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소설회랑

애프터글로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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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45 Nov 19,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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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Naufrago
협업 참여 동의 아니오

  얕디얕은 잠자리였지만 메르세데스는 꿈을 꾸었다.


  익숙한 자각몽이었다. 눈 닿는 곳 전부가 천년설로 새하얀 곳에 그저 우뚝 서 있었다. 부란도, 삭풍도, 눈사태나 눈신기루도 없이 그저 어디까지고 깨끗했으며 그만큼 외로웠다. 메르세데스는 걸었다. 그녀가 걷는지 발자국이 따라오는지 모를 지경이었지만 어딘가 익숙하고 자신 있는 데가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정표가 덩그러니 섰기 때문이다. 저 꼭대기까지 드리워진 하늘사다리가.


  엔셀라티카에 두서넛 있는 하늘사다리는 기상이 좋을 때면 외지 중의 외지인 안버스 하이브에서도 하나가 보였다. 물론 공회당 꼭대기 즈음은 되어야 시계가 트이기에 메르세데스는 눈구름이 개이기라도 하면 경보 당직을 못 해 안달이었다. 경보종이 달린 꼭대기에 소풍 가듯 올라 경치 구경이나 할 수는 없었으니까. 일리아나는 단짝이 그렇게 유별난 짓 할 때마다 질색했지만 당직 대타를 해 주고 버는 돈 몇 푼 때문이라도 나 몰라라 하진 않았다. 친구는 지정사수답게 즉물적이고 계산적이었다. 열 낭비할 일만 자꾸 벌인다며 핀잔 안 주는 것만으로도 우정이 대단한 것이리라.


  그러나 메르세데스는 참으로 다르게 억척스러웠다. 그녀의 하늘사다리 호는 남다른 데가 있었다. 오랜 분들이 남긴 것들 중 과연 저만한 게 있을까? 오랜 분들은 장난치지 않는데, 저 엄청난 걸 도대체 왜 쌓아 올렸을까? 하늘사다리에는 어떤 게 잠들어 있을까? 이런 부류의 학자 같은 관심이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일련의 귀소본능이나 회귀성 같은, 막연하지만 강렬한 이끌림이라 해야 할 것이다. 최면에 걸렸대도 순순히 믿을 수 있을 정도로. 이 무슨 조화랴?


  엔셀라티카에서 중한 건 언제나 결과뿐이다. 과정이야 어쨌든 겨울 앞에 살아있기만 하면 그만이고 원리야 어쨌든 세렌디피티의 선택만 받으면 그만이 아닌가! 마찬가지로 왜 하늘사다리에 취해 있는 이유는 아무래도 좋은 것이었다. 그래서 어쩔 것인지, 어떻게 될 것인지만이 중할 뿐. 혹 여신의 주사위가 눈 여섯 개로 덩그러니 구를 수도 있는 일이니까.


  안타깝지만 그런 점에서, 메르세데스의 꿈은 북풍으로 불 때는 소리나 다름이 없었다. 무의식이란 참으로 영악하여 진즉 그 사실을 꿰뚫고 있었다. 언제나 시작이 같으며 끝 또한 그랬으니까. 상상할 수 없는 걸 상으로 맺어야 하는 지점부터, 메르세데스는 한 걸음도 더 나갈 수 없는 것이다. 제아무리 꿈이라지만 수천 걸음을 걸어서는 투명한 벽에 와락 가로막히는 건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 벽에 비쳐 보이는 자신은 언제나 눈을 다이아몬드처럼 까마득하게 빛내고 있었다. 의식으로 끌려 나오는 예후 치고는 참 별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온 관절이 까마득하게 시렸다. 사지 하나하나가 뻣뻣하여 몸뚱이가 진짜 얼어버리고 만 게 아닌지 덜컥 겁이 났다. 온열 배양조 속 플라나리아처럼 꿈틀거리던 메르세데스는 간신히 손을 뻗어 설상 키트를 끌어당겼다. 꺼져가는 난방로를 다시 지피자 제 몸도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온갖 기침을 토악질하며, 그녀는 정신을 제자리에 끌어 맞추었다.


