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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시니 002

by 반척수 posted Jun 27, 2017 (14시 56분 31초) Letters cou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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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

 

 우리 학교에는 한가지 전설이 있는데, 우리는 그 전설을 '욕심쟁이 시니'라고 부른다.

 시니는 학교의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곤란에 처한 사람에게 나타나 도움을 주고는 사라진다고 한다. 

 하지만 우습게도 이 상냥한 존재를 우리들은 욕심쟁이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시니는 자신이 도와준 사람에게서 언젠가 그 댓가로 행운을 앗아간다는 전설이 있기 때문이다.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끝이났다. 그러자 나뭇잎이 바람에 쓸리는 소리가 부실안으로 들어왔따. 때마침 부드러운 바람이 목덜미를 타고 물결처럼 지나갔다. 창가자리에 앉아 있었다. 하늘거리는 커튼의 틈새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지만 활기찬 녀석이 떠나간 부실안은 어둡고 냉기가 흘렀다.

이하고는 의자를 절뚝거리며 몸을 돌렸다. 창가에 턱을 괴고 밖을 내려다봤다. 이른 봄 날. 정오의 햇살에 눈이 부신 탓에 눈을 잔뜩 찡그리자 가늘어진 풍경에 한 사람의 뒷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학교 별관의 맞은 편에는 작은 연못이 하나있다. 그리고 거기에 한 가운데에는 학교의 창립자라고 하는 노교수의 동상이 덩그러니 있다.

마치 세상과는 단절된 존재인 마냥 팔걸이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 책을 내려다 보고 있는 차가운 낯빛의 동상. 늙은 학자처럼 때로는 고고하기도 때로는 쓸쓸한 감상을 일으키는 그의 정체가 시니라고 사람들은 믿는 모양이었다.

그의 연못에 동전을 던지면 시니가 나타나 소원이라도 들어주기라고 할 것이라 생각하는지 사람들은 오고가며 그곳에 동전을 던지고는 하였다.

그녀도 그들 중 하나였다.

그녀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퐁당. 퐁당. 소리가 나며 연못에 작은 파문이 일렁거렸다.

그래도. 저건 제 정신이 아니지.”

어느새 그녀가 던진 동전이 5천원. 동전으로는 50개가 넘어가고 있었다. 정신이 나간 것이 아닐까. 누군가 말리지 않았다가는 연못을 동전으로 가득 채울지도 모를 기세다.

그 장면을 보고 있으려니 저도 모르게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녀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겠지. 호기심도 연민도 아닌 무미건조하고 매마른 눈동자를 한 채 그녀를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다가 옆의 쟃빛의 시니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저렇게 간절하다면 진짜 시니라도 나타나지 않고는 베기지 못할거라고, 그런 생각을 들었을 때였다.

문득 세찬 바람이 불어와 연못을 쓸고 지나갔다.

그녀는 갑작스러운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다.

불현듯 아주 잠깐 연못을 담은 것 같은 하늘색 눈동자를 이쪽으로 향했다.

순간. 눈이 시려 옷소매로 이마를 가리고 실눈을 떴다.

그 깊은 연못에 파문이 일렁거리는 물결이 눈에 보였다. 마치 부실의 안으로 쓸려 들어오는 것 같이 일렁거렸다.

 

 

 

 

1. 속물주의가 낳은 바보.

 

잠깐 동안 발걸음이 멈춰 버리고 말았다. 인기척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앞에서 걸어가던 서주 선배도 멈추었다.

뭐였지 방금?”

누군가 있는 것 같았는데.”

지누 선배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뒤로 돌아서 핸드폰의 라이트 빛을 비추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움켜쥐고 있던 핸드폰을 켜서 시간을 보니 어느덧 저녁 8시가 지나고 있었다.

기분 탓이었을까요?”

, 글쎄.”

하긴 이 시간에 누가 있을 리가 없잖아?”

