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학생회실에서

by 캘빈 posted Jun 30, 2017 (09시 10분 43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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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업 참여 동의

 날씨가 쌀쌀해지기 시작한 어느 날.
 학생회실에서는 여느 때와 같이 축제의 준비가 계속되고 있었다.

 "하아... 지루해. 뭐 이리 번거로운 직업이 많은 거예요. 그것도 이렇게 산더미만큼이나."

 A고등학교의 학생 부회장 한민정은 여느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쌓여 있는 업무에 푸념을 늘어놓았다.

 "어, 양이 많았어? 내 나름대로 줄인다고 줄여 본 거였는데."

 그리고 그런 민정의 말을 A고등학교의 학생 회장 정승현은 웃으면서 여느 때와 같이 흘려 넘겼다.

 "대체 뭘 기준으로 잡고 말하는 거예요? 설마 작년에 비교하는 거라면 기준을 바꿀 필요가 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만."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때만큼은 아니지. 업무에 자습 끝나고 귀가하면 항상 저녁 식사 시간 넘겼었는데. 날짜 바뀐 적도 가끔 있고."
 "... 그거 교칙 상 괜찮아요?"

 요즘은 그래도 학교 일과 중에 끝나잖아?
 싱긋 웃음 짓는 승현의 얼굴에 민정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생각해 보면 정말 비인간적인 작업 방식이었네요, 그때는. 단둘이서 학생회를 꾸리다니. 지금은 학생회 인원도 늘었고, 개별 부서의 부원들도 일을 하고 있는 데도 이 정도 작업량이잖아요."
 "아, 작년은 지금처럼 일이 많지는 않았어. 아무리 나라도 지금 그때처럼 하려면 죽지."
 "네? 그러면 어땠는데요?"
 "일단 전적으로 이지원 회장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으니까. 그 사람은 귀찮은 업무를 전부 내 쪽으로 떠넘기기는 했어도, 그 업무를 어떻게 하면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는지를 알고 있거든. 그에 따라 수행하기만 하면 되니 조금 과장 섞어 지금의 절반 정도만 일하면 됐어."

 어느새 승현은 다시 자신의 업무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의 표정에서 희미한 쓴웃음이 엿보였다.

 "나는 그만큼의 능력이 안 되니까, 너랑 다른 임원들을 고생시키는 거지 뭐. 이 부분만큼은 항상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이 사람과 대화할 땐 항상 이런 식이다. 민정은 작게 혀를 찼다. 이야기가 조금 길어진다 싶으면 시작이 어땠든 끝은 항상 이지원. 그것도 꼭 자기 자랑을 하듯이 자부심을 차서 말한다. 승현 본인이 자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물론 그녀는 A고등학교의 살아 있는 전설이고, 승현은 그 전설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증인이다. 하지만 이제는 떠난 사람을 한두 번도 아니고 틈만 나면 화제로 꺼내는 건 민정 입장에서 짜증이 나기 충분한 일이었다. 그 감정에는 분명히 질투가 섞여 있었다. 민정 본인은 죽어도 인정하려 하지 않겠지만.

 "아무도 선배한테 그걸 기대하지는 않거든요. 그 사람이 규격 외 존재인 거지. 제 개인적으로는 이지원 회장의 지시를 3년 간 따라갈 수 있었던 선배가 더 경이롭게 느껴져요."
 "하하. 그런가?"
 "그렇다니깐요."

 그 대답을 마지막으로 둘의 대화는 멈췄다.

 현재 시각은 오후 5시 50분. A고등학교의 귀가 권장 시간이 10분도 채 남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민정은 간신히 오늘의 할당량을 마칠 수 있었다. 깊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승현의 모습을 살피자 꽤 여유 있는 모습이었다. 그도 슬슬 돌아갈 준비를 하려는 것 같다.
 민정은 이때다 싶어, 아까 대화 도중에 떠오른 질문을 던졌다.

 "승현 선배."
 "응?"
 "부회장을 하다가 회장이 되면 기분이 어때요?"
 "어려운 걸 묻네... 일단 부담감이 확 오르지. 학생회가 까일 때 대상이 되는 건 회장이지 부회장이 아니니까. 게다가 전임 회장이 업무에 관해서는 욕 먹는 걸 들은 적이 없기도 하고."
 "회장 되기 전까지는 그럴 줄 알고 있었어요?"
 "어떻게 알았겠니. 나름 3년 동안 일만 했으니 대충 흉내는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애초에 내가 회장을 하게 될 거라고 생각조차 못 했고."

 이런 질문은 예상조차 못한 건지 승현은 영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런 기회를 놓칠쏘냐, 민정은 계속해서 질문을 이어나갔다.

 "부회장을 하면서 회장 할 생각을 전혀 못했어요?"
 "우리 학교 부회장은 임명직이잖아. 부회장 지내고 회장까지 한 경우는 거의 없을 걸."
 "... 그럼 회장 선거는 대체 언제부터 준비한 거예요? 그냥 이지원 회장이 너 나가라 해서 나갔어요?"
 "당연히 그건 아니고. 계기... 라고 해야 하나? 딱 선거하는 학기 되어서야 출마하겠다는 결심이 섰지."
 "그럼 처음부터 그 계기를 말해줬음 됐잖아요!"

 민정의 투정에 난처하게 웃는 승현. 스토리텔링은 그의 특기가 아니었다.

 "어디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까..."

 승현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회상했다.



 "정승현. 선거가 다가오고 있다."
 "아아, 벌써 그런 시기인가요? 그나저나 이 학교는 무슨 생각으로 기말평가가 얼마 남지도 않은 때에 학생 회장 선거를 치르는지..."
 "그건 내가 제안한 일이다만? 뭐가 문제지?"
 "..."

 후폭풍이 두려워진 승현은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며 스스로의 업무에 몰두했다.

