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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50 Dec 17,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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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AERO
협업 참여 동의

모든 남자아이에게는 자신만의 공주님이 있었다. 테스카 테르오만 빼고.

노예 주제에 공주라니, 천한 것이 흘긴다고 눈깔이나 안 뽑히면 다행이었다. 이 나라 공주의 젠장맞을 성격이야 뭐 그렇다 치더라도, 그런 공주를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다는 둥 주인집 클라라 아가씨의 향기가 어떻다는 둥 헛소리를 지껄이는 동년배들을 볼 때마다 평생 허드렛일이나 하다 죽을 제 팔자나 아는지 궁금했다.

한 번은 승마를 마친 클라라 아가씨가 옆을 지나가는 줄도 모르고, 놈들이 그녀의 가슴을 가지고 농담을 해대는 통에 막은 적이 있었다.

“헛소리 그만 다물고 손이나 놀려.”

지들 위하는 말인 줄도 모르고 다짜고짜 주먹이 날아왔다. 평소부터 사이가 안 좋은 바오라는 놈이었다. 실컷 싸운 다음 날, 무리에서 떨어진 테스카가 꿍하니 홀로 마구간을 청소하고 있는데 누군가 어깨를 콕콕 건드렸다. 아가씨 시중을 드는 카나라는 계집이었다.

“너 말이야. 어제는 일부러 그런 거지?”

“뭘?”

“모른척 하기야? 하여튼 입만 험해서는.”

원래 사근사근한 성격도 아니거니와 일하는 중에 마주칠 일이 없는데도, 유독 이렇게 한 번씩 와서 굳이 아는 체를 했다. 

“가라. 바쁘다.”

테스카는 일부러 쌀쌀맞게 말했다.

“흥! 누구는 한가해서 온 줄 아니? 나도 중요한…… 아, 아니야 난 이만 간다.”

카나는 손을 팔랑팔랑 흔들며 급히 뛰어갔다.

계집애 말을 왜 하다가 마는지는 몰라도, 나름 위로를 해주러 온 걸 알았다. 하지만 솔직히 기뻐할 수 없었다. 저들끼리 위로하고 격려해도 노예는 결국 노예일 뿐이었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차라리 주인의 성격이었다.

테스카의 주인은 전에 마법사였던 사람이었는데, 실력이 없어 관두었다는 걸 보면 실력은 없는 듯싶었다. 대신, 재산을 불리는 수완이 뛰어났다.

어디의 중간관리로 꽤 많은 돈을 만졌고, 거기에 미련인지 취미인지 알음알음 마법물품들을 모아 현재는 제법 상당한 컬렉션을 소유하고 있었다. 주인의 별명이 ‘수집가 아레티나’인 이유였다.

하지만 노예들은 그 수집품을 구경조차 할 수 없었는데, 창고에는 오직 주인 혼자만 드나들었기 때문이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창고에만 몰두하는 탓에 모두 이상하게 여겼지만, 일거리를 명령하지 않으니 구태여 불만을 다는 놈은 없었다.

몇 달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하루 일과를 대충 끝낸 테스카가 막 허리를 펴려던 참이었다. 그루터기에 앉아서 쉬고 있으니 바오가 다가왔다.

그때부터 쭉 사이가 좋지 않던 와중이었다. 또 무슨 시비를 걸러왔거니 싶어서 노려보는데, 웬걸 놈의 한쪽 뺨이 퉁퉁 부어 있었다. 자기 말고 싸울 놈이 있나 싶어서 의아한데 놈이 먼저 입을 열었다.

“클라라 아가씨가 널 찾는다.”

시선을 피하는 녀석의 태도가 석연치가 않았다.

“아가씨가 날 왜?”

“몰라. 난 전했다.”

서로의 사이를 생각하면 쉽게 믿음이 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주인집 딸내미가 부른다는데 안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테스카는 하는 수 없이 저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택의 고명딸인 클라라 아레티나는 얼굴은 다소 반반하지만 늘 새침한 표정에 생각을 알 수 없는 인물이었다. 괜히 알짱거리다 눈 밖에 날까, 테스카는 먼저 다가가 본 적도 없었다.

