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소설회랑

애프터글로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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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0:30 Nov 13,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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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Naufrago
협업 참여 동의 아니오

  그러나 레인저란 그렇게 그저 덧없다기에는 족히 모진 자들이었다. 감히 겨울을 정면으로 들이받으며 짧게는 이삼 년에서 길게는 이삼십 년을 까마득하게 싸워 온 것이다. 부단하게 하룻눈을 밟아 뭉개며 임무를 향해. 아마 설맹인 눈은 천년설에 신성을 빼앗겨서가 아니라 그네들과 맞부딪쳐 하얗게 이글이글 끓어버린 것일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대장부터 두 말단 레인저까지, 빠짐없이.


  메르세데스는 입마개에 숨이 얼어붙어 맺힌 얼음을 긁어냈다. 달리 말하면, 꼭 그만큼의 수분을 버린 것이다. 음수 노즐을 빨았지만 목넘김은커녕 입이 촉촉해지는 기색도 느껴지지 않았다. 괜히 집수 주머니에 압력을 가한 꼴이 되어 카테터가 와락 죄어들었다. 벌레가 가랑이를 파고드는 것 같아, 소녀는 기겁을 하며 제 설상복 아랫도리를 주먹으로 콱 내리쳤다.


  조바심에 갈증이 더해 갔다. 메르세데스는 살며시 짝궁 옆구리를 건드렸다.


  「아나, 물 좀 찼어?」


  「계집애, 벌써부터 물 타령이야? 네 건 어쩌고?」


  「나, 너보다 작고 땀도 덜 나니까…….」


  「남의 땀 오줌 훔쳐 마시는 건 너 밖에 없다고. 자, 한 모금만이야.」


  일리아나는 기막혀하면서도 목 언저리에서 노즐을 잡아 꺼내 우측으로 디밀었다. 메르세데스는 입마개를 젖히고 납죽 물었다.


  여느 때처럼 정신이 번쩍 들 만치 텁텁했다. 메르세데스는 혀를 툭툭 날름거렸다.


  「으, 쿰쿰해.」


  「이게 진짜!」


  설상복 두건 아래로, 눈두덩이며 미간 주변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설상기동 중이 아니었다면 개머리판으로 혼쭐을 내 줬으리라.


  영리한 메르세데스는 그걸 알고 장난 친 셈이겠지만.



  마흔여덟 명의 안버스 레인저는 눈막대를 좇아 무심하게 북상했다. 천년설 위에서 레인저들은 한 명도 남김없이 극한으로 치닫고 있었다. 고통이란 불가피하다못해 친구나 다름이 없었다.


  일리아나는 허옇게 얼어붙은 입마개를 아주 벗어 얼음을 두들겨 깼다. 그리고는 수순이라도 밟듯 석탄 사탕 하나를 휑한 입으로 던져 넣었다. 으직, 하는 소리와 함께 오싹한 시큼텁텁함이 엄습했다. 물씬한 암모니아향이 이내 근육에 힘을 불어넣었다. 인간 연료, 음식에 이 따위 멸칭을 붙이는 건 이런 걸 입에 달고 살아야 하는 신세에 대한 한탄이 아닐까?


  건너편에서 단단하게 낀 팔짱이 못마땅한 기색 만만이었다. 메르세데스는 앞니로 문 사탕을 아래로 뚝 분질러 손에 남은 조각을 쑥 들이밀었다.


  「넌 왜 반만 먹어?」


  「물 이걸로 갚을래. 나 이거 싫어. 똥 이끼란 말야, 이거. 똥 이끼라고.」


  「으, 까다로운 계집애. 설종 튀어나왔을 때 허기지면 어쩌려고 그래?」


  메르세데스는 인분을 그러모아 키운 스밀레이 이끼로 석탄 사탕을 만든다는 걸 박물지를 읽다 알게 된 후로 늘 저랬다. 대개는 관심도 없거니와 별 수 있는 일도 아닐 텐데! 똑똑한 건 참 멍청한 일이기도 한 법이다. 


  아닌게아니라 그녀는 종종 생뚱맞은 데서 푼수 티를 냈다. 지금처럼. 그러다가도 곧잘 영리한 걸 보면 그때그때 달리 보이는 햇볕 아래 천년설 빛깔 같달까. 친구 생각은 제법 쓸모가 있었다. 이놈의 석탄 사탕 맛을 얼마간 흩어 주니까. 


  메르세데스는 입마개를 달싹거리면서 계속 조잘거렸다.


  「난 머리 쓰는 쪽이잖아. 머리는 배에 든 게 좀 적어야 잘 돌아가.」


  「어쭈.」


  「증명해 볼까? 우린 지금 막 공동지 8부 능선을 지난 참이야. 해가 한 시간도 안 남았으니까 곧 대장이 눈굴 파라고 하시겠지.」


  일리아나는 질린 얼굴을 했다.


