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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름발이 늑대 이야기 프롤로그 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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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42 Apr 30,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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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이시하
협업 참여 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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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화가 이진에게 마련하는 자리는 푸른빛이 항상 가득했다. 푸른빛이 영원히 남아있을 것 같은 특별한 자리에서, 그녀는 이진을 자리에 앉혔다. 이진에게 아주 잠깐 동안이라도, 빛을 통해서 어둠을 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그녀의 작은 마련을 이진은 거부할 수 없었다. 그는 그녀의 배려에 항상 감사하게 생각했다.

청화가 자리에 앉아 치마 가장자리를 다듬는 동안 리아는 눈을 뜨며, 인형들을 움직이며, 차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진이 리아가 인형들을 조종하는 모습을 지켜보자 청화도 따라서 리아를 지켜보았다. 잠시 모습을 감추었던 빛은 다시 이진과 청화가 앉은 자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리아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있죠. 다른 자매들 이상의 능력으로 인형들을 움직일 수 있으니까요. 원한다면, 리아는 당신의 영혼을 연결해 당신이 원하고자 하는 움직임을 집적 표현할 수 있어요. 솔직히 리아에게 너무 많은 일을 시키는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해요. 그리고 이진 당신을 그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저도 당신에게 성급한 마음이 있었나 봐요.”

우연이라고 생각했었다. 청화는 단순한 꿈을 꾸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뒤에서부터, 그는 꿈에서 나와 현실이라는 세계에서 걸어가고 있었다. 왜 허상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생각해봐도 청화는 그를 너무 의심을 해버린 것 같았다. 만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꿈이라 생각했던 마음이 너무나도 그에게 무례했다고 그녀는 생각하고 있었다.

“아닙니다. 청화님. 전....... 감사할 뿐입니다.”

“어제도 얘기했지만, 그냥 청화라고 부르세요.”

“청.....화?”

“네. 저도 이진이라고 부르는데요. 물론 그 전에는 이진 씨라고 많이 부르긴 했지만. 현계에 인간관계처럼 이런 말도 한 번쯤은 해봐야 한다고 많이 생각하고 있었어요.”

이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렇지 않다는 듯 말했지만, 생각보다 서툴렀다. 청화는 이진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청화는 천으로 가려진 두 손을 드러내, 이진의 손에 다가갔다. 그냥 아무런 힘도 없이 놓는다면, 어쩌면, 이진의 손을 더럽히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두려운 마음을 품었다.

“깨끗하군요.”

“제 손이요?”

“네.”

“아니요. 전에 연극하고 인형들을 움직이느라 조금 빛을 잃었을 뿐이에요.”

“깨끗합니다.”

이진은 조심스럽게 청화의 손을 잡으려고 했지만, 청화는 선뜻 물러났다. 그리고 천을 숨긴 채로, 잠시 동안 이진을 보지 않았다. 그의 모습이나 행동에 불쾌감을 느낀 것이 아니었다. 자기 손에 참혹한 저주를 알고 있기 때문에 거부한 것이었다. 사이나인의 낙인이라고 할지도 모르는 그녀의 투명한 손에서는 커레스란 이름의 보이지 않는 무기로 감싸져 있었다. 커레스는 투명한 실들로 이루어져있으며, 손을 가득히 뒤덮고 있었다. 이 실에 살기나 적의를 불어넣기만 해도, 적이라 인식되는 존재들을 제거할 수 있었다.

그녀의 손은 같은 사이나인이 아닌 인간 같은 타 종족이 만진다면, 베이거나 토막 날 수 있었다. 커레스는 무희들의 무기라고 할 수 있지만, 그녀들의 정신을 서서히 소멸시키는 독이기도 했다.