 "대답 안 할 거야? 그럼 내가 의의를 설명할게. 학생회가 스스로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유권자, 즉 학생들의 피드백이 필요하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게 실행되는 방법은 선거밖에 없어. 새로운 학생회를 뽑는 거지. 하지만 그게 학기 초에 이루어졌다간 사이에 공백이 생긴단 말야. 방학이 끝나고 나서 학생회가 정상적으로 운영되기는 어려워. 그렇기 때문에 선거는 학기 후반에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맞아."
 "... 맞는 말씀이십니다."
 "그리고 새로운 학생회가 당선되었다면 기존의 학생회는 그 동안의 프로젝트를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 그렇기 때문에 기말평가 전. 기말평가가 끝나고 상당히 풀어지는 시간 동안 학생회를 마무리하는 거야. 그렇게 함으로써 새 학생회도 더욱 더 빨리 업무를 인계받을 수 있지."

 기말평가 기간에 선거를 준비해야 하는 후보들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시지 않고 계시는군요... 물론 당신이라면 시험이라는 걸 준비해 보신 적이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
 승현은 그저 말없이 웃었다.

 "너, 표정이 어째 몹시 도전적이다."
 "아닙니다!"

 무심결에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마는 승현이었다.

 "뭐, 본론으로 돌아가서. 선거철이라... 긴장되는데."
 "예?"

 그리고 이지원의 말에 승현은 스스로의 귀를 의심했다.

 "김장이요? 간장이요? 공장이요?"
 "재미없는 이야기 한마디만 더 하면 가만 안 둔다."
 "... 죄송합니다."

 이어진 지원의 목소리는 살짝 토라져 있었다.

 "아무리 나라도 긴장은 한다고. 넌 나를 대체 어떤 사람으로 보고 있는 거야?"

 감정 없는 로봇? 인간 컴퓨터? 푸른 피의 마녀?
 승현은 떠오른 단어들을 재빨리 머릿속에서 지웠다.

 "그것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나서는 선거라면, 긴장하는 수밖에 없지 않겠어."
 "... 예?"

 그렇게 다시 한 번 승현은 스스로의 귀를 의심했고, 지원은 능청스러운 미소로 답했다.

 "어라? 너한테 말 안 했었나? 내 임기는 이번 학기로 끝이야. 다음 선거는 출마 안 해."




 "역시 최고로 싫은 성격의 인간이예요. 이지원 선배는."
 "부디 그 말이 선배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기를 바랄 게... 완전히 부정할 수 없다는 게 조금 슬프지만서도."
 "그럼 선배가 회장으로 선거 나가는 건 그 때 결정난 일이란 말이예요? 지난 학기 중간 평가 이후?"
 "아니 아니, 내 출마가 결정난 건 그보다 조금 더 뒤. 그때 당시는 완전히 패닉이었으니까."
 "하긴 그렇네요."




 시각은 오후 10시. 지원마저 떠나 버린 학생회실을 승현 혼자서 고독하게 지키고 있었다.
 평소의 여유 있던 웃음은 어디 갔는지, 지금 남아 있는 것은 딱딱하게 굳어 있는 표정뿐.

 "이지원 선배의... 마지막 임기라."

 물론 내년에 지원은 12학년이 된다. 그건 일반적인 수험생의 기준으로는 반드시 대학 진학을 위하여 매진하게 되는 시간이며, 그것은 지원 역시 마찬가지일 터.
 그러나 승현은 지원이 학생회장 자리를 포기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지원 회장이 학생회장이 아니라니. 상상하지 못한 건 아니지만, 상상 속에선 아직 1년이 남았었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니 그녀가 학생회를 떠난다는 사실이 더욱 더 가깝게 느껴졌다.
 어떻게 해야 할까. 5년 동안 학생회 임기를 수행한 학생회장을 어떻게 떠나 보내야 할까. 학생 부회장으로서 축하 파티라도 계획해 줘야 하나? 감동 먹을 이벤트라도 준비해야 하나? 수험생인 학생회장을 위해 지금 업무를 더 떠맡아야 하나?

 "그건 아니지..."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맴돌았지만, 단숨에 사그라 들었다. 이지원이 그런 미적지근한 것들을 반길 위인인가. 마지막까지 본인답게, 자신에게 남겨진 책무를 완벽하게 끝마치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자리에서 내려올 것이다.

 '학생회실. 잘 부탁할게.'

 지원이 오늘 이 방을 떠나면서 남긴 건 오직 이 한마디.
 그 말의 의미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무겁게 다가왔다.

 "학생 회장... 정승현."

 스스로 말해 보기에도 너무나도 어색한 호칭. 오직 '부' 한 글자가 빠졌음에도 이상하기 그지없다.
 내가 학생회장이 될 자격이 있을까. 오랜 부회장 생활로 경험을 쌓긴 했지만 그건 말 그대로 부회장으로써의 업무를 담당했을 뿐이다. 학생회의 방향을 결정하는 건 학생회장. 그건 또 다른 1년 동안 지원으로부터 더 배우고 싶었던 것이다.

 그에 앞서.
 과연 지금 상태로 학생회장으로 당선될 수 있을까? 학생이 뽑은 건 이지원이다. 정승현은 이지원에게 지명되어 학생 부회장으로 임명되었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잡무 처리 위주였다. 그걸 맡았을 뿐인 정승현에게 대체 누가 표를 던질까.
 몇 번을 다시 생각해 봐도 승현은 학생들이 스스로에게 표를 던질 이유를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사실 그것보다 두려운 일이 있었다.
 신뢰를 저버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부담감.
지원은 승현에게 학생회실을 맡긴다고 말했다. 그건 아마 지원이 승현에게 걸 마지막 기대가 될 것이다.
그 기대만큼은 어떻게든 보답하고 싶었다. 3년 동안 신세를 진 사람이다. 성장한 모습을 보여 줘야만 했다.
 그러나 지금 승현에게는 그걸 성취할 수 있다는 자신이 없었다.