방문 앞에서 기척을 하자 안에서 특유의 뽐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부르셨습니까?”

테스카는 그가 아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예의를 차렸다. 고개를 숙이고 있으니 말없이 흘겨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옆에는 카나가 서 있었다. 그녀는 무언가 전하고 싶은 듯 우물쭈물했지만, 이내 클라라 아레티나가 그녀에게 명령했다.

“나가 봐.”

거스르지 못하고 카나는 방을 나서야 했다. 단둘만 남게 되자, 클라라 아레티나는 거두절미하고 본론을 말했다.

“너 말이야. 언제나 노예들하고 늘 싸운다던데.”

“예? 아…… 예.”

갑자기 그런 말을 꺼내는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테스카는 수긍했다.

“그리고 혼자서만 일을 한다면서?”

“예…… 그렇습니다.”

“보아하니 분란을 일으키는 모양인데, 설마 나에게까지 거역하거나 하진 않겠지?”

“예…….”

말을 이리저리 꼬는 꼬락서니가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았다.

“좋아. 그럼 얼마나 말을 잘 듣나 보지.”

클라라 아레티나의 눈이 가학적으로 빛났다. 쥐를 노리는 고양의의 그것에 테스카가 불안을 느꼈을 때, 클라라 아레티나는 제 손가락을 자신의 뺨에 가져다 댔다.

“때려.”

어이없는 명령에 테스카는 눈만 깜빡였다.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거라고 생각이 들었다.

“예?”

“못 들었어? 때리라고.”

장난인가 싶으면서도, 테스카는 할 수밖에 없는 대답을 말했다.

“죄송합니다. 할 수 없습니다.”

대답과 동시에 그녀의 손이 날아들었다. 제민하게 그의 따귀를 올려붙인 클라라 아레티나는 더욱 차가운 시선을 돌려주었다.

“다시 한번 지껄여봐.”

“죄송합니다.”

다시 한 대, 두 대, 이어서 다리를 걷어차더니 클라라 아레티나는 무참히 그의 등을 짓밟았다.

“내 말에 거역하지 않겠다고 말했을 텐데?”

“거역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그렇다고 감히 아가씨의 몸에 손을 댈 수는 없습니다.”

“흐음, 그래? 순종한다는 거니?”

그녀가 발을 내렸다. 테스카는 입에서 피가 떨어질까 얼른 자세를 고쳐 잡았다.

손을 움켜쥔 클라라 아레티나의 얼굴에는 미묘한 홍조가 피어 있었다. 올라가려고 실룩이는 입술을 감추며, 그녀가 뒤로 돌아섰다.

“흠. 그럼 내 몸에 닿지 않으면 괜찮다는 거지?”

테스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답해!”

“……예.”

그녀는 서랍장을 열더니 열쇠를 하나 꺼내서 던졌다. 떨그렁거리는 열쇠는 상당히 조잡해 보였는데, 언뜻 봐도 조형을 따서 위조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아버지의 창고 열쇠야. 들어가서 아무 물건이나 가져와.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이번에도 싫다고만 해봐.”

마치 물 한잔 떠오라는 것처럼 무심한 말투였다. 하지만 테스카에겐 청천벽력 같은 요구였다.

놀라 입만 뻐끔거리는 테스카가 재미있다는 듯, 아레티나가 자신의 옷의 허리끈을 풀어 내렸다. 겉드레스 한쪽이 흘러내리며 그녀의 뽀얀 어깨가 드러났다.

“못하겠다고 해 봐. 순간 당장 소리를 지를 테니까.”

만약에 그러기라도 한다면, 테스카는 매질을 당하다 죽을 터였다. 하지만 고분고분 따를 수도 없었는데, 창고에 침입한 게 들키는 날에는 최소 손이 잘리고 쫓겨날 게 뻔했다.

