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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프터글로우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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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0:04 Dec 11,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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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Naufrago
협업 참여 동의 아니오

  붉은 지구라트는 실상 겉만 붉은 건물이다.


  외장에 붉은 화강암을 덧대어 마감했을 뿐 검은 돌산을 통째로 깎아 만든 성전 내부란 시커멓게 칙칙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성화 교단에서는 그런 모습이야말로 불의 표상이라 여겼다. 불과 재는 서로가 서로의 이면인 법, 사방팔방 이글거리는 것이 오히려 본질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물론 북풍이 수시로 눈발을 이끄는 이곳에서 외벽만이라도 줄곧 그리 하는 일이란 보통이 아니다. 연중 내내 하룻눈을 치우고, 얼음을 깨고 망가진 석재를 곧장 갈아주어야 하니까. 그러니 창건 이후 한 번도 어딘가 흐려지지 않았음을 교세의 방증으로 삼아 무리 없으리라. 나날이 제 생업에 더해 교단에 봉사하겠다는 자가 끊이지 않는다는 것일 테니.


  지구라트 내부의 난방은 탄탄했다. 엔셀라티카 사람들이 으레 열을 재물과 같이 여긴다면 교단 형제자매들은 거룩한 것으로 여기니 당연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냉기를 씻고 생기를 부여하는 것이 어찌 성스럽지 않으랴? 또 성스러운 것을 어찌 가까이하지 않으랴? 때문에 교단 총본산은 불의 신성성을 좇아 난방의 중핵 기능을 하도록 되어 있고, 지구라트를 중심에 두고 뻗어나가는 보일러관과 여러 부속지의 단열 조치가 의식적으로 집요했다. 그 중 알렉산더 하이브와 공동지로 연결된 극지물류동맹 가맹시들과는 난방 설계 철학이 정반대라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기반시설에의 여열을 제거하여 보통난방 효율을 끌어올리는 방식 말이다. 아마 알렉산더의 난방기술자라면 위험하다며 질겁하리라.


  난방탑과 작열로는 재점화에 막대한 비용이 든다. 만약을 위해서라면 중핵에서 잉여 열이 순환하게끔 조치해야 한다. 만에 하나 꺼지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그럼에도 이런 상식에 역행하는 시스템을 채택한 이유란 바로 교단의 위세 때문이었다. 성스러운 불 앞에 평등하며 그 열기 앞에 안식 있으라, 누구는 땀 흘리고 누구는 얼어 죽는 여타 하이브와는 달리 정말로 전 신도가 적어도 떨지 않을 만큼은 몸을 데울 수 있게 하고 있으니까. 성스러운 불을 믿는 자라면 누구든 그렇게 품어야만 하는 것이다. 실 뭇사람들에게 성도 루스카야가 겨울 앞에 낙원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이제 성도 바깥에까지, 끓는 작열탄처럼 교세가 일고 있었다. 


  성화 교단은 이런 부름에 대답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제 내실 다지기를 넘어 전 엔셀라티카로 뻗어 불로 인간을 구원하리라, 그야말로 성화 혁명을 일으킬 때가 되었음이라. 그리하여 중차대사를 논의하기 위해 교단 수뇌부가 빠짐없이 붉은 지구라트에 모여들고 있었다. 성무로 루스카야 하이브를 떠나 있던 자들까지 전원. 평신도들에게는 붉은 설상복 차림의 고위 사제를 이다지도 많이 볼 날이 있을까 싶은 날이었다. 대개 방한 두건을 깊숙이 써 누가 누구인지 알 길 없었으나 한 명만은 분명했다. 별달리 말하지도, 유별나게 굴지도 않았지만 뚜렷하게. 타오르는 후광을 가진 그녀의 이름은 선지자 이브제니아였다.


