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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2:26 Nov 03,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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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Naufrago
협업 참여 동의 아니오

  소녀는 설맹이었다.


  그 눈은 크레바스 위 천년설과 같이 희끄무레했다. 사방으로 만 리를 달려도 삭풍과 천년설뿐인 엔셀라티카에서 사람은 눈과 얼음에 신성을 빼앗겨 색색들이 눈을 잃어버린다고들 한다. 홍채부터 하얗게 색이 들고 살얼음이 끼다 이내 얼음장에 갇히듯, 동공마저 탈색되어 버리는 것이다. 아직 열 일곱밖에 안 된 메르세데스에게는 까만 부분이 겨우 작은 점처럼 남아 있었다. 아마 내년이면 완전히 눈에 눈멀고 말리라. 


  목 위로만 드러난 소녀의 맨살은 제 눈보다 더 희었다. 희다 못해 파르스름해 보일 만큼. 제아무리 설상복이 온갖 체온과 대사열을 가두고 순환시켜 손실을 줄여 준들 난방 상태가 이래서야 저체온증만 가까스로 면할 뿐이니 어쩌랴. 소녀는 두건을 고쳐 쓰고 뜨뜻미지근한 보일러관에 엉덩이를 내리눌렀다. 먼저 앉은 짝꿍에게 몸뚱이를 밀어붙여 반신을 꼼꼼히 바투 붙이고 어깨에서 어깨로, 방한포까지. 열이 법이요, 난방이 신분이요 온기가 생명인 만큼 한 점 체온이라도 허투루 쓸 수 없었다.


  이곳 안버스 하이브에서 부모 모르는 아이들은 공평하게 노스윈드라는 성을 받는다. 메르세데스 노스윈드, 일리아나 노스윈드. 북풍에 쓸려 온 두 소녀에게는 골방에 보일러관 끄트머리가 지나가는 정도 보금자리만으로도 호사였다.


  메르세데스는 조막만한 책을 주섬주섬 펴기 시작했다. 눈이 반짝거렸다. 일리아나는 힐금, 눈치채지 못할 만큼만 살피고 들리지 않을 정도만 한숨을 쉬었다.


  교대하여 비번이 된 지 갓 한 시진 즈음 된 참이었다. 먹다 남은 보존식량으로 죽을 끓여 속을 데우고 나니 찢어지는 눈바람 소리가 심란하기 짝이 없었다. 부란이 휘몰아치면 꼭 일이 터지고, 일이 터지면 비번이고 나발이고 공회당에 집합 직행인 것이다. 사실 관측동맹에서 예보가 들어온 직후로 짬이 달리는 만큼 각오한 일이지만……. 원망할 건 눈이요, 미워할 건 북풍이나 사람 마음이 오롯이 그리 될 리 있는가?


  실내에 꽁꽁 숨어 있었지만 하룻눈이 켜켜이 또렷하게 들렸다. 어드메에선 어슴푸레하게, 근방에선 둔탁하게. 심지어는 문을 두들겨 설주와 방한포째 와장창 흔들어 놓기까지. 하지만 일리아나는 곧 그 소리를 자장가 삼아 병든 동물처럼 꾸불텅하니 졸았다. 근무 내내 온 신경을 곤두세웠던 만큼 신경줄 끄트머리가 닳아 버렸을 터. 메르세데스는 친구 머리채를 잡아 끌어 제 어깨에 기대게끔 해 주었다. 잠결의 날숨이 방한포에 서너 겹 서리를 입힐 즈음, 그녀도 피로를 견디지 못하고 깨작깨작 읽던 엔셀라티카 과학사를 덮었다.


  조금이나마 뜨뜻한 건 보일러관에 걸친 궁둥이뿐인 곳에서, 메르세데스와 일리아나는 알량한 온기를 좇아 들러붙었다. 이곳에 남은 건 깡그리 얼어 버린 것만 같았다. 대강 내버려 둔 식기, 하다못해 설상화 바닥에 붙은 하룻눈덩어리며 온갖 얼음조각, 하다못해 잠이 든 치들까지. 그렇게 멈추어 버린 곳에서 오로지 눈바람의 날카로움과 둔탁함만이 생생했다. 온 하이브가 요란하다는 걸, 사방 수백 리 인근이 모두 부란 아래 놓여 있다는 걸 아는 만큼. 가마득했다. 네 평 반, 닷 평 남짓한 골방 안조차 감히 그러했다. 하지만 잠이 더 중했다. 의연하기도 했지만 레인저 노릇이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땡그렁, 땡땡그렁, 땡그렁……. 소름 끼치는 경보종이 멀지만 또렷하게 덮쳐 왔다. 서너 시간이나 졸았을까, 가사상태에 빠져 있던 두 소녀는 엉망으로 몸을 튕기며 기계적으로 잠에서 깨어났다. 에미 이끼, 애비 플라나리아! 추위로 발그레한 입술에서 욕설이 딸꾹질처럼 튀어나왔다. 하지만 허둥거리면서도 날렵하게 정신줄부터 챙겼다.