그녀들이 커레스의 말살을 막기 위해서 선택한 것은 리아처럼 자매란 이름의 무희와 함께 지내는 것이었다. 자매력이라 부르는 이 행동은 무희들이 커레스의 말살을 막기 위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매라고 할 수 없는 그와의 만남 속에서, 혼란의 감정을 느꼈다. 커레스가 정신을 말살시키는 것은 아니었다. 그와 함께 있고 싶었다. 이대로 지켜보고 싶었다. 그 생각과 감정은 말살의 감각마저 지워버렸다. 그와 만났다는 것으로도, 그녀는 이진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만질 수 있다는 것. 이진은 어떤 느낌인지 아세요?”

“평범합니다.”

“그래도 가끔은 이진의 손을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천으로 가려진 손이 아닌 그냥 제 손으로.”

“의수를 착용하지 않으셨습니까?”

“네. 물론 인간들이 많이 있을 때는, 착용하지만 집 안에서는 최대한 쓰고 싶지 않아요. 특히 당신의 앞에서는.”

청화는 조심스럽게 이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진이 조심스럽게 청화의 손을 잡자 베임의 감각이 날카롭게 퍼져나갔다. 피가 흘러내렸지만, 이진은 고통을 참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투명했던 그녀의 손은 피의 색채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감당할 수 없는 아픔이 퍼지고 나서야 이진은 그녀의 손으로부터 벗어났다. 그녀의 손에 칠해진 출혈의 흔적에 어떻게 해서든 피를 닦으려고 했지만, 청화는 고개를 저었다. 피로 얼룩졌던 손은 커레스의 흡수되며, 깨끗한 순결함으로 되돌아갔다.

“아프죠?”

“괜찮습니다.”

“거짓말. 아프잖아요. 속으로는 아프면서, 제 손을 잡은 거 알아요.”

“사실입니다.”

청화는 애써 모른 척하는 그의 대답에 미소를 지었다.

대부분 무희들은 인간들 같은 타 종족과 있을 때만큼은 의수를 착용했다. 이진 같은 인간들이 무심코 손을 만지려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청화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이진에게만큼은 가면 속에서의 손이 아닌 순수한 빛으로 칠해진 손으로 그를 대하고 싶었다. 그것이 피로 얼룩지는 고통의 대가를 불러일으킨다고 해도.


리아의 인형이 차를 들고 각각 이진과 청화의 앞에 놓았고, 둘은 말없이 차를 마셨다. 아리차에서 느껴지는 맑은 정신이 한 때, 잠시 어두웠던 서로가 지녔던 어두운 기억을 말없이 지우는 것 같았다. 이진에게는 낯선 느낌이 들었지만, 청화에게는 산뜻한 기분이 들었다. 차를 마신 후, 청화는 긴 머리칼을 넘기며, 이진을 바라보았다.

“이진. 인간들이 연인을 맺을 때는 어떻게 서로를 대하나요?”

“어떻게 대한다는 건?”

“솔직히 궁금했어요. 사이나 인으로서 인간들에 대해 알고 싶었어요. 인간들은 어떻게 이성을 대하나요?”

“그냥 평범합니다. 가급적이면, 상대가 부담이 되지 않게 말을 놓는 편이죠.”

“말을 놓는다. 라는 건?”

“청화님이 아닌. 청화라고 부른다던가, 아니면....”

“잘 모르겠어요. 더 자세히 알려주실래요?”

청화의 뜻밖의 부탁에 이진은 할 말을 잃었다. 거짓은 청화를 대하는 입장에서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행위였다. 청화는 이진의 답이 나올 때까지, 푸른색의 아리 잎이 담긴 차에 입을 대지 않았다. 이진은 심호흡을 하며, 조심스럽게 청화에게 말했다.

“청화.... 어떻게..... 지내?”

“그렇게..... 이진이 그렇게 대답하면, 저는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요?”

“그냥, 예의를 조금 없애신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청화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떠오른 듯 웃으며, 대답했다.

“어. 잘 지내?”

“네. 그렇게 하면 됩니다.”

“아! 이렇게 하는 거군요?”

