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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하는 작가와 인형의 도시 - 2/30

by 플칸 posted Aug 04, 2017 (00시 01분 45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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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업 참여 동의

□ 작가와의 만남


어느 날, 남자는 자신이 기억을 잃어버렸단 사실을 깨달았다.


‘여긴 어디지...…?’


시간은 저녁때인 것 같았다. 하늘과 구름이 점점 붉어지면서 뭔가 아련한 느낌이 든다. 남자는 주위를 둘러본다. 주변에 흙 같은 것들이 잔뜩 쌓여있었다. 흙이라기엔 지나치게 검정색이었다. 그 흙 같은 물질은 온 사방에 널려있었다. 바닥에도, 벽에도, 심지어 천장에도.


천장과 벽을 보자 이곳이 어디인지 알게 되었다. 여기는 어떤 건물이었다. 무슨 건물인지는 짐작도 할 수 없다. 짐작컨대 버려진 건물 같았다. 우선, 청소가 안 되어 있고 창문이 죄다 깨져있었다. 하늘과 구름을 볼 수 있었던 건 창문들이 깨진 덕택이다.


남자는 주변에 다른 사람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무도 없었다. 생명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 흔한 벌레마저 없는 기이한 공간이었다.


남자는 대체 여기서 뭘 했을까? 주변을 서성이며 그런 생각을 했다. 벽은 온통 검은 흙 때문에 새까맣다. 남자는 왼손 검지로 벽을 살짝 문질렀다. 오래된 때가 벗겨지듯, 벽은 원래의 색깔을 되찾았다. 대신 남자의 손가락은 빛을 잃어버렸다.


자세히 보니 흙 같은 건 아니었다. 흙보다는 먼지에 가까웠고 먼지보다는 재에 가까웠다. 무언가를 태우고 난 후에 남은 재였다.


남자는 직감적으로 자신이 오른손잡이라는 걸 생각했다. 왼손의 움직임이 뭔가 어색했다.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왼손가락이 먼저 움직였다. 그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남자의 오른손은 종이를 한 장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종이는 검은색으로 뒤덮인 주위와는 사뭇 달랐다. A4 사이즈의 새하얀 종이. 종이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그런 줄 알고 뒤집어 보니 어떤 글자가 적혀있었다. 남자는 글자를 읽어보았다. 좋은 어감이었다. 이름으로 쓰면 좋을 것 같았다. 느낌상 여자 아이한테 붙이면 좋을 것 같았다. 이름이 적힌 그 종이만이 유일하게 자신의 색을 지키고 있었다. 건물은 잿빛에 범해졌고 남자는 자신의 색을 기억하지 못했다.


남자는 여기서 무엇을 했던 걸까.


남자는 이 장소가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친근함까지 느껴진다. 하지만 이곳에서 무엇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추측해보자. 남자가 이곳에서 무언가를 태운 걸까? 충분히 일리 있는 생각이었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손가락 끝에 묻은 재는 차가웠다. 열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불은 오래전에 꺼진 것이다. 정확히 무엇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튼 뭔가 중요한 일이었던 같다. 중요한 일이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은 조금 역설적이지만 어쩔 수 없다.


남자는 자신의 이름도 모습도 기억할 수 없었다. 주변에 거울이 있다면 자신을 비추고 싶었다. 우선 눈으로 자신의 모습을 훑어봤다. 흰색 와이셔츠와 감색 양복을 입고 있다. 왼쪽 손목에는 이름 모를 브랜드의 시계가 보였다.  


시계의 분침과 시침은 7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초침은 쉬고 있었다. 창밖의 해는 아직 하늘을 불태우고 있었다. 이제 곧 있으면 해가 완전히 자취를 감출 것이다. 주변 풍경은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조용했다.  


남자는 깨진 창문을 통해 바깥을 내다보았다. 바깥 풍경은 그야말로 살풍경이었다. 여러 건물과 도로들이 보이지만 정작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도 보이지 않았다. 하늘을 있는 건 구름뿐이고 참새 한 마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까마귀 울음소리라도 듣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람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으면 정신이 이상해진다고 한다. 남자도 극도로 혼란스러웠다. 지나친 침묵은 소음을 뛰어넘는 고통이었다. 자신의 생각이나 심장박동이 지나치게 크게 들려왔다.


어쩌면 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게 가장 합리적인 판단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벽에 손가락을 같다댔을 때 느낀 차가움은 지나치게 현실적이었다.