  「계속 눈막대 세고 있었던 거야? 독한 계집애.」


  「그건 아닌데. 그런 일은 대장이 하시겠지.」


  「뭐? 그럼 뭔데? 적당히 때려맞춘 거야?」


  메르세데스는 배시시 웃었다. 입마개에 가려 보이진 않았지만 시시덕거리는 꼴이 분명히 그래 보였다. 


  「네 배꼽시계가 좀 정확하더라고. 설상기동할 때면 만날 이때쯤 석탄 사탕 씹던데?」


  「야!」


  일리아나는 벌개져서 소리를 빽 질렀다. 부란의 굉음에 파묻히지 않았다면 분대장에게 열 낭비하지 말라며 잔소리를 듣게 되었으리라.


  메르세데스가 말한 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대열이 앞에서부터 착착 멈추었다. 그들은 공동지를 따라 북상하고 있었으므로, 숙영을 한다면 능선을 넘지 않고 남쪽 사면에 눈굴을 파야 했다.


  레인저들은 눈막대 주변에 분대 단위로 모여 전우조끼리 삽질을 하기 시작했다. 해가 꺼질 즈음이 되자 그야말로 겨울의 광란이 펼쳐졌다. 북풍을 정면으로 받았다간 기우뚱 자빠질 정도였고 하룻눈을 두 삽 퍼내면 한 삽이 도로 쌓일 정도로. 그러나 우직하게 팔을 놀릴 뿐이었다. 레인저는 설종보다 겨울 그 자체와 더 잘 맞싸울 줄 알아야 하는 법.


  두 소녀는 착착 역할을 나누어 2인실을 만들고 있었다. 사내들보다 몸집이 작은 만큼 굴을 작게 만들어도 되어 일감은 꼭 그만큼 적었다. 잔뜩 옹송그린 채 몸 뉘일 곳을 파던 메르세데스가 작업을 끝내고 신경질적으로 입마개를 벗어 동댕이칠 즈음이 되자 암흑이 눈 결정 사이사이에 내렸다.


  하늘이 온데간데없고 극광이 만개했다. 수천 가지 빛깔로 이리저리 일렁거리며 천년설 위에 최소한의 시계를 마련해 주면서. 엔셀라티카 사람들은 인간이 눈에 빼앗긴 신성이 돌아오지 못한 채 구천을 떠돌며 번들거리는 것이 저 오로라라고 믿었다. 아이러니였다. 퇴락한 겨울 땅에서 결국 인간을 비추는 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든, 저승에 들어서야 제 존엄을 되찾는다는 것이든. 피차 저 잔광이란 인간을 참으로 모질게 말하는 셈이라.


  신성의 자취를 멍하니 구경하며 쉴 수 있다면 좋으련만, 아직 할 일이 태산이었다. 메르세데스와 일리아나는 말로 온기를 소모하는 일 없이 죽이 맞았다. 


  메르세데스는 반합에 정화제를 넣고 난방로에 올려 식수를 만들었다. 저주받은 눈이 나리는 극한의 땅에서 물은 귀물처럼 다루어야 했다. 3리터씩의 여유분을 만들어 두기 위해 그녀는 무심하게 일했다. 한편 일리아나는 보존식을 데웠다. 이끼 크래커를 물에 풀고 플라나리아 포를 썰어 넣어 엉기지 않게 휘이휘이 저어서. 이빨이 건강하더라도 이 딱딱하고 질겅질겅한 걸 차게 씹고 싶진 않으니까!


  식사 시간이었다. 두 소녀는 추위와 노동으로 얼굴이 발그랗기 그지없었다. 푸르죽죽하고 기름기라고는 없어 퍽퍽한 이끼죽이나마 그렇게 맛이 좋았다. 뜨끈하게 속이 풀렸다.


  한 끼 식사는 하룻눈보다 더 쉬이 녹아내렸다. 눈으로 대강 철벅철벅 찬합이며 숟가락을 씻어내자 덜 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잠자리 굴로 기어들어간 메르세데스와 일리아나는 사방 벽을 눈삽으로 꾹꾹 눌러 다지기 시작했다. 특히 천장은 꼼꼼히 신경 써 요철이나 균열이 없도록 했다. 아무렇게나 우둘투둘 내버려두었다가는 체온과 난방로 열에 고드름이 맺혀 날벼락을 맞기 십상이다.


  일리아나는 삽을 놀리면서 괜히 툴툴거렸다. 그녀는 분대 제일의 명사수면서도 손가락 하나만큼 키가 작은 메르세데스보다 걱정이 많았다.


  “부란이 좀 잦아들면 좋을 텐데.”


  “뭐, 관측동맹 예보가 틀린 적이 한두 번이어야지. 아침엔 맑을지 누가 알아?”