  곧 메르세데스는 모질게 일리아나의 따귀를 갈겨 깨웠다. 두 소녀가 은신처에 지붕을 드리운 하룻눈을 파내며 기어나오는 데는 반 시진 즈음 걸렸다. 밤새 눈폭풍이 휘몰아쳤다기에는 아무래도 만만한 일이었다.


  부란이 그친 것이다.


  하나 둘 8부 능선 눈막대 근처에 모여든 대원들은 누구 하나 좋은 기색 하지 않았다. 불문율이었다. 이렇게 갤 때 천둥벌거숭이처럼 경망스레 굴었다가는 성난 겨울이 되레 휘몰아친다는 이유로. 나비 효과 치기에는 너무 허황된 미신이었으나 레인저에게 날씨란 그만큼이나 간절했다. 하물며 지금은 참으로 별다른 임무를 수행 중인 만큼 더더욱.


  전원이 식사 대신 석탄 사탕을 깨물어 부수며 하룻눈을 헤쳤다. 부란은 변덕스럽기 짝이 없다. 이 하늘이 다만 몇 시간이나마 맑으리라는 보장조차 불가하리라. 극성인 절기가 원망스러웠지만 그런 좌절감에도 오롯이 맞닥뜨리는 게 이들의 일이었다. 공복으로 바짝 마른 입에 암모니아 내음이 걸쭉하게 달라붙었다. 그만큼 악에 받쳐 설상기동 할 수 있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마흔여덟 명 전사는 순식간에 갈 길을 주파하고 있었다.


  정상에서, 부란이 휩쓸고 간 풍경은 얼어붙은 천년설만치 맑았다. 설맹인 눈으로는 이 극지를 아래로 이삼 킬로미터까지 또렷이 내려다볼 수 있었다. 앞으로 이정표 삼을 수십 개 눈막대, 소규모 눈사태가 휩쓴 흔적, 밤새 설종이 지난 자취, 다른 동물들의 은신처……. 그저 새하얗고 사뭇 천진할 뿐인 것 같은 정경은 간밤의 고독과 음산을 남김 없이 승화시켜 버린 걸까? 레인저들은 한풀 꺾인 삭풍을 잔바람 맞듯 하며 시계에 들어온 온갖 정보를 읽었다.


  허나 겨울이란 놈은 참으로 악의적이어서 이런 막간에조차 인간을 위협하는 법. 기온이 오르면 천년설의 독기가 끓어 눈신기루를 이룬다. 말 그대로 겨울의 환영이 되는 것이다. 발을 딛는 순간 그 자리가 크레바스 끄트머리인 것처럼 보이거나 바람다발이 휙 스쳐 지나갈 때 밴시나 팬텀이 앞발을 들어 후려치는 모습이 보이는 등 예고 없이 절망적인 환영이 엄습해 온다. 


  훈련이 모자란 자는 움찔거리거나 허둥거리며 끊임없이 힘을 버릴 테고, 잘못하면 보우건을 오발하여 동료를 날려 버릴지도 모른다. 레인저란 그런 불시의 공포를 감히 이겨내는 자들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제정신으로 공동지를 제 집처럼 드나들 수는 없는 법. 최연장자인 대장부터 제일 애송이인 메르세데스, 일리아나까지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부란이 그쳤을 때 작전이 대강 마무리돼야 할 텐데! 환영을 손짓으로 흩으며 하는 생각이란 으레 같았다. 그러나 레인저가 낙관으로 움직여서는 안 된다. 일리아나로 말할 것 같으면, 조금 더 철저하게 그랬다. 의식적으로, 또 타고난 대로. 한참을 꿍얼거리던 그녀는 메르세데스더러 들으라는 듯이 지껄였다.


  “날씨 좋은데, 부란이 곧 다시 불겠지?”


  메르세데스는 배시시 웃으며 얼른 되받아쳤다.


  “날씨 좋다고? 누가 들으면 기겁했겠다.”


  “난 미신 안 믿어. 겨울이 무슨 사람도 아니고……. 또 성화교단 사제들이 하는 염불도, 오랜 분들이 모셨다는 여신 같은 것도 안 믿어.”