지누 선배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고 겨우 말했다. 가뜩이나 수척한 얼굴이 더 수척해보였다. 반면에 언제나 쾌활한 서주 선배는 오늘따라 이상하리만큼 얼굴이 굳어 있었다.

가자.”

듬직한 체격에 맞지 않게 서주 선배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어둠에 쌓인 도서관에서 우리 셋은 천천히 앞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지금 시간에 학교에 우리들 말고 다른 사람이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려했지만 불현 듯 불길한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서주 선배의 뒤를 따라 키높은 책장들의 숲으로 들어간다. 빽빽이 쌓인 책장들 사이를 지나치다 문득 지누 선배가 말했다.

정말로 이래도 되는 걸까?”

“.....어쩔 수 없잖냐.”

서주 선배는 제자리에 서서 한숨을 내쉬었다.

꼭 이런 방법밖에 없는 걸까요. 나도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런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서주 선배도 마찬가지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서주 선배의 말에 지누 선배도 동의한 것인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앞을 향해 빛을 비추었다.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듯 다시 앞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마치 귀신에게라도 홀린 듯이 말이다. 홀렸다니.... 어쩌면 홀렸다는 표현이 적절하리라. 우리는 어쩌면 시니에게 홀린 것이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책장의 끝에 다다랐다. 그러자 이제 시작이라도 하자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 서주 선배가 책장의 앞으로 나섰다. 나는 긴장한 탓인지 손을 꽉 쥐어 가슴 앞에 가져다 대었다. 한숨같은 심호흡을 내뱉는 서주 선배의 숨소리는 마치 신음같았다.

저기...”

그렇게 말하고 서주 선배는 책등을 툭툭쳤다. 하지만 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서주 선배는 우리를 흘겻 보았다. 우리의 시선이 서주 선배를 닦달하듯이 느껴진 것인지 서주 선배는 짐짓 못마땅한 얼굴로 같은 말을 되씹은 그 순간이었다.

저기...시니..?”

시니. 그 한 마디에 일순간 우리는 숨을 멈추었다.

소문속의 존재. 그 시니가 과연 우리들의 앞에 나타날까. 우리들 중 누구도 확신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결국에는 왔구나.”

어디로부터 들려오는지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에 생기라고는 없는 마치 한탄에 가가운 목소리였다.

서주 선배는 그 목소리에 몇 발자국 물러섰다.

우리들 사이에서는 꽤나 대담한, 나쁘게 말하면 저돌적인 이미지의 서주 선배의 저런 모습을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 하지만 서주 선배의 저런 모습도 이해를 못하지는 않았다.

그 소문속의 귀신같은 시니가 드디어 나타났기 때문에 서주 선배가 저렇게 겁에 질린 얼굴을 하는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우리는 지금 어딘가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시니를 진짜 시니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진짜 시니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은 하지 않지만, 적어도 지금 순간의 시니는 진짜가 아니라는 확신은 있었다. 메신저로 연락하고, 지정된 시간, 지정된 장소에서만 자신의 모습을 숨긴채 나타나는 이 목소리가 진짜 시니일리는 없으리라. 심지어 상담비에 성과급까지 요구하는 이 존재가 소문속의 시니일리는 없다.

시니?”

서주 선배가 조심스럽게 묻자 곧 바로 시니의 대답이 들려왔다.

편할대로 불러도 상관은 없지만....”

나는 빙글돌며 주위를 살펴보았다. 시니의 목소리는 사방에서 들려오고 있었지만 목소리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너희가 멋대로 날 찾아오는 건 곤란해. 그리고.”

시니는 깊은 한숨을 흘리고 이어서 말했다.

너희는 나랑 한 약속조차 지키지 않았어. 내가 너희를 도와주는 건 저번이 마지막이었고 두 번 다시 날 찾지 않기로 했을텐데.”

그건.”

서주 선배는 시니의 일침에 반박을 하지 못했다.

