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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ERO

자유 겨울음악

  • AERO
  • 조회 수 78
  • 2017.12.31. 16:06
  • 글자 수 자 (공백 포함)
협업 참여 동의

겨울음악


1. 첫 만남

솔직히 별로였다. 아니, 그보다 별로였던 만남을 기억하기 힘들 정도로 최악이었다.

중2가 되던 날이었다. '작업'을 하느라 전날 밤을 센 나는, 첫날부터 지각을 하게 되었다.

반에 도착하자 교실은 벌써 꽉 차 있었고, 남은 자리 하나, 옆에는 웬 여자애가 당당하게도 학기 초부터 자고 있었다.

'첫날부터 수면모드라니... .'

'나는 교류를 포기했습니다' 하고 외치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아웃사이더인지 일진인지 몰랐지만, 선택지가 없어 혀를 차면서도 옆에 앉을 수 밖에 없었다.

의자를 빼자 바닥에서 튀어나온 못에 걸렸다. 텅! 쇳소리가 크게 났다.

"윽... ."

첫날부터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 소리에 애가 깼다. 서로 눈이 마주쳤다. 샐쭉하니 여우 같이 생겼다. 예쁜상은 아닌 걸.

"안... ." 깨웠으니, 매너상 먼저 인사를 건네려고 했다.

"아 XX!"

시퍼런 상욕이 내 인사를 잘랐다. 기세에 쫄아서 입을 다물었다.

그 애는 한 마디를 뱉더니, 그 자세 그대로 다시 엎어져 버렸다.

"...... ."

인사를 위해 들었던 내 손은, 다음 갈 곳을 잃어 버렸다.

일단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제빨리 가방에서 노트를 꺼냈다.

얼른, 뭐라도 하는 척 해야지.



2. 그러나

충격적이게도 첫 날 앉은 자리로 한 달 짝궁이 정해졌다. 선생님 왈 너희의 선택을 중시한다나 어쩌나?

오해입니다, 오해라고요! 우린 친해서 짝짜꿍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마음 속으로만 외쳤다.

그래도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던가? 며칠 지나자 옆자리 애에 대해서 제법 알게 되었다.

하나는 이름이 '정 단아'라는 것.

두번째는, 얘는 정말 정말 하루 종일 잔다는 것.

"하아... ."

곰도 동면하다 깨서 음식을 먹는다는데, 얘는 이미 포유류도 아닌 것 같았다. 점심시간조차 고사하고 잠을 잔다.

이건 의외로 큰 문제였는데, 이 학교에서 또 점심을 안 먹는 유이한 한 사람이 바로 나였기 때문이다.

난 점심을 먹으면 더부룩해 두 끼만 먹는다. 그럼 얘는 왜일까? 설마 그 시간도 자려고?

그것조차도 잠만 자니 그 이유도 묻지 못하고, 그렇게 오늘도 점심시간.

서둘러 급식실을 향해가는 애들과는 한참 먼 우리 둘. 이런 상황도 벌써 2주가 넘었다.

"음... ."

아직까지 눈치가 보이지만 더는 지체할 수가 없다. 나의 '작업'은 언제나 시간이 부족했다.

나는 조심스레 가방에서 노트를 꺼내 들었다.



3. 너도 똑같아

"정 단아 좀 데리고 교무실로 와라."

담임쌤이 말했다.

하아, 기어이 이런 날이 왔구나... .

하기사 단아는 이미 반에서도 이상한 애로 찍힌지 오래고, 다른 선생님들도 너무하다는 눈치를 보내던 차였다.

속으로 명복을 빌어줬다.

교실에 들어가니 오늘도 어김없이 단아는 자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톡톡 어깨를 두드려 깨웠다.

"뭐."

불쾌함을 한껏 숨기지 않은 단아는, 단 한마디로 상황에 대한 구체적 설명을 요구했다.

표정봐라, 저거. 물겠네 물겠어.

"선생님이 너 데려오라고... ."

"왜."

끝나기도 전에 자른다.  으, 살벌한 것.

"나도 몰라."

어깨를 으쓱해보인다.

"하... 미친 XX."

단아가 마지못해 일어난다. 쯧쯧, 뭘해도 욕은 빠지질 않아요.

단아는 교실을 나가려다 멈추고 날 본다.

"왜?"

단아는 퉁명스레, "데리고 간다며." 하고 대답했다.

