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안녕, 시니 003,+004

by 반척수 posted Aug 13, 2017 (01시 48분 59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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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


  '파치칙' 소리를 내며 짜릿한 파찰음이 튀어 올랐다.

 순식간이었다. 눈깜빡할 사이에 눈 앞이 캄캄해져 버렸다. 

 교실의 전등들이 동시에 꺼지자 칠흑같은 암흑이 들이 닥친 것이었다. 어둠은 오래 가지 않았고 곧 깜박깜박 거리는 소리와 함께 다시 밝아오기 시작할 그때였다.

"..!?"

 눈이 부시다. 실눈을 뜨니 방금 전까지 없던 다른 무엇인가가 내 눈앞에 떡하니 서있었다.

 유능한 조각가가 일부러 초짜처럼 조각해놓은 것 같은 인상. 작위적으로 눈웃음을 짓고있는 여학생의 입은 무겁게 닫혀있다.

 단정한 회색의 투버튼 마이. 하얀 셔츠의 카라에는 남색의 리본을 메고 있다. 주름 스커트의 밑단에는 하얀색의 줄무늬가 들어가 있는 교복으로 우리 학교의 교복이었다.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면 기억속 깊은 곳에서 이름정도는 떠올리수 있으리라. 어디선가 낯익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자신을 떠올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이 차가운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눈웃음을 짓고 있는 눈꼬리에 날이서고 그녀가 천천히 물었다.

"이런 시간에 혼자서 뭐하는 걸까?"

"......."

 대답을 하지 못하자 그녀의 손이 불쑥 앞으로 향했다. 

"잠깐."

 뒷걸음 치는 나를 따라 그녀가 한 걸음 다가온다. 그러면서 그녀의 시선은 분명히 한 곳에 머물러 있었다. 

"아직 대답을 듣지 못했어. 왜 여기 있는 거야?"

 그렇게 말하면서 눈동자는 내가 잡고 있는 낡은 책을 향하고 있었다.

"아니.....단지 깜박하고 두고 간 책을 찾으러 온 것 뿐인데."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하지만 이 장면을 누군가 본다면 꼼짝없이 현장에서 붙잡힌 좀도둑으로 생각할 게 뻔하다.

"....그래? 그런데 왜 그런 수상쩍은 옷차림으로? 누가 보면 물건이라도 훔치러 온 줄 알겠어..."

 그녀가 고개를 들어올렸다. 애써 생긋웃는 얼굴은 어느새 사라지고 차가운 안광이 빛나고 있었다. 그 시선을 피할수 없는 것을 알면서도 한 손으로 볼 캡을 더 눌러썼다.

"내가 무슨 옷을 입든 무슨 상관이냐."

 내가 생각해도 퉁명스럽다고 생각될 정도로 날카로운 어조였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녀를 때내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말하는 사이에 어느새 손에 들고있던 책에 미묘한 힘이 더해진 것이었다. 그녀또한 책등을 잡고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이거 정말 우연인걸?"

 도대체 얼마나 강하게 움켜쥔 걸까. 단단한 책의 하드커버가 움푹 들어간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나도 마침 잃어버린 책을 찾으러 온 참이거든... 내 책을."

 단호하게 말하고는 책을 자기의 쪽으로 끈다.

"......."

 내가, 그녀와 동시에 붙잡고 있는 책은 낣은 하드 커버로 덮여있는 책이었다. 보기만해도 낡은 종이 특유의 눅눅한 냄새가 코를 살살 간지럽힐 것만 같음 음울한 책이었다.

 평소였다면 고작 이런 책따위를 사이에 두고 실랑이를 버릴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그녀가 진짜 이 책의 주인이든 아니든 이런 책 따위 진작에 넘겨줘 버려도 나와는 무관하리라.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달랐다.

"착각이겠지."

 고의가 아니었으나(아니 오히려 스스로는 선의라고 생각하지만) 문제를 일으켜 버리고 말았다. 더 이상 문제가 커지기 전에 내 선에서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렇게 손에 저도 모르게 필요 이상으로 힘이 들어가 버리고 만다. 

 어째서 나는 내가 안량한 정의감에 힘겨루기를 벌이고 있던 책이 굉장히 낡고 당장이라도 뜯겨 날아가도 이상한 것이 없는 책이라는 사실을 미리 생각하지 못하고 있던 것이었을까.

 그 사실을 세삼스레 깨달은 것은 그것에서 부욱하고 불길한 소리가 나서였다. 