차갑게 식은 시니의 목소리게 그만 나도 침을 꼴깍 사키고 말았다.

시니라는 녀석과 오늘에야 말로 담판을 짓겠다던 지누 선배는 아까부터 어느새 내 뒤에 바짝 붙어 있었다. 자신의 볼을 따갑게 때리며 다그쳤던 주제에 이렇게 꼴불견이라니.

그건...미안하게 생각하고 있긴 한데. 하지만 우리의 입장도 이해해주길 바란다.”

너희의 입장?”

시니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건 서주 선배를 자극하기에 적절했던 것 같다. 서주 선배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하지만 서주 선배는 애써 화를 가라 앉히고는 사람 좋게 말했다.

너도 알겠지만.... 우리는 학생회잖냐. 우리는 그런 책이 학교에 돌아다니는 걸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없었고 너가 도와준 덕분에 그 책을 찾아낼 수 있었어. 하지만...”

나는 불쑥 찾아온 곤혹감에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시니가 없었다면 학생회는 그 책을 찾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무엇인가 잘못됬다고 느끼고 있었다. 서주 선배는 아까부터 근거없는 고압적인 자세로 시니에게 명령을 내리듯이 말하고 있었다.

조금 다른 문제가 생겼어.”

서주 선배는 답답한 듯 목깃을 풀어 해쳤다.

그 책을 만든 장본인이 누군지 알려줬으면 좋겠어.”

장본인? ?”

그게 말이야. 학교 측에서도 알아버리고 말았거든. 허가서 학교에 그런 책이 학생들 사이에서 떠돌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이상 그 책을 만들어서 퍼트린 사람은 책임을 져야 되.”

그래서 시니가 책을 쓴 장본인을 찾아 줬으면 좋겠다고, 서주 선배는 요구했다. 서주 선배의 장황한 요구에 시니의 대답은 간결했다.

찾아서 어쩔 생각인데.”

학교에서는 이미 그 책을 쓴 장본인을 찾는다고 혈안이 되어있어. 스스로 자백하면 심한 처벌까지 받지 않을테니까 학교에서 찾아내기 전에 우리가 먼저 자백하기를 권유할 생각이야.”

“....하하....”

그것은 분명한 웃음소리였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아무런 감정도 없이 차갑게 비웃었다.

그 소리가 서주 선배의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은 당연했다. 서주 선배도 그리고 내 뒤에 숨어있던 지누 선배도 얼굴을 내밀고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시니는 이어서 아무 말이 없었다. 숨소리도 내지 않은 채, 이 어두운 공간 어디에선가 살벌한 두 눈으로 우리를 쳐다보고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서주 선배는 꽤나 감정을 절제하는 것 같아 보였다. 주먹을 꽉 쥔 채로 짝다리를 짚고 서있었다. 하지만 끝내 들려온 시니의 조소에 그만 참지 못했다.

친절하구나. 너희들은.”

이봐! 비웃지 말라고! 정체도 숨긴채 시니 흉내를 내는 녀석이 뭘 안다고 그러는 거야!”

그래. 맞아! 너만 우리를 도와주면 책을 만든 그 사람도 무사할 수 있다고.”

흥분해서 떠드는 서주 선배를 따라서 지누 선배도 덩달아 합세하였다.

시니?”

문득 불안한 기색에 나는 소리없이 시니를 불러보았다. 그러자 차갑게 식은 목소리가 책장 사이에서 세어 나왔다.

그 책을 만든 장본인이 누군지도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아.”

시니는 진심으로 한숨을 내뱉었다.

찾으려고 하지마. 그럼 다들 무사할 테니까.”

나는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시니의 말이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아직까지 난 솔직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서주 선배도 지누 선배도 최대한 일을 조용히 해결하자고 했지만 그 책을 쓴 장본인을 찾아내는 건 오히려 일을 키우는 것은 아닐까.

그때였다. 갑자기 서주 선배가 앞으로 나서서 손바닥으로 책장을 치기 시작했다.

