 공범이 아니에요!
뭐,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어?
양심상 이야기 하면, 내가 큰 언니와 그 수많은 전 남자친구들을 다시 이어주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시도는 항상 처참하게 실패했고, 그것들은 항상 최악의 결과들만을 나에게 안겨주었다. 저래 봬도 쇠심줄 같은 우리 큰 언니는 한번 선언한 결별을 절대 번복하지 않았고, 나는 언제나 전 남자친구들의 스파이 취급을 받으며, 한동안 부산물에 손도 대지 못할 정도의 대접을 받아온 것이다. 참고로 이 신뢰를 다시 회복하는데 엄청난 세월이 소요되었다는 것만 말해두겠다.
이제 다시는 그런 일을 벌이지 않으리라. 결국은 나도 인간. 얼굴도 알지 못하거나, 한두 번 소개받은 남자들을 위해 내 실속을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이제다끝이야.사랑했지만,더이상그사람은생각도하기싫어.그래서말인데,그남자가선물해준거,전부너희한테나눠줄게."


43번째 전쟁 스타트!

"언니, 꼭 그래 야겠어? 그래도 한때는 언니가 사랑했던 남자잖아. 언제 또 다시 생각날지도 모르는데, 물건 '하나 쯤'은 가지고 있어야지. 난 이런 물건 못 가져."

둘째 언니 선수. 선공했습니다!
역시 오늘은 컨디션이 좋은 것 같다. 적당히 큰 언니를 설득하는 것처럼 자세를 취하며, 결국은 남자친구와의 결별을 인정하는 분위기로 몰아간다. 물건에 대한 욕구는 절대 내비치지 않으면서, 실수로라도 다시 사귈 수 있다는 식의 가능성은 내비치지 않는다. 정말 멋진 선공이었다. 얼핏 큰 언니의 얼굴에 만족감이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아직 무르다!

나는 잽싸게 큰 언니의 사각지대로 이동하여 '준비해 둔' 티어스틱을 눈가에 문질렀다. 이건 중요한 작업이다. 너무 많이 문질러서는 안 되고 딱 7번 반을 문지르면, 멋들어진 눈물이 된다. 완성!
아아, 내가 봐도 잘 만들었다. 눈물 글썽글썽한 얼굴.

"그래, 언니. 언니는 그렇게 사랑했잖아. '이제 끝이야'라고 말한대도 언니의 사랑이 그렇게 무 자르듯이 끝난 걸까? 나는 언니가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 안 해. 다정한 우리 언니. 속으로 얼마나 울었을까. 내가 대신 울어줄게."

순간 큰 언니의 시선이 나만을 향해서 고정됐다. 지금이 가장 중요한 타이밍이다. 말이라는 것은 상황과 기억 속에 잊혀 진다. 특히나 저렇게 머리꼭대기까지 취한 사람에게는. 그렇기 때문에, 눈물이 동반된 이미지를 언니의 뇌리에 각인시킬 필요가 있는 것이다.

'칫!'
둘째언니가 한방 먹었다는 듯이 혀를 찼다. 설마 준비해 온 전술이 그것뿐인 건 아니겠지?
이 언니가 어디서 날로 먹으려고.

"우리 보리가 어린 줄만 알았더니, 언니를 위로해 줄줄도 알고, 이제 다 컸구나."

찌잉- 진한 감동의 눈물을 흘리신다. 이대로라면, 1차전은 나의 승리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긴장을 풀어 선 안 된다. 감이 좋은 큰 언니는 내 흑심의 조각이라도 보였다가는 바로 눈치를 챌 것이다. 그러나 방 오른쪽 구석에 구겨져 있는 ,둘째 언니라는 이름의 패배자에게 회심의 미소를 지어 주는 기회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것이 바로 승자의 의무인 것이다.
아하하하하하!
결코 놀리기 위해서 그런 건... 뭐 틀린 건 아닌가.
그러나 바로 그때!

"잠깐! 큰 언니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느닷없이 방문이 열리고 셋째 언니의 참전!

"이게 무슨 소리야! 언니! 헤어졌다니!? 불쌍한 우리 언니!"

방문을 여는 동작과 동시에 몸을 날려 두 바퀴 반을 돌고, 나와 큰 언니 사이의 좁은 공간에 슬라이딩하며 울부짖는다. 아마 이 동작을 계산하며 방문 앞에서 몇 십 분이나 타이밍을 가다듬고 있었겠지. E난이도의 4.5점짜리 동작입니다.

"언니! 어떻게... 어떻게!! 그렇게 좋아했는데! 불쌍한 우리 언니!"