 그 다음날.
 학교 전체에 이지원 회장이 출마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야 정승현, 정승현! 이지원 회장 안 나온다며. 진짜야?"
 "그렇게 말했던 거 같은데..."
 "그럼 학생회는 앞으로 어떻게 돼? 대혼란상태?"
 "그냥 다른 회장이 뽑혀서 하는 거지 혼란 상태는 무슨."

 덕분에 승현은 등교하자마자 엄청난 인파에 둘러싸여 질문 세례를 받는 상황에 놓였다. 정작 당사자인 지원에게는 아무도 몰려들지 못했지만.

 "그나저나 그 정보는 어디서 들은 거야?"
 "어제 밤에 학교 사이트에 올라왔던데. 짧은 글로 학생회장은 이번 학기를 마지막으로 하겠다고 적혀 있었어."

 역시 그런가.
 지원은 승현을 아꼈지만 그를 편애하지는 않았다. 그에게 도움을 주는 걸 아끼지 않았지만 그것은 그의 잠재적 경쟁자에 대해서도 다르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이런 중요한 정보를 승현 혼자에게만 알릴 리는 없었다.
 승현은 남몰래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승현. 차기 학생회장을 노리는 겁니까! 이제 절대강자도 없어졌으니 정승현의 시대가 펼쳐진다 이겁니까!"
 "아하하하."

 그 말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웃음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었다.

 

---

 

 "완전히 패닉 상태였네요."
 "일찍 침대에 누워도 잠 들 수가 없었고, 겨우 잠에 들었다 싶으면 몇 시간만에 깨 버리고. 학교에 다니면서도 전혀 집중을 못했었지."
 "... 이지원 회장이 출마하지 않는다는 소식이 그렇게까지 충격이었어요?"
 "음, 물론 그것도 상당히 견디기 힘들었지만... 결국 스스로의 목을 조이는 건 자기 자신이지.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게 되니까. 그리고."

 살짝 어두워진 분위기에 승현은 말을 멈췄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인 후, 부끄러운 듯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 갔다.

 "가장 큰 문제는 내가 내 기분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거였으니까."



 아무런 전달사항 없이 종례는 끝났다. 평소라면 담임이 말을 마치자마자 학생회실로 뛰어가다시피 하는 승현은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야 정승현, 요즘 웬일로 이렇게 피곤해 보여? 뭔 일 있어?"

 그런 승현에게 희연이 히죽이며 다가왔다.

 "새삼스럽게 무슨 소리야. 내가 피곤하지 않았던 날이 오히려 손에 꼽을 정도다."
 "그러고 보니 넌 입학할 적부터 일에 치여 살았군."

 입학하자마자 학생회 업무에 시달려 온 승현이다. 코웃음 치는 그의 말에 희연은 킥킥 웃더니, 순순히 동의했다. 하지만 그것은 승현을 놓아주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그래서 지쳤으니까 학생회는 때려칠 생각?"
 "... 나한테 왜 그러냐 너까지."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승현은 희연의 눈을 피해 홱 고개를 돌렸고, 희연은 잠깐 멍하게 보고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이렇게까지 노골적인 거부 반응을 예상하지는 못했나 보다.

 "야, 야. 너 언제부터 이렇게 귀여워졌냐!"
 "말 걸지 말아주세요."

 승현의 바람과는 정반대로 희연은 대화의 의지로 충만했고,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하겠다는 듯 그의 옆에 비어 있는 책상에 걸터앉았다. 포기한 표정으로 승현은 턱을 괴고 희연과 마주했다.

 "농담은 여기까지로 하고... 너 후보자 등록 안 했다며? 기한 내일 오전이다. 내일 모레 연설이고. 니가 모를 리도 없겠지만."
 "응."
 "어디에 대한 응인지 모르겠거든? 내년 쉴 거야?"
 "몰라 나도."
 "뭐야, 모른다니."

 승현은 질린 얼굴로 답했다.

 "내가 여기서 '응, 선거 안 나가려고'라 한다 치자. 넌 그럼 어쩔 거냐?"
 "'뭐어어어어? 그거 진심이야? 요즘 학생회에서 무슨 일 있었어? 왜 그래 왜 그래!' 라고 흥분해서 캐묻겠지."
 "... 그렇지. 이 정도로 편향적인 질문에 응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래서. 정말 안 나가는 거야?"
 "이 학교 사람들은 뭐 이리 학생들 출마 여부에 관심이 많아?"
 "아니, 대부분의 사람한테는 관심 없어. 니가 나간다는 말 없이 미적대니까 이렇지."
 "일깨워줘서 고맙다!"
 "음, 태도를 보니 '이지원 회장 임기 말이라 바빠서 미처 등록을 못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등록 신청서 제출할 거다'라고 대답할 생각은 아예 없었다는 거네."

 에휴, 작게 한숨을 내쉬는 승현. 지금 그에게 있어서 학생회장 선거는 피하고 싶은 화제일 뿐이었다.

 "후보자 등록, 많이들 했어?"
 "그렇지. 지원 언니 출마 안 한다니까 기회다 싶어 도전해 보는 거 같아 다들. 선배들 중에서 쟁쟁한데 언니한테 밀린다 싶어 안 나왔던 사람들 좀 나왔더라. 신문부 부장에 축구부 주장에... 아, 이거 선관위 밖으로 이야기하면 안 되는데. 비밀이다."
 "야 인마... 학급 임원을 선거관리위원으로 자동 임명하는 제도는 좀 고칠 필요가 있겠... 아."

 무의식적으로 학생회 부회장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승현의 발언에 희연은 씨익 웃고 말았다. 머쓱해진 승현은 억지로 화제를 돌렸다.

 "너는 나갈 생각 없냐, 김희연? 6년 연속으로 학급 반장을 해 먹을 정도의 인망인데 노려 보지 그래?"
 "난 그렇게 큰 일들 이것저것 다루는 것보단 교실에서 애들이랑 선생님이랑 투닥거리는 게 더 재밌어서. 그리고 나 따위 경력을 어디 3년째 부회장으로 뛰고 계신 정승현 씨께 갖다 대겠습니까?"
 "부회장은 임명직이었잖아..."