 타협의 여지따위는 처음부터 없었겠지. 하지만 지금의 최악은 일어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팔랑. 팔랑. 툭. 서글픈 소리를 내며 허리가 뜯겨진 책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

 이제서야 이 책의 정체를 밝힐 때가 다가왔다는 듯이, 사지가 뜯겨져 바닥에 뒹굴고 있는 책은 낣은 넝마가 감추고 있던 속살을 여실없이 들어냈다.

 빽빽하게 페이지를 채우고 있는 작은 글자들. 그것은.... 야한 책이었다.

 내게 그것을 순식간에 읽어내는 능력은 없었다. 그렇지만 이 고고한 지식으로 포장되어 있던 것이 야한 소설이라고 단번에 결론 내린 것은 우연히도 펼처진 그 페이지에는 가릴 것들만 교묘하고 기술적으로 가린 여성의 속살이 발칙하게 들어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런데.... 그 정도였으면 좋았을 텐데. 

 불안으로 점철되어 정지한 것 같은 시간속에서 낙서장 같은 한 페이지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팔랑팔랑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지는 중에도 그것을 무심코 보아 버린 나는 경악을 금치못했다. 아니, 그보다 번개같은 속도로 재빨리 낚아채는 그녀의 손놀림에도 놀랐다. 손은 눈보다 빨랐다. 그럼에도 종잇조가리에 그러져 있던 그 그림은 뇌리속에 밖혀 쉽게 떠나가지 않았다.

 남녀의 성비는 맞추는게 좋으니까. 이해는 그렇게 하려고 한다. 

".....봐....봤지?"

 그 그림에는 탄력있는 근육질의 남자가 탄탄하고 매끈한 허벅지로 한 부분을 기술적으로 가리고 있었다.'그래, 분명히.' 라고 차마 대답할리가 없잖아!

 이것은 추측컨데 이 책의 주인, 이 책을 만든 장본인이 그린 것이겠지.  

 도대체 어떻게 그녀를 위로 해야 잘 위로 했다고 소문이 날까. 아니, 아니다. 그런 소문이 났다가는 이 여자는 더욱 더 나락의 끝으로 떨어져 버리고 말겠지.

"...취향은 존중하니까."

 아뿔싸.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런 시덥잖은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이미 내뱉어 버린 것을 대신해서 내가 꺼낼 수 있는 말은 한 마디 밖에 없었다.

"그럼 이만."

 비겁하다고 욕해도 담담히 받아들이겠다. 그렇다고 모든 잘못이 내게 있다고 돌리는 건 참아줬으면 좋겠다. 도의적으로 책임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기억 따위는 없는 걸로 하면 그만 아닌가.

"멈춰."

 그렇지만 그녀는 그리 생각하지 않을게 분명하다.

 종언을 고하듯이 그녀는 짧게 내뱉었고 얼어붙어 버린 나는 뻣뻣이 선 채 고개를 슬쩍 돌아본다.

"왜. 그런 거야. 왜...왜...."

 절망감에 흠쩍 젖은 것 같은 목소리가 그녀의 입안에서 흐믈거리며 세어나왔다.

 내 예상보다도 더욱 더 깊고 음울한 기운에 파묻힌 그녀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사람처럼 이죽 웃고있었다. 하지만 그 눈동자많은 혼이 나간 사람처럼 공허했다.

"왜.. 왜....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거야. 난 단지 행복하고 싶었을 뿐이라고."

 감추고 있었던 치부를 들켜버린 감정은 이해할 수 있으리라. 물론 아직 내 방에 있는 치부를 들켜본 경험은 없기에 완전히 공감을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밑바닥에 다다른 사람은 저렇게 추해지는 걸까. 흐느적 거리며 얼굴을 감싸 쥔 그녀의 가느다른 손가락은 꿈틀거린다. 아니. 밤바람의 나뭇가지처럼 떨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이윽고 뚝 행동을 멈추었다.

 산발이 되어버린 머리카락. 더 이상 웃음조차 짓지 않는 입가. 그녀의 시퍼런 눈동자와 마주 쳤을 때는 단 한가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위험하다.

"...잠깐. 도대체 뭘 하려는 거야."

 복잡한 안광을 내뿜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어렴풋이 한 가지 감정만은 읽어낼 수 있었다. 나로서는 멈춰 세울 수 분노였다.

"이제 만족해?"

"만족이라니. 그게 무슨..."

 그녀가 자세를 숙였다. 두 눈동자는 또렷히 나를 응시한채였다. 무릎을 숙이고 앞으로 달려들 사람처럼 준비자세를 갖춘 것이었다.

"학교에서 유명한 변태작가의 정체를 밝혀낸 기분이 어때?"

"변태...작가?'

"기분 나쁘게 내가 했던 말 반복하지 마."

 그녀가 질렸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린다.

