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소설회랑

Call me Ishmael(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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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업 참여 동의 아니오

Call me Ishmael 


 이억수



0.



 담뱃갑에 아직 금연그림이 없고 술집에선 담배를 피우는 게 당연했던 시대의 이야기.



01.


 데구르르 쿵! 하고, 소녀는 이제쯤 오겠다 싶으면 찾아왔다. 

 어떤 낮엔 침상 밑에서, 어떤 저녁엔 바람결에 부푼 커튼 아래서 굴러 나왔다. 도대체 여기선 어떻게 굴러나온거야 싶은 곳에서 굴러 나올 때도 많았다.

 다만 끝 동작은 늘 한결같게 체조선수처럼 양팔을 쫙 펼치며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일어섰다.


 대체 뭔 의미가 있는 동작인지는 몰랐지만 하여튼 그랬다.



02.



 그리고 사라질 때는 으레 눈을 꼭 감으라고 하거나 

 윤의 뒤로 돌아가서는 뿅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왜 올 때는 쿵이고 돌아갈 때는 뿅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랬다. 



03.


 윤은, 자신이 미친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부대 안에 여자라니. 그것도 어린 여자애라니. 그냥 여자도 아니고

교복을 입은 여자애가 나왔다는 것이 더 문제였다. 

 그냥 여자였다면 그러려니 했겠지만

 여중생이라는 단어는 한없이 범죄에 가까운 냄새를 풍겼다.


 윤은 억울했다. 


 정신병에 걸릴거면 좀 더 이쁘고 나이찬 여자나 나올 것이지.

 그래도 너무 어리지 않나 중학생은. 

 자신의 내재된 성욕이 원망스러웠다.


04.


 소녀가 처음 관물대에서 데구르르 쿵! 하고 굴러 나왔을 때. 

 윤은 그만 깜짝 놀라. 씨발! 이라고 외쳐버렸다. 

 누구라도 관물대에서 금발의 여중생이 굴러 떨어진다면 깜짝 놀랐을 테지만.

 안쓰럽게도 선임들이 다 있는 앞이었다. 


 다행히도 윤은 예전부터 이미 폐급이었다. 


05.


 소녀가 여섯 번짼가 굴러 나왔을 때. 


 윤은 소녀에게 말을 걸어보기로 마음먹었다. 

 환상과 대화하는 것은 정신병을 키우는 짓이라고 

어디선가 주워들은 것 같았지만 

 윤은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게 그도 적잖이 심심했던 것이다.


 "저기." 하고


 윤이 말을 걸자 소녀는 까무러치듯이 놀랐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이었다.

 윤은 당황했다. 

 아니, 그건 내가 지을 표정이지.


06.


 소녀는 윤을 잡아끌고 도서실로 향했다. 

 무언가에 끌려가는 듯 이상하게 걷는 윤을 보며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곧 '아, 쟤 원래 이상한 놈이었지?' 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지나갔다.


 도서실엔 아무도 없었다.


 이상한 포즈로 도서실에 끌려들어온 윤과 금발의 교복소녀. 

 만약 윤의 취향이 조금만 더 소아성애 쪽에 기울어 있었다면 

 소녀는 큰일을 당했을 것이다.


 소녀는 살짝 상기된 표정으로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곤 숨을 한번 크게 몰아 쉰 뒤.

 이젠 말을 해도 된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윤은 잠시 고민하다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네 정체는 무엇이냐! 라는 식의 질문은 아무래도 너무 무례한 것 같아 대강 돌려 물어본 것이었다.


 윤은 정신병에게도 예의를 차리는 놈이었다.

 하지만 되려 이것이 소녀에겐 더 곤혹스러웠는지

 소녀는 곤란하다는 듯 머뭇거리다 책장을 보곤

막 정한 것이 분명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이슈마엘."


 "이슈마엘이라고 해요."


 이때는 그냥 모비 딕을 너무 감명 깊게 읽었나 보다 싶었다.


07.


 별로 본명을 밝히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기에 윤은 언젠가 인터넷에서 봤던 영상을 떠올리며 소녀를 롤링걸이라 부르기로 작정했다. 하지만 소녀가 질색을 했기에 그냥 이슈마엘이라 부르기로 했다. 


 그러다 윤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자연스레 책장에서 성경을 찾았다. 그리곤 어떤 영화에서 봤던 것처럼 성경구절을 읊으며 물러나라! 하고 근엄하게 말해봤다. 


 하지만 소녀는 여전히 거기 있었다. 

 소녀가 크아악 하고 절규하며 타버리지 않아서 

 윤은 살짝 실망했다.


 자신이 악마 취급을 받았다는 걸 깨달은 이슈마엘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윤의 가슴을 퍽퍽 쳤다. 


 첨언하자면 꽤 아팠다. 


08.


 이후로, 윤은 조금 무서워져서. 몇 번 이슈마엘을 무시하려 해봤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무시하면 “무시해요?” “지금 나 무시하는 거에요?” “무시하냐구요.” 하며 계속 주먹으로 퍽퍽 쳐왔기에 굉장히 성가셨다. 그렇다고 키가 자기 어깨까지도 안 오는 여자애를 때린다는 건 뭔가 인간으로서의 무언갈 버리는 느낌이라 꺼려졌다.


 성가신 정신병이네. 하며


 결국 사람이 없을 땐 말을 받아준다는 조건으로 합의를 봤다.



09.


 안 그런 부대가 있겠냐 만은 윤의 부대는 깡촌에 있었다.

 깡촌도 그런 깡촌이 없었다.

 윤은 아직까지도 자대배치를 받았을 때의 감상을 기억하고 있다.

 이야, 이거 참, 좆됐다 싶었다.


 여기엔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싶은 산 몇 개를 굽이굽이 건너 여기서 과연 생물이 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올라올 때쯤에 부대가 나왔다.


 기암절벽과 기괴하게 뒤틀린 소나무들이 돌아가라……. 돌아가라... 하고 경고하는 듯 했다. 면회실엔 면회객도 뭣도 없었다. 언제부터 여기서 살았을까 싶은 고양이들만 있을 뿐.

 간혹, 아들 새끼 얼굴이나 보자. 하고 찾아왔던 부모님들도 우리 그냥 휴가 때만 보자. 하고 학을 떼며 돌아갔다. 거기에 본부가 있는 거고 윤이 사는 막사까지 가려면 또 비슷한 산길을 몇 개 건너야 했다. 그러는 데만 40분이 걸렸다.


 중대의 위치가 고대의 도시국가를 연상케 했다. 

 사람 하나 죽어도 아무도 모를 곳이었다.

 간부가 이곳에 오면 좌천이요 병사가 이곳에 떨어진다면 희망을 버려야 한다…….


 여기가 대충 어디쯤이냐는 지리학적 질문에 윤은 담배를 태우며 이렇게 장황한 설명을 했다.

 윤은 그런 놈이었다.

 결국 가만히 설명을 들어주던 이슈마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일축했다.


 "중증의 피해망상이네요."


10.


 "흐으음"하고 머리를 톡톡 두드리던 이슈마엘이 빙글 웃으며 말했다.

 "제가 살던 곳에서 꽤 많이 떨어진 곳이었네요. 여기."

 호기심이 동한 윤이 물었다.

 "어디 사는데?"

 "인천이요."

 윤은 깜짝 놀랐다. 

 물고 있던 담배를 떨어트릴 정도의 놀람이었다. 

 먼지를 툭툭 털고 담배를 다시 물며 새삼스럽다는 듯 물었다.

 "그런 설정이었어?"

 설정이 아니에요ㅡ 하고 이슈마엘은 화가 난 듯 

윤의 가슴을 퍽퍽 쳤다.


11.


 "그럼 어디 나라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요?"


 어이가 없다는 듯.

 여전히 퍽퍽 소리가 나게 치며 이슈마엘이 물었다. 자신의 몸에서 이토록 호쾌한 소리가 난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윤은 잠시 머뭇거리다 실토했다.

 

"꿈의 나라나, 상상의 나라 같은 곳."


 때리는 속도가 리드미컬하게 빨라졌다. 좀 전이 큰북이었다면 지금은 팀파니를 치는 듯 했다. 이젠 좀 많이 아프다. 

 이슈마엘이 씩씩거리며 물었다.


 "그럼 제 머리카락이 왜 금발이라고 생각해요?"


 "그야, 나도 모르던 내 삐뚤어진 취향을 흠뻑 함유해서 그런 줄 알았..."


 "어쩐지 물어보질 않더라!" 


 보통은 물어본다구요 엄마랑 아빠 중에 누가 외국인이냐고.

 이슈마엘이 길고 샛노란 속눈썹을 부루퉁하게 깜빡였다. 


12.



 재잘재잘 이라는 부사를 사람으로 바꾸면 이슈마엘이 될 것 같았다. 윤의 기억이 맞는다면 이슈마엘이라는 이름은 추방자 라는 뜻인데. 만약 이슈마엘이 어딘가에서 추방당해 이곳에 온 것이라면 그 이유는 분명 시끄러워서일 것이다. 묻지도 않은 깊은 이야기를 들었다. 곤란했다.

 윤은 이슈마엘의 엄마가 핀란드 사람이었다는 것.

 이슈마엘이 열 살 때 병으로 돌아가셨다는 것

 그리고 열세 살 때 아빠가 새 장가를 들었는데. 새엄마(아줌마라 부른다.)와는 사이가 별로 안 좋다는 것. 둘이 맞벌이라 주로 할머니의 손에 자랐다는 것. 교복 밖에 입지 않는 건 아줌마가 사준 옷은 입기 싫어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럼 네가 가서 사오면 되잖아. 라는 말에 이슈마엘이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그그그, 그런 건 당연히 알고 있죠. 라고 말해서. 애가 머리가 썩 좋진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13.


 뭔가 이슈마엘만 말하는 것은 불공평한 것 같아. 윤도 이것저것 얘기했다. 예를 들면, 지금 읽고 있는 책에 대한 것. 멧돼지가 얼마나 위험한지에 관한 것.


 위병소 앞에 사는 고양이에 관한 것.