청화는 어린아이처럼 까르륵 웃었다. 이진의 얼굴이 붉어진 채로, 대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가급적이면, 청화에게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지만, 청화는 그의 얼굴에서부터, 이미 부끄러움에 몸부림 치고 있었다.

“이진 외에도 다르게 부르는 것도 있어?”

“청화께서, 아니. 다른 이름도 있어.”

“어떤 호칭?”

“오빠. 라던가, 아니면, 진아 라던가.”

“오빠?”

“대부분의 여자들은 남자들을 그렇게 불러.”

“오빠. 어떤 의미죠?”

반말이 서투른 청화의 물음에 솔직히 이진도 알 수 없었다. 그냥 여자가 귀여움을 보여주기 위해서 오빠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반대로 남자가 여자에게 그런 말을 들으면, 좋아하기 때문일 수도 있었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그런 호칭으로 서로를 부르는 건지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귀여움을 보여준다던가, 아니면, 남자가 좋아하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걸지도 모릅니다. 아니. 몰라.”

“제가 오빠. 라고 부르면, 이진은 좋아하나요?”

“네!?” 이진은 순간 당황한 나머지 차를 떨어뜨릴 뻔했다.

“오빠.”

청화는 웃으며, 오빠라고 부르자, 이진은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차를 마셨다. 청화는 웃으며, 고개를 숙인 이진에게 다가갔다. 이진은 청화가 다가갔다는 사실을 잊으려고 말없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오빠?”

“어?”

“오빠라고 부르니까, 어때?”

이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청화는 웃으며, 서서히 뜨거움이 사그라져가는 차를 마셨다. 리아는 인형들을 움직이는 와중으로 둘의 웃는 얼굴들을 일일이 기억하듯 지켜보았다.

“반대로, 이진이 저에게 특별하게 부르는 애칭은 있나요?”

“비슷한 게 하나 있어.”

“어떤 거죠?”

이진은 잠시 생각하다가 레기온 군에 있을 때, 한 동기의 말이 떠올랐다. 여자들이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말이 있다고. 이진은 그 동기의 말이 떠올라 조심스럽게 꺼냈다.

“누나.”

“누나?”

“어. 누나.”

“누나가 무슨 뜻이죠?”

“리아가 청화에게 부르는 호칭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됩. 아니. 돼.”

“아. 언니와 비슷하다는 얘기인거군요?”

청화는 고개를 갸웃하며, 누나라는 말을 생각했다. 이진은 청화라는 이름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그냥 청화라고 부를게.”

“그렇게 해요. 오빠?”

이진은 붉혀진 얼굴을 숨긴 채로, 조용히 차를 비웠다. 청화는 이진의 어떤 표정과 시선을 가지고 있는지 상상하듯 이진을 바라보았다.


“요즘 어떻게 지내?”

리아가 인형대신 손수 빈 잔을 들고 정리하는 동안, 청화는 서툰 목소리로 물었다. 이진은 차를 정리하는 리아와 인형들에게 잠시 시선을 옮기다가, 청화의 목소리에 시선을 주지 못하고 내리깔았다.

“그냥, 지내.”

“어색한가요? 이런 느낌의 대화요?”

청화가 많이 당황하고 있는 그의 모습에 부담이 되는 걸까? 생각하는 시선으로 이진을 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를 의식한 이진은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며, 대답했다.

“어. 청화답지 않다는 생각이 많이 들고.”

“그럼, 평소대로 하실래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대답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

“그럼 익숙해질 때까지?”

“어.”

“좋아요. 아니! 좋아.”

청화도 어색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약해져가는 이진과 함께 균형을 유지했다. 청화는 이 대화를 통해서 그가 숨기고 있는 상처를 들려주기를 원했다. 그 동안 자기를 만나면서 이진은 얼마나 낯설어하고 두려워했을까? 그 총알이 발목에 박혀 절름발이가 된 순간부터.