  이브제니아는 북서풍을 타고 내리는 하룻눈처럼 사뿐사뿐 걸었다. 곧 성화 공회의 정각이 될 터이나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물론 무심하거나 지각없는 건 결코 아니었다. 한 끗 한 끗 어떤 계시에 따라 움직이기라도 하는지 그야말로 확신 그 자체였던 것이다. 성전을 보살피던 예사 사제나 봉사자들은 그녀가 나타나고 사라질 때까지 손을 멈추고 눈으로 좇았다. 불이란 눈 떠 지켜보아야 비로소 밝은 지 아는 법, 그렇다면 불의 화신 또한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대전당에는 벌써 승정들이 배석해 있었다. 이브제니아가 입당하기가 무섭게 비슷한 유난을 떠는 고위 사제들이 있었다. 예언자를 추종하며 구원파라는 분파에 속한 치들이었다. 이들은 뭇사람들보다 한 술 더 떴는데, 벌떡벌떡 일어서 절하기가 예사요 오열하며 북받쳐 울기 직전인 자까지 더러 있었다.


  “불길의 은총을! 이브제니아시여, 오랜만이나이다.”


  “아나톨리 승정, 사 년 하고도 넉 달 하루 만이네요. 저도 다시 뵈어 좋습니다.”


  “이브제니아시여, 성스러운 불길이 임하시길!”


  “당신에게도, 타티아나 승정.”


  “오오, 선지자시여! 성화를 당신께…….”


  “여러분, 이대로 서로 성화의 축복을 바라는 것도 좋지만 할 일이 많습니다. 대선지자 이고르께서 오늘을 얼마나 고대하셨는지 모르는 분은 없겠지요.”


  선지자는 자애롭게 일일이 인사를 받아줄 기세였으나 곧 휘어잡고 갈무리해버렸다. 친교회나 자신의 설법 자리도 아니거늘, 대선지자 앞에서 주목을 독차지하는 결례는 이쯤으로도 과한 감이 있었다.


  제 이름이 나오자 대선지자가 천연덕스럽게 나섰다.


  “이브제니아, 당신에게 감출 수 있는 건 없지 않나 싶소.”


  “또 일어서야 할 테니, 그만 앉도록 하겠습니다. 아, 공석 하나는 괘념치 마시길. 미로슬라브 승정께선 부란에 끊긴 길 덕에 입당하기 어려우실 것 같습니다.”


  이브제니아는 참으로 태연하게 툭 던진 투였으나 전당에 다시 한 번 술렁거림이 찾아왔다. 이글거리는 천리안이다, 예언이다, 신통력이다. 비슷한 말로 요란한 가운데 아나톨리 승정은 제 자리에 머리를 처박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서, 선지자시여! 신통하십니다.”


  “아나톨리 승정, 말씀은 고맙지만 장파 통신은 신통력이 아니지 않겠습니까?”


  여기저기에서 웃음보가 터졌고 곧 침묵이 찾아왔다. 그러면 그렇지, 천리안을 이리 허투루 뜨지는 않으시겠지. 이브제니아가 원한 것은 이런 분위기였음에 틀림없었다.


  공회의 불씨 당기기에 이만한 적기가 없었다. 이브제니아는 우아하게, 이고르에게 손짓을 건넸다. 썩 떨떠름해 보였지만 삭풍에 눈발이 실려 오듯 곧장 합을 맞추었다. 교주다운 위엄과 관록이 있었다.


  “내 지금껏 공회를 허투루 소집한 적이 없소. 오늘도 마찬가지일 것이오.”


  새카만 화강암 벽이 쩌렁쩌렁 울렸다. 빈말 하나 없이, 대선지자의 연설은 작열탄 더미에 당긴 불길과 같았다.


  “이브제니아께서 홀연히 교단에 합류하신 후로 성화의 기세란 그야말로 탄광에 내리꽂힌 번갯불처럼 타오르고 있소. 이제는 알렉산더 하이브에까지 빛이 올랐으니 말이오. 혁명의 때가 가까웠다 하겠소. 이제 성화 교단의 믿음이 공동지를 따라 전 엔셀라티카로 퍼져나가야 하리란 게요. 