 옆에 사람이 있을 때면 노트에 끼적였고 사람이 없으면 조용히 말했다. 

 윤도, 미친놈처럼 보이는 건 싫었던 것이다.


14.


 아빠랑 싸우고 나서였나. 왜 싸웠는지는 기억이 안나요.

하도 많이 싸워서 짚이는 게 한둘이 아니거든요. 하여튼 침대에서 머릴 박고 


 "이 놈에 집구석! 완전 짜증나!" 하면서 발버둥 치다가 굴러떨어졌더니 여기였어요. 진짜 깜짝 놀랐어요. 막 무섭게 생긴 아저씨들이 군복입고 이상한 말이나 하고 있고……. 물어봐도 대답도 안하고 만져지지도 않고……. 꼭 귀신이라도 된 것 같아서 처음엔 어떻게 돌아가나 싶었는데 또 속으로 돌아가고 싶다 돌아가고 싶다 하면 돌아가지더라구요.


 눈으로 먼지를 쫒던 윤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그러다, 갑자기 내가 널 보기 시작했다?"


 이슈마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꼭 5일만이었어요.


 윤은 자신의 정신병이 당위를 만들고 있다고 감탄하며.

자신이 무서운 아저씨 중 하나였다는 사실은 애써 외면했다. 



15.


 이슈마엘은 보통 학교가 끝나는 4시쯤에 자주 왔다. 

 쿵! 하는 소리가 들리면 ‘또 시작이구나. ‘ 했다. 

 시간이 일정하지 않다는 점이 꽤 디테일하네. 싶었다.


 책을 읽고 px에 건전지가 들어오면 같이 노래도 듣고 가끔은 대화도 나눴다. 


 서로에 대한 신상정보를 알고 나서부턴 주로 문학과 음악에 대한 얘기를 많이 했다. 윤이 생각하기에 이슈마엘은 나이치고 꽤 괜찮은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 


가끔은 대화가 너무 즐거워져서

너무 빠져 들까봐 윤은,


 이슈마엘이 자신이 모르는 문학이나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부러, 내 정신병이 디테일해진다며 감탄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당연하다는 듯. 이슈마엘은 윤을 퍽퍽 때렸다.

 손도 더 매워지는 것 같네. 

 윤은 더 감탄했다.


 그리고 이슈마엘도 윤이라는 인간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다.

 

 군대라는 곳은, 애초에 혼자 있는 것이 불가능한 곳이다. 

 그런데 윤은 밥을 먹을 때도 혼자였고 작업을 할 때도 혼자였고 심지어 담배를 태울 때도 혼자였다. 모두가 윤을 피하는 듯 했다. 


 이슈마엘은 윤이 외톨이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16.


 윤은 흡연장에서 담배를 태우며 천천히 자신이 혼자가 된 경위를 변명했다. 윤도 처음부터 폐급은 아니었다. 정확하겐 폐급취급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등병 땐 폐렴 때문에 창 전술 훈련이라는 큰 훈련을 빼게 되고 일병 때는 간염 때문에 혹한기 훈련을 빼게 됐다는 희대의 꿀을 빨아버린 덕택에 막사에 복귀하고 보니 윤은 폐급이 되어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염증이 개새끼였지만 사람들은 윤을 개새끼 취급하는 걸 더 좋아했다.


 안 그래도 말이 없는 성격이었기에 오해는 점점 더 깊어져갔다. 

선임들은 윤과 말도 하기 싫다는 듯. 근무를 나갈 때면 하품을 하며 자기는 막사에서 가까운 초소에 고정을 박고 윤에게 근무를 다녀오게 시켰다. 일명 부메랑이라 불리는 부조리였다. 


 이따금 야간 근무를 나갈 때면 윤은 산짐승의 울음소리에 벌벌 떨며 오랫동안 밤길을 헤매었다.


17.


 거기에 윤은 동기도 없었다.

 사실 동기들만 있었더라도 지금 같은 취급을 받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같이 들어왔던 동기 세 명 중 두 명이 일병 2호봉 때 서로 죽어라 싸우고 다른 중대로 옮겨졌고 한 명은 일3 때 와이프가 출산을 하면서 상근으로 빠져버렸다. 그래서 윤의 군번에는 윤밖에 안 남게 되어버렸다. 그리고 윤 본인도 혼자인 게 편했다. 


그렇게 된 거야. 하고 윤이 담배를 비벼 끄자.


 잠시, 이슈마엘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정말로 기쁘다는 듯이 밝게 웃었다.


 "다행이네요. 저도 같아요."



18.


 윤은 잠시 이슈마엘을 바라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 

 묻는 것이 두려워졌다. 그래서 곤란해진 윤은 그러냐. 하고 

이슈마엘의 이마에 딱밤을 때렸다. 이슈마엘도 그래요. 라고 하곤 아무 말 없이 윤을 때렸다.


 뭔가 윤은 이슈마엘과 조금은 친해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19.


 윤은 외출을 나갔다가 

 이슈마엘이 쓸 컵을 하나 사왔다. 


 애초에 그걸 목적으로 나간 건 아니었지만 잠깐 마트에 들렀을 때 생각이 나서 사왔다. 무려 담배 한 갑 치였다. 이건 윤에게는 꽤 큰 지출에 해당한다.


 하얀 도자기에 웃는 그림이 그려진 귀여운 머그컵이었다.

 최근에 이슈마엘이 자주 방문하게 되며 물을 마시거나 차를 마실 때 컵을 종종 쓰게 되었는데.

 책이나 CD플레이어 같은 건 같이 써도 상관이 없었지만 

아무래도 컵을 같이 쓰는 건 비위생적인 것 같았다.


 "설거지는 직접 하도록." 하고 건네주자


 이슈마엘은 뛸 듯이 기뻐했다. 


20.


 도서관을 좋아했다.

 외톨이들은 모두, 도서관을 사랑하는 병에라도 걸리는 걸까.

 윤과 이슈마엘은 둘 다 도서관을 좋아했다.

 그곳은 원래 텅 빈 휴게실이었지만 

옛날부터 시간을 죽일게 담배와 책 밖에 없었는지

선임들이 두고 간 책들이 도서관을 이뤘다.


21.


 윤은 책을 읽는 것도 좋아했지만 책장에 놓인 

책들의 장정을 찬찬히 살피며 뒤적거리는 것을 좋아했다.

 책에 쓰여 있는 이름과 책들을 대조해보며 이젠 없는 사람의 취향을 상상해보기도 하고 이건, 정말 답이 없다 싶은 책들만 따로 빼 정리하기도 했다.


 윤은 정동혁이라는 사람의 취향은 꽤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박태환이라는 사람과 임철진이라는 사람의 취향은 영 꽝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임철진이라는 사람은 끔찍했다.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사람인지 얼굴이나 한번 보고 싶었다. 


22.


 대체로 윤과 이슈마엘은 각자 읽고 싶은 책을 읽었지만

읽고 싶은 책이 겹치면 같이 읽기도 했다. 

 취향이 비슷했기에 꽤 자주 그랬다.

 윤이 오른쪽에 앉고 이슈마엘이 왼쪽에 앉아 서로의 페이스에 맞춰 천천히 책을 읽어 나갔다. 

 이따금 이슈마엘의 얼굴이 너무 가까이에 와있어 윤이 화들짝 놀랄 때도 많았다. 


 주로 헤밍웨이나 카프카 같은 옛날 작가들의 책을 즐겨 읽었다.

 가끔 카버의 단편도 즐겨 읽었다. 

 헤밍웨이를 특히 좋아해서 ‘인디언 캠프’를 세 번, ‘무기여 잘 있거라‘를 두 번 킬리만자로의 눈을 세 번 같이 읽었다. 


23.


 "인디언 캠프는, 어린 닉이 죽음이 뭔지는 몰라도 자신은 죽지 않을 거라고. 다짐하는 부분이 백미잖아요?"


 윤이 잠시 다른 생각을 하다 책을 덮으며 말했다.


 "그렇지."


 "그런데 전 처음에 인디언캠프를 읽었을 때. 왜 그 부분이 좋다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이슈마엘이 한숨을 폭 쉬었다.


 "왜냐면 그런 걸 이해하기엔 제가 너무 어렸거든요."


 "지금보다 어릴 때면 얼마나 어렸다고."


 윤이 의아해하자 이슈마엘은 손가락을 꼽아보며 대답했다.


 "아홉 살 때 얘기에요."


 윤은 조금 생각하다가 으음, 하고 대답했다.


 "조숙했네."


 “그렇죠?”


24.


 한참을 도서관에 있다가. 해질녘이 돼서야 둘은 밖으로 나왔다, 

여기서 밖이란. 당연히 흡연장을 말한다. 끙차! 하고 기지개를 펴며 이슈마엘이 중얼거렸다. 


 “사실, 지금도 잘 모르겠어요.”


 “뭐가?”


 “인디언 캠프.”


 뭔가 대화가 이어지질 않는 것 같네. 라고 생각하며 윤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아마 아까전의 이야기를 하는 거겠지. 하고 윤은 이슈마엘의 다음 말을 기다려 줬다. 잠시 넘어가는 해를 응시하던 이슈마엘이 한숨같이 말했다. 살짝 목이 졸린 듯. 혼잣말인 듯. 주위가 조용하지 않았다면 들리지 않았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왜 사는 게 아름답다고 하는 걸까요?”


 “계속 살아 있어봐야. 더 좋은 일이 있을 거라는 보장도 없는데. 결국에 죽어서 사라질 거라면. 좀 더 보기 좋은 꼴일 때 죽는 게 낫지 않을까요.”


 멋쩍었는지 이슈마엘은 뒤에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죽고 싶다는 건 아니지만요.’ 하고 얼굴을 붉혔다. 


 윤은 속으로 목련을 생각하며 그 말에 깊이 공감했다. 하지만 이슈마엘의 표정은 공감보다는 윤의 생각을 듣고 싶어 하는 표정이었다. 담배연기를 오랫동안 머금던 윤이 연기를 폐 밖으로 내보냈다. 오랜 고민 끝에 윤은 이슈마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무덤덤하게 말했다. 