“청화는 어때?”

“곧 있으면, 사이나 어머니의 생일이니까. 연극을 준비하고 있어. 리아하고 같이 준비하고 있는데, 아직 자매들하고 호흡이 잘 안 맞긴 해. 그래도 연습을 계속하다보면 되겠지? 오빠도 같이 와서 볼래?”

“이진이라고 해.”

“싫어? 오빠라고 부르는 거?”

“그건 아니지만.....”

이진의 엉뚱한 대답에 청화는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천으로 감싼 두 손으로 쿡쿡 거리다 못해, 결국 웃어버리고 말았고, 인형들을 조종하고 있던 리아는 뜻밖의 청화의 웃음소리에 놀란 듯 두 사람이 앉아있는 쪽을 보았다.

“너무 어색해요! 이진!”

“죄송합니다.”

이진은 한숨을 내쉬며, 창밖의 자라나는 정령수 한 그루를 보았다. 청화의 까르르 웃으며, 이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래도 오빠에게만큼은, 보여주고 싶은 게 많아. 아니. 이진에게만큼은. 나중에 키하 언니의 생일이 오면, 그때 같이 구경해줄래?”

“어. 갈게.”

이진은 머리가 지끈거림을 느꼈다. 잠시 아픔을 억누르며, 청화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청화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의 고통에 커레스가 피를 느낀 듯 살기를 드러냈다.

“이진?”

청화는 진지하게 이진을 보았다. 이진은 눈을 감은 채로, 청화의 목소리를 들었다. 알고 있다. 청화의 커레스가 피를 느끼고 미세하게 움직였을 때부터, 이미 청화에게 들켜버린 뒤였다. 이진은 결국 어울릴 수 없다는 것을 느낀 듯 미소를 지었다. 그 말을 듣기 전에 먼저 나가야겠지. 이진은 그렇게 생각하고 일어나는 순간, 청화가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마침 리아하고 같이 준비한 춤이 있는데, 한번 봐 주실, 주! 줄래? 한번 이진에게 보여주고 싶었는데,”

청화의 대답에 이진은 나가려고 했던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청화는 미소를 지으며, 내면을 숨겼다. 비록 모른다고 해도, 그녀는 그에게 온기를 주고 싶었다.

청화가 리아에게 손짓해, 밖으로 나오게 하는 동안 이진은 낡은 군화를 신고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낡은 자켓 속에서, 미미하게 이진의 붉은 눈물의 흔적이 곳곳이 비추어졌다. 청화는 눈을 감으며, 푸른빛 속에서 드러난 붉은 피를 잊고 리아의 손을 잡으며, 춤을 췄다.


‘어울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까?’


이진은 기억했다. 그가 죽인 자들과 얼굴과 죽음의 나락으로 빠진 그들을 기억했다. 그 고통의 숨소리들을 한편으로는 고통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한 채로, 바로 어둠의 나락으로 떨어뜨린 자들의 기억들을. 이진은 청화의 춤 속에서, 하나 둘 기억해냈다.


‘과연 당신이 저 아름다운 천예의 무희로부터, 진실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청화의 부드러운 두 팔의 벌림과 함께 숙이자 리아는 천천히 청화의 주변을 돌며, 청화의 푸른빛을 가득히 채우듯 두 팔을 번갈아가며, 움직였다.


‘당신은 진실하지 않습니다. 진실하다고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진은 고개를 들어 천예의 푸른빛이 비추는 하늘을 주시하는 청화의 두 눈을 지켜보았다. 청화는 이진의 시선에 순간 몰입을 깨뜨릴 뻔했다. 청화는 다시 몰입을 하며, 마음속에 간직한 푸른빛의 꽃을 표현해냈다. 이진은 청화의 얼굴에서부터, 푸른빛의 무희복이 꽃봉오리처럼 펼치며, 스르르 내려가다가 다시 감춰지는 모습까지 두 눈에 담았다.