속살을 까발렸음에도 아레티나의 얼굴에는 부끄럼이 없었다. 노예가 본들 아무렇지도 않다는 걸까? 하지만 그녀의 눈은 다른 걸 원하는 것 같았다. 테스카는 의아함을 느꼈다. 만약 그녀가 정말 창고의 물건을 원했다면, 아무거나 가져오라고 했을까?

테스카는 주운 열쇠를 꽉 쥐었다. 그는 클라라 아레티나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돌발적인 행동에 클라라 아레티나는 당황하는 듯 보였으나, 물러서거나 소리 지르지는 않았다.

테스카는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고, 거칠게 한쪽 벽으로 밀쳤다. 악당인 척 연기하며, 그는 클라라 아레티나의 귀에 속삭였다.

“뭐 명령하시니 물건은 가져다주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 일로 나에게 불화가 닥친다면, 아가씨도 아름다운 숫처녀로 남을 수는 없게 될 겁니다.”

정말로 맞아 죽어도 할 말 없을 위험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테스카의 예감은 적중했다. 그의 거친 행동에 아레티나는 두려워하는 대신 어떤 화환으로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그녀는 귀까지 벌게져서 순한 양처럼 대답했다.

“아, 알았어. 맹세할게.”

그녀의 손목을 놓은 테스카는 당당한 척 성큼성큼 방을 나섰다. 그리고 태연한 척 계단을 따라 내려와서, 저택까지 나선 후,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저택에서 한참 멀어진 후에야, 그는 쓰러지듯 나무에 기대어 앉았다.

“하아 하아…… 젠장! 추잡한 계집 같으니.”

따귀를 치고 아려는 손의 틍증에 행복해하는 얼굴이라니, 어딘가 대가리가 이상한 게 틀림없었다.

창고 일에만 관심을 두는 주인의 무관심 탓에, 안주인이 바람을 피우고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딸내미까지 그 지경이 되어있을 줄은 몰랐었다.

먼저 불려간 바오가 쩔쩔매다가 한 대 맞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테스카 자신을 부른 것도, 자기에 대해 안 좋은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그는 그런 종류의 난봉꾼과는 거리가 멀었다. 더 큰 문제는 창고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적당한 물건을 하나 가져다준들, 그녀와의 관계가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

만약 그녀의 비위를 거스르는 날에는 창고에 침입했다는 명목으로 그를 넘길 것이고, 관계가 잘 풀린다고 해도 필시 시녀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게 뻔했다. 그럼 추문을 없애고자 처벌당할 터였고, 매 잘못 맞으면 팔다리병신 되기는 십상이었다.

‘도망칠까?’

마침 뒤뜰에 몰래 감춰둔 은화 주머니도 제법 두둑해진 참이었다.

명목상의 임금으로나마 찔끔찔끔 떨어지는 은화를 생각 없이 술과 도박에 탕진하는 멍청한 놈들과는 달리, 테스카는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으고 있었다. 평생 이 집에 있을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는 건 등신들이었다. 천한 것의 결국 스스로 구해야 했다.

그렇다면 기왕 도망칠 거, 창고에서 물건을 좀 가져가도 나빠질 일도 없었다. 어차피 도망친 순간 죽는 건 확정이니, 몰래 몇 개 집어서 다음 날 영지 산지기에게 가는 척 저택을 나선다면, 이틀 정도는 기별이 없어도 아무도 찾지 않으리라. 몇 년 숨어 있다가 가짜 신분증이라도 구하면 평민으로 살 수 있을지도 몰랐다.

저녁에 만난 바오는 오후에 있었던 일에 대해 묻지 않았다. 퉁퉁 부은 테스카의 뺨을 보더니 무언가 수긍한 듯 지나갔다. 뭘 안다는 건지 싶어서 웃음만 나왔다. 애당초 자신이 카나와 친하게 지내는 게 샘이 나서 그를 미워하는 놈이었다. 그런 눈치가 있을 리가 없었다.

