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소설회랑

그래서 그들은 지하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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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25 Dec 08,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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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Rogia
협업 참여 동의

그녀는 비명을 지르지도, 도망가지도 않았다. 

나의 빈약한 발상력으로는 이 두 가지의 선택지 외의 다른 행동은 떠올릴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가 나에게 천천히 다가올 때 ‘완전히’라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패닉에 빠졌다.

딸그락- 금속 날붙이가 바닥에 떨어진 소리는 어두운 복도에 울린다.

어느샌가 힘이 풀린 내 손아귀에서 빠져나온 칼이 낸 소리였다. 이 당연한 사실이 약간의 시간차로 이해되었다.

불 하나 켜져 있지 않아도 구름이 개인 밤하늘의 보름달은 복도 저 멀리에서 다가오는 소녀의 실루엣을 내리비추기에 충분히 밝았다. 너무 느리지도 않게, 그렇다고 초조함이 느껴지는 빠른 걸음걸이도 아닌, 그야말로 일상처럼 소녀는 위아래 체육복에 실내화 차림으로 터벅터벅 걸어왔다.


“야. 이거. 네가 한 거야?”

“이… 이거?

“응. 이거.”


소녀는 턱끝으로 지호였던 것을 가리켰다.


“이번 주까지는 내가 당번인데 어, 지금 우리 반 복도를 피칠갑으로 만들어버린 이 파렴치한 짓을 한 게 너냐고 물은 거야. 2학년생.”

“네, 마, 맞아요...”


아아. 난 왜 이렇게 멍청한걸까.

방금 그 말이 범행 자백을 하는 꼴이라는 걸 머리로는 알았다. 머리론 알았지만 입으로 나오는 말을 주워담을 수 없었다. 내게는 이 뜻밖의 상황에 바로 대처를 할 만큼의 여유가 남아 있지 않았다.

내 손으로 저지른 일이지만, 내가 감당할 수 없었다.

마치 춤이라도 추는 것 마냥 기묘하게 허리를 뒤틀고 죽은 지호에게서 나는 시선을 돌렸다.


지호, 였던 것.


문방구용 커터칼은 너무 가느다래서 조금만 힘을 줘도 부러진다. 공업용 커터칼을 쓰자. 손가락 두 마디 정도로 칼날을 내밀고, 정신없이 여기저기 마구 찔렀다. 얼굴은 너무 아플 거 같아서 못 찔렀지만.

어두운 게 다행일지도 모른다. 하얀색 와이셔츠가 짙은 빛으로 물들어졌고 의외로 피비린내는 느껴지지 않았다. 코가 둔감해진 덕분이었다. 눈을 부릅뜬 채. 입에는 거품을 물고, 고통에 온몸을 비틀어선지 손발이 괴이하게 꺾인 채, 지호는 자신의 피웅덩이에 빠져 있었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내 가슴을 주무르고, 허벅지를 쓰다듬으면서, 역겨운 숨과 욕설을 내쉬던 존재라는 걸 믿을 수 없었다.

시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소녀는 이윽고 나를 보았다.


“왜 죽였어?”

“예?”

“궁금해서 물어보는 게 아니라 알면서 물어보는 거야. 이 새끼가 몹쓸 짓이라도 했지?”

“으, 으응…….”


긴장의 끈이 풀렸다. 느슨해진 감정을 헤집고 여태까지의 쌓인 기억이 솟구쳐 올라왔다. 생판 남에게 할 이야기는 절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두서 없이 나혼자 억울한 일을 털어놓는 게, 소녀의 입장에선 시시한 일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 그래그래. 그런 거였구나.” 라고 말한 소녀는 폰을 꺼냈다.

그걸 보고 나도 모르게 어깨가 움찔했다. 내 입에서 말로 완성되지 않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으, 우으으….”


이런 나를 보던 소녀의 고개가 살짝 옆으로 기울었다.

당연히, 뻔히 알면서도 모르는 척, 조금 멍청한 척, 덜떨어지는 척해도 나도 내가 저지른 짓이 어떤 건지 알고 있었다. 이제 곧 경찰이 출동한다. 나는 체포가 되고, 인터넷에서 끝없이 씹히고, 재판을 받고, 판결을 받고, 감옥으로 간다.