  알렉산더를 비롯하여 저 극지물류동맹이라는 작당들을 보시오. 물류쟁이 돼지들이 동지들의 피와 열이 담긴 탄을 빼앗고, 난방로 곁에 눌러앉아 알몸으로 땀을 뻘뻘 흘린다지 않소? 알몸으로 땀을 말이오! 그네들의 사냥개인 알렉산더 레인저는 더한 죄악을 저지르오. 공동지를 따라 횡행하며 물류쟁이의 질서로 세상을 겁박하는 데 앞장을 서고 있으니 말이오. 성화 앞에 만인이 평등한 이 세상에서! 오 불길이시여, 용서하소서. 내 알렉산더에, 신앙이 자생하였다는 소식에 기쁘기 한량없으나 그다지 놀라지는 아니하였소. 마치 하룻눈 아래 천년설이 있음이 자명한 것과 같은 이치니 말이오. 우리 믿음은 겨울 속에 홀연히 뿌리내렸고, 삭풍과 같은 억압 속에 꽃을 피우는 것이 아니겠소? 그저 신앙 있을 곳에 신앙 있으니 이제는 혁명 있을 곳에 혁명이 있어야만 한다는 이야기밖에 아니될 것이오!”


  매가리 없는 갈채가 이어졌다. 성화 혁명, 교단에서는 엔셀라티카의 모든 인간이 구원받을 때까지 혁명은 끝나지 아니한다 규정하고 있었다. 극지물류동맹과 알렉산더 하이브에 대한 비난 역시 그만큼 상투적이었다. 떠들썩하게 승정들을 불러모으고는 이 정도로 끝나서는 될 일이 아니었다. 요는 각론이었다.


  다들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얼마간의 소강 뒤에 타티아나 승정이 총대를 멨다. 아무래도 혁명파가 아니라 구원파 쪽에서 따지고 나서는 게 모양이 맞을 테니까.


  “대선지자시여.”


  “말씀하시오, 타티아나 승정.”


  “오해가 있다면 바로잡아 주십시오. 외람된 말씀이오나, 지금 알렉산더 하이브의 물류쟁이들과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이고르는 웃는 낯으로 폭탄을 떨어트렸다.


  “성화 혁명에 필요하다면, 물론이오.”


  타티아나 승정뿐 아니라 좌중을 모조리 술렁거리게 하기 충분한 발언이었다. 하지만 그런 반응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였다. 다른 말이 이어졌으니까.


  “허나 혁명에도 상책과 하책이 있음은 당연지사, 차선이란 우선의 연후에 고려함이 옳소. 붉은 군단은 허투루 잃기에는 너무나 귀한 용사들이오.”


  “계획이 있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이고르시여.”


  “그렇소, 유리 승정. 계획이란……. 혁명에 적이 있다면 어찌 쳐부수는 것이 제일의 상책인가, 하는 일반론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보오. 어찌 생각하시오?”


  끼어들었다가 얼떨결에 발언권을 얻게 된 셈이다. 유리 승정은 잠시 멈칫거리더니 그야말로 상식적인 말만 했다.


  “그리 말씀하시면……. 뭐,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제일이 아니겠습니까?”


  “말씀대로이오. 우리는 알렉산더 하이브가 자멸케 할 것이오.”


  이번에는 듣는 이들이 반응할 시간 없이 곧장 말이 맞붙었다.


  “괜한 말로 쓸데없이 궁금증만 키운 걸 같소. 금일 공회는 묘책을 짜 보자는 자리가 아니라고 해 두겠소. 내 여러 승정들께 원하는 건, 동의를 구하는 것이오. 상책이든 묘책이든, 뭐라 불러도 좋을 것이 벌써 나와 있으니 말이오.”


  “……!”


  “아나톨리 승정, 타티아나 승정. 앉으시오. 조바심일랑 얼마 후에 내도 늦지 않을 테니까.”


  수선을 가라앉힌 대선지자는 천천히 한 걸음씩 연단에서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가 가리킨 손 끝에는, 바로 이브제니아가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교단에는 귀인이 있지 않소? 자, 이브제니아, 당신 차례요.”


  두 수장이 사전에 입이라도 맞춰 둔 모양이었다. 승정들은 다시 한 번 술렁거렸고 특히 구원파에 몸담고 있는 자들은 더했다. 요즈음 교단 일은 이런 식으로 돌아가는 법이 없었다. 즉 이 일은 위대한 예언자가 직접 나서 그린 그림이라는 뜻이었다. 예언자께서, 성화의 예언자께서! 반대파인 혁명파 승정들 역시 의아하지만 놀랍기는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연단에 오르는 이브제니아는 처음 성화 교단에 나타난 그 때 이래 가장 주목받고 있었다.