  정색한 목소리가 바글거렸다. 메르세데스는 아주 잠깐, 피곤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바로잡았다. 잔뜩 동여맨 두건이며 방한포 덕분에 보이지는 않았으리라.


  “그럼 아까, 눈굴에서 나오자마자 날씨 오진다고 떵떵 말하지 그랬어?”


  “그건 아니지.”


  “왜?”


  “다른 대원이 기분 나쁠 거잖아. 나 때문에 전투력이 떨어질 거라고. 이건 미신이 아니라 확실한 거니까.”


  변명이랍시고 하는 게 갈피가 없었다. 부란이 아주 그쳤으면 좋겠다고 내심 생각했으면서. 모질게 자신을 감추고 싸매야 명줄이 길어지는 극지에서는 사람이 어떻게든 거짓말쟁이가 되는 법.


  남 말 할 처지는 아니겠지만, 이라고 메르세데스는 생각했다. 웃어버릴 수밖에.


  “맨날 생각하는데, 넌 속물이야.”


  “속물이라 미안하네. 네가 좀 이상한 애니까, 둘이 살아나가려면 한 쪽은 속물이어야지.”


  일리아나의 입마개가 달싹거렸다. 약이 오른 것 같았다. 아마 가려진 얼굴이 반쯤 얼었다 녹은 것처럼 벌개져 있을 터. 메르세데스는 잽싸게 설상복 두건을 탁 올려치며 치근덕거렸다.


  “왜 못나게 입술을 삐죽거리고 그래? 칭찬이야, 이거.”


  “야! 칭찬은 무슨.”


  일리아나는 주먹을 냅다 휘두르다 말고 기세를 죽였다. 친구 머리에 닿을 즈음에는 겨우 꿀밤 즈음밖에 안 되었다. 북북서풍이 여전히 바닥에 깔린 채 은근짜로 하룻눈을 한 꺼풀 들더니 나지막하게 흩뿌려 댔다.


  설상기동하며 잡담으로 열을 버리는 중간중간 멀찍이 밴시의 포효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어딘가에 국지적으로 삭풍이 부는 걸까, 아니면 눈신기루에서 환청이 들리는 걸까? 누구도 분명하게 알 수는 없는 일이겠지만. 메르세데스는 주섬주섬 노즐을 물었다. 부란이 다시 불어올까, 아닐까? 짝궁과는 달리 낙천가에 직관가라도 레인저인 만큼 이럴 땐 부정의 역치가 참으로 높디높을 밖에. 이래서야 누구더러 속물이라 놀린 보람이 없었다.


  이런 때에 하늘사다리란 눈막대 천 개, 만 개보다 더 멀었다. 달리 말만 안 했다 뿐 그녀는 방한포를 바스락거리며 수십 걸음에 한 번 정도씩 하늘을 곁눈질하고 있었다. 겨울 같으니라고, 진짜 몹쓸 땅에 짜증나는 바람 같으니라고.


  안버스 레인저들은 청명을 틈타 반나절 만에 40리 가량을 주파했다. 하룻눈이 채 가시지 않아 반쯤 얼고 반쯤 퍽석거리는 바닥을 감수한 만큼 엄청난 강행군이라 할 만했다. 휴식이 필요했다. 근육을 달래고 속도 풀어주어야만 여차할 때 힘을 쓸 수 있으니까. 하지만 엔셀라티카는 전적인 악심으로 대할 뿐이었다. 어느새 하늘이 들끓고 있었다. 악천후가 지척으로 다가오자 거짓말처럼 눈신기루가 멎었다. 겨울이 사람을 약올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어찌나 눈구름이 두꺼운지 그 끄트머리에서 수선을 내려 어둠의 경계선으로 삼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눈밭에나마 잠깐 엉덩이를 붙이려던 마흔여덟 명은 즉각 몸을 일으켜야 했다. 누가 날씨 좋다고 씨부렸냐며 엉뚱한 발본색원을 하려 드는 대원, 말없이 설상장비를 여미는 대원, 어처구니가 없는지 아주 낄낄거리고 있는 대원……. 두 소녀로 말할 것 같으면 이끼 크래커를 씹고 있었다. 일리아나는 그런 와중 슬그머니 어깨를 움츠렸고.