 "이제 와서 시치미라도 때려는 거야? 남의 책을 함부로 훔쳐서는 서로 자기들 끼리 돌려보는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아예 책으로 만들어서 팔기까지 해?"

 "잠깐."

 이제서야 짐작이 가는 것이 있었다. 하지만 내 앞에 있는 여자는 이미 이성을 반쯤 잃어 버린 상태였다.  그녀와 대화가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몸이 깨달았는지 저도 모르게 이미 뒷걸음 치고 있었다.

 불현듯. 지직. 치지직. 바삐 돌아가는 톱니들이 내는 소리가 그녀 주위에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시동"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그녀가 읇조리자 눈으로 쫓을 수 없는 정전기들이 솟아올라 푸른 색의 띠들이 몸 주위에 솟아 오른다.

"느, 능력이라니 지나치잖아."

"시끄러워!!! 역시 시니 말이 맞아..! 너만 처리해버리면 모든 게 원래 대로 돌아 갈거야!!!"

 제정신이 아니다. 이 녀석은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짖거리고 있는 건지 알고나 있을 까. 

 심정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장난이 지나치다. 그리고 어디서 부터 잘못된 건지도 모를 오해를 사고 있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갑자기 시니라니. 시니에게 무엇이라도 들은 것 처럼 말하지만 그런건 말이 될리가 없다. 애초에....

"저기 말이야. 너.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시간을 되돌린다거나 과고로 돌아갈 수 있는 능력은 없는거야? 단 10분이라도 좋으니까 돌아가서 너의 실수를 바로잡는거야."

"그런 능력같은게 있을리가 없잖아!!"

 협박을 한다고 해서 그런 상상속의 능력이 불쑥 튀어나올리가 없다. 과거로 되돌아가니 그런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미 과거로 수업이 되돌아 갔을거라고.

"그럼 스스로 기억을 지을 수 있다던가..!"

 최후에 짜내고 짜낸 희망이 고작 그런 거라니 상황이 정말 딱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가 원하는 대답은 할 수 없었다.

"그, 그렇지도 않은데."

"으으으으으! 넌 어째서 이토록 쓸모 없는거야!"

 비참한 신음을 토해내고 그녀는 결심을 한 듯 고개를 들어올린다. 그리고 정면으로 나를 향해 울부짖었다.

 "그럼 잊어!!! 잊어버리는 거야!!!"

 "말했잖냐! 그런 능력 같은 건 없다고!"

 코너에 몰린 쥐처럼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그녀의 기세를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말이 점점 빨라지며 눈동자가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그그럼 어쩔 수 없어."

 스스로에게 확신을 받듯 중얼거린다.

"어차피 신경도, 고통도, 기억도 모두 전기의 한 종류일 뿐이야. 해보는 수밖에 없어."

 해보다니? 뭘!?

"그게 무슨 소리냐. 해보다니."

"걱정마. 아픈 건 순간일 뿐이야. 잠시 따끔한 느낌만 들면 모든 기억을 사라져 있을테니까. 아마도.."

 아마도라니. 사람을 칼같은 걸로 찌르겠다고 발언하고는 확신이 없는 목소리로 이어 말한다.

"그 이상은 괴롭지는 않을거야. 물론 최악에는 바보가 될 수도 있겠지만."

 좀 이제 닥쳐줬으면 좋겠는데 마지막까지 이어 붙인다.

"어차피 바보가 되는 게 죽는 것 보다는 낫잖아?"

 낫긴 뭐가 낫냐. 처음부터 사람을 죽일 생각까지 가지고 있었던 거냐고. 도대체 처음에 어떤 각오를 다진건지 머리를 쪼개서 연구해버리고 싶다. 

 분한 마음에 나도 반격했다.

"전혀 괜찮지 않다고! 야한 소설이나 써 재낀 녀석이 사람을 죽이겠다니. 바보로 만들어 버리겠다니. 그렇게 죽고 싶으면 혼자서 접기 물에 코 박고 죽어버리라고!"

 하지만 그녀에게는 내 악담이 별로 효과가 없어 보인다. 가볍게 웃어 넘겨버린다.

"왜 이래 같은 변태끼리. 너도 변태잖아... 애초에 여학색의 책을 몰래 훔쳐보고, 훔쳐버린 것 부터 이미 진성변태잖아!!!!"

 도리어 버럭 화를낸다.

 그때였다. 푸른 섬광이 번쩍였다. 눈깜짝할 사이에 푸른 섬광은 금색으로 바뀌었다. 섬광이 아니었다. 달빛을 머금은 것 처럼 눈부신 금발이었다.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낀다. 어느새 내 앞에 그녀가, 야한 책의 주인이 바짝 다가 선 것이었다. 그녀의 손 주위에는 푸른색 전류가 털실처럼 걸려있었다.

