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소설회랑

애프터글로우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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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1:11 Nov 27,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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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Naufrago
협업 참여 동의 아니오

  그 때, 일리아나는 보았다.


  파랗게 피어오르는 눈을. 안광인지 냉기인지 모를 것으로 이글거리는 눈을! 주마등이 스쳐 지나갈 새도 없이, 싸우는 기계인 양 몸뚱이가 생각보다 앞질러 나갔다. 크랭크가 덜그럭거리며 달군살이 물렸다. 결로가 순간 기화하며 아지랑이가 와락 터져나왔다. 방아쇠만 달싹거리면 돼! 하지만 결국 쏘지 못했다. 메르세데스가 달려들어 그녀를 덮쳐 쓰러뜨렸기 때문이다.


  설종은 내뻗은 보우건을 결딴내며 비껴 갔다. 두 소녀는 형편없이 튕겨 나가 하룻눈에 메다 꽂힌 꼴이 되었다. 발작적으로 허우적거리던 일리아나는 눈을 거칠게 쓸어 내고 짝궁을 찾아 내, 어깨를 모질게 내리눌렀다. 미친년, 카테터 빠진 년, 시체이끼, 겨울 창녀, 얼어죽은 설종…….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 온갖 욕을 돌아가며 내뱉을 생각이었지만 그만 입이 고드름에 꿰인 듯 우뚝 멈추고 말았다. 이제 완전히 하얘진 눈이 순간 보석처럼 빛을 냈기 때문이다.


  뭘까, 무언가 다른 걸 보기라도 한 것일까?


  메르세데스는 턱만 달싹거리고 있는 친구에게서 입마개를 벗겨 냈다. 자기 것도 벗어던졌다. 자지러진 눈토끼처럼 숨만 가쁘게 쉬고 있었다. 일리아나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무, 무슨……. 왜, 왜 그랬……. 왜 그랬어? 왜?」


  「알잖, 아……? 그렇게 쏘면, 우리가 죽, 었어. 죽었……. 다고.」


  정론 앞에 이끼 먹은 벙어리가 될 밖에. 약점을 노려 쏘는 게 아니면 거죽이 뚫릴 리가 없다. 일리아나는 허탈하게 하룻눈에 몸을 던져 버렸다. 다리가 통제불능이었다. 그들은 레인저라지만 고작 삼 년 차 애송이였다. 죽음이 이다지도 지척에서 번뜩였던 적이 있었을까, 겨울에 집어삼켜진다는 말이 어느 때보다 생생했으리라.


  허나 애송이라도 명색이 단련된 전사들이었다. 일리아나도, 메르세데스도 곧 원기를 끌어내 오뚝 섰다. 숨은 여전히 가빴지만.


  「어떡할 거야? 이제 우리……. 다른 레인저 찾아야 돼. 응, 대장님 쪽으로……. 」


  「내 보우건, 네가 들어. 여기.」


  동문서답이었고 황당한 말이었다. 무기는 주고받는 물건이 아닌 만큼, 목숨보다 손에서 먼저 떨어져서는 안 되는 만큼.


  일리아나는 정색했지만 메르세데스는 그저 실실 쪼갰다. 이번에는 화가 치밀었다.


  「왜 네 걸 내가 들고 다녀?」


  「보면 몰라? 나, 방금 오른팔이 부러졌다고. 자, 봐.」


  메르세데스는 팔을 억지로 들어 보였다. 채 한 치도 못 올라가고 신음이 터져나왔다. 아, 일리아나는 망연자실했다. 두 소녀가 산 대신 레인저 친구가 스러지고 말았던 것이다. 어처구니없게도 그녀 역시 피식 웃어버렸다. 이렇게까지 설상가상일 수는 없지 않나, 사실 숙영 중에 머리통이 얼어 나쁜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실없는 건, 오히려 일리아나 쪽인지도 몰랐다. 메르세데스는 웃는 얼굴 그대로 친구를 잡아끌었다. 미간이 으슬으슬 꿈틀거리는 양이 고통을 참고 있는 게 분명했다.