 희연의 넉살을 자연스럽게 받아칠 기력이 승현에게는 남아 있지 않았다. 이제야 희연은 조금 걱정이 되었는지 목소리를 살짝 낮췄다.

 "자신이 없는 거야?"
 "음... 결국은 그렇지. 난 투표로 당선되어 본 적이 없기도 하고."
 "진지하게 니가 다른 후보들보다 경쟁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해? 그 이지원 밑에서 3년을 버틴 니가?"

 승현은 강하게, 거의 쥐어 뜯을 것 같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당장 등록 마감이 내일인데 이렇게까지 미적대고 있는 후보를 누가 뽑아주고 싶겠냐고. 처음에 말했잖아, 모르겠다고. 내가 뽑힐 수 있을지, 없을지. 회장으로서 학생회를 이끌어 나갈 수 있을지, 없을지. 내가 이 선거를 나가고 싶긴 한 건지, 아닌지. 이지원 회장이 안 나온다는데 지금 대체 어떤 기분인지."
 "니가 이렇게까지 감정적으로 고생하는 건 만나고 처음인 것 같아."
 "그러게. 예상 못한 사태에서 내 밑천이 다 드러난다. 준비 부족이야."

 잔뜩 풀 죽은 승현을 보고 있자니 희연의 기운도 점점 빠져나갔다. 둘은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큰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이 사태의 원인인 지원 언니는 애초에 왜 안 나온대?"
 "그러게. 전혀 모르겠다. 내가 언제 회장 생각을 제대로 알았던 적이 있겠냐마는."

 승현에게는 알 수 없는 일만 계속해서 늘어가는 지난 일주일이었다.

 휴대전화로 시간을 확인한 희연은 작은 목소리로 궁시렁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자기 자리로 돌아가 빠른 동작으로 가방을 챙겼다.

 "나 슬슬 갈게. 학원 또 쨌다간 엄마한테 죽음이다. 벌써 네 시 반이네. 그러고 보니 넌 오늘 학생회 없어?"

 잠깐, 몇 시? 승현은 스스로의 귀를 의심하며 교실 뒷 편의 시계로 시선을 보냈다. 승현의 의심에도 시계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네 시 삼십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 이런 씨... 나 먼저 간다, 내일 보자!"

 승현은 여태까지의 기운 없는 모습은 뭐였냐는 듯 허둥대며 교실을 뛰쳐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보고 희연은 작게 웃었다.

 "뭐야. 괜히 걱정했네."

 

---

 

 "죄송합니다!"

 

 숨을 헐떡거리며 학생회실로 뛰어들어온 승현. 그 모습을 거들떠 보지도 않은 채 지원은 목소리만을 건넸다.

 

 "웬일이냐? 네가 다 늦고. 이제 내 임기 끝나간다니까 벌써 레임덕이야? 건방진데?

 "서, 설마요. 친구랑 떠들다 보니 시간 확인을 못해서..."

 

 황급하게 변명에 나선 승현이었지만 지원은 처음부터 농담이었는지 별로 신경을 쓰는 눈치도 아니었다. 멋쩍어진 승현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죄송합니다. 늦었지만 바로 작업 들어갈게요. 끝마치기 전엔 안 돌아갑니다."

 "됐어. 오늘은 네 일 없다."

 "네?"

 

 무슨 말도 안 되는... 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승현은 간신히 참아냈다. 하지만 그도 이상할 게 없었던 것이 승현이 학생회에 들어온 이래 그에게 일이 주어지지 않았던 날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당황하는 승현에게 지원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

 

 "너 후보자 등록 아직 결정 안 했다면서?

 "아..."

 

 누구와는 다르게 지원은 변화구 따위는 던질 생각조차 없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승현이 예상할 수 없었던 질문은 아니었겠지만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에 빠르게 들어오는 직구에 곧바로 대처할 수가 없었다.

 

 "... 회장도 선관위에 친구 있으세요?"

 "뜬금없이 뭔 소리야. 선관위는 후보자 등록 정보 발설 금지잖아. 주변에서 네 상태 안 좋다는 소식만 들려오니까 그렇지."

 "하하... 그렇죠."

 

 오늘은 끝장을 보겠군. 승현은 쓴웃음지었다. 당장 내일이 마감이기에 더 이상 보류한다는 선택지는 남아 있지 않았다. 당연한 사실을 인정하니 어쩐지 머릿속이 말끔해지는 느낌마저 들었다. 승현은 지원의 맞은 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째야 될까요? 저."

 "쭉 현실도피만 하다가 그걸 이제 와서 나한테 물어? 너도 몇 년 사이 상당히 뻔뻔해졌구나."

 "아무래도 허세 부리다 누구한테 죽도록 깨지는 것보단 나으니까요."

 

 비난하는 말과 달리 지원의 목소리는 날카롭지 않았다. 어처구니없어 웃는 표정에서는 그녀의 유쾌한 기분이 엿보였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지원은 이 천연덕스러운 후배에게 그녀답지 않게 물렀다.

 

 "좋아. 이야기나 듣자. 뭐가 문제라고 생각해?"

 "문제, 요."

 

 나지막히 대답한 승현은 생각에 잠겼다. 문제 해결의 첫 단계는 문제를 명확하게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승현이 지난 며칠간 괴로워했던 건 스스로도 무엇이 문제인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 동안 찾아내지 못했던 문제를 고작 몇 분 동안 깨달을 리 만무했다. 정답을 내는 것을 포기한 승현은 자신 없는 목소리로 지금 유일하게 떠오르는 답을 말했다.

 

 "겁 먹은 게 아닐까요. 홀로서기에."

 "겁? 무섭다고?"

 "회장 없이 제가 학생회를 잘 이끌어 나갈 수 있을지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지원이 승현의 답을 일축했다. 찌푸린 얼굴에서 그녀의 불만족스러움이 드러났다.