우선, 이 답답하고 거무튀튀한 공간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창문을 통해 내다봤을 때 남자가 있는 곳은 상당히 높았다. 층수로 따지면 못해도 6층 정도는 될 것이다. 꿈이라면 가볍게 뛰어내려볼 높이지만 지금은 그럴 자신이 없었다. 우선, 엘리베이터를 찾았다. 생각보다 쉽게 엘리베이터를 찾았지만 버튼을 눌러도 묵묵부답이었다. 하는 수 없이 비상구 층계를 이용하기로 했다.


남자는 계단을 내려가면서 한층 한층 건물 내부를 살펴봤다. 다행히도 재로 뒤덮인 건 남자가 있던 층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건물에서 사람은 찾을 수 없었다. 건물의 모습을 보아하니 백화점인 것 같았다. 층마다 진열된 상품들이 달랐다. 4층에는 여성의류, 3층에는 가전제품, 그런 식으로.


1층으로 내려오자 화장품과 각종 액세서리, 핸드폰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른바 잡화 코너였다. 역시 점원도 손님도 그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침묵만이 남자 곁을 지키고 있던 순간, 어디선가 벨소리가 들려왔다. 평소 같으면 쉽게 묻혀버릴 작은 소리였지만 지금은 그 어떤 소리보다 크게 들렸다. 벨소리는 귀를 찢는 총성처럼 크게 느껴졌다. 벨소리의 근원지는 휴대폰 매장이었다. 다양각색의 핸드폰들이 전시되어있었지만 모두 검은 화면을 보여줄 뿐이었다. 화면에 불이 들어오고 통화버튼이 보이는 건 단 하나뿐이었다. 마치 동굴 속에서 한 줄기 빛을 쫓는 벌레처럼 소리가 나는 핸드폰을 쫓아갔다. 생각보다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핸드폰을 열어보니 척 봐도 괴상한 번호가 표시되어있었다.


「 111 – 1111 – 1111 」


장난으로 걸어도 아무도 받지 않을 것 같은 이상한 번호였다. 남자는 오른손의 종이를 반으로 접어 양복 안주머니에 넣은 다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작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분명 전에도 많은 통화를 했을 텐데, 마치 처음 통화하는 것처럼 긴장되었다. 상대방은 누구일지 궁금했다. 되도록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스팸전화를 받으면 나오는 자동음성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랐다.


“오, 눈을 뜬 건가? 내 목소리가 들리나?”


희한한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소년 같기도, 소녀 같기도 했다. 남성적이면서도 여성적이며 앳되기도 하면서 연륜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남자는 이런 목소리는 처음 들어봤다.


“들립니다. 누구시죠?”


“오, 들리나보네. 좋아.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반가워 주인공씨. 난 작가야. 자네가 주인공인 이야기를 쓴 작가지.”


“뭐라고요?”


휴대폰 너머의 존재, 성별조차 알 수 없기에 일단 「목소리」라 부르기로 했다. 목소리의 대답은 솔직히 말해 너무 뜬금없었다.


“작가요?”


남자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말투로 다시 질문을 던진다. 눈을 뜬 이후로 의문만 늘어나는 기분이었다. 그 의문들 중에서 답을 찾을 수 있는 것이 몇 개나 될지 두려워졌다.


“그래. 자넨 내 소설의 주인공이야. 이렇게 서로 대화하는 건 처음이겠지? 하긴 방금 막 만들었으니까.”


남자의 정신이 아득해지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남자는 자신 말고도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지만 이런 헛소리나 해대는 정신병자인줄은 몰랐다.


“지금 내가 정신병자라고 생각했지? 너무하는구만.”


핸드폰 너머에서 섬뜩한 말이 들려온다. 남자의 속마음이 그대로 언어화된 것 같았다. 머릿속을 염탐당한다면 분명 이런 느낌일 것이다.


“당신은 대체...”


남자는 다시 질문을 하려한다. 하지만 목소리에게 저지당하고 만다.


“아직 좀 혼란스러운 것 같네. 일단 조용한 곳에서 머리 좀 식혀보게. 바깥도 좀 둘러보고 말이지.”


목소리는 그런 말만 남긴 채 전화를 끊어버렸다. 아까 본 괴상한 번호로 다시 통화를 시도했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 …”


듣고 싶지 않았던 전자음이 들려왔다. 분명 발신자 번호를 멋대로 바꾼 것이다. 이쪽에서 함부로 통화를 못하게 하고 자신의 정체도 숨길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남자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저쪽에서 다시 전화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하는 수 없이 건물 밖으로 나왔다. 어차피 사람 없는 건물에선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언제 또 전화가 올지 모르니 핸드폰은 들고 가기로 했다. 생각해보면 엄연한 절도지만 지금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아무도 없는 거리에서 남자는 날짜를 추측해봤자. 우선, 평일은 아닌 것 같았다. 평일에 이 시간이면 퇴근하는 직장인이나 하교하는 학생들로 언제나 거리가 붐빈다. 하지만 지금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다시 시계를 보았다. 7시 30분. 아직 그대로다. 다시 보니 멈춰있는 건 초침만이 아니었다. 시침과 분침도 자신의 일을 내팽개치고 놀고 있었다. 처음 시계를 확인 한 이후로 적어도 10분은 지났을 것이다. 시계가 고장 난 것이라고 굳게 믿어야만 했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든 생각은 시계가 고장 났다는 걸 부정하고 있었다. 고장난건 어쩌면 시간일지도 모른다.  