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큰 언니의 어깨를 붙잡고 운다. 진짜라고 해도 믿을 만큼 신이 내린 연기였다. 나는 라이벌이라는 것도 잠시 잊은 채, 셋째 언니에게 그만 감동해버렸다. 아무래도 슬라이딩 때 방바닥에 찧은 무릎이 실제로 눈물이 나올 정도로 아픈 거겠지. 저런 초심자의 행운 같은 일이!
그러나 이것은 낭패였다. 셋째 언니는 실제로 배우로도 활동한 적도 있는 연기파 선수다. 사실, 지난 42번째 전쟁에서 내가 챔피언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셋째 언니가 참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룰 수 있었던 쾌거다. 그 정도로 가장 경계해야 할 1순위가 바로 셋째 언니라는 강자였다.
보상이 이 계집애. 도대체 얼마나 소문을 퍼뜨리고 다닌 거야!
그러고 보니 저번 우승 상품이었던 핑크색 뮬은 보상이가 제일 가지고 싶어 했었지...
복수인 건가, 그런 건가! 에이잇! 그러나 나는 질 수 없다.

아직도 흘러내리고 있는 눈물이 난반사되어, 물안개처럼 시야를 흐리게 한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러자 내 눈에 각인되는 오로라같이 아름다운 섬광이 보였다. 무의식적으로 바라본 방의 구석에는 언니가 가장 아끼는 아이보리색 옷장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입 사이로 보이는 찬란한 반사광!
거기에는 내가 이번 전쟁에서 1순위로 노리고 있는 상아색 수영복이 그 자태를 뽐내고 있다. 물론, 그것은 다른 자매들도 마찬가지였다. 사람의 소유 욕구를 자극하는 백합같이 순수한 옷감에, 잘 갈무리된 장인정신으로 한 땀 한 땀 마무리된 정갈한 디자인. 바라보는 모든 이들의 시선을 표현 그대로 빨아들이는, 무채색의 큐빅들은 그야말로 다이아몬드의 품격을 닮아있다.
저 수영복은 내가 처음으로 가격적인 면을 고려하지 않고 소유하고 싶어진 첫 번째 우승상품이었다. 내가 이때까지 노린 부산물들은 모두 그 전쟁에서 가격이 제일 비싼 상품들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르다.
바로 저 것이었다! 저것만 가질 수 있다면! 다른 물건은 전부 다른 자매들에게 양보해도 좋다.
저 수영복만 있으면... 우헤헤헤헤헤...
지난 봄 내 아무도 모르게 성장한 내 똥배를 가릴 수가 있다.
아무도 내 배에는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크하하하하! 저건 신의 아이템이다!!!!!!

문제는 이번 상품 중에서 저 상아색 비키니가 가장 가격이 높다는 것이지만... 항상 비싼 것만 골라내는 안목을 가지다 보니, 이제 마음이 드는 것도 전부 최고의 가격을 자랑하게 되는 사태가 된 거다.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내 안목이 처음으로 저주스러운 순간이었다. 하지만 꼭 손에 넣어야 한다. 저 드림 아이템이 없으면, 내 여름은 끝이다! 내 존재 이유마저도 의심 받게 된다!

"언니이. 언니이! 흑흑!"

이제 슬슬 이 신파극을 끝낼 때가 왔다.
사실, 엄청난 파괴력의 공격이기는 했지만, 중간에 참전한 셋째언니는 지지기반이 부족한 상태였다. 지금의 셋째 언니는 내 적수가 아닐 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그 강적인 셋째를 상대하는 동시에, 이를 갈며 전략을 다시 세우고 있는 둘째 언니를 같이 상대하는 악몽 같은 상황이었다. 어쩔 수 없다.
이 작전만은 피하고 싶었지만... 나는 사전에 교섭해둔 또 한 명의 적에게 한쪽 눈을 찡그려 신호를 보냈다. 나의 믿음직한 아군은 오른쪽 엄지손가락을 살짝 들어 올려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계약 성립이다. 닭 뼈가 목에 걸린 악조건으로 인해서, 전쟁에서 밀려나 있던 막내 동생은 소리 없이 셋째언니의 등 뒤로 다가갔다.

"언니이~ 나 잠 와. 동화책 읽어줘!"

미션 클리어.
뜻하지 않은 사고로 부모님을 모두 여의었던 해. 우리에게는 터울이 큰 세 살 박이 어린 막내가 남아있었다. 그때, 우리는 한 가지 약속을 했었다. 모든 자매가 막내의 부모님이 되어 주기로. 절대 외로움을 타지 않게 하기로. 막내가 바라는 것은 어떤 일이든지 들어주는 것. 그것이 우리 자매의 암묵적인 약속이었다.
좀 비겁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셋째 언니는 절대로 그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다. 걸리적거리는 장애물을 멀리 치워두는 내 작전은 물론, 그 대가가 엄청나게 비싸겠지만 절대 성공할 수  밖에 없는 작전이었던 것이다.
뭐, 승리의 여름을 쟁취하는 비용이라고 생각하면 싸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억지로라도.