 

 "정승현, 혼자인 게 겁 난다고? 내가 없는 게 무섭다고? 정승현이 익숙하지 않은 일에 시행착오를 하는 걸 두려워 해? 정승현이 누군가의 지시 없이 행동하는 걸 두려워 해? 그건 대체 어디 사는 정승현이냐?"

 

 지원은 속사포처럼 일갈했다.

 

 "거짓말하지 마."

 

 그녀의 박력에 살짝 위축되긴 했으나, 애써 생각해서 내놓은 대답을 처음부터 끝까지 부정당하자 승현으로서는 억울함이 앞섰다.

 

 "... 준비되지 않았으니까요. 이럴 거면 조금 더 빨리 알려줬으면 좋았잖아요."

 "준비되지 않았으니까 당황했겠지. 하지만 네가 당황한 게 절대 겁 먹어서는 아냐."

 

 지원은 질렸다는 듯 한숨 쉬었다. 그녀의 태도에 승현도 점점 약이 받쳤다.

 

 "알겠어요. 그럼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자신이 없는 게 문제겠죠. 선거를 이길 생각도 학생회를 잘 해 나갈 생각도 안 드니까."

 "자신이 없다. 아깐 겁 먹어서고, 이젠 자신이 없다."

 "대체 뭐가 그렇게 맘에 안 들어요?"

 "네가 자꾸 딴소리로 도망가려 그러잖아. 왜 솔직하지를 못해? 그렇게까지 착한 척을 안 하면 성이 안 차?"

 "아까부터 저한테 뭔 말을 원하는지 전혀 모르겠거든요?"

 "생각을 피하니까 알 수가 있나. 생각할 생각조차 없으니까 모를 수밖에 없지."

 "그래서 지원 선배는 알아요? 모르는 게 없어서 참 좋겠습니다, 그렇게 다 아는 것처럼 떠들 거면 나한테도 좀 알려줘 봐요."

 "그래, 알려주지."

 

 지원은 승현의 눈을 똑바로 보고 말했다.

 

 "지금 너한테 없는 건 자신감이 아니라 의욕이다. 건방져 정승현."

 

 승현의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지원의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선거에 나갈 결정을 왜 못 내렸냐. 다른 이유 있을 게 어디 있어. 할 마음이 사라졌던 거지. 선거도 학생회도 네 안에서 의미를 잃어서 전부 귀찮아져 버린 거잖아. 그걸 자신 없다 따위의 변명으로 포장하고. 학생회가, 학교가 이제 만만해 보이지? 더 이상 의욕도 안 사는 걸 보면. 정승현, 너 이러려고 3년을 잡무나 뛰면서 부회장으로 지냈어?"

 "누가 의욕이 없어요! 누가 귀찮아 했어요! 그런 마음이었으면 내가 진작에 선거 안 나간다 말하고 끝냈지, 왜 이 고생을 하고 있어요!"

 "그래. 그거."

 

 악에 가득 차 외치다시피 항변하는 승현. 지원은 담담하게 그 감정을 받았다.

 

 "화가 난 거야."

 

 아직 진정되지 않은 승현의 숨소리가 들렸다.

 

 "내가 나오지 않았으니까. 너랑 내가 함께 출마할 수 있는 마지막 선거에 내가 나오지 않았으니까. 그토록 기다려 왔던 기회를 내가 없애 버렸으니까."

 

 방금까지 매섭게 승현을 도발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지원은 앞머리를 매만졌다.

 

 "넌 나를 잘 따라주긴 했지만... 본질적으로 안 맞으니까, 우리 둘. 내가 제시한 방향이 넌 전혀 맘에 들지 않았고, 그렇다고 내가 웬만한 수로 설득되는 사람도 아니고."

 

 지난 3년의 학생회는 충돌의 연속이었다. 지원은 우선 순위에 철저한 인물이었고 그 순위 최상단에는 항상 목표와 효율이 자리했다. 목표를 세운 후에는 양보하지 않았으며 그것을 효율적으로 달성하기 위해서 어떠한 희생도 감수해 왔다. 승현은 이지원만한 사람이 학교와 타협하는 모습을 납득할 수 없었다.

 그래서 부딪혔다. 지원이 무언가 포기하려 할 때마다 승현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맞섰다. 그럴 때마다 지원은 승현이 제시한 대안, 그리고 그녀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차선책의 한계를 지적하며 포기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승현은 반박하지 못했다.

 그래서 승현은 기다렸다.

 

 "보여 주고 싶었겠지."

 

 지난 3년 동안 지원으로부터 배우고 훔친 기술로 한층 성장한 모습을.

 

 "증명하고 싶었겠지."

 

 지난 3년 동안 외쳐왔던 스스로의 정의가 결국 옳았음을.

 

 "이기고 싶었겠지."

 

 지난 3년 동안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던 상대에게.

 

 승현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렇게 남몰래 칼을 갈아 온 선거에 상대역이 갑자기 출마를 안 한다니, 의욕이 빠질만도 하지. 그리고 갑작스레 그런 결정을 내린 나한텐 잔뜩 화가 난 거고. 완전 적반하장이지만."

 

 큭큭, 지원은 작게 웃었다. 그리고 아주 잠깐의 뜸을 들이고 다시 승현을 쳐다본 후 말했다.

 

 "미안해. 네 바람에 응해주지 못해서."

 

 승현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지원으로부터 사과의 말을 들은 건 3년만에 처음이었다. 눈치채기 힘들 정도로 살짝 고개를 숙이고, 치켜뜬 눈으로 미안함과 머쓱함이 담긴 미소를 짓고 있는 지원의 모습이 마치 다른 사람인 것 같았다.

 몸에서 긴장이 확 풀렸다. 의자 등에 눕다시피 기대니 시선이 창으로 향했다. 겨울에 가까워져 방 안에는 벌써 석양이 비쳐 들어왔다. 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니 어쩐지 스스로가 우습게 느껴져서 승현은 소리내어 웃었다.