"어딜?"

"너 좀 멍청하냐?"

"뭐?! 아... ."

내가 정말 '데리고 간다고' 했던가?

에잇, 그냥 혼자 가라고 할 걸 그랬네. 하는 수 없이 단아와 함께 교무실로 향했다. 짝을 잘못둬서 뭔 고생이람.

...그렇게 생각했는데 교무실에서 일어난 일은 참 의외였다.

"너희 둘 다 참 문제야. 알아?"

담임쌤이 혀를 차며 말했다. 예? 단아는 알겠는데, 나는 왜요?

"단아도 그렇지만, 너, 너! 우리학교 최다 지각 횟수를 갱신한 거 알아?"

이런, 그것 때문이었군.

어쩔 수 없었다. 난 밤에 늦게 자는 습관이 완전히 몸에 베여 있었다. 그래도 학교에 오면 졸진 않는데.... .

"하여간 한 놈은 학교를 수면실로 알고, 한 놈은 지각 기록을 갱신하고 있으니... . 다른 분도 아니고 교감 선생님이 신경쓰라고 직접 말하셨어!"

단아랑 동급이라니... . 이미 쌤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그저 슬펐다.

그러는 중에 단아의 표정이 더 가관이다.

한심하다는 듯, '쯧쯧.' 날보는 표정이 말하고 있었다.

야 이... 너도 똑같아!



4. 오해입니다

모든 여자가 단아 같진 않을 것이다.

이를테면 그래, 앞자리에 신애는 참 사근사근하다. 얼굴도 예쁘다. 모 아이돌 여가수를 닮았다는데 정말이다. 그래서 남여노소를 불구하고 인기가 많았다.

나도 예쁜 사람은 좋아하는 편이다.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 그래서 수업 중에 한번씩 얼굴에 눈이 갈 때까 있었다.

따스한 봄의 어느 5교시, 밥을 안 먹어도 잠이 쏟아졌다. 신애의 예쁜 얼굴에 취한 것이 반, 잠에 취한 것이 반. 머릿속에는 벚꽃이 흐드러졌다.

끼적끼적, 뭘 하는 지도 모르고 손을 움직이고 있을 때, 내 귀에 나즈막히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오... 타... 쿠... XX... ."

단아였다.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정색하며 날 보고 있었다. 깨달으니 내 노트에 신애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그것도 2D 일러스트 풍으로.

아, 습관이!

서둘러 가리지만 이미 늦었다. 단아는 다시 자리에 엎드리며 속삭였다.

"더러워... ."

얼굴이 확 달았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누명을 벗기 위해서라면 당당히 외칠 수 있었다.

'아, 아, 아스카짱은 좋아하지만 오타쿠는 아니라구요!'



5. 오해가 아닌 것 같은

"서방님을 이런 데서 만나다니!"

미연이 누나가 외쳤다. 나도 미연이 누나를 이런 데서 만날 줄은 몰랐다. 이 동네 사람이 아닌데... .

누나는 늘 그렇듯 보자마자 덥썩 팔짱을 껴왔다.

"아 놔요!"

"하핫! 좋으면서 또 그런다!"

싱긋 웃는다. 진심으로 싫다. 이 누나, 사람은 좋은데 그래도 우리 '입장'을 좀 생각해줬으면 한다.

"무슨 일이세요?"

"영업이야 영업. 일 하러 왔지!"

"쇼핑백은 숨기고 거짓말해요."

"히."

누나는 유쾌하게 웃었다. 우리 동네에는 큰 백화점이 있다. 늘 와보고 싶다고 말하더니, 오늘로 날 잡았나 보다.

"서방님 덕에 이렇게 백화점 쇼핑도 한다!"

"예, 예. 실컷 쓰고 살펴갑쇼."

누나한테 붙잡히면 3시간은 기본이라 얼른 도망치려고 했다.

"어딜!"

누나에게 목덜미를 덥썩 잡았다. 목이 졸려 퀙 소리를 질렀다.

"보통 어른을 만나면, 맛있는 거 사줘요! 조르는 게 청춘에 대한 예의 아니니?"

"저 문제아에요. 지각을 너무 많이해서. 그러니까 예의 같은 거 몰라요."

"어머! 그런 얘긴 또 커피 마시며 해야 제맛이지!"