  그러나 첫 마디는 꽤나 엉뚱한 말이었다.


  “여러 승정들께서는 공동지 조약이라는 것에 대해 알고 계시나요?”


  “물류쟁이들의 괴뢰법이옵니다, 선지자시여.”


  “맞아요, 유리 승정. 그러면 혹 조약문에 대해서는 얼마나 아시는지요?”


  유리 승정은 우물쭈물 대답하지 못했다. 공동지라면 학을 떼는 교단이니만큼 알 공산이 적었다. 이브제니아는 붉은 두건을 슬쩍 고쳐 쓰고는 유창하게 지껄이기 시작했다.


  “겨울에 감히 맞선 세 하이브, 알렉산더, 애들레이드, 래터디, 그리고 추후 함께 하기를 결의할 모든 하이브, 그 의지 앞에 겨울에는 저주, 인간에는 열기 있으라.”


  감탄할 틈바귀를 주려는 듯, 암송이 잠시 틈을 두고 이어졌다.


  “한 곳에 모든 것이 있을 수는 없음이 순리이며 북풍이 구태여 천년설과 하룻눈으로 인간을 고립시킴이란 이를 꿰뚫은 바, 이에 우리 세 하이브는 공동지를 구축하여 결핍에서 벗어나고 불균형을 바로잡아 겨울에 맞서리라.


  공동지에 함께 우뚝 선 자들을 극지물류동맹이라 함이라. 이제 엔셀라티카를 남에서 북으로, 동에서 서로 꿰뚫을 때까지 묵묵히 싸워나가리니 우리의 적은 겨울이요 친구는 공동지, 이하 조약에 함께하는 자 누구든 동맹에 함께하리라.”


  이브제니아는 신을 내다가 화들짝 놀라서는 유리 승정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유리 승정, 자아비판을 시키려는 건 아니었으니 이해해 주시길. 제가 분명히 하고자 하는 건 무조건적 거부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겁니다. 기실 공동지에의 무지는 적에의 무지와 같다 하겠어요.”


  “선지자시여, 방금 말씀은…….”


  “이데올로기적 거부와 전략전술적 거부를 동일시하지 않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닐까요, 멘델레이 승정?”


  소란이 일기 시작했다. 평신도라면 경을 칠지도 모르는 이야기였으니까. 혁명파와 구원파의 온도차가 뚜렷이 보이는 아우성이. 하지만 연설인지 산파법 설법인지 모를 연설이 참으로 태연하게 이어졌다.


  “그래서 재차 묻겠습니다만, 불길의 사도 여러분, 알렉산더 하이브의 약점이 무엇이라 생각하시나요?”


  “선지자시여, 여전히 자아비판 같나이다.”


  “그렇습니까? 너그러이 봐 주시길. 저는 대선지자님 같은 달변가가 아니다 보니.”


  이브제니아는 낮고 맑게 웃었다. 짐짓 겸손했으나 실상 산파법으로 교묘하게 좌중을 조종하고 있었다.


  “알렉산더 하이브의 약점이란 이제 공동지 그 자체나 다름없게 되었다는 데서 옵니다. 알렉산더 레인저, 에크런드 관통선, 대 설종 종심방어체계, 공동지 의회……. 그네들이 이 모두를 낳았고 동맹에 이식하였으며 스스로 동화되었으니까요. 공동지의 약점은 곧 알렉산더의 약점이지요.”


  모두가 납득할 만한 비유였다. 질문으로 일관하다가 분명한 형용이 끼어들었으니 다음 이야기란 의미심장할 터.


  “그러면 공동지의 약점이란 무엇인가, 다음 질문은 참으로 간단하다 하겠어요. 공동지의 약점이란, 공동지라는 것이니까.”


  전당에 기기묘묘한 정적이 감돌았다. 불은 당겼지만 발화점을 못 넘은 작열탄처럼 뒤숭숭하고 불안정하게.

Writer

Naufrago

안녕하세요

comment (1)

까치우
까치우 18.12.12. 20:15
좋아 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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