 

 "쪽팔리게 누구한테 어떻게 말해요. 이지원한테 도전하고 싶었는데 안 나와서 실망했다... 나, 참. 허풍에도 정도가 있지. 아무리 제가 큰소리를 잘 치고 다녀도 이건 좀 아닌 것 같더라구요."

 "뭐야, 내가 너한테 들어온 헛소리들은 그 정도가 아닌데?"

 "회장이 제 말을 어떻게 듣는진 잘 알겠습니다..."

 

 승현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지원에게 할 말은 푸념밖에 없었다.

 

 "전설이 전설인 채로 끝나면, 그건 불멸의 신화로 남아 버려요. 회장이 이뤄낸 업적들은 회장이 학교를 떠나도 회자될 거고 그 과정에서 포기한 것들은 불가피했다고 회장의 업적이 정당화시키겠죠. 그것만큼은... 그것만큼은 어떻게 해서든 막고 싶었어요. 내가 맞섰다면, 당신을 이길 수는 없었겠지만 당신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인상만큼은 남겼을 테니까. 그럼 곧 나보다 대단한 사람들이, 어쩌면 회장보다도 대단한 사람들이 나타나서 회장이 무조건 옳지는 않았다는 걸 증명해 줄 거구요."

 

 승현의 목소리는 무거웠다.

 

 "회장이 끝까지 흠 없이 물러나 버렸으니, 남겨진 저희들은 좋으나 싫으나 포스트 이지원의 시대를 살 수밖에 없어요. 지금 대부분의 학생들은 이지원 회장이 없던 때를 몰라요. 그러니 차기 회장의 비교 대상은 이지원 회장뿐. 이거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알아요? 회장만큼 잘하진 못해도 회장이 해 놓은 걸 망쳐서는 안 된다는 부담이 차기 회장을 압박할 거예요. A고등학교에서 이지원의 그림자가 사라지려면 한참 걸리겠죠."

 "에이. 말도 안 돼."

 

 그런 승현의 걱정을 지원은 가볍게 웃어넘겼다. 승현은 살짝 토라졌다.

 

 "그렇게 웃을 일이 아니라니까요."

 "내가 이번 선거에 안 나온다 해서, 꼬박 3년을 개갠 누구누구 씨가 가만히 이지원 후계자 노릇이나 하고 있겠어?"

 

 지원의 여느 때보다도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

 

 "내가 아는, 내가 봐 온, 내가 키운 정승현은... 포스트 이지원의 시대를 살기는 무슨, 나를 그냥 프리 정승현 시대의 조연으로 만들어 버리겠지."

 

 그리고 그에 대비되는 그녀의 익살스런 말에, 어안이 벙벙해 잠깐 눈만 깜빡이는 승현.

 

 승현은 지원의 새침한 미소에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럼 마지막 후보. 기호 7번 정승현의 연설을 시작합니다."

 

 6번까지의 학생회장 후보가 모두 연설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후보로 등록한 승현의 차례가 돌아왔다. 학생들의 분위기는 우호적이지 않았다. 정승현은 너무나 익숙한 인물이었다. 지난 3년간 지원의 대변인 역할을 한 승현에 대한 요구치는 높았고 저항감도 컸다. 5년만에 회장이 바뀌는데 그 자리를 이지원의 후계자에게 맡겨서는 안 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여섯 번의 연설로 지쳐 있는 학생들의 반감이 피부로 느껴질 정도였다.

 

 승현은 아랑곳 않고 단상에 올랐다. 평소보다 조금 더 크고 뚜렷한 목소리로, 승현은 연설을 시작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고 합니다. 그 말대로 우리는 매 순간 선택을 하며 살아갑니다. 선택하지 않는 것조차 하나의 선택이니까요. 우리가 A고등학교의 학생으로 있는 것도 우리가 정한 선택의 결과겠죠.

 선택에는 반드시 가치 판단이 들어갑니다. 쉽게 버릴 수 없는 수많은 것들 중 가져 갈 수 있는 것은 그만큼 많지 않기 때문에, 선택과 포기는 마치 동전의 양면과도 같이 함께합니다. 쉽게 고르는 사람들이 있고 심사숙고 끝에 간신히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개인이 느끼는 선택의 무게와는 관계없이 누구나 선택의 결과에 따른 책임을 집니다. 고른 것에 대한 책임이 있고 버린 것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이 모든 책임을 지는 것은 결국 자신이고, 따라서 선택은 타인에 의하여 강요되어서는 안 됩니다. 책임이 개인에게 돌아가는 이상 우리는 모두 선택의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자유롭게 선택하고 있나요? 자유롭게 선택한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나요? 안타깝게도 우리, '이 나라의 미래'인 우리들에게 선택의 자유란 주어진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골라온 것이라곤 기껏해야 어느 과목을 들을지, 어느 학교에 다닐지, 아니면 학생회장으로 누구를 뽑을지 정도겠죠. 이것마저도 원하는 것을 고르지 못한 사람들이 있는 것을 저는 압니다. 게다가 '선택'하라고 누군가가 종용할 때, 정말 마음에 드는 선택을 할 수 있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다른 누군가 이미 입맛에 맞게 고쳐 쓴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고를 수 있는 것들이라곤 그들이 재단한 선택지뿐입니다. 그들은 아주 교묘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판을 짜 놓고 선심 쓰듯 우리에게 '선택'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당연하지만 그 중 무엇을 골라도 그들은 잃는 것이 없습니다. '선택'을 우리들에게 맡겨 놓았기에, 실패의 책임 역시 전부 우리들이 떠안습니다. 그들은 실패한 우리들을 보고 훈계하며 선택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이런 불합리한 처사에 항의하면 되돌아 오는 명목은 보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우리를 보호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여느 인간이 그렇듯이 위기의 순간에 그들이 구할 것은 그들 자신입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구하지 못한, 선택의 자유가 없었던 우리들은 버려집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가 살아나오지 못한 것을 우리의 선택에 탓으로 돌립니다.