웃기지마! 이봐! 너가 상담비라면서 뜯어간 돈이 얼마나 되는 줄 알아? 그 돈을 우리가 어떻게 구했는데!”

그리고는 빌 듯이 서주 선배는 계속해서 말했다.

이번 한번이면 돼! 이번 한 번만. 어려운 사람을 돕는게 원래 너가 할 일이잖아?”

그 모습은 내가 보기에도 이상했다. 서주 선배는 왜 저렇게 까지 하는 것일까.

하아.”

시니는 작은 한숨소리를 낸다.

“....그래.”

?”

?”

그래. 그래야겠지.”

갑작스런 시니의 반응에 우리들은 모두 얼이나간 표정을 지어보였다.

서주 선배는 잠시후 마치 자신이 시니를 설득시켰다는 듯이 의기양양한 얼굴이 되었다. 방금 전까지 울것같은 얼굴이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어째선지 나는 이유모를 불안감에 휩쌓였고, 그 이유를 깨달은 것은 생각보다도 더 빨리였다.

책장을 향하여 내일까지 부탁한다고 때를 쓰는 서주 선배와 그리고 덩달아 이제 이 일이 끝날거라는 안도감에 다리가 풀린 듯 책장에 기댄 지누 선배. 그리고 그 모습들 뒤로 보이는 복도쪽으로 나있는 창가를 보고서 나는 나를 짓누르고 있던 불안감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복도의 짙은 어둠속에서 두 눈동자가 이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차가운 눈동자를 정면으로 마주해버린 나는 그만 자리에 얼어붙어 버리고 말았다.

. 손에서 핸드폰이 덜어졌다. 그제서야 무엇인가 문제가 생겼다는 이질감이 느껴졌던 건지 서주 선배는 불현 듯 인기척이 느껴지는 밖을 향하여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문득 익숙한 기계 소리가 들려왔다.

. . . . “비밀번호가 틀렸습니다.”

그 소리의 정체를 우리는 모를 리가 없었다. 방금 전 우리가 몰래 도서관에 잠입할 때와 마찬가지로 들은 소리기도 했다.

. . . . “비밀번호가 틀렸습니다.”

하지만 번호를 누르는 소리를 뒤 따르는 소리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 의미를 우리들은 아직까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강제로 잠금장치를 열고 도서관의 안으로 들어오려는 것일까. 아니 그것은 아니리라. 이미 입구의 잠금장치는 자신들이 풀어놓고는 문을 열어놓고 왔었다는 것을 서주는 겨우 기억해냈다.

그리고 다시 삑. . 버튼을 누르는 소리가 나기 시작하고서야 서주와 지누는 헐레벌떡 도서관의 입구를 향하여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비밀번호가 틀렸습니다.”

그런 소리가 종언처럼 들리자마자 두 사람은 두 눈을 질끈 감고는 화들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방금 전까지 어둠에 적응했던 눈이 천장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등빛을 견딜수는 없었으리라.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었다. 도서관의 사방에서 귀가 먹먹할 정도로 경고음이 터져나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삐용. 삐용. 삐용. 거리는 소리와 함께 도서관의 모든 출입문과 창문이 자동으로 잠겼다.

너 이 자식!!!”

서주 선배의 괴성에 정신을 차린 나도 입구쪽으로 뛰어 나갔다. 서주 선배는 단단히 닫겨진 입구를 흔들면서 밖을 향하여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지금 뭐하는 거야!!! 이 문 안 열어!?”

서주 선배는 우리가 도서관에 몰래 들어왔던 그대로 올바른 비밀번호를 입력했지만 문을 꼼짝하지 않았다. 그제서야 나는 잘못된 비밀번호를 3회 이상 잘못 입력한 경우 자동적으로 모든 출입문이 막힌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서주 선배의 반대편에는 검은색 후드티에 검은색 야구모자까지 뒤집어 쓴 남자가 서있었다.