자기 마음대로다. 결국 찍소리도 못한 채 누나 손에 이끌려 카페로 들어갔다.

아, 결국 이렇게 주말이 날아가는구나... .

그런데 안에 들어가자 의외의 만남이 있었다.

"어?" "엑?"

'엑?'이라니! 정 단아씨, 너무 싫은 티 내는 거 아닙니까?

바로 그 단아가 유니폼일 입고 있었다. 서로를 알아보고 잠시 굳었다.

"뭐야뭐야? 둘이 아는 사이니?"

촉을 잡은 미연이 누나가 끼어들었다.

"네, 같은 반이에요."

"쉿!"

갑자기 단아가 손가락으로 입을 막았다.

"뭐, 왜? 왜?"

단아의 돌발행동과는 별개로, 누나는 단아와 날 몇 번 번갈아 보다가,

"어머! 반가워! 난 얘 지인이면서 같은 단체에서 일하는 김 미연이야!" 하고, 갑자기 호들갑을 떨었다.

누나의 파워에 단아가 움찔한다. 기세를 늦추지 않고 누나가 유쾌하게 자신의 명함을 건넨다. 앗! 너무 빨라 미처 말리지 못했다.

단아는 명함을 받아 보더니 말했다.

"아... 스키?"

명함에 대문짝만하게 박힌 회사이름이다.

"응! '아니메 스키!'의 줄임말이야."

누나는 당당하게 외친다. 일단 일본 말이긴해도 요즘 세대라면 뜻을... 표정을 보니 모르는 것 같진 않다.

단아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날 가리켰다.

"얘도 여기에 속해 있어요?"

"그럼! 완전 정예 회원이지!" 누나가 치켜세운다. 덕분에 수치심이 치켜섰다.

단아는 정색한 채 날 노려보았다. 작게 입을 벙끗 거린다.

'오', '타', '쿠', '새'... .

...뒷말은 굳이 더 쓰고 싶지 않다.



6. 드디어

한 달 2주 만에 짝이 바뀌었다. 드디어 잠탱이 곁을 떠나는구나!

바뀐 자리도 여자랑 짝이다. 우리 반에서 남녀 짝은 한쌍 밖에 나올 수 없는데 말이다.

자리를 바꾸자 옆자리 여자애가 쪼르르 사라졌다. 그러더니 (우리 반 여신) 신애를 끼고 왔다.

오, 신애를 정면에서 본 건 처음... .

"저기, 나랑 자리 좀 바꿔줄래? 우리 둘이 친해서... ."

신애는 꽤나 간결하게 요청했다.

"좋아." 이런, 얼굴에 혹해서 너무 경솔하게 대답했다. 얼른 덧붙였다. "근데 네 자리는 어디... ."

"저기."

신애는 손가락으로 자리를 가리켰다

"... ... ."

...실화야?



7. 여름방학

결국 1학기 내내, 자리가 세 번이나 바뀌는 동안 단아의 옆을 지키는 건 내 몫이 되었다. 이 정도면 거의 전담반 수준이다.

가만히 있는 애 옆에 있는 게 뭐가 힘드느냐고? 힘들어 죽겠다!

선생님의 지적에도 꿈쩍을 안 하다보니, 분위기가 안 좋을 때마다 긴장의 연속이다. 중간중간에 단아를 변호하다보면 내가 왜 이런 고생을 해야하나 싶다.

하지만 그런 고민도 이제 끝! 고대하던 여름방학이다.

엎어져 자는 단아는 놔두고 옆에서 즐겁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깨톡!]

알람이 울었다. 누구지?

"억."

미연이 누나였다.


[오늘부터 방학이지???

다 알고 있다 ㅡㅡ+

공구 챙겨서 사무실로 바로 와! ♡]


몸이 덜덜 떨린다. 하트가 죽음을 예고하는 표식이었을 줄이야... .

차라리 단아 전담반이 나았다.



8. 문제적 인간

2학기 초, 기어이 사건이 터졌다.

방학 중에 썸씽이 있었는지 우리 반 신애가 옆반 한휘라는 애와 사귀는 모양이다.

문제는 한휘가 좀...  양아치였다. 소문도 좋지 않고.

그래도 학기초부터 끈질기게 구애했다고는 한다. 순애보가 통한 건지, 아님 나쁜 남자가 언제까지나 통할 아이템인 건지.