이제 그 1단계가 시작되려는 참이다. 마음의 각오는 했을 줄 알았는데.

내 손발이 말도 안 될 정도로 덜덜 떨리는 걸 본 소녀는 짧게 탄성을 내었다.


“아하!”


표정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웃고 있을 게 틀림없는 음색이었다.


“잠깐 빛이 필요해서 꺼냈을 뿐이야. 플래시 조명은 너무 밝으니까 폰 화면 빛만 쓸 거니까 걱정 안 해도 된다고. 알았지?”


이해가 안 될 말이었다. 애초에 내 이해가 필요하지도 않았겠지만.

한 손으로 폰을 든 소녀는 다른 한 손으로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그리고 조금도 허둥거리는 기색이 없이, 시체의 이것저것을 만지작거렸다.


“교복 상의는 없고. 읏차...”


실내화가 피투성이가 되든지 말든지 시체를 건너뛴 소녀는, 옆으로 비스듬하게 돌려진 바지 옆주머니와 뒷주머니에 있는 것을 꺼냈다.

“와, 남자애들은 진짜 이런 걸 들고 다니구나~”라 말하며 맥가이버 나이프를 능숙하게 펼쳤다가 접고, 소녀는 그대로 자기 주머니에 넣었다. 제법 커다란 크기의 스마트폰도 한번 슬쩍 보더니 마찬가지로 주머니 속으로.

그리고 카드홀더에 들어 있는 뭔가를 소녀는 “호오라.”하는 의미심장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박지호 선배였군. 와꾸(*외모) 좀 반반한 거 믿고 존나 찝적거려서 1학년에서도 별로 소문이 안 좋은 새끼였는데. 언니 건드렸다가 이 꼴이 난 건가?”


그 말에 틀린 부분은 없었다. 그렇지만 뭔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선배라고 했지…요?”

“난 1학년이고 박지호 선배는 2학년이니까. 선배니까 선배라고 불렀는데, 뭐 잘못된 거라도 있어?”

“저기, 나, 나도 2학년인데…….”

“그야 그렇겠지. 네 명찰 색깔이 2학년 명찰색인데.”


아차 하는 사이에 이미 내 학년도 이름도 들켜버렸다. 더 이상 둘러댈 여지가 없는 상황에서 내 입은 엉뚱하고도 가장 궁금한 의문점을 꺼내었다.


“그, 근데 왜 반말해…요?”

“외국에서 자라서 존댓말 할 줄 몰라.”

“지, 진짜요?”

“뻥이야. 중학교 때까지 프놈펜에 있었던 건 진짜지만.”


그렇게 말한 소녀는 지호의 지갑도 마치 자기 것인 마냥 체육복 윗주머니에 넣고,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거의 억지로 나와 악수를 했다.


“내 이름은 루다. 이루다. 외우기 쉽지?”


뭐라고 대답할 사이도 없이 소녀-루다는 금세 악수를 풀었다. 그러고는 지호가 애지중지하던 플래그십 기종 스마트폰을 다시 꺼내서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지문 인식이 되는 거니까 다행이네. 언니. 이 새끼 왼손잡이야 오른손잡이야?”

“아, 아마 오른손잡이일걸요… 아마도.”


특별히 왼손잡이라고 으스대는 걸 들은 기억은 없었다. 만약 지호가 ‘남들과는 다른’ 왼손잡이였다면 이미 소문이 돌고 돌아서 기초 상식으로 되어있겠지. 내 말을 들은 루다는 무릎을 꿇고 앉아서 지호의 축 늘어진 오른손을 쥐었다. 그 오른손의 검지손가락 끝으로 폰의 뒷면을 문질렀다.


“일단 상메(*상태 메시지)부터 다 바꾸고.”


내가 봐도 어마어마하게 빠른 타이핑으로 뭔가를 입력하고, 루다는 그 폰을 나한테 들이밀었다.


“교문은 CCTV가 있으니까 그쪽으로는 가면 안 돼. 서쪽 현관 뒤로 나가서, 소각로 옆 쪽문으로는 없거든. 거기로 나가자마자 폰 전원을 끄고 바로 여기로 들고 돌아와.”

“뭐…하려는 거예요?”

“재미있는 거.”

“재미? 이게 재밌어요?”