  「따라와.」


  「네가 뭘 앞장서려고 그래? 소리 안 들려? 아무렇게 달려들면 밴시 아가리로 가든 우리편 달군살에 얻어맞든 할 거라고.」


  「따라와, 좀. 내가 걸을 수 있을 때.」


  메르세데스는 끙, 하며 아랫입술을 물었다. 부르텄던 입술이 주르륵 금 가며 발갛게 반들거렸다. 체력이 조금만 더 떨어져도 자리보전하는 신세가 될 것 같았다. 일언 반구도 않았지만, 적어도 일리아나에게는 호소하는 데가 있었다.


  친구가 마지막으로 손잡고 같이 죽자 할 리는 없을 것 같았으니까.


  작은 노스윈드는 뽀얗게 입김을 피우면서, 또박또박 물었다.


  「설상전투 교범 기억나지?」


  「갑자기 교범은 왜?」


  「부란이나 극안개로 시계가 극히 제한될 때, 전장 선택은 어떡해야 돼?」


  일리아나는 입을 삐죽거렸다. 그걸 아니까 방금 잔소릴 했지! 괜히 툴툴거리는 대신 그녀는 정답을 외었다.


  「능선 방향으로, 저지대보다는 고지대 방향으로. 정신없이 뛰다가 설종보다 크레바스에 먼저 죽게 되니까.」


  「그래. 그러니까 우린 그레이트 크랙 쪽으로 내려가자.」


  「……묻긴 왜 물은 거야? 머리통이 얼어버리기라도 한 거야?」


  들어 황당해도 허튼 소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일리아나는 혀를 내둘렀다. 메르세데스는 여전히 능청스레 진지했다.


  「팔 병신 끼고 교범대로 하려고? 뭐, 네가 나 버리고 설상기동해서 위험하게 따라잡을 생각이면…….」


  「팔 병신은 무슨 팔 병신? 재수없는 소리 하지 마, 계집애.」


  일리아나는 진저리를 쳤다. 살아남는다, 둘이 같이. 지금까지 그랬고 언제까지나 그럴 것이다.


  「말 안 들으면 어쩌나 했는데. 낙오됐으면 낙오된 대로 살 길 찾아야지, 안 그래? 동료들이 밴시한테 이기게 해 달라고 기도만 할 게 아니면.」


  「그레이트 크랙 쪽으로……. 너, 탄차 찾자고 한 거지?」


  「응. 그거 말고 더 좋은 수, 있어?」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휘몰아치는 부란을 뚫으며 크레바스로 다가가다니, 생전 이보다 미친 짓을 해 본 기억이 없었지만. 꿀꺽 침을 삼키자 긴장으로 목이 따끔거렸다.


  부란이 하나 둘 겨울에 스러지고 있는 자취를 남김없이 짓부수고 있었다. 제 숨소리마저 아득하여 아찔하리만치 먹먹했다. 낙오자들이, 아우성 어린 침묵 속에서 전황을 알아내는 건 불가능했다. 미쳐 날뛰는 북북서풍을 받으며 몇 번이나 쓰러지고 나뒹굴 뿐. 두 소녀는 제 몸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거늘 감히 겨울이 지은 것들 중 제일의 흉물을 향해 다리를 놀렸다.


  이따금씩 사람의 것인지 밴시의 것인지 모를 비명이 조각조각 흘러들었다. 메르세데스는 귀를 틀어막고 싶었지만 망가진 오른팔이 그마저 못 하게 했다. 부상을 면했다면 좀 더 참아낼 수 있었을까? 격통에 정신이 한 겹 한 겹 벗겨지고 있었다.


  방한포가 극풍 앞에 오만 방향으로 날뛰었다. 이걸 벗어 동댕이치면 편안해질 것만 같았다. 눈신기루가 속삭여 왔다. 소녀는 와락 고개를 저었다. 한 번 유혹에 지는 순간 설상복을 벗어! 천년설에 드러누워 버려! 포기하면 편해질 거야! 영원히 잠들 수 있다고! 그렇게 환청이 눈보라처럼 몰아닥치리라. 지레짐작만으로도 어찌나 황홀한지 메르세데스는 야릇하게 웃으며 부들부들 떨었다. 카테터가 축축해졌다.


  눈물이 서리가 되었다. 하얀 눈 위에서 몇 큐빅의 얼음조각이 되고, 이내 눈바람에 스러져 갔다. 그 앞에 일리아나가 없었다면 진즉 뇌수부터 겨울 아가리에 처넣고 말았으리라. 메르세데스는 노즐을 당겨 물고 앙다물었다. 제 체액을 걸러 만든 식수도 쿰쿰하기는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생명이 느껴졌다. 아직 살아 있으니까, 두 명이니까.