[그래도, 이상하게 난 당신을 기억하고 싶어.]


이진은 허리춤에 숨겨진 클로즈 데드의 차가운 숨결을 느꼈다.



어울릴 수 없다. 왜 그럴 수 없는 걸까? 매번 기억이 되며, 괴롭히게 되는 것일까? 만약 언데드가 아니었다면, 살아있는 진정한 인간이었다면, 그녀에게 남아있는 것을 줄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그녀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남아있지 않았다. 살아있는 것도, 숨을 쉴 수 있는 것조차도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달릴 수도 없는 늑대란 이름의 사고 속에서도, 매번 그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 이진이 충동이라면, 청화는 후회였다. 죽음의 대한 간절한 충동과 원한을 후회라는 감정으로 정화하는 그녀. 그렇게 간절하게 원하며, 시도를 한다고 해도, 그녀를 볼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후회가 이진을 지배했다.


만약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녀는 다시 반겨줄 것이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어줄 것이다. 그리고 그 손을 잡으며, 푸른빛이 있는 곳으로 그를 안내해줄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를 나누겠지. 현계에 대한 이야기들. 그리고 이야기하지 않았던 그에 대한 비밀들을 하나 둘 볼 거고. 그녀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생각을 해도, 그가 생각하는 건 오로지 순간순간 스쳐지는 그녀에 대한 푸른빛의 기억이었다. 이진은 그녀가 만든 후회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이진은 천예의 숲을 걷고 있었다. 너무 깊게 와버린 것일까? 빛이 사라졌을 때부터, 그는 뒤늦게 주변을 인식했다. 긴 여정이라 불렸던 무의식의 걸음이 더디기 시작했을 때, 숲 속에서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웃음소리에 그는 뒤늦게 클로즈 데드를 쥐었다. 멀리서 들려오던 메아리의 웃음소리는 어제처럼 빠르고 조용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녀의 발소리가 숲의 가면 속에서 나와 들리기 시작했을 때, 그는 뒤로 돌아 클로즈 데드를 겨누었다. 적일까? 생각이 든 것도 잠시 이진은 다급하게 총구를 아래로 내려놓았다. 조준한 찰나에 동양식 우산을 핀 회색빛 무희복을 입고 있는 무희가 그의 행동이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이진의 기이한 행동에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서, 핏빛의 흔적이 가득 얼룩졌던 군복과 그의 오른손에 쥔 클로즈데드까지. 그녀의 우산이 손끝에서 회전할 때마다 비가 한 방울씩 내리기 시작했다. 뜻밖의 소나기에도 이진은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고, 그녀를 주시했다. 그녀의 검은 빛 머리칼이 서서히 젖으며, 더 매혹적인 움직임을 표현했다.

“재미있는 인간이네? 어제와는 달라.”

그녀는 이진의 모습에서부터, 쿡 웃으며, 어제와 지금의 이진을 비교하듯 말했다. 알고 있는 걸까?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어제 그에게 다가온 것은 이 여자였던 것 같았다. 비를 내리는 무희. 어쩌면, 청화가 말했던 그녀가 바로 이 무희라는 생각이 차갑게 식어가는 그의 직감을 각성시켰다.


그녀는 우산을 천천히 돌리며, 더 짙은 비를 내리게 하자, 이진은 환각에 사로잡혔다. 익숙한 비. 그는 그 안에서 최후라는 기억의 속박을 느꼈다. 그녀의 비는 잠들었던 그의 내면을 끄집어내듯 채워가기 시작했다. 그의 안에 깊게 숨겨진 기억의 조각들을 채워 띄우려고 하는 것처럼.

“좋아? 넌 이 빗속에서, 정말로 하고 싶어? 그것을?”

“........당신은 누구? 왜 이런 걸?”

“싫어. 너 같은 인간에게 이유를 알려주기에는 넌 재미있으니까. 네가 그걸 보여주지 않으면, 난 너에게 이름을 가르쳐주지 않을 거야.”