 더욱 비극적인 건 우리가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평생을 남의 선택 아래서 놀아날 것입니다. 우리가 학생일 때 그렇듯, 우리 위에 있는 그들은 우리에게 일말의 자유만을 남길 것입니다. 그 일말의 자유를 건네받은 탓에 우리를 향한 모든 불합리한 공격이 책임이란 말 아래 정당화됩니다. 그들이 누구인지, 는 우리가 어디에 있냐에 따라 변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무엇을 할지는 우리가 어디에 있어도 변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생각해야 합니다. 주어져 있는 선택지를 고르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 선택지를 누가 어떤 의도로 만든 건지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선택이 결국 누구의 배를 불리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더, 우리의 목소리가 담긴 선택을 해야 합니다. 책임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큼큼. 승현은 잠시 목을 가다듬었다.

 

 "곧 학생회 선거가 열립니다. 선거란 너무나도 명백한 선택의 일종이죠. 후보 중 단 한 사람만이 A고등학교 학생들을 대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만이 학생들을 대표하여 학교와 협상할 수 있습니다. 저는 지난 3년간 제 선택을 포기한 탓에 질 필요가 없었던 책임을 져 왔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일지도 모릅니다.

 지난 5년간, 선출된 건 이지원 회장이었습니다. 처음 뽑혔을 때 그녀는 6학년 소녀였습니다. 모두가 그녀를 단순히 마스코트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영리했습니다. 지킬 수 있는 공약들을 내걸고 실천하여 신용을 얻었습니다. 그녀는 유능했습니다. 특유의 추진력으로 단숨에 학교를 그녀가 바라는 방향으로 바꾸어 나갔습니다. 그녀는 냉혹했습니다. 세운 목표를 위해 포기할 수 있는 것들은 가차 없이 내던졌습니다.

 교실이 더 따뜻해졌습니다. 외투가 금지되었습니다. 동아리 전부가 동아리실을 받았습니다. 동아리의 절반이 사라졌습니다. 축제가 화려해졌습니다. 학생들의 참여가 줄었습니다. 학교는 위대해졌습니다. 학생은 조용해졌습니다. 우리는 점점 목소리를 잃어 갔습니다.

 5년 동안 수많은 것들이 개선됐습니다. 하지만 5년 동안 많은 것들이 사라졌습니다. 물론 회장에게는 합당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학생들이 포기하는 것으로써 보다 큰 걸 얻을 수 있다. 차마 포기할 수 없었던 학생들은 학생회로 찾아왔으나 그 누구도 회장을 설득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학생과 학교 사이의 소통의 장이 사라졌습니다. 우리는 발언권을 빼앗겼습니다.
 회장은 모든 결정은 학생들의 이익을 위하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위한다는 거짓말이 셀 수 없이 잦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정말 회장은 학생들을 위해 일했습니까? 그녀가 학생들의 의견을 묵살할 때 가장 즐겨 대던 변명은 효율입니다. 최대의 효율을 위해선, 어쩔 수 없이 그 의견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지만 그건 정말 어쩔 수 없었던 일이었나요? 당장의 성과가 필요했던 건 누구였을까요? 매년 선거를 통해 평가 받는 이지원 회장이었습니다. 재선을 위해서는 눈에 띄는 변화를 일으켜야만 했으니까요. 5년간 가장 편했던 건 어디였을까요? 학생들을 별 다른 수고 없이 통제할 수 없었던 학교입니다. 이지원 회장 개인과의 협상으로 학생들 전부의 동의를 얻을 수 있었으니까요

 그녀는 선거의 의미를 퇴색시켰습니다. 그녀의 계획대로, 우리는 언제부턴가 이지원이 학생회장인 걸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지원에 맞서는 것은 무의미한 것에 더해 방해라고까지 여겨지고는 했습니다. 이렇게 짜여진 판에서 당선된 그녀는 선택되었다는 사실을 발판 삼아 그녀의 방식을 저항 없이 추진시켜 나갔습니다. 저는 내부에서 맞섰으나 역부족이었습니다. 저는 바깥으로 나아가 소리 높여 싸우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 있습니다."

 

 분한 듯 떨리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저는 저항했어야 합니다. 우리는 저항했어야 합니다. 어쩌다 당선된 꼬마 회장이 5년을 해먹도록 내버려 두어선 안 됐습니다. 적어도 5년 동안 압도적인 지지율로 학생회장을 당선시켜서는 안 됐습니다. 빼앗긴 자들이 힘을 합쳐 지킬 수 있는 것들을 지켰어야 합니다. 그것이 단순한 선거 용지 한 장이 아닌, 우리의 목소리가 담긴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더 이상 다목적실을 사용할 수 없게 되어 버린 영화연구 동호회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영화야 회원들 집에서 돌아가며 감상하면 된다고 말했지만, 프로젝터의 색감은 그리울 거라고 아쉬워하던 학생의 쓴웃음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무대를 빼앗겨 축제에 서지 못한 연극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결국 연말에 교실을 빌려 작게나마 극을 올릴 수 있었지만 끝끝내 안타까움에 눈물을 쏟던 배우의 눈물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다행히도 우리는 다시 되찾을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이지원 회장의 업적을 발판 삼아 우리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할 수 있습니다. 5년 동안 학생회의 권한은 더 커졌습니다. 이 힘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를 우리가 선거로 결정합니다. 저는 이번 선거가 학생들이 다시 권리를 되찾을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쉽지 않겠지만, 학생 여러분의 관심과 비판이 있다면 지금 이룬 것들을 잃지 않고도 새로운 길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 저는 확신합니다.