  부상자가 있어 느렸고, 크레바스에 다가간다는 두려움으로 더 느렸다. 반 시진이나 체온을 빼앗겨 가며 부란을 횡으로 돌파한 그들 앞에 거뭇한 그림자가 우뚝 섰다. 탄차였다. 길을 열던 일리아나는 싱숭생숭했다. 이런 시계 속에서 이렇게 곧장 올 수 있다니! 허나 감상은 어떻게든 살아남으면 백 번 천 번 떠벌릴 수 있는 법.


  두 소녀는 곡소리를 내는 몸뚱이를 레인저답게 다스리며 우선 움직였다. 거뭇한 그림자였던 것에 손을 내뻗어 닿을 만큼 다가갔다.


  처참했다. 난방로가 망가진 탄차는 싸늘한 쇳덩이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아무래도 밴시가 발톱으로 앞창을 결딴낸 것 같았다. 앙상한 골조 안으로 구멍 숭숭 뚫린 시체가 벽에 메다 꽂힌 채 시뻘겋게 얼어붙어 있었으니까. 호송대가 어찌 전멸했는지 알 길 없었지만 적어도 탄차 주변에서 격전이 일어난 것만큼은 분명해 보였다.


  일리아나는 입을 가린 채 고개를 숙였고, 메르세데스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겨울을 들이받은 레인저들, 따뜻한 곳에서 잠들길.」


  설장은 물론이거니와 조의에 나누어 쓸 시간조차 없었다. 두 소녀가 탄차를 찾은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 차체에 거치된 발리스타건을 쓸 수 있다는 것. 눈폭풍에 사흘쯤 방치된 물건이 성할 리 없으니 어서 총열을 녹이고 달군창살을 물려야 했다. 


  여차저차 이야기도 없이 역할이 나뉘었다. 한쪽 팔이 성하지 않은 메르세데스는 작열탄을 꺼내러 갔다.


  간간이 들리던 비명이 끊겼다. 대원들이 전멸한 걸까? 그저 전장을 반대로 가로지르며 멀어졌기 때문인 걸까? 애써 불길한 생각을 흩었다. 어디 소문난 집단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안버스 하이브를 지켜 온 사람들이니까. 하지만 한 손으로 화물칸을 따고 작열탄을 주워섬기는 건 고로운 일이어서 괜히 우울함이 고개를 불쑥불쑥 들었다.


  포탑으로 올라가자 일리아나는 무심한 얼굴로 무심하지 않은 이야기를 해 왔다.


  「빨리 줘, 작열탄. 이거 고치는 데 좀 시간 걸릴 것 같아.」


  「왜, 어디가 문젠데?」


  「눈이 엉겨붙어서 다 얼었어. 총열이고 약실이고 그냥 얼음덩어리야. 탄차 난방로가 꺼졌으니 달군창살도 멀쩡한 게 없고…….」


  메르세데스는 가져온 연료를 모조리 쏟고 되는 대로 점화했다. 수백 아티카가 한순간에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얼어붙은 발리스타건을 분해할 수가 없어 임시방편으로 작열탄 조각을 집어 가까이 들이대고 있어야 했다. 여기저기로 물이 샜고, 바닥에 떨어지기 무섭게 도로 얼어붙었다. 내부는 흥건하게 엉망이 되어 있으리라.


  식은땀이 흘렀다. 얼음을 녹이고 긁어내는 시간은 차치하더라도 격발이 제대로 될 지부터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두 소녀에게 시간이 얼마나 있을까? 겨울은 한 번 동댕이친 인간을 순순히 놓아주는 법이 없다. 그 하수인인 밴시는 오죽하랴. 살점과 피 냄새, 알량한 온기를 좇아 분명히 올 것이다. 계집애건 늙은이건 장정이건, 그 악독함 앞에 공평하리라.