 “......나중에 네가 진심으로 죽고 싶어지는 때가 오면, 그땐 같이 죽어줄게.”


 “뭐에요 그게.” 머리를 덮은 윤의 손을 치우며 이슈마엘이 불평했다. 됐어요. 하고 이슈마엘이 피식 웃었다. 


 석양빛에 담배가 타들어갔다. 윤은 잠시 눈을 감은 채 

벤치에 앉아 있는 이슈마엘이 놀라우리만치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25.


 언제가 됐건. 흡연장은 대화를 나누기 괜찮은 장소다.

 이후로 둘만 있을 때면 윤과 이슈마엘은 거기서 대화를 나눴다.

 윤은 주로 커피를 마시거나 담배를 태웠고 

 이슈마엘은 핫초코를 마셨다. 

 윤이 '중학생이면 주말에 할 일 많지 않나...'

 하는 눈으로 노골적으로 귀찮아하면 

 이슈마엘이 '주말에도 딱히 갈 곳이 없어요.' 


 하는 눈으로 깔끔하게 무시하는

 치열한 대치가 이뤄지는 장이기도 했다.


 그래도 이슈마엘이 좋아했기에 핫 초코만은 꼬박꼬박 타줬다. 


26.


 "핫 초코 맛있어요."


 윤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가 어렸을 때부터 많이 타줘서, 비법 비율을 알거든."


 "어머님이랑 친하셨나요?"


 "응, 꽤 친했어."


 이슈마엘이 지긋이 윤을 쳐다보자 멋쩍어진 윤은 눈을 슬쩍 피했다.


 "의외지?"


 "의외에요,"


 즉답이었다.


 윤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27.


 "부모님이랑 전화는 자주 해요?"


 "전혀 안 해."


 "사이가 안 좋아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글쎄, 뭐랄까.


 "죽은 사람이랑 전화하는 건, 아무래도 미친놈처럼 보일 테니까."


 이슈마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주위 눈치를 많이 보는군요."


 윤도 우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른의 숙명이지."


28.


 담배 탓인지 살짝 쉰 목소리로 윤이 말했다.


 "입버릇처럼, 한 날 한 시에 죽고 싶다더니, 정말로 한 날 한 시에 죽어버렸어."


 이슈마엘은 조용히 윤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 정도의 상식은 있었던 모양이다.


 "교통사고였지."


 무슨 일본 괴담처럼 너무 많은 보험금이 들어왔어.

그런 소원은 빈 적이 없지만.


 윤은 잠시 흐으음하고 숨을 쉬다. 세 번째 담배에 불을 붙였다.

말을 너무 많이 했다 싶었다.


29.


 이슈마엘은 뭔가 할 말이 있다는 듯 짧게 숨을 쉬었다가 멈췄다.


 그 모습을 보고 윤은 속으로 살짝 긴장했다. 하지만 별 일 아니라는 듯, 포기한 듯. 이슈마엘은 잠시 빈 잔을 내려 보다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저기, 윤. 나중에 나도 그 비법비율 좀 알려줘요."


 윤은 안도하며 그러겠다고 했다.



30.


 최근 중대에서 윤이 혼잣말을 하는걸 목격한 사람이 많아졌다.

윤은 몰랐겠지만 흡연장에선 그런 소문이 돌았다. 조곤조곤하게 소란스러운 흡연장에서 불현듯 누군가가 말했다.


 "그런데 그 새끼 원래 미친놈이었잖아."


 맞는 말이었다. 

 귀신이라도 보나보지 하고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흩어졌다.


31.


 윤이 이슈마엘에 대해 가장 신기해한 것은. 

 이슈마엘이 가끔 숙제를 가져온다는 것이었다. 

 마치 진짜 중학생인 것처럼.

 그것도 윤이 분명 본적이 없는 교재를 또박또박 가져온다는 점이 디테일했다.


 윤이 교과서를 들춰보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이거, 진짜 교과서네."


 "그럼 세상에 가짜 교과서도 있어요?"


 정론이라 할 말이 없었다.

 윤은 입맛을 다시며 결국 이슈마엘의 방학 숙제를 거들었다.

여기서 여기까지만 해주면 되요. 라고 너무 당당히 요구해서 

윤은 내가 이걸 왜 해야 하는 거지. 라는 표정을 지으며 함수 문제를 풀었다.


 그 표정을 본 이슈마엘이 펜을 바쁘게 놀리며 물었다. 


 "딱히, 할 일 있어요?" 


 없었다. 


32.


 다음날 이슈마엘은 교무실로 불려가

'숙제가 하기 싫으면 그냥 말로 하라'는 충고를 들었다.

 갱지엔 빨간 비가 주륵주륵 내려 있었다.

 죽고 싶을 정도로 창피했다. 

 사실, 말은 안했지만 윤은 문과였다.


 '돌아가면 백대 때릴 거야.' 


 이슈마엘이 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33.


 이슈마엘이 찾아와도 윤을 못 만날 때가 있었다.

 평소엔 휴게실이나 흡연장이나 도서관에만 가면 윤을 찾을 수 있었는데. 어딜 가도 윤이 없었다. 그게 꽤 쇼크였나 보다. 

근무를 다녀왔는데 내무반에서 웬 여자 울음소리가 들려와서 

윤은 깜짝 놀랐다.


34.


 깜빡 전역해버린 줄 알았다면서 이슈마엘은 얼버무렸다. 윤은 일병 약장을 보여주며 안타깝게도 아직 한참 남았다는 것을 알려줬다.


 "다음번에 근무 갈 땐 나도 같이 나갈래요."


 힘들걸. 하고 경고했지만 이슈마엘은 생각보다 잘 따라왔다. 

저 멀리서 빨리 오라고 재촉하는 이슈마엘을 보며 윤은, 

나도 저 나이 땐 저렇게 체력이 좋았던가. 하고 생각하다 

곧 숨을 몰아쉬며 먼저 쉬자고 말을 걸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저 정도로 체력이 좋진 않았었다.

 그 이후로 근무를 나갈 땐 이슈마엘도 따라 갔다. 


35.


 이슈마엘이 머무는 시간이 점점 늘어났다. 

 웬만하면, 윤이 어딜 가든 이슈마엘과 함께였다. 

 주말엔 아침부터 올 때도 있었다.

 가끔 근무를 나갈 때면 귀신이 나온다는 버려진 초소의 기만 인형을 올리고 고라니의 수를 세고 멧돼지를 만나면 같이 도망쳤다. 

 이즈음해서 이슈마엘은 위병소의 고양이와 좀 친해졌다. 


 책도 노래도 지겨워질 때면 가끔 버려진 고가에 올라 한가로이 마을을 보거나 구름을 봤다. 굉장히 의미 없고 쓸모없고 자잘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군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다들 이정도 무료함과 무의미함은 느끼는 것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윤은 이슈마엘과 노닥거렸다. 


 솔직히 조금은 즐겁다고 생각했다.


36.


 그렇게 내려쬐는 햇빛에 

봄이 증발하는 소리가 들릴 즈음에.



37.


 당신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하고 

이슈마엘은 책을 읽다가 정말로 뜬금없이 고백했다. 

윤은 이슈마엘을 보며 나도 저 나이 땐 저렇게

솔직했던가. 하고 생각하다. 생각에도 없던 말을 내뱉었다.


 "좋아하면 좋아하는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좋아하는 것 같다는 뭐야."


 "아, 그런 부분은 좀 싫어해요."


38.


 윤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어."


 "저도 대충 짐작은 했으리라 짐작했어요."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이슈마엘의 표정에. 

 잠시 빈 머그컵을 내려다 보다 입술을 깨문 윤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도 변명이나 상처받을 말 밖에 안 나올 것 같았다.


 윤은 망상에게도 상처를 줄까 걱정하는 놈이다.


39.


 긴 침묵 끝에 


 "미안하지만 매주 면회를 오는 기특한 여자 친구가 있어서 안될 것 같아." 하고 윤이 말했다.


 "너무 빤하게 보이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들켰냐?"


 "요컨대 거절인가요?"


 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셈이지." 


 "그런 거면 그런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그런 셈인 건 뭐에요?"


 애들은 정말로 빨리 배우는구나. 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윤은 앞으론 찬물도 함부로 못 마시겠다고 생각했다.


40.


 이슈마엘이 단발이 되어 나타났다.

보통 남자들은 여자의 변화를 쉽게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하지만 

이렇게 확실한 변화는 제 아무리 윤이라도 알아차려버리는 법이다.

작가가 게을러서 묘사를 안했지만 이슈마엘은 원래 등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였는데 지금은 어깨까지도 안 오는 단발이다.


 반항하는 거냐! 와 실연이라도 한 거야? 에서 고민하다 윤은


 "머리에 껌이라도 붙은거야?" 하고 물었다.


 꽤 재치 있었지? 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 괘씸했다.


 이젠 당연하다는 패턴으로 맞았다.


41.


 “할머니한테 잘라 달라고 했어요.”

 

 밥 먹으면서 남자한테 차였다고 했더니. 알았다. 라고 하고는 바로 잘라줬어요. ‘시원스런 할머니네.‘ 하고 윤이 생각했다. 


 “그런데 예쁘게 잘 자르신 것 같은데.”


 “옛날에 미장원에서 일하셨다나 봐요.“


 어쩐지. 하고 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42.


 이젠 단발인 이슈마엘이 책상에 앉아 다리를 까딱거렸다

윤은 그걸 보며 시원시원한 다리라고 생각했다. 

바람이 불어 커튼이 펄럭였다.


 "그래도 저 노력은 해볼 생각이에요." 하고 


이슈마엘이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겼다.


 "사실 당장 사귄다고 해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뭘 해야 할지 대충 감이 잡히면 다시 고백해볼래요." 


 대체 뭔 노력을 할 것인지 짐작도 안 갔지만 윤은 뜻대로 하세요. 하고 아이스티를 타왔다.


43.


 윤의 생일이 다가와서.

 이슈마엘은 윤에게 뭐 가지고 싶은 게 없냐고 물어봤다.


 윤은 생각하는 듯. 눈깔을 위로 했다가 연기를 뿜으며 말했다.