“응.” 


루다는 단 1초도 망설이지 않았다. 


“이 새끼를 죽인 건 언니야. 내가 아니라. 그런데 언니. 하윤 언니는, 자수할 생각 있었어?”

“당연히 있었지요. 있긴 있었는데.”

“그치만 안 했잖아.”


소녀의 눈동자가 나를 올곧게 올려다본다.


“자수 안 했잖아. 할 수가 없는 거잖아. 이 새끼가 했던 짓 때문에 언니는 죽을 만큼 괴로웠는데, 그래서 죽기 전에 먼저 죽였는데, 이제 언니에게 남은 건 살인이라는 죄뿐이고.”


소녀는 지호의 피로 젖은 손수건을 아무렇게나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난 하윤 언니를 믿을 수 없어. 죽어도 싼 죄를 지었다고 진짜 죽이는 사람을 어떻게 믿겠어.”


그 말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래도, ‘죽어도 싼 놈은 죽여도 될 거 같다’고 다들 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할 거야.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거든. 언니, 하윤 언니.”


그렇게 말하면서 루다는 커터칼을 주워들었다.


“나랑 같이 청소 하자.”




다음 날, 토요일. 1학년 6반─루다의 반에서 만나기로 한 시간은 정오였다. 신신당부를 들었던 대로 휴대폰은 집에 두고 나와서, 최대한 방범 카메라에 잡히지 않는 길로 학교에 도착했다.


‘모든 CCTV를 피할 순 없어.’


어젯밤 루다는 헤어지기 전에 학교 주변의 안심 경로를 약도로 그려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반드시 피해야 할 것만 피하면 돼. 학교 주변 스쿨존의 CCTV, 그리고 학교 부지 안의 CCTV. 이건 몇 개 안 되니까 조금만 신경 쓰면 돼.’


어째서 그 소녀는 이런 걸 알고 있는 걸까.

1학년 6반으로 향했다. 복도는 언제 그런 참상이 있었냐는 듯 깨끗했다. 지난밤 혼신의 청소가 만든 결과였다. 자세히 보면 아직 물기와 청소 흔적이 군데군데 남아 있지만, 주말이 지나면 이 정도는 사라진다.


“아, 딱 맞춰서 왔구나.”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자니, 루다는 놀라운 옷차림으로 나타났다.


“그…그거 남자 교복 아니에요?”

“응. 부산에 갔다 왔어. KTX 타고.”


아무렇지도 않게 대단한 걸 말하면서 루다는 쇼핑백 하나를 내밀었다.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이걸로 갈아입어.”


오늘이 토요일인 건 천만다행이었다. 그리고 일을 저지른 게 1층인 것도 우연이 만든 기적이었다.

시체는 지하실에 있었다. 들어가기에 앞서 주섬주섬 위생복을 챙겨 입었다. 루다가 마치 급식소 조리 아줌마들처럼 보였다. 아마 루다가 보는 나도 비슷한 몰골이겠지.


“윽─”


문을 열자마자 비릿한 냄새가 풍겨왔다. 생각처럼 코를 찌르는 악취가 풍기거나 하진 않았지만, 누군가의 주의를 끌기엔 충분한 정도의 냄새였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나를 힐끔 쳐다보고, 루다는 여행용 백팩을 맨 차림 그대로 먼저 들어갔다.

여느 학교나 다 그렇듯 우리가 다니고 있는 고등학교의 지하실에도 상수도와 연결된 물탱크 배관 설비와 복잡하게 연결된 파이프, 그리고 콘크리트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는 변전실이 있다. 다른 부분이 있다면 지하 2층이 있었다는 점이었다.

우리가 있는 곳은 본관이고 디귿 자 모양의 건물에서 가운데 획은 행정관이다. ‘지상은 학생을 위해’란 모토 아래에 각종 주차장과 기타 설비가 행정관 지하에 위치하고 있는데 그중 지하 2층에 자리를 잡은 주차장은 본관까지 이어져 있다. 수직적으로 복잡한 구조의 건물은 여러 가지로 쓰이지 않는 공간과 시설이 있기 마련이다. 

루다는 그 부분을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


“오늘 안에 시체를 처리할 거야. 언니. 다리 잡아.”

“아, 으응.