밤이 깊어 모두가 잠들자, 테스카는 몰래 숙소를 빠져나왔다. 성급하게 탈출을 감행할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미리 창고를 확인할 기회를 잡은 건 행운이었다.

이제껏 궁금증을 키워온 창고였지만, 막상 문을 열고 들어가자 내부가 어두워서 잘 볼 수가 없었다. 다만 빽빽이 진열된 물건들 중 빛을 내는 게 몇 개 있어서 통로를 구분할 수 있었다.

여러 물건들 중 첫 번째로 눈에 띈 건 헝겊으로 감싸놨던 세공된 단검이었다. 장식용이지만 거추장스럽지 않아서 집어 들었다.

두 번째로 눈에 띈 것은 불이 켜진 등불이었다. 어두운 중 마침 반가운 것이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심도 기름도 없이 타오르고 있었다. 신기해하면서도 집으려는 순간, 벼락같은 고함이 날아들었다 .

“거기 누구야!”

화들짝 놀란 테스카는 재빨리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여차하면 살인도 불사를 생각이었다. 하지만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때, 다시 한 번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쪽이야! 이쪽이라고!”

앳된 아이 같은 목소리가 등불 안에서 울렸다. 테스카는 흠칫 놀라 등불의 반대쪽으로 뒷걸음질했다.

“너, 넌 뭐야?”

“진정해! 놀라는 꼬락서니가 봉사가 봐도 도둑인 줄 알겠다.”

“나, 난 도둑 아니야!”

낭패였다. 하긴 마법사의 창고인데 이런 장치가 없는 것이 더 이상했다. 불꽃이 테스카 쪽으로 기울어졌다. 마치 그를 더 자세히 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도둑이 아니면 이곳에 사람이라고 할 참이야?”

“그, 그래! 이 저택의 하인이야.”

“하인? 여기에 하인이 들어온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그, 그건 주인님이 몸이 갑자기 좀 안 좋으셔서 뭘 좀 가져오라고 명령해서…….”

더 이상 좋은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 그런 거였어?”

다행히 이 멍청한 보초는 제구실을 잘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불꽃은 곧이곧대로 믿는 듯 말이 없어졌다. 어물쩍 넘어갈 수 있나 테스카가 은근한 기대를 품었을 때였다.

불꽃은 혀가 있었다면 끌끌 찼을 소리를 내며 지껄였다.

“하지만 네가 거짓말을 너무 못해서, 속아 넘어가 주면 내가 바보인 것 같잖아.”

“윽! 저, 정말이야!”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만하자. 보기 딱하다. 사실 네가 누구든 상관없어. 대신 말하지 않을 테니까, 내 부탁을 하나만 들어줘.”

“부탁?”

테스카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래. 여기서 날 꺼내줘.”

불꽃은 끝이 휘어져서 램프의 유리를 가리켰다. 마치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램프 위에는 이미 바람구멍이 뚫려있었다.

“꺼내달라니? 위로 나오면 되잖아?”

“안 되니까 부탁하는 거잖아. 겉으로 봐서는 잘 모르겠지만 이 램프는 지금 주술로 봉인되어 있어. 들어가는 것도, 나가는 것도 할 수 없지.”

“램프를…… 부숴 달라는 말이야?”

“그렇게 했다간 나까지 같이 박살날 걸? 비슷하지만 좀 달라. 네 허리춤에 그거, ‘파인의 단검’이라는 물건이야. 주술을 풀 수 있는 도구지. 모르면서 가져온 모양인데, 그걸로 이 램프의 표면을 살짝 그으면 결계를 깨뜨려버릴 수 있을 거야.”

“잠시만…… 넌 그러면 우리 주인의 끄나풀이 아니야?”

“그럼, 나도 잡혀 있는 신세인걸.”

불꽃은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그래?”