  집합 명령이었다.


  꾸물거리다가는 영창 신세일지도 모른다. 눈폭풍을 가로질러 공회당까지 가야 하는 만큼 더욱. 설상 키트를 메고, 방한포를 망토처럼 두르고, 후크를 채우고, 입마개를 두르고, 그 위에 두건을 눌러쓴다. 그리고는 나란히 세워 두었던 보우건을 사이 좋게 집어들었다. 중무장하여 눈만 빼꼼 내민 모양이 되자 한쪽은 크고 한쪽은 작은 눈사람 병정이었다.


  문지방 너머는 난리도 아니었다. 뿌연 바람으로 시계는 겨우 십 수 미터 남짓, 눈덩이가 주먹처럼 연신 몸을 노크하고 있었다. 메르세데스와 일리아나는 각자 반대쪽에 어깨 총을 하고서 단단하게 팔짱을 끼고 걸었다. 단단히 여민다고 여몄지만 방한포가 미친 듯이 나부끼며 요란뻑적지근하게 펄럭거렸다. 쌍쌍이 휘청거리는 망령 꼴이었다. 눈폭풍 속에서 하이브의 가도는 눈에 파묻혀 방향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마을 안 길이건만, 눈에 눈이 멀어야 갈 수 있었다.


  이삼십 분을 부란과 씨름하고서야 집합 장소인 공회당에 도달했다. 난방탑 바로 아래에 보일러관이 서른 두 개나 지나는 이곳은 부란에 반쯤 얼어버렸던 낯짝이 따끔거릴 만큼 후끈했다. 하나 둘 도착한 레인저들이 계급순으로 안쪽부터 자리잡았다. 메르세데스와 일리아나는 말석 중 말석에서 슬금슬금 눈치를 봤다. 출입문 바로 옆, 외풍이 속삭이고 결로로 축축한 그곳이나마 하루하루 얼어죽지 못해 사는 집보다는 훨씬 나았다. 관절 관절이 노곤하게 풀어졌다.


  대장은 마흔여덟 대원이 다 모이고도 십 분쯤 더 지나 공회당에 왔다. 아무도 불평하는 사람은 없었다. 설상 두건이며 방한포에 얼어붙은 눈을 주렁주렁 매달고 온 양이 심상찮았기 때문이다.


  “짧게 한다. 우리 작열탄 호송대가 그레이트 크랙 부근에서 연락이 끊겼다. 지금 우리 하이브엔 비축분이 나흘치 밖에 없어서 기다려주거나 할 여유가 없어. 당장 호송대를 찾아내 데려오든, 시체는 설장(雪葬)하고 탄차만 끌고 오든 해야 돼.”


  웅성거림이 순식간에 들고 빠르게 흩어졌다. 법석 떨어 봐야 온기만 낭비하리라는 걸 레인저들은 누구보다 잘 아는 만큼.


  작열탄이 떨어지면 난방탑이 꺼진다. 꺼진 난방탑을 되살리는 데는, 통상의 열 배가 넘는 연료가 든다. 또 반나절만 보일러를 꺼트려도 주민이 절반은 얼어 죽는다. 어느 쪽이건 가타부타 할 게 없는 건 당연지사. 문제는 작전 계획이었다.


  누군가가 잽싸게 손을 들었고, 대장은 턱 끝으로 그쪽을 가리켰다.


  “순번대로 나가는 겁니까? 그럼 하이브에 남을 레인저는…….”


  “아니, 전원 출동이다.”


  “대장! 지금 고작 여섯 시간 전에 교대한 대원도 있는데…….”


  몇몇 대원이 반발하며 구태여 열을 낭비했으나 씨알도 먹히지 않을 일이었다.


  “내가 로테이션 짰는데, 그걸 모르겠어? 관측동맹 쪽에서 모레까지 부란이 점차 두 배까지 강해질 거란 예보다. 어중간하게 열 명 스무 명 나갔다간 겨울에 잡아먹힌다. 그럼 난방탑을 꺼트리게 되겠지.”


  정론이 모질었다. 눈폭풍이 벽을 매만지는 소리만 뻐근했다. 침묵 아닌 침묵에, 선언 비슷한 물음이 이어졌다.


  “불만 더 접수해야 하나?”


  레인저들은 대답 대신 실내에 들면서 느슨하게 해 두었던 후크며 조리개끈을 단속하기 시작했다. 부스럭거리고 덜그럭거리며 공회당 전체가 요란해졌다. 대장은 목소리를 높였다.


  “좋아. 분대장들, 대원 챙겨서 보고해. 보급품 모자란 거 있는 놈, 지금 말하고!”