"담배나 사다줘."


군대 담배는 영 맛대가리가 없어서.


"저 미성년자인데요."


 윤이 쿨럭 거리며 웃었다.


“알아.”


 내가 이런 사람을 좋아한다니.

이마를 짚으며 이슈마엘은 자기가 미친 것 같다고 생각했다.


44.


 별달리 다른 갖고 싶은 건 없냐고 묻자.


 윤은 "없어" 라고 말하곤 다시 연기를 뿜었다.


 다만 생일이라는 단어에선 무언가 느낀 게 있었는지

그러고 보니 이런 일이 있었지 하며 말문을 열었다. 


 "일곱 살... 아니 초등학교를 다닐 때니 아홉 살인가. 생일 일주일 전에. 사탕을 사먹었었는데 곽이 하모니카모양이었어. '시' 소리만은 안 났지만 그럭저럭 노래 비스무리하게 흉내를 낼 수 있더라고." 


 "한동안 집에서 뿜빠뿜빠하고 부르고 다녔는데. 엄마가 그 모습을 유심히 보더니 생일 선물로 하모니카를 사줬어. 내가 좀 제대로 된 하모니카를 불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했나봐."


 윤은 잠시 생각하다. 

그럴 줄 알았으면 장난감 전단지라도 들고 다닐걸. 

하고 투덜거렸다.


45.


 옆에서 가만히 아이스티를 마시던 이슈마엘이 졸랐다.


"듣고 싶어요."

 

 주어는 생략되었지만 대강 의미는 알 수 있었다.

 윤은 고개를 저었다.


 "하모니카가 없잖아. 휘파람이라면 불 수 있지만."


 그거라도 듣고 싶어요. 라고 해서 윤은 

빌리 조엘의 피아노맨을 휘파람으로 불었다.


46.



 그래서 

선물이에요. 하고 이슈마엘이 상자를 내밀었을 때. 

 윤은 아마 하모니카겠지. 하고 생각했다.

 상자는 담배 갑이 들어있기엔 너무 좁고 길었다.

 딱 하모니카 하나가 들어갈 크기였다.

 윤은 실망을 숨기지 않은 채 "고마워" 하고 선물을 받았다.

 전혀 고마워하는 얼굴이 아니에요 하며 

 이슈마엘은 윤의 가슴을 퍽퍽쳤다. 

 역시 하모니카였다. 


47.


 "그런데 이걸 어디서 불어?"


 불 수는 있지만……. 하고 윤은 이슈마엘에게 물었다.

하모니카는 생각보다 소리가 크게 나는 악기다. 내무반에서 부르기엔 선임들의 눈치가 보이는데... 군대에선 딱히 악기를 연주할만한 공간이라는 게 없었다. 방음이 안되니까.


"폐고가에서 불러주면 되잖아요."


 이슈마엘이 당연하다는 듯 요구했다.

 확실히 거기까지 가면 소리가 들릴 일은 없다. 윤이 시무룩하게 물었다.


 "널 위해서?"


 "응, 날 위해서."


 이슈마엘이 없는 가슴을 펴며 더 당당히 요구했다.

 얜 정말 답이 없구나 싶으면서도 결국 윤은 고가에서 하모니카를 불어주었다.


49.


 윤도 슬슬 사수로 뛰는 횟수가 많아지는 짬이 되었다.


 윤은 별로 인정하기 싫겠지만 결국 시간은 흐르는 것이다.

 부사수로 나갈 때면 사수들이 무조건적으로 부메랑을 시켰기에 이슈마엘과 둘이 근무를 다녀올 수 있었지만 사수로 나갈때면 부사수를 데리고 나가야했기에 둘이 대화를 하며 다닐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부사수에게 부메랑을 시키긴 싫었다. 그 결과 이슈마엘과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그래도 이슈마엘은 같이 근무를 나가고 싶다고 했다.

 윤이 말은 못 걸텐데. 하고 시무룩하게 충고했다.

 그래도 같이 나가주겠다며 이슈마엘은 윤을 위로했다.



50.


 다행히도 사람은 적응하는 동물이라.

 윤은 곧 이슈마엘에게 말을 거는 법을 터득했다.

 부사수에게 말을 거는 척하면서 말을 걸면 된다!

 어차피 주어만 빼면 그게 그거였다.


 '어두우니까 발밑 조심해라.' '랜턴은 수풀쪽을 비추면 안 된다. 멧돼지님께서 노하신다.' 

 '라면 먹고 갈 거야?' '비빔? 국물?' '내가 고3땐가 한번은 서른 살 먹은 여자랑 사귄 적이 있었는데....' 


 대부분이 후임에게 말해도 무방할 말들이었다.

 그럴 때 마다 뒤의 부사수는 성실히 대답을 해줬지만 윤의 관심은 다른 곳에 가있었다.

 불쌍한 일이다.


 하지만 걔 중엔 눈치가 빠른 놈도 있는 법이다.


51.


 김이라는 놈이 그랬다.

 아주 옅게나마 남아있던 위화감을 귀신 같이 알아차려 버린 것이다. 여느 날과 같이 윤은 김에게 말을 거는 척을 하며 이슈마엘에게 말을 걸었는데 김이 "저기 윤 일병님? 사실 저한테 말을 거시는 게 아니시지 않습니까?" 하고 물어버렸다.

 감은 좋아도 참을성은 없는 놈인가 보다. 

 윤은 소름이 돋았다. 처음엔 부정했지만 두 번 세 번 물어보자 결국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요컨대 여기에 이슈마엘이라는 여자애가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이슈마엘이 빙글 웃으며 김에게 손을 흔들었다.


 "제대로 미친놈 같겠지만. 응, 그래." 


 윤이 머리를 긁적이며 담배를 껐다.


 그러자 흐음. 하고 김은 손을 흔드는 이슈마엘을 보더니.


 "뭐, 윤 일병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하고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곤 정말로 상쾌한 미소를 지으며 "반갑습니다. 이슈마엘." 하고 이슈마엘이 있는 곳을 향해 정확히 손을 흔들어줬다.


 진짜로 이슈마엘이 보이는 줄 알고 윤도 이슈마엘도 깜짝 놀랐다.

이후로 김은 가끔 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도와주기도 했다.

 뭔가 미친놈 장단에 맞춰준 다기 보단 정말로 이슈마엘을 존중한다는 느낌이었다. 가끔 윤과 김은 같이 담배를 태우기도 했다.


 터무니없이 좋은 놈이라고 윤은 생각했다. 


 

52.


 관물대를 정리하다 타로카드가 나와 오랜만에 타로를 봤다.

이등병 떄 재미 삼아 샀다가 선임들 타로만 엄청나게 봐줬던지라

한동안 봉인했던 물건이었다. 내무반에 앉아 조용히 타로를 보고 있는데 관물대에서 이슈마엘이 굴러나왔다. 


 "윤, 타로도 볼줄 알아요?!" 하고 호들갑을 떨었다.

 꼴에 사교적인 취미를 가지고 있다는 게 신기하다는 눈치였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내 것도 좀 봐줘요!" 하고 이슈마엘이 아양을 떨었다. 정신병의 타로를 봐주는 건 처음인데. 하며 윤이 카드를 셔플했다. 그리고 침상에 능숙하게 카드를 쫘라락 펼쳤다.


 "자 여기서 원하는 카드를 세장 골라."


 으음... 하며 머리를 잡고 고민하던 이슈마엘이 

 이거, 이거, 이거요. 하고 세장 골랐다.


 ...심판과 태양과 악마가 나왔다.


 결과 값은. 운명의 수레바퀴와 교황이다.


 실로 정신병에게나 나올 법한 점괘라고 생각하며 윤은 풀이를 시작했다. 하지만 카드들이 나타내는 징조가 지나치게 난해하고 또 불가해했기에 풀이 또한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말이 길어지자 답답했는지 이슈마엘이 말을 끊었다.


 "그래서 결론이 뭔데요?"


 윤은 흐으음. 하며 천장을 봤다.

 심하게 담배가 당겼다.

 '결론이라.'

 윤이 무릎을 탁 쳤다.


 "성불하겠네."


 진지하게 하라고 퍽퍽 맞았다.



53.



마르세유 타로 카드. No.5 교황.


이성관계와 인간관계의 대립 혹은 이별을 의미.


54.


"고백을 받았어요."


이슈마엘이 편지를 흔들며 자랑했다.

새하얀 편지지에 붉은 하트 스티커로 봉인을 한게

딱 순정 만화에 나올 법한 전형적인 고백 편지였다.


"오." 윤이 담배를 떨어트리며 감탄했다.


"열어봤어?"


"아뇨, 아직요. 윤이랑 같이 열어보려고 기다렸어요!"


윤이 어깨를 으쓱이며 손을 뻗었다.


"굳이?" 


"보기 싫어요?" 이슈마엘이 정색하며 편지를 뒤로 확 뺐다.


"아니, 역시 보고 싶어."


윤이 시무룩하게 꼬리를 내렸다.


"그쵸?"


55.


학창시절에 이런 경험 한번 못 겪어봤을 윤을 위해 특.별.히 가져와 준거라구요. 하고 이슈마엘이 뻐겼다. 솔직히 윤은 좀 재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편지가 정말로 궁금했기에 꾹 참았다.

한 10분을 그렇게 뻐기고 이슈마엘이 입으로 러브하우스에 나오던 노래를 따라라라라. 따라라 라라라라. 흥얼거리며 봉투를 천천히 열었다. 


윤은 그걸 보며 타짜에서 아귀가 고니의 패를 까던 부분을 상상했다. 

편지는 수려한 필기체로 이렇게 시작했다.

이 편지는 101년전 영국으로부터 시작해...


윤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56.



분통을 터트리는 이슈마엘을 달래며

윤은, 그럼 앞으로도 쭉 오겠구나 하고 

살짝 안도했다. 그리고 어이없어했다.

이 미친놈이 또 뭔 미친 생각을 한거야...


이슈마엘은 윤이 왜 갑자기 자기 뺨을 때리는지 의아해했다.


57.