남자는 건물을 완전히 빠져나와 잠시 거리를 걸어보았다. 전체적으로 뭔가 붕 뜬 느낌이었다. 아스팔트는 아직 열기를 머금고 있었다. 계절로 따지면 여름쯤 되 보였다. 남자는 양복 차림인지라 상당히 더웠다. 양복 주머니에는 반으로 접은 빈 종이와 건물에서 갖고 온 핸드폰밖에 없었다. 지갑이나 신분증이라도 있으면 기억을 되찾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런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여긴 어디지...?’


맨 첫줄부터 품은 의문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여긴 대체 어디인가. 아까부터 계속 말없이 걸었더니 알 수 없는 공포가 밀려왔다. 여긴 대체 어디인가. 왜 사람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가. 머릿속에서 자꾸만 의문이 생겨났다. 머리가 아파왔다.


생각에 잠긴 채로 걷다보니 어느새 공원에 도착했다. 무슨 공원이 이리도 황량하단 말인가. 공원입구에는 표지판이 하나 세워져있었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그저 ‘공원’ 두 글자만 적혀있다. 마치 누군가가 이곳은 공원이라고 우기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두 글자 외엔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마치 빈 종이를 보는 느낌이었다.


사실 공원이라고 해 봐야 산책로와 벤치, 분수 하나가 전부인 소규모 공원이었다.



‘난 여기서 뭘 했던 거지?’


남자는 벤치에 앉아 하늘을 보았다. 하늘은 여전히 붉었다. 하늘이 붉게 충혈된 눈으로 남자를 응시하는 것 같았다. 아까부터 구름이 전혀 안 움직인 것 같았다. 착각이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착각이 아니었다.


공원 벤치에 팔을 기대었다. 고개를 조금 돌리니 공원은 생각보다 넓었다. 공원에는 분수가 있었다. 하지만 물은 나오지 않는다. 분수라는 이름이 어색할 정도로 정적인 분수였다. 물이 말라버린 분수는 여전히 분수일까. 쓸데없는 질문 같다.


아까부터 아무것도 안하고 앉아만 있으니 머릿속에서는 자꾸만 쓸데없는 생각이 떠올랐다. 가끔은 한가로이 공원 벤치에 앉아 사색을 즐기는 것도 좋은 여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여가가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공포다. 영원히 반복되는 한가로움은 죽음과 다르지 않다. 남자는 자꾸만 겁이 났다.


‘여긴 대체 어디지...’


물음표가 사라졌다. 남자는 체념한 걸지도 모른다. 질문을 던지는 것을 포기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남자가 자꾸 겁이 나는 이유는 시간 때문이었다. 벤치에 앉은 지도 한참이 지난 것 같았다. 해가 이렇게 길었던가. 아무리 여름이라도 해가 이렇게 길 것 같지는 않다. 남자는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남자는 왼쪽 손목의 시계를 보았다. 7시 30분. 흔히 사람이 생각하는 속도가 빛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생각도 일종의 전기 신호기 때문에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남자의 머릿속 전기신호가 아까부터 계속 강조하고 있었다. 시계가 고장 난 것이라고. 하지만 다른 전기신호가 끊임없이 의혹을 내던졌다. 고장난건 시계뿐인 걸까?


아까부터 구름은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공원까지 걸어오면서도 구름은 움직이지 않았다. 남자는 자신이 걷는 속도와 구름이 움직이는 속도가 똑같았던 거라고 스스로 변명했다. 하지만 그것도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남자는 아까부터 벤치에 앉아있었다. 어느 마술사의 무대장치처럼 공원 전체가 움직이는 게 아니라면 뭔가 대단히 잘못되었다. 더 이상 벤치에 앉아있을 수 없었다. 왠지 더 앉아있었다가는 뭔가 크게 잘못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생각이 멈춰버릴 것 같았다.



생각을 멈추면 안 된다. 남자는 일어서서 다시 걷기 시작했다. 걸어도 걸어도 똑같은 풍경이었다. 아파트도 똑같고 도로에는 차 하나 보이지 않았다. 움직이는 것은 남자밖에 없는 것 같았다. 남자의 정신이 몽롱해졌다. 아까부터 계속 걷는데도 전혀 지치지 않았다.