  동료들이 밴시를 사냥하고 탄차를 찾아 오진 않을까? 낙관론이란 애초부터 고려에 없었다. 레인저답게 악착같이 살아남을 궁리를 할 뿐. 일리아나는 허겁지겁 약실을 뜯어 노리쇠뭉치를 들어냈고 장갑마저 벗어버린 채 손질을 시작했다. 손이 곱다 못해 시뻘겋게 부르트는 와중에도 시시각각 삭풍이 뒤틀리며 낄낄거렸다. 메르세데스라고 놀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제 부서진 팔에서 열이 오르며 몸 가누기도 만만찮았지만 총열이라도 녹이고 있어야만 했다. 살고 싶으면, 아니, 살 가능성이라도 찾고 싶으면!


  작은 노스윈드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며 침묵을 깼다.


  「나갈 것 같지, 아나?」


  「해 봐야지, 뭐. 맛이 갔으면 죽기밖에 더 하겠어?」


  일리아나는 손이 녹으면 후닥닥 부품을 손질하고 도로 얼면 작열탄 위에서 휘적거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괜히 퉁명스러웠으나 그만큼 진심이었다.


  뭐가 그리 좋은지 메르세데스는 또 웃기 시작했다. 두개골이 띵한 눈바람 속에서도 그 교소(巧笑)는 희한하게 또렷했다. 실없는 것도, 단념한 것도 그저 대중없이 쪼개는 것도 아니었다. 마치 극지의 태양처럼 없는 듯하나 분명히 있는 데가 있었다.


  「우린 살 거야.」


  「파이팅 한번 하자고? 뭐, 그것도 좋겠지. 대장님은 별로 안 좋아하시겠지만.」


  「딱히 그런 건 아니야. 그냥, 그럴 것 같은 예감이 들어.」


  「그래? 그건 더 좋네.」


  일리아나는 겉보기에만 심드렁했다. 자기까지 거들 필요는 없는 이야기였으니까. 근본 없는 계집애 둘이 꾸역꾸역 헤쳐 나온 건 이런 모진 어우러짐 덕이라고 생각하니까. 자신도 비슷한 예감이 들었다는 걸 애써 무시하면서.


  겨울이란 놈은 모질다.


  그저 인간을 편히 내버려두는 법이 없다 하여 모진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휘몰아쳐 인간과 가루기에 모진 것도 아니다. 꼭 한 끗 희망을 주고서는 비참하게 얼려 부수기에 모진 것이다.


  약실에 달군창살을 물리고 노리쇠를 잡기가 무섭게 삭풍을 따라 살기가 도사렸다. 일리아나는 겨울의 악의에 이를 갈았다. 옆에서 쇠 부딪치는 텅 소리가 났다. 메르세데스가 제 보우건을 가져와서는 총안에 걸쳐 놓고는 낑낑대고 있었던 것이다. 성한 손이 하나뿐이니 쏘나 마나이리라. 하지만 포핸드가 안 되면 백핸드로, 그마저도 여의찮으면 발이든 턱주가리든 허우적거리며 악다구니라도 쓰고 볼 일이다. 이게 무너진 하늘에서 솟아날 구멍인지, 겨울이 슬그머니 흩뿌린 떡밥인지 또렷이 분간할 재주를 타고 난 적은 없으니까, 일리아나도, 메르세데스도!


  밴시, 팬텀, 스펙터……. 설종에게 종마다 유령 같은 이름을 붙이는 건 괜한 일이 아니다. 눈, 북풍, 눈사태, 눈신기루 등 여타 겨울의 가호 속에서 쏜살같이 치달리는 짐승이 어찌 귀신처럼 보이지 않을까? 그 중 밴시는 두 소녀에게 가장 익숙한 종이었다. 네 발로 뛰기도, 두 발로 서기도 하는 그 놈은 새하얗고 뻣뻣한 갈기를 드리우고 있어 섰을 땐 마치 거대한 여인처럼 보이는 끔찍한 족속이다. 온갖 겨울바람의 뒤틀림을 밴시의 포효라 하는 게 괜한 일이 아닌 것이다.


  일리아나와 메르세데스는 잔뜩 긴장한 채 하얀 눈을 굴리고 있었다. 밴시가 다가온다. 두터운 부란 속에서 실마리가 되는 건 시리디시린 안광뿐. 낮은 높이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높은 높이에 우뚝 서서는 한참을 멀뚱한 모양이 이쪽을 의식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정신을 어지럽힐 셈인지 경계하고 있는 건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피가 말랐다. 한 발, 딱 한 발. 정면 쇄도하는 밴시가 차탄을 장전할 시간 따윌 주지는 않을 테니까. 이쪽에서 두개골을 깨부수든, 저쪽에서 발톱으로 꿰든 크레바스로 떨어트리든 눈 깜짝할 새에 끝장이 나리라.