윤이 낮잠을 자고 있을 때

이슈마엘이 찾아왔었다. 데구르르 쿵! 하고


"윤, 자요?"


하지만 어젯밤 근무가 너무 힘들기도 했고

또 귀찮기도 했기에 그냥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했다.


"진짜 자요?"


이슈마엘은 확인하려는 듯

윤의 얼굴에 손바닥을 휘휘 저어보기도 하고

숨소리를 확인하기도 했다. 


"진짜 자는 거죠?"


그리고 기분 나쁜 정적이 흘렀다. 뒷골이 싸했다.

대체 뭔 짓을 당할지 몰라서 윤은 어색하게 막 일어난 척을 했다.

이슈마엘이 눈을 흘기며 '겁쟁이' 하고 매도했다.


58.


"저기 말이야, 이슈마엘." 하고

윤이 문어에도 안 쓰고 구어에도 안 쓰는 괴상한 문법으로 말을 걸었다.


"뭘 하려고 했던 건진 모르겠지만 다음번엔 내가 자는 척을 하는 것같다 싶으면."


"차라리 때려줬으면 좋겠어."


이슈마엘이 혐오했다.


"저기, 윤 그런 특수한 성벽을 제게 강요하는 건 그만둬줬으면 좋겠어요."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윤이 이마를 짚었다.


"정말로 난처해서 그래."


"어떤 부분이 난처한데요?"


"그걸 그렇게 물어보면 또 그 점이 난처한데..."


윤은 자기 생각도 제대로 말로 풀어내지 못하는 한심한 놈이다.


결국 보다 못한 이슈마엘이 그럼 이렇게 하죠. 하고 한숨을 쉬었다.


"제가 윤에게 하는 짓은, 윤도 저한테 해도 돼요."


이슈마엘이 이제 다 해결됐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공평하죠?"


'강화도조약 급으로 불평등한 조약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윤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59.


평소와 똑같은 나날이었다.

다만 평소처럼 이슈마엘을 정신병 취급하던 윤의 목소리가 

그날따라 유독 역겨웠던 것인지.

이슈마엘의 신경이 가느다랬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둘은 꽤 심하게 싸웠다. 


그래서 같이 근무를 나가서 이슈마엘은 


"이제 윤 같은 건 진짜 몰라요!" 하고 수풀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둘 다 한 시간도 못 되서 후회할 애 같은 싸움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윤도 꽤 격앙돼 있었고 평소에 쌓였던 것들이 터져

짜증나기도 했기에 '내가 먼저 사과하나 봐라!' 하고 이슈마엘을 등진 채

막사로 복귀해버렸다. 어차피 저러고 나서도 또 다음 날이 되면

헤헤거리며 달라붙을 것이다. 


알아서 사라지겠지. 하고 윤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60.


폐부 깊숙이 니코틴을 빨아들였다가 내뱉으며 윤이 생각했다.

김에게 이슈마엘에 대한 불평을 한바탕 쏟아낸 직후였다. 


김은 늘 그렇듯 그렇습니까. 그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아니, 이슈마엘 말고 윤일병님 말입니다. 그렇다고 바로 욕을 박아버리시면 제가 또 할 말이 없지 않겠습니까? 와 너무 하십니다. 알겠습니다. 꺼져 있겠습니다. 라고 하고 먼저 가버렸다. 씨발스러운 놈이라고 생각하며 침을 퇘 뱉었다. 


'그러고 보니 이슈마엘은 돌아갈 때 어떻게 돌아갔더라?'


생각해보니 이슈마엘이 사라질 때는 늘. 윤의 주변에서만 사라졌었다.

에이, 아니겠지 하면서 윤은 줄담배를 피웠다. 

윤의 흡연량을 잘 알고 있던 김도 슬쩍 돌아보곤 "혹시 굴뚝이십니까?" 하고 걱정할 정도였다. 

윤은 "꺼져, 씨발놈아." 라고 답하며 자신의 상태가 괜찮다는 것을 피력했다.

바람결에 조금씩 눈이 날리기 시작했다.


불안이 깊어졌다.


이건, 좋지 않았다.



61.



겨울 산에서 가장 가혹한 것은 추위 그 자체다.

윤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오늘은 영하 20도까지 떨어질 거라고 일기예보가 지껄였다.

영하 20도에서 사람은, 몇 시간이나 버틸 수 있을까?

일생을 불운과 부대끼며 살아온 사람만이 맡을 수 있는 불운의 향기

그 짙은 역취가 윤의 주위에서 풍겨오고 있었다.


씨발스럽네... 하는 윤의 발밑으로 담뱃재가 산을 이루었다.



62.


결국, 저녁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윤은 창밖의 겨울 산을 보며 생각했다.

어차피 폐급인데. 여기서 영창까지 갔다와봐야 크게 달라질건 없을 것 같았다.

윤은 몇 가지 채비를 하고 몰래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윤은, 처음으로 자신이 폐급인게 마음에 들었다.

설산이 깊어졌다. 

어디선가 오늘 제설은 확정이네 어쩌네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63.


 기록적인 폭설이었다.

 방금 막 찍힌 발자국이 눈에 덮여 사라지는 걸보며 윤은 절망했다.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인지.'

 이슈마엘은 어쩌면 집에 돌아가 바보같은 윤을 욕하며 따뜻한 코코아를 마시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타당했다. 윤의 몸은, 특히 눈 때문에 젖어 얼어버린 발과 딱딱하게 굳어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 얼굴이 윤에게 그 논리를 받아들일 것을 강하게 종용했다.

 하지만 만에 하나. 이슈마엘이 돌아가지 못했다면. 상상하고 싶지 않아도 불행에 찌든 윤의 뇌는 자꾸만 눈밭에 쓰러진 이슈마엘, 실족 당한 이슈마엘, 윤을 부르며 우는 이슈마엘을 그려냈다. 먼 산에서 군견이 컹컹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윤을 찾는 것이리라.


 이 눈 덕분에 되려 기동타격대의 추적을 따돌리기가 쉬울 것이라는 모순이 우스웠다.


 "한 시간만 더." 윤은 달달 떨리는 이를 꼭 깨물며 자신을 다독였다. 



64.



 윤은, 이슈마엘이 있을만한 곳을 하나하나 더듬어갔다.


 숨어있기 좋은 작은 동굴, 둘이 같이 쉬곤 했던 대기초소, 꼭 사람 얼굴 같은 무늬가 있는 100살 먹은 고목...


 자꾸만 이슈마엘과 함께했던 기억이 떠올라 윤은 피식 피식 웃었다. 


 더불어 미안한 감정도 배가 되었다.

 갈 수 있을만한 곳은 거의 다 가봤다.

 또 어디가 남아 있더라... 하다가

 딱 한군데. 아직 안 가본 곳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아니, 거기일 수 밖에 없다. 대체 왜 거기부터 확인하지 않은걸까.

 역시 윤은 바보인가 보다.

 윤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다섯 시간을 설산을 헤맨 사람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험한 산길을 거의 뛰듯이. 심장이 터질 듯이 달렸다.



65.



"......찾았다." 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66.


하지만 산길을 지나치게 빠르게 뛰었기에


윤의 첫마디는 "흐허흐허후욱."에 가까웠다.

폐고가에서 이슈마엘이 실소했다.

"뭐라고 하는 건지 전혀 모르겠어요."

윤은 숨을 고르기 전에 가져왔던 여벌의 외피를 이슈마엘에게 입히고

미리 터트려둔 핫팩 아홉 개에 자신이 쓰던 핫 팩을 두개, 도합 열 한 개의 핫팩을 

이슈마엘의 몸 곳곳에 집어넣었다. 힘이 없는지 이슈마엘은 저항하지 않았다.


이슈마엘의 몸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영하 20도의 추위에 10시간 가까이 밖에 있었으니 당연한 것이었다.

사람들의 눈엔 얼어죽고 싶어 환장한 것처럼 보였겠지만 윤에겐 의미가 있었다.

비록 다른 사람들의 눈엔 안보여도 이슈마엘은 살아있었다.

자기 이빨이 딱딱 소리를 내며 부딫치는데도

윤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이슈마엘의 손을 꼭 잡곤 따뜻해질 때까지

호오, 호오. 입김을 불어넣었다.


67.


윤이 정상적으로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이슈마엘의 컵에 두 번 째 커피를 따라줬을 즈음이었다.

다행히도 보온이 잘됐는지 아직 뜨끈뜨끈했다. 

사과를 할까. 하다 윤은 생각에도 없던 말을 해버렸다.


"...덕분에 이제 탈영병이야."


이슈마엘이 지적했다.


"용법이 잘못됐어요. '덕분에'가 아니라 '때문에'에요."


"늘 해보고 싶었으니까. 덕분에지."


"그러니까." 윤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


"책임져 줘."


이슈마엘이 피식 웃으며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책임져 드릴게요."


어떻게 책임져줄지 모르면서도 이슈마엘은 책임져주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말에 윤은. 놀라우리만치 안심했다.


그것보다도. 이슈마엘이 커피를 홀짝이며 물었다.


"왜 핫 초코가 아니라 커피인거에요? 어른이 되라는 무언의 암시인가요?"


이슈마엘에게서 컵을 받아든 윤이 커피의 온기에 손을 녹이며 말했다.


"아뇨, 귀하께서 저희 핫 초코를 사랑해주신 덕분에 커피 밖에 남지 않았을 뿐입니다."


"세상에나, 당연히 복선인줄 알았는데."


"사실 복선도 뭣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윤과 이슈마엘은 평소와 다름없이 실없는 대화를 나누며 웃었다.

하지만 그 대화는 분명 평소보다 더 많고 깊지 않은 듯 깊은 대화였다.


기동타격대가 올 때까지 둘은 웃고 떠들었다.


윤은 아무 짓도 안 하겠다 약속한 뒤 이슈마엘을 업고 산을 내려갔다.

그 때 이슈마엘이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회복이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는


윤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땀 냄새가 날 텐데도 이슈마엘은 딱히 싫은 눈치가 아니였다.

이상한 자세로 내려오는 윤을 보며 사람들은 '역시 미친놈이다.' 했지만

그 또한 윤에겐 아무 상관없는 일이었다. 