비닐을 넓게 펼치고 그 위로 시체를 옮겼다. 마른 피 때문에 지호의 교복은 피부와 들러 붙어 있었다. 처음부터 곱게 벗기려는 생각은 아니었는 모양인지, 루다는 재봉용 가위로 옷을 슥슥 잘라내면서 조각 조각으로 떼어냈다.


“사후경직이 빠르게 풀렸네. 그만큼 부패가 빨리 진행되고 있으니까, 하루만 더 방치했으면 냄새 때문에 먼저 들켰을지도 모르겠, 어!”


루다가 약간 힘을 주면서 와이셔츠을 당겼다. 지호의 피부가 마치 만두피처럼 떼어내지는 광경은 뭔가 이상한 느낌이었다.


‘이상한 느낌.’


무언가, 현실 도피와는 다른 감각.


“좀 힘들었지만 어제 피를 미리 빼놓기는 잘 했지. 귀찮다고 안 했으면 큰일 날 뻔했어.”


지호의 양 발목과 손목은 이미 잘려나가 있었다.

남 일처럼 말할 건 아니다. 바로 열두 시간 전에 우리가 한 일이니까.

어젯밤 시체를 지하실로 서둘러 옮기고, 피가 말라붙기 전에 서둘러서 복도를 물걸레질로 닦아내었다. 만약, 지금 바로 여기서 본격적으로 경찰이 수사를 시작한다면 여기저기에 흔적이 너무 많아서 감당이 안 될 정도로 엉성한 뒤처리였다.


내가 저지르고.

루다가 도와준 ‘일’이었다.


“어디서 본 거 같지.”

“네?”

“영화나 미드에서 이런 거 자주 나오잖아. 언니는 넷플릭스 안 봐?”


그렇게 말하고 루다는 백팩에서 칼을 꺼내주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 그냥 ‘뼈에 달라붙은 걸 긁어낸다’란 느낌으로. 슥슥. 내가 오른쪽에서 작업할 거니까 언니는 왼쪽에서 해줘.”


그렇게 이제 지호가 여기에 있었던 흔적은 서서히 사라져갔다. 시체를 없애는 건 중노동이었다. 챙겨 온 버너에 물을 끓여서 살점을 삶고, 루다가 챙겨 온 분쇄기에 갈고,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붙은 화장실 변기에 내린다. 뼈는 망치로 대강 부순 후, 마찬가지로 분쇄기로 갈아서 버린다. 정신을 차려보니 온몸이 땀범벅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지호의 머리를 랩으로 둘둘 말아서 배낭 맨 밑으로 쑤셔넣고, 루다는 손목시계를 슬쩍 보았다.


“벌써 6시네.”


여름이 참 낮이 길기는 길었다. 바깥으로는 피에 젖은 위생복과 고무장갑이 안으로는 땀으로 축축히 젖어 있었다.


“여기에 다 넣어야지. 언니, 봉지 좀 벌려줘.”


루다가 꺼낸 건 속이 비치는 주황색 비닐봉지였다. 떨떠름한 내 눈치를 언제 알아차렸는지, 소녀는 봉지에 적힌 글자를 가리켰다.


“일반 의료폐기물 봉투야. 여기에 넣으면 매립지가 아니라 소각시설로 가거든.”

“아하….”

“괜히 쓰레기 봉투에 넣거나 학교 소각로에서 처리했다가는 흔적이 남을 수 있다고.”

“대단하다. 이런 거 어떻게 알아요?”


너무 궁금했지만, 아마도 꺼내서는 안 될 질문이었다. 

이런 생각이 든 건 루다의 눈이 처음으로 내 시선을 피할 때였다.


“평소에 늘 준비하고 상상했거든. 이상하지?”


어째서인지, 만난 이후로 처음으로 ‘고민’이란 게 담겨 있는 말이었다.


“나도 알아. 보통은 이런 짓을 안 하는 거. 하지만 난 언제나 만약을 대비하는 성격이거든. 요컨대 선생 하나를 학교에서 죽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죽인 이후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때. 좀 깨지? 보통은 이런 생각은 안 하잖아. 보통, 언니는….”


비닐봉지에 꼼꼼하게 시체의 옷조각을 넣으면서 말하던 루다가 문득 말을 멈췄다.