  “맞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잖아? 눈폭풍 날리는 데 보우건질 하는 거, 질색이야.”


  “그으래?”


  메르세데스는 옆을 돌아보며 웃었다. 밝았다. 흔들림이라곤 없어 뜨끔할 정도로. 일리아나는 종종 이 친구가 무슨 예언이나 계시 같은 걸 받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앞을 내다볼 때가 있는 걸 알고 있었다.


  무슨 말을 더 하려나 싶었지만 메르세데스는 하품을 쩍 하며 얼버무렸다.


  “글쎄, 싫은 건 싫은 거고 쏘는 건 쏘는 거고. 나 졸려, 일리아나, 자자.”


  늘어지기가 무섭게 눈굴이 위에서 누르는 발소리로 퉁퉁거렸다. 곧 불호령과 함께 웬 사내가 아래로 쑥 떨어져 내렸다.


  “게으르게스리 벌써 쳐 자려고, 작은 노스윈드?”


  “대, 대장님!”


  메르세데스는 용수철처럼 튀어오르다가 얕은 잠자리 굴 천정에 머리를 쾅 찧었다. 대장은 피식 웃으며 설상 랜턴을 잠시 끄고, 눈을 털고는 방한포를 여몄다.


  “보아하니 장비엔 이상 없는 것 같고, 아픈 데 없지?”


  “예, 괜찮습니다.”


  “네.”


  난방로에서 새는 빛뿐인 눈굴은 어둑어둑했다. 대장은 대강 연놈들이 뒈지지는 않았는지 불러 보기만 해도 될 것을 구태여 벽도 만져 보고 보우건이며 난방로도 제 눈으로 살피려 들었다. 부동 자세로 앉은 두 소녀는 멀뚱멀뚱 하얀 눈알만 굴렸다.


  그는 메르세데스의 보우건을 전개해 활대며 크랭크를 점검하다 말고 뜬금없이 너털웃음을 웃었다.


  “계집애들 주제에 너흰 이상하게 걱정이 안 된단 말이지. 특히 저 꼬맹이 말야. 아직 눈도 다 안 먼 게…….”


  “칭찬으로 알아들을게요.”


  메르세데스는 깜찍하게 빈정거렸다. 곧 철컥철컥 소리가 나더니 소개된 보우건이 눈벽에 기대 세워졌다. 사내는 다소 착잡하게, 하지만 힘있게 말했다.


  “선행대에서 보고가 들어왔다. 아마……. 밴시 하나쯤은 잡아야 될 것 같다고.”


  “잡아야 되면 잡는 거죠. 아닙니까?”


  “그러게요.”


  일리아나도, 메르세데스도 겁먹은 기색은 없었다. 다만 설종과 한두 번 싸워 본 게 아닌 까닭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무언가 더 있었다.


  대장은 가소롭다는 듯 머리를 한 대씩 탕탕 내리쳤다. 그게 뭔지 알아낼 필요는 없었다. 무언가 있기라도 한 게 중할 뿐.


  “속 편한 계집애들, 그래. 쉬어라.”


  하룻눈을 밟아 뭉개는 소리가 뻑적지근하게 멀어져 갔다. 얼마 못 가 밴시의 울부짖음, 처덕거리는 눈덩이에 묻혀 누가 온 적이라도 있었냐는 양 사라져 버렸지만. 


  방한포를 깔고 누운 소녀들은 머리맡에 설상 키트와 보우건을 나란히 둔 채 꼭 껴안았다. 이때가 사람이 가장 약해지는 때라고들 한다. 눈에 생매장되지는 않을까, 눈사태에 휩쓸리지는 않을까, 얼어 죽지는 않을까, 내일 아침에 눈 뜰 수 있을까, 혼자 남게 되지는 않을까……. 머리 위에서 울려퍼지는 부란은 종말의 앞잡이마냥 고막을 뒤흔들고, 사방에서 옥죄는 한기가 설상복 내피 안쪽까지 사무치게 스민다. 언제는 안 그렇겠는가마는 잠자리 굴에선 겨울의 고독 속에 자신과 전우조 친구, 단 둘이 내팽개쳐지게 되는 것이다.


  언제나 천연덕스러운 메르세데스조차 예외는 못 되었다. 그녀는 한 올 온기를 좇아, 존재감을 좇아 일리아나의 품 속에 파고들었다. 뻣뻣하고 냉한 설상복 위로나마 사람 온기가 두렷했다. 일리아나 역시 이런 밤이면 작은 친구가 마치 견착한 보우건 개머리판처럼 참 의지가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comment (2)

까치우
까치우 18.11.14. 18:47
밝은 면 어두운 면 하며 들었다놨다 하는 점이 아찔한 매력이지만 이번엔 그림자가 더더더 짙어졌네요. 인분 재활용 읽다보니 잊고 있던 견인도시가.. 똥과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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