다음날. 윤은 영창에 들어갔다. 들어가는 김에 탈영 사유로 평소 좆같았던 선임들을 몇 명 찔렀다. 저 멀리 육군교도소에서 선임들이 이를 가는 소리가 아드득 빠드득 들려오는 듯 했지만. 


그래도 이슈마엘이 끝까지 같이 있어줘, 지루하진 않았다.



68.


그리고 새삼스럽게도, 시간이 흘렀다. 


69.



윤은 병장이 되었다.

김도 병장이 되었다.

둘은 이제 말을 놓았다.

윤은 스물 셋이 됐고

이슈마엘은 새 교복을 입었다.

세일러복이었는데 그게 또 어깨까지 내려온 금발과 잘 어울렸다.

브래지어가 맞지 않아 B컵으로 바꾸었다고 자랑했다.

윤은 속으로 '제정신인가..' 라고 중얼거리며 자신의 일처럼 기뻐해줬다.

예의상 기뻐해준 건데도 너무 기뻐한다며 가슴을 퍽퍽 맞았다.

억울했다.


이슈마엘은 이제 커피를 마신다. 

마셔보니까 괜찮더라구요. 라고 해서 윤은 이제 두 명 분의 커피를 산다.


그리고 놀랍게도.

윤은 돈을 아끼기 위해 담배를 끊었다. 

대신 커피를 하루에 열 잔씩 마셨다.

그럼 의미 없는 거 아니냐고 이슈마엘에게 핀잔을 들었다.

윤은 할 말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제 이슈마엘의 키는 윤의 턱까지 닿는다.

제대까지 대략 10여일정도 남은 시점이었다. 


70.


윤과 이슈마엘은, 이제 한단어로 서로를 겁박할 수 있었다.

윤은 '모차렐라 치즈'라는 단어로.

이슈마엘은 '중학생' 이라는 단어로 서로를 겁박할 수 있었다.


서로 내가 미쳤지. 저걸 왜 말해서... 

라고 말하며 분개했다.


즐거운 기만의 나날이었다.



71.


변한 건 별로 없었다.

윤은, 일단 근무를 안 뛰었고 머리가 많이 길었다.

이슈마엘이 머리를 자르라고 성화였다.

하지만 긴 머리는 병장의 상징이었기에 자를 순 없었다.

윤은 김치찌개를 이슈마엘은 밥을 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가끔 이슈마엘이 자고 갈 때도 있었다.

처음엔 조금 두근거렸지만 나중엔 그렇듯. 그냥 익숙해졌다.

여전히 윤은 하모니카를 잘 불었고 애창곡은 피아노맨이었다.


72.


윤은 단기 하사나 해볼까. 하고 

1년 전의 자신은 절대로 하지 않았을 말을 입에 담았다.

김은 처음으로 이 새끼가 미친건가... 하는 눈으로 윤을 쳐다봤다.

윤은 허둥거리며 아니, 부사관이 의외로 안정적이기도 하고... 라며 변명을 하다

조용히 그 눈빛에 동의했다.


"일병 때 보다 더 미친놈 같냐?"


담배를 비벼 끄며 김은 "응"이라고 대답했다.


73.


어느새 둘은 사귀고 있었다.

물론 윤과 김이 아니라 윤과 이슈마엘 말이다.

언제부터 사귀자! 하고 말로 정한 건 아니었지만

이슈마엘의 공세에 윤이 무너진 건지

사실 윤도 이슈마엘에게 마음이 있어서 그랬던 건지

둘은 이미 사귀고 있었다.

가끔 껴안았고 자주 손이 얽혔고 많이 보고 싶었다.


아직 동기가 있을 때 주말이면

윤의 동기는 하루 종일, 정말로 하루 종일 통화했다.

통화비로만 월급 이상을 썼다.

월급이 비정상적으로 적은 것도 문제였지만

그래도 모자라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던 동기는

윤이 보기엔 이미 휼륭한 정신병자였다. 


그 때 동기는 니가 아직 사랑을 몰라서 그래 이 새끼야. 라고 말하며 웃었다.

뭔가 애 취급당한 느낌이라 기분이 나빴던 게 생각이 났다.


밤에 이슈마엘의 생각을 하다 

윤은 조금은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74.


짬 처리를 할 만큼 했다.

꼭 벼룩시장에 온 것처럼 바글바글했다.

평소엔 인사도 안하던 후임들이 각다귀처럼 달려들어

이것저것 가위바위보도 하고 데덴찌도 해가며 가져갔다.

다만 이슈마엘이 가지고 싶어 했기에 노란색 깔깔이만은 이슈마엘에게 하사했다.

사실 처음엔 뭔가 괘씸하게 여겨져서.

김에게 다 줘버릴까 생각도 해봤지만 어차피 김도 전역이 얼마 안남은 시점이었기에

진짜 짬 처리가 될 것 같아 그만두었다. 


"이 홍차 우리는 유리병은요?"


"무거워서 두고 가기로 했어."


"책은요?"


"두고 갈 거야. 대부분. 다음 놈도 읽겠지 뭐."


"꼭 자살하기 전에 신변정리를 하는 것 같아서 즐겁네요!"


윤이 기겁했다. 그도 그럴게 떨어지는 나뭇잎도 조심하는 시기인 것이다.


"부정 탈라!" 하고 살짝 준엄하게 경고를 해봤지만 이슈마엘은 여전히

개뿔 그런 건 신경도 안썼다.


75.


그렇게 긴 듯, 길지 않은 듯한 윤의 마지막 일과가 끝났다.

이슈마엘과 여기 있었다는 흔적을 남기고 싶었는데. 

딱히 그걸 남에게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둘은 고민하다. 침상아래에 매직으로

'윤과 이슈마엘. 여기 있었다.' 라고 적었다.

쓰고 나니 멋쩍기도 하고 너무 진부하기도 해서

둘은 서로의 아이디어였다고 공을 돌렸다.


76.


풀벌레 소리가 들려왔다.

몰래 피운 모기향과 이슈마엘이 살살 부쳐주는 부채만 있다면

이 계절을 한 번 더 견딜 수도 있겠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다.


마지막을 기념하며 윤과 이슈마엘은 같이 잤다.

우연인지 김은 그날따라 코를 골며 깊게 자고 있고

다른 놈들은 말차다 말말차다. 해서 내무반에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둘이 그렇고 그런 플레이를 즐겼다는 얘기는 아니다.

윤과 이슈마엘은 아직 그런 관계는 아니었다.

윤이 졸리다는 걸 알고 있는지 이슈마엘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일이면 전역이네요."


"그러게."


"전역하고 나면 뭐 할 거예요?"


"글쎄... 거짓말 같겠지만 너무 꿈같은 얘기라 생각해 본적이 없어."


"거짓부렁 하지 말아요! 만날 나가기만 하면... 나가기만 하면...씨발. 거렸으면서!"


"아니... 그게. 진짜야. 분명 만날 그렇게 중얼거리긴 했지만."


뭔가 어둠 속에서 이슈마엘의 눈이 반짝 빛난 것 같았다.


"그럼 말이에요 윤. 핫 초코를 파는 카페를 여는 건 어때요?"


"야, 그건 내 소망이 아니라 네 소망이겠지?"


"아니, 진짜로! 윤이 잘 하는 건 핫 초코 타는 것 밖에 없잖아요."


"뭐, 생각은 해보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둘은 한동안 풀벌레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슈마엘도 졸렸던 것인지 부채를 부치던 손이 서서히 멈추고

곧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옅은 잠기운 속에서 윤은 자신이 정말로 뭘 하고 싶었는지 생각하다

문득, 자신의 팔을 베고 자고 있는 이 여자애를 더 오랫동안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이렇게 말해볼까.

난 김치찌개를 잘 끓이고 넌 밥을 잘하니 

같이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그러면 이슈마엘은. 

아니, 사람이 김치찌개만 먹고 살 것도 아니고... 하며 어이없어 하겠지.

이슈마엘이 어이없어 하는 게 눈에 선해 윤은 슬쩍 웃었다.


공상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간 미래로 이어진다.

윤의 머리 속에선 이미 이슈마엘을 닮은 딸과 성인이 된 이슈마엘의 손을 잡고 

같이 소풍을 가는 부분까지 상상하고 있었다.

슬프게도 남자란 그런 동물이다. 

열일곱에서 스무 살까지면 삼년인가... 아니, 이 미친놈이 또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하고

윤은 다시 웃었다.


그 공상이 지나치게 허망하고, 또 아름다워서 웃었다.


77.


결국 오지 않을 것 같았던 그 날이 찾아왔다.

전역자 버스를 기다리며 김이 퉁명스레 배웅을 해줬다.

어제 윤의 물건을 가져갔던 후임들은 당연하다는 듯 아무도 오지 않았다.

윤도 별 기대는 안 했기에 실망하지 않았다.


"잘 가."


"그래. 나오면 연락하고."


둘의 인사는 이정도면 충분했다.


"이제 너 가면 난 누구랑 담배 피냐."


투덜거리는 소리에 이제와 생각해보니

이 새끼도 외톨이였구나 싶었다.


혼자 피워 새끼야. 하고 윤은 김에게 남은 담배를 다 쥐어주었다.


이슈마엘은, 왜 우는 건진 모르겠지만 울었다.

그래서 달래느라 꽤 고생했다.

꼭 장성한 아들을 독립시키는 엄마 같네. 하며 윤은 피식 웃었다.

"저기, 윤." 하고 이슈마엘이 코를 팽! 풀곤 윤을 불렀다.

버스가 도착한 직후였다. 

이슈마엘은 "줄게 있어요." 라고 말하곤 윤에게 눈을 감으라. 시켰다.

뽀뽀라도 해주려는 건가 싶었는데 손에 무언가를 꼭 쥐여 주고는 윤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쪽지였다.


"전화 줘요. 윤."


그리고는 정말로 나가는 건 못 보겠다는 듯이 뿅 소리를 내며 사라져버렸다.


조금 멍했다. 

여전히, 겁이 많은 여자라고 윤은 버스에 오르며 생각했다.