걷다 보니 어느새 또 공원이 나왔다. 이번에도 공원 입구에는 성의 없게 만든 표지가 놓여 있었다. 표지에는 ‘공원’ 두 글자밖에 없다. 하지만 아까와는 조금 달랐다. 공원에는 분수 대신 책상이 놓여있었다. 이질적이었다. 만약 이 책상이 학교에 있었다면 상관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는 공원이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갖다놓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호기심과 동시에 공포가 밀려왔다. 여기에 남자 말고 누군가 있는 건가. 사실 있어야 정상이다. 이런 도심에 사람이 남자밖에 없다는 것이 더 이상하다. 남자는 용기를 내어 책상에 다가갔다.


책상에는 칼자국이 나있었다. 누군가 날카로운 걸로 그은 흔적이었다. 자세히 단순한 자국이 아니었다. 어떤 메시지였다.


「넌 누구지?」  


남자는 오싹해졌다. 책상이 말을 건 것 같았다. 아주 날카로운 쇠가 무언가의 표면을 긁는 듯 한 소리로 말을 거는 것 같았다. 삐뚤삐뚤하지만 정확히 읽을 수 있었다. 여기에 쓰여 있는 질문은 대체 누구를 향한 것일까.


그때 남자의 머릿속에 갑자기 어떤 생각이 스친다.


‘나는 누구인가?’ 


중요하지만 잊어버렸던 질문이었다. 남자는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해내야 했다. 신분증은 없다. 하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신분증에 적혀있는 건 그저 이미지이며 정보에 불과하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아내야 했다.


책상에서 잠시 눈을 돌려 주변을 살펴보았다. 공원에는 여전히 사람이 없었다. 도시는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마치 정적이란 단어를 그대로 형상화시켜놓은 것 같은 풍경이었다. 거대한 무균실 같았다.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작은 벌레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까부터 해는 움직일 생각이 보였다. 노을이란 게 이렇게 오래 지속되는 현상이었나. 남자는 스스로 답할 수 없는 질문으로 스스로를 옭아매었다. 남자는 다시 걷기 시작하자 다시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벨소리가 이렇게 기쁘게 들릴 줄은 몰랐다. 남자는 온 몸의 신경을 귀에 집중시킨다.


“자, 어때. 좀 진정이 되었는가?”


여전히 성별도, 나이도 짐작하기 어려운 목소리였다. 변조된 음성이라고 생각하는 게 옳을 것이다.


“여긴 대체 뭐죠?”


“아까도 말했잖은가? 자네가 있는 곳은 소설속이라니까.”


남자의 말을 끊고 목소리는 이해하기 힘든 소리를 내뱉었다. 목소리는 남자를 조롱하듯이 말했다. 솔직히 말해 정신병자가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소리 같았다. 남자는 아무리 생각해도 목소리를 믿을 수 없었다. 의혹만이 쌓여갔다.  


“하하. 또 의심하고 있구만. 하지만 믿어달라고. 사실을 외면하면 안 된다네.”


“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죠?”


“의심이 많은 주인공이구만. 뭐 내가 설정한 거긴 하지만.”


“설정?”


또 다시 알 수 없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목소리랑 대화를 주고받을 때마다 남자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래. 자네는 범죄 스릴러 소설의 주인공이야. 어떤 사건의 범인을 찾아야 하지. 일종의 탐정 역할이지. 탐정은 필연적으로 의심이 많을 수밖에 없어.”


묘하게 설득력 있는 헛소리였다.


“그러니까 자네는 의심이 많을 수밖에 없어. 이래도 못 믿겠나?”


“못 믿습니다. 말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믿을 수 있을 리 없다. 증거도 없이 나불댄다면 그저 허풍쟁이에 불과하다.


“흠 … 어쩔 수 없지. 조금 거친 방법이긴 하지만. 사람을 한 개 죽여 볼까.”


“뭐요?”


남자가 질문을 던지려하던 찰나, 갑자기 구두굽이 또각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눈앞에는 한 여인이 서있었다. 남자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여인의 머리카락은 은빛에 가까운 회색이었고 눈은 하늘처럼 푸르렀다. 맑은 눈동자로 남자를 가만히 응시하며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잠깐, 지금 뭐 하시는 ─ ”


「 탕! 」


남자가 여자를 막으려던 순간 총성이 침묵을 깨뜨렸다. 마치 폭탄이라도 터진 듯 엄청난 굉음으로 느껴졌다. 여자는 총성과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 하늘빛 눈동자는 정말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의 머리에서 흘러내린 피가 공원의 바닥을 흥건하게 적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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