  눈폭풍이 거침없이 마수를 들이밀기 시작했다. 일 각 일 각마다 갑절이 되어! 사방 하룻눈에 투닥투닥 떨어지기만 하던 눈이 눈 깜짝하는 사이 걸음 걸음마다 눈이 정강이를 받아 삐죽하게 설상기동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언제 간밤의 맹위로 돌아갈 지 몰랐고 언제 그보다 더 강해질 지 알 수 없었다. 또 거짓말처럼 뚝 그치겠거니 하기에는 마음이 지나치게 다급했다. 밴시의 포효가 조급증을 부추겼다. 다 왔는데, 이제 거의 다 왔는데!


  허겁지겁 설상화를 옮기고 또 옮겨 놓던 대원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멈추어 섰다. 지금까지 죽어라고 듣던, 겨울이 늘어놓는 온갖 싫은 소리에 뚜렷한 이질감이 있었다.


  진짜, 살아 움직이는 밴시의 울부짖음이 들려온 것이다! 어디 겨울 언덕배기에 부는 바람이 아니라 진짜 설종이 뽑아내는 울음소리가 바로 지척에 있었다.


  「전투 준……!」


  채 조명살을 위로 쏘아 올리기도 전에, 비명이 터져나왔다. 꼬리처럼 드리워진 조명 불꽃도, 전투 준비 명령도 한 발 반은 늦었다.


  밴시의 실루엣이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1소대 전위인 대장에게는 물론 3소대 후미인 메르세데스와 일리아나에게도. 이제는 부란이 너무 거셌다. 어른 주먹 만한 눈발이 팔매처럼 모로 내리꽂히고, 팔을 뻗으면 제 손가락이 온전히 보이지 않을 정도로. 대원은 총 마흔여덟 명이지만 한 명씩 마흔여덟 조로 내팽개쳐진 거나 다름이 없었다. 겨울에 반쯤 씹어 먹힌 비명으로나마 밴시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는 그나마 다행일까?


  체력 안배고 나발이고 미친 연놈들마냥 뛰어 줄줄이 늘어선 대형부터 바꿔야만 했다. 이렇게 눈폭풍에 가린 채 한 명씩, 한 전우조씩 밴시와 맞닥뜨렸다간 전멸을 피하기 어렵다. 전멸, 그렇다. 탄차를 끌고 갈 수 있나 없나 하던 임무가 이제는 떼죽음이냐 아니냐를 목전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겨울이 지척이었다. 인간에게만 가혹하고 잔인한, 진짜 겨울이 목덜미에 아가리를 바투 들이대고 있었다. 레인저들은 하나 둘 이를 갈기 시작했다. 잇몸이 무릎 꿇고 사이사이 피가 들끓을 만큼, 보우건을 놓치지 않는 한 끝난 건 아니라고 악다구니를 쓰면서.


  일리아나는 뜀걸음이 느린 친구를 팔짱에 매달다시피 끌고 본능이 가리키는 대로 치달렸다. 충분히 학익진을 펼치기 전에 노려진다면 명사수고 뭐고 개죽음을 피할 수 없으리라. 왼손으로는 지향사격 태세를 갖추었지만 여차할 때 아무 쓸모 없다는 건 스스로가 더 잘 알았다. 거칠게 나부끼는 눈바람 한 끗 한 끗이 부란인지 쇄도하는 밴시인지 알 길 없었다. 어디! 어디야! 거친 숨에 입마개가 고드름 덩어리가 되도록, 싸늘한 올무는 음산하리만치 단단했다.

comment (2)

까치우
까치우 18.11.23. 23:05
“어찌나 눈구름이 두꺼운지 그 끄트머리에서 수선을 내려 어둠의 경계선으로 삼을 수 있을 것 같았다.”가 어떤 의미인가요?
느낌표 좋군요
Naufrago 작성자 까치우 18.11.27. 01:13
적란운 따위가 아주 두꺼우면 멀리서 그림자를 볼 수 있겠죠.
권한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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