어쨌든 오늘이 저 둘의 투투 데이인지 뭔지하는 기념일인데, 그런답시고 한휘 무리가 자기 반과 우리 반에 돈을 거둬 들였다.

돈을 낼 이유는 하등 없지만, 분위기상 다들 내는 지라 나도 그냥 줘버렸다. 문제는... .

"싫은데?"

내 다음 차례, 모금의 요청을 단아는 칼바람 같이 내리쳤다. 지금은 돈을 내기는커녕 준대도 욕을 갈겨버릴 얼굴이다.

상대도 분위가 험악해진다.

"걍 좀 내지? 그 정도도 못하냐?"

"못하겠는데?"

...사이에 끼인 나는 뭔 죄냐?

돈을 거두던 여자애가 언짢았는지 단아 의자를 툭툭 찼다.

"야, 하 나. 눈치 없냐? 없냐고?"

단아의 열굴이 이때까지 본 것 중에 어두워진다. 깊고... 다크하게... .

순간, 단아는 의자를 차던 그 애의 발을 쾅 밟았다.

"악!"

피해자는 닭과 돼지의 중간쯤의 음역으로 비명을 터뜨렸다. 뒤에 있던 무리들이 주먹을 들었다.

"X 같은 게 뒤질라고!"

단아는 세상에, 맞설려고 했다. 하지만,

"너희들 뭐하는 거야!"

지나가던 영어쌤이 우리 교실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덩치가 우락부락해 애들이 무서워하는 쌤 중 하나였다.

"하 XX, 너 있다 보자?"

양아치 무리가 속삭였다. 영어 쌤이 다가왔다.

"늬들 지금 싸우냐?"

"아녀, 안 싸웠는데요?"

그들은 순식간에 태도를 전환한다. 그리고 단아를 노려보며 반에서 나갔다.

단아 역시 끝까지 저들을 노려보았다.



9. 단아... 당신은 도대체

점심시간이 되지마자, 단아가 일어났다. 그리고 성큼성큼 교실을 나갔다.

그래 몸 좀 사려라... 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체육복으로 갈아입은 단아는 머리까지 묶고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올 테면 오라는 듯 다리를 꼬았다.

하하 미치겠군. 나까지 끼고 싸움이라도 할 거니?

곧 양아치 무리가 돌아왔다. 6명이나 왔다. 여자 둘, 남자 넷.

정작 문제의 당사자 한휘는 오지 않았다는게 아이러니하군.

"따라나와."

아까 발을 밟힌 여자애가 첫 마디를 텄다.

단아는 중지로 답했다.

짝! 여자애가 재빨리 단아의 뺨을 갈겼다.

"아나... 얼탱이가 없네. XX 같은 게."

여자애는 이어서 한 대 더 때리려고 했다. 그 손을 쫓아 막았다.

"그쯤하지?"

누가? 내가.

못 믿겠다고? 당사자는 오죽하겠냐.

반년 넘게 봤다고 정이 들었냐? 아이고, 나도 참 나다.

"야." 무리 중 덩치 큰 놈이 나를 옆에서 불렀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 녀석의 주먹이 날아왔다. 퍽! 안면에 작렬했다. 얼굴이 순간 뜨거워진다.

"XX말고 낄 때 껴라."

맞았어? 나 맞은 거야?

"눈 X아."

그 놈이 말했다.

싸우면 이길 수 있을까? 절대 아닐 걸.

만약 피하면, 단아는 어떻게 되지? 단아를 내버려둘 수는 없다. 그럼 결론은 하나 뿐이다. 싸움은 피할 수 없고 어차피 실컷 맞을 거.

"XXX야!"

녀석의 인중을 갈겼다. 나도 한대는 때려야 덜 억울하지 않겠어?

불의의 기습에 놈이 움찔한다. 순간을 놓치지 않고 코에 박치기를 먹였다.

또 명중이다. 어? 선빵의 위력인가? 어쩌면 비빌만한... .

"잡아!"

뒤에서 두 놈이 내 팔을 부여잡았다. 정신을 차린 뚱땡이가 내 명치에 주먹을 갈긴다.

"큭!"

말로는 쓸 수 없는 아픔이 달린다. 아, 이렇게 끝인가? 뚱땡이의 다음 공격이 오려는 순간, 정아가 달려와 뚱땡이에게 니킥을 먹였다. 하지만 여자애들이 곧바로 정아를 발로 찼다.