“아, 언니는 이미 죽였지.”


그제야 난 내가 터무니없는 사람에게 휘말렸다는 걸 깨달았다.


“어떻게 보면 다행이야. 언니가 아니면 내가 먼저 누군가를 죽였을지도 모르고, 내가 아니면 언니는 넋 놓고 주말을 보내다가 월요일에 그냥 잡혀갔겠지.”

“루다야, 나는….”

“괜찮아. 하윤 언니. 언니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 새끼는 훨씬 나쁜 자식이야. 그러니까ㅡ”

“아니야. 그게 아니라...”

“언니. 난 언니가 잡혀가는 게 싫어.”


만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은 사람의 입에서는 나오지 않을 말이었다.


“나처럼 기분 나쁜 인간과 어울려주고, 이렇게 치명적인 비밀을 죽을 때까지 함께 할 사람은 다시는 없을 거 같아.”


루다의 손이 멈췄다. 조금 전 턱밑부터 손목 끝까지 가리고 있던 위생복을 벗은 루다는 축축한 민소매 차림이 되어 있었다.


“언니가 날 어떻게 생각해도 상관없어. 이번 작업이 끝나고 학교에서 모르는 척 지내도 괜찮아. 그러니까, 이번 작업을 마무리하기 전까지만이라도.”

“난 그런 사람 아니…예요.”


또다.

언제나 이렇다.

나는 그냥 가만히 있을 뿐인데, 남들이 멋대로 나를 써먹고, 나를 받아들인다.


“루, 루다가 생각하는 것처럼 나는 비… 비밀을 잘 지키는….”


이런저런 너저분한 변명이 흘러나오려는 입은 금세 강제로 틀어막혔다. 들을 필요 따위는 없다는 것처럼. 숨이 턱 막힌 건, 입이 막혀서가 아니라 깜짝 놀랐기 때문이겠지.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어느샌가 나는 눈을 감고 있었다. 감긴 눈을 떠보니 루다의 길다란 속눈썹이 보였다.


“하윤 언니. 누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움직이고, 시키는 대로 생각하고. 그런 거는 오늘로 끝내자.”


턱을 단단히 붙잡고 있던 손을 풀었다. 씩 웃으면서, 루다는 부풀어 오른 의료폐기물 봉투를 배낭에 넣었다.

왜 루다는 나를 신고하지 않을까. 

재미로? 아니면 정말로 나에게서 호감과 유대감을 느껴서?

어제는 ‘죄를 저지른 건 자기가 아니니까’라고 했었다. 어제는, 그 말을 믿었지만.


“뒷정리는 다 끝난 거지. 언니. 그럼 슬슬 1층으로 올라갈까?”

“으응….”


자신감에 넘치는 표정은 근거 없는 자만이 아니었다. 준비된 자신감이었다.

그 자신감은 ‘나만큼은 절대 잡히지 않는다’는 것.

이 소녀는 그 날 밤 나를 만나기 전부터, 이미 모든 계획이 머릿속에서 정리가 끝나 있었다. 단순한 계획뿐만이 아니다. 실행에 옮겨야 할 준비물도 사물함 안에 있었다. 조금 전에 루다가 한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을 게 분명하다.


 - 내가 먼저 죽였을지도 모르고.


“언니. 왜 그래?”


아아.

생각을 하면 안 되는데.

오늘까지는, 루다가 생각하는 대로 따라가야만 하는데.


“갑자기 좀 안 좋아 보이는데... 아하, 긴장이라도 풀린 거야?”


큭큭 웃으면서 루다는 내 손을 잡고 복도로 향한다. 거기에 끌려가듯이 발걸음을 옮긴다. 조금도 내키지 않는 발을 내딛으면서 나는 생각해버렸다.

루다의 시나리오엔 살인범이 있고, 피해자가 있다. 피해자는 곧 시체로 바뀐다. 

단지 그 시나리오의 등장인물이 나와 지호로 바뀌었을 뿐이다.


루다의 시나리오엔, ‘조력자’가 없다.


“와, 여기가 어제까진 난장판이었던 곳이라곤 믿어지지 않네. 어제는 정말 육체적으로 힘들었어. 그지, 언니?”