테스카는 자신의 허리춤에 단검을 꺼냈다. 다섯 개의 자수정이 박힌 단검은 신비한 기운을 뿜었다. 칼날을 램프에 가져다 대니, 기대에 부푼 것처럼 뷸꽃이 강하게 타올랐다.

테스카는 결심한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검을 도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고생하라는 듯 램프를 툭툭 쳤다.

“수고해라. 앞으로도 램프 잘 지키고.”

“앙?”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는 듯 불꽃이 어처구니없다는 소리를 내었다. 반면 테스카는 무척 당연한 것처럼 덧붙였다.

“널 어떻게 믿냐?”

“그거…… 진짜로 하는 말은 아니지?”

“어차피 네가 주인에게 말 안 해도 들키는 건 시간문제였어. 그렇다면 지금 굳이 너라는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지. 주인이 네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래도 램프는 필요했기에, 테스카는 손잡이를 들었다.

“이 불신자! 배신자 같으니!”

“배신은 모르겠지만, 원래 불신불만불평이 몸에 밴 천것인지라.”

양해해달라는 듯 램프를 한 번 흔들고, 테스카는 안쪽으로 들어갔다.

테스카는 다시 이런저런 물건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동안 불꽃은 얌전히 욕지거리를 이어갔다. 신기하게도 정신 사납게 말을 뱉어내고 있음에도, 같은 욕은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늙을수록 욕만 는다는데 사실 나이가 엄청 많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쓸 만해 보이는 걸 찾지 못한 채로, 창고의 끝이 가까워져 왔다. 불꽃은 어느 정도 안쪽으로 들어가자 갑자기 말이 없어졌다.

“왜? 아는 욕은 이제 다했냐?”

테스카가 비아냥대며 물었다. 하지만 아닌 것 같았다. 불꽃은 말없이 창고의 제일 안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집중을 하는 모양이어서 테스카도 덩달아 긴장 되었다.

지팡이, 가운, 로브, 검, 창, 도자기, 장식품 등 없는 게 없는 창고 안에서도, 제일 안쪽에 있던 것은 눈을 의심하게 했다. 한쪽 모퉁이에 놓인 벨벳의자 위에는, 숨 막히게 아름다운 소녀가 앉아 있었다. 흘러내린 긴 금발에 하얀 피부, 나이는 테스카 자신보다 조금 어려 보였다.

테스카는 소녀가 왜 이런 곳에 있는지, 소녀의 정체가 무엇인지에 의문을 느끼지 못했다. 대신 외모에 홀려서 한참이나 그녀를 바라보았다. 천천히, 빨려 들어가듯이, 그는 소녀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한 뼘 남짓 가까워졌을 때였다.

팟!

갑자기 모닥불에 집어넣은 것처럼 손끝이 달아올랐다. 얼른 손을 거뒀지만, 이미 손바닥이 벌겋게 익어 버린 후였다.

“어, 어?”

자신이 무슨 일을 당한 건지도 모른 테스카가 신음을 참는 동안, 옆에서 불꽃이 말했다.

“결국 인간이 블러디본의 보물을 훔쳤군.”

“뭐?”

“오늘은 그만 돌아가도록 하자. 아침이 밝을 거야.”

방금 전까지 칭얼대던 것과는 달리 차분한 목소리였다. 테스카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새 창고에는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감돌고 있었다.

“이 아이는…….”

“계속 쳐다보고 있으면 안 돼! 자, 어서 가!”

불꽃의 재촉에 그는 못내 발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소녀는 소란에도 눈을 뜨기는커녕 뒤척이지도 않았다. 마치 인형처럼 그 자세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테스카는 램프와 단검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바깥으로 나와 창고의 문을 잠갔다.

멀리서는 해가 밝아 오고 있었다. 익숙한 풍경을 보자 방금 있었던 일이 꿈같이 느껴졌다. 하지만 손에 아른거리는 아픔이, 저 안에서 일이 어디까지나 현실이었음을 분명히 했다.

오늘도 변함없이 하루 일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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