  일리아나는 침 넘기는 건 고사하고 숨조차 얕게 쉬어 떨림을 죽였다. 잠깐 꿀꺽, 하는 순간에 조준이 흐트러지고 탄도를 망칠지 모른다. 가늠자와 가늠쇠로 들여다보이는 엔셀라티카가 싸늘했다. 눈과 칼바람, 서리와 결로가 언제는 상냥했겠는가마는 자신과 친구의 목숨이 이 작은 울에 갇혀 한 순간 한 찰나에 달렸던 적은 없었다. 같이 살아남자고 작당한 그 날 이후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이번에는 그녀에게 맡겨진 것이다.


  날숨이 총몸 위에 얼어붙어 새하얗게 내려앉을 때까지 끔찍한 대치가 계속되었다. 야수의 기만이 이기느냐, 레인저의 설맹이 이기느냐, 이야기는 단순하나 그만큼 밴시는 교활했다. 알고 있는 것이었다. 레인저를 수 명이나 쓰러뜨렸을 테고, 그 수만큼 뇌수를 씹어 삼켰을 테니까! 이 허여멀건 살덩어리들이 지치고 조급하다는 걸 맛보았을 테니까! 몇 분이고 몇 시간이고 어슬렁거리며 포탑에서 헛손질하기를 기다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식은땀이 흘렀다. 겨울 같은 놈, 지독한 놈 같으니라고!


  그 때, 통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메르세데스의 오른손이 총안 벽을 두드리고 있었다. 사람 말이 아니었지만 명쾌했다. 당연하지만 이상하리만치.


  거의 동시에, 곁에서 보우건이 격발하며 뻘건 궤적이 눈폭풍을 파고들었다. 메르세데스의 팔 상태만큼이나 매가리 없는 달군살이었다. 허나 설종조차 이런 긴장 속에서 공포(空包)를 쏘리라고는 여기지 않았던 것 같다. 안광이 치달리며 진짜 밴시의 포효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매서운 부란 속에서조차 살벌함이 또렷했다. 삽시간에 체고 삼 미터 눈짐승이 시계 안으로 들이닥쳤다. 눈이 더덕더덕 얼어붙은 갈기 다발이 몽둥이처럼 휘날렸고 기다란 아가리에서 풍기는 썩은내가 포탑 안까지 파고들었다. 밴시! 일리아나의 눈이 다이아몬드처럼 까마득하게 빛나고 있었다. 뒤로 쭉 뺀 앞발도, 무시무시하게 덮쳐 오는 기세도 그저 잠시 멈춰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람은 설종보다 느리지만 사람이 날려 보내는 건 어느 쪽에 비할 것도 못 된다. 아마 저 낯짝이 사람을 닮았다면 낭패로 까매진 꼴을 잠시나마 볼 수 있었으리라. 발리스타건이 불을 뿜었다. 동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순식간에, 달군창살이 턱뼈를 아래로 깨부수며 모로 두개골을 뚫고 튀어나갔다. 두 소녀는 이글거리는 호가 보인다고 생각했다. 핏덩이가 흩날린다. 고기 끓는 냄새가 나는 것도, 단말마에 고막이 찌르르한 것도 같다. 


  그러나 더 확실한 건, 절명한 몸뚱이가 그대로 덮쳐 왔다는 것뿐이었다. 엄청난 기세로 포탑에 머리를 찧었고 탄차는 그대로 그레이트 크랙 아래로 기우뚱했다. 아무 것도 들리지도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저 하늘 위에 멀뚱한 빛무리가 멀어져갈 뿐. 메르세데스와 일리아나는 죽음이란 게 이렇지 않을까, 하며 의식을 놓쳤다.

comment (2)

까치우
까치우 18.11.29. 01:22
추운 이야기를 읽으니 「테러호의 악몽」이 떠오르네요. 낱말을 낯설게 사용하는 게 독특하군요.
AERO
AERO 18.11.29. 10:49
다음편이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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