1학년 6반의 복도. 어제와는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시체가 없고, 피도 없다. 지호는 이미 사라졌다. 그렇지만 같은 것도 있었다. 내가 있고, 루다가 있다.


“언니. 나는 언니가 잡히는 걸 원하지 않아. 내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믿어줘.”

“응. 믿을게… 요.”

“나 참, 편하게 말해도 된다니까. 수줍어하지 말고 쫌.”


고개를 숙이고 소녀의 눈빛을 피한다.

수줍은 것도 있었지만 수줍어서가 아니었다. 나는 루다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내가 믿는 건 루다가 아니었다. 루다의 시나리오였다. 그 시나리오가 완벽하다면 나는 잡히지 않는다.


그렇지만, 루다는?

‘조력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그럼 잠깐만 배낭 벗고. 아차차, 배낭에 뭐 묻은 거 없지 언니?”


나는 루다가 매고 있는, 자기 상반신만큼 커다란 배낭을 훑어보았다. 대체 무슨 재질로 만들어진 건지는 몰라도 먼지 한 톨 묻어있지 않았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루다는 안심하고 복도 바닥에 배낭을 놓았다.


“아무리 그래도, 배낭을 메면 재빠르게 움직이기가 어렵지.”

“그, 그럼 이거 내가 메고 갈까….”

“으음~ 그건 좀 힘들 걸.”


그렇게 말하고, 루다는 배낭에서 수건을 꺼냈다.


“언니. 잠깐만 우리 반에 들어와 볼래.”

“으, 으응…?”

“괜찮으니까~ 해야 할 게 있거든.”


루다는 내 등을 떠밀 듯이 밀면서 교실 뒷문으로 함께 들어갔다.

1학년 반이라고는 해도, 작년까지는 내가 다녔던 학년의 반이다. 비슷한 물품에 비슷한 교실이지만 그렇긴 해도 남의 반에 들어오는 건 왠지 모를 죄책감이 든다.


“하윤 언니. 선물.”


루다는 알약이 들어 있는 갈색 약통을 나에게 줬다. 이게 뭔지 물어볼 틈도 주지 않고 막무가내로 루다는 내 주머니에 그것을 넣었다.

그리고.


“읍-”


배가 갑자기 화끈거렸다.

화끈거림은 이윽고 찢어질 듯 쑤셔오는 통증으로 바뀌고, 몸이 새우등처럼 오므라들었다.


“아, 아아-… 아아아…!!”

“미안해, 언니.”


루다는 피가 살짝 묻은 맥가이버 나이프를, 내 배에서 뽑았다.


“언니 손에 방어흔이라도 생기면 안 되니까 어쩔 수 없었어. 힘들겠지만 하루는 버텨야 해. 내일까진 진통제로 참아줘.”

“아... 아파... 루다야...”

“잠깐은 쇼크 반응 때문에 움직이기 힘들 거니까, 내 자리에 앉아.”


의자에 앉은 내 온몸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책상에 엎드린 채, 손으로 상처는 더듬었다. 배꼽에서 왼쪽, 갈비뼈 아래가 칼로 쑤시듯이 아팠다.

아아, 진짜로 쑤셔진 건 안다.

알면서도 현실에 바로 매치가 되지 않았다.


“깊게 찌르진 않았으니까 죽진 않을 거야. 흉터도 거의 안 남을 걸. 그러니까 진정이 되는 대로 곧장 집으로 가. 알았지? 지혈은 금방 될 테니 그때까진 이걸.”


루다가 내민 걸 받을 힘조차 팔에 들어가지 않았다. 소녀는 내 곁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내 손과 상처 사이에 억지로 수건을 쥐여주었다.


“잘 들어. 언니. 이건 ‘그 새끼’가 찌른 거야.”

“으그윽-…”

“나이프도 두고 갈게. 집에 꼭 가져가. 이거 월요일에 언니가 증거로 내야 하니까.”


아무리 나라고 해도 그 말만큼은 반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증거’라니.

지금까지 우리가 열심히 증거를 없애고 있었는데, 지금까지의 짓은 무엇이 된다는 거야?


'루다, 너 지금 나한테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이렇게 당장 따지려고 싶었다. 마음만큼은 그랬고 몸이 따라주지 않을 뿐이었다. 단지 작게 움츠러들어서, 다람쥐처럼 동그랗게 말려 들어가며 부르르 떨 뿐이었다.