그 뒤로 어떻게 됐냐고?

현실은 소설이 아니다.



10.  사건의 끝

싸움 뒤 모두가 교무실에 불려갔다.

사건은... 덮기로 했다. 걔내들이 양아치는 아니지만 우리도 범생이가 아니라서랜다. (정확히는 양쪽모두 잘못이 있댄다.)

기념일이라는 이유로 대놓고 돈을 삥뜯은 놈들을 한테 싫다고 말한 것뿐인 단아의 잘못이 뭔지 짚고 넘어가줄 선생님은 대한민국에는 없었다.

끝으로 되도 않은 화해의 악수를 시키지만, 하는 사람은 없었다.

단아는 싸움 중 끝까지 반항을 했다. 진짜 사이코 또라이 같았다. 쟤내도 질린 듯, 이제는 건드릴 것 같지 않았다. 나도 단아의 객기에 휘말려 끝까지 싸웠다. 덕분에 죽기 직전만큼 터졌다. 아프다.

그날 단아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헤어졌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겨울이 되었다.



11. 삼 주 후

문득, 정아가 점심을 먹지 않는 건 돈이 없어서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돈을 내라고 하니 싸우고,

중학생이면서 몰래 아르바이트를 하고,

평소에 준비물은 항상 가지고 오지 않고,

그 흔한 문제집이나 필통도 항상 없었다.

"음... ."

만약 그렇다면, 글쓴이는 정말 죽어 마땅할 것이다. 이때까지 글을 끌어놓고 그런 싸구려 신파극을 들이 밀다니.

"일 안 하고 뭐해?"

미연이 누나가 매의 눈으로 말했다. 잠깐의 멍때림을 놓치지 않는다. 과연 우리 팀장님! 가차 없군!

잠깐의 상상시간은 거기서 끝났다.



12. 겨울음악

프롤로그가 길었다.

워워! 짜증은 내지말길 바란다. 뭐든 순서가 중요하니까. 그럼 이제 본론.


아주 추운 겨울이었다. 집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다. 펜을 끄적이길 몇 분, 몇번이나 똑같은 부분을 수정하고 있었다.

"아 짜증나!"

인정해야겠다. 작업이 막혔다.

'영감'을 중시하는 타입인 나는 느낌이 오지 않으면 아무 것도 못한다.

마침 정신을 번쩍 들게 할 찬바람이 무료로 불고 있었기에, 당당히 사용하기로 했다.

...틀렸다. 너무 춥다. 30초만에 후회했다. 영감은 개뿔, 세 달 전에 밟힌 곳이 쓰라릴 정도로 춥기만 하다.

주머니에 손을 폭 꽃고 근처 공원으로 향했다.

바람이 너무 불어 사람도 없을 터였다.

"어?"

저 아래, 미끄럼틀에 걸터 앉은 단아가 보였다.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 ♪

정아가 자판을 누를 때마다 피아노 음이 울렸다.

"뭐지?"

궁금했지만, 아는 체 해봤자 좋은 말 못 들을 걸 알아서 서 있었다.

추위에 얼은 손으로 폰을 꾹꾹 누른 단아는, 잠시 후 '저장' 버튼을 누르고 언뜻 '▶'으로 보이는 버튼을 눌렀다.

♬ ♪♩- ♪♬-

갑자기 피아노 멜로디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설마... 작곡?

언뜻 배경으로 깔리는 음은 단조, 메서운 날씨와 같이 차갑게 시작했다.

그 위로 천천히 장조의 피아노 음이 깔렸다. 조용하면서 따뜻한 함박눈과 같은 선율이었다.

이건... 거울이었다.

차가운 날씨에도 체온을 가진 것들은 그 속에서도 살아있다. 추운 출근길, 따뜻한 집의 아늑함, 겨울을 연상시킬 수 있는 차고 뜨거운 모든 것이 선율이 되어 눈송이처럼 떨어졌다.

조금씩, 조금씩 전율이 흐른다. 감상은 거기까지다. 음악의 하이라이트 부분이 시작되자 그저 선율에 취해서 듣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우와!"

"우왁!"

내가 소리를 지르자 단아가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하지만 들키거나 그딴 건 이미 안중에도 없다. 폰을 꺼내 터치펜을 뽑았다.