 기계적으로 행동하지 맙시다. 습관적으로 결정하지 맙시다. 오늘 나온 후보들의 면면을 철저하게 분석해서, 저와 다른 후보들이 어떤 의도로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 주세요. 그리고 누가 지금 학생들을 위해 최선의 선택일지 판단해 주세요. 이지원 회장은 5년간 당연하다시피 당선됐습니다. 그러나 결과가 정해져 있는 당연한 선거에서 학생들의 목소리는 대변될 수 없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들께 당연하지 않은 후보로서 여기 서 있습니다.
 저에게 당연하지 않은 한 표를 주십시오. 고민하고 고민하여 마지 못해 정승현에게 한 표를 주십시오. 주변의 그 어떤 것도 당연하게 여기지 않겠습니다. 일방적인 규칙도 전해져 오던 관습도 당연하게 여기지 않겠습니다. 무엇보다 제 스스로의 정의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겠습니다. 저 역시 오늘 여러분들이 그러하듯, 모든 사안에 있어서 고민을 거듭하여 결정하겠습니다.

 연설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주에 이 자리로 돌아올 수 있기를 고대하겠습니다."

 

 승현이 말을 마치자 긴 침묵이 이어졌다. 강당에는 조용한 박수소리가 울려 퍼졌다.

 

 

 

 연설을 듣기 가장 편한 장소인 강당 옆 방송실 안. 방송부 부부장 희연과 부원도 아닌 지원이 연설을 마친 승현을 보고 있었다.

 

 "저거 진짜... 있던 일 없던 일 기분 가는대로 다 지껄여 주시는구만. 저걸 3년 데리고 있었던 것만으로 난 평가받아야 돼."
 "정승현 쟤 인격 형성에 언니가 기여한 건 생각 안 하고?"

 

 바로 반론이 튀어나오지 않는 것 보면 지원 역시 집히는 게 없지는 않는 모양이다.


 "그래서 언니. 올핸 왜 안 나온 거야?"
 "그걸 몰라서 물어?"

 "언니 생각을 대체 누가 안다고."
 "지는 싸움은 하기 싫거든."
 "아..."
 "저걸 내가 무슨 수로 이겨?"

 

 언니도 성격 참. 희연의 혼잣말에 지원은 어깨를 으쓱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저에게 당연하지 않은 한 표를 주십시오. 고민하고 고민하여 마지 못해 정승현에게 한 표를 주십시오... 큭큭큭..."

 "아, 그만. 그만. 부탁이니까 그만. 거의 흑역사급 연설이니까 좀 용서해 주라. 일단 1년이 다 되어 가는데 대체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 거야?"

 

 민정이 짐짓 엄숙한 체로 승현의 진지한 목소리를 흉내내자 승현은 오만상을 쓰며 뒹굴다시피 책상에 엎드렸다.

 

 "그야 그토록 힘 잔뜩 들어간 연설이었는데 기억이 안 나겠어요. 후보들 중에 그런 연설을 한 사람은 선배 하나였고. 근데 공약 하나 없는 연설로 용케도 뽑히셨네요."

 "출마를 전날에 결정했으니까. 연설문 하루만에 쓰느라 죽는 줄 알았다."

 "연설을 저렇게 거창하게 해 놓고 득표율은 겨우 30%... 운 좋았네요 선배."

 "야 7명 중에 30 퍼센트면 많이 먹었지! 나온 사람들이 만만했으면 말을 안 해, 다들 인지도적으로 나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고."

 

 힘껏 항변하는 승현의 모습을 보는 게 즐거웠는지 민정은 계속해서 승현을 놀렸다. 승현과의 대화에서 이렇게 주도권을 잡은 건 좀처럼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민정은 애써 표정에서 웃음기를 지우고, 하지만 눈에는 여전히 웃음이 가득한 채 승현을 보고 말했다.

 

 "전 그 연설 보고 선배 뽑았어요. 부회장 하고 싶단 생각도 들었고."

 "그래... 너를 건졌다면 그래도 의미 있는 연설이었다..."

 

 후배의 기특한 한마디에 쑥쓰러워 승현은 머리를 긁적였다.

 

 "하아... 선배가 연설의 반을 투자해 가며 이지원 회장을 디스하던 시절도 있었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거예요?"

 "말도 마라. 연설 뒤로 이지원 선배 일주일 동안 나랑 말도 안 했어."

 "네? 이지원 회장이요?"

 "그리고 그 연설은 반쯤은 쇼였고... 아, 생각할수록 흑역사네. 니 말대로 용케도 뽑혔다 나. 운 좋나 봐."

 

 확실히 승현이 뽑힌 데는 운이 따랐다. 하지만 민정은 지금의 학생회가 학생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자신이 있었다. 승현은 적극적으로 학생들과 교류했고 그만큼 마찰도 많았지만 그렇게 티격태격 싸우는 과정에서 학생들이 점점 승현을 회장으로 인정해 갔다. 이 학생회의 일원으로 있다는 사실을 민정은 자랑으로 여겼다.

 

 긴 이야기를 듣고 민정도 으흠,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그녀가 승현의 출마 일화를 그저 흥미 본위로 물은 것은 아니었다. 승현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뭐 승현 선배도 힘들게나마 회장으로 뽑혔는데, 저 한민정이라고 못할까 봐요! 다음 선거는 열심히 준비해서, 내년엔 회장으로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게 노력하겠습니다!"

 "에이. 그건 안 되지."

 

 결의에 찬 목소리로 선언하는 민정에게, 승현은 눈을 멀뚱히 뜨며 답했다.

 

 "왜 그래요! 후배 기 죽이고 싶어요?"

 "넌 날 이기려면 한참 멀었어."

 "네...? 선배 임기는 이번 학기로 끝나는 게..."

 "난 올해 선거 안 나온다는 이야기는 한마디도 안 했는데."

 

 그러고 보니 그랬다. 민정은 지원을 동경하는 승현이 그녀가 그랬듯 11학년까지만 회장 임기를 채울 거라고 단순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자리를 내가 누구한테 넘길 것 같아?"

 학생회장 정승현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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