그녀는 가볍게 거절하며, 웃음 속에서 그의 행동을 눈여겨보았다. 결과물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것처럼, 끝없는 비의 안개 속에서, 그를 바라보았다. 이진은 그녀의 눈동자에서부터, 들켜버린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어떤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비의 흩날림 속에서, 그녀는 유쾌한 행동을 떠오른 인간의 유희를 지켜보았다.

“그때는, 답답했고,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한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당신에게 보여준다고 해도, 이 발목에 박힌 총알이 남은 이상 소용없을 것입니다.”

“그럼 처음이야? 이런 게? 생각은 많지만, 처음으로 해본 거야?”

“그렇긴 합니다.”

“왜? 참을 수 없어? 이런 비가? 아니면,


‘좀 더 격렬하고 거친 걸 원해?’


그녀는 장난에 취해버린 악마의 시선을 드러내며, 전보다 더 강하고 거친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우산은 비의 춤에 조금씩 돌아갔지만, 비는 참혹한 소리를 뿜으며, 한 인간을 집어삼켜버렸다. 폭풍처럼 쏟아지는 비에 이진은 눈을 뜰 수 없었지만, 그녀는 고통의 파도에 휘말린 그의 심장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허름하기 짝이 없게 변해버린 그의 몰골에 그녀는 입을 열었다.

“넌 약해. 네가 생각한 꿈의 비보다는 잔혹하고 끔찍하니까.”

그녀는 웃음의 메아리를 숲에 가득히 퍼뜨리며, 본래의 소나기로 되돌렸다. 비가 약해져서야 이진은 눈을 뜨며, 잔뜩 젖은 군복의 축축함을 두 손으로 힘겹게 짜내며, 물기를 빼냈다. 그녀는 우산을 접은 채로, 나무에 기대어 소나기의 즐거운 손길을 즐겼다. 그리고 그에게 호기심을 자극하는 감정을 느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너, 뭔가 기억하는 것 같은데? 뭘 생각하고 있어?”

“네. 그렇습니다.”

“흐음? 무슨 생각?”

“가고 싶은 곳이 생겼습니다.”

“가고 싶은 곳? 정말로 내 비 때문에 가고 싶은 곳이라는 게 생긴 거야?”

그녀의 되물음에 이진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옷과 살을 꿰뚫어버릴 것 같은 비였지만, 이진은 그 속에서, 동료들이 기억이 났다. 그녀는 그의 동료라 부르는 미안함과 위로의 감정을 느낀 듯 종종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미안함과 호기심으로 가득 찬 얼굴로, 품속에 천을 꺼내 잔뜩 젖은 그의 얼굴을 닦아냈다. 그녀의 조심스러운 손길에, 이진은 그녀의 행동에 움직일 수 없었다. 잠이 들고 싶은 부드러움에 취하기 시작했을 때, 그녀는 손수건을 숨기며, 방긋 웃으며, 말했다.

“멀쩡할 거야. 봐봐.”

그녀의 대답에, 이진은 그 전까지만 해도 잔뜩 젖었던 군복을 볼 수 없었다. 예전 군복 그대로, 이진의 몸에 입혀져 있었다. 그걸 확인하고 나서야 그녀를 보았을 때, 언제부턴가 그녀는 저만치 멀어져있었다. 빛이 닿지 않는 숲으로 돌아가기 전 그녀는 깜빡 잊었다는 듯 그를 보며 대답했다.

“아메하.”

“네?”

“그게 내 이름이야. 변덕쟁이지만, 같은 변덕쟁이라서 넌 재미있을 것 같아. 그 생각 끝나고 심심해지면 내 숲으로 와. 변덕쟁이 인간.”

그녀가 숲에 사라진 후 유지되었던 푸른빛의 숲에 속삭이던 소나기는 서서히 멎어가며, 이내 그쳐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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