  “저, 대장님…….”


  “뭐야, 꼬맹이 메르세데스?”


  “저랑 일리아나가 설상 키트에 쓸 작열탄이 떨어져서요.”


  메르세데스는 쭈뼛거리면서도 할 말을 했다. 코웃음에 버르장머리없이 낯짝을 구기지 않도록 안간힘을 쓰면서.


  “팔아먹은 거 아냐?”


  “누가 이걸 팔아먹어요? 저흰 저번에 보급 못 받았습니다.”


  일리아나가 거들면서 발끈했다. 대장은 짜증스레 한쪽으로 소리를 질렀다. 두 소녀는 노스윈드건 꼬맹이건, 레인저 자격이 있었다. 이런 괴롭힘은 따지고 보면 열 낭비나 다름없으리라.


  “내가 얘랑 쟤 못살게 굴지 말라고 그랬잖아, 엉? 보급! 작열탄 내 줘!”


  여기저기에서 노스윈드 계집애, 호로 새끼 운운했지만 명령은 명령이었다. 곧 여덟 개 들이 자루가 두 개 쥐어졌다. 나흘 치 분량이었다.


  저들 챙겨야 할 걸 챙긴 두 노스윈드는 다른 불호령을 듣기 전에 얼른 3분대 대열에 후닥닥 가서 붙었다. 분대장 이하 대원이 총 열 둘이었다. 메르세데스는 오른 어깨에, 일리아나는 왼 어깨에 보우건을 차고 여느 때처럼 꼭 팔짱을 꼈다.


  이번 원정에서의 무사를 빌면서.


  부란은 족히 천 명의 목숨을 건 발버둥을 비웃기라도 하듯 차츰차츰 세를 올렸다. 막 하이브를 등질 즈음엔 여느 악천후에서야 설상기동 경험이 풍부하니 대수롭잖았으나 점차 몸뚱이가 휘청거릴 지경이 되니 참으로 별일이 되었다. 선두에서 온 말이 줄줄이 대열을 따라 한 명 한 명 뒤로 전해졌다. 낙오자를 방지하기 위해 분대 단위로 후크를 이으라는 명령이었다. 선두가 눈막대를 찾아 걸으면 어떻게든 마흔여덟 명이 따라 갈 수 있을 테니까.


  스무 걸음 간격으로 박힌 눈막대는 몇 미터나 되는 높이로 훌쩍했다. 엉성하고 살풍경하지만, 공동지에서는 지도도, 나침반도 이보다 틀림없는 길잡이는 못 되는 법이다. 그런 걸로는 당장 내 발 앞에 크레바스가 끔찍스러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지, 설종들의 소굴이 있는지 알 도리가 없으니까. 천 명, 만 명의 피와 열이 싸늘한 거인처럼 우뚝 서서 다른 천 명, 만 명의 피와 열을 보살피는 셈이다.


  가는 길을 그르치지 않은들 어디 만만한 게 없었다. 천년설 위에 하룻눈이 벌써 두 척을 넘는 두께로 깔렸고 날이 바뀌면 지형이 아주 바뀌어 버릴 것이다. 이 억척스러운 융단은 눈에 눈 먼 전사들을 질척하게 붙들고 있었다. 하늘에서는 주먹 만한 눈덩이가 횡으로 휘날리며 몸을 두들겼고 이따금씩 골을 후려갈겨 정신을 쏙 빼놓았다.


  무한정 펼쳐진 설원에서 북풍이 뒤틀렸다. 비껴 불어온 칼바람끼리 휘감기고, 부닥치며 서로 발겨 쇳덩이를 잡아 찢는 마냥 끔찍한 소리를 냈다. 레인저들은 이 소리를 밴시의 포효라고들 한다. 설종이, 천년설 위에 덩그러니 선 인간을 보고 가소로이 우짖는다는 것이다. 아닌게아니라 마흔여덟의 크고 작은 형체는 제 자리에 선 그뿐이었다. 발자국, 다리를 끈 자취 따윈 부란에 집어삼켜져 당초 없던 듯하며 앞으로 눈막대, 뒤로 눈막대, 위로 눈폭풍, 아래로 천년설 뿐. 밴시의 포효, 까마득히 먼 눈사태, 켜켜이 세를 불리는 하룻눈…….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안겨지는 것들이 남김없이 무시무시하고 쓸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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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Naufrago

안녕하세요

comment (3)

까치우
까치우 18.11.06. 11:38
아니 글 미쳤잖아요 지금까지 뭐하셨던 겁니까
Naufrago 작성자 까치우 18.11.12. 23:56
안녕하세요. 연초부터 일이 좀 있어서... 곧 또 뵙겠습니다.
까치우
까치우 18.11.06. 11:38
오늘 하루를 살아갈 재미를 얻었다
권한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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