"어... 어? 어... 아. 알겠어. 막내야."

걸림돌은 퇴장했다. 결승선은 이제 일직선이었다. 달리는 일만 남았다.
둘째 언니는 아직 1회전의 패배를 추스르지 못하고 있었다.
셋째 언니는 저 멀리로 치워 버렸다.
보상이와 보통이는 아직 학원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이제 내 승리다!

"보리야,아무래도언니들은다바쁜것같으니네가먼저가져가야겠다.가져가고싶은것있으면마음대로..."

'빠빠빠라- 빠빠빠라- 빠빠빠라- 빠빠빠라- 빠빠빠라- 빠빠빠라- 빠빠- 빠라빠-'

괴상한 소리가 울렸다. 당장이라도 옷장을 향해 달려가려던 나의 발걸음은 누군가가 강탈해 버린 것처럼 멈춰 버렸다. 벨소리가 울리는 자신의 핸드폰을 바라보던 큰 언니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알 수 있었다. 전화를 걸어온 사람이 누군지.

방 안은 마치 진공상태가 된 것처럼 고요하다. 나는 숨죽인 채로 큰 언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꼬리 끝에 매달린 눈물방울들은 채 마르기도 전이라, 밝은 형광등 빛을 이리저리로 난반사하고 있었다. 저 커다랗고 예쁜 눈이 한번 감겼다가 떠지면, 방 안 전체로 무지개가 쏟아질 것 같다. 하지만 언니는 단호하게 눈을 감지 않고 있었다. 마치 무지개가 쏟아지기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무지개가 뭔가를 변화시키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그러고 보니 나는 예전에 큰 언니에게 질투를 한 적이 있었다.
모든 것을 다 가진 듯한 아름다운 큰 언니. 그렇지만 결국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시한부 같은 가련함. 그 가여움 마저 질투심의 대상이 되었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단지 그녀를 비웃으며 비판하며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큰 언니는 어떻지?
그녀는 방의 구석에서 비율이 잘 맞는 얇은 몸을 애처롭게 떨면서 그저 자신의 휴대폰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내가 박애주의자였을 때도 떠올려 본다. 그때 나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질투였을까.
아니다. 그건 아니었다.

"언니."

단호한 걸음으로 큰 언니에게 다가가, 바닥에 놓인 휴대폰을 들어 언니의 손에 꾹 하고 쥐어주었다. 그러자 3원색으로 촌스럽게 빛나던 휴대폰의 액정이 따듯한 색상으로 빛나며, 언니에게로 옮겨갔다. 그녀는 잠시 굳은 듯이 그것을 바라보다가 힘 있게 휴대폰을 그러쥔다. 활발하게 진동하는 휴대폰이 그녀의 안의 뭔가를 일깨워 준 것처럼.

"더 이상의 스파이 역할은 사양이니까."

큰 언니는 눈물 흘리듯이 아름답게 웃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큰 언니의 웃음이었다.

 


그렇게 수영복 전쟁은 끝이 났다.

"결국 너만 남았구나, 친구."

나는 마지막 한 조각남은, 기름기 번들번들한 친구를 들어 올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당신의 눈동자에 비친 내 얼굴에게 건배. 찡."

전혀 유쾌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이제 내 똥배를 어쩌면 좋아!!!!!!
승리의 여름 따위 개나 줘버리라지. 이번 여름은 방구석 확정이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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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2 연재 인카운터 신드롬-[1. Encounter 소녀-‘유하임’이라는 바보에 대해서](2) (1) Leth 2013.04.19. 13155
381 연재 인카운터 신드롬-[1. Encounter 소녀-‘유하임’이라는 바보에 대해서] Leth 2013.04.18. 12684  
380 연재 인카운터 신드롬 <프롤로그> Leth 2013.04.18. 3223  
379 자유 THE Beast kira1350 2013.04.13. 3085  
378 자유 [중편]사제지간-2 miiin 2013.04.13. 3872  
단편 수영복 전쟁 라세 2013.04.10. 3965  
376 단편 무제 워너비 2013.04.03. 3661  
375 프롤로그! Road to the Rome 1 엄마는소중해 2013.03.26. 2982  
374 프롤로그! The Fool[어느 광대 이야기] 프롤로그-1 주댕 2013.03.23. 3239  
373 단편 플래그 워너비 2013.03.22. 4140  
372 자유 시지프 의뢰소(1) (1) 으이구불쌍! 2013.03.14. 3391
371 자유 시지프 의뢰소 (1) 으이구불쌍! 2013.03.14. 3876
370 자유 [판이대] 마지막날 감실 2013.01.30. 5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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