78.


 자대전입을 올 때 왔던 그대로 버스를 타고 위병소로 왔다. 군대라는 곳이 늘 그렇듯. 풍경은 변하지 않는다. 소나무들은 여전히 돌아가라... 돌아가라... 하고 기괴하게 구부러져있었다. 처음엔 낯설고 무서웠지만. 이젠 휴가를 나갈 때마다 봤기에 익숙한 풍경이다. 


위병소에서 전역증을 확인 받고. ‘고생하셨어요 아저씨. 와 진짜 부럽네.’ 소리를 들었다. 윤은 조금은 멍하게 ‘아저씨도 수고하세요.’ 하고 휴가자들과 함께 버스를 타 시외버스터미널에 왔다. 휴가를 나간다고 들떠있는 신병을 보며. 


문득 어제 밤

행보관이 불러 맥주를 한잔 따라주며 ‘고생 많았다고.’ ‘제대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니까. 무슨 일이 됐던 열심히 해보라고’ 말한 게 생각이 났다. 터미널 앞에서 담배를 물었다. 

진짜로 시작인걸까. 의심스러웠다. 


흐르는 땀에 전역모가 자꾸 흘러내렸다. ‘김 이 새끼. 전역모 하나 제대로 못 맞추나.’ 하고 쓰게 웃으며 윤은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79.


윤이 사회에 나와 처음으로 한 일은 역설적이게도 머리를 자른 것이었다.

확실히 이슈마엘의 말대로 너무 길었다. 만약 지금이 장발 단속을 하던 80년대 였다면

바로 머리에 고속도로가 뚫릴만한 머리였다.

머리를 깎는데 뭐 이리 돈이 많이 들어. 하며 윤은 새삼 세상이 바뀌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리고 햄버거를 사먹고 담배를 산 뒤. 음반 가게에서 요즘 유행하는 밴드의 앨범을 샀다.

 

아무도 없는 집에 돌아가 가방을 던져두고 간만에 혼자 있는 시간을 만끽했다. 

이슈마엘에게 전화를 해볼까. 하다 

역시 저녁에 하기로 마음먹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살짝 애를 태우고 싶었다.

그렇게 다짐하고 윤은 30분만에 쪽지에 있는 번호를 누르고 있었다.

아니, 보통 오후 3시면 저녁이라고 하지 않나?

번호를 하나하나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누르고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딱 두 번 송신음이 울리고는,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80.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The dail is wrong number, please call again....


81.


아홉 번 정도, 아니 사실 스물아홉 번 정도 강박적으로 번호를 꾹꾹 눌렀다.

마지막에는 너무 세게 눌러 손톱이 나갈 지경이었다.

이젠 귀에 박힌 듯한 기계음에 윤은 전화기를 던져버렸다.

'대체 뭘까.' 윤은 그대로 머리를 감싸 쥐고 침대 위로 쓰러졌다.

미칠 것 같았다. 자신이 미쳤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었다. 

그리고 이슈마엘이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전화기에선 여전히 엿같은 기계음만이 흘러나왔다.



82.


대체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다.

나는 정말 정신병에 걸렸던 것일까. 아니면 이슈마엘은 귀신이었던 걸까?

만약 신이 있다면 지나치게 잔인하다고 이건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윤은 진심으로 자신이 정신병에 걸렸으면. 

지금이라도 저 벽장에서 이슈마엘이 다시 굴러 나왔으면 하고 진심으로 바랬다.

눈을 꼭 감고 이슈마엘을 불렀다.

하지만 이슈마엘은 나오지 않았다. 벽장은. 그냥 벽장이었다.

아직까지 이슈마엘을 껴안았던 감촉이 생생한데. 

그게 전부다 단순한 환상이었단 말인가.


눈으로 보기 전까진. 절대로 믿을 수 없다며. 윤은 옷을 대충 걸쳐 입고 밖으로 나왔다. 


83.


담배를 물고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걸으며 윤은 헝클어진 생각을 정리했다. 


분명 휴대전화를 산지 얼마 안 되서 자기 번호조차 제대로 외우지 못한 것이다. 

평소 행동거지를 보면 그게 틀림없다. 

그도 그럴 것이 아주 오랫동안 외톨이지 않았나. 

정신머리가 나간 여자 같으니라고 

그렇다고 마지막의 마지막에 이런 실수를 해? 별 진짜. 


윤은 속으로 이슈마엘을 욕하며 인천으로 가는 버스표를 구했다. 


84.


 인천에 도착한 윤은 학교 주변에 있는 양장점을 찾아 다녔다. 

이때는 아직 홈페이지라는 게 그렇게 발달한 시대는 아니어서 당연히 교복을 맞추려면 

양장점을 가거나 기성품을 파는 가게에 가야했다. 

교복을 찾는데요. 라 하고 들어와서 이 교복 저 교복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이게 아니야... 라고 중얼거리는 윤은, 옆에서 보기엔 평범한 변태였다.

이것도 아니고 저건 프릴이 달려있고. 뭐를 봐도 이슈마엘이 입던 교복과는 다른 것 같았다. 


양장점 주인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살 생각이 없으면 꺼지시라고 정중하게 말했다. 


그렇게 한 양장점에서 쫓겨나면 다른 양장점으로 쫓겨나기를 반복했다.

경찰에 쫒기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양장점 주인들 사이에서 웬 미친놈이 교복을 찾아다닌다는 모종의 네트워크가 돌았지만 윤은 그런 건 신경 쓰지 않고 체크한 교복들과 아직 체크하지 않은 교복들을 찾으며 골머리를 앓았다. 아직 이슈마엘이 입던 교복을 찾지 못했다. 


85.


그렇게 3일이 지났다. 


86.


 오늘도 결국 해가 떨어져버렸다. 내일 또 다시 해가 뜬다는 것을 알면서도 오늘이 세계의 끝인 것처럼 절망스러웠다. 다시 터미널 주변으로 돌아온 윤은 멍한 표정으로 작은 다방에 들어가 털썩 주저앉았다. 다방 주인이 세 번 헛기침을 하고나서야 아직 주문을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은 윤은 커피 한잔이요. 하고 노트를 꺼낸 채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터미널 주변인 주제에도 사람이 없는 다방답게 커피는 금방 나왔다. 

슬쩍 노트를 본 다방 주인이 퉁명스레 물었다. 


“흐음, 당신이오? 그 교복을 찾아다닌다는 남자가?” 


분명 변태가? 라고 하려다 남자가? 로 바꾼 것이었다.

담배에 불을 붙이며 윤이 헛웃음을 지었다.


“제가 유명해요?”


다방 주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재떨이를 내밀었다.


“양장점 주인들한테선. 소문으론 궁극의 교복을 찾는다던데.” 


다방 주인이 잠시 고민하다 덧붙였다. 


“어떤 여자에게 입혀도 학생으로 보인다는.”


윤이 헛소리를 무시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양장점도 해요?”


다방 주인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친구 놈이 양장점을 하거든.” 


“그래서 찾는 교복은 찾았소?”


“아직요.”


“어떤 교복을 찾는 건진 모르겠지만. 뭐, 법에 걸리지 않는 선에서만 열심히 하시오.”


“감사합니다.”


윤이 예의바르게 화답했다. 

오늘은 왜인지 진이 빠져서 뭔 소리를 들어도 뭐라 대꾸할 힘이 없었다.


“그리고.“ 다방주인이 멋쩍다는 듯이 물었다. 


“이건 그냥 내가 궁금해서 그러는 건데. 그 노트 한번 봐도 되겠소?” 

내가 왕년엔 옷 좀 만들었거든. 하고 다방 주인은 아예 윤의 앞에 주저앉아버렸다.


가라고 해도 안갈 기세여서. 윤은 좋으실 대로. 하고 노트를 내밀었다. 


다방 주인이 노트를 펄럭이며 윤이 조사한 교복들의 디자인과 특징들을 훑어봤다. 

웬만한 교복 마니아가 봐도 이 사람은 진심이다! 라는 게 느껴질 정도로 뜨거운 정리였다. 

다방 주인이 고개를 휘휘 저으며 감탄했다.


“많이도 찾아 다녔구먼 그래.”


“이 주변 양장점은 다 찾아다녔으니까요.” 


 다방 주인이 “이 교복이 당신이 찾는 교복이랑 비슷하지 않나?” 하며 한 부분을 짚자 윤은 고개를 저으며 “비슷하기만 하고 전혀 다른 교복이더라구요.” 하고 이슈마엘이 입던 교복과 어떤 부분이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했다. 


윤이 이슈마엘이 입던 교복에 대한 장황한 설명을 시작하자 

잘 모르겠다는 듯 흐음.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다방 주인이 창밖을 가리켰다. 


“꼭 저것 같은?”


87.


윤은 빨리 달리는 것은 자신 없었지만 오래달리는 것만은 자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소녀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윤은 평생 저렇게 잘 달리는 여자를 본 적이 없었다. 터미널에서 달동네까지. 추격전을 반복하던 둘은 힘이 다 빠지면 잠시 휴전하듯 쉬고 다시 달리기를 반복하며 달밤에 난리 부르스를 쳤다. 한번 뛸 때마다 건물이 낮아지고 점차 빛도 드물어졌다. 도움을 청하거나 경찰을 부르지 않은 것이 용한 일이었다. 윤으로선 다행이었지만. 소녀는 소녀 나름대로 무서웠을 것이고 윤도 윤 나름대로 이슈마엘에게 닿을만한 단서를 놓칠까봐 두려웠기에 필사적이었다. 


잠깐만! 서봐! 근처 찻집에서 얘기만 잠깐 해보자고! 라고 했을 때도 

멘트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깨닫지 못할 정도였다. 


 결국 윤이 소녀를 따라 잡은 것은 거의 8km를 더 달렸을 때의 일이었다. 가로등 아래서. 힘이 다 빠졌는지 후욱후욱 스으읍 후우욱. 하며 숨을 몰아쉬던 소녀는 억울하다는 듯 울상이었다. 윤 역시 거의 울듯이 숨을 몰아쉬며 소녀의 어깨를 잡았다. 