 그녀가 갑작스럽게 사뭇진지한 얼굴을 했다. 마지막 일격을 남겨놓은 주인공처럼 말이다. 여기서 악당은 물론 나겠지.

 "미안하지만. 이제 그만 잊어줘."

 우리가 언제 부터 아는 사이였다고. 마치 이제 헤어지는 사람들처럼 그렇게 말하는 모습이 어이가 없었다. 

 언짢았다. 날 바보로 만들거나, 기억을 잊게 해버리거나 어찌됬든 성공을 하고는 의기양양할 이 여자가 지을 의기양양할 낯짝을 생각하지 기분이 얹짢아 진 것이다.

 썩은 미소를 지으면서 나지막하게 내뱉는다.

"차라리 날 바보로 만드는 것 보다. 너 스스로 사러져 버리는 선택지는 없는거냐?"

"응. 그런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아. 미안하지만 난 아직 해야할 것들이 너무 많이 남았어.......아직은"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입술은 소리 없이 움직였다. 들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입술과의 거리가 가까워 모양만으로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진심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난 정말로 바보인지 이 순간에 내가 생각해도 어이없는 물음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서, 설마 그 할 게라는 게 그 책의ㅡ?"

"아니야!!!!"

 그녀가 달려들었다. 내가 지금까지 본 적없는 최악의 경멸의 눈동자를 한 채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것은 내 턱에 닿지 않았고 그대로 벽에 날아가 꽂혔다. 나를 진심으로 노린 것이라면 피하지 못했겠지만 그것은 순순히 뇌수술에 응하라는 경고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새를 놓치지 않는다. 자리에서 일어서 재빨리 출구로 뛰쳐나가려 했다.

"자, 잠깐만! 도망치지 말라고! 뭐야, 이거 왜 안 빠져! 빠지라고! 이거! 이거어!! 야!"

 그래 넌 거기서 벽이랑 실랑이라 벌이라고 생각하며 문을 열고 도망치려 했다.

 덜컹덜컹. 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는다. 대신에 뒤에서 벽에 박힌 손을 빼내며 낑낑거리고 있는 마녀의 비웃음소리가 들렸다. 실성한 웃음소리였다. 하지만 어째서 그 모습은 더 비참하게 보이는 걸까. 인간이 나락으로 떨어지면 저렇게 추악해지는 건가 깨닫는다. 

 드디어 벽에서 해방된 녀석은 나를 향하여 몸을 돌렸다.

"도망칠 수 없을꺼야."

 그녀는 갇혀버린 불쌍한 먹이를 향하여 다가오면 말했다.

 몸 주위에서는 전류가 팟팍 소리를 내며 튀기고, 머리카락은 기세좋게 하늘로 치솟는다.

 이런 이야기를 인연이라고 해야할까. 

 사람 사이의 관계를 함부로 정의하는 것은 매우 조심스러운 일이다. 내가 생각하는 그녀와의 관계에 대하여 그녀는 동의하지 않고, 그 반대로 내가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서로의 관계에 대하여 두 사람이 동의를 하더라도 그 관계가 지속 된다고도 확실할 수 없다. 서로간의 관계에 대하여 확신이 없는 이상 우리는 무엇이라 판단하는 거은 경솔하고 무지하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만은 그런 문제는 없으리라. 그녀도, 그리고 나도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는 납득할 수 있는 정의는 한 가지 뿐은 아닐까.


"...악연이구나."


 그래, 그렇게 그녀와의 악연은 시작된다. 천천히 나를 향해 다가오는 그녀를 쳐다 보며 한숨을 흘린다.





004


"이하고."

 나를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려 정면을 쳐다본다.

 검은색 롱 가지건을 걸친 여인이 책장에 기대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렴풋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 같은 야릇한 어구이었다.

 기껏해야 이십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그녀는 내가 있는 연구실의 주인. 1학년 3반의 담임. 즉, 내 담임 선생님이기도 한 여선생이었다.

 윤기가 흐르는 흑발은 마치 그녀가 두른 실크천 처러 허리까지 내려간다. 가색의 눈동자는 저녁놀이 드리운 깊은 숲을 보는 것처럼 짙었고 신비한 빛을 띠고 있는 얼굴은 영민해 보이기 까지하고 사실이기도 하다.

 얇은 가디건의 안에는 하얀색의 셔츠를 입고 있었다. 작은 언덕을 타고 올라가며 하얀 목선위로 신비한 막이 쳐져있는 얼굴이 있다.  반듯한 인상의 이목구비와는 달리 남을 내려다 보는 듯 한, 아니 그녀만의 당당한 표정은 남들에게 차가운 이상을 주기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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