"너, 너 뭐야!"

이 영감, 이 감각을 놓치면 안 된다.

노트 어플을 켜서 스케치를 시작한다.

어느 도시의 거리, 한 소녀가 쓸쓸히 어느 가게의 창을 바라보고 있다. 소녀는 무표정하지만 거울에 비친 거리는 따뜻하기만 하다.

이어서 또 하나를 스케치했다. 북쪽 침엽수가 우거진 숲, 별이 가득한 하늘을 올려다보는 사슴의 그림이었다.

손을 멈출 수가 없었다. 얼른 색깔을 찾아 채색 포인트를 표시해놨다.

"야! 씹냐!"

손가락을 들어 조용히 하라고 했다.

닥쳐랏! 이제 조금 더, 조금 더! 조금만 더!

"됐다!"

마침내 모든 것을 쏟아낸 초안이 완성됐다. 오랜만에 정말 만족할 만한 그림이 나왔다.

감격에 겨워 단아에게 외쳤다.

"음악! 그거 네가 만든 거야?"

"어? 어, 뭐. 그런 셈... ."

"나랑 같이 작업하자!"

"뭐? 뭐?"

"네가 그린 그림, 앨범 자켓으로 선물할게. 수입은 8:2로 가져! 노래 작곡한 거 더 있지?"

단아는 또라이를 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래, 무리도 아니겠지.

"뭔 소리 하는 거야? 네 오타쿠 그림에 관심 없... ."

"내 일러스트 하나에 삼백만원이야!"

돈 얘기가 나오자 정아가 움찔한다.

"뭐?"

"응?"

뭐야? 먹힌 거야? 돈 얘기에? 설마 진짜 싸구려 신파극인 거야? 가난해서 급식을 못 먹었다고?

아냐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나는 미연이 누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누나!"

"뭐야? 갑자기 전화를 다... ."

"지금 사무실로 갈게! 소개해줄 사람이 있어!"



에필로그. 겨울도 하나의 계절이다.

단아는 아르바이트를 하루에 세 개씩 하고 있었다.

독한 것. 그러니까 교실에서 잠만 자지.

하루 벌어 사는 허덕이는 삶의 유일한 탈출구는 작곡이었다.

그 음악은 더럽고, 눈물나게 힘든 인생의 아름다운 승화였다.

입이 거친 그녀의 가시가 감춰둔 꽃이었다.

무엇보다도, 단아는 음악에 소질이 있었다.


이건 그뿐인 이야기다.

가난은 단아에게 '사실'일 뿐, '불행'이 아니었다.


킥스타터로 인디 리듬 게임의 후원금을 모았다.

이쪽 세계에서는 유명한 내 일러스트와

단아의 음원 몇개만으로도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미연이 누나는 자신의 일에 당당했고, 폭발적인 추진력과 인맥이 있었다.

게임은 성공적이었다.

단아는 아르바이트를  하나로 줄였다. 사실 전혀 안 해도 되지만 게임 판매는 한철 장사라 안정적인 수입을 위해 그만두진 않을 모양이다.

돈은 벌었을 것임에도 단아는 점심을 먹지 않았다.

"익숙해져서 안 먹는 게 속이 편해." 란다.

하, 우린 결국 닮았던 것인가. 그 말에 기분이 몹시 슬퍼졌다.

아, 내 표정을 읽었나보다.

"너 띠꺼워."

...말본새하고는... 하여간 입에 필터가 없어요 필터가.

"말 좀 예쁘게해라 이것아."

시어머니 같으 내 말에 단아가 킥 웃었다.

미연이 누나랑 지낸 탓인지 단아도 요즘은 곧잘 웃는다. 웃을 땐 좀 예쁜 것도 같다.

"싫어. 상놈아."

단아는 양손으로 중지를 올렸다. 역시 예쁘게 봐줄 수는 없는 것 같다.

"하... 넌 진짜... ."

요즘도 날씨는 춥다. 겨울은 어쩔 수 없이 추운 계절이다.

그래도, 겨울보다 더 시퍼런 욕을 해대는 여자애 덕분에 덜 춥게도 느껴지는 것 같다.

나는 나름의 정을 담아, 만면의 미소와 함께 정아를 향해 가장 완벽한 자세로 중지를 들어주었다.

며칠 후면 겨울도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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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돌을 맞아야 작가가 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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