“자.. 잡았다하악...”


술래잡기는 아니었지만 왜인지 그런 룰이 되어버린 것 같아 윤은 소녀의 어깨를 잡았다. 

성추행이라 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너무 세게 잡았다는 듯 당연하다는 듯 머리에서 무언가 툭 떨어졌다. 가발이었다.


윤은 기겁을 했다.

소녀도 기겁을 했다. 


윤은 소녀를 다시 보았다.


소녀의 목엔 중간에 무언가가 걸린 듯이 뼈가 툭 튀어나와 있었다.


88.


다방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은 소년이 훌쩍였다.


“경찰에 신고하지 말아주세요.”


감히 상상치도 못했던 사태에 윤은 살짝 당황했지만 그래도 원래의 목적은 잊지 않았다.


“신고할 생각도 뭣도 없어. 난 그냥 네가 입은 교복이 어디 학교건지 궁금한 것뿐이야.”


소년이 기겁을 하며 물었다.


“그..그건 왜..왜요?”


윤이 소년의 걱정을 지레짐작했다. 


“학교에 알리려는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그냥 학교 이름만 알려주면 돼.”


“그... 그런데 왜요?”


윤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거짓말을 했다.


“여자친구가 도망쳐서 찾아 갈라고 그런다. 왜.”


“그..그게...”


윤이 답답하다는 듯 재촉했다.


“아 학교엔 말 안한다니까. 어디 학굔데 그래.”


소년은 소름이 돋는 다는 듯 얼굴이 새파래져서 대답했다.


“이 교복. 3년 전에 망한 학교 교복이에요...”


89.


“......뭐?”


90.


소년의 안내를 받아. 망했다는 학교가 있던 자리를 찾아갔다. 

그 자리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었다. 


차라리 휑한 터라도 남았으면 미련이라도 버리겠건만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으니 

충격이 더 했다. “너 이 새끼. 거짓말하는 거 아니야?” 하고 협박도 해봤지만 

소년은 “진짜라니까요!“ 하고 답답하다는 듯 억울함을 호소했다.


소년을 버리고 근처의 이름이 비슷한 학교를 찾아다녔다. 그 멍청한 이슈마엘이니 유급했을 수도 있어. 하며 근처의 중학교도 찾아다녔다. 


하지만 그 어느 곳에도 이슈마엘은 없었다. 

윤은 집으로 돌아갔다.


91.


집에 돌아와. 윤은. 당연하게도 땀을 많이 흘렸으니까. 

샤워를 하고 더우니까 선풍기를 켜고 

배가 고프니까 라면을 끓여먹었다. 그리고 라면을 먹다가 이슈마엘 생각이 나 조금 울었다.


상을 물리고 멍하니 앉아 있다 소음이 그리워져 TV를 틀었다. 

TV에서 이슈마엘 또래의 걸그룹이 나와 이승철이 불렀던 소녀시대를 부르고 있었다.


다시 이슈마엘 생각이 나 울컥했다.


그래,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있을 리가 없잖아. 그런 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윤은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서.

다시는 이슈마엘을 볼 수 없다는 생각에 견딜 수가 없어졌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다 부숴버리고 싶어졌다.

마침 가방이 눈에 들어와서 발로 찼는데. 아팠다.


뾰족한 것이라도 있었나 보다. 뭔지는 몰라도 완전히 부숴버릴 생각으로

가방을 열었다. 하모니카였다. 생일 때 이슈마엘에게 받았던.

불어보니 뿜빠뿜빠 하고 소리가 났다. 

그리고 시 소리도 기가 막히게 잘났다. 그게 무엇보다도 마음에 들었다.

윤은 손에 피가 안 통할 정도로 하모니카를 꽉 쥐었다.


옆방에서 씨발 놈아 새벽 세시야 세시! 하는데도 윤은 기뻐했다.



92..


윤은 정말로 필사적으로 정말로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었다.

그렇게 더듬어 댔는데도 기억이 신음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독립투사 급의 정신력이다. 이제 좀 불어줬으면 좋겠는데.


윤은 처음으로 자신의 기억력이 저주스러웠다.

머리뚜껑을 따서 속을 헤집어서라도 기억하고 싶었다.

그렇게 기억을 더듬다 언젠가 김에게, 그런 얘기를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슈마엘이 살던 동네에 있던 유원지. 분명 김은 그 주변에서 살았다고 했었다.


새벽 5시 새가 지저귈 즈음의 일이었다.

슬슬 밝아오는 하늘을 보지도 않고

윤은 하모니카와 지갑만 챙기곤 밖으로 나섰다.


김을 만나볼 차례였다.


93.


도저히 사람이 살 것 같지 않은 산을 몇 개 구불구불 지나.

다시 부대 앞이다. 위병소에 면회 신청을 하고 김을 기다렸다.

정확히 10분이 지나고 김이 모습을 보였다.


"전역한지 일주일 만에 면회를 오다니.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어?"


"농담할 시간 없어. 예전에 이슈마엘이 산다고 했던 동네 기억나?"


윤은 이젠 그 주변의 모든 집의 벨을 누르며 이슈마엘을 찾아볼 생각이었다.


김이 윤이 가져온 사제담배를 피우며 얼굴을 찌푸렸다. 

그리곤 연기를 후 뱉으며 말했다.


"음... 어. 기억나."


"진짜?!"


"아니. 가짜. 내가 이사를 얼마나 많이 다녔는데. 기억이 날 리가 있나. 그런데 상관없어."


윤은 이 개똥구더기 만도 쓸모없는 놈이 뭐라 지껄이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 잠깐만. 잠깐! 스톱! 진정해봐. 들어보라고!"


그딴 게 통할리가 없었다. 윤의 주먹이 올라올 즈음에.


"아니, 야. 애초에 나. 너무 빨리 나온 것 같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러고 보니. 막사에서 여기까지만 40분이다. 그런데 어떻게 김은 10분 만에 여기에 올 수 있었을까? 그렇다. 이곳은 벽지 중의 벽지. 가족들조차 한번 오고 나면 학을 떼는 곳이다.


"그게, 너 말고도 오늘 면회 오는 사람이 하나 더 있었거든."


별달리 친구도 없는 김에게 누가 찾아오겠는가. 

얼떨결에 애인과 생이별을 하게 생긴 여고생이나 찾아오겠지.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


교복 사이로 노란 깔깔이가 비죽 튀어나와 있었다.


94.


진짜 있었네. 이슈마엘. 


축하해. 하고 김은 윤의 어깨를 턱. 한번 잡곤 자리를 피해줬다.

여전히 터무니없이 좋은 놈이었다.


그렇게 윤과 이슈마엘만이 면회실에 덩그러이. 남았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고민하던 윤을 재치고 이슈마엘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기차화통이라도 구워먹은 듯한 목소리였다.


"아니, 전화를 왜 안 해요 왜! 내가 그렇게 싫었어요! 내가 싫던 거면 말이라도 하지! 나 지금 인기도 많은데!"


윤의 목소리도 자연스레 올라갔다.


“그것보다도 왜 망한 학교의 교복 같은 걸입고 있는 거야! 역시 머리가 나빠서 검정고시로 학교 나올라고 작정 한거지? 헷갈리잖아 바보야!”


“그거야 윤이 세일러복을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실망할 것 같아서... 우리 학교는 사복 학교라 별 수 없었단 말이에요! 아줌마 옛날 교복을 달라 그랬죠! 사람이 왜 배려를 해줘도 감사할 줄을 몰라요! 그리고 바보라고 한 사람이 바보라고 했어요!”


이젠 둘은 삿대질까지 해가며 싸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왜 마지막의 마지막에 잘못된 번호를 주고 난리야! 내가 얼마나 찾아 다녔는지 알아!”


"남자가 하나하나 바꿔서 전화해볼 근성이 없어요? 애초에 자기번호를 그렇게 잘 기억하고 다니면 자기 번호라도 주던가! 왜 나한텐 번호 안줬어요! 자신감이에요? 내가 번호를 꼭 줄 거라는 자신감이라도 있었어요? 와 어이없네? 이 남자! 그리고 별 수 없잖아요!"


이슈마엘이 힝하고 울었다.


"오랫동안 외톨이였는데 자기 번호나 제대로 기억하고 다니겠어요!"


크게 외치는 소리에 건물 뒤에서 담배를 태우던 김이 역시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둘 다 훌륭한 어른답게 남 탓하는 게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그리움이 더 짙은 탓이었는지 서로를 호도하는 목소리는 점차 울먹거림으로 변해갔다.

둘은 너무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것이다.


이슈마엘은 윤에게 다가가 키스하려다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인다는 걸 깨닫고 머뭇거렸다.

그리고 윤은 상관없다는 듯 몰상식하게도 

이슈마엘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개버렸다.

포개진 입술의 온기를 느끼며

내가 이렇게 몰상식한 사람을 좋아했다니. 하고

이슈마엘은 행복해했다.


-끝-

comment (5)

까치우
까치우 6일 전
피폐해진 마음을 헤집는 레몬즙 같은 글이네요
이억수 작성자 까치우 3일 전
세상에나... 이런 과찬을... 글로 사람 울려보는게 소원이었는데... 이제 그만 살아도 여한이 없겠네요. 감사합니다.
호성軍
호성軍 5일 전
최고의 글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억수 작성자 호성軍 3일 전
아니 호성軍님께서 댓글을... 우선 감사합니다. 과찬이십니다. :)

손만 잡고 잤을텐데?! 1권부터 7권까지 초판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3권은 당연히 드라마 CD까지 포함이요:)

저 역시 제가 고등학교 시절부터 정말로 잘본 작품이었기에 언젠가 한번 꼭 인사드리고 싶었는데...
정말로 너무 잘봤습니다. 덕분에 고등학교 시절이 참 즐거웠습니다.

전 1권의 그 유쾌한 분위기를 굉장히 좋아했었는데 사람들이 꽤나 혹평을 해서 좀 슬펐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3권부터의 시리어스한 분위기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지만...

아무튼 다음번엔 꼭 독자로서 뵙고싶네요.

작가님의 다음 작품도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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