“그 새끼가 금요일 저녁에 언니를 찌르고, 언니가 죽은 줄 알고 도망간 거야. 흉기를 언니 배에 꽂은 채로.”


땀기가 하얗게 말라붙어 있을 내 목을, 루다는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니는 병원에 가지 않았어. 그대로 그렇게 주말을 집에서 보내다가 일요일에는 병원, 월요일에 학교에 와서 선생님한테 말하는 거지.”

“뭐… 뭘 말해야 하는 거… 예요?”

“언니의 이야기.”


그렇게 말하고, 루다는 일어섰다.


“그 이야기에 나는 없어.”


그대로 루다는 복도로 나갔다. 실내화가 콘크리트 바닥을 치는 나박한 발걸음 소리는 점점 멀어진다. 나는 교실에 혼자 남았다.

저녁놀이 창가를 채운다. 적란운이 흩어진 여름의 하늘은 불타오르고 있었다. 유리창은 닫혀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바람이 불어오는 듯한 기분이 든다.

욱신거리는 통증은 여간 사라질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주머니에서 약통을 꺼냈다. 아스피린 두 알을 입에 털어 넣고, 시린 맛에 눈물을 흘리면서 억지로 식도 아래로 삼켜 넣었다.

한 번만 찔려도 이렇게 아프구나.

이런 걸, 나는 지호의 배에 몇십 번이나 들락날락 시킨 건가.

배, 가슴, 그리고 혹시 안 죽으면 어쩌나 싶어서 목도 찔러넣었다.

얼마나 아팠을까. 그리고 얼마나 무서웠을까.

죽어도 싸지만, 죽여버리고 싶었지만, 그래서 진짜로 죽였지만, 지금 느끼는 이 고통보다 훨씬 아팠다는 거였지. 그제서야 나는 지호가 조금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약간의 후회를 담아 중얼거렸다.


“목만 찌를걸….”




한 차례 시끄러운 교내 조사와 상담이 지나간 후, 결과적으로는 루다가 의도했던 대로 일이 흘러갔다.

원래는 ‘대단히 큰 문제’였다. 그도 그럴 게, 남학생이 여학생을 찌르고 도망간 거니까. 그렇지만 이 소문이 퍼지지 않도록 입단속을 시키는 건 학교 입장에서는 어렵지 않았다.

지호에겐 많은 친구가 있었지만 그들이 아는 것도 ‘지호가 갑자기 가출했다’는 것 뿐이었다. 나는 친구도 부모도 없는 낮은 성적의 문제아 하나였다.

입시 명문 고등학교의 명예를 운운하면서 지도부장 선생님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그냥 덮자’란 개소리를 길게 지껄였고, 난 한 마디 말도 꺼내지 않았다. 고개만 몇 번 끄덕인 걸로 지호는 여름방학이 코앞에 다가온 겸 혼자서 가출한 게 되었다.

그 뒤에 훨씬 더 큰 문제가 있는 걸 아는 건 나와 루다 둘 뿐이었다.

루다가 나에게 다시 말을 건 건 두 달 후였다. 

하복이 지나가고 춘추복의 시대가 도래한 2학기 초, 북적거리는 매점에서 어느샌가 내 옆으로 다가온 루다는 무언가를 나에게 건네주었다.


“선물인데 오다가 주웠어.”


단 한 문장 안에 앞뒤가 안 맞는 말을 하고.


“오늘 저녁에 봐.”


내 손등을 살짝 꼬집고 매점에서 훌쩍 나갔다.

선물은 감사히 받아야지. 반창고를 보고 살짝 웃은 나는, 선물 리본에 예쁘게 감싸여진 편지를 펼쳤다. 그리고 가슴 속에서 솟아오르는 미소를 참을 수가 없었다. 편지엔 시원시원한 필체로 짧은 글이 적혀 있었다.


[내 청소 좀 도와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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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Rogia

Rogia

SPRING IS COMING

comment (1)

캘빈
캘빈 18.12.09. 16:35
섬뜩했지만 엄청 몰입해서 읽었네요. 결말 한 방까지 참 좋았습니다. 잘 읽고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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