서주 선배보다 조금 작은 체구였다고는 하나 서주 선배는 내가 보기에는 충분히 건장한 선배였다. 그런 선배보다 조금 작다는 건 밖의 남자도 내 눈에는 꽤나 키 큰 남자였다는 것이었다.

푹 눌러쓴 모자 때문에 얼굴의 절반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남자는 낮게 깔린 목소리로 충고를 하듯 우리를 향해 경고했다.

경고음이 꺼지고 나서야 나갈 수 있을거야. 운이 나쁘면 그 전에 보안업체 직원들이 먼저 올 수도 있고.”

, 뭐라고?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거야! 이 가짜 녀석이!”

저게 바로 시니의 정체인 것일까.

서주 선배의 옆에서 지누 선배가 부들부들 떨면서 비밀번호를 몇 번이고 입력했지만 문은 열리지 않는다.

서주 선배의 욕설에 문밖의 남자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안을 들여다 보기만 한다.

,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우리 좋게 해결하기로 한거 아니었어!?”

지누 선배가 문 여는 걸 포기하고 남자에게 물었다. 남자는 한숨을 흘리고는 모자를 좀 더 깊게 내려썼다.

그쪽이 진작에 해결했어야 하는 일을 도와주려는 것 뿐이야.”

? 넌 이게 도와주는거냐!!!”

흥분한 서주 선배가 소리를 질러댔다.

결과적으로 문밖의 그는 우리를 골탕먹인 셈이 된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 남자의 말에 거짓은 없어보였다. 적어도 남을 골탕먹이는데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뭘 어쩔 셈인데!”

그 책을 찾아서 없앤다. 처음에 약속했던대로.”

. 잠깐 없앤다니?”

문을 흔들던 서주 선배의 움직임이 뚝 멈추었다. 그런데 갑자기 서주 선배는 웃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없애...? 하하하. 그게 어디 있는 줄 알고?”

문밖의 남자는 서주 선배의 웃음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단지 반쯤 돌아서 서주 선배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아주 잠깐 그 남자의 눈동자가 보였다. 마치 서주 선배의 모든 것을 알아내려는 것처럼 눈동자는 어둠속에서 형형히 빛나고 있었다.

“.....단순한 건 자랑이 아니야.”

문득 문밖의 남자는 성큼성큼 문으로 바짝 다가섰다.

애초에 학생회 일에 관심조차 없는 사람이 그 책을 집에까지 가져 갔을리는 없겠지. 그나마 믿는 구석이라고는 예전부터 사용하던 번호식 자물쇠로 잠겨있는 사물함 정도겠지.”

. 잠깐. .......”

서주 선배는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이마에 땀이 흐르는 것을 닦지도 못하고 문을 쥐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 한채 문밖의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문밖의 남자보다 한참이나 큰 서주 선배였지만 지금 서주 선배는 너무나도 왜소해보였다.

새로 산 시계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건들지는 않을 테니까.”

시계?”

“.........!!!!!!!!!!!!!!”

서주 선배는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치부를 들켜버린 사람처럼 식은땀을 흐르면서 밖에 있는 남자를 잡아먹을 기새였다. 하지만 눈빛만은 겁에 질린 사람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 . . . 무슨 개소리를 하는거야!!! 시계고 나발이고! 일단. 일단 얘기를 하자고 얘기를!”

“.......”

하지만 문밖의 남자는 서주 선배를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제는 질렸다는 듯이 모자를 다시 눌러쓰고는 한숨을 흘린다. 그리고는 불쑥 얼굴을 문에다 가까이 가져갔다. 그가 불쑥 오른손을 들어올리자 서주 선배는 기겁하고 꼴사납게 뒷걸음 쳤다.

남자는 마치 딱밤을 때리듯이 손가락으로 유리문을 퉁 쳤다.

“......조금은 친절해지라고.”

남자는 그 말을 